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은 구르지 않는 돌
- 작성일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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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은 구르지 않는 돌
함윤이
함윤이의 소설 「굴은 구르지 않는 돌」을 위한 사운드트랙 ⓒ 이해인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영어 속담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는다)” - 두보의 시 「팔전도」 중
그 동굴에 관한 말 중 열에 여덟은 거짓이다. 내가 사실을 알려 주겠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 모든 말이 거짓이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을 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걸 얘기하려 한다.
동굴은 2019년 7월 말, 뼈까지 침식되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장차 미술관이 될 부지를 측량하던 일꾼들이 발견한 것이다. 미술관을 ㅂ기업의 새로운 문화적 간판으로 삼고자 한 용 회장은 동굴의 소식을 듣고 긴긴 고민에 잠겼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을 나는 어쨌거나 지지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사들인 광막한 땅에 난 균열의 시작점처럼 보이던 공동(空洞)을 활용키로 마음먹었다. 곧 동굴을 개조한 미술관 ‘별관’을 만든다는 소식이 ㅂ기업 산하 문화재단에 퍼졌다. 당시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느낀 암담함이야 추측할 수 있을 뿐, 여기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별관 설립을 곁들인 공사가 시작된 2020년에는 모두가 알 전염병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많은 사람이 열을 앓았고, 연달아 기침했으며, 멍한 얼굴로 집안에 갇혀 있었다. 한번 몸에 깃든 병증은 다른 몸들로 옮겨 다녔다. 죄지은 마음이 곳곳에 퍼졌다. 용 회장은 늘그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시기를 주름잡을 지렛대는 개인의 의지보다는 여러 겹의 우연에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의 교차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외려 지금이야말로 별관의 공사를 진척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어차피 동굴을 다듬는 작업자들은 모두 두터운 마스크를 써야 했다. 산업용 방진 마스크가 코비드 바이러스를 막기에 적절치 않다는 연구 결과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여름의 굴속에서 마스크를 쓴 인부들이 호흡 곤란을 호소해도 용 회장은 그저 밀어붙였다. 시대의 흐름이야 어쩔 수 없어도 공사장 인부들은 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인부들은 매일 땀 흘리고 번갈아 기침하며 동굴을 파고 들어갔다. 굴은 외부의 빛과 습기 속으로 서서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4년 후에야 이 흐름에 끼어들었다. 전염병이 지나가고, 지나갔다, 는 표현과 상관없이 외상과 내상을 받은 이들이 남고, 무수한 마스크가 쓰레기 더미가 되어 우리가 모를 곳에 묻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해의 예술지원사업에 모두 떨어졌다. 국가나 서울시, 민간이 운영하는 지원사업의 선정자 목록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각종 웹사이트를 들락거렸다. 뒤늦게라도 창작자를 모집하거나 후원한다는 재단 또는 기관의 공고를, 아니면 카메라를 다룰 줄만 알아도 곧장 일자리를 주겠다는 채용 안내를 찾아다녔다. 물론 내가 찾는 내용은 환상 속 공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갑작스레 나타난, 동굴에 관한 공고는 한층 더 마술 같은 기회로 보였다. 실제로 공고에는 ‘환상’이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들어가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자비로운 기회를 베푸는지 잘 안다는 투였다. 나는 시중의 두 배는 되는 지원금 아래 적힌 신청 요건, 즉 만 34세 이하의 청년 작가를 모집한다는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나는 곧장 기획서 양식을 내려받았다. 점차 늘어나는 다운로드 횟수를 못 본 체하며 기획서의 항목을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 마감일에 온몸으로 땀을 흘리며 서류를 냈다.
그 결과, 올해 7월 나는 명진과 후지이 유코를 동굴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동굴은 전라북도에서도 북편에, 그중에도 분지 안쪽에 있어 대중교통으로는 갈 수 없었다. 대신 재단 측 사람이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
이른 아침의 터미널은 예상보다 붐볐다. 여름휴가를 틈타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인파 속에서도 나는 한눈에 명진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진이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명진은 나보다 열 살 내지 그 이상은 더 많아 보였다. 키가 작았으나 너른 어깨나 굵직한 목 덕에 한층 큰 체구를 지닌 듯 느껴졌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 뒤 명함을 건넸다. 구겨진 명함 복판에 나를 선발한 문화재단의 이름 그리고 ‘협력 및 자문’이라는 호칭이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인지 묻기 전에 명진이 먼저 말했다.
“제가 여기 출신이어서요. 동굴 주변 환경부터 해서 갖가지 자문을 드리고 있어요. 오늘도 가이드로 왔습니다.”
“동굴 가이드요?”
“그런 셈이죠. 저기 타세요!”
그녀가 터미널 문 바깥, 하얗게 번뜩이는 카니발 한 대를 가리켰다. 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명진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일본 작가님은 오토바이로 따로 오신다네요.”
나는 그 작가가 누구인지 잘 알았다. 공고 합격자 명단이 뜬 이후, 내 옆에 나란히 적힌 후지이 유코의 이름을 몇 번이나 검색해 본 까닭이었다. 사진 속 그녀는 연신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굵은 눈썹을 찌푸리거나, 흑백으로 찍힌 입술을 비죽 내민 채였다. 사실 나는 한눈에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텅 빈 국도를 지나가며 명진은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주로 내가 기획한 작업에 관한 질문이었다. “저는 원래 예술에 아주 무지하거든요.” 명진이 말했다. 나는 잘난 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냥··· 다큐멘터리 같은 거 찍어요.”
“다큐멘터리 같은 거요?”
“아니, 그냥, 다큐멘터리 찍어요.”
“어떤 다큐멘터리인데요?”
차가 시내를 빠져나와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공사장을 둘러싼 높다란 외벽이 양쪽 창으로 펼쳐졌다. 벽에는 ㅂ기업과 산하 문화재단의 이름과 함께 미술관의 여러 건물 그리고 정원의 예측도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아직 지어지지 않은 건물들의 그림을 보면서 내가 어떤 다큐멘터리를 찍었고, 앞으로는 무엇을 찍을 예정인지 설명했다. 기획 서류에 적은 내용을 면접용 대답처럼 압축한 설명이었다.
기획서에 나는 이렇게 썼다. 저는 스스로 무너진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이 폐허로 몰락한 공간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뒤이어 대한민국에는 이러한 공간이 산재한다고 적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가 지금은 흉물로 변한 ‘근대’적 건물들, 인구 저하로 소멸 위기를 겪는 지방 시가지, 유적지 등의 ‘명소’가 자본 부족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서서히 허물어지는 모습 등··· 특히 흥미로운 건 이런 공간이 잊히며 차차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도 썼다. 실제로 지난 몇 해 내내, 나는 이런 장소들을 쥐 잡듯 찾아다녔다. 마땅한 곳이 없다면 밋밋한 공간에라도 여러 의미와 역사를 덧씌워 촬영했다. 마이크를 휘두르며 주변의 소리를 녹음하는 일에도 골몰했다.
‘자연적’ 폐허의 이미지를 그곳의 환경음과 함께 기록한다는 점에서, 내 작업을 사운드스케이프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나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아가 장소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럼으로써 장소와 개인의 관계를 고찰하며, 개개인의 서사가 공간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한다. 내가 취재했던 이들의 증언은 일종의 구술사이므로 동굴에서 선보일 작업 역시 사운드스케이프-구술사-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겠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듣기 매끄러운 각종 표현만 들입다 이어 붙였다고 욕할 수도 있겠으나, 기획서란 본래 이렇게 쓰는 법.
“이제 내릴게요.”
나도 모르는 새 설명에 몰입한 모양이었다. 명진이 말한 뒤에야 차가 멈췄음을 깨달았다. 차 문을 열자 아까 본 공사장 외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벽이 둘러싼 범위는 내 예상보다 더욱 넓었다. 여러 축구팀이 동시에 시합을 뛰어도 됨 직한 부지 곳곳에 노란 먼지를 뒤집어쓴 굴삭기와 트레일러 등의 건설 기계가 가득했다. 기계들 너머로 여러 겹의 소나무가 매달려 자라난 절벽이 보였다. 동굴은 바로 그 절벽에 있었다. 산이 한 걸음 물러서듯 움푹 팬 자리에 아가리를 쩍 벌린 모습을 하고.
“입구 공사는 얼마 전에 끝났어요.”
명진은 나를 동굴 옆의 조립식 건물로 데려갔다. 그 안에서 헬멧과 헤드램프, 고무장화 등을 들고 나왔다. 직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까지 내려와 한 잔을 건넸다. 내가 거절하자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셔야 해요. 동굴 안은 추워요. 몸을 데워 두세요.”
내가 차 문턱에 앉아 명진이 끓여 준, 이름 모를 곡물차를 후후 불어 마시고 있을 때 후지이 유코가 왔다.
후지이 유코는 이미 몇 차례 한국에서 전시를 열었다. 전시 서문에 적힌 그녀의 소개글은 대개 비슷했다. 후지이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키나와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뒤로는 도쿄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필름으로 10대와 20대를 보낸 도시 곳곳을 촬영했다. 신체 일부를 찍듯 도심의 골목, 대로, 노후한 건물과 새로 짓는 빌딩 그리고 그 안에 머무는 사람 들을 기록했다. 그녀가 참여한 전시를 다룬 기사에는 팔짱을 낀 후지이 유코와 그 뒤편에 걸린 각종 사진 작품이 실렸다. 그녀의 작품에는 오키나와, 오사카, 도쿄, 서울, 인천, 제주도 곳곳과 거기 머무는 여러 얼굴이 담겨 있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그녀는 나와 명진을 향해 교차로 몸을 숙였다. 오토바이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첫인상과는 상반되는, 느릿한 어투의 인사였다. 명진은 그의 양손을 붙들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작가님.”
“그냥 후지이라고 불러 주세요. 후지이 씨, 하고.”
“네, 후지이 씨. 제 이름은 명진입니다. 성은 명, 이름이 진.”
“네. 진 씨.”
뒤돌아선 후지이가 나를 마주 보았다. 흑백사진으로 보던 송충이 눈썹 아래, 움푹 들어간 눈이 나를 응시했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뻤다. 인상을 쓰고 있지 않아서인 듯했다. 단체전이나 프로젝트를 통해 인생의 반려를 만났다는 주변의 선배나 동료 얘기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명진이 조립식 건물에서 또다시 차를 끓여 왔다. 그녀가 말했다.
“뱃속을 따끈하게 만든 다음 동굴에 들어갈 겁니다. 겉옷도 챙기세요.”
찻잔을 모두 비우자 명진의 말대로 가슴과 뱃속에 후끈한 열기가 돌았다. 나는 물었다.
“혹시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죠?”
“그러기 전에 나올 거예요. 오래 안 있어요.”
헬멧을 쓰고 고무장화를 신는 내내, 나는 후지이 유코를 곁눈질했다. 그는 한국 남자와 만나 볼 생각이 있을까? 이미 만나는 남자가 있나? 어쩌다 한국에 오게 되었을까?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나? 전시 서문들에는 후지이 유코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카르마’가 ‘장소로서 체현되는 순간’에 흥미를 품고 있다는 애매모호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왜 한국에 왔는지, 오토바이는 누구 것이며 어디서부터 타고 왔는지, 우리 이렇게 함께 동굴에 나란히 작업을 걸 수 있다니 묘한 인연이라고 말하면 수작이라고 느낄지 등등. 몇 차례 눈을 마주치려 했으나 후지이는 동굴만 보고 있었다. 한 손은 어깨에 매단 카메라 가방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아직 해가 쨍쨍하던 오후, 우리 세 사람은 나란히 동굴로 들어갔다. 재단의 말대로라면 채 공사가 끝나지 않은 동굴의 모습을 먼저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지 고민하며, 각자의 사진과 영상을 전시할 공간을 살펴볼 계획이었다.
나는 배낭에서 보디캠과 고프로를 꺼냈다. 동굴에 들어가는 첫 순간을 미리 촬영할 생각이었다. 명진이 이 지역 출신이라는 소식이 나를 들뜨게 했다. 원주민과의 만남은 작업 곳곳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시간이나 여건상 제대로 된 촬영은 어려울지언정, 거친 감각으로라도 동굴에 들어서는 순간이나 명진과의 대화 들을 기록한다면···.
“혹시 두 분 모습이랑 목소리가 나와도 될까요?”
핸드마이크를 꺼내며 묻자 두 여자가 눈길을 주고받았다. 나는 조금 더 온순한 어조로 말했다. 작업물을 만들기 전 두 사람이 나오는 장면을 모두 미리 허락받을 테며, 원치 않는 부분은 전부 지우겠다고.
명진이 말했다.
“저는 상관없어요. 다 나와도. 영화 출연이라니, 좋죠 뭐.”
반면 후지이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말했다.
“얼굴 나오는 건 싫어요. 목소리는 몰라도, 얼굴은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미안합니다.”
후지이는 카메라 가방을 만지작대다가 말을 이었다. 사진작가로서 민망한 말이지만, 예전부터 누군가에게 이미지로 기록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나는 기사 사진마다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가운데 설게요. 작가님이 안 찍히도록.”
후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을 세모꼴로 만든 다음 두 여자에게 보여 주었다.
“녹음할 때도 신호를 보낼게요. 제가 이런 손 모양을 하면, 녹음을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그다음 활짝 펼친 오른손바닥에 모로 세운 왼손을 내리쳤다.
“이렇게 하면 녹음 끝인 것으로요. 녹음 자체가 싫으면 이 수신호를 보내 주세요.”
두 여자가 웃었다. “초등학생들 장난 같네요.” 명진이 말했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명진이 건넨 덧옷과 안전띠 등을 차례대로 걸치자 제법 탐사대원 같은 구색이 갖춰졌다. 나는 보디캠이 장착된 조끼를 입고 헬멧 위로 고프로를 걸쳐 썼다. 휴대폰을 켜서 양쪽 카메라를 작동시키자, 동굴과 그 앞에 선 명진이 찍히기 시작했다.
명진의 말이 맞았다. 동굴 안은 추웠다. 몇 발짝 들어선 순간부터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에어컨을 세차게 틀어 둔 카페나 겨울철 아침의 시린 공기와도 다른 쥐색 냉기였다.
나와 후지이가 동굴 내부에 금세 움츠러든 반면, 명진은 굴속에서 더욱 활기를 띠는 듯 보였다. 그녀는 울룩불룩한 길을 사뿐사뿐 걸어갔다. 램프 빛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안전 장비나 빛 따위가 일절 필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뒤돌아도 출구가 보이지 않을 즈음 길이 한 차례 꺾였다. 모퉁이 뒤로 좁은 비탈이 이어졌다. 머리를 조심하라는 명진의 말에 따라 허리를 굽히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등 뒤에서 후지이가 말했다.
“꼭 몸속에 들어가는 것 같다.”
내가 동조하자, 그녀는 동굴에서 전시할 사진들의 테마 역시 비슷하게 가 볼까 생각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본래 자신은 도시나 사람의 몸을 찍는 데 관심이 깊으니, 이번엔 동굴의 내장이나 핏줄을 담아낸다는 마음으로 촬영을 해 볼까 한다고. 뒤이어 그녀가 물었다.
“작가님은 뭘 찍고 싶어요?”
나는 아까 명진에게 한 설명을 조금 더 세부적으로, 더불어 청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한껏 담아 풀어냈다. 동시대성이라든지 미시사 같은 단어도 근근이 덧붙였다.
후지이는 말했다. “동굴에 전시되면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요.”
앞서가던 명진이 슬쩍 우리를 돌아보고서 말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가면 본인과 재단 직원들이 전시용으로 고려한 장소들이 나오니, 한번 보고 의견을 말해 달라고.
내리막을 따라갈수록 땅바닥의 굴곡은 점차 잦고 촘촘해졌다. 후지이의 말대로 몸속 내장 같기도 했고, 비늘이 뻑뻑한 파충류의 등 같기도 했다. 동굴 바깥보다 몇 배는 큰 귀뚜라미와 쌀알만 한 벌레 떼가 연달아 지나갔다. 머리와 가슴팍에 달라붙은 카메라가 어떤 영상을 찍는지 보고 싶었지만, 계속 걸으며 화면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절반 정도 설치되었다는 동굴의 조명등 빛은 아직 어둑하여 걸음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명진은 몇 번이나 손전등으로 우리 발아래를 비추며 말했다.
“머리 조심하세요.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하시고요.”
눈앞의 길은 종유석과 석순들로 가득했다. 돌들은 붉은 기로 번득였고, 표면 곳곳이 얽힌 모양새였다. 지옥에서 힘껏 뻗은 손가락들 같았다.
손가락들을 이리저리 피해 지나가자 어느 순간 시야가 트였다. 천장은 높아지고 바닥은 깊어졌다. 그 사이를 채운 건 철제 계단이었다. 난간과 층계 군데군데가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로 젖어 있었다. 명진이 헤드램프를 쓴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난간 꼭 잡으세요.”
나는 얌전히 그 말을 따랐다. 난간을 힘주어 쥐고 한 발 한 발 느리게 내디뎠다. 그럼에도 첫째 층계참에 다다랐을 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머리 위로 뭔가 딱 소리를 내며 부딪힌 까닭이었다. 흠칫 놀라 난간을 놓쳤고 두 계단쯤 미끄러져 층계참에 엉덩이를 찧었다.
명진이 뒤돌아 달려왔고, 후지이 역시 잰걸음을 쳐 내 뒤에 섰다. 나는 계단에 반쯤 누운 자세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층계참에 등을 댄 채 보는 천장은 기이하리만치 높고 화려했다. 거대한 손이 움켜잡은 듯 주름진 돌들이 벽과 천장을 타고 겹겹이 이어졌다. 본 중 가장 커다란 종유석들은 갓 태어난 짐승들이 알을 깨고 낙하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벽에 달린 등불이 짐승을 닮은 돌들의 얼굴을 어렴풋이 비추었다.
“굉장하네.”
속삭거리자 후지이가 고개를 들었다. 입을 벌린 채 천장을 훑더니 곧 카메라를 꺼냈다. 후지이가 천장 한구석으로 렌즈를 겨누며 말했다.
“박쥐도 있네요.”
과연 우묵하게 들어간 천장 곳곳에 털이 부숭부숭한 짐승들이 매달려 있었다. 박쥐 떼 아래 설치된 안전망도 그제야 눈에 띄었다. 방금의 낙석은 안전망까지 통과하여 나를 때린 셈이었다. 내 헬멧 곳곳을 손전등으로 비추던 명진이 말했다.
“얇게 긁혔네요. 아주 가볍고 작은 돌이었을 거예요. 도토리보다 작은 정도요.”
“그래도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위험한 것 아닌가요?”
명진이 흐흐 웃었다. “괜찮아요. 동네 애들은 헬멧도 안 쓰고 막 들어왔는걸요.”
“동네 애들이 여기 들어왔다고요? 공사 전에요?”
명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표정은 평온했다. 의도치 않은 말실수를 한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 이야기예요. 이 전시와도 관련 없고요.”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앞으로 만들 작품에는 그 장소에 사는 혹은 머무르는 이들의 목소리도 무척 중요하다고. “그러니 아는 게 있다면, 또 얘기해 주신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너무 게걸스럽게 느껴지지 않도록 어조를 다듬으며 말을 맺었다.
명진은 또 한 번 흐흐 웃더니 가슴팍 위로 세모꼴 모양의 손을 올렸다. 나는 얼른 핸드마이크를 켰다. 기계 상단의 붉은빛이 반짝였다. 명진이 입을 열었다.
“아마 두 분 태어나기도 전 이야기일 거예요.”
명진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핸드마이크를 명진에게 최대한 가까이 디민 채로 걸음을 옮겼다. 카메라를 도로 넣은 후지이가 뒤따라왔다.
“작가님 말대로 동네 사람들은 이 동굴을 진작부터 알았어요. 일부러 동굴을 비밀로 한 건 아니고요. 비밀이라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냥 여기 이런 곳이 있다, 하며 알고 지낸 거죠. 생각하면 흔한 일이죠. 그 지역민들만 아는 명소가 있잖아요? 인적 드문 계곡이라든지, 숲길이라든지, 해안가라든지··· 우리 경우에는 그게 이 동굴이었어요.”
계단이 끝나자 또 다른 평지가 나타났다. 뱀의 등 같은 바닥이 양옆으로 몸을 뒤틀며 이어졌다. 명진이 굽잇길 너머를 비추며 말했다.
“물론 평소에는 계곡이나 산등성이가 훨씬 놀기 좋았죠. 그래도 굳이 동굴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불륜 커플, 모텔에 못 가는 미성년자, 그렇고 그런···, 뭐 아시겠죠. 그 외에도 깜깜한 굴속을 신기해하는 애들이 찾아오기도 했고요. 제 친구들도 몇몇 왔었어요.”
“명진 선생님도 오셨나요?”
“아주 어릴 때 왔어요. 하지만 기억은 안 나요.”
“얼마나 어릴 때 왔길래요?”
명진이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이 내 헬멧 위로, 카메라 렌즈가 번득이는 헤드밴드 중앙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길은 고프로 렌즈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타지 사람들도 온 적 있었어요. 1980년대 중반쯤이었지요. 자연 탐사를 하겠다며 온 대학생들이었어요.”
이제 명진의 눈길은 내 가슴팍의 보디캠으로 옮겨 갔다. 두 카메라 사이에 놓인 얼굴일랑 아무래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내가 그녀의 태도에 슬슬 불편함을 느끼던 찰나, 명진은 고개를 들고 웃었다. 이전과는 전연 다른 미소였다. 동굴의 차고 축축한 기운이 그의 이목구비에 어떤 기운을 불어넣은 듯했다.
“그 사람들, 여기 갇혔어요.”
“갇혔다고요?”
“네. 남자 셋과 여자 둘이었죠.”
“어떻게 됐는데요?”
명진이 다시 웃었다. “그건 좀 중요한 이야기여서요. 좀 더 내려가면 말씀드릴게요.”
그가 오른손을 폈고 왼손으로 그 위를 내리쳤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녹음기를 껐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벽 사이 너비가 넓어지고 눈앞이 밝아졌다. 곧게 뻗은 길이 우리 앞에 나 있었다.
눈앞의 길은 그간 지나온 통로보다 한층 널찍했다. 더 많은 공사를 겪어서인지, 본래부터 너르게 뚫린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층고가 높고 양 벽에 불그스름한 석주가 줄지어 서 있어 주랑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공에 멎은 파도처럼 곳곳에 불거진 돌이 차양인 양 드리워져 있었다. 명진은 평평한 벽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양쪽 벽에 후지이 씨 사진을 걸면 어떨까 싶었어요.”
나는 살짝만 몸을 틀어 후지이를 보았다. 보디캠이나 고프로에 그가 걸리지 않을 정도로. 후지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멋져요.” 말하는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양쪽 벽에 되울리며 메아리를 남겼다.
각기 다른 둘레의 석주들은 잘 익힌 피부처럼 불그레했다. 동굴에 오기 전 미리 펼쳐 본 책 몇 권에서 비슷한 석주들의 사진을 본 적 있었다. 석주란 천장에서 늘어진 종유석과 바닥에서 솟아오른 석순이 만나 형성된 것. 종유석과 석순 모두 지하수의 물방울이 천장이나 바닥에 고이고 굳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가 자라나 만나려면 수천 년에서 수만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후지이는 꼼꼼히 길 양옆과 위아래를 살폈다. 카메라를 꺼내 몇 군데를 찍기도 했다. 한 바퀴 둘러본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질문했다.
“명진 씨, 지금 모습 찍어도 되나요?”
명진은 길 끝에 서 있었다. 양옆의 석주를 문틀처럼 그러쥔 채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진이 끄덕이자, 후지이 유코가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와 셔터 소리 사이에서도 명진은 어색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제 집에 있는 듯 태연자약하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슬쩍 휴대전화를 꺼내 내 머리와 가슴팍의 기기가 눈앞의 명진을 제대로 녹화 중인지 확인했다.
“예전에 반딧불이로 유명한 호주 동굴에 갔어요.” 카메라를 내린 후지이가 말했다. “그곳 중간 지점이 여기와 아주 닮았거든요.”
그날 관광객을 인솔하던 가이드는 이곳과 비슷한 모양의 길에 멈춰 서 쉿, 소리를 냈다고 했다. 후지이 일행 그리고 함께 동굴에 온 관광객 모두가 입을 다물자 쌕쌕대는 숨소리가 굴 안쪽을 채웠다. 백발의 가이드는 〈반짝반짝 작은 별〉의 첫 소절을 불렀고, 노랫소리는 겹겹으로 메아리쳐 동굴을 울렸다. 이제 같이 불러요. 가이드의 권유에 관광객들은 각자의 언어로 동요를 불렀다. 후지이는 일본어로, 그와 함께 간 애인은 한국어로 노래했다. 어슴푸레한 빛과 한기 속에서 각국의 언어가 섞이고 되울렸다.
후지이가 말했다. “그때 동굴한테 반했어요. 도시에선 절대 찾을 수 없는 유의 공간이었죠.”
그 말소리 역시 불룩한 벽과 얽힌 천장, 종유석과 석순 그리고 석주 사이를 꿰뚫으며 울렸다. 천장에 고인 물방울이 고사리를 타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뒤섞였다. 후지이는 메아리가 잦아들길 기다린 다음 말했다.
“당시 애인이 멍하니 있는 제게 말했어요. 유코 짱. 여긴 한국 동굴과 정말 다르네. 그는 한국의 동굴들은 노래 따위 부를 분위기가 아니라고 했어요. 몇천 개 조명이 빛나서 너무 밝기 때문에 노래하기에 부끄럽거나, 폐광처럼 어두워 노래하기에 슬픈 곳이라고 했죠.”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후지이 작가님은 그분 때문에 한국에 오신 건가요?“
후지이가 흠칫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내 질문보다는, 내가 질문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얼굴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 동굴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던 것이다.
곧 후지이가 머리를 털고 말했다.
“그 사람 때문만은 아니에요. 우린 오래전에 헤어졌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 덕에 한국에 관심을 가졌고 한국어도 배웠죠. 정말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멋진 추억을 많이 줬어요.”
“그런데 왜 헤어졌나요?”
명진의 물음에 후지이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한테 필요한 질문이에요.” 그녀가 눈을 감더니, 깜깜한 굴속을 더듬듯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근데 가끔 술 취해서 이상한 말들을 했죠. 정확히 말하면, 술 마시고 섹스할 때요. 그는 알몸으로, 또 한국어로 말했어요. 유코 짱네 남자들이 우리 여자들을 욕보였어. 저는 그때 아직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계속 물었어요. 욕보였단 게 뭐야? 그는 거의 울면서 말했어요. 그 남자들이 우리 여자들을 아프게 했다고! 그런 순간이면 애인이 아주 낯선 외국인처럼 보였어요.”
후지이 유코가 눈을 뜨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나는 한국 여자들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듯했지만, 어둠 속에 묻혀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떤 때 애인은 나한테, 아니, 나를 통해서 뭔가에 복수하려는 것 같았어요. 가끔 그는 소리 질렀죠. 네 남자들이 우리를 때리고, 욕보이고, 중요한 걸 뺏었어! 그러면서 내 몸을 마구 주물렀어요. 내가 아파, 아파, 소리치고 내 살이 빨갛거나 파랗게 변할 때까지요. 그런 뒤에 애인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어요.”
후지이는 말을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붉고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한 복도를 지나 다시 내리막에 접어들 때까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명진도 마찬가지였다. 평지가 다시금 내리막으로 꺾일 즈음 후지이는 말했다. “하지만 그 이유로 헤어진 건 아니에요. 우리 사이엔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녹음하고 있나요?”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당신의 허락 없이는 어떤 말도 녹음하지 않겠다고. 후지이가 흐리게 웃었다.
“좋아요. 오프 더 레코드예요. 여기서만 듣고 흘려 주세요.”
물과 진흙으로 미끌미끌한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후지이가 한 말이 어른거렸다. 각종 색채로 멍든 후지이 유코의 부드러운 알몸도 같이 떠올랐다. 얼굴에 열이 오르더니 뱃속이 당겼고, 오줌이 마려워졌다. 동굴 입구에서 차를 마실 무렵 내가 한 질문이 떠올랐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면 어쩌죠? 명진은 우리가 그 전엔 동굴 바깥으로 나오리라 했다. 한데 어쩌지. 이르게 솟은 요의가 나를 찔러댔다.
돌계단은 철제 계단보다 짧고 가팔랐다. 마지막에는 셋 다 미끄러지듯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허리를 펴자 널찍한 공동이 정면에 펼쳐졌다. 스무 평은 훌쩍 넘어 보였다. 방금 지나온 길이 주랑 같았다면, 이곳은 중앙 홀에 비견할 만했다. 천장이 얕은 궁륭을 그리며 이어지다가 꺾이며 하나의 구멍 위로 모여들었다. 길고 좁다란 구멍이었다.
“여기에 최 작가님 영상을 설치하면 어떨까 했어요.”
명진이 손전등으로 굴 곳곳을 밝히며 말했다. 전등 빛이 구멍에 닿자, 명진은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후 그녀는 구멍이 또 다른 좁은 굴과 연결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얼른 굴을 가로질러 구멍으로 향했다. 온몸을 비틀고 어깨를 적시며 구멍을 통과하자, 이전 공간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굴이 나타났다. 모퉁이에는 묘목 같은 석주들에 일부가 가려진 구덩이가 보였다. 스피커나 빔 프로젝터를 두기 딱 적절해 보였다.
나는 금세 흥분했다. 동굴이 은밀하게 풍기는 진흙 냄새,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미처 다 설치되지 못한 조명의 불빛과 더불어 후지이의 이야기까지 접했더니 이미 마음 곳곳이 울렁이던 참이었다. 나는 사물함 정도 크기의 구멍을 몇 차례나 오가며 양쪽 굴을 살폈고, 쩌렁쩌렁 떠들었다. 제 생각보다 규모가 크군요. 투 채널(two-channel) 비디오를 설치해도 좋겠어요. 머릿속으로는 동굴에 온 관객들이 좁은 구멍을 오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전시를 담은 기사 사진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 얼굴까지 잇따라 스쳐 갔다.
그때 명진이 물었다. “투 채널이 뭔가요?”
나는 멈춰 섰다. 마구잡이로 떠든 사실이 조금 겸연쩍었으나, 뺨과 귓불에 남은 열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하고 말했다.
“큰 굴과 작은 굴에 영상을 나눠 트는 거죠. 구멍을 오가면서 두 세계를 동시에 접하는 거예요.”
“두 세계라고요?”
“네, 여기에 동굴 영상을 틀고, 저기에 명진 씨를 포함한 동네 분들 영상을 틀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명진은 내가 손가락질한 구멍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를 돌아본 얼굴에는 일말의 웃음기도 없었다.
“작가님.”
“예?”
“아까 제가 하던 이야기 기억나세요? 중간에 멈췄잖아요. 중요한 대목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진은 양손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고, 다시 한번 세모꼴을 그렸다. 반사적으로 핸드마이크를 켜려다가 멈칫했다. 왜인지 몰라도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치밀었다. 분명 골치가 아파지리라는 예감도 함께 솟았다.
후지이가 왜 녹음을 시작하지 않느냐는 눈길을 보냈다.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기도하는 듯 가슴팍에 삼각형을 올려 둔 명진의 표정이었다. 나는 머뭇대다가 녹음기를 켰다. 붉은빛이 깜빡거렸다. 다시 한번 아랫배가 찔리듯 아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던 일이에요.” 명진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세상사가 수상쩍은 시기였으나 지금이나 그때나 활기찬 젊은이는 여럿 있었다. 명진이 잘 아는 두 여자, 림과 준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은 모두 가명이에요.” 명진은 덧붙였다.
두 여자는 같은 해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녀들이 처음 만난 장소는 강의실이나 과방이 아닌 동아리방이었다. 방 간판에는 ‘자연 탐사 동아리’라는 담백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가입한 회원은 여럿이었으나 열중하여 활동하는 이들은 열이 채 되지 않았다.
림은 스물하나, 준은 스물셋이었다. 그들은 동아리의 몇 없는 여학생이었으므로 금세 말을 텄다. 남자 선배들은 종종 짓궂게 굴었지만, 다른 동아리의 소문에 들려오는 사내애들보다는 정중했다. 자연에 자주 몸을 담가 한결 점잖은 모양이라고 림은 생각했었다.
그해 여름 그들은 이번 방학에 어느 지역으로 탐사를 떠날지를 두고 짧은 논쟁을 벌였다. 의외로 막내인 림의 의견이 화두에 올랐다. 그녀가 제 동네에 숨겨진 동굴 이야기를 별생각 없이 꺼낸 탓이었다. 동굴이라니 좋네. 4학년들이 취업 전선에 뛰어든 이후(아니면 그 시대의 말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이후) 동아리장을 맡은 3학년 선배가 말했다. 동굴 안이면 시원할 거 아냐. 근처에 계곡도 있다며? 동굴을 한 바퀴 쓰윽 돌고 계곡서 백숙이나 먹으면 되겠네. 얼마나 깊다고 했지?
“계곡이요? 아니면 동굴이요?”
명진이 림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높고 쨍한 목소리가 천장 곳곳에서 울렸다.
당연히 동굴이지, 하고 동아리장은 말했다. 림은 잘은 모르지만 꽤 깊을 거라고, 중학생 시절에 간 것이 마지막이라 정확한 깊이는 가늠하지 못하겠다고 대답했다. 동아리장 양옆에 선 다른 선배들이 웃었다. 꼬마들도 가는 곳이라면 휴양지나 다름없지 않으냐며 놀리기도 했다. 자존심이 상한 림은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분명 꽤 깊고 어둑한 동굴이다, 안쪽에서 강 흐르는 소리도 들리고 박쥐도 보았다 하고. 옆에 앉은 준이 편들어 주었다. 박쥐까지 있는 동굴이라면 그야말로 자연 탐사에 제격인 공간이겠다면서.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그들은 떠났다. 림과 준 그리고 세 명의 남자 선배가 선발대로 출발했다. 다들 밑창이 단단한 운동화를 신었고 물과 초콜릿바 그리고 간단한 요깃거리 들로 꽉 채운 배낭을 멨다. 선배들은 얼마 없는 동아리의 여후배들을 아끼겠다며, 무거운 배낭은 모조리 저들이 들겠다고 나섰다.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림과 준은 손전등, 물통, 가벼운 옷가지가 든 배낭을 멘 채 버스에 올라탔다.
그날 버스에 나란히 앉은 림과 준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림은 제 고향에 대해, 준은 대학 입시에 목숨을 건 지난 두 해에 대해 주로 말했다. 준은 축축하고 어두운 순간들을 회고하면서도 코를 찡긋대며 웃었다. 림은 그 미소에, 고작 두 살 위의 준이 그토록 풍성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에, 시종일관 차분한 그녀의 말씨에 감탄했다. 언니, 어른 같아요. 림의 말에 준은 넌더리를 냈다. 아이, 그러지 마. 난 아직도 애나 마찬가지야. 그녀들이 까르르 웃자 앞좌석의 선배들이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여자애들은 사이가 좋네.
동굴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림과 준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의 손을 잡아 주며 내려갔다. 반면에 남자 선배들은 서로 외따로 떨어져 걸었다. 큰 소리로 조심해, 라거나 발밑 잘 봐라, 하고 외칠 뿐 서로를 붙들거나 만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행동을 상대를 낮잡아보는 행위로, 나아가 수치를 주는 일로 여겼다. 훗날 림과 준은 동아리장 선배의 갑작스러운 사고 역시 그 같은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몇 미터 앞에서 엇, 하는 비명이 들렸다. 비명은 곧이어 어, 억, 아이고, 하는 고함으로 변하더니 돌 구르는 소리와 함께 메아리쳤다. 두 여학생 앞에 선 남자 선배들이 챙겨 온 전등을 모조리 켜 앞을 비췄다. 축축하고 어두운 길 정중앙에, 바닥 모를 지하로 내뻗은 구멍이 있었다. 구멍 아래 어딘가에서 동아리장 선배가 외쳤다.
쌍, 발목이 꺾였어.
구멍 앞에 선 네 사람은 눈길을 주고받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책임감을 느낀 림이 한 발짝 나섰다. 직접 내려가 선배를 부축해 오겠다고 했다. 두 남자 선배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농담 마라. 너 혼자 어쩌려구? 그들은 한숨을 내쉬더니 구멍 속으로 느릿느릿 몸을 넣었다. 양어깨를 비틀고 목을 돌려 가며 암흑 속으로 내려갔다.
림은 조금씩 멀어지는 선배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발을 굴렀다. 나도 내려갈게. 림은 말했다. 내가 여기 오자고 한 거잖아. 선배들을 도와야 해. 준이 몇 차례 말렸지만, 림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배낭을 돌려 메고 신발 끈을 묶은 뒤 구멍 속으로 들어섰다. 남자 선배들보다 체구가 작은 덕에 비교적 빨리 좁은 통로를 지날 수 있었다.
마침내 구멍을 빠져나와 널찍한 공간에 발 디딘 순간, 림은 뒤를 돌아보았다. 허리를 바싹 굽힌 준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림과 눈이 마주친 준이 말했다.
넌 뭘 그렇게 무작정 가니?
림이 옅게 웃었다. 마치 신호탄처럼, 웃음과 함께 돌 하나가 떨어졌다. 작고 작은 낙석이었다. 하나 직후에 들려온 소리는 폭포가 덮치듯 거대했다. 준은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등 뒤로 내려앉는 천장이, 갖은 먼지와 함께 무너지는 벽이 보였다. 준은 림의 어깨를 붙든 채 쏟아지듯 몸을 굴렀다. 두 사람은 세 명의 남자가 서 있는 굴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들이 지나온 구멍은 순식간에 흙먼지와 무너진 돌로 메워졌다.
“그들은 엿새간 여기 갇혀 있었어요.”
명진은 말했다.
“처음엔 현실을 부정했고, 한탄하다가, 서로 위로했습니다. 림의 가족에게 동굴에 간다고 말했고 후발대도 출발할 예정이니, 얼마 후면 사람들이 그들을 찾으러 올 거라고요. 하지만 곧 배가 고프고 오줌이 마려워졌죠.몇몇이 구멍 안으로 넘어진 동아리장 선배를 탓했고, 동굴 이야기를 꺼낸 림을 원망 어린 눈길로 쳐다보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었죠.
일단 그들은 공간부터 나누기로 했습니다. 세 남자가 이곳‧‧‧ 그러니까 큰 굴에 머물기로 했어요. 남자 선배 중 한 명이 작은 굴로 연결되는 구멍을 발견하고서 이야기했죠. 여자애들은 이 안에 묵어. 이야, 이렇게라도 공간이 나눠지다니. 너네한테는 얼마나 다행이냐.
준과 림은 건전지를 아끼기 위해 손전등을 하나만 켜고 굴 안을 비췄습니다. 손에 든 빛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어두컴컴한 공간이었어요. 진흙 비린내가 풍겼고, 불을 비춘 바닥 위로 귀뚜라미 떼가 움직였습니다. 귀 기울이면 박쥐들이 끽끽대는 소리도 들렸고요.”
명진의 목소리는 작아졌고, 말의 속도는 빨라졌다. 표정에서는 어떤 기색도 읽을 수 없었다. 여러 번 거듭하여 읽은 책을 외는 듯 보였다.
“동굴 밖에서는 이들이 엿새 동안 갇혀 있던 걸 알았지만, 동굴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전등을 켜지 않으면 눈 닿는 모든 곳이 깜깜했고, 불을 켜봤자 보이는 건 벌레와 박쥐 그리고 물방울뿐이었으니까요. 나중에 림과 준이 말해 주길‧‧‧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건 암흑뿐이라, 밤낮 여부는 물론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대요. 몇 시간 머문 것 같기도 하고, 몇 달을 지새운 것 같기도 했답니다. 다섯 명 다 까무룩 잠들길 반복했답니다. 어쩌다 잠에서 깨면 배가 고프고 목도 말랐대요. 배를 채우면 똥오줌이 마려워졌고요. 남자들은 낙석 주위에 가서 일을 해결했고 여자들은 저들이 머무는 작은 굴의 구덩이를 변소로 썼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곳곳에 냄새가 풍겼지요. 그쯤 되자 남자들이 이야기했습니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메고 온 배낭들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말했다. 이 안에 깨끗한 물과 음식이 있다. 다섯 명이 먹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긴 하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모든 것을 철두철미하게 배분하여 나눌 생각이다. 불만 없겠지? 왜냐하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지고 왔으니까‧‧‧. 그들은 램프의 조도를 최소로 낮춰 굴 정중앙에 내려놓았다. 둥글게 앉은 얼굴마다 짙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남자들이 말했다. 먹을 건 공평하게 나눌 거야. 대신에 조건이 있다. 명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애들 말이야. 우리를 좀 안아 줘. 우리가 필요할 때 말이야. 여기는 너무 춥잖아.”
림과 준은 서로를 보았다. 반쯤 어둠에 가려진 상대의 낯을 마주하며, 결국은 이 모든 게 예견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동굴에 갇힌 첫날, 다리가 말짱한 두 선배는 작은 굴로 찾아와 말했다. 야, 여기 쾌적하네. 좋겠어‧‧‧. 그들이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은 순간이나, 식사 때 그녀들이 건네받은 물병 안에서 떠다니는 음식 부스러기를 본 순간, 림과 준은 곧 찾아올 압박을 어렴풋이 예견했었다.
그럼에도 림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준은 축축해진 림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는 고개 돌려 자신들 앞에 반원형으로 둘러앉은 남자들을 보았다. 준은 몸을 일으켰다. 당신들끼리 안고 있지 그래요, 하고 말하는 대신 림을 부축하여 자신들의 굴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남자들이 어디 가, 외쳤다. 준은 잠시만 이야기 좀 할게요, 말한 다음 작은 굴의 구석에 림을 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있잖아, 그 역할은 내가 할게. 너는 여기 있어. 음식을 가져다줄 테니까.”
이제 명진은 누구의 목소리도 흉내 내지 않았다. 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림이 완강히 거부했으나 준은 계속 설득했다. 언제 사람들이 구하러 올지도 모르잖아. 거부했다간 더 안 좋은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걱정 마. 나는 그 짓을 좋아해. 너는 아니잖아. 그렇다면 그 짓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게 낫지.
림은 반박했다. 거짓말. 지금 언니 행세하려 애쓰는 거잖아. 자기 몸 버려 가면서‧‧‧. 준이 버럭 화를 냈다. 그따위 소리 마! 그녀는 숨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얘, 나는 작년에 애인을 두 명이나 동시에 사귀었어. 이번엔 셋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니? 나는 무엇도 버리지 않아. 이딴 게 뭐 별거니. 나를 버리긴커녕, 망칠 수도 없는 일이야.
준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져 어떤 메아리로도 울리지 않았다. 손전등을 끈 탓에 림은 눈앞의 준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빈틈없는 그림자 안에 갇혀 있었다. 텅 빈 꿈속에 사로잡힌 듯 느껴지기도 했다. 림은 침묵했고, 준은 다시 몸을 구부려 통로를 넘어갔다. 큰 굴에서 그녀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 그리고 남자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을 마친 명진이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 뜨기 전까지 나와 후지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숨을 쉴 때도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고자 입술을 가늘게 벌렸다.
“어때요?”
마침내 눈을 뜬 명진이 말했다.
“잘 녹음되고 있어요?”
우리는 온 길을 도로 되짚어 올라갔다. 서로 이어진 두 개의 공동을 나서기 전에는 잠시 멈춰 스크린과 스피커를 둘 자리를 확인했다. 돌계단 뒤편의 복도를 지나갈 때는 후지이의 사진 중 어떤 사이즈가 여기 어울릴지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나와 후지이는 종종 침묵에 잠겼다. 명진만이 변함없이 활기찼다. 그는 여전히 가볍게 움직였고, 동굴 곳곳을 비추며 머리와 발을 조심하라 일렀다. 나는 그의 지시를 따르다가도 연신 걸음을 멈췄다. 요의 때문이었다. 곧 방광이 터질 듯하다가 누그러지는 순간이 반복되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비탈길을 올랐다.
철제 계단이 나타났을 때, 후지이 유코가 결국 입을 열었다.
“진 씨. 그 두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명진이 뒤돌아섰다. 그녀가 쓴 랜턴의 불빛이 어찌나 환한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엿새 후에 구조됐지요.”
명진은 뒷걸음질로 느릿느릿 계단을 올랐다. 그 속도에 따라 우리도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지하 저편까지 울렸다. 턱을 젖히면 사원처럼 높이 치솟은 천장이 보였다. 물방울을 머금은 돌들이 벌겋게 번득이고 있었다.
명진은 말했다. 림의 가족을 비롯한 사람들이 돌을 치우고 길을 내서 다섯 명의 대학생을 찾아냈을 때, 굴 안에는 거의 텅 빈 가방들과 전등 빛에 눈도 뜨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그들은 동굴의 젖은 흙냄새, 그리고 인간의 지린내와 구린내 속에 잠겨 있었다. 다행이라 할지 불행이라 할지, 당시 준은 남자들을 안고 있지 않았다. 대신 림이 잠든 준을 꽉 안고 있었다. 그녀는 기름기로 빳빳해진 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중이었다. 가족들은 림을 끌어안았고, 림은 그들의 가슴팍 안에서 생각했다. 우리는 계속 이 동굴로 돌아오게 되겠지.
한 달 후, 그들은 준의 뱃속에 무엇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엄마는 입덧을 심하게 앓았다고 해요.” 명진이 말했다. “또 다른 엄마, 그러니까 림은 그 옆에서 아홉 달을 함께 있었고요. 와중에도 계속 일들이 벌어졌답니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지고, 사람들이 죽고, 독재자가 물러나고, 또 누가 죽고‧‧‧. 림은 사이사이 계속 준한테 물었대요.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고. 그러자 준이 말하길, 그게 왜 중요해? 우리가 같이 기르는 거 아냐? 림이 대답하길, 당연하지. 이 애는 우리 애야. 우리 거야.”
명진이 다시 발을 멈췄다.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물었다.
“녹음하고 있어요?”
그의 시선이 내 가슴팍에 매달린 핸드마이크로 향했다. 나는 녹색 불빛이 반짝이는 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잘못을 들킨 애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수신호를 해 주지 않으셔서‧‧‧ 마이크 켤 생각을 못 했네요.”
“그래요?”
명진은 실망한 얼굴이었다. 나는 거의 변명조로 말했다.
“지금 다시 켜 볼게요. 한 번 더 말씀하실래요?”
명진이 아, 하고 탄식했다. “두 번 말하기엔 에너지가 모자라요.” 말한 다음 한숨도 내쉬었다. 그럼에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손으로 세모꼴을 그려 보였다. 그녀의 수신호를 보자 이번에는 뱃속을 틀어잡히는 고통이 왔다. 이토록 아플 만큼 오줌이 마려웠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집중하는 척 다리를 모로 꼬고 녹음기를 켰다.
녹음기의 붉은빛을 보고도 명진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난간에 팔을 기대고 굴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톱날 같은 바위들과 빛 한 자락 스미지 않는 벽 곳곳을 훑는 동안, 후지이는 명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카메라 가방을 꽉 붙든 채였다.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명진에게 디밀고 싶은 마음을 참는 듯 보였다.
“작가님이 내 얘기를 가져갈 거면, 이 질문도 같이 가져가 주길 바랐어요.”
명진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컸고, 울림은 여러 차례 번지며 내게 내려앉았다. 머리카락 안쪽부터 등덜미까지 땀이 줄줄 흘렀다. 터질 듯한 방광 탓인지 혹은 갑작스레 지워진 책임감의 무게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엄마들은 끝내 누가 내 아빠인지 알려 주지 않았어요. 실은 자기들도 모를 거예요. 그건 우리 사이에 그다지 필요한 일도 아니랍니다. 정말이에요. 우리한테 진짜로 필요한 건 다른 질문인데요‧‧‧.”
나는 쭈그려 앉아 보디캠과 마이크를 달아 둔 조끼 그리고 고프로를 매단 헬멧을 내려놓았다. 헤드램프만 겨우 챙긴 다음 말했다. 죄송한데 오줌이 마려워서, 너무너무 오줌이 마려워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고. 정말 죄송하지만, 남은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저는 얼른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사과의 말을 주문처럼 거듭 읊조리며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웃는 소리라도 들리려면 좋으련만, 내가 등지고 떠난 자리에서는 여전히 무언가 이야기하는 명진의 말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후지이의 사진을 전시할 복도까지도 내려가지 못했다. 철계단에서 내려와 모퉁이를 도는 게 최선이었다. 등 뒤로 여자들이 보이지 않자마자 바지춤을 풀었고, 물방울로 축축한 벽을 향해 오줌을 눴다.
몸이 비워지며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 느낌.
속에 그득한 것이 바깥으로 배출되며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감각.
철계단으로 돌아왔을 때 녹음기는 꺼져 있었다. 보디캠과 고프로는 동굴의 천장을 향한 채 고요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좀 괜찮나요?” 명진과 후지이가 번갈아 물었고 나는 벌게진 얼굴을 주억거렸다.
계단은 내려올 때보다 훨씬 길고 가파르게 느껴졌다. 앞의 두 여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몇 차례 망설이다가 마이크를 켰다. 이어폰을 연결한 다음 귀에 끼우고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다. 녹음이 끝나기 5분 전쯤부터 다시 재생시켰다.
핸드마이크에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종유석을 따라 흐른 물방울이 떨어지고, 도토리인지 낙석인지 모를 것이 툭 툭 바닥을 치고, 박쥐들이 낑낑 울었다. 그 사이로 명진이 질문했다.
유코 씨.
네, 진 씨.
어때요?
‧‧‧.
우리가 불행해 보여요?
저는 몰라요.
그럼, 우리 얘기는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어 뵈나요?
기록?
우리 이야기가‧‧‧ 그러니까, 투 채널로 틀어질 만하냐고요.
(잡음 소리) 우리라는 거, 진 씨와 진 씨의 엄마들인가요?
잇따른 명진의 목소리는 씨근대는 숨소리와 잡음에 뒤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후지이 유코의 음성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보다 예닐곱 계단 앞선 여자들의 등이 보였다. 헤드램프의 빛을 고정하자 그들의 뒤통수와 목, 허벅지와 엉덩이, 서로를 잡은 손이 보였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그녀들은 상대의 팔과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부축이나 안내의 손길은 아니었다. 상대가 달아나지 못하게 붙들어둔 몸짓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들은 종종 고개를 돌려 서로에게 속삭였다. 몇 층계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어폰을 빼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따져 묻기를 포기했다. 저들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감히 하지도 않았다. 나는 핸드마이크를 켜는 대신, 귀를 바짝 세운 채 계단을 올랐다. 속삭임 중 한마디 정도는 되울리기를 바라면서.
돌아가는 길은 계속해서 오르막을 그렸다. 동굴 바깥, 땅 위, 햇볕 속의 세상이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가빠졌다. 눈을 들면 절반쯤 설치된 조명등 빛이 여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움켜쥔 피부처럼 붉거나 푸른 빛에 잠긴 얼굴들, 그들은 돌들 틈에서 만들어진 양 보였다. 또는 그저 돌자체로, 굴속에서 오랜 시간 흘러내리고 솟아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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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 임아라 그가 돌을 키우자고 했을 때 나는 딸기를 먹고 있었다. 케이크에 얹은 것치고 과즙이 실해서 턱이 저릿했다. 나는 테이블 매트에 포크를 내려놓고 오른뺨을 어루만졌다. 입안에 머금은 걸 삼켰는데도 신맛이 가시질 않았다. 어금니에 들붙은 씨가 거슬려서 자꾸 혀끝으로 더듬댔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돌을 키우자는 거지. 문득 씨가 아니라는 게 떠올랐다. 딸기의 겉에 박힌 점들 말이다. 그게 열매고, 그 속에 더 작은 씨가 있다는데, 그렇다고 그걸 달리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골라낸 씨를 검지에 뱉었다. 침과 뒤엉켜서인지 꽤 부푼 것 같았다. 자기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한테? 그래, 우리한테. 그의 윗입술에 묻은 생크림이 바르르했다. 나는 그것을 닦아 주려다가 관두고 나이프를 집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면 으레 주는 플라스틱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직원이 물었을 텐데. 그가 뭐라고 답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초는 없고, 나이프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손잡이에 달린 마개를 열었더니 성냥 두 개비가 쏟아졌다. 돌을 키우기도 해? 응, 돌도 키울 수 있대. 그는 컵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또 커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 컵은 가장자리가 겉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물이 넘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서랍에 들어박힌 처지길래 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발끈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다. 너무 말짱하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 이후 그의 커피는 그 컵에만 내줬다. 똑같은 컵이 있었는데 이미 버렸다는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왜 돌이야? 손이 가는 건 싫다며. 그렇다면 돌 만한 게 없지. 그가 살며시 컵을 기울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슬쩍슬쩍 드러나는 둥근 밑면을 바라보면서 유난히 까맣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에 닿을 때마다 닳았을 테니까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하얀 컵과 대비되어서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너머에 있는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흰자위를 바삐 오가는 걸 보아하니 뭔가 숨기고 있었다. 실은 주문했어. 나는 잼이 덕지덕지한 접시를 토닥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몫의 케이크는 모로 누운 채로 사이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겹겹인 시트에서 반쪽짜리 딸기들을 빼낸 흔적이었다. 언제부턴가 버터에서 여물의 향을 맡았다. 내가 투덜댔더니, 그는 여물의 근처라도 가본 적이 있느냐며 놀렸다. 그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는데, 어째서 끄덕였는지 의문이었다. 미리 이름을 지어 주자. 그가 반절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새 눅눅해진 받침대가 흔들려서 잠시 애를 먹었다. 나는 식탁에 흐트러진 빵 부스러기를 그러모으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검지에 뱉은 씨앗이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로 옮았을 텐데, 전연 기억나지 않았다. *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따끈한 물줄기를 쏘였더니 순식간에 케이크가 일그러졌다. 폭우를 맞은 모래성처럼 쉬이 뭉그러졌다. 자잘한 건더기는 배수구를 향해 미끄러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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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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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문학동네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