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 작성일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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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원에는 이름이 있다
조재윤
그녀는 공원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녀의 퇴근길이 비탈이 될 즈음, 공원은 나타난다. 사 차선 도로와 맞닿아 있는 공원은 아스팔트의 바깥이 아닌 일부처럼 보인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너비의 내부엔 몇 개의 운동기구와 나무 벤치밖에 없다. 옅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놓여 있는 나무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느 공원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흐느적거리며 산책하는 사람 또한 없다. 그녀는 자정에 가까운 퇴근길의 경로를 공원 입구로 바꾼 적이 없다. 공원 뒤편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단지 내에 이미 공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주민 또한 없다. 과자 부스러기를 뿌려 주는 주민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 또한 없다. 공원엔 나무도 없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참새 또한 없다. 그녀는 공원 앞에 놓여 있는 낡은 표지판을 들여다본다. 공원의 이름은, 무슨무슨 혹은 땡땡 공원이다. 무슨무슨 혹은 땡땡에 적혀 있던 글자는 칠이 벗겨져 알아볼 수 없다. 없는 게 너무 많은 공원은 이름 또한 없다.
그녀의 원룸 창문을 열면 또, 공원이 나타난다. 언덕 위 원룸에서 보는 공원은 더 작고 조악해서 뭉쳐 놓은 모래 더미 같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유추해 본다. 본래의 이름. 무슨무슨에 들어갔던 글자들. 하지만 머릿속엔 텅 빈 공원이나 길옆 공원 같은 공원의 민낯을 드러내는 이름만 떠오른다. 그녀는 공원의 이름을 아무것도 없는 공원으로 지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런 이름을 지어 주기엔 공원이 가엾게 느껴져 머릿속에서 지운다. 시간은 밤 열두 시를 향하고 있다. 그녀는 힘겹게 나무 벤치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락을 떠올린다. 락에게 공원의 이름짓기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락이 오는 시간은 아직 멀고 멀었다. 오후 한 시. 한낮의 해가 지구의 정수리에 오도카니 설 때, 락은 온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며.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따라 해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보다는 자전거의 경적 같다고 생각하지만 따르릉만큼 자신의 벨 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다고 수긍하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흥얼거린다. 전화를 받자 락이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그늘이 많은 날이야.
그녀도 인사한다.
안녕. 오늘은 햇볕이 따뜻한 날이야. 근데 따뜻하다는 말은 여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
락이 웃으며 말한다.
그늘이 필요한 날이었는데 딱 좋네. 서늘해.
그녀가 답한다.
바깥에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가 전깃줄에 줄지어 앉아 있으면 글씨 위를 까맣게 그은 밑줄 같아.
락이 잠시 뜸 들이다 말한다.
오늘 점심은 소고기뭇국이었어. 나는 무보다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길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아.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이어 말한다.
해가 따뜻할 땐 이불을 널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여름은 언제나 이불을 널어놓기가 좋은 것 같단 말이야. 문제는 비가 오는 날이 더 많다는 거지만.
락이 앓는 소리를 낸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네. 그녀가 나도 일하러 가기 싫다, 하고 답한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이어지다 그녀가 말한다.
아, 실수. 실수.
락이 하하하, 웃는다.
락과 그녀의 대화에는 두 가지 규칙이 있다. 첫 번째는 대화를 시작할 땐 서로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고 혼잣말을 하며 비켜 갈 것.
락과 처음 대화를 했을 때 그녀는 먼저 이름을 물었다. 자신의 이름은 락이라는 대답에 그녀는 다시 한번 본명이냐고 되물었다. 이번엔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이 없는 락을 향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이름. 사는 곳. 나이. 하는 일. 음성채팅어플은 어떻게 알게 된 거냐 같은 것들. 락은 일관되게 침묵하다가 그녀의 말이 끊기자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온라인에서 뭘 그런 걸 물어. 우리는 지금 당장 인터넷이 끊기면 서로의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랑 같아. 그런 관계야. 방 제목 못 봤어?
서로를 빗겨가는 방.
빗겨간다. 그녀는 빗겨간다를 빗겨준다로 잘못 읽었다. 서로를 빗겨준다니. 서로의 머리를 빗겨주듯 대화를 하는 방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그녀는 조금 민망해졌다. 당황하며 방 나가기 버튼을 찾다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음성채팅어플은 처음이라. 그녀가 사과하자 락이 괜찮다고 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나가기 버튼을 찾지 못했다. 락이 서로를 빗겨가는 방의 규칙을 읊었다. 첫 번째 규칙을 다 듣고 나서야 그녀는 나가기 버튼 찾기를 포기했다.
두 번째는 절대로, 이름을 묻지 않기.
그녀가 알겠다고 답했다. 락은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물었다. 그녀가 본명을 말하려는데 락이 끼어들었다. 본명 금지. 그녀는 락과 비슷한 이름을 고민했다. 락. 돌. 락앤롤. 돌덩어리. 돌대가리. 그러다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내 이름은 달걀이에요.
그녀가 생각해 낸 건 달걀로 바위치기였다. 달걀로 락치기. 락이 그럼 이름은 에그, 하고 말했다. 그렇게 그녀는 에그가 되었다. 에그로 락을 비껴치기. 에그가 된 그녀가 처음 꺼낸 말은 이랬다.
방 제목 틀렸어요. 빗겨가는, 이 아니고 비켜가는, 이 맞아요.
락이 답한다.
첫 대화부터 너무 의미 있는 말인데.
그녀의 출근은 오후 네 시다. 그녀는 락과 대화를 끝낸 뒤 공원을 지나 지하 노래방으로 간다. 그녀는 코인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오후 네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지하 노래방에서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카운터에 앉아 손님이 들어 오면 고개를 꾸벅하고 몇 번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라고 한 뒤 혹여나 금지 행동(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애정 행각을 하거나)을 하지 않나 눈여겨본다. 손님이 나가면 방을 청소한다. 마이크와 의자를 가지런히 정리한다.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장 힘들어하는 건 누군가의 노래를 가장한 비명을 듣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카운터에 앉아 있는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비명을 지른다는 점을 가장 좋아했다. 손님들은 마이크에 소리를 내뱉는 데 관심이 있을 뿐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명찰에 적힌 이름도 얼굴도 바라보지 않는다. 안내된 방으로 들어가 마이크를 붙잡을 뿐이다. 사람들은 노래를 틀고 마이크에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른다. 으아아, 하고. 누군가는 울부짖는다. 싱긋 웃으며 들어온 뒤 발랄한 음악을 틀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운다. 으어어, 하고. 그녀는 그들이 나가고 나면 침과 눈물, 콧물로 축축해진 마이크를 씻는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노래방 반주를 틀고 비명과 울음을 토해 내기 위해 지하 노래방을 찾아온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노래의 음률을 따라간다. 울음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간드러졌다를 반복한다. 울음과 음률은 하나의 음이 된다. 그녀는 가끔 노래방 기계와 손님 중 누가 울고 있는 건지 분간하지 못한다. 그들의 몸 안에 축적된 울음을 듣는 관객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울음과 비명을 들려주기 위해 마이크에 대고 입술을 연다. 그녀는 그들의 관객이 아니다. 그녀는 음료가 나오는, 혹은 지폐를 바꿔 주는 자판기 정도의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그녀는 손님이 나갈 때면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와줘서가 아니라 눈길을 주지 않아서. 그녀는 마이크를 씻으면서 락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소고기뭇국은 무가 더 많아서 뭇국. 무의 함유량이 높으니 당연하게 이름은 뭇국이 된다는 말. 소고기가 많으면 소고깃국이 되겠지.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어쩌면 명찰에 적힌 이름이 아니라 최민지로 기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최민지로 아는 사람의 함유량이 더 높을 테니까. 축축해진 마이크는 여러 번 세척해도 큼큼한 냄새가 난다. 그녀는 마이크의 둥그스름한 머리에 세척제를 쭉, 짠다.
그녀와 락은 서로의 이름을 묻지는 않지만 이름 지어주기를 자주 한다. 서로의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예를 들면 락이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 말하고 그녀가 내일 자를 발톱과 손톱에 관해서 얘기하는 대화,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이름 지을 것들을 찾는다. 두 사람의 이름 짓기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내가 사는 곳엔 돌이 많아. 돌들이 아주 많아서, 여기 사는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락이야. 그러니까 나도 락이지.
그녀도 말한다.
내가 사는 곳도 달걀밖에 없어. 달걀이 많은 만큼 닭도 많지만 달걀이 닭보다 먼저니까 난 에그야.
락이 말한다.
내 방은 동그랗게 생겼어. 각진 부분이 없달까. 그래서 원룸이지.
그녀는 동그란 방을 상상하며 말한다.
내 책상은 알루미늄이야. 그래서 캔 뚜껑이라고 불러.
락이 그녀의 방 이름을 지어 주겠다고 말한다.
너는 에그니까 방은 닭장이라고 하자.
그녀가 닭장은 닭인 것 같잖아, 신선칸이라고 해줘, 답한다.
락이 수긍하듯 오, 한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아.
그녀가 묻는다. 그럼 뭐라고 불러.
아주 길게 침묵이 이어진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말했잖아. 락. 돌대가리들.
그녀가 그럼 나도 돌대가리네? 한다.
락이 물론이지, 답한다.
그녀가 체념하듯 답한다.
돌대가리 에그네.
그녀에게 최민지를 알려 준 건 같은 과를 다녔던 대학 동기였다. 동기는 어딘가 신난 목소리로 이거 너 아니야? 라는 물음과 함께 사진을 전송했다. 사진 속엔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캐릭터 위에 말풍선도 있었다. 말풍선 속에 네가 불쌍하니까 놀아 줬지 시발, 같은 대사도 적혀 있었다. 그녀는 동기에게 이건 내가 아니라는 부정보다 이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동기는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여전히 신난 목소리로 답했다.
이거 요즘 제일 핫한 웹툰이잖아. 너 몰라?
그녀는 몇 년 전 대학 동기에게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가 여전히 생생하다. 그날의 온도, 공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던 느낌까지도. 가끔 생생한 꿈으로 나타날 때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오늘의 꿈자리다. 대학 동기들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너랑 정말 똑 닮은 캐릭터다. 만화 캐릭터가 아니라 그냥 너인데? 같은 칭찬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는 말을 하며. 그녀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자각한다. 이런 걸 자각몽이라고 하는 건가, 하며 손가락을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각몽이 아니라 그냥 가위에 눌렸군, 생각한다. 동기들은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손을 붙잡고 위로인지 비아냥인지 의심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낸다. 얼굴에 침이 튀기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동기들 뒤로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는 락을 발견한다. 그녀는 락의 나이, 이목구비, 걸음걸이를 모르지만 걸어오고 있는 게 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가능할 수 있겠다고,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어느새 도착한 락이 동기들의 귓등에 대고 말한다.
따르릉 따르릉 빗겨나세요.
그녀가 눈을 뜬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가에 맺힌다. 마치 꿈에서 튀긴 침 같아서 식은땀을 흘렸다는 사실을 느리게 깨닫는다. 오후 한 시. 락의 전화다. 한낮의 해가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달랑거리는 시간. 핸드폰 불빛이 침 같은 땀에 반사되어 일그러진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고맙다고 말한다. 락은 매미는 찌르르하고 울까, 삐잉하고 울까, 말한다. 그녀가 이어서 말한다.
오늘은 악몽을 꿨어.
락도 이어서 말한다.
창문 앞에 오동나무가 있는데, 거기 매미가 정말 많이 붙어 있어. 오동나무의 몸 안에 수액이 남아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야. 이미 다 빨아 먹히고 죽은 채 서 있는 거라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도 들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저 나무에게 이름을 지어 줬다는 거야. 나뭇잎이 덥수룩하게 자라서 더벅이라고. 근데 이미 죽어 있었던 거라면, 나는 죽은 나무에게 이름을 지어 준 거잖아. 죽고 나서야 이름을 얻는다는 건 조금 이상해.
그녀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꿈이 꿈이라는 걸 아는데 움직이지 못했어. 이러면 자각몽이 아니라 가위겠지. 락이 가위, 하고 답하다 멈춘다. 그녀는 비켜가지 못한 락의 실수를 눈감아 준다.
그때 네가 나타났어. 몸이 움직이지 않는 악몽 사이에서.
락이 말한다.
매미에게도 이름을 지어 주려고 했다가 그만두었어. 더벅이를 죽인 매미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 매미가 무언가를 죽인 존재가 될 것만 같았어. 매미는 매미니까 나무를 죽인 게 괜찮아. 자연의 섭리라는 방패 뒤에 숨으면 되니까. 하지만 매미가 이름을 가지게 된다면 그땐 정말 더벅이를 죽인 존재가 되어 버리는 거잖아.
그녀는 휴지로 땀을 닦는다. 그녀는 꿈에서 두 발자국 멀어지고 나서야 꽤나 길고 깊은 악몽이었구나, 되뇐다.
네가 먼 곳부터 천천히 걸어오더니 말했어. 비켜달래. 악몽들에게.
락이 답한다.
우리는 기어코 빗겨가는 사람들이니까.
이번엔 넘어가지 않은 그녀가 하하하, 웃는다.
락, 너, 실수.
저녁 시간이 되면 지하 노래방에 술에 취한 사람들이 온다. 그들은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비척비척 방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서 노래인지 괴성인지 모를 비명을 질러 댄다. 가끔은 마이크로 벽을 쾅쾅 치는 취객도 있다. 더러 혹은 자주. 마이크로 벽을 쾅쾅 치는 소리가 카운터까지 들려온다. 격하게 혹은 강하게. 그녀는 취객을 말리지 못한다. 해코지당할까 봐, 생각하다가 난 자판기일 뿐인 걸 하고 카운터에 몸을 웅크린다. 쾅쾅 치는 게 벽이 아닌 자신이 될까 봐, 숨을 죽인다. 자판기라고 쾅쾅 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마이크로 벽을 치던 취객이 마이크를 거꾸로 잡고 노래를 부른다. 날 떠나지 마요, 날 버리지 마요, 한다. 그녀는 취객에 관한 이야기를 락에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락이 없을 땐 락에게 해줄 이야기를 기억해 둔다. 그녀는 오후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의 전화가 끝난 뒤 락은 무엇을 할까 생각한다. 하지만 상상 속엔 동그란 원룸을 부유하는 돌밖에 없다. 돌이 많은 곳에 사는 락은 전화가 끊기면 그녀의 삶에 조금도 함유되지 못한다. 그녀는 가끔 그게 슬프다. 그래서 음률인지, 울음인지 모를 취객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날 떠나지 마요, 날 버리지 마요. 취객이 문을 쾅 열고 나온다. 그녀는 취객이 나가는 동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입을 다문 채 말한다. 금스흠므드. 나가 주셔서 정말로요. 마지막 말은, 당연하게도 묵음이다.
락이 말한다.
나는 사실 한국에 살지 않아.
그녀는 첫 번째 규칙에 맞춰서 대화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돌이 아주 많은 외국이 어딘지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강아지는 멍멍, 고양이는 야옹야옹 울지. 그리고 취객은 쾅쾅하고 울어.
락이 이어서 말한다.
외국이라고 생각했지? 외국도 아니야. 한국도 외국도 아니라고 했으니 지금은‧‧‧‧‧‧ 내가 외계인이라고 말할 거라고 예상할 거야. 하지만 그것도 아니야. 난 외계인도 아니야. 우주에서 온다는 건 너무 진부해.
그녀도 이어서 말한다.
취객이 쾅쾅 울어서 나도 쾅쾅 울었어. 가끔은 왜 마이크에 대고 비명을 질러 대고 마이크를 벽에 치는지 궁금해. 그들은 왜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그들은 뭐가 그렇게 슬프고 화가 날까. 왜 자기 울음소리를 크게 듣고 싶은 거야.
락이 답한다.
쾅쾅 울다 보면 몸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기 마련이야.
락이 그녀의 말에 동조하자 그녀도 락의 말에 답한다.
그럼 넌 한국도 외국도 우주도 아니면 어디 사는데.
락이 웃으며 말한다.
에그. 사는 곳을 묻는 건 실례야.
락이 헛기침을 한다. 수화기 너머로 잡음이 섞여 들려온다.
나는 돌이 많은 곳에 산다고 했잖아. 돌들만 가득한 곳에서 살고 있어.
그녀는 수많은 돌들 사이에 서 있는 락을 상상한다. 락은 돌보다 더 흐릿한 형상으로 서 있다.
돌들하고만 살면 외롭겠는걸.
먼 곳에서 말하는지, 락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돌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잖아. 락인지 아닌지 구분할 눈도 없고 돌이라고 하면 돌. 락이라고하면 락. 그게 끝이야. 그니까 외로워도 돌들이랑 사는 건 의외로 나쁘지 않아.
그녀는 동기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웹툰을 찾아봤다. 최민지는 웹툰의 첫 화부터 등장하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최민지를 보는 순간 예전 길거리에서 받아 들었던 캐리커처를 떠올렸다. 그녀는 캐리커처를 그려 준 화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특징을 정말 잘 살려서 그려 주셨어요. 그리고 최민지도 그녀의 특징을 잘 살린 캐릭터였다. 그녀의 이목구비, 점의 위치, 머리 스타일, 말투 같은 것이 만화 속 캐릭터로 구현되어 있었다. 다만 그녀가 하지 않은 행동들도 하고 있었다. 최민지는 과거 그녀와 같은 수업을 들었고 비슷한 친구들과 지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뒷소문 또는 이면처럼 몰래 주인공을 괴롭혔다. 최민지는 겉으론 소심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뒤에서는 주인공을 험담하거나 룸메이트의 물건을 훔치는 어디서 보고 듣고 겪어 봤을 것 같은 악인의 행동을 답습했다. 주인공만이 최민지의 악한 면을 알고 있었다. 웹툰은 주인공을 통해 그런 최민지를 고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지만 가명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악한 마음을 갖고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해 봤지만 작가는 각색된 내용 속에 교묘히 숨어 있었다. 그녀는 웹툰이 동기의 말마따나 핫해진 이후 여러 사람에게 연락을 받았다. 작가가 누구인 것 같냐는 질문부터 너랑 진짜 닮긴 했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공감까지. 어느 날엔 농담 섞인 문자도 받았다. 잘 보고 있어. 민지야ㅋㅋㅋㅋㅋ.
그녀는 어떻게 하면 최민지와 멀어질지를 생각했다. 제일 먼저 핸드폰 번호를 바꾸었고 SNS 계정들을 삭제했다. 연고가 없는 곳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최대한 최민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과 멀어지기로 했다.
그녀는 익숙지 않은 새 전화번호를 외우면서 물보라가 일지 않는 수면을 자주 생각했다. 수면 위로 조용히 증발하는 물의 입자를 상상했다. 증발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조용히 이루어졌다. 볼 수 없는 일이라서 그녀는 더 자주 고요한 수면을 떠올렸다.
단체로 들어온 중학생들이 여러 방에 흩어져 들어간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뒤섞이는 목소리를 듣는다. 학생들은 발라드를 부르다 포크송을 부르고, 신나는 댄스곡을 틀어 놓고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지른다. 그녀는 성대가 덜 여문 학생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공원을 떠올린다. 아무도 없는 공원. 없는 게 너무나 많은 공원.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공원에 학생들을 보내고 싶다. 비명을 지를 거라면 나무 벤치에 앉아 부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공원은 비명을 들을 사람 또한 없어서 너희의 비명을 받아 줄 수 있는 곳이라고 전해 주고 싶다. 그녀는 여전히 공원의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무슨무슨 공원, 하다가 무슨무슨 공원에 돌이 많으면 락 공원이라고 지을 텐데 생각한다. 공원 곳곳에 닭이 돌아다니고 달걀이 굴러다니면 에그 공원. 하지만 공원엔 돌도, 달걀도 없다. 노란 흙과 나무 벤치, 녹슨 운동기구뿐이다. 노란 흙과 나무 벤치, 녹슨 운동기구 공원이라고 짓기에는 성의가 없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공원의 이름을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공원을 부를 때 그 공원이라고 부른다. 칠이 벗겨진 표지판처럼 이름을 감추는 그, 라는 이름. 그녀는 이름을 감추기에 그 라는 말보다 완벽한 그림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 그 사람처럼. 공원에게 적합한 이름이란 무엇인지 그녀는 다른 공원들을 떠올려본다. 가장 흔한 건 지역 이름이다. 어쩌면 그녀가 사는 동네 이름이 공원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역과 공원을 붙여 이름을 지어 본다. 하지만 어딘가 입에 붙지 않는다. 지역에 있기 때문에 이름마저 지역이 되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는 돌이 많은 곳에 살아서 이름이 락인 락이 들었다면 조금은 서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락에게도 본래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표지판 속 지워진 이름처럼. 그럼에도 락은 락으로 불리길 원한다. 그녀도 이제는 본래의 이름보다 에그로 불리길 원한다. 그렇다면 공원은 무엇으로 불리길 원할까. 그녀는 공원에게 음성채팅어플을 알려 주고 싶다. 함께 서로를 빗겨가는 방으로 들어간 공원과 그녀가 대화를 나눈다. 서로가 서로를 비켜가며 목소리로만 서로를 잇는다. 예를 들면 공원이 오늘은 나무 벤치 속에서 애벌레가 태어났어, 라고 말하면 그녀는 커피가 까만색인 이유는 어두운 밤을 담았기 때문 아닐까 같은 대화를 한다. 그리고 어느새 둘은 하하하, 웃는다.
동전이 다 떨어진 중학생들이 방에서 우르르 빠져나온다. 아이들은 나가면서 카운터를 향해 습관적으로 인사를 한다. 그녀도 카운터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그때 마지막으로 나가던 학생이 지하 노래방을 떠나다가 멈춰 선다. 감사합니다, 에서 감사까지 말한 그녀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든다. 문 앞에 선 학생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학생의 시선이 그녀를 훑는다. 이마. 눈. 코. 입. 그리고 명찰에 적힌 이름 순서로. 수 초간 같은 자세로 서 있던 학생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아, 그.
아, 그라니. 그녀는 찰나의 순간 아, 그 뒤에 나올 말을 상상한다. 학생이 지하 계단을 올라가며 친구에게 무어라 수군거린다.
야. 알바 얼굴 봤어?
그녀는 카운터에 서서 멀어지는 학생들의 발소리와 말소리를 듣는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만큼은 노래방에서 비명을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없다. 노래방은 그녀가 삼켜 온 묵음들처럼 조용하다.
락이 말한다.
사실 난 존재하지 않아.
그녀도 말한다.
그래?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존재하지 않아. 네가 통화하고 있는 존재는 아직 고도로 발전하지는 못한 AI야. 덜 진화된 AI가 너에게 맞춰서 대화를 해 주고 있는 것뿐이야.
락이 답한다.
그래? 역시 세상은 빨라. 이렇게 나랑 맞춰서 대화할 수 있는 기계도 만들고. 학습하는 건가? 나를 학습하고 나를 맞춰 주고 그럼 수화기 너머에는 아무도 없는 거네.
그녀가 기계음을 따라하며 그렇습니다 주인님, 답한다.
락이 침을 두 번 삼키고 말한다.
나도 이건 정말 비밀인데. 네가 말해 주니 나도 말해 줄게.
그녀는 락이 보이지 않음에도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락이 말을 잇는다. 마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이.
사실 난 존재하지 않아. 망상이라고 해야 하나.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고 생각한 네가 만들어 낸 일종의 망상. 나는 너고 너는 나인 거야. 사실 달걀과 돌이 같은 거지. 넌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았고 누구의 목소리도 수화기에서 흘러나오지 않아. 흘러나온다고 착각하는 거지. 알겠어? 그러니까 네가 망상에서 깨면 난 언제든 아무런 복선도 없이 사라지는 거야.
말을 끝낸 락이 웃는다.
그럴듯하지?
그녀는 답하지 못한다. 망상이든 아니든 인터넷에서 알게 된 관계는 복선 하나 없는 이야기처럼 끝날 수 있다는 걸 알아서 그녀는 새삼 락과의 관계를 상기한다. 전류가 끊기는 순간 끝나 버리는 관계는 망상과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말함과 답함의 연속 안에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입을 다문다. 묵음이 아닌, 이면에 아무런 말을 숨기지 않은 완전한 침묵.
밤 열한 시. 그녀는 취객들의 노래를 듣다가 퇴근한다. 어떤 노래도 흘러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비탈을 오른다. 비탈을 오르는 그녀의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이어폰 안쪽에선 그녀의 들뜬 숨소리만 들려온다. 그녀가 잠시 서서 숨을 고를 때면 꼭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은 그녀가 숨을 고르는 걸 찬찬히 바라본다. 그녀도 고개를 돌려 공원을 마주본다. 공원은 언제나 입구를 열어 두고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는 공원에 들어가 볼까,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 입구에서 멈춘다. 옅은 바람이 분다. 공원의 녹슨 운동기구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운다. 운동기구는 바람의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반대편으로 돌기를 반복한다. 그녀도 따라 울어본다. 끼익끼익 하고.
그녀는 락이 보고 싶다.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 전화를 걸고 싶다. 갑자기 전화를 건다면 락은 오후 한 시가 아닌걸,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전화를 건 이유를 지어 내서 말할 것이다. 마이크에 대고 비명을 지르는 취하지 않은 사람과 취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정작 비명을 지르고 싶은 나는 소리를 지르지 못해서. 오늘 나의 이름이 ‘에그’가 아니라 ‘아,그’가 되어 버려서. 사실은 공원의 이름을 아직도 짓지 못해서. 이름을 너라면 지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면 너와 함께 공원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아니 그게 아니고 사실 내 이름은 에그도 아,그도 최민지도 아니라서. 그리고 나도 너처럼 돌들만 사는 곳에서 살고 싶어서. 그녀는 전화를 걸 여러 이유를 떠올리다 그만둔다. 어떤 이유를 붙여도 락은 없다. 그녀는 한낮이 아닌 어두운 밤과 푸르스름한 새벽 또는 한기가 가시지 않은 아침 언저리에도 락이 존재하길 바랐다. 락이 자신의 망상이라면 원할 때 언제든 나타나 주길 바랐다. 함께 공원으로 들어가길 바랐다. 그리고 애벌레들이 파먹고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아 가로등 불빛을 정수리에 달고 서로를 빗겨주는 대화를 하길 바랐다.
그녀는 공원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비탈을 걷는다. 바람은 공원 앞 언저리에 내버려둔다. 그녀의 가쁜 숨이 함유된 바람에 운동기구가 또 운다. 끼익끼익 하고.
락이 말한다.
세상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대.
락은 좀 전까지 우주의 먼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우주의 먼지란 바로 우리들이라는 이야기. 우주의 먼지에 붙여 준 이름이 지구라는 어딘가 수긍이 가는 이야기(지구가 우주의 먼지라고 말하는 의도가 궁금해. 우리가 가진 고민은 먼지의 먼지가 갖는 고민이라 하찮으니 진지해지지 말란 말일까. 위로인지 험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야) 그녀가 답한다.
사람은 결국 죽으니까 사라지는 게 맞지.
락이 말한다.
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지.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잖아. 살아 있는데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들 왜 사라질까 궁금해하더라. 근데 나는 그들이 왜 사라질까 말고 어떻게 사라질까가 궁금해.
그녀는 음, 핸드폰 번호를 바꾸거나 사는 지역을 옮기거나 성형을 하거나 그러지 않을까, 답한다.
락은 잠시 고민을 하는지 말이 없다. 수화기 너머에서 매미가 운다. 찌르르인지, 삐잉인지 알 수 없는 소리로. 오동나무를 빨아먹은 매미들의 울음이 세차다. 락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야. 그냥 이름만 바꾸면 돼.
그녀가 항변하듯 답한다.
이름을 바꾸더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알 수 있잖아.
아니. 이름을 바꾸면 내 이름은 무슨무슨이 아니고 땡땡이야 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야. 내 이름은 그게 아닌데 왜 그 이름으로 부르냐고 소리 지르면 상대방이 어쩔 거야?
어느새 설득당한 그녀가 그러네, 답한다. 수화기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하하하. 그렇지? 상대방에게 너는 이름밖에 없어. 얼굴이고 성격이고 의미가 없다니까. 내 이름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야. 그러니까 증발하듯 사라지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건 이름을 바꾸는 거야. 아니면.
그녀가 물컵을 잡으려고 손을 뻗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락이 침을 삼킨다. 꿀꺽.
진짜 돌이 되거나 달걀이 되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락이 바로 옆에서 침을 삼키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고, 생각한다. 돌과 달걀. 그녀는 이목구비가 없는 돌과 달걀이 핸드폰을 들고 대화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거울 너머에는 그녀가 아닌 하얗고 동그란 달걀이 전화를 받고 있다. 어, 진짜 에그네.
내 이름은 에그고 넌 락이니까 우린 이미 세상에서 증발하듯 사라지는데 성공했네.
락이 말한다. 하지만.
네 이름은 에그가 아니잖아. 물론 아,그도 아니지. 그리고 당연하게, 최민지도 아니야.
그녀가 어, 하고 소리를 내지만 달걀이 된 그녀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입을 움직이려다 그만두고 껍질로 수화기를 두드린다. 네가 어떻게 그 이름들을 알고 있느냐고 묻듯이. 달걀 껍질이 톡. 톡. 톡. 톡.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자 락이 말을 잇는다.
내가 왜 모를 거라고 생각해. 에그. 근데 네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아,그든. 최민지든 넌 나한테는 에그잖아. 그럼 됐어.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 에그.
오후 세 시. 여느 때와 달리 늦잠을 잔 그녀가 눈을 뜬다. 따르릉따르릉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든다. 핸드폰의 화면은 까맣다. 까만 화면에 그녀의 부스스한 얼굴이 비친다. 핸드폰은 조용하다. 그럼에도 따르릉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온다. 그녀는 소리가 핸드폰이 아니라 창밖에서 들려오고 있음을 깨닫고 창문을 연다. 자전거 한 대가 비탈을 내려가고 있다. 따르릉 따르릉 경적을 울리며. 그녀는 어딘가 꿈같은 상황이야, 생각하며 엄지손가락을 움직인다. 손가락은 왔다 갔다 잘 움직였다. 그녀는 오늘 왜 락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은 것인지 확인하려 핸드폰을 켠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지만 락의 번호가 아니었다. 그녀는 부재중보다 락이 왜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는지가 궁금했다. 락이 오후 한 시에 전화를 걸어오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녀는 부재중 번호 여덟 자리를 읽는다. 모르는 번호다. 그녀는 음성채팅어플에 들어가 락이 만들어 놓은 방을 확인한다. 서로를 빗겨가는 방. 언제나 만들어져 있던 방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락이 있던 세상이 꿈인지, 락이 없는 세상이 꿈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차라리 AI나 외계인이 낫지. 망상이나 꿈은 너무 진부한데. 그녀는 열어뒀던 창문을 닫는다. 자전거가 비탈을 떠났는지 따르릉 소리는 이제 들려오지 않았다.
노래방에 손님이 없다. 오늘은 사람들이 울고 싶지 않고 비명을 지르고 싶지 않은 날이다. 모두가 울고 싶은 날은 자주 있지만 모두 울지 않는 날은 드물다. 오늘은 모두가 노래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웃으며 흥얼거리는 드문 날이다. 노래방엔 그녀만 있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린다. 날 버리지 마요. 날 울리지 마요. 가사가 이게 아니었던가. 아무렴 어차피 돌아오라는 말인걸. 그녀는 계속해서 울다 버려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는 취객이 노래를 부르던 방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취객이 부른 노래가 무엇인지 몰라 한참을 찾다가 마이크를 들고 무반주로 노래를 부른다. 날 버리지 마요. 날 울리지 마요. 그때 전화가 울린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그녀는 핸드폰에 뜬 여덟 자리 번호를 읽는다. 번호는 락이 아닌 오전에 걸려 왔던 부재중 전화다. 그녀는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다. 마침 두 명의 손님이 노래방에 들어온다. 그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빈방 아무 곳이나 들어가세요. 핸드폰을 귀에 대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다. 그녀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고민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말한다.
잘 지냈니.
그녀는 자신을 밝히지 않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바꾼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녀가 말이 없자 상대는 계속 홀로 말한다.
사과하고 싶어서 전화했어. 너 알고 있었지?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상대방은 그녀가 말이 없자 듣고 있니, 말한다. 이어서.
이제 최민지는 작품에 안 나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해 낸다. 기억의 파편 속에서 길어 온 얼굴과 이름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떠오른다. 걱정 말라니. 대체 무엇을, 어떻게, 왜. 그녀는 최민지가 더 이상 안 나온다는 말이 웹툰을 그만 그린다는 것인지 웹툰에 최민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최민지의 죽음을, 최후를 상상한다. 죽어가는 최민지의 얼굴을 상상하자 걱정이 덜어지지 않고 더해진다. 핸드폰 너머의 주인공은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과하지 않는다. 그녀는 조용히 사과를 기다리다 그만둔다. 그리고 말한다. 이렇게.
갑자기 소고기뭇국이 먹고 싶어. 나는 국에 소고기가 더 많이 들어 있기를 바라지만 언제나 무가 더 많지. 그래서 소고기뭇국의 이름은 소고깃국이 아니라 뭇국이지.
핸드폰 너머에서 답한다.
뭐라고?
그녀는 락이 알려 준 방법을 떠올린다. 사라지는 방법. 증발하는 방법. 당신, 혹시 누구누구 아니세요? 라고 물을 때 해야 할 대답. 그리고.
그녀는 동그란 달걀 같은 마이크를 집어삼킬 듯, 비명을 지른다.
그녀는 다시금 공원 앞에 서 있다. 여전히 공원의 이름은 짓지 못한 채. 그리고 천천히 공원 입구에 발을 들인다. 너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들어가지 않겠다는 기억나지 않을 다짐은 입구 앞에 가지런히 벗어 둔 채. 끼익끼익 울고 있는 녹슨 운동기구를 지나 가로등 아래 나무 벤치에 앉는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정수리를 비춘다. 벌레들이 불빛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밤 열두 시. 공원은 무섭도록 조용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한 공원이 무섭지 않다. 이곳엔 공원과 그녀만이 존재한다. 그녀는 애벌레가 속을 파먹고 있는 나무 벤치에 손을 댄다. 매끈하고 부드럽다. 락은 결국 오늘 오지 않았다. 내일 오후 한 시에는 나타날지도 모른다. 혹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밤 열두 시이기 때문에, 락이 함유되지 않은 밤 열두 시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그녀는 두 가지 경우의 수에 같은 무게의 감정을 싣는다. 대신 그녀는 자정에 처음 만난 공원에게 이름을 묻는다.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긴 시간 고민했다는 사실은 숨긴 채.
목을 가다듬은 공원이 말한다.
절대로, 이름을 묻지 않기.
그녀가 하하하, 웃는다. 마이크에 대고 웃듯 입을 벌리고서. 아, 실수, 말하며. 그녀는 칠이 벗겨진 무슨무슨 혹은 땡땡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들을 적는다. 그리고.
공원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건 너무 잔인한 행위라는 사실에 수긍한 채. 또, 그리고.
그녀는 락이 만든 규칙에서 빗겨가기로 했다. 우리는 기어코 빗겨가는 사람들이니까, 생각하며.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처음으로. 이렇게.
“내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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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정말 잘 읽었습니다. 좋은 작가님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건승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락은 어디에 사는지 누구일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