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의 바다
- 작성일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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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의 바다
유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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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까맣고 짧다. 정숙은 갓 태어난 미라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 말을 생각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너 꼭···, 하면서 말을 고르던 정숙은 드디어 딱 맞는 말을 찾아냈다. 너 꼭 미라 같구나! 시간이 갈수록 검고 바삭바삭해지는, 살점이 까맣고 얇은 조각이 되어 손을 대면 후두두 떨어져 나가는 미라. 그렇게 미라는 미라가 됐다.
미라라니, 잔인한 이름이라고 언젠가 지희는 말했지만 그건 뭘 모르는 소리였다. 미라가 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정숙은 그때 미라를 보고 그러니까 너 꼭···, 시체 같구나! 외칠 뻔했으므로. 시체보다는 미라가 되는 게 낫지 않은가? 시체는 완전히 끝난 거지만, 미라는 이어진다.
미라는 평생 검었으나 열여섯 살부터 더 이상 짧지는 않았다. 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열네 살까지 백사십 센티미터를 넘지 않던 미라는 열다섯 살, 열여섯 살, 두 해 동안 삼십 센티가 넘게 컸다. 하룻밤 새 일 센티가 자랄 때도 있었다. 그 시기 미라는 아침마다 갈색 개털 무덤을 빠져나와 똑바로 서서 양팔과 다리를 쭈욱 뻗고 그 끝의 손과 발을 쳐다봤다. 손과 발은 미라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팔과 다리는 길고 가늘어졌다. 부슬부슬한 갈색 털이 꼭 같은 개 세 마리가 아침마다 가늘어지는 미라의 발목을 핥았다.
미라는 키가 자라고 난 후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자란 팔다리의 피부가 얇아지다 못해 모두 벗겨져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내리꽂듯 떨어지는 소나기, 동네 뒷골목의 쓰레기 냄새, 더위, 추위, 바람, 햇살, 살에 닿는 모든 것이 따가워서 마당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엄마.
정숙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라가 집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어미 새가 되는 것은 정숙의 오랜 꿈이었다. 정숙은 월, 수, 금요일에는 17층짜리 오피스 건물에서, 화, 목, 토요일에는 4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청소일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나갔다가 두 시쯤 대낮의 길을 걸어 미라가 개들과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며, 정숙은 자신이 둥지로 돌아가는 어미 새라고 생각했다. 아기 새들이 바글바글 들어 찬 둥지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웠다. 목젖이 보이게 입을 벌리고 삐악삐악 울며 하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미라를 위해 정숙은 퇴근할 때마다 집 앞 빵집에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을 사 갔다. 비슷하게 생긴 조각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조각을 고르는 시간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었다.
미라는 크림만 떠서 먹었다. 딸기와 빵은 흙 마당에 던져두면 가장 날쌘 개들이 달려와 먹어 치웠다. 잠깐, 그 애들 이름이 뭐였지? 몽글이, 구름이, 별이···.
미라는 매일 부대끼는 개들의 이름을 헷갈렸다. 미라의 개들이 아니라 모두 정숙의 개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숙의 개들은 처음에는 아홉 마리였다가 곧 서른세 마리, 스물여덟 마리, 마흔두 마리, 마흔 마리, 예순세 마리가 됐다. 정숙은 모든 개에게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을 모두 기억했고,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정숙이 달이야, 하면 달이가 돌아봤고 노을아, 하면 노을이가 움찔했다.
그러나 미라에게 몽글이는 구름이었고 구름이는 별이었다. 별이는 노을이었고 노을이는 달이었다. 그 이름들은 모두 높은 곳에 있었고, 따라서 미라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미라에게 닿는 모든 것들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당의 축축한 흙, 미끄덩한 지렁이, 오줌, 개똥, 막 태어난 개의 보드랍고 성긴 털, 이제 막 죽은 개들의 뻣뻣한 다리들. 미라는 구름이의 이름은 몰랐지만, 잠결에 몸을 뒤척이다 구름이의 가느다랗고 꼿꼿한 다리가 발목에 닿았을 때 이 개는 죽었구나 알았다.
미라는 죽은 개들을 대문 밖으로 던져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정숙은 개들이 죽어서도 마당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못하게 했다. 개들은 우리의 가족이고, 가족은 집에 있어야 한다. 개들은 거실에서, 소파에서, 침대 위에서 죽었다. 미라는 소파에 앉고 침대에 누워야 했기에 죽은 개들을 흙 마당 구석에 던져두었다.
던져둔 개들에게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파리와 쥐들이 몰려들었다. 개들은 먹히고 썩어서 뼈가 되었고 몇 년 후에는 뼈조차 사라졌다. 이제 그들은 마당의 일부가, 집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영원히 함께라고 정숙은 말했지만, 미라는 알았다. 개들은 집이 된 게 아니다. 그냥 사라진 것이다. 털과 살이 사라지고, 뼈가 사라져 미라에게 닿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 사실은 미라에게 오래도록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정숙의 집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털도 결국엔 사라졌을까? 뿌옇게 피어올라 옷들과 침대, 소파 뒤 구석 어디든 살포시 가라앉는 털들.
미라는 털에 관해 농담하기를 좋아했다. 개들의 털은 갈색이고 검었으며 미라와 정숙의 털도 딱 그만큼 갈색이고 검었다. 바닥에는, 이불에는, 옷에는 수만 개의 털들이 박혀 있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미라는 갈색 털이 덕지덕지 박힌 티셔츠를 입고 미소 지으며 정숙에게 다가가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겠어?
정숙은 글쎄, 샛별이? 눈송이? 해솔이? 사랑하는 예순세 개의 이름을 다정하게 읊고는 혹시, 미라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면 미라는 맞다 틀리다 말하지 않고 낄낄 웃었다.
사랑받는 예순세 마리의 개들은 대체로 조용했다. 현관 밖으로 차가 지나가거나 택배기사가 문을 똑똑 두드려도 짖지 않았다. 단지 온 힘을 다해 네 발을 휘저으며 개집 뒤편, 사료 포대 사이 같은 작은 틈으로 숨었다. 그러면 미라는 웅크려 있는 개의 작은 얼굴 옆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이 개가 콩이었던가, 두부였던가? 아니면 쿠키? 이 개도 먹히고 썩고 부서져서 사라질 건가? 검분홍빛 작은 코에서는 쌔액 숨소리가 났다. 가만히 귀를 대고 있으면 쌔액, 하는 그 소리는 마치 미라의 숨소리 같았다. 경계가 사라진 숨이 방 안 가득히 차올랐다.
미라는 스물한 살 때 아주 오랜만에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개털이 목뒤에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는 끈적끈적한 여름이었다. 주민센터 동물복지팀과 민간단체, 경찰로 구성된 구조팀이 들이닥쳤다.
문 여세요! 구조팀에서 왔습니다!
정숙은 구조라는 말을 알았고,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 우린 그냥 여기서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에요! 정숙은 갈색 털로 만든 아늑한 둥지를 지키기 위해 양팔을 넓게 펼치고 구조팀에 맞서 섰다. 구름아! 몽글아!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개들 중 누구도 정숙을 쳐다보지 않았다. 정숙의 목소리는 개 짖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구조팀은 정숙을 지나쳐 태연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사료 포대를 옮겨 뒤쪽에 숨은 개들을 찾아냈다. 바닥에 엎드려서 소파 밑을 살폈다. 장을 옮기고 이불을 들어냈다. 무언가 옮겨질 때마다 숨은 개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어떤 개들은 대문 밖을 뛰쳐나갔다. 정숙은 도망치는 개들을 붙잡고 잡아당기고 품에 넣었다. 이곳이 너희의 집이야. 개들은 거세게 짖으며 달음박질쳐 정숙의 품을 빠져나갔다. 사방이 담으로 막혀 있어 안전했던, 정숙의 집에 거대한 틈이 생겼다.
개들이 도망가기 시작하자 구조팀은 틈을 틀어막았다. 구조팀원 둘이 커다란 파란색 그물 양쪽 끝을 들고 현관 앞에 섰다. 미라는 그것을 뚫고 도망가야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파란 그물로 뛰어들었다. 소형견의 무게를 예상했던 구조팀은 당황한 나머지 망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쳤고, 미라는 망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미라의 기다란 왼팔에 질긴 망이 휘감겼다.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진정하세요! 진정해!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라는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짖는 개들, 달아나는 개들, 형광 연두 조끼를 입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달려서 현관으로 뛰어들었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불이 걷힌 소파, 엎어진 장, 낡은 커튼. 미라는 그사이를 지나 세면대 뒤, 싱크대 밑, 쥐가 드나들던 어두운 구멍, 사료 포대 뒤에서 숨을 곳을 찾았다. 그러나 온갖 틈마다 예순세 마리의 개들이 미라보다 먼저, 꽉꽉 들어차 있었다.
미라는 어쩔 수 없이 마당 한복판 흙 위에 섰다. 비옥하고 뜨끈한 흙들이 발가락 사이사이로 들이닥쳤다. 미라는 파란 그물을 끌어안고 왼뺨을 흙에 대고 누웠다. 축축한 개 사료, 썩은 고기 냄새, 개의 배설물 냄새, 따뜻하고 불쾌한 숨 냄새가 나는 흙이 귓속으로 들어왔다. 미라는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수년이 빠르게 흘러가기를, 먹히고 썩고 부서지기를, 그래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미라는 죽은 개가 아니었다. 미라는 미라였다. 미라는 나중에 KTX역 플랫폼의 TV로 육천 년 된 미라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봤다. 미라는 그 뉴스를 보면서 구조팀이 들이닥친 그날, 사라지지 못한 것이 자기 이름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육천 년을 살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미라는 계속 이어졌다.
1.
자립 지원 생활관의 강의실 책상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미라는 그곳에 왼뺨을 대고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플라스틱 책상에서는 옅은 먼지 냄새만 났다. 정말 자세히 집중하면 먼지들이 책상 위에 내려앉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미라는 동그랗고 작은 먼지들이 책상 위 어디쯤 도착할지 예측해 보곤 했는데, 먼지들은 언제나 의외의 길을 그리며 미라의 예측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내려앉았다. 미라는 그때마다 아, 하고 작게 놀랐다.
스물한 명 수강생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광경이라고, 미라는 생각했다. 개들은 그런 법이 없었다. 웅크린 자세로 각자의 꼬리만 쳐다보고 있다가 기척이 느껴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어디론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개들은 혼란스러웠고, 그게 그들의 질서였다.
자,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강사가 수업을 열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하고요? 몇몇 입소생이 다시 질문으로 답했다. 맞습니다. 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네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인사하는 법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눈을 맞추는 것도 인사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미소 짓는 것도 인사예요. 미라는 강사의 입꼬리를 쳐다보고는 자기 입꼬리로도 같은 모양을 만들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미라는 강사보다 수천 개는 더 많은 인사를 알았다. 이를테면 꼬리를 흔들기, 발냄새를 맡기, 가볍게 코로 밀기, 눈에 코를 가져다 대기, 무릎에 얼굴 비비기, 귓구멍, 콧구멍, 눈, 틈이란 틈은 모조리 핥아대기.
악수도 중요한 인사법 중 하나죠.
강사는 ‘호감을 주는 악수법’을 알려주겠다고 하며 눈을 맞추고 웃으면서 자신 있게 손을 아래위로 흔들라고 설명했다. 실습을 위해 스물두 명의 입소생은 열한 명씩 두 줄로 서서 마주 보고 악수했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희의 맞은편에는 미라가 서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미라는 강사가 시킨 대로 지희의 오른손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붙잡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미라의 엄지와 검지 사이 손샅에 지희의 손샅이 깊숙이 들어왔다. 마주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자 희미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먼지와 개 사료 사이의 냄새, 차갑기도 뜨겁기도 한 냄새였다. 지희의 손바닥은 우둘투둘 돌기가 잔뜩 돋아난 것처럼 거칠었다. 지희는 미라의 눈을 쳐다보고 멋쩍게 웃었지만, 손에는 떨림이 없었다. 단단하고 안정적인 손. 강사가 말한 그대로였다.
미라도 지희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미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자신감 있게 말하려 했지만, 말끝이 떨렸다. 까맣고 작은 지희의 눈동자가 미라를 정면으로 향해 있었다. 불편하다는 표현도, 위협도, 경고도 아니었다. 지희는 웃고 있었다. 눈을 마주 보고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개들은 그렇게 오래 눈을 맞추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싸우거나 도망쳤다. 미라는 기다란, 그러나 곧 끊어질 것 같은 고요 속에서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둘은 하염없이 손을 마주 쥐고 끝없이 아래위로 흔들었다. 악수를 언제 끝내야 하는지는 잠시 뒤에 배울 예정이었으니까. 결국 지희가 먼저 손을 놓았다. 미라는 관성 때문에 두 번 정도 허공에서 혼자 손을 흔들었다.
취업 프로그램은 4월에 시작해 12월에 끝났다. 입소생들은 6주간의 방학을 제외하고 꼬박 7개월 반을 단계별로 취업을 준비하며 취업 시장 속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고심했다. 프로그램은 계획한 대로 순항했으나 입소생들의 자신감은 멀미 날 정도로 출렁거렸다. 자신감을 북돋는 강사의 말을 듣고 매주 진행되는 과제를 하면서 미래를 낙관했다가 채용 공고의 조건을 보고 다시 비관하는 식이었다. 기술을 배워야 해, 17번째 시간부터 그 말은 주인 없는 주문처럼 생활관을 떠돌았다. 입소생들의 건의로 퍼스널컬러 진단과 메이크업을 한 번에 배울 수 있는 수업이 개설되었다.
미라에게도 입소생 대표가 찾아와 서명을 받아 갔다. 대표가 건넨 종이에는 굵고 큰 글씨로 ‘건의’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수많은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미라는 시끄러운 그 종이에 자신의 이름 두 글자를 더했다.
미라. 미라는 또박또박 정자체로 자신의 이름을 적고는 한참 바라보았다. 미라라는 글자는 현주나 영현, 민정이나 현진보다 어딘가 아래위로 납작해 보였다. 미라는 제 이름을 소리 내 말해 보았다. 미이라아, 하고 끝을 늘려서 발음하자 아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분명 유용할 거예요. 대표는 미라에게 그렇게 말하곤 종이를 가져갔다. 미라는 무엇이 어디에 유용하다는 말인지 한참 고민했다.
취업 프로그램 29회차에는 증명사진을 찍었다. 7회에 걸쳐 정성껏 작성한 이력서에 붙일 사진이었다. 생활관에서는 사진사를 불렀다. 사진사는 칠판 앞에 푸른 스크린을 설치하고는 수강생 열일곱 명을 한 명씩 그 앞에 세웠다.
자, 찍습니다. 미소 지으세요.
스물두 명으로 시작했던 수강생들이 열일곱 명이 된 이유는 다섯 명이 그새 생활관을 퇴소했기 때문이었다. 스물둘, 열아홉, 열여덟, 열일곱. 미라는 자신도 모르게 수강생의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날 생활관에서 미라는 난생처음으로 증명사진을 찍었다. 미라의 순서는 뒤에서 두 번째였다. 미라는 차례를 기다리며 카메라 앞에 선 입소생들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그 애들은 모두 다른 얼굴에 모두 다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미라는 강사의 입꼬리를 떠올리며 그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웃어 보이려 했다.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웃잖아. 정숙은 말하곤 했다. 가족이란 그런 거지.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질 때마다 각기 다른 얼굴들이 움찔거렸다. 아래위로 긴 이름이 있는 얼굴들. 미라는 그 앞에 서지 않은 다섯 명의 얼굴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내 카메라 앞에 선 미라는 웃었다. 웃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미라의 입꼬리는 남의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미라는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입꼬리 대신 진짜 꼬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갈색 개들이 그랬듯 맘껏 흔들고 세우고 눕히고 몸을 감쌀 수 있다면. 꼬리가 있으면 좋겠다. 그다음에는 꼬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리 사이로 넣어 숨길 수 있는 꼬리가 있어야 해. 미라는 엉덩이를 손으로 짚어 봤으나 당연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사라졌다고, 미라는 느꼈다. 상실감을 느끼며 엉치뼈 부근을 더듬었다.
살짝 웃어 볼게요. 이는 보이지 말고요.
살짝? 이 없이? 어려운 단어는 없는데도 그 두 문장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미소요, 미소!
사진사가 거듭 외쳤다. 미라는 여전히 얼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미라의 입꼬리가 알아서 미소 비슷한 형태를 만든 것 같았다. 미라는 셔터 소리가 대여섯 번 들린 다음에야 카메라 앞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입소생들은 취업 준비 수업 31회차에 증명사진을 받아봤다. 미라는 3.5cm x 4.5cm의 작은 직사각형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그 속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마가 반들거렸다. 입꼬리는 어색하게 올라가 있었다. 미라는 강사의 입꼬리 모양이 사진 속 얼굴에는 잘 내려앉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정 가운데, 똑바로 있는 얼굴. 사진을 왼쪽으로 기울이면 얼굴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미라는 손톱만 한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봤다. 얼굴은 굴곡 없이, 매끈하고 평평하게 이어졌다.
넌 너한테 필요한 게 뭔지 알아?
별안간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지희가 미라의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지희는 손가락으로 미라의 증명사진을 가리켰다. 제대로 된 메이크업. 그게 필요해.
미라는 그 뒤로 일주일에 한 번씩 803호 지희의 방에 모델이 되어 주러 갔다. 지희에게는 수십 개의 브러시가 있었다. 길이와 모양이 모두 달랐고 지희는 수십 번도 넘게 각 브러시의 용도를 설명해 주었지만, 미라는 그 모든 용도를 결국 기억하지 못했다. 미라가 기억하는 것은 브러시가 아주 가느다란 털을 수천 개 아니면 수만 개 묶어서 만들어졌다는 것, 얼굴에 닿을 때는 모든 털이 같은 방향으로 부드럽게 뭉개진다는 것이었다.
지희는 커다랗고 넓적한 브러쉬로 미라의 광대를 쓸다가 미라의 왼쪽 광대 아래 점이 두 개 있다는 것을, 하나는 개암색, 하나는 초콜릿색이라는 것을 발견해 주었다. 미라는 그 순간 자신이 803호에, 지희의 방에 내려앉았다는 것을 깨닫고 아, 하고 작게 놀랐다.
2.
지희는 미라보다 반년 먼저 생활관에서 독립했다. 작은 복층 오피스텔을 얻어 아래층에 화장대와 전신 거울, 의자를 두고 손님을 맞았다. 복층에는 납작한 침대와 티브이를 뒀다.
보여, 안 보여?
이사 후 청소를 돕기 위해 미라가 복층집에 찾아갔을 때 지희는 자꾸만 미라에게 1층에서 복층을 올려다보라고 했다. 침대 보여? 티브이 보여? 손님이 이 집이 사람 사는 집인 걸 몰라야 한다고, 지희는 말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미라는 물었지만, 지희는 오히려 그게 왜 안 중요해? 하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는 사는 사람보다는 일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 거라고, 지희는 말했다. 너는 아직도 그걸 몰라?
사는 것과 일하는 것. 미라는 둘의 차이를 고민하면서 목뒤가 뻐근할 때까지 복층을 한참 올려다봤다. 어떤 각도로 봐도 침대 모서리가 빼꼼 보였다. 지희는 결국 침대보와 같은, 파란색의 천을 사서 짧고 긴 커튼을 만들어 복층에 달아야 했다. 남는 천으로는 밥솥과 싱크대를 가렸다.
미라는 생활관을 퇴소하기 전까지 파란 커튼이 가득한 그 집에 자주 찾아갔다. 허리를 숙이고 엉금엉금 걸어 올라가 복층 침대에 엎드려 티브이를 봤다. 지희도 미라의 옆에 엎드려 함께 티브이를 봤다. 티브이 속 사람들과 풍경들은 모두 조금씩 노랬고, 그래서 납작한 침대도, 복층 공간도 노랗게 빛났다. 둘은 노란빛 속에서 노란 화면을 바라봤다. 티브이 보면서 그대로 있어. 다녀올게. 예약 시간이 되면 지희는 그렇게 미라에게 속삭이곤 침대를 엉금엉금 벗어났다.
미라는 노란 천장을 향해 돌아누워 지희의 소리를 들었다. 계단 내려가는 소리. 스윽스윽 발을 끌며 걸어가는 소리. 탁, 스위치 누르는 소리. 일 층의 전깃불이 복층 커튼을 통과하면서 천장을 파랗게 물들였다. 커튼이 희미하게 좌우로 떨리면서 천장에도 물결을 만들었다.
미라는 온통 파란 주변을 둘러봤다. 지희는 정말 작정하고 삶의 모든 흔적을 복층에 숨기는 것 같았다. 구겨진 양말, 대충 접힌 티셔츠들, 메이크업 브러시가 잔뜩 꽂힌 컵, 샴푸, 치약, 칫솔까지 납작한 침대 옆에 주르륵 세워 두었다. 미라는 턱을 괴고 TV를 보다가 종종 고개를 돌려 지희의 파란 삶의 흔적을 쳐다보곤 했다. 메이크업 브러시 끝이나 낡은 티셔츠의 옷자락을 괜히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정숙이 했던 말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번 집에 살았던 것들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 집이 된다는 말.
미라는 처음 면접 기회를 얻은 태성인쇄소에 바로 취업이 되었다. 얼마나 큰 축복이니. 강서 여성 자립 지원 생활관의 생활지도실장은 미라에게 축하한다며 열심히 하라고 전했다. 취업 준비 프로그램 강사도 씩씩하게,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란다고, 미라를 격려했다.
그 시기 많은 이들은 미라에게 뭔가를 당부하거나 빌어 줬다. 미라는 그럴 때마다 정숙의 집에 남은 개들을 떠올렸다. 사실 ‘남은’ 개들이라는 말은 틀렸다. 그날 많은 개가 도망쳤다. 탈출에 실패한 개 50마리는 모두 구조되었다. 네 마리는 한 달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고 네 마리는 보호소로 옮겨졌다가 안락사되었으나 살아 있는 개들은 입양을 갔다. 미라는 수십 년간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언제나 흙 마당에 ‘남은’ 개들만 생각했다.
개들에게는 뭘 당부하거나 빌어 줄 수 있을까? 열심인 삶, 행복한 삶? 개들이 열심이나 행복이라는 말을 알까? 모를 것 같았다. 개들은 자기가 개인지도 모른다. 개가 뭔지도 모를 거다. 그 애들은 그냥 사는 거였다. 미라는 그래서 개들에게는 무얼 빌어 주거나 당부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강사가 가르친 인사는 태성인쇄소 면접에서 크게 활용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뭘 하는지 몰라도 됐고, 힘 있는 악수도 필요 없었다. 인쇄소 사장을 만났을 때 미라는 배운 딱 그대로 했다. 안녕하세요? 미라입니다, 자신 있게 손을 내밀었으나 사장은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미라의 손을 쳐다보기만 했다. 미라는 끝까지 손을 내리지 못했다. 손바닥에서 조금씩 땀이 났다. 기계 소리가 웅웅 적막을 채웠다. 한참 후 사장은 큰 결심이라도 하듯 숨을 내쉬더니 미라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곤 맥없이 위아래로 손목을 흔들다가 얼른 놔 버렸다. 미라는 혼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여기서 일 오래 못할 거예요.
사장이 손바닥을 웃옷에 문지르며 말했다. 일단 일이 바쁠 때까지는 계속 쓰겠지만, 원래 직원을 쓰는 데가 아니에요, 여기는. 사장은 미리 준비하라고 했다. 틈틈이 구직활동도 하고, 공부도 하라는 거였다. 미라는 허리 정도쯤 오는 프린터들과 테이블 위 그보다 높이 쌓여 있는 인쇄물들을 쳐다보면서 알겠다고 했다. 준비하겠다고.
성함은··· 태성이세요?
미라는 인쇄소의 이름을 생각하고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은 아니요, 하더니 그게 중요한가요? 물으며 미라를 쳐다봤다. 당연히 중요하지, 미라는 생각했지만, 더 이상 묻지는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사장이 태성의 할아버지인지, 아빠 아니면 아들인지 고민했다. 그렇다면 사장은 태성이나 태현, 태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사장에게도 이름이 필요했다. 일단 미라는 사장을 태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태성인쇄소의 전문 분야는 판촉물, 그중에서도 휴대용 물티슈에 붙이는 스티커였다. 거래처에서 디자인 파일을 받기, 확인하기, 스티커 원단을 준비하기, 인쇄하기, 물티슈에 부착하기. 태호는 미라에게 순서대로 일을 가르쳐 줄 때도 말이 많지 않았다. 보셨죠? 이 물음이 전부였다. 제대로 보셨죠? 미라는 봤고, 본 대로 했다. 태호의 시선이 있었던 곳을 쳐다보고, 발이 있었던 자리에 서고, 손이 있었던 자리에 손을 가져다 대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태호는 매해 물티슈 판촉 스티커의 트렌드가 바뀐다고 말해 줬다. 그해 트렌드는 바다였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온갖 상관 없는 업체의 판촉물에도 바다 사진이 배경으로 프린트되어 나갔다.
미라가 처음 맡은 판촉 스티커는 마린 진정 앰플 광고였다. 자연 유래 성분. 청량한 바다와 같은 피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이미지. 미라는 자신의 팔뚝을 쓸어 보았다. 서걱서걱하고 마른 느낌. 이것이 청량함일 것이라고 미라는 짐작했다.
미라는 바다를 만져 본 적은 없었다. 바다를 가 본 적도 없었다. 뭐? 그게 정말이야? 태호는 미라의 고백을 듣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 살면서 바다를 못 가 봤다니, 한탄했다. 나중에 시간 되면 꼭 가 봐. 차로 30분이면 가잖아. 태호는 미라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 막 인쇄되어 나오고 있는 중고차 회사의 판촉 스티커를 확인했다.
바다가 정말 청량한가요?
미라가 태호에게 물었다. 태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글쎄, 날이 좋은 날에야 그렇겠지, 답했다.
태성인쇄소에서는 날이 좋은 날에도 좋지 않은 날에도 청량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맨들맨들한 바다, 라벨지 위의 바다였지만.
바다는 디퓨저 광고에도 등장했다. 바다의 고요함을 내 방으로. 검푸르고 깊은 바다 안에 놓인 디퓨저 병. 미라는 스티커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검푸른 냄새. 고요한 냄새. 이게 바다 냄새일까?
그다음은 독서실 광고. 효성 독서실. 스티커 끝에서 끝까지 이어지는 바다. 바다 한가운데 책상과 의자를 놓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의 뒤통수. 바다처럼 고요한 독서실에서 파도처럼 높아지는 성적!
미라는 또다시 태호에게 바다에 관해 물었다. 바다가 정말 조용한가요? 독서실처럼? 태호는 조용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철컥 우웅 사삭, 철컥 우웅 사삭. 인쇄소 프린터에서는 부품이 맞닿는 소리, 종이에 잉크가 내려앉는 소리, 종이가 빠르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태호는 여전히 스티커에 눈을 고정한 채 그러고 보니 바다에서도 저런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파도가 일어나고 부딪치고 사라지는 소리. 미라도 바다를 보기는 많이 봤다. 물티슈에 잔뜩 붙은 바다. 영화에 나오는 바다. TV 광고를 메우는 바다. 그래서 미라는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생각하니 정말 바다를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미라는 마침내 궁금해졌다. 진짜 바다에는 뭐가 있을까? 파도는 정말 저런 기계음을 낼까?
그날 저녁에도 미라는 복층에 찾아갔고, 납작한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면서 지희에게 물었다.
너는 바다에 가 봤어?
지희는 당연히 가봤다고 답했다. 셀 수 없이 가 봤지.
좋았어?
미라가 지희에게 물었다. 글쎄. 지희는 답했다. 좋고 나쁠 게 뭐가 있어. 바다는 그냥 바단데.
왜? 바다 가고 싶어?
지희가 미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미라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가 본 적이 없어서 가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그런데 궁금하기는 해.
궁금하다고? 지희는 열한 살까지 바다가 있는 동네에 살았다고 했다. 바다는 생각보다 무서워. 특히 밀물 때를 조심해야 했다고 지희는 설명했다. 갯벌에서 놀다 보면 물은 금방 쳐들어온다고. 그러면 얼른 뭍으로 도망가야 한다고.
그 말을 들으니, 미라는 바다가 더 궁금해졌다. 순식간에 쳐들어와서 발밑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바다. 처음에는 축축한 갯벌을 휩쓸고, 그러고는 마린 앰플과 디퓨저 병, 공부하고 있는 아이, 놀고 있는 지희를 휩쓸어 버리는 바다. 바다에 가야겠다고, 미라는 결심했다.
3.
기차는 자정에 가까워 역에 도착했다. 역을 나오자마자 축축한 바람과 함께 온갖 냄새가 한 번에 밀려 들어왔다. 디퓨저 냄새, 화장품 냄새, 독서실 냄새, 잉크 냄새, 종이 냄새. 저 멀리서는 일어나고 부딪치고 사라지는, 철컥 우웅 사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라는 그토록 수많은 택시가 이 밤에 역 앞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는 데 놀랐다. 미라와 동행했던, 기차의 승객이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택시의 승객이 되어 연속적으로 이동해갔다. 그것이 어떤 흐름이라도 되는 양 미라도 택시에 올랐다. 택시 기사에게 바다로 가 달라고 말하니 기사가 고개를 돌려 미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바다에요! 모르셨어요?
기사는 저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바다가 보일 거라고 알려 줬다. 기사가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미라는 달려갔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바다는 나오지 않았다. 분명 바다 냄새는 진해지고, 바닷소리는 커지고 있는 것 같은데 바다는 코빼기도 내비칠 기미가 없었다. 미라는 한참을 달리다 지쳐서 길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미라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차 한 대, 사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황갈색의 기다란 벌레 한 마리가 고요히 있을 뿐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벌레였다. 아마도 바다 근처에만 사는 벌레일 것이다. 따라서 바다가 멀지 않을 거라고, 미라는 믿었다.
미라는 얼굴을 땅에 가까이 대고 벌레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등이 볼록한 벌레는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움직임이 없었다. 쉬고 있는 걸까? 잠이 든 걸까? 미라는 신발 끝으로 벌레의 꼬리 쪽을 살짝 건드렸다. 그런데도 움직임이 없어 이상하다고 여기던 찰나 머리 위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찾으세요?
미라가 아, 아니요, 하고 위를 올려다보니 큰 배낭을 하나씩 짊어 멘 두 사람이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 노인 두 명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봐서 그런지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어딘가 묘한 권위가 느껴졌다.
길 좀 물어봐도 될까요?
한 노인이 미라에게 물었다. 미라가 이 지역의 길을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저 방향이 바다로 가는 방향이라는 것만은 택시 기사가 알려 줘서 알고 있었다.
저는 이곳 길을 몰라요. 바다로 가는 길만 알아요.
미라가 답하니 노인 둘 중 키가 큰 쪽이 바다로 가는 길이라면 이미 알고 있어요, 지금 그곳에서 오는 길인 걸요, 했다. 그러자 미라가 도리어 길을 물어볼 상황이 됐다. 이쪽으로 가면 바다가 나오는 게 맞나요?
키가 큰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만 꽤 멀 텐데요, 길도 어둡고요, 혼자서 가려고요? 물었다. 미라가 혼자 가겠다고 하니, 노인은 일단 역 쪽 밝은 곳으로 우리와 같이 갔다가 날이 밝고 나면 첫 버스를 타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미라는 몸을 일으켜 제가 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멀리, 한참을 달려왔는지 미라가 떠나왔던 역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기나긴 어둠과 가로등 빛뿐이었다. 그렇지만 달려온 길을 더듬어 가다 보면 역이 나올 거였다.
역은 저쪽이에요.
미라는 어둠 속을 가리켰다. 키가 큰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요, 같이 가요, 말했다. 미라는 한시라도 빨리 바다를 보고 싶었지만, 어디선가 날아오는 바다 냄새, 파도 소리를 들으며 조바심이 났지만, 노인들의 말대로 바다가 아직 멀다면 이 밤에는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미라는 노인 둘을 이끌어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 둘과 밤길을 걷는 일은 분명 두렵고 불안해야 맞는 일인데 도리어 미라는 바다를 한시라도 빨리 봐야겠다는 조바심이 가라앉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행 오셨나요?
미라가 노인에게 물으니 두 노인 중 키가 작은 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역은 처음이에요,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참. 미라는 노인에게 이상한 익숙함을 느끼며 그렇군요, 하고 답했다.
새벽 기차로 돌아가려고요.
키 작은 노인이 숨을 밭게 쉬며 미라에게 말했다. 오르막길인 탓이었다.
저는 밤 기차로 도착했어요.
미라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늦췄다. 역의 불빛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빛이 흙바닥에 환한 동그라미를 알알이 만들었다. 고개를 드니 잘라 놓은 손톱만 한 달이 미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달이라고 작은 몸 주변으로 꽤 환한 빛이 돌았다.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역과 역 주변 24시 편의점, 카페의 밝은 불빛이 보였다. 미라는 안도감보다 아쉬움이 들었다.
조금 쉬었다 갈까요?
미라가 묻자, 노인들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미라를 보고, 입을 모아 그래요, 그렇게 해요, 했다.
결국 셋은 흙길 옆 유독 솟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한동안은 숨소리만 들렸다. 셋 모두 계속해서 걸어온 터였다. 미라는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아까보다 밝아진 것 같았다.
어디서 왔어요?
키가 큰 노인이 미라에게 물었다. 그건 미라가 전에 한 번도 답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미라는 생각했다. 한참이 지나도 미라가 답이 없자 키가 큰 노인이 우리는 옆 도시에서 왔어요. 기차로 오면 금방이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바다가 이렇게 가까울 줄이야, 탄식했다.
바다를 보셨어요?
미라는 노인들에게 물었다. 그럼요, 봤죠, 많이 봤죠. 노인들은 자신이 본 바다를 모두 나열했다. 부산 바다, 남해 바다, 제주 바다, 일본 바다, 베트남 바다, 필리핀 바다, 스페인 바다, 프랑스 바다···.
그렇지만 이곳의 바다는 어제 처음 봤어요.
키가 작은 노인이 말했다.
세계에 바다가 그렇게 많은가요?
미라가 물었다.
그럼요.
키가 큰 노인이 답했다. 모두 다르죠. 노인은 그동안 자신이 봤던 그 많은 바다를 떠올리는 모양인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미라는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벌떡 일어났다.
저는 가 봐야겠어요.
미라가 일어서자, 노인 둘이 미라를 올려다봤다.
어디로요?
바다로요, 미라가 답했다.
역이 아니라요?
네. 바다로 가야겠어요.
미라는 노인들에게 바다의 방향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혼자 발길을 옮겼다. 조심히 가세요. 미라가 노인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노인들도 네, 당신도요, 하면서 미라를 배웅했다.
이번에는 달리지 않았는데, 빨리 걷지조차 않았는데, 금세 모래사장이 나왔다. 아까는 길을 잘못 들었나? 미라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올라섰다. 해가 진 지 오래되어 여름인데도 모래가 서늘했다. 사각하고 마른 모래가 발등 위로 부드럽게 올라왔다. 발날에 따갑게 닿는 것이 있어 손으로 더듬어 보니 불가사리였다. 불가사리는 말라 죽어 있었고 심한 비린내가 났다. 미라는 불가사리를 집어 저 멀리 바다로 던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가벼웠다. 바다가 불가사리를 다시 살게 할까?
이곳의 바다는 물티슈 위의 그 어떤 바다와도 달랐다. 손톱만 한 달이 내뿜는 빛이 만들어낸 짧은 가로선 수백 개 때문이었다. 선들은 모두 좌우로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떨다가 다가오고, 떨다가 다가오는 선들. 미라는 선들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숨을 크게 내쉰 다음 다시 들이마셨다. 미라의 몸속 숨이 나간 자리에 선들이 무섭게 들이닥쳤다. 그렇게 몸속을 모두 달빛이 그린 선들로 채우면서 미라는 계속해서 바다 쪽으로 걸어 나갔다.
미라는 두려웠지만, 바다에 발을 담갔다. 그다음에는 발목을, 그다음에는 종아리를 담갔다. 바다에 몸을 담근 채 들으니 바닷소리는 프린트기 소리와 전혀 달랐다. 뭐랄까, 철컥 우웅 사삭 하는 세 박자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두 박자 소리에 가까웠다. 호-흡-하는,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과 같은 소리. 미라는 숨을 반 박자 참음으로써 자신의 호흡을 바다의 호흡과 맞췄다. 뒤에서 바다가 미라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몸을 돌려 육지 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프린트기가, 지희가, 파란 천이, 갈색의 털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미라는 다시 몸을 돌려 수평선을 바라봤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려졌다. 미라는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한발씩 내디디자, 미라의 몸이 바다에 서서히, 부드럽게 섞여 들었다. 해가 뜨고 있었다. 미라는 미라의 바다에서 그 모습을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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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은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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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를 의인화했다기 보다 사람을 강아지로 동물화해서 일상의 의식을 쫓아간 작품. 그렇다면 주인공의 지인과 주인공이 우연치 않게 만나는 낯선 타인들은 무엇으로 사물화된 것인가? 이러한 알레고리를 풀어가며 바다가 의미하는 바를 유추해보는 건 이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는 절대 요소이다. 태평 인쇄소 사장은 여러 가지 바다의 형상을-바다 소리를 내며 출력되는 다양한 바다 사진들-, 노인들은 바다의 변화를-바다에서 여기로 왔고, 세계 각국의 바다를 보았다고 말함- 상징하는 바다 그 자체가 아닐까? zero is you를 유영은화 한 소설을 일독해보길 권한다.
바다와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바다를 본적없던 주인공이 인쇄소에서 자꾸 보게된 지면상의 바다를 보다가 실제 바다를 찾아나선 여정이, 주인공의 과거에 수많은 개들과 함께 고여있듯 살았던 삶에서 좀 벗어난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첫 3인칭 소설이신가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