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 입
- 작성일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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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 입
이현석
아기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박명이었고 아직 분유 먹일 시간은 아니었다. 어두운 잠귀를 이유로 밤 당번을 자처한 것은 나였으나 의지와 달리 본성은 강했다. 아내가 자리끼 컵을 산산조각 냈을 때도 세상모르고 코만 곯았다는데 율이와 둘이 잔 뒤로는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에도 눈이 금방 뜨였다. 바닥에 깔아 둔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아기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율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가 또 속았네.’
잠은 설쳤어도 흐뭇했다. 이 작은 목숨이 간밤을 또 무사히 넘겼구나. 그 마음을 얹고 도로 몸을 뉘었는데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아기방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거슬렸다. 창문은 밤새 돌린 가열식 가습기 탓에 부러 흩뿌린 것처럼 흥건했다. 문득 재건축 조합 단톡방에서 보았던 잡담이 떠올랐다. 유명 로펌을 다니느라 바쁜 딸과 얼마 전 개원한 의사 사위를 대신해 손주 둘을 보느라 겨우내 가습기를 틀었더니 옷장 안에서부터 피어난 검은 곰팡이가 벽면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였다. 시황 따라 일이 억은 우습게 에누리하는 아파트에서 곰팡이 걱정이라니. 직면한 현실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치른 비현실적인 가격 사이의 뚜렷한 차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현실만 따지면 놀랍지 않았다. 아파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삼화토건 회장 도예종, 매일신문 기자 서도원,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 등 여덟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을 선고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형을 집행했던 바로 그해에, 여의도의 다른 구축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명령으로 완공됐다. 반세기가 넘은 건물이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곰팡이는 당연했다.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보아도 놀랄 것이 없었고, 개수대에서 썩은 내가 올라와도 그러려니 했다. 아내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여름밤에는 통통하니 살이 오른 쥐가 아파트 복도 반대편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기함할 듯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대수롭지 않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견뎌. 이게 실거주 투자의 현실이야.”
아내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나는 그 말을 묵직이 받아들였는데 싱글일 때부터 정석대로 자산을 늘려 온 아내의 투자 이력을 알아서였다. 현관문을 잽싸게 닫은 나는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충성”이라고 촐싹댔다. 사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벌레나 쥐가 부르는 본능적인 혐오도 자산 증식이라는 대명제 앞에선 한낱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곰팡이조차 농담일 수 없었다. 집에는 율이가 있었다. 가습기를 끈 나는 전날 벗어 둔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율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창문에 다가갔다. 물기를 닦고서 창문을 미세하게 열었다. 서늘한 외풍이 실낱처럼 들어왔다. 재건축 단톡방에 상주하는 어르신들은 아침에 잠깐씩 이렇게 해 두면 곰팡이도 예방하고 아이들 호흡기에도 좋다며 훈수를 두곤 했다. 나는 축축해진 티셔츠를 가지고 아기방을 나왔다.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나니 전날 외면했던 육아의 흔적이 싱크대 위에 남아 있었다. 젖병과 공갈 젖꼭지를 씻어 살균 건조기에 넣은 나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천천히 홍차 한 잔을 마시고 나면 딱 아기 아침을 먹일 시간이었다. 나는 티백을 우린 잔을 들고 거실 식탁으로 갔다. 효율을 중시하는 우리 부부에게 식탁은 부엌과 떨어질 만한 가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거실 유리창에 면하여 붙인 것은 두 명이 세 명이 될 참에 더 좁은 집으로 옮긴 탓이었다. 당근 온도를 20도 넘게 올리면서 살림을 줄여 보아도 배치의 묘는 절실했는데 결과적으로 다행이었다. 부엌을 벗어난 식탁은 의도치 않게 미감을 충족시켰다. 식탁 앞에 앉으면 아파트와 수령을 같이한 가문비나무와 벚나무, 은행나무의 높다란 우듬지가 무상한 계절을 펼쳐 보였다. 며칠 전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렸을 때는 거실에 트리 하나 없이도 성탄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때 이른 눈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줄 알았으나 기온은 다시 십도 안팎을 오갔고 벚나무 가지마다 붉은 단풍은 여전했다. 폭설을 버틴 기백은 가상하다 쳐도 이제 12월이었다. 이상했다. 심상찮은 날씨도 이상했고 엇박자가 나는 풍경도 이상했다. 그보다 이상한 것은 12월이라는 사실 자체였다. 왜 벌써 12월인가, 싶다가도 왜 아직 12월인가 싶었다. 아이가 조리원에서 집에 온 뒤로 하루하루는 일 초 만에 지나갔지만 석 달은 또 삼 년 같았다.
소독이 완료됐다는 음성 메시지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갓 태어난 아이를 탯줄째 안았을 때가 엊그제 같았다. 율이는 벌써 체중도, 키도 두 배가 됐다. 엄마 아빠를 보면서 생긋생긋 웃기도 잘 웃고 옹알이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살균 소독기에서 젖병을 꺼내 분유를 탔다. 양손으로 따뜻한 젖병을 비비며 아기방으로 돌아가니 율이가 수면욕과 식욕 사이에서 줄기차게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연탄불 위의 건오징어처럼 팔다리를 파닥거리는 아기를 안아 들었다. 꿈결에 입맛을 다시던 아이는 젖병을 물리기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율이가 거센 압력으로 젖병을 쪽쪽 빨아댔다. 일차원적인 코미디쇼를 본 것처럼 소리 내어 웃던 나는 뻐근한 목을 한 바퀴 돌렸다. 월수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병원에서는 경추 추간판탈출증 환자를 자주 봤다. 환자들에게는 늘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맥켄지 신전운동을 하라고 이야기했다. 안 하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추간판탈출증의 주원인은 유전이었다. 어쩐지 하자투성이 유전자를 준 것 같아 측은한 눈길을 보내는데 율이가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 혀로 젖병을 밀어 냈다.
“벌써 배불러?”
나는 젖병을 들어 남은 분유를 확인했다. 배가 부를 리 없는 양이었다. 다시 율이를 보자 아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부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알싸한 냄새가 퍼졌다. 그제야 나는 율이가 이틀째 대변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방수 패드 위에 눕혀 기저귀를 벗기니 율이는 다시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울음을 터트렸다. 우렁찬 소리에 벌떡 깬 아내가 비틀대며 아기방으로 들어왔다.
“오구오구 우리 아기 똥 쌌어? 오구오구 잘했어!”
아내는 비몽사몽간에도 아이의 쾌변에 감격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기저귀로 아기 엉덩이에 묻은 변을 닦는 동안 아내는 화장실로 먼저 가서 세면대 물 온도를 맞췄다. 하의를 실종시킨 아기를 통구이 바비큐처럼 들고 화장실로 가자 아내가 새벽부터 똥 파티를 한다며 웃었다. 거울에는 깔깔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 끼인 작은 엉덩이가 반들반들 빛을 발했다. 어느 모로 보나 그것은 내 손에 잡히는 가장 확실한 행복이었다.
*
아이가 일찍 깬 김에 출근도 일찍 했다. 성산동 작업실로 가는 화·목·금은 프리랜서 흉내를 내는 날이었다. 혼자서는 기강이 해이해질 것이 뻔해, 진짜 프리랜서 두 사람과 작업실을 같이 썼는데 오늘은 혼자가 확정이었다. 지난달에 편성을 확정 지은 민주는 남편의 휴가 일정에 맞춰 노보리베츠로 온천 여행을 갔다. 전날 밤 드라마 4부 원고를 담당 피디에게 넘긴 병준은 박 대표의 컨펌이 있을 때까지 가정에 충실하겠다는 메시지를 단톡방에 올렸다. 기획안이든 원고든 피디에게 넘겼다면 결론은 둘 중 하나였다. 추상같은 피드백이거나, 무탈한 통과거나. 그 끝에는 늘 박 대표가 있었다.
공중파 공채 피디로 입사해 시청률 1위 드라마를 세 편 찍고 종편으로 옮기면서 제작사를 차려 나온 박 대표는 독립한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이런 전사를 가진 오십 대 남자의 스테레오 타입대로 그는 취하기만 하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대화의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운 좋게도 나는 대학 시절부터 박 대표와 비슷한 프로파일의 의대 교수와 선배들을 무던히도 상대해 왔다. 그런 남자들의 장광설에 맞춰 분위기를 띄우는 일에는 이골이 났다 싶었는데 문제는 박 대표가 한때 심각한 문청이었다는 데 있었다. 국문과 재학 시절, 친형같이 지냈다는 젊은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시·소설·평론으로 삼등단하는 것이 꿈이었다는 박 대표는, 삼시 패스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것을 꿈이라고 꾸었는지 어리둥절해하는 민주와 나와 병준을 하나씩 손가락질하면서 작가님들은 하필 등단도 조선·중앙·동아로 했냐고 이거 완전 꼴통 보수 트리오 아니냐며 신나게 웃어댔다. 그 웃음에 맞추어 억지웃음을 짜낸 우리는 빛의 속도로 시선을 교환했는데 그 눈빛에는 향후 우리가 대단한 상전을 모시리라는 운명이 녹아 있었다.
나는 빌라 삼 층에 있는 작업실로 들어갔다. 보일러는 외출 모드였어도 훈기가 가득했다. 아마도 윗집 아랫집이 모두 가정집인 덕을 보는 듯했다. 기대에 없던 훈기는 수면을 박탈당한 자에게 치명적 유혹이었다. 출근을 했으면 일을 해야지. 나는 본능을 이겨 보려 했다. 하지만 외투를 벗어 공용 거실 옷걸이에 거는 순간 소파에 몸을 내던지는 모습을 예감했다. 제작사에서 공용 작업실을 잡아 줄 무렵, 우리 셋은 편히 눕기 어려운 딱딱한 가죽 소파를 들이기로 했다. 세 사람의 대본이 모두 편성되는 날까지 긴장을 놓지 말자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하지만 반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딱딱한 소파에서 최대치의 편안함을 뽑아내는 방식을 각기 터득했다. 박약한 우리 의지 때문에 다소 없어 보이지만 석 달 동안 단편소설 한 편 매달린 대가로 세전 백오십만 원을 받고 나면 “이야, 오십이나 더 주다니, 역시 메이저 문예지는 다르네!”라며 감탄하던 우리에게 작가라는 이유로 마용성 금싸라기 땅에 스리룸 작업실 임대료는 물론, 가구도 들여 주고 공과금도 대납하는 세상은 분명 상상 밖에도 없던 세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것은 모두 박 대표 은덕이었다. 박 대표는 적게는 삼천만 원에서 많게는 일억을 주고 사 둔 저작물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면서 각색을 요청했다. 쓰는 것만으로 생계를, 기왕이면 풍성하게 유지하기를 원했던 우리는 박 대표에게 보은해야 할 계약상의 의무가 있었다. 사소한 문제 하나는 박 대표가 문학 탈덕이라는 점이었다. 과연 탈덕은 안티보다 무서웠다. 박 대표는 우리에게 ‘이쪽 문법’을 유난히 강조했다. 당분간 그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말고 웹툰이든 웹소설이든 드라마든 막장이라고 욕을 먹은 시나리오들만 골라서 흠뻑 젖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사불성 직전의 꼬인 혀라 나는 반사적인 웃음으로 맞장구를 쳤는데 “이 작가님, 지금 웃음이 나와요? 에?”라는 박 대표의 공격적인 물음에 허리를 곧추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님들, 똑똑히 들어요. 나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니라고. 에? 예술들 하시려면 그거나 계속하셨어야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죠? 그런 거는 말이야, 향유를 하는 거야, 향유. 굳이 생산까지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에? 내가 알아···. 내가 진짜 그 꼴을 수도 없이 봤어!” 격앙된 목소리에 숙연해진 우리는 숨을 죽였다. 딱히 틀린 말 같지도 않아 반감도 들지 않았다. 다만 이쯤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싶었다. 기대와 달리 박 대표는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서럽게. 이건 또 무슨 진상인가, 싶어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아니다, 사람이 진상이 되면 질질 짜기도 하지, 라는 넉넉한 마음으로 중년의 위기를 보듬어 보려 했다. 그러나 박 대표가 우는 이유가 그 뽕 진작 안 뺐으면 오십 넘어서도 허명만 좇다 세상 탓이나 하는 제 동기 누구나 누구처럼 낭인이 됐을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연민이었음을 알고서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방면으로 문제인 박 대표의 인성과 별개로, 우리는 그의 자금력 덕에 다시 한 공간에 모일 수 있었다. 처음 이곳에 모인 작년 여름에는 소설 초고를 나누어 읽던 우리의 이삼십 대로 돌아간 느낌도 들었다. 각자 다음 회차에 쓸 장면을 두고 아이디어를 던지며 열띤 대화를 이어 갈 때 특히 그랬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진 열정의 벡터는 그 시절 우리가 경탄해 마지않던 어떤 아름다움들, 말하자면 쓸모없고, 잉여롭고, 병들고, 결락된 그래서 온전히 내 것인 양 착각했던 그 아름다움들의 정반대를 향했다. 다음 장면에 어떤 요소를 넣어야 시청자가 오티티를 끄고 유튜브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텐가, 이 장면을 얼마나 압축해야 숏폼과 경쟁할 수 있나, 기획서만 보고 투자한 큰손들의 요구를 어떻게 찰떡같이 반영할 수 있을까. 박 대표의 기우와 달리 우리의 열정은 딱딱한 소파를 선택한 날부터 그보다 더 자본에 충실할 수 없었고 한때 우리를 지배했던 예술적 경이랄지, 에피파니 따위는 간혹 가까운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가서 외주를 주는 것으로 명맥을 이을 뿐이었다.
“여어, 자냐?”
나는 뜻밖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간밤에 우리 율이가 협조를 덜 했나 보구먼.”
병준의 목소리였다. 나는 기억나지도 않는 말을 웅얼대면서 볼에 흥건한 침을 닦았다. 무언가 찜찜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소파에 관한 꿈이었나. 소설에 관한 꿈이었는지도 몰랐다. 언젠가 구천을 떠도는 소파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지. 그것은 무척 아련한 느낌이었다가, 한순간 지극한 현실이었다가, 여느 꿈들처럼 희미한 윤곽만 남긴 채 흩어져 갔다.
“병준아··· 너가 방금 꿈에 나온 거 같으다···.”
게슴츠레하게 병준을 보면서 말했다.
“길몽일세.”
“민주도 나왔나···. 박 대표도··· 그래. 박 대표는 분명히 나왔다.”
“아니다. 악몽인가. 박 대표야 누구 꿈에든 나오고도 남지.”
병준이 점퍼를 옷걸이에 걸면서 말했다. 휴대폰을 보니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인 듯했다. “왜 왔냐? 가정에 충실하겠다던 애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가 물었다.
“역시 너는 등 따신 직장이 있어서 잘 모르는구나. 프리랜서 가장이란 무릇 해가 뜨면 집을 나서야 가정에 충실한 거다.”
“예, 예. 그렇겠지요. 4부 보냈다며?”
“어. 까일 땐 까이더라도 마음만은 가뿐하다.”
“그러면 할 일도 없는 놈이 일은 무슨 일.”
“이 작가야, 숨만 쉬어도 소모하는 에너지가 얼마나 많냐. 사는 게 다 일이다.”
목에 걸친 무선 헤드폰을 두드리면서 병준이 말했다.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소설을 쓴 뒤로 소설 읽는 일이 정말 일이 된 것처럼, 대본을 쓴 뒤로는 드라마를 보는 일도 일이 됐다. 병준은 작업실에서 드라마를 볼 때면 항상 저 애플 에어팟 맥스를 가져왔다. 그것이 두어 해 전 결혼기념일에, 이천 물류센터에 일자리를 알아보던 병준에게 그의 아내가 집중해서 계속 글이나 쓰라며 사 준 선물임을 알고 나면 그가 내리 여섯 시간을 낄낄대면서 시트콤을 정주행해도 노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병준만이 아니었다. 민주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우리는 많든 적든 작가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살았으나 종일 한 글자도 적지 않을 때가 많았다. 기획 회의를 하는 날이나, 투자자를 상대로 피티를 하는 날처럼 누가 봐도 업무에 가까운 날을 빼더라도 우리는 쓰는 날보다 아무 웹툰을 보거나, 아무 드라마를 보거나, 아무 웹소설을 읽는 날이 많았고 그런 날들보다 우리는 더 자주 잡담을 했다. 잡담은 주로 어느 감독이 무슨 작가랑 싸웠다더라, 요즘 시장에 돈이 전혀 안 돈다더라, 그 배우가 전에 그 대본 깠다더라, 어느 제작사는 불륜만 원한다더라, 끝내주는 오리지널 기획안을 보여 줘도 오티티 회사에서는 원작 웹툰이 뭐냐고 묻는다더라 등등 뜬소문의 향연이었는데 우리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빈도는 보통 셋이 느끼는 불안의 총합에 비례하곤 했다.
전동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가는 소리가 났다. 아일랜드 식탁에는 병준이 가져온 주먹만 한 밀폐용기들이 돌담처럼 쌓여 있었다. 병준은 재배지와 품종, 등급과 워싱 방법에 따라 맛과 향을 예민하게 구분했다. 병준과 달리 이 커피나 저 커피나 다 맛있어하는 민주와 나는 아기 새처럼 그가 내려 주는 커피를 받아 마셨다.
“후일라 몬테블랑코. 귀한 거다.”
병준이 무늬가 알록달록한 커피잔을 건넸다. 나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서 한 모금을 마셨다. 기분 좋은 산미가 입안에 맴돌았다.
“맛 좋다.”
“그지?”
같은 소파에 앉은 병준이 자기가 내린 커피를 홀짝이면서 만족스러워했다.
“응. 맨날 반응이 단출해서 미안타.”
“별게 다.” 병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인마, 너는 뭐만 하면 미안하다고 하더라.”
“그런가.”
“아까 자다 일어났을 때도 ‘어, 어, 미안해, 미안.’ 이러면서 일어났잖아.”
“내가 그랬어?”
놀란 듯이 물었지만 돌이켜 보니 정말 그런 듯했다.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몸에 익은 죄책감이었다. 어쩐지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실은 우리가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했을 즈음 나는 두 사람 몰래 전전긍긍한 적이 있었다. 작업에 투자할 절대 시간이 모자라 마음만 급했던 나와 달리 두 사람은 쪼인다고 말만 할 뿐 여유만만이었다. 내가 유독 힘들어했던 것은 커피타임에 곁들이는 방대한 스몰토크였다. 십 년을 원가족보다 가까이 지낸 마당에 신상 발언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흘려보내는 시간 자체였다. 나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에 익숙했고, 시간을 쪼개어 쓰는 것에 익숙했다. 취미로 시작한 소설이 진짜 일이 된 이후로 불가능했던 이 인분을, 심지어 잘해 보려고 애를 썼다. 정신이 제대로 상한 시기에는 여유를 부리는 것도, 쉬는 것도, 자신을 돌보는 것도 모두 낭비라 여겼다. 퓨즈가 완전히 끊기고서야 연달아 펑크를 내고는 깊이 가라앉았는데 정작 내가 다시 살도록 만든 것도, 다시 쓰도록 만든 것도 그 모든 낭비들이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작품을 만드는 거지, 꼭 글을 쓰는 건 아니지 않냐?”
언젠가 병준이 말했다.
“별 수 있나. 안 되면 안 쓰는 거지.”
민주는 더 심플했다. 그들의 여유로움은 프리랜서 업력만 도합 이십오 년이 넘는 두 사람의 내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내 몸은 불안을 떨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나마 죄의식을 덜 느끼게 된 것은 두 사람과 같이 생활을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즈음에야 나는 병준의 커피 맛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삶은 생활이었다. 생활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남은 커피를 단박에 들이켠 나는 “크-”하고 길게 감탄사를 뱉었다.
“어때? 살 만하냐?”
“살 만도 하고 죽을 만도 하지. 이제 백일인데 삼 년 지난 줄.”
“힘들 때야. 근데 진짜 삼 년 지나잖냐? 사흘도 안 지난 것 같을 거다. 나는 우리 정아가 벌써 초등학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요만하던 핏덩이가 ‘어라? 어라?’ 하는 사이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러는 거야.”
“부럽다. 그날이 오긴 오겠지?”
“오지. 아주 빨리 올 거다. 왜냐? 우리가 좀 낡았거든. 해 바뀌면 우리 둘 다 만으로도 변명의 여지 없이 사십 대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게 기억력 감퇴 때문이라잖냐. 한번 이미지로 상상해 봐라. 이, 기억의 부피가 늘어날수록 밀도는 더 심하게 줄어드는 거지. 옛날에 사람들이 광우병 걸리면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고 했잖냐. 타이어도, 연골도 갈아 끼우지 않으면 다 닳아 버리는 것처럼 쓸 만큼 쓴 뇌도 닳아서 사라지는 거지. 그러니까 ‘눈 깜짝할 사이’라는 시간도 그 닳음의 증거인 셈이야. 나한텐 늙는다는 것의 이미지가 그렇다. 옹골졌던 뇌가 스위스 치즈처럼 변하다가 마지막에는 겉껍데기만 남고 텅 비어 버리는 거야. 원자처럼 말야. 원자도 핵이랑 중성자, 전자 같은 걸 뺀 나머지는 비어 있다지. 그 작은 입자들마저 다 파동의 집합이라잖냐. 그러면 우리도 대강 반올림하면 처음부터 빈껍데기 아니었느냐, 이 말이야. 허무? 허무랄 것도 없고, 허무라고 안 할 것도 없지. 처음부터 비었는데 다시 빈다고 뭐가 달라질까. 우리 어릴 때 꿘 선배들 생각해 봐라.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그렇게나 겁박했잖냐. 걔들도 어렸던 거야. 살아 보니 관성은 필수더라. 태어나기를 그저 그냥 살도록 태어난 거지. 나는 모든 존재가 그렇다고 본다. 우주가 탄생한 게 우연인데 인간이 뭐라고 대단한 목적이 있고, 사는 데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 애초에 그런 게 없으니까 목적이 이끄는 삶 어쩌고 하면서 약 파는 거지. 그런데 말이다. 이 비어 있는 상태가 편하단 말이야. 내가 이렇게 빈 껍데기라는 인식을 기본값으로 둬도 허무 이상의 공포나 공허로는 번지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그 이유를 생각해 봤거든. 그러니까 개체가 아닌 종으로서, 우리 종에 축적된 시간과 경험이 인류로 하여금 의미를 추구하게끔 진화한 거야. 세대를 거듭해서 태어나서 살고 죽고, 또 태어나서 살고 죽고를 반복하다 보니 인과를 본능에 탑재시키는 게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안 거지. 목적을 찾고 의미를 찾는 종이 됐으니까 지금껏 살아남은 거다. 개체 차원에서든, 종 차원에서든 우리는 DNA의 군집이잖냐. 개개인이 태어났으면 되도록 죽기 싫어하는 것처럼, 우리 군집은 복제를 통해 세대를 이어 가도록 자동연산을 하는 거지. 그래서 내 말은, 뭘 비실비실 웃어. 너 나한테 또 반동이니 가부장제 화신이니 그런 말은 하지도 마라. 나는 진지하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가 우리 정아라고 생각해. 그래, 인마. 너도 애 생기니까 다르게 들리지? 솔직히 나는 그렇더라. 정아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체감한다든지, 불쑥 늙음을 인지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남들보다 훨씬 느렸을 거야. 아예 모르고 영영 젊은 척만 하다 객사했을지도 모르지.”
“그래. 윤 작가야. 네 귀한 커피 다 식는다.”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둑이 터진 병준의 말문을 막았다. 병준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남은 커피를 비웠다. 병준에게서 커피잔을 건네받은 나는 부엌으로 가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 같은 애가 작가를 안 하면 누가 하겠어!”
세찬 수전 물줄기 소리에 파묻히지 않도록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어, 고맙수다.” 능청스럽게 대꾸한 병준이 소파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향했다. 나는 젖은 손을 털었다. 잡담의 길이는 불안의 총합에 정비례한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칙이었다. 그 규범에 비추어 볼 때 병준의 불안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작업물은 편편이 가루가 되도록 평가받았다. 아무리 붙잡아도 정신머리는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병준이 쓴 각본은 1부가 통과되기까지 칠 개월이 걸렸다. 2부는 넉 달, 3부도 석 달이었다. 4부는 이제 첫 제출이었으니 또 어떤 피드백이 쏟아질지 몰랐다. 4부라서 더욱 그랬다. 이 판에서 4부는 끝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 드라마가 백이면 백, 4부까지만 재미있는 이유는 거의 모든 의사결정이 4부까지의 대본으로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작가로서는 이제 마지막 큰 산이 남은 셈이었다. 이 산만 넘으면 그때부터는 박 대표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병준이 주절거린 기나긴 논변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삶의 최전선에서 자신을 차선으로 물리는 법을 강구해 온 오랜 내력 같았다. 끊이지 않는 풍랑 속으로 자기를 내몰아야 하는 이들은 상상으로라도 구명정을 펼칠 수 있어야 했다.
*
상상은 이르게 현실이 됐다. 점심으로 백반을 먹으려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불광천 징검다리를 건너는 동안 병준이 전화를 받았다. “여어, 오 피디.”로 시작하는 것을 보니 담당 피디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원고는 어떻게 좀 읽을 만했냐며 넉살 좋게 대화를 이어 가던 병준이 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췄다. 휘청거린 나는 하마터면 그와 부딪힐 뻔했다. “고맙다, 고마워.” 나직한 목소리로 통화를 끝낸 병준이 휴대폰을 귀에서 뗀 채 하늘을 올려보았다.
“뭐하냐?”
내가 묻자 병준이 몸을 뒤로 돌렸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통과다.”
“한 번에?”
“응!” 병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도 바로 오케이했다네. 믿기지 않는다.”
“대박 사건!”
믿기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손을 위로 뻗은 나는 몸을 활시위처럼 젖혔다. 우리는 손바닥이 아릴 정도로 손뼉을 마주쳤다. 창작을 업으로 삼은 이래 동료의 잘됨에 꼬인 마음 한 톨 없이 축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병준과 손뼉을 부딪친 그 순간만큼은 축하하는 마음이 다른 잡다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압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글만 써서 먹고사는 것은 누구보다 병준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병준은 작가라는 타이틀만으로 세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그가 우연히 박 대표와 맺은 연을 놓지 않고 문학판 작가들을 이쪽으로 데려오자고 설득한 것 역시 그런 간절함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병준은 기분이라며, 오늘은 자기가 쏜다고 삼겹살집으로 가자고 했다. 오후에 제작사 미팅이 예정되어 있던 나는 냄새가 밸까 저어됐지만 흥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이렇게 구워 주는 곳이 좋지.”
병준이 오백짜리 생맥주잔을 부딪치면서 말했다. 직원이 초벌구이를 한 삼겹살 사이에서 멜젖이 팔팔 끓었다. 다음 일정 때문에 목만 살짝 축였는데도 잊고 지낸 짜릿함이 밀려왔다. 율이가 태어난 뒤로 처음으로 집 밖에서 마시는 술이었다.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죽인다.”
“죽이지? 나는 말이다, 이제야 이 판의 문법을 알게 된 것 같아. 그게 아주 기분이 죽여 줘!”
고기가 다 익기도 전에 오백 한 잔을 비운 병준이 말했다. 덩달아 흥이 오른 나는 병준에게 이제 탄탄대로일 거라고, 더 잘 풀릴 거라고, 다음 시리즈 들어갈 때는 몸값이 두 배 세 배 뛸 거라며 치켜세웠다. 입꼬리를 씰룩인 병준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서라. 그것도 다 편성된 다음 얘기다. 편성이 되려면 일단 배우를 대어로 낚아야 하는데 요즘 어디 그게 쉽나.”
“걱정 말아라. 박 대표가 누구냐. 명절 때마다 탑배우들 선물이 탑차로 들어오는 위인이다. 클래스 어디 가겠어?”
“그래!” 병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배우만 잘 데려오면 된다!”
“그럼!” 내가 잔을 들었다. “배우가 전부다!”
병준이 잔을 부딪치며 복창했다. “배우가 전부다!”
배우가 전부다. 맞다. 이 말은 더없이 참이었다. 나는 불변의 진리 같은 이 명제를 하필이면 한발 먼저 체득했다. 불현듯 두어 달 전에 벌어진 사달이 떠올라 실소가 나왔다. “그러게 말이다···.” 하고 중얼거린 나는 “배우가 진짜 전부더라!” 하고 짐짓 쾌활한 척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 자조를 섞은 농담이었는데 병준을 웃기는 데는 실패한 것 같았다.
“아이고, 이 작가. 내가 눈치가 없었네.”
“야, 희극을 다큐로 받으면 내가 뭐가 되냐.”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무마했지만 속으로는 후회했다. 되긴 뭐가 돼. 등신 된 거지. 농담이랍시고 뱉은 말이 어쩐지 수동 공격 같았다. 꾸덕꾸덕해진 멜젖에서 비린내가 올라왔다. 처음에는 셋의 속도가 비슷했더랬지. 압도당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밑에서부터 역류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틀어막아 보아도 찌꺼기들은 꾸역꾸역 올라왔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편성을 확정한 상태에서 기획서를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웹툰을 각색하라고 제안했던 두 사람과 달리, 박 대표는 내게 영국 소설 한 편을 내밀었다. 추상화 같은 표지부터 추천사를 쓴 중견작가의 이름까지 띠지에다 ‘이거 찐순문학임’이라고 헤드라인 서체로 박아 둔 것 같은 책이었다. 나는 박 대표가 그토록 잡도리하던 문학이 한국문학 한정이었나 싶어 의아했는데 판권을 사들인 이유를 알게 되자 단박에 수긍이 갔다. 박 대표가 내민 원작은 차세대 한류 주역으로 손꼽히는 케이팝 아이돌 출신 남배우가 위버스 라이브에서 인생 책으로 소개한 소설이었다.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톱스타가 제작과 출연을 동시에 안달 내는 작품이었다. 군말 없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나는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책을 펼쳤다. 얼마간 훑어보니 배우가 왜 이 소설을 인생 책으로 꼽았는지도 짐작이 갔다.
소설은 웨스트햄FC로 유명한 런던 뉴엄구가 배경으로, 주인공은 태어날 때부터 정체불명의 혈소판 질환을 앓아 온 아랍계 소년이었다. 소년은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을 오랫동안 학대하다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다. 하지만 아버지는 소년의 도움 없이는 자립이 불가능했고, 역으로 아버지가 죽도록 방조한 소년은 거리로 나가 처지가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린다. 신생 갱단을 결성한 그들은 조직 이름을 ‘프릭스(Freaks)’로 정했다. 그것은 극도의 빈곤과 미치광이 부모들 밑에서 제정신으로 자라기 어려웠던 자신들을 가리키는 블랙 유머였다. 좀도둑질과 빈집 털이로 시작한 프릭스의 사업은 머리가 비상했던 주인공 소년의 성장과 함께 날로 번성해 뉴엄구 마약 유통권을 두고 전통의 유대계 갱단과 대립할 정도로 세를 불린다. 그러나 사업과 전투를 이유로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결과, 소년의 병세는 결정적인 때에 급격히 악화해 피비린내 나는 쟁투에서 밀려난다. 구립병원 내과 주치의 티나는 목숨만 부지한 채 실려 온 소년의 NHS 기록을 살피다 자신과 소년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당연하게도 또 다른 주인공인 티나가 의사라는 점은 박 대표가 내게 각색을 맡긴 이유였는데 소설은 후성유전학을 이론 틀 삼아 과학적으로도 상당히 탄탄한 구성을 보여 주었다. 소년과 마찬가지로 뉴엄구에서 나고 자라 전문의가 된 티나는 자신처럼 부모의 정신질환과 자식의 조혈기계 질환이 세트로 묶인 사례가 지역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다만 소년과 달리 티나의 경우, 딸이 림프종을 앓고 있었고 정신질환자는 티나 자신이었다. 환청에 시달리면서도 진실을 알기 위해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해 왔던 티나는 이러한 특징을 공유하는 신종 유전질환의 원인이 뉴엄구와 경계를 접한 공단에서 글로벌 기업이 무단 배출한 화학물질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제 병은 물론 저를 죽이려 했던 친부의 정신질환까지 명백한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된 소년은 마약 부작용 탓인 줄로만 알았던 일부 조직원들의 악성 빈혈이나 백혈병 따위를 다시 본다. 소년은 병들어 퇴출당했던 조직원들을 찾아 새로운 프릭스 조직을 규합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티나의 열정에 올라타 막대한 보상을 타낼 작정으로 기업의 은폐 공작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소년의 아픈 몸은 기업의 첨병이 되어 고비마다 소년과 대립하는 유대계 갱단처럼 그 자체로 플롯이었다. 몸의 좌절을 의지가 극복하는 계단식 상승은 이 소설을 인생 책으로 꼽은 배우의 개인사와도 깊이 조응했다. 소년처럼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은 배우는 친부와의 연을 일찌감치 끊었는데 본인이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네 번 더 결혼한 그에게 오만 정이 떨어져서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아버지가 물려 준 외모는 그를 연예계로 자연스럽게 이끌었으나 부차적으로 물려받은 약한 심장은 배우의 발목을 자주 붙잡았다. 소아심근병증을 앓아 온 배우는 데뷔를 앞둔 때에도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몇 달을 병원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본인은 부인했지만 소속 그룹이 글로벌 차트를 석권할 무렵 아이돌을 그만둔 것도 그룹의 시그니처였던 격한 안무가 심장 문제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금수저 아니면 연습생도 되기 힘든 시대에 이 바닥 진정한 금수저는 타고난 비주얼임을 증명했던 그의 활동 중단에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으나 공백기 이후 공중파 월화드라마 주연으로 재데뷔한 그는 외모가 외려 마이너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호연을 펼쳤다. 배우의 이러한 인생 역정은 덕후들의 심장을 후려쳤다. 출연작이 잇따라 흥행하면서 팬들은 그가 맡은 배역과 작품의 세계관에 열성적으로 몰입했다. 시청률과 화제성을 입증한 배우 역시 팬덤의 성원에 힘입어 다른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배우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배우님. 이제는 백상 같은 거 타고 싶으시죠?”
소탈하게 웃으면서 “작가님 되게 재미있으시네요.”라고 말하는 배우의 눈에 총기가 돌았다. 나는 액셀을 한 번 더 밟았다. 당신이 욕망에 솔직해진다면 나도 거기에 충실히 맞춰 작업해 주겠다고. 배우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 결과 나는 원작에서 성에 차지 않던 한 부분을 확실하게 틀어 버릴 수 있었다. 원작에서 소년은 기업으로부터 보상금을 뜯을 요량으로 티나에게 협조한다. 그러다 티나의 딸을 포함해 뉴엄구에 산재한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소년은 싸움에 점점 진지하게 임하게 된다. 생존본능으로 사익을 추구하던 주인공이 진실을 알고서 정의를 구현하는 서사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감정을 동요시키기에는 밋밋했다. 나는 주인공이 선의의 가치를 깨닫고, 이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고,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다가 결국 병마로 죽음에 이르자 제 육신마저 정경유착의 검은 뿌리를 드러낼 생물학적 증거로 기증함으로써 대속하는, 이른바 자기희생과 승화의 서사를 제안했다.
“에헤이, 거 안 그래도 불쌍한 애한테 되게 가혹하네. 이 작가. 내 삼십 년 드라마 짬밥으로 볼 땐 말이지, 주인공이 죽는 거는 팔 할이 망해요. 시청자들 그거 엄청 싫어해. 김 배우는 어때? 이거 너무 문학스럽지 않아?”
탐탁지 않아 하는 박 대표와 달리 배우는 개의치 않았다.
“대표님. 아름다움이라는 게 겹이잖아요. 레이어. 응? 이 맥캘란처럼 술맛이 고급질 때도, 우연히 알고리즘 타서 듣게 된 곡에 감동할 때도, 어떤 영화를 걸작이라고 느낄 때도 공통점은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한 번의 경험으로 수많은 경험들이 느껴지는 거. 우리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 캐릭터라는 것도 마찬가지 같아요. 목적이라든지 정체성, 의지 같은 걸 복잡하게 꼬아 놓은 인물을 절체절명의 위기에다 밀어 넣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흥미롭지만, 거기다가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길이 자기를 희생하는 길밖에 없다면, 응? 이 죽음을 아주 개연성 있게 붙이기만 한다면, 뭔가 뜨거운 것이 파악, 하고 가슴을 치지 않겠어요?”
배우가 손목 스냅으로 언더락 잔을 돌리면서 말했다.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말도 미친 듯이 잘생긴 사람이 하면 완전히 다르게 들리는구나. 어느새 배우 옆으로 바짝 다가간 나는 건배를 청하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배우님··· 참 깊어.”
배우가 미소를 띠면서 건배를 받았다. 쨍, 하는 크리스털 글라스 소리와 함께 꿈이 부풀어 올랐다. 아내는 율이가 태어나고도 작가로서의 나를 전폭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눈치가 보여 원래 연봉만큼 못 벌면 전업 작가는 꿈도 꾸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선언한 터였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편성만 되면 다음 작품부터 몸값이 두 배 세 배씩 올라간다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삼십 년 짬밥의 박 대표였다. 결판을 지을 여건은 모두 갖추었다. 나만 잘하면 될 일이었다. 곧장 나는 본 작업에 돌입했다. 대본을 쓰고, 넘기고, 피드백을 받고, 고치고, 또 고치는 시간이 고통스럽기는커녕 즐거웠다. 한 편 한 편 간신히 넘어가 마침내 4회차 대본을 시작할 시점에는 솟구쳐 오르는 아드레날린으로 인해 정해 둔 작업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는데 부풀어 오른 꿈이 현실을 향해 한없이 가까워지던 그때 사건이 터졌다.
시작은 마약 스캔들이었다. 잦은 입원으로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된 탓이라는 팬덤의 비호가 이어졌으나, 아이돌 그룹 활동을 중단하고 공백기를 가진 이유가 섹스 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까지 뒤늦게 밝혀지자 코어 팬부터 돌아섰다. 그에 더해,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이르다 했던가, 배우에게 학폭을 당했다는 배우의 예술고등학교 동창이 구 트위터 현 엑스에 매우 구체적인 정황을 담은 입장문을 올리면서 배우는 한국 연예계사에 유래가 없는 그랜드슬램을 일궈 냈다. 배우는 아픈 몸만으로 원작 주인공에게 동질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마약과 섹스와 폭력을 아우르는 프릭스 갱단의 양아치 짓 일체가 배우의 삶과 혼연일체였다. 돌이켜보면 진정 이보다 더 그의 인생 책일 수가 없었다. 편성은 물거품이 됐고, 투자는 날아갔다. 시나리오는 공중에 붕 떴다. 규칙적인 상담과 꾸준한 치료로 완치했다고 생각했던 이인증이 불시에 도졌다. 임사체험처럼 내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손가락에 불이 나도록 두드려대던 대본이 어디서 표류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담당 피디는 다른 작품 촬영에 돌입하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다. 박 대표는 박 대표대로 사건이 조금 진정된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만남을 미뤘다. 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하릴없이 새로운 기획안을 써 보려다가 막히면 죽은 아이 불알 만지듯 4부를 마저 쓰려고 했고, 그마저도 안 되면 일기장을 펼쳐 내 속에 있는 것을 마구잡이로 갈겨썼다. 하지만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더 많았는데 그럴 때면 불광천으로 나가 무작정 걸었다. 걷다가도 자꾸만 몸이 떨렸다. 그래, 누굴 탓하랴. 떨리는 몸에서 내가 분리되어 떠올랐다. 내 명줄을 타인에게 맡긴 대가였다. 걸음을 멈춘 나는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했다. 떨림이 잦아들었다. 내 몸으로 돌아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변 산책로를 다시 걸었다. 그렇게 두 달여를 흘려보내고서야 제작사에서 이 프로젝트의 향후 방향을 두고 이야기를 해 보자며 오늘 회의 일정을 잡은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런 쓰레기 새끼한테 걸려서 말이야.”
병준이 삼겹살 한 점을 멜젖에 찍으면서 말했다. 명이나물을 오물오물 씹던 나는 병준답지 않은 된소리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괜찮아. 뭐랄까. 진부하긴 한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뭣 같은 세상. 꼭 피해자가 자길 돌아봐야 하더라. 정신 나간 인간 일찌감치 걸렀으니 액땜했다 치자. 명작을 써 두지 않았냐. 별일 없을 거다.”
병준이 맥주잔을 들었다. 나는 웃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맥주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별일이 없을 리 없었다. 그래도 애쓰는 마음이 고마웠다. 피해자라. 왜인지 그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말 내가 피해자였을까. 나는 어느 쪽으로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
퇴근길 여의나루역에는 지하철을 타려는 사람들이 출입구 밖까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는 나를 빼면 러닝크루 예닐곱 명이 전부였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해는 저물었고 한강공원은 밝았다. 공원 안 수변 광장에는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성채를 본뜬 가건물이 화려하게 빛을 뿜어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공원 입구에 놓여 있었다. 아내가 어제 내게 율이를 맡기고 밤 산책을 나갔다가 들렀다는 팝업 스토어가 저기구나 싶었다. 평소라면 슬쩍 구경이라도 했겠지만 내일의 사회성까지 가불해서 소진한 상태였다. 공원 경계를 따라 아파트 쪽으로 터벌터벌 걷는데 같이 올라온 러닝크루가 내 양옆을 질러 달렸다. 스치듯 지나치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피해야 할 돌부리가 된 것 같았다. 씨발, 하고 내가 중얼댔다. 그들은 훌륭한 운동을 즐기는 선량한 시민들이었다. 결코 그들을 향해 중얼거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충분히 그렇게 들릴 법했고 나는 더욱 느리게 걸었다. 검은 운동복을 맞춰 입은 그들이 공원으로 내려갔다. 씨발. 좆같네, 진짜. 나는 또 중얼거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오물이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기분이 더러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더러운 기분을 묻힌 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사를 와서 아내가 단골로 삼은 빵집이 길가에 있었다. 빵집에 들어서니 아내가 좋아하는 초콜릿 퍼지 브라우니는 딱 두 개 남아 있었다. 굽는 족족 동이 나는 제품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비닐에 싸여 있어 봉투는 따로 받지 않았다. 나는 브라우니를 손에 쥐고서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 앞에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뻣뻣한 목을 한 바퀴 돌린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고는 브라우니를 쥐지 않은 손의 검지와 엄지로 양쪽 입꼬리를 꾹꾹 밀어 올렸다.
“아빠 왔네! 아빠다, 율이야!”
현관문을 열자 중문 너머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찬바람이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현관문을 닫은 나는 중문을 열면서 브라우니를 내밀었다. 활짝 웃는 아내의 어깨에 율이가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전쟁을 치른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도우미를 고용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했지만 육아휴직 기간만이라도 남의 손을 타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내의 일관된 의지였다. 얼른 씻고 나온 나는 아내와 바통 터치를 했다. 종일 아이와 떨어지지 못한 엄마는 소파에 누워 율이 때문에 멘붕에 빠졌던 이야기를 했다. 분유를 먹다가 울면서 모두 게워 낸 율이를 씻기려고 옷과 기저귀를 벗기는데 갑자기 똥을 북북 싸기에 망연자실한 채 영유아기 배변 활동을 직관했다는 것이었다. 오늘 중 제일 힘든 순간이었을 텐데도 아내는 웃긴 예능 프로그램을 간추리듯이 말했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고 내 배 위에 엎드린 율이가 웃음소리에 맞춰 통통 튀었다. 세 식구 모두 중력에 순응하는 자세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가 더는 미룰 수 없다며 팔다리를 쭉 폈다. 작은 비명과 함께 기지개를 켠 아내는 소파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몸을 기어코 일으켜 샤워를 하러 갔다. 나는 허리춤에 아기띠를 매고 율이를 들었다. 아기를 품 안에 쏙 집어넣자 따뜻한 기운과 보드라운 냄새, 통통한 목덜미에 농축된 분유 향이 한꺼번에 내게 인화됐다. 아기띠 어깨끈을 바짝 당겨 한 몸이 된 두 사람은 좁은 집안을 설렁설렁 배회했다.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희미하게 기억나는 동요 네댓 곡을 무한히 돌려 부르는데 머리카락을 말리고 나온 아내가 아기를 씻기자고 했다. 나는 율이 방에서 속싸개와 아기 손수건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목덜미의 분유 향이 다 날아가도록 박박 씻은 아기를 아기 몸보다 훨씬 큰 수건으로 감싸 닦아 내고 나니 아내 눈 밑으로 피로가 뚝뚝 떨어졌다.
“들어가서 잘래?”
“그럴까? 배가 살짝 고플락 말락 하는 것 같기도?”
“자다 깨면 야식해 줄게.”
“좋았어!”
손가락을 튕긴 아내가 율이와 내 볼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그러고도 못내 미덥지 않았는지 한 시간 뒤에 마지막 수유를 해야 한다고 주지시키는 아내에게 나는 걱정 말라며 어서 안방에 들어가라고 했다. 육아는 아이템전이라 하지 않았나. 율이와 둘이 거실에 남은 나는 놀이기구를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없으면 못 살던 타이니러브 모빌에는 이제 확실히 시큰둥했다. 모빌을 치우고 아기 체육관 밑에 눕히자 율이가 무지개 모양 틀에 매달린 고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고리를 붙잡고 한참을 놀던 아이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같은 쪽으로 몸까지 젖힌 율이를 보면서 설마 오늘 몸통을 뒤집는 건가, 싶어 율이의 최애 강아지 인형을 아기 앞에서 계속 흔들었다. 아이는 한쪽 팔을 휘적거렸지만 몸에 깔린 나머지 팔을 어찌할 줄 몰라 용만 썼다.
“율아. 팔 빼야지. 밑에 팔 빼 봐.”
알아들을 리 만무한 율이는 몸을 가누지 못하자 시위하듯 울음을 터트렸다. 아내가 깰 것 같아 아이를 재빨리 안아 든 나는 요즘 율이가 제일 좋아하는 베이비뵨 바운서에 아기를 눕혔다. 아이가 크게 움직이면 그 힘을 이용해 흔들리도록 만들어진 기구였는데, 우리는 에듀테이블이라는 건반형 놀이기구를 조합해서 썼다. 바운서에 아기를 눕히고 아기 발 쪽에 에듀테이블 건반을 수직으로 세우면 발로 건반을 찰 때의 반동이 더욱 강해져 위아래로 몸을 신나게 흔들 수 있었다. 사자, 사자, 고양이, 개, 개. 건반은 발길질에 맞춰 동물 이름을 말하다가 빨강, 빨강, 파랑, 주황, 주황, 이라며 색깔 이름도 말했고 도, 도, 시, 파, 파, 하고 음계 이름을 말하기도 했다. 아잇적 나는 트램펄린에 미쳤었다. 너도 그러겠구나 싶을 만큼 율이는 발을 쾅쾅 구르며 격렬히 제 몸을 흔들어댔다.
아내에게는 오늘 회의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만간 하긴 해야 할 텐데, 모르겠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다 관두고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십 부작 중 남은 일곱 편의 각본은 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칠천만 원의 기대 소득도 사라졌다. 많은 돈이었지만 원래부터 없었다 치면 딱 그만큼만 아쉬움이 남는 돈이기도 했다. 비빌 언덕이 많다는 점이 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 중에 독 아닌 것은 없었다. 지금 나를 해하는 독은 그 이야기를 품고 지낸 시간이었다. 율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시작한 작업이었으니 짧다고 하기에는 너무 길었다.
회의 결과 제작은 무기한 연기됐다. 무기와 연기의 조합은 당연히 취소를 뜻했다. 다만 나는 이 각본이 스타 배우의 지지 없이도 투자를 받을 만한 것인지 확인은 받고 싶었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희망인 듯했다. 동석한 담당 피디와 이사는 한두 해 묵혀 두면 누군가 찾는 경우가 왕왕 있다며 듣기 좋은 말을 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어림도 없다며 쐐기를 박았다. 이 판이 미신에 죽고 사는 판인 거 모르냐. 부정 타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그랜드슬램을 한 놈이 밀던 작품을 누가 들고 가겠냐. 나는 그 말에 허탈해하면서 웃었다. 그럴듯한 말 아닌가. 웃기는 상황이기도 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배알이 없는 건지 믿을 구석이 있어서 여유로운 건지 모르겠다며 피식거린 박 대표는 이만 자리를 마무리하자는 식으로 팔을 크게 저었다. 짐을 챙기는 내게 담당 피디는 다른 기획서를 쓰면 꼭 보내 달라며,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 힘을 내라고 말하고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너는 자식아, 그런 말 하려면 카톡이나 씹지 말든가. 한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으나 나는 미소로 응답했다. 회의실을 나온 우리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서 다음에 또 보자며 인사를 나누는데 박 대표가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양, 검지로 이마를 두드렸다.
“이 작가. 갑자기 생각난 건데 말이야···.”
박 대표가 뜸을 들이는 사이 나는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내려보냈다.
“그, 주인공 있잖아. 아직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나는 천장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했다. 박 대표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투명하디 투명한 얼굴이었다. 그를 흘깃 쳐다본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친 채로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그렇지? 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박 대표는 흡족해하는 얼굴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손을 흔들면서 등을 돌린 박 대표는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대표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개, 개, 고양이, 개, 개, 개, 개, 개.
율이가 같은 건반을 계속 찼다. 개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만, 괜히 정서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율이를 바운서에서 안아 들었다. 습관처럼 내 볼로 아기 볼을 비비니 율이가 입에 닿으면 무엇이든 흡입할 기세로 내 볼을 쭉쭉 빨았다. 벽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우리 부부의 생활 패턴상 늦어도 열한 시까지는 수유를 마치고 아이를 재우는 편이 좋았다. 나는 아기를 한쪽 팔로 안고서 서둘러 분유를 탔다. 따뜻한 젖꼭지를 입에 대자 아이가 입술을 한껏 내밀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모양이었다. 율이가 분유를 짭짭, 소리가 나도록 빨아 먹으면서 숨을 헐떡였다. 너무 급히 들이킨다 싶었는데 역시나 컥컥대면서 도리질을 쳤다. 젖병을 떼자 쌕쌕거리던 아기가 항의하듯이 무어라 옹알거렸다.
“왜, 많이 힘들었어?”
나는 율이를 안아 세워 등을 두드렸다. 어깨에 턱을 괴고 있던 아이가 꺼억, 하고 트림 소리를 냈다. 어른 못잖은 큰 소리라 웃음이 터졌다. 잘했다, 녀석아. 잘했어. 그러고는 문득 생각했다. 네게 온전한 사랑을 주는 일이 앞으로도 이렇게만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율이 등을 두드렸다. 여진처럼 아이가 한 번 더 꺽, 하고 작게 트림했다.
쉽지 않은 하루였다. 나는 오랜만에 일기가 쓰고 싶어졌다. 소설 쓰기를 그만둔 뒤로 한 해 동안은 매일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내 말이 바깥으로 흐르지 않게 단단히 가두고 싶어서였다. 그때 나는 이런 문장을 자주 적었다. 성한 입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성하다는 전제가 오만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지금껏 계속되는 물음이다. 쓴 만큼 살 수 없더라도 글은 쓴 자의 좌표이자 선언이 되었다. 부조리 없는 삶에 대한 희구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필연적으로 대립했다. 지키지 못할 선언이 나를 기만하고 타인을 획책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쓰면 쓸수록 내가 만든 껍질 안에 갇히는 느낌이었다. 점점 나와 상관없는 모습으로 커져만 가던 껍질은 셀로판테이프를 붙인 자리를 바늘로 찌른 풍선처럼 힘없이 쪼그라들었다. 다행히 밖으로 터지지 않고 바람만 조용히 빠져나간 것은 셀로판테이프처럼 응력을 분산시키는 단출한 힘이 곁에 있어서였다.
이제 내게 소중한 것은 그런 힘이었다. 불온은 감히 입에 올리지도 않게 되었다. 단출한 한 줌만으로도 고민거리는 벅찼다. 태교 여행은 어디로 갈지, 드라마는 어떻게 쓰고, 조리원은 어디로 가야 하며, 헤드헌터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 병원으로 이직할지, 당근으로 살 아기용품 외에 신상으로 살 것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다가 원리금이 자동 이체되었다는 알림이 띵, 하고 울리면 이번 달 남은 돈을 계산하면서 얼마를 어디에 더 투자할지 상의하는데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깨어 눈을 채 뜨지 못한 아이가 몸부림치는 것을 흐뭇한 미소로 구경하다가 제 손에 제 코를 부딪쳐 울음을 터트리면 미안하기도 하지만 웃기기도 웃겨 순간을 영영 휘발시키지 않을 것처럼 폰으로 사진을 찰칵찰칵 찍는 사이 내 곁의 타인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인간에게는 사유를 하는 힘이 있지 않느냐고, 물리적인 감소가 타자를 향한 안테나의 감소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같은 풍경을 반복해서 바라보는 동안 볕이 잘 드는 곳만을 바라본 것도 사실이었다. 좋은 세상 같은 막연한 희망보다 입주권과 배당처럼 구체적인 현실이 더욱 큰 무게로 다가올 때 현실을 사는 거라고 자위해도, 초라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는데 그 초라함도 이내 똥 기저귀를 갈고, 기저귀 단계를 올리고, 배 위에서 고개를 가누는 아이를 보다 보면 나날이 흐릿해져 갔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다만 그러한 나날들. 바로 그런 나날에 관해서 무언가를 써 두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두세 명이 복도를 다급히 달려 나가는 발소리였다. 윗집에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여겼을 뿐, 내 신경은 분유가 끝을 보이는 젖병으로 쏠려 있었다.
“다 먹었네! 아구, 잘했어!”
나는 식사를 마친 아이를 한쪽 가슴으로 받쳐 안았다. 아기 턱을 내 어깨에 괴어 트림을 하게끔 등을 두드리다가 방금 먹인 양을 까먹을 것 같아 폰을 켰다. 12월 3일 오후 11시 21분, 분유 230밀리미터. 육아 앱에 수유량을 기록한 나는 율이의 하루치 데이터를 살폈다. 분유는 총 1리터를 넘겼고 소변 여덟 번에 대변도 두 번을 보았다. 이 작은 목숨이 오늘 하루도 잘 먹고 잘 쌌구나. 나는 흡족해하며 아기띠를 다시 둘러맸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거실을 걷고 있는데 조금 전 보았던 폰 화면이 눈에 밟혔다. 바탕화면에 깔린 메신저 앱마다 숫자가 빨갛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상했다. 늦은 밤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카카오톡을 켜니 무음으로 설정해 두었던 단체대화방마다 수십, 수백 개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나는 눈에 띄는 아무 대화창으로 들어갔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놓쳤는지 확인하려 했다. 대화를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 보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엄이라고? 이게 무슨 헛소리야. 분명 헛소리여야만 하는 말들이 하나같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포털사이트는 계엄 관련 속보로 도배돼 있었다. 포고령 1호를 보는 순간 실소가 나왔다. 무려 처단씩이나 하겠다니. 이딴 게 진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 그나마 텔레그램에는 신뢰할 만한 단체대화방이 서너 곳 있었다. 그중 한 곳에서 누군가 지금 국회의사당 상황이라며 유튜브 링크를 올렸다. 나는 링크를 타고 들어가 라이브 방송을 켰다. 화면 속에는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서 국회의원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못할, 명백한 내란이었다. 화면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아우성이 들렸다. 카메라가 소란스러운 쪽으로 뛰어갔다. 국회로 향하는 길목에 멈춘 국방색 전술 차량이 화면 속에서 점점 커져 왔다. 차 빼, 이 새끼야! 라이브 방송 진행자가 숨을 헐떡이면서 소리쳤다. 평상복 차림의 시민들이 전술 차량을 몸으로 막고 있었다. 어딜 감히 기어 들어와! 돌아가! 꺼지라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전술 차량을 에워쌌다. 그제야 위에서 들렸던 발자국 소리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품 안에 있던 율이가 꼼지락거렸다. 나는 아차 싶어 휴대폰 음량을 낮추었다. 그러자 둥, 둥, 둥 하고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소리가 이중 창호를 뚫고 들려왔다. 나는 품 안의 율이를 감싸안은 채 안쪽 창문을 한 뼘가량 열었다. 창문 손잡이에 맞닿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공기가 밀려들었다 빠져나가길 거듭하는 것처럼 진동이 느껴졌다. 아니라고, 내 착각에 불과하다고 부정하기에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깥 창문까지 열자 프로펠러가 허공을 긁으면서 내는 굉음이 거실 안으로 밀쳐 들었다. 고막을 타고 들어온 그 낮고 탁한 소음이 속을 울렸다. 소음과 함께 한기가 침투했다. 나는 창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곧이어 군용 헬리콥터가 검은 하늘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고개를 치켜든 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저 시커먼 기계가 내 머리 위를 지나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이미지는 전일빌딩에 박힌 이백사십 다섯 발의 총탄이었다. 군용 헬리콥터가 국회의사당 쪽으로 멀어졌어도 눈과 귀에 남은 이물감이 그대로였다. 넋을 놓고 있던 나는 율이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 정신을 번쩍 차렸다. 소음과 한기에도 불구하고 눈까풀이 반쯤 내려간 아이는 조막만 한 손으로 제 머리를 긁고 있었다. 창문을 닫은 나는 잠에 들려는 아이의 이마에다 연신 입을 맞췄다. 율아, 세상을 살려면 얼마나 더 부끄러워야 할까. 나는 꾹 닫은 입술로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얼마나 성해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것도 못 본 척하고 살 수 있을까. 아이가 몸부림을 치면서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에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성하지 않았다. 그저 성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자기야.”
나는 안방 문을 똑똑 두드렸다.
“자기야 일어나 봐.”
어느새 눈을 꼭 감은 아이가 내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나 좀 나가 봐야 할 거 같아.”
바깥은 춥고 어두웠다. 그래도 아직, 밤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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