춘분(春分)
- 작성일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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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春分)
유형진
복강경 수술로 담낭의 돌을 꺼낸 친구가 준 커피에서 담뱃재 냄새가 난다. 친구는 요즘 캡슐커피머신을 쓰기 때문에 커피콩이나 갈아 놓은 커피를 주면 손 흘림으로 내려야 해서 자주 안 먹게 된다며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 가져왔다. 지인이 동남아 여행 다녀오면서 선물로 커피를 주었다는데. 에스프레소 머신용으로 갈아 놓은, 아주 진하게 볶은 콩이었다. 봉지에는 ‘아라비카 100%’라고만 되어 있고. 베트남 커피 만드는 식으로 우려서 연유를 넣어 먹어야 할까, 차가운 물로 한 방울씩 내려 우유를 타서 마셔야 할까 고민한다. 남쪽엔 눈이 온다는데. 담뱃재 냄새가 나는 커피를 들고 창밖을 내다본다. 나무에겐 아무것도 없다. 눈도, 새 잎도, 꽃도, 단풍도. 지나가는 계절의 진공상태. 계절 밖의 계절 같은. 어쩌면 가을 같기도 하고, 겨울 같기도 한. 보이지 않게 모든 것이 충분한 춘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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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탕약목련탕약(木蓮湯藥) 유형진 목련 꽃망울이 가지 맨 끝 솜털 속에 자고 있다 이 아파트 단지엔 목련이 유난히 많다 목련꽃이 툭, 툭, 떨어지는 계절이 되면 온 천지에 탕약 달이는 냄새 집 안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폐병 환자가 있는 듯 잎도 없이 알몸으로 봄을 앓는 목련이 흰 촛대 같은 꽃망울을 들면 마침내 뿌리 끝 탕기에 불이 오른다 검게 젖었던 탕기는 차츰 달구어지다 가장 서럽게 어두운 날, 마당 가장자리에 놓인 곤로 탕기 위 훈김에 서성이는 봄눈들이 어디로도 내려앉지 못하고 증발해 버리는, 가보지도 않은 북유럽 어느 하늘처럼 하루 종일 저녁같이 깜깜한, 그런 날을 골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툭, 촛대에 올린 흰 빛을 터트리고 마는데 흰 종이에 쌓인 약 한 재 모두 달일 쯤 꽃잎 터질 때처럼 흙색 꽃잎들 무거워 멀리 날지도 못하고 곧장 바닥으로 툭, 아무나의 발에 차이고 짓이겨지면 천지에 목련탕약 냄새는 더 진동한다
- 유형진
-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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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미미할머니 미미 유형진 어떤 할머니가 있어 할머니의 이름은 미미 깜깜한 것들을 덮어 주는 근사한 할머니 미미 안경은 썼지 나이가 들면 노안이 오는 것은 당연하니까 인디언 핑크의 바탕에 쑥색 깨꽃무늬 치마를 입고 (치마 속엔 삼단 핀턱 레이스 속곳은 꼭 챙겨 입어야지) 버건디의 니트 카디건을 받쳐 입고 있어야 해 니트 조끼엔 주황색 호박 단추가 쪼르륵 달려 있겠지만 한 개만 채워야지 (할머니는 스타일이 중요하니까. 스타일 없는 할머니는 영혼 없는 좀비) 할머니 미미는 지금 남편도 잃고, 아들도 먼 외국에 가서 살고 있고 손자들은 공부하느라 바빠서 명절에도 오지 않아 할머니의 집은 용인이나 안성, 아니면 화성 서울의 남쪽 어디엔가 작은 시골 저녁에 전등불을 끄면 별만 빛나는 곳 할머니 미미는 기름 값을 아끼기 위해 낮 동안 동산에 올라가 모아 온 솔가지들을 화목난로에 집어넣으며 생각하지 젊은 날 사랑했던 남자들을 새로 넣은 솔가지에 불이 붙고 소나무 기름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 할머니 미미는 낮에 뜨다 만 블랭킷을 집어 들지 뜨개질거리가 담겨 있는 바구니 옆에선 고양이 나비가 미야?옹 난로의 불빛에 일렁이는 나비 눈동자엔 졸음이 가득해 할머니 미미는 나비의 머리를 세 번 쓰다듬고 접혀진 블랭킷을 무릎에 펼쳐 덮고 그 위로 계속, 계속 뜨개질을 해 미미의 블랭킷은 끝이 없는 밤을 덮어 주려고 뜨는 것처럼 끝나지 않아 그 블랭킷은 톨스토이와 카프카와 오르한 파묵을, 파울첼란과 잉게보르그 바하만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장난 같지만 결국 같은 사람), 그리고 마루야마 겐지와 미야자와 겐지, 보르헤스와 파블로 네루다를, 백석과 김소월과 윤동주와 정지용을, 할머니 미미는 덮어 주고 또 덮어 주었지.
- 유형진
- 20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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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과 절망의 트라이앵글기쁨과 슬픔과 절망의 트라이앵글 _7년 전의 7년 전 일기 유형진 7년 전, 4월에 우리는 바닷가에 갔었다 바닷가에는 데이지나 아네모네 화분에 물을 주었을 때 꽃잎 끝에 맺히는, 투명도 99%의 물방울 같은 햇살이 우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웃고 있었다 멀리 바닷가 마을에 사는 개가 이방에서 온 손님들에게 멍멍멍 짖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우리는 웃고 있었다 기쁨과 슬픔과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치는 것처럼 우리의 웃음은 땡땡땡땡…… 바닷가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땡땡땡땡…… 트라이앵글 바닥면의 절망과 양쪽으로 똑같이 기울어진 기쁨과 슬픔을 치면서 우리는 4월의 바닷가에서 웃고 있었다
- 유형진
- 20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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