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흰옷 빨래의 날

  • 작성일 2025-04-01

   흰옷 빨래의 날


안담


   오늘은 마지의 기일이니까 흰옷을 모아 빨래를 한다. 마지가 유니폼처럼 자주 입던 크림색 티셔츠도 잊지 않고 꺼내서 빤다. 아마도 처음 살 때는 흰옷이었을 거다. 내가 애용하는 독일 브랜드의 캡슐 세제는 성능이 뛰어나다. 이 티셔츠에서는 마지의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나도 마지의 냄새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꽤 강한 냄새였는데, 그런 냄새가 잊히기도 한다는 게 신기하다.


   가끔 그 냄새를 다시 기억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4년 전 마지와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인 모둠 전집에 간다. 전을 굽는 작업대가 가게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서 포장 손님도 많은, 반은 노점인 그런 가게. 튀는 기름을 막기 위해 조리대 틈새와 철판 모서리에 은색 호일이 덧대어져 있고, 그럼에도 철판 가장자리나 작업대 위 처마에 쌓이는 기름때를 막을 수는 없다. 조용히 질색하며 지나치는 행인들, 저 시커먼 데서 맛이 나오는가 보다고 농담하는 손님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와 비슷했던 것 같아. 열과 기름과 사람이 합쳐서 내는 냄새. 전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내 동거인의 냄새, 홍제천 스리룸의 주방 맞은 편 작은 방의 냄새, 마지의 냄새. 앞으로는 누구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


   윤석열 나이로 스물아홉이 되던 2021년 겨울, 나는 당근마켓을 통해 홍제역 인근 스리룸의 하우스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마지는 그 글을 보고 연락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좋은 집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련산과 홍제천이 코앞이고 인왕산이나 북한산도 비교적 멀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프라랄 게 없는 집. 인적 드문 가파른 언덕에 있고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는 않으며 어떤 역에서든 멀었다. 낡은 건물인데 월세는 70만 원으로 센 편이었다. 월세를 제외하면 그 집의 여러 요소는 내게는 장점이었다. 크고 힘 좋은 내 개와 오를 산이 있고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는 게. 스리룸에 방들이 크고, 연식이 오래된 집의 컨디션을 의식한 집주인이 못 박기를 포함해 여러 변화를 허용해 준다는 점도 좋았다. 나부터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흡연자도 좋았다. 내가 대형견과 산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장점이고 누군가에게는 극단적인 단점이었을 테다. 내 개는 순하다 못해 맹한 편이었지만, 글에는 남자나 키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보인다고 적었다. SNS로 하메를 구하는 여자에게 피곤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는 줄 아냐고 으름장을 놓은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인 소개가 낫지 않냐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지만, 지인의 지인이 길거리에 다니는 아무개보다 더 좋은 사람일 거라는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되었거니와, 하우스메이트가 맘에 안 들었을 때 소개해 준 지인의 체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구인 글은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다가 이런 형태가 되었다.


   ‘홍제역 인근 스리룸 하메 구합니다.

   -무보증, 월세 인당 35만 원, 공과금 1/n

   -위치: 홍제역과 무악재역 중간, 산이고 역에서 가깝지는 않습니다.

   -대형견 있습니다. 남자나 키 큰 사람은 경계하기도 합니다. 무냐고 묻지 마세요. 사람을 가리키며 화도 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3일 동안 달린 댓글은 두 개였다. 


   ㄴ홍제동칼발(홍은동): 여자?

   ㄴ창근87(서교동): 남자도 되나


   홍제동칼발은 하루 만에 없는 아이디로 바뀌었다. 새 댓글을 기다리는 틈틈이 다른 사람들의 구인 글을 구경했다. 본문 하단에는 보통 작성자가 원하는 하우스메이트의 조건이 적혔다. 신원 확실하신 분, 직장인이나 대학생만요, 위생 관념 있으신 분, 깔끔하신 분, 비흡연자, 당연히 여자분만!, 예민한 분은 거절합니다, 둥글둥글한 성격이었으면 합니다, 고양이 안 싫어하시는 분, 동물 안 키우시는 분만, 상식적이신 분, 대화가 되시는 분, 남자고 성별 상관없습니다, 유도리 있으시면 좋겠어요, 서로 민폐 안 주실 분만, 서로서로 조심합시다, 예의 있으신 분, ···


   나는 몇 개나 해당되려나? 말하면 믿어 주려나? 대화가 돼요, 라고 말하면 대화가 되는구나, 생각해 주려나.


   늘 함께 새집처럼 가꾸실 분, 이라는 퍽 낭만적이기까지 한 문구에 이르자 독립하고 처음 같은 벽을 공유했던 사람 생각이 났다. 정확하게는 고시원 옆방에서 지내던 사람. 그와 내가 살던 고시원의 이름은 새집고시원이었다. 계약하기 전엔 새집이 새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닭장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일지, 아니면 지친 새들이 물과 좁쌀을 먹으며 쉬어 가는 장소가 되리란 포부일지 궁금했다. 허무하게도 새집고시원의 공용 주방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열심히 해서 새집 가자


   건물주의 손 글씨였다. 새집이란 뉴 홈, 그런 뜻이었구나. 여기서 열심히 고생하면 갈 수 있는 어딘가. 각자의 사정으로 고시원에 흘러들어 온 사람들의 의지를 북돋워 주기 위함이었는지, 건물주는 새집고시원을 고난의 테마파크처럼 운영했다. 여기가 공용 주방, 여기가 여자 샤워실, 여기가 남자 샤워실, 여기가 학생이 지낼 방. 공간을 하나하나 소개할 때마다 흠칫 놀라는 내 표정을 건물주는 니글니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민망함을 감추려는 건지 진실로 즐거워하는 건지 모를 미소와 함께. 즐거움이라면 그건 게임 기획자의 즐거움 같은 거였을까. 다가올 레벨 업과 보상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을 조성해 내고야 말았다는 자랑스러움 같은 거. 짧디짧은 투어를 마치고 그는 말했다. 우리 새집고시원의 자랑이 두 개 있지요. 자랑 하나는 공용 주방 밥솥에 있는 밥이 맛있어. 다들 그래. 묵은 밥이 될 새가 없이 새로 짓지. 내 늙은 엄마가 이천 사람이라 좋은 쌀을 보내 줘. 자랑 둘은 흡연 구역이 좋다는 거야. 이 건물 전체가 내 꺼라 옥상에서 피워도 마당에서 피워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 그건 정말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샤워실에서도 주방에서도 심지어는 자기 방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그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뭐라고 할 힘이 없는 사람만 그곳에 남았다.


   새집고시원이 자랑하는 그 마당에서 담배를 태우다가 옆방 사람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이런 헌 집에 오셨어요? 그는 공용 주방에서나 조금 유행하는 농담으로 말을 걸었다. 집에서 도망쳤어요. 그래요? 난 집에서 쫓겨났는데.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내 방 구경할래요? 긴 정적 끝에 그가 그렇게 물었을 땐 자존심 상하게도 팍 웃음이 터졌다. 뭐 좀 다르게 생겼나요? 그럼요. 놀랄 노 자죠. 


   내 방과 똑같이 생긴, 0.8평의 방. 하나 이상의 사람이 있으려면 포개져 있을 수밖에는 없는. 주인과 손님, 친구와 친구, 그런 적당하고 우아한 사이에 필요한 공간적 여유가 없어서 우리는 그냥 연인으로 지냈다.


   그의 배 위에 눕거나 앉거나 엎드려서 그가 일하는 닭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양계장에서 닭을 어떻게 옮기는지 알아? 손가락을 벌려 봐. 손가락은 다섯 개고, 그럼 사이사이에 틈은 네 개가 있지? 그 틈에 닭발을 하나씩 끼워서 닭을 딱 거꾸로 드는 거야. 한 손에 두 마리, 양손이니까 한 번에 네 마리씩 옮길 수 있지. 숙련된 아저씨들은 한 손에 막 세 마리씩 집어. 뒤집혀 있으니까 엄청나게 퍼덕거리지. 닭 발톱은 엄청 날카로워. 장갑을 껴도 손에 상처가 많이 나. 버둥거리다가 내 손에 똥을 죽죽 싸. 닭똥은 너무 뜨거워. 


   그는 거꾸로 매달려 닭들에게 쪼아 먹히는 꿈을 자주 꾼다고 했다. 닭 부리가 자기 배를 콕 찌르면 밀웜인지 좁쌀인지 모를 알갱이들이 쏟아진다고. 그는 그 꿈을 피냐타 꿈이라고 불렀다. 피냐타 꿈이 너무 무서워서 그는 곧 치킨집 알바로 전향했다. 기름이란 얼마나 독한지, 하루 종일 닭을 튀기다 오면 빡빡 씻긴 알몸에서도 기름 냄새가 빠지질 않았다. 나 냄새 나지? 그가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기 어려워서 미국에는 베이컨향 향수도 있대, 하면 좋아했다. 베이컨보다 치킨이 더 맛있는데, 미개한 놈들. 가끔 그가 팔고 남은 치킨을 가져오면 저녁밥이나 아침밥으로 나눠 먹었다. 먹고 나면 그는 낙타가 그려진 독한 담배를 태워 치킨 냄새를 덮었다. 세탁 세제에 관심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고시원에서 비트가 아닌 세제를 쓰는 사람은 내가 거의 유일했다. 빨래를 하는 날이면 그의 옷도 함께 빨아서 문고리에 걸어 두었다. 그러나 냄새는 한 방향으로만 옮겨 가지는 않았다. 내 옷의 냄새가 그의 옷 냄새와 비슷해지는 게 싫어서 나는 점점 그의 방에 덜 가게 되었다. 


   새집고시원을 나가던 날, 그는 낙타 담배를 태우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닭 튀겨서 새집 가자는 모토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멀쩡한 치킨을 먹고 독하게 체했다. 이후로 생닭만 보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바람에 치킨집에서 잘렸다고 했다. 그는 월세가 몇만 원 더 싼, 방 모양은 똑같지만 외풍이 드는 4층 복도 끝으로 방을 옮겼다. 새 집을 떠나서 어디로 가? 진짜 새집으로 가? 묻는 그에게 돈은 있지만 우울증이 깊은 친구 집에 말동무 겸 식모살이하러 간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지? 내가 못 찾게 하려고. 걱정 마,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 좋은 집이길 바라.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두었다. 좋은 집을 찾았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듯이. 내 몸에서 나게 된 냄새를 참기 어려워서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떠나는 게 아니라는 듯이. 그는 내가 제일 아껴 쓰던 세탁 세제를 대용량으로 사서 이별 선물이라며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개구리가 마스코트인 브랜드였다. 개구리를 손에 쥐고 나는 새들의 집에서 떠났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그 세제의 이름은 프로쉬다.


*


   구인 글을 올린 지 일주일 만에야 한 사람이 세 번째 댓글을 달았다. 


   ㄴmotte13(연희동): 월세를 제가 다 내도 되나요? 챗 주세요.


   왜 월세를 다 내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집안일을 잘 못해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메시지를 읽는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여러 해 전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월세를 내지 않는 대신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고시원을 떠날 수 있도록 내게 방을 주었던 친구는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지금껏 의지하고 있는 한국주택공사의 전세임대주택제도를 소개해 준 것도 그 친구였다. 그 집에서 했던 집안일 중에 그가 명시적으로 요구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삼시세끼 밥을 차리고, 친구가 샀지만 먹지 않은 식재료를 정리하고, 생각나면 한 번씩 머그컵과 행주를 삶고, 탄산소다가 함유된 티슈로 가스레인지를 빛이 나게 닦고, 삼 일에 한 번 화장실 바닥을 구연산 물로 청소하고, 집 안 물건들에 송홧가루처럼 내려앉는 먼지를 부드러운 솔로 털어 낸 다음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있으면 친구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 손을 붙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될까, 말하곤 했다. 친구는 자주 울었다. 배가 고파서 울고, 양말의 짝을 찾을 수 없어서 울고, 아끼는 조명의 전구가 망가져서 울고, 남은 배달 음식이 식탁에서 굳어 가는 냄새가 맡기 싫어서 울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들에 그가 더 심하게 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주었으니까 뭐라도 해야지’ 내 머릿속의 계약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문구에는 남의 옷가지를 더 곱게 개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정작 친구는 작성한 바가 없을 동거인의 조건이 점점 독소조항처럼 느껴졌다. 하루는 우는 친구에게 참지 못하고 넌 돈이 있잖아, 쏘아붙였다. 그는 곧바로 넌 힘이 있잖아, 맞받아쳤다. 노여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사람 무시하는 거 아니야, 힘겹게 말을 마치고 그는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집주인이 없는 집에 혼자 앉아 있자니 집마저 노여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를 미워할 염치가 없어서 병드는 관계도 있다. 그 사실에 놀라서 나는 그의 집에서 나가기로 했다. 그때부터는 한국주택공사에 성실하게 가난을 증명하고 전세금을 얻어 혼자서만 살아왔다. 가난을 유지하면 집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근근이 살기에 대한 묘한 자부심이 되어 주었다. 한국주택공사가 정한 ‘청년’의 나이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일단 이렇게 사는 것으로. 펫시터 알바, 원룸 청소 알바, 주말에는 보습학원의 데스크 직원이나 호프집 마감 직원으로 일하고, 이따금 자기소개서를 대필하며. 자유로운 프리랜서니까, 개를 입양해 산에 살아도 되지. 그렇게 흘러들어 온 게 홍제동이었다.


   연희동에 산다는 motte13에게 옛친구의 얼굴을 덮어씌우는 바람에, 나는 돈으로 살림을 사겠다는 거냐는 날 선 답장을 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상대는 그런 게 아니라 살림 요령이 워낙 없어서 그렇다, 열심히 배울 자신이 있으니 교습비를 드린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하다고 빠르게 덧붙였다. 기억과 화가 가라앉자, 인의예지를 따지다가 월세를 전부 아낄 기회를 놓치긴 아쉽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죄송해요. 일단 한번 뵈어요. 집도 보시고요. 날짜는 언제가 괜찮으세요?


   날짜는 빠를수록 좋아요. 내일도 좋고요. 그런데 최대한 늦은 오후에 뵐 수 있을까요? 


   최대한 늦은 오후라. 최대한 늦은 오후가 언제일까.


   그러니까 저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네요ㅎ 저녁에 뵙겠습니다.

 

   아직도 그 대화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실제로 마지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좀 놀랐다. 제일 먼저는 그의 체취가 강해서 놀랐고, 그다음에는 뭐랄까, 그가 상당히 미인이라서 놀랐다. 그의 이목구비가 실은 반듯하고 조화로우며 피부 또한 깨끗하고 부드러움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키가 크고 자세가 구부정한 데다 살집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미팅에 가까운 자리에 나오면서 슬리퍼에 롱패딩을 선택한 기개가 더 인상적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모자를 푹 눌러썼음에도 머리에 하루치 이상의 기름이 쌓였음이 티가 났고, 옷 위에도 살 위에도 먼지가 앉은 듯이 사람 전체가 어딘가 희부연 인상을 주었다. 분명한 미인이었지만, 미인으로 살지 않은 지가 오래된 것 같았다. 


   노란 기름이 자글자글 끓는 커다란 철판에서 빈대떡이며 동태전, 육전, 버섯전, 파전이 쉴 새 없이 생겨났다. 기름을 왕창 쓰는 식당 한복판에서는 마지의 체취도 조금 묻히는 듯했다. 예비 동거인들의 미팅 장소로는 주말 낮의 카페가 제격이었지만, 마지가 만날 수 있다고 한 시간에 문을 연 카페는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만나자고 했는지 물으니, 낮에는 주로 잔다고 했다. 내심 낮 동안 내가 외출을 하면 개와 있어 줄 사람이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관해서 궁금한 점이 있는지 묻자, 마지는 글만 보아서는 사람하고 같이 살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누구든 사람이 좋아서 같이 사나요. 돈이 무서워서 그렇죠. 그런데 마지 님은 사람 싫어하는 사람 괜찮으세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요. 나한텐 좀 유리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대답하고 입을 씰룩거리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좀··· 사람이 덜되었다는 말을 많이 듣거든요. 니가 사람 새끼냐는 말도···.


   뜸을 들인 시간에 비해서는 참으로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서 마지는 파하하 웃었다. 그러더니 멀뚱한 개에게 아는 체를 했다. 내가 잘 못하면 있잖아, 꼭 물어야 한다. 어흥, 물어야 한다. 


   짖으면서 무는 개가 어딨어. 그것도 어흥, 하고 짖는 개가. 그 실없음이 맘에 들어서 마지에게 집을 보러 가시겠냐고 물었다.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면서 마지는 여러 차례 토할 듯이 힘들어했다. 두꺼운 패딩으로 가려 놓았어도 근육 비슷한 무엇이 있는 몸은 아님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조금도 지칠 이유가 없는 나의 튼튼한 개가 뒤따라오는 마지를 쳐다봤다가 나를 올려다봤다가 했다. 너는 사륜구동이잖아, 좀 기다려, 개를 달래면서 저 사람이 과연 이 집에 살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을 때, 거친 숨 사이사이로 마지가 힘겹게 외쳤다. 괜찮, 아요, 난, 집에서, 안, 안, 안, 나가.


   마지와 내가 집으로 들어서자 넓고 휑한 스리룸 곳곳으로 고소하고 더운 기름 냄새가 퍼져나갔다. 집주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십자 형광등의 잔인하리만치 무감한 흰 빛이 그날따라 조금 노랗게 보이는 듯도 했다.


*


   마지가 왜 사람이 덜되었다는 피드백을 듣곤 했는지를 나는 그가 우리 집에 산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는 전반적으로 사는 게 서툴렀다. 또는 사는 정도가 아주 미약했다. 다른 사람의 0.3인분 정도만 사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음식도 휴지도 수건도 잘 줄지 않았고, 배달시킨 햄버거 포장지와 담배꽁초를 제외하면 쓰레기도 많이 생기지 않았다. 어떤 날엔 종일 먹는 게 계란프라이밖에 없는지 개수대에 예닐곱 개 분량의 계란 껍데기가 쌓여 있곤 했다. 여섯 개나 일곱 개라는 것도 내가 껍데기를 맞춰 보고 대강 짐작한 숫자다. 프라이에 쓰인 계란이라기엔 껍데기가 지나치게 잘게 쪼개진 게 하도 신기하기에. 마지의 입속으로 들어간 조각도 많으리라.


   마지는 방에서 도통 나오는 법이 없었지만, 마지의 체취는 어디든 갔다. 자기 방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으니 확실히 알긴 어려워도, 문을 열고 닫을 때 얼핏 보이는 마지의 방바닥에는 뭐가 많았다. 가족도 아닌 사람의 옷가지를 건드리면 실례인가 싶었던 날들도 잠시, 나는 마지가 손을 댄 적이 있는 모든 섬유 제품은 발견 즉시 그러모아 세탁기로 가져갔다. 마지 덕에 아끼게 될 월세를 다 더해 보고도 분이 가라앉지 않았던 어느 날, 나는 마지에게 빨래를 맡겼다. 겁에 질린 마지에게 빨랫감과 세제는 세탁기 안에 이미 다 넣어 놓았고, 세탁이야 기계가 해 줄 테니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개와 나갔다. 기나긴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마지는 세탁기 앞에서 빨래를 뒤적이며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마지는 나를 보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빨래가 다 젖어서 나왔어.


   씻는 건 가르칠 수 없어도 빨래만은 가르치리라 굳게 마음먹고는, 날을 넉넉히 잡아 마지에게 내가 아는 세탁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옷 종류별 빨래 주기, 빨랫감 분류법, 세탁기 작동 순서를 적은 메모도 옷방 문에 붙였다. 설명하면 할수록 빨래가 이렇게 복잡하고 할 말 많은 노동이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세제를 많이 넣으면 오히려 세탁이 잘 안된다는 점, 세탁기도 주기적으로 청소가 필요하다는 점, 무엇보다 빨래는 건조되어서 나오는 게 아니고 반드시 건조대에 널어 말려야 한다는 점···.


   마지가 빨래를 할 줄 알게 되자, 집에서 느끼는 마지의 후각적 존재감 또한 한결 옅어졌다. 나는 기세를 몰아 옷에서 나는 쉰내를 빼는 법과 흰옷을 표백하는 법도 가르쳤다. 여름철 옷이나 수건에서 나쁜 냄새가 날 때는 락스를 희석한 물에 담가 탈취를 한다. 흰옷이 변색되었을 때는 과탄산소다를 섞은 뜨거운 물에 담가 두면 색이 많이 살아난다. 다음 날 오후에 귀가했을 때, 나는 사뭇 달라진 거실 풍경에 압도되어 신발도 벗지 못하고 현관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사방에서 흰 천이 나부꼈다. 흰옷, 흰 양말, 흰 수건, 흰 담요, 흰 베개 커버, 흰 식탁보, ···.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나른하게 흔들리는 흰 천들을 보고 있자니 흡사 서낭당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유령들이 정모를 하는 집에 잘못 들어왔거나. 기분 좋은 냄새가 나는 젖은 천들 사이로 개가 먼저 나타났다. 집에 상주하며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의 존재가 생긴 게 만족스러운지 내 개는 전보다도 성품이 느긋해지고 있었다. 뒤이어 마지가 나타났다. 군데군데 붉은 얼룩이 생긴 검은 옷을 양손에 든 채였다. 


   미안해. 검은 옷은 락스 물에 담그면 안 되는지 몰랐어. 냄새를 빼고 싶었는데···.


   나는 대답 대신 마지가 차린 서낭당을 한 바퀴 더 돌았다. 일부러 이 시간에 빨래 한 거지? 이 집에는 오후 세 시부터 두 시간 정도만 볕이 세게 드니까. 나는 물었고, 마지는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빨래에 자신이 붙은 뒤로 마지는 내게 종종 살림에 관한 질문을 해왔다. 때로 마지의 질문은 이해가 어려워서 추리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너는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다시 여는구나? 묻는 그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지, 다 채워야 버리니까, 대답했더니 알았어, 하는 식으로. 알고 보니 마지는 모든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딱 한 번만 쓰고 있었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 양이 애매하면 변기에 버려 왔다고 고백했다. 어디서 따로 찾아 보았는지 화장실에 걸린 휴지 끝을 세모나게 접어 놓거나 냉장고에 있던 양파를 굳이 꺼내 베란다에 늘어놓기도 했다. 이 집은 겨울이면 베란다가 더 추우니 다시 안으로 들이겠다고 했더니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어느 날 마지는 머뭇거리다가, 왜 너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는지 물었다. 나도 특히 깔끔을 떨거나 용모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다. 차이가 있다면 매일 씻는다는 것뿐. 그러니까 좋은 냄새가 난다기보다는 나쁜 냄새가 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 말이 공격으로 들릴까 봐 맘을 졸였던 게 무안할 정도로 마지의 반응은 덤덤했다. 아, 매일 씻는구나. 오늘 씻어야겠다. 배우는 데 자신이 있다고 했던 마지의 말이 뭘 뜻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씻고 나온 마지에게 내가 머리카락과 목덜미에 바르곤 하는 바디 오일을 좀 주었다. 손바닥에 떨어진 두어 방울의 황금색 오일에 코를 대보더니 마지는 이 냄새구나, 했다.


   몸에서 나오는 기름은 왜 냄새가 안 좋을까.


   마지가 그걸 신경 쓴다는 점이 신경 쓰여서, 나는 그 오일을 마지에게 주어 버렸다.


*


   백련산과 홍제천이 가까운 북향의 집에서 사계절을 보내면서 마지는 조금씩 달라졌다. 체취가 묽어졌고 피부색은 미세하게 더 진해졌다. 방 밖에서도 시간을 보내는지 거실 물건의 배치가 다를 때가 있었고, 휴지와 수건을 점점 더 자주 갈게 되었다. 베개 커버도 전보다 덜 노랬다. 마지의 방은 줄곧 미궁이었지만, 그 방에서 쓰레기를 모아 나오는 빈도가 늘면서 방바닥에도 공간이 조금 생긴 것 같았다. 이듬해에는 거실에서 마지와 함께 있는 일도 자주 생겼다. 


   그거 알아?


   어느 순간부터 마지는 자주 그렇게 운을 띄웠다. 아이소프로필 알코올, 그런 단어를 던져 놓고 내가 모른다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소프로필 알코올로 고장난 컴퓨터나 게임기를 씻더라고. 부품 다 분해해서 아이소프로필 알코올을 묻혀서 솔로 박박 문지르는데 그걸로 닦으면 얼룩이 안 남아. 고장도 안 나고.


   어디서 봤어?


   유튜브에서.


   노랗게 변색된 플라스틱 제품을 과산화수소에 담근 다음 자외선을 쪼이면 다시 하얗게 돌아온다, 수도꼭지에 생긴 녹에 케첩을 발라 방치했다 닦으면 깨끗해진다, 청소솔 계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솔이 있다, 때밀이 계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때 타올이 있다, ‘레드데드리뎀션2’ 라는 게임의 NPC들은 자세히 관찰하면 실제로 노동을 하고 있다. 한참 방에 박혀 있다가 번뜩 거실로 나올 때면 마지는 장르를 특정할 수 없는 온갖 팁들을 알려 주곤 했다. 어디서 봤냐고 물으면 언제나 유튜브에서 봤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지가 유튜브에서 본 생활의 팁들은 택배의 형태로 홍제천 스리룸을 찾아오기도 했다. 이게 뭔지 알아? 주우재가 쓰는 옷걸이래. 티셔츠에든 코트에든 이 옷걸이밖에 안 쓴대. 이게 뭔지 알아? 다이소에서 딱 2개만 사야 한다면 이 거치대를 사야 한대. 살림의 고수들이 추천하고 홍보하고 몇 차 공구를 진행하고 나중에는 직접 제작에 참여하기까지 했다는 정리 용품들이 생겨났다. 유리보다 가볍지만 유리만큼 투명해서 내용물이 잘 보이는, 규격이 정해져 있어서 끝도 없이 쌓아 올릴 수 있는, 정리템 계의 에르메스라는 정리함도 있었다. 마지는 종종 그 정리함에 네임 스티커를 떼었다 붙였다 하며 오후를 보냈다. ‘야채용’, ‘고기용’, ‘반찬용’, 이런 분류도 시도해 보고, 며칠 있다가는 ‘빨간 음식’, ‘마른 식재료’, ‘습한 식재료’ 이런 분류도 시도해 보았다. 

   

   마지가 베이킹소다, 구연산, 과탄산소다를 대용량으로 구입해 오던 날에는 벌컥 짜증이 났다. 정리 용품을 정리할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실제로 부엌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주방 하부 수납장에 베이킹소다와 구연산과 과탄산소다가 언제나 있다는 사실쯤 알았어야 하지 않을까. 일을 하다 말고 살림 고수들의 삼 요소인 그 가루들로 마지가 무얼 하는지 주시했다. 역시나 베이킹소다와 구연산을 섞어 싱크대 배수구에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거품이 우르르 솟았다. 이산화탄소 가스가 나오고 있을 터였다. 나는 굳이 코와 입을 막으며 마지에게 말했다.


   마지, 그거 알아? 베이킹소다는 염기성이고, 구연산은 산성이야. 섞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 거품에서 나오는 가스 몸에 안 좋아.


   거품을 한참 바라보던 마지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너 그렇게 사람 무시하는 거 아니야.


   말을 마치고 마지는 방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마지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동안 냉장고에 있는 빨간 음식, 마른 식재료, 습한 식재료가 제각각의 속도로 상해 갔다. 유리보다 가볍지만 유리만큼 투명해서 내용물이 잘 보이는, 규격이 정해져 있어서 끝도 없이 쌓아 올릴 수 있는, 정리템 계의 에르메스라는 정리함 덕에 그 모습이 아주 잘 들여다보였다.


   매일 남는 시간마다 거실에서 마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지, 이 옷걸이 되게 좋네. 좀 더 살까 봐. 마지, 아이소프로필 알코올이 나오는 그 유튜브 이름이 뭐야? 찾았다. odd tinkering. 이 사람 맞아? 마지. 마지. 미안해. 며칠에 걸친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드디어 밖으로 나온 마지는 대뜸 말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퍼뜨린 배후에 빌 게이츠가 있다는 말 들어 봤어?


   방에 있는 동안 마지는 음모론 유튜브를 섭렵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갔지···? 정리정돈하면서 동기부여 나레이션을 해 주는 채널이 있거든, 그걸 보니까 다음엔 공부 자극 동기부여 영상이 뜨더라고. 그 다음엔 조던 피터슨 동기부여 모음 영상이 나왔고, 그 다음엔 조던 피터슨이 바라본 일론 머스크 영상이 나왔고, 그다음이 바이든이 머스크를 백악관에 초대하지 않은 이유는, 뭐 이런 영상이었나? 그러니까 다음엔 트럼프 지지자들이 “Stop the steal!”이라고 외치는 영상이 나오구, 그 다음엔 전광훈 목사 연설이 나왔어. 그러더니 이제는 알고리즘에 별별 음모론이 떠. 지구는 사실 평평하구, 고위 전문직 중엔 랩틸리언들이 많이 숨어 있구, 인류는 달에 간 적이 없구, 피라미드는 외계인이 만들었구, 21대 총선은 조작됐대. 낄낄거리는 마지에게 그걸 다 믿냐고 물었더니 마지는 가벼운 목소리로 믿겠냐, 받아쳤다.


   그런데 집회는 한번 나가 보고 싶어.


   거실에도 웬만하면 안 나오면서 집회를 갈 수 있겠냐고 묻는 내게 마지가 보여 준 것은 2018년 덴버에서 열린 국제 지평설 콘퍼런스 영상이었다. 인종도 성별도 나이도 지역도 다르지만, 지구가 평평하다는 믿음만은 똑같이 가진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 영상이었다. 평평한 지구에 대한 시를 낭독하는 지평인, 대안 지구본을 만드는 지평인, 지평인과 포옹하는 지평인, 지구가 평평하다는 말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는 지평인, 우리는 미치지 않았다고 외치는 지평인, 오래도록 다만 받아들여지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지평인. 지평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마지는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 눈물을 흘리잖아. 너무 행복해하잖아.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 내 생각에 지구는 둥글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람들 모임도 있을 거 아니야. 


   나는 대답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람들의 모임, 그게 보통 지구 아니야?


   부정선거론 영상들을 흥미롭게 보던 마지의 첫 집회는 트루스포럼 주최로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부정선거 방지 촉구 집회’였다. 집회는 오후 2시에 시작했고, 마지는 2시 30분쯤 그 집회에서 쫓겨났다. 자꾸 웃었기 때문이다. ‘부정선거 방치하면 눈 뜨고 코 베이징’이라는 현수막 글귀를 읽다가 무심코 코 베이징, 코 베이징, 하고 몇 번 읊조렸더니 그 이후로 사람들의 코만 보면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고 마지는 하소연했다. 다음 집회는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3.1절 애국시민 시국대회’였다. 시국대회에서 작은 태극기를 가지고 집에 돌아온 마지는 귀가 아프다며 하루이틀 정도를 앓았다. 마지를 ‘호국청년’이라고 부르며 껴안고 흔들고 만져본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보통 남자한테만 청년이라고 하지? 대답을 바라는지 모르겠는 질문을 하고는 어두운 얼굴이었다. 마지는 집회에서 보고 들은 말을 읊으며 짧은 설명이나 촌평을 덧붙였다.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을 지키는 일이 저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돌아만 오십시오 영원히 당신의 그림자로 살겠습니다’(그런 말을 언제 해?/박근혜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깃발에 적힌 말이야), ‘인간말종 인간백정 둘다교체’(말종이 누구고 백정이 누군지 몰라서 그냥 나한테 하는 말 같았어) 등등. 한 여성은 발언대에 올라 전과4범이 성남시장일 때 66명의 사람들을 정신병동에 쳐넣었다고,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신병동에 갇히겠냐고 말했다고 했다. 그 아주머니가 나한테 태극기를 주었어. 이제 태극기 집회는 안 나갈래. 그렇게 말하고 태극기를 만지작거리는 마지의 표정은 복잡해보였다.


   부쩍 정신병원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마지는 3월부터는 지하철역에서 삭발을 하는 장애인 활동가들의 기사를 자주 보았다. 그거 알아? 대선토론에서 후보 두 명은 장애 인권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대. 그거 알아? 매년 5월 24일은 세계 조현병의 날이래. 매드 프라이드라는 말도 있어. 날이 따뜻해지자 마지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의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달력에 새 집회 날짜를 적었다. 좀 덥다 싶었던 그해 4월은 차별금지법 관련 집회 일정으로 빼곡했다. 집회에 다녀온 마지가 복기하는 거의 모든 문장에 평등이란 단어가 나오던 봄이었다. 평등을 잇는 여름의 단어로는 평화가 등장했다. 제주도에 가서 ‘평화야, 고치글라’라고 적은 손피켓을 들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마지는 다이소에서 산 공간박스 하나를 거실에 두고 피켓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가을에는 제주도에서 만났다는 사람 몇 명과 기후정의행진에 다녀왔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롱뇽을 따라서 많이 걸었어, 행진 관련 기사를 검색해 사진들을 보여주는 마지는 드물게 진지해보였다. 그중에는 도로에 드러누워 있는 마지의 사진도 있었다. 걷다가 광화문 즈음에서 다 누웠어, 삼 만 몇 천명이 다. 다이-인 시위라고 한대. 하루는 마지에게 집회가 뭐가 그리 좋은지 물었다. 장광설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마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하는 거라서, 아무도 아무것도 안해서 좋아.


   10월 이후에는 피켓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윤석열은 퇴진하라, 막을 수 있었다, 퇴진이 추모다, 이게 나라냐, 국가는 없었다. 다이소 공간 박스는 위태로울 정도로 시끄러워졌다. 11월 20일, 녹사평 역에서 돌아와 ‘우리 모두의 안전한 일상을 보장하라’는 피켓 너댓 장을 공간박스 맨 위에 얹어놓고서, 마지는 답지 않게 말이 없었다. 온갖 국회의원들의 이름도, 언제언제 발의됐는데 아직도 계류중이라는 어려운 법안의 이름도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침묵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내가 먼저 운을 띄웠다. 오늘은 어떤 말을 들었어? 불과 몇 시간 전 일을 말할 뿐이면서 꼭 전생의 일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가 마지는 말했다.


   좋은 말들이었어.


   어떤 말이 좋았는데?


   그냥 다.


   그래도 하나만 골라봐.


   트랜스젠더는 당신 곁에 있다, 그런 말.


   대답을 마치고 마지는 긴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의 지평인처럼. 또는 마침내 지구인들의 포럼을 찾아낸 지구인처럼.



   마지가 죽은 것은 이듬해 3월이었다. 마지의 장례식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상주인 아버지를 제외하고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인가. 우리는 그냥 하우스메이트니까. 그것도 당근마켓으로 만난. 마지의 아버지는 1년에 한 번 마지의 상태를 확인하러 들르겠다며 나의 번호를 받아 갔었다. 홍제천 스리룸을 두 번째로 방문하던 날 그의 표정이 생각났다. 보송한 마지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지나치게 빤히, 마치 부활한 자식을 보듯 쳐다보다가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이제 좀 사람 같네. 


   아버지를 보내고 함께 빨래를 개던 그날 저녁, 마지는 내게 물었다.


   나 이제 사람 같아?


   아버지의 칭찬을 곱씹어 보고 있겠거니 싶어서 정말 그렇다고 말했다. 똑같은 양말을 몇 번이나 더 만지작거리다가 마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할 일 많겠지.


   할 일?


   이런 거··· 다 할 줄 알게 돼도. 뭔가 해야 하잖아. 사람이니까··· 이런 것만 하면 안 되잖아.


   마지는 여전히 양말을 붙들고 있었다.


   뭘 해야 하는데?


   음식도 해 먹고. 친구도 사귀고. 여행도 가고. 책도 읽고. 취직이나, 취미 같은 것도···.


   그럼, 다 할 수 있지, 대답하고는 수건을 차곡차곡 쌓아 일어나려다가 나는 우뚝 멈추었다. 마지는 울고 있었다. 울음이라고 믿기는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버거워, 버거워, 마지는 외쳤다.


   장례식은 천주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의외인걸, 모태 신앙이었나. 새삼 마지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염습과 입관까지 참관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마지의 아버지와 장례지도사의 권유로 남게 되었다. 깨끗한 천에 싸인 마지에게서 너무 낯선 냄새가 나서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마지의 아버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은 많이 안 상했네. 깨끗하네. 예쁘네.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부검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찰은 등산철인 봄에 흔히 발생하는 실족사로 결론지었지만, 나는 애초에 마지가 산에 갔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집 가는 언덕도 버거워하던 몸으로 북한산까지 왜 갔던 걸까. 마지가 산에 갔을 만한 이유를 추측하다 보면 어느 밤 마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괴로웠다. 산에 가면 좋으냐고 묻기에 좋다고 대답했었는데. 


   2년 전 오늘, 그러니까 마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집에 돌아오던 날, 같이 산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마지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방은 놀랍게도 단정하고 깨끗했다. 청소 전에 꼭 창문을 열어야 좋아, 분무기로 공기 중에 물을 뿌리면 먼지가 안 날려서 기관지에 좋아, 물걸레질을 하기 전에 청소기를 먼저 돌리는 게 좋아, 종이 벽지니까 걸레 대신 정전기 청소포로 한번씩 훔치면 좋아, 내가 또는 유튜브가 좋다고 했던 모든 청소법을 적용해 치운 방 같았다. 정갈하게 갠 이불 위에 크림색 티셔츠 하나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나는 그 티셔츠를 집어들어 얼굴을 묻었다. 그때 콧속 깊숙이 심어 두었던 마지의 냄새가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 냄새를 맡으며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하면 좋은 일이 많다는 사실 따위 결코 알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베란다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빨래가 다 되었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늦은 새해

늦은 새해 주나영 우기 막바지인 3월 아침, 조식당에 안까지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원은 사다리에 올라 창에 붙은 검은 시트지를 문질렀다. 들뜬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눌렀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해서 창을 가려야 하나 싶었다. 어젯밤 체크인할 때 받은 안내문 상단에는 영어로 ‘침묵의 날(녜삐 데이)’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발리의 불빛과 소음을 줄이며, 투숙객의 호텔 외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건네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아주 조용하게 보내는 풍습이 있거든요.”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호텔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췄고, 손님들도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줄이는 듯했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시트지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래도 한쪽이 다시 들뜨자 시트지 한 장을 떼어 사다리 아래로 내려보냈다. 창의 절반쯤이 드러났고, 유리 바깥 면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케이지-프리 에그 화이트 오믈렛을 주문했다. 쉰을 넘긴 뒤부터 식단과 운동에 부쩍 엄격해졌다. 디종 머스터드 병을 열어 숟가락으로 접시 귀퉁이에 덜어 놓은 뒤, 오믈렛을 잘라 찍어 먹었다. 면도를 공들여 한 듯 턱끝이 말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혜리는 빵 바구니에서 올리브 치아바타를 집어 들더니 박혀 있는 올리브만 손끝으로 빼 먹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었다. 나는 냅킨 상자를 혜리 쪽으로 밀었다가 멈추었다. 혜리는 이미 옆에 놓인 냅킨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혜리는 남편과 전처 사이의 딸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혜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리다. 혜리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호주로 건너간 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혜리를 만났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 남편이 서재에서 혜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방에 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면 물병만 꺼내 돌아왔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먼저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통화를 마친 뒤 혜리의 학교생활과 새로 키우기 시작한 동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몇 장 넘겨본 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혜리는 빵에서 올리브를 하나 더 빼 입에 넣었다. 남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은 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미뤄 왔다. 결혼식은 석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흘 정도 쉬고 오자고 한 것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쯤인 발리에서 혜리를 만나자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서재에서 청첩장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구겨지지 않도록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혜리는 아보카도 스프레드를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한입 베어 물자 빵 껍질이 바스러져

  • 주나영
  •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장정호

장정호 장희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기가 차고 맑은 곳. 다른 곳보다 해가 빨리 뜨고 지는.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희재에게서 그가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우듬지 너머로 뜨는 어슴푸레한 새벽 동이나 찹찹한 분위기,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임야를 떠올렸다.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허공 속의 한 점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어머니가 복수가 찬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분명히 그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느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른 아침부터 희재와 나는 서둘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입을 헹구고, 어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희재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양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창문으로 머리를 기댔다. 저기 뭐가 죽은 것 같아. 아니다, 다시 보니까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어. 희재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답했다. 한참 후 주위가 고요해진 것 같아 옆을 보니 희재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백반과 우동을 나누어 먹었다. 밥을 다 먹고도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휴게소 뒤편으로 펼쳐진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휴가철이 지나서인지 대체로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왜 그렇게 서둘렀냐고 묻자 희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희재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는 삼 년 전 아내가 간경화로 죽고 난 후 홀로 지내다 언제부턴가 야산에서 지내고 있었다. 양산에 있던 그가 어떻게 산천에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 살게 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미처 주변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냉장고에는 그가 먹다 남긴 반찬들이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희재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부터 기르던 식물들, 호야 나무, 산세비에리아, 스투키가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지가 가득한 집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희재와 희재의 가족이 살았던 집. 희재와 나는 명절이면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오곤 했다. 간간이 희재와 희재의 어머니, 내가 웃을 때면 그는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가 왜 그런 곳까지 가게 되었을까 하고 묻자 희재가 대답했다. 자신도 우연히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뿐 더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뭐든 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죽어버렸으면. 나는 희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본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말이 없고 등이 조금 굽은 왜소한 노인. 그는 묵묵히

  • 장희원
  •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내 마음이야

내 마음이야 이갑수 퇴근하고 싶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신나는 음악을 듣는다. 눈을 감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린다. 졸업, 제대, 여행, 생일파티, 800만 원 복권 당첨, 첫 키스…… 아니 첫 키스는 빼자. 그리고 명상을 한다. 생각을 비우고 차분하게. 절대 조금이라도 우울해선 안 된다. 어제도 제시간에 퇴근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 회사가 정부의 근로자 지원프로그램 시범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지난달부터 퇴근하기 전에 우울증 지수를 체크 한다. 보건복지부가 대학 연구소와 산학협력으로 개발했다는 ‘뉴진’이라는 우울증 측정기는 헬스장의 인바디 측정기처럼 생겼다. 악력기처럼 생긴 손잡이를 잡고 발판 위에 올라서면 우울증 지수가 100분위로 표시되는데, 우울증 지수가 50이 넘는 사람은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한다. 어떤 원리로 우울증을 측정하는 건지는 모른다. 아무리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몸을 측정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몸을 통하지 않고는 마음을 알 방법이 없으니 둘 사이의 어떤 메커니즘을 알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시범 사업이 끝나고 일반에 공개가 되면 측정 원리도 밝혀질 테니 기다리면 곧 알게 될 일이다. - 80.00 오늘도 실패다.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첫날에는 51이었고, 그날 상담은 5분 만에 끝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신기한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 요즘 기분은 어때요? 강 박사의 첫 질문은 항상 똑같다. -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그냥 괜찮습니다.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 무감각한 것도 우울증세일 수 있어요. 일단 지켜봅시다. 강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지난 한 달간 나를 지켜본 결과는 부정적일 게 분명하다. 내가 상담을 받으며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수치가 올라가고 있으니까.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들을 부러워하며 상담실로 올라갔다. 내 앞에 대기자는 일곱 명, 네 명은 자주 보는 얼굴이고, 세 명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울증 지수가 높아서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다들 정말 우울해 보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상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로 강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이 지원프로그램은 경력형 일자리 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은퇴한 의사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으니까. 정부 입장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좋은 정책이었다. 강 박사도 대학병원에서 정년 퇴임한 정신과 전문의다. 강 박사는 슬램덩크에 나오는 안 감독님을 닮았다. KFC의 샌더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흰 양복 대신 흰 가운을 입고 있다는 것 빼면 정말 똑같았다. 강 박사를 보면 치킨이 먹고 싶었다. - 요즘 기분은 어때요? 자리에 앉자마자 강 박사가 모니터의 차트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전에 없이

  • 이갑수
  • 2026-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