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입생로랑 낭떠러지

  • 작성일 2025-04-01

   입생로랑 낭떠러지 


김엄지


   1

  

   E는 걸으면서 여자 친구를 떠올린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다. 

   지갑을 선물하리라. 메탈릭 컬러의. E는 결정했다.

   메탈릭 컬러가 여자 친구의 취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거리에 눈발이 날리고, 때늦게 웬 눈인가. 

   인도로 걸어야 하는데 보도블록을 까뒤집어 놓은 날이다. 

   찬바람에 흙먼지가, 눈보라가 휘날린다. 

   이런 날씨에 무슨 공사를. 

   보도블록과 공원 터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중장비 두 대가 덩그러니 멈춰 있다. 

   E는 카페로 가는 또 다른 길, 크게 우회하여 걷는 경로를 떠올린다. 

   E는 천변으로 내려가 물을 따라 걷기로 한다. 



   2


   축복이라는 건 그저 그런 상황에서 주시는 게 아니야. 핑크빛, 막 그런, 좋고, 그런 게 아니라. 코너로 몰아. 사람을 몰고 몰아서. 상황 중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 보증된 건 천국이라는 자리뿐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는 거. 여기서의 생활이 너무 괴로우니까. 갈등이, 사람을 끝까지 몰아가는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얼마 전에 급식 봉사하는 분 간증을 들었어. 오늘 밥 열심히 나눠 주고, 내일 밥할 돈을 또 구해야 하는 게 너무 큰 고난인 거야. 밤새 기도를 한대. 내일 밥값이 없습니다. 내일 밥값이 없습니다. 그럼 신기하게 다음날 딱 급식할 밥값만 입금되어 있대. 넉넉하게 편안하게 안 해 주는 거야. 하루만 딱. 항상 하시는 일이 그거인 거야. 딱 그거. 하루치. 너무 신기한 거야. 신기한 가운데 이틀치 주시면 안 되나요, 싶은 거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실 때는 사용할 그만큼만 하시는 거야.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행복하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내가 열성분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아. 내가 교회를 못 갈 일이 생기면, 오늘은 교회에 오지 말고 모임에 나가라, 하신다고. 내가 하나님 모를 때는 팝송도 듣고, 이거저거 다 들었는데, 하나님 알고 나서는 찬송가만 들었어. 그랬더니 어느 날 하나님이 네가 듣고 싶은 것 들어라, 하시는 거야. 그래서 알게 됐지. 아 하나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구나. 하나님이 너무 응답해 주시니까 신학대학에 가려고 했거든. 신학대학 가기 전에 히브리어 띠고 가는 게 좋다고 해서, 히브리어 시작하려는데 그때 또 들렸어. 그 길은 네 길이 아니다, 음성이 들리더라고. 그래서 신학대학원은 안 가기로 했어. 하나님 왜 그러시냐고 물을 때는 답이 없으셔. 사람은 모르는 거야. 하나님만 아시는 정확한 때에. 정확한 방법으로 딱 그만큼만 알려 주시는 거야. 내가 구한다고 해서 그때마다 알려 주시고, 들려주시는 게 아니야. 성령이 임한다고 마냥 핑크빛이 아닌 거야.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내 몸으로 보여 주셔. 물집이 똑 떨어지고 그 자리에 반점이 생기는 거야. 나 심장도 멈춰 봤어.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멈추면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 나를 그렇게 움켜쥐고 있던 게 내 숨이었던 거야. 


   E는 카페에 앉아 교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방언과 예언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병과 약물 부작용과 치유에 대해서 듣게 된다. 

   증상과 살아남에 대해서 듣게 된다. 

   이대목동병원과 수술방에 대해서 듣게 된다. 

   끝에 방, 끝의 끝에 방에 대해서 듣게 된다. 

   폐소공포증과 멈춤에 대해서 듣게 된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니까 호흡이 멈추는 거야. 듣게 된다.

   그때 그 느낌이 순간적으로. 너무. 듣게 된다. 

   바로 또 살려 주시고. 숨을 돌려주시고. 듣게 된다. 

   내가 촉이 좋아서 하나님이 일러 주시는 것들을 빨리 알아차리는 편이기도 해. 듣게 된다. 


   촉이 불교 용어라는 것을, E는 알고 있다. 윤회 과정 중의 하나인, 사람이 죽고 다시 잉태된 다음, 태중 처음으로 알아차리는 감각. 닿을 촉. E는 묘하다고 생각한다. 

   묘해. 

   묘하다는 생각은 곧 여자 친구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E보다 7살 어린 여자. 

   어린데 가끔 자신을 압도하기도 하는. 

 

   이 커피를 다 마시면 백화점으로 가리라. E는 자신의 일정을 환기한다. 

   백화점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E는 시뮬레이션한다. 

   택시나 버스를 타도 되지만 E는 걷고 싶다. 


   걔는 요즘 뭐해?

   쉬고 있대. 

   이미 쉬고 있던 거 아니었어? 

   이제 좀 다르게 쉬려나 봐. 


   E가 백화점으로 가는 경로를 떠올리는 동안 옆 테이블의 주제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고, E는 다시 듣는다. 


   걔 단점은 친구가 없어. 주변인이 없어. 

   친구 하나 데려오래도 하나를 못 데려와. 

   외모, 볼품, 매너, 돈 쓰는 거, 친구, 

   없어.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하나도 없는 거야. 

  

   옆 테이블의 대화는 이전과는 판이한 것이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바뀐 것 아닌가, E는 생각한다. 

   E는 잠깐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의 면면을 확인한다. 

   E는 커피의 얼음을 입안으로 털어 넣고 씹는다. 



   3


   오펄 질감, 자개 같기도 하고요. 여자 친구분 선물 주시는 거면 좋아하실 거예요. 영한 연령대에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에요. 손가락이 더 길어 보이기도 하고요. 잡았을 때, 이렇게요. 


   입생로랑 매장 여직원은 웃는 얼굴로 카드 지갑을 이렇게 저렇게 쥐어 잡는다. 

   여직원의 손가락은 길고, 손톱에는 투명 매니큐어가 발려져 있다. 


   각도에 따라서 빛이 쪼개질 때 발하는 색이 달라져요. 분홍빛 같지만 이게 딱 핑크는 아니고, 연한 민트빛도 보이거든요. 홀로그램 효과가 있는 거예요. 


   E는 네, 아 네, 대답한다. 

   E는 여직원의 입을 보고 있다. 

   여직원의 입술이 너무 도톰하고 번들거려서 자꾸 쳐다보게 된다고 생각한다. 


   들어 보시겠어요? 

   여직원은 E에게 카드 지갑을 건넨다. 

   E는 카드 지갑을 매만져 본다. 

   지갑은 E의 손 안에서 몹시 작고, 그러니까 여직원의 말대로 콤팩트하다. 


   가죽은 아닌 것 같네요. E가 말한다. 

   네. 가죽은 아니에요. 여직원이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가죽이 아니면 뭐냐고, E는 묻지 않는다. 

   이걸로 주세요. E는 말한다. 


   포장하는 동안 매장 안을 더 돌아보시라 여직원이 말한다. 

   매장 안은 시트러스와 우디향이 가득하다. 

   E는 여직원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느리게 걷기 시작한다. 

   E는 천천히 고개를 휘저으며 구경한다. 

   벽 선반과 진열장, 마네킹에 크고 작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아무런 상품도 아닌 그저 입생로랑 로고 자체인 금속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번쩍인다. 크다. 크기가 저것의 의미인 것 같다. 번쩍임이 의미일까. 속이 비어 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충분히 무거워 보인다. 금속물의 높이는 E의 어깨까지 올라온다. E는 그 조형물의 맨 윗면을 손바닥으로 쓸어 본다. 차갑고 매끈하다. 

   다 됐습니다. 여직원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감사합니다. E는 포장된 것을 받아 들고 백화점에서 완전히 빠져나온다. 



   4


   E와 여자 친구는 와인과 치즈, 견과류를 사이에 두고 있다. 

   홀의 조명은 어둡다. 

 

   생일 축하해. E는 그 말을 할 타이밍을 고민한다. 

  

   우울해. E의 여자 친구가 말한다. 

   오늘 생일이잖아. E가 말한다. 


   생일이라서 우울한 거야. 여자 친구는 미간을 구긴다. 

   그렇구나. E는 그렇구나, 한다. 

 

   E는 테이블에 준비한 선물, 쇼핑백을 올려놓는다. 

   둘은 마주 앉아 있고, 여자 친구는 E의 머리보다 약간 위를 응시하고 있다. 

   E는 그녀의 빈 잔에 와인을 따른다. 

   여자 친구는 몇 모금 연거푸 마시고 한숨을 쉰다. 


   어제 꿈을 꿨어. 여자 친구가 말한다. 

   악몽이었니? E가 묻는다. 

   아니. 여자 친구가 대답한다. 

   

   어떤 꿈이었는지, E는 더 묻지 않는다. 

   여자 친구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그녀의 아래턱이 미세하게 떨린다. 

   발포비타민 같다. E는 그녀의 떨리는 안면을 보며 생각한다.

 

   사람들은 끝내 뭐가 될까? 

   여자 친구가 허공에 대고 말한다. 

   사람들은. 끝내. 뭐가. E는 속으로 되뇌어 본다. 

   사람은 사람이 되지.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그런 말들은 그녀가 원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E는 알고 있다. 


   유리 종이 꿈을 꿨어. E의 여자 친구가 말한다. 

   유리 종이는 얇고 투명해. 뾰족한 것으로 쓰면 깨지고, 묽은 것으로 쓰면 흩어져. 깨지고 흩어지는 꿈이었어. 

   E는 그녀의 꿈을 상상해 본다.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 

   거기에 뭘 썼니?

   비밀을 썼어.


   E는 끄덕이며 입안에서 치즈를 녹인다. 

   둘은 와인 한 병을 천천히 다 비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질까? 여자 친구가 묻는다.


   뭘 원하니?

   비밀이야. 


   E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입생로랑 쇼핑백을 여자 친구 쪽으로 밀어 본다. 

   여자 친구는 쇼핑백에 묶인 리본을 풀고 그 안에서 상자를 꺼낸다.    상자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습자지를 헤친다. 


   예쁘다. 여자 친구가 말한다. 

   예쁜데 촌스러운 것도 같아. 그녀는 말하면서 웃는다. 

   싫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라고, E는 생각한다. 


   여자 친구는 카드 지갑을 이렇게 저렇게 쥐어 본다. 

   갈색 조명 아래에서 지갑은 밝게 빛난다. 

 

   잘 어울려. E가 말한다. 

   고마워. 여자 친구는 다시 지갑을 상자 안에 담고, 종이상자는 쇼핑백에 넣는다. 


   E는 와인 한 병을 더 주문한다. 

   잔을 부딪치지 않고 각자의 속도로 마신다. 

   둘 다 멍하다.

 

   올여름에 어디에 놀러 갈 수 있을지, 둘은 이야기한다. 

   여자 친구는 섬에 가고 싶다. 

   E는 비행기나 배를 타고 싶지 않다. 

  

   한여름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너무 덥고 지치기 때문에. E는 좋은 숙소에서 쉬고 싶다. 여름을 떠올리면 숙소에 대한 생각이 전부인 것이다. 큰 창이 있는, 쾌적한, 푹신한,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꼭 섬이어야 하는 거니? E가 묻는다. 

   그런 건 아니야. 여자 친구가 대답한다. 


   한동안 둘은 말이 없다. 

   둘은 테이블에 놓인 작은 초를 본다. 촛불의 윤곽이 또렷하다. 

  

   나는 오빠 이상을 알아. 여자 친구가 말한다. 

   내 이상? E가 되묻는다. 

  

   나는 오빠가 사는 방식을 존중해. 여자 친구가 말한다. 

   내 방식? E가 되묻는다. 

  

   그게 오빠 포즈인 거지. 삶을 사는 포즈. 여자 친구가 말한다. 

   내 포즈? E는 자기 포즈에 대해 생각한다. 


   두 번째 와인 병이 바닥을 드러낸다.

   E는 핸드폰 액정에서 시간을 확인한다. 

   1시 11분.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더 할 말도, 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5

  

   E와 여자 친구는 골목과 대로변, 다리 밑을 걷는다. 

   오래 걷는다는 생각 없이 걷는다. 

   여자 친구는 E의 한쪽 팔을 붙잡고 늘어지듯 걷는다. 

   E의 한쪽 어깨를 푹 내리고 걷는다. 

   두 사람의 걷는 그림자를 멀리서 본다면, 절뚝이는 한 명의 것처럼 보인다. 

   E는 걷는 동안 술이 좀 깨기를 바라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걸을수록 몽롱하다. 

   둘은 드문드문 대화를 하기도 하고 아주 말없이 걷기도 한다. 

   둘 다 격렬하게 웃을 힘은 없다. 

   그만 걷고 이제 그만 헤어지려 할 때, 어두운 길가 저 멀리 선명한 빛을 발견한다. 

   맥도날드다. 

   둘은 약속한 것처럼 그리로 간다. 

   24시 맥도날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너무 밝다. 여자 친구가 말한다. 

   너무 밟고 넓다. E가 말한다.

  

   더블치즈 세트 두 개를 주문한다. 

   와인 바에서 갖가지 치즈를 먹고 나와 또 치즈버거를 먹는 것이다. 

   E와 여자 친구는 맥도날드 구석에 자리 잡고 앉는다.

   누가 먼저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둘 다 잠이 오는 얼굴이다. 

   오늘은 여자 친구의 생일이고, 아니 이제 어제의 일이 되었다. 


   주문한 것들을 테이블에 펼쳐 두고 둘은 먹기 시작한다. 

   비슷한 속도로 느리게 E와 여자 친구는 치즈버거를 우물우물 먹는다. 

   감자튀김과 콜라까지 남김없이 천천히 먹는다.

 

   우리 배가 고팠었나. E가 말한다. 

   여자 친구는 뭐라 대답하려다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녀는 급히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또 다른 손으로는 긴 머리칼을 부여잡고 뛰쳐나간다. 

   E는 뒤따라 나가려다 앉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 역시 속이 좋지 않다. 토할 정도는 아니지만 더부룩하고 역하다. 

   맥도날드 내부에 기름 냄새와 히터 바람이 가득하다. 

   E는 여자 친구를 기다린다. 

 

   걔 그래서 요즘 뭐해? 

   쉬고 있대. 

   어떻게 더 쉴 수 있지? 

   어떻게든 쉬겠지. 꾸역꾸역. 

   미련해.

   미욱해. 


   E는 멀찍이 테이블에서 하는 대화를 듣는다. 

   새벽이고, 그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잔잔하게 공간을 울린다. 

   미욱하다는 건 뭘까. E는 생각해 본다. 


   나 멈춰 봤어. 

   심장이?

   심장이.

   어떻게 그럴 수가. 

   거짓말 아니야.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설명 안 되는 거야. 내가 겪었지만 설명 못 해. 그 안락함. 


   E는 지금 말하는 얼굴이 궁금하다. 

   E는 대화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방금까지 대화하던 테이블의 사람들이 말을 멈춘다. 

   매장 안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맥도날드에 손님은 E와 그 테이블뿐이다. 

   E가 먼저 시선을 거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좀 더 작은 목소리들로 그들은 말하고, E는 더 주의를 기울인다. 

   E는 오늘 먹은 모든 것들이 소화되지 않아서 콜라를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여자 친구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늦어진다. 

   나가서 찾아 보아야 할까. E는 생각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E의 여자 친구는 늦어지고 늦어지다 끝내 자리로 돌아온다. 

   그녀는 말간 얼굴로,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환하게, 유리문을 밀고 맥도날드 안으로 들어온다. 

  


   6


   여자 친구는 택시를 잡아탄다.

   그녀는 술이 다 깬 것 같다. 

   그녀가 탄 택시가 빠르게 E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거리는 멈춘 것처럼 고요하다. 

   방금 여자 친구가 타고 떠난 택시가 이 세상의 마지막 택시인 것 같다. 

   E 역시 택시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기로 한다.

   새벽이고, E는 추워서 움츠러든다. 그는 단단히 팔짱을 끼고, 한 발에서 또 다른 한 발로 무게 중심을 옮기며 천천히 제자리걸음을 한다. 

   E는 도무지 술이 안 깬다. 머리가 너무 무겁다. 

   고개를 숙이면 머리가 뚝 떨어질 것 같다. 

   E는 고개를 들어 공중에 걸린 신호등을 본다. 

   황색 신호등이 일정한 속도로 깜빡이는 것을 본다. 

   입으로 깜, 빡, 깜, 빡, 뻥끗거린다. 

   새벽 거리에 신호 점멸 음은 제법 크게 들린다. 무언가 흐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끊기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 둘 다라는 것을 E는 안다. 

   E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이어 붙이고 있다.    어떻게 해도 택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E의 들숨 날숨에서 발효된 술 냄새가 난다. 

   E는 이제 목이 마르다. 

   E는 입안에서 혀를 굴린다. 침을 만들어 삼킨다. 

   여자 친구는 내가 준 선물을 잘 챙겼던가. 문득 E는 궁금하다. 

   E는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원이 꺼져 있고.

   꺼져 있는 걸 알면서도 두 번 더 전화를 건다. 

   지갑 잘 챙겨 갔니? E는 메시지를 남길까 하다가 관둔다.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집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걸릴까. E는 시뮬레이션한다. 



   7


   천변에 도착하자 E는 이미 집에 도착한 것처럼 마음이 놓인다. 

   물줄기를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그의 집이 나타날 것이다.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E는 걷다가 물가에 앉을 만한 돌을 찾아 거기 앉는다. 

   너무 오래 걸어서 곧 해가 뜰 것 같다고 E는 생각한다. 

   여자 친구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 있다. E가 켤 수는 없다. 

   E의 핸드폰 역시 곧 꺼질 것이다. 남은 배터리는 4퍼센트이다. 

   E는 돌에서 엉덩이를 떼고 물을 향해 몸체를 기울인다. 

   물은 거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확인하고 싶다. 

   E는 자기를 확인하고 싶다. 

   흐르는 물결에 E 형체가 끊임없이 이글거린다. 

   물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난다. 

   E는 물에서 뭔가 더 보고 싶다. 

   E는 여름휴가를 상상한다. 

   배를 탄다면. 섬에 간다면. 종일 헤엄치고 살갗을 태운다면. 한참을 덥다가 차가운 걸 마신다면. 여자 친구가 섬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게 수영일지 태닝일지, 차가운 걸 마시는 것일지, 뒤늦게 E는 궁금하다. E는 대체로 두 시간, 이틀, 두어 달 정도 느리다. 깨달을 때마다 이미 지나간 후이고, 별수 없기 때문에 곧잘 체념한다. 

   체념. E는 그 단어를 떠올리자 마음이 편하다. 

   E는 여자 친구에게 체념하는 법을 알려 주고 싶다. 

 

   걘 매사에 감사한 걸 몰라.

   걔가 좀 그렇더라고. 

   주제를 모르고. 

   몰라도 그렇게 모르고. 

   그런 족속들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어 정말 생각이 없어. 

  

   새벽 조깅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E의 뒤에서 들려온다. 

   E는 뒤돌아 그들을 확인한다. 

   탁, 탁, 탁 뛰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경쾌하다. 

 

   E는 집으로 돌아가 자고 싶다. 

   이번에 잠들면 한동안 깨고 싶지 않다. 

   E는 이미 잠든 것처럼 몽롱하다. 

   지금 앉아 있는 이 물가는 잠들 만한 곳이 아니다. 

   E는 결심을 하고, 돌에서 엉덩이를 뗀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자 현기증이 인다. 

   전신이 뻐근하다. E는 선 채로 천천히 기지개를 편다.

   E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에는 신호가 간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 


   E는 다시 걷기로 한다. 

   이렇게 오래 걸었는데 왜 아침이 되지 않을까. 

   E는 천변에서 완전히 벗어나 파헤쳐진 보도블록을 지난다. 

   멈춘 중장비는 그 자리에 그대로이다. 

   E는 우회하고 싶지 않다. 

   공사 중 천막을 넘는다. 가로질러 갈 것이다. 

   천막을 넘는 동안 E는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경계의 안일지, 밖일지. E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본다. 

   아무런 두서없이 길바닥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다. 

   저건 뭘까. 저 정육면체는. 

   발전기이다. 

   아침에도 저 자리에 있었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E는 발전기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고 있다. 

   E는 발전기가 필요한 상황까지 가고 싶지 않다. 피곤하다. 

   너무 피곤한 사람은 걷다가 잠들 수도 있다. E는 그것을 모른다. 

   E는 자기의 피곤함을 모르고 계속해서 걷는다. 

   E는 자동기계처럼 걷고, 걷다가 한순간 무릎이 꺾인다. 

   한순간 잠으로 툭 빠져든 것이다. 

   E의 발목과 허리, 어깨와 목이 잘못 쌓은 구조물처럼 와르르 무너진다. 

   어느 모서리에 머리를 찧는다.


   성령이라는 게 핑크빛은 아니지만. 

   E의 감은 눈에 보이는 것은 선명한 핑크빛이다. 눈이 부신 형광의 분홍이 E의 눈꺼풀 안쪽에 가득하다. 빛은 점점 더 비대해져 E의 머리통을 가득 채우고 안구 밖으로 쏟아질 것 같다. 


   부르셨나요? E는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E는 자기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알아차린다. 

   E는 입안에서 찌르는 듯한 이물감을 느낀다. 

   유리 종이. 여자 친구가 꿈꿨다던 유리 종이 파편을 씹은 것 같다.

   E의 입안에는 유리나 종이가 아니라 모래와 돌가루가 가득하다. 

   E는 뱉고 싶다. 잘 뱉어지지 않는다. 혓바닥이 뻣뻣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목소리는 한 번 더 말한다.

   E는 바닥에 자그락거리는 것들을 더듬는다. 

   더듬거리는 그의 손짓에 차갑고 매끈한 무언가 스친다. 

   좀 더 더듬자 훅 꺼져 버리는 허공이다. 

   E의 몸체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운다. 

   낭떠러지요. E는 작게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더, 다시 말해야 할 무언가를 E는 생각해야 한다. 

   생각이라는 게 이어 붙이기조차 어려울 때도 있다. 

   E의 뺨에 차가운 뭔가 톡 떨어진다. 하려던 말이 흩어진다. 

   발전기 가동되는 소리가 시작된다. 

   소리 때문에 E의 안면이 덜덜덜 떨려 온다. 

   지금 많이 간절하세요? E는 듣는다.

   지금 아침인지, E는 묻고 싶다. 그게 왜 중요한지는 알 수 없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예지6

[단편소설] 예지6 김엄지 1 누구든지 이상하다. 이상한 모두를 피하고 싶었던가. 이상한 눈, 코, 입을 본 적이 있다. 이상한 사람의 눈은 이상하기 마련이다. 이상한 사람의 코와 입은 이상한 사람의 눈보다 더 이상할 수 있다. 어떻게? 어떻게든. 이상한 자가 이상한 자에게 다가가 말할 수 있다. 지금 참고 있는 게 뭐예요? 참고 있는 표정인데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요. 말하고 나면 훨씬 후련할 텐데요. 후련해질 텐데요. 나는 후련해지지 못했다. 내가 끌고 다니는 두 다리가 너무 무거웠다. 몸 이곳저곳, 아무리 더듬어도 내 두 다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었다. 엉덩이에서부터일까, 골반? 정수리에서부터일까? 발바닥에서부터일까? 땅에서부터? 발 딛는 곳마다 시작일까?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다리가 땅에서 솟아나 다리 위에서 몸통이 싹트고 머리는 없는 것 같다. 머리가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하늘에서부터 내가 내려와 쌓인다는 상상. 발바닥이 만들어지고 그다음 정강이가 그다음 무릎이 차곡차곡 쌓여 목까지 만들어진 나는 걷겠지. 걸었다. 11월 말이 되자 곧 해가 바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마침내 11월 1일이 되자 득달같이 해가 바뀐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들어야 하는가. 11월과 10월과 해의 바뀜. 체인지 더 문. 체인지 더 썬. 흩어지는 조합, 눈과 귀가 계속 열려 있었다. 열려 있는 것은 감각만이 아니라 감각보다 더한 것, 감각보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생각 없이 살겠다는 다짐이 자꾸 무너졌다. 무너지는 것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는데. 둑, 댐, 둑과 댐. 무너지는 것이라고는 둑과 댐 그 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둑과 댐은 다른가? 둑과 댐 중에, 실종되기 더 좋은 곳은 어디인가? 둑의 안쪽, 둑의 바깥쪽에서, 댐의 안쪽, 댐의 바깥쪽에서 사라진 것들. 흉악범의 얼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던 날 저녁에 나는 밥에 물을 말아 먹고 있었다. 흉악범의 얼굴은 브라운관 가득히 또는 브라운관 구석에 배치되었다. 흉악범의 얼굴을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 우리 사회에 공포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일까요? 우리는 조금 더 안전해진 것인가요? 뉴스 진행자가 패널로 초대된 범죄심리학 박사에게 질문했다. 안전하려면 얼마만큼은 감수해야겠죠. 박사라는 사람의 대답이었다. 무얼 감수해야 할까요? 그게 무엇이든, 공포이건, 불안이건,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모두에게 안전은 공짜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이상한 것은 웃음소리였을까. 웃는 입 모양이었을까. 브라운관 가득히 혹은 구석에 배치되는 범죄심리학자의 얼굴을 보며 저녁식사를 마쳤다. 나는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식사를. 맨밥과 맹물과 브라운관을. TV다이와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 어두운 창문, 창문에 드리운 나뭇가지 그림자, 흔들리는 것을 믿지 않기로 했고. 공포, 불안, 얼굴, 11월, 보도블록. 하루 종일 걸었던 길이 떠올랐다. 보도블록, 보도블록. 나는 리듬을 만들지 못했다. 2 내가

  • 김엄지
  • 2019-05-02

문장웹진 소설

예지4

예지4 김엄지 배경 비가 내리는 날에도 먼지가 자욱하다. 더. 공중습도를 높여야 한다. 몇 가지 규칙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변명이다. 얼굴에 변명을 써 붙이고 걷는다. 지하철이 너무 빠르다. 지하철이 너무 빠른 것은 문제될 일이 아니다. 아니다. 문제다. 강은 저기 멈춰있다. 엘리베이터는 매일 수상하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의자에 앉는다. 바닥을 쓰는 사람이 정해져있지 않다. 감정도 감상도 없다. 많이 본 장면이다. 알고 있는 대사이고, 익숙한 목소리이다. 너는 뭐가 그리 늘 불만이야. 상사는 c를 향해 소리친다. 그리고 혀를 찬다. c는 대답하지 않는다. 인상 펴. 오천원 줄게. 인상 펴봐. 상사는 c의 얼굴 앞에 오천원권 지폐를 흔든다. 정말 줄까? 저 오천원을? 한번도 상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오천원을 준 적이 없다. c는 고개를 숙이고 서 있을 뿐이다. 관둬라. 관둬. 상사는 자기 바지 주머니에 오천원 지폐를 다시 구겨 넣는다. 상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a는 휴가를 떠났고, b는 외근을 나갔다. 사무실에는 상사와 c, 내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다. 이 사무실의 정체는 무엇인가. 야. 몽키. 이번엔 상사가 나에게 소리친다. 네 문제는 성의가 없다는 것. 진심이 아니라는 것. 상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 한다. 평소에 독서를 좀해라. 다독! 상사는 내 책상 앞에 서있다. 나는 고개 들지 않는다. 생각을 하고 살아! 다상량! 다상량! 상사는 내 정수리를 보고 소리친다. 생각을 해보자. 이제 나는 생각을 시작할 것이다. 생각에 대한 생각. 아마 c가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c는 안타까운 마음일 수도 있다. 허밍 어디선가 은은한 콧소리가 들린다. 설마 c가 흥얼거리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속으로 흥얼거리는 것인가. 인물 맹세와 선언 중에, 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는 무엇인가. c와 나는 대화를 시작한다. 맹세다. 선언이다. 몇 가지 근거가 오고가다가, 맹세고 선언이고 뭐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결론을 내린다. 거기 가는 게 아니었어. c는 불현듯 눈물을 흘린다. 곧 c의 얼굴이 눈물, 콧물, 침 범벅이 된다. 그러게. 거기 왜 갔어. 나는 c의 어깨를 주무른다. 몰라. c는 탁자에 엎드려 운다. 탁자 위에 모든 것이 나뒹굴고 있다. 조개껍데기와 삶은 새우대가리, 빈병들과 그것들의 뚜껑. 나무젓가락은 제각각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다. 탁자에 엎드린 c는 씩씩 숨을 몰아쉬고, 그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올라온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나는 c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흔드는 대로 c가 흔들린다. 사건 c는 지난 주말 섬에 다녀왔다. c는 이틀간 섬에 머물렀다. 이틀이나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고, c는 말했다. 섬에는 c와 헤어진 여자가 살고 있었다. c는 5개월 전에 그 여자와 헤어졌다. 그 여자는 두 달 전에 c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지난 주 금요일, c에게 연락을 했다. 문득 네가 걱정 됐어. 여자는 c에게 그렇게 말했다.

  • 김엄지
  • 2016-03-0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조이

    내가 '나'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 새롭고 좋다

    • 2025-06-09 23:09:12
    조이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