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에서 멀리
- 작성일 2026-01-01
- 댓글수 1
태양에서 멀리
김채원
지금부터 아침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질 것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솔지에게도 주어질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어떠한 저항도 없이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름의 궤적을 그리며 부지런히 그 시간을 사는 일. 솔지에게 그것은 꽤나 쉬운 일이었다.
그치만 어려운 일인데? 솔지는 생각했다. 꽤나 쉽고, 그치만 어려운 일이라고.
알겠습니다, 솔지는 늦저녁에 창문을 열어 두고 혼자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선과 악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잘못 걸렸다, 하면서도 끝까지 읽기는 다 읽었다. 치워 없애야만 하는 악이 존재하고 그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이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됐다. 누가 보아도 선한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물들이 고통받는 이야기.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우정이나 사랑 같은 것들. 에구, 눈부셔라. 에구, 싫어라. 솔지는 이 모든 것에 필요 이상의 적의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지의 약점을 건드리기 때문이었다.
솔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거였다. 솔지는 배신하기를 잘했다. 그러니까 배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정도의 배신을 참 잘했다. 최근에 솔지는 세 사람의 친구를 배신했다. 세 사람의 친구에게 차례차례 합성 마약을 권하였다. 세 사람의 친구 민지, 차은이, 가영이가 고등학교 건물 5층 화장실 맨 끝 칸에 모여 차례차례 그것을 받아 보았다. 처음이니까 그냥 줄게. 이게 뭔데? 알지만 한번 물어볼래. 그럼 알려 줄게. 몸에 좋은 약이야. 약의 이름은 해마야. 네가 지었어? 응, 내가. 이름이 영 징그럽고 별로다. 거절해도 돼? 왜? 귀여운데···. 원래 이름은 뭔데? 나도 몰라. 요즘 입시 준비하느라 머리가 아프다며. 생리통도 심하다며. 그런데 나 지금 진짜 돈이 없어···. 괜찮아, 내가 돈이 많아! 내 지갑을 보여 줄게!
솔지의 암호 화폐 지갑은 영단어로 된 열두 개의 암호를 입력해야만 열어 볼 수 있었다. 지갑의 암호는 솔지가 좋아하는 영단어의 단순한 나열이었다. 첫 번째 단어는 window였고 두 번째 단어는 forest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mountain, 산이었다.
겨울 산을 잘게 부순 듯한 흰 알갱이들을 솔지는 차분하게 소분해 가지고 다녔다. 합성이라는 게 둘 이상의 것을 합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인데··· 정확히 무엇과 무엇과 무엇이 기타 등등 합쳐져 마침내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인지는 제조하는 역할이 아니라서 몰랐다. 예전에는 약의 성분이 비교적 단순했는데 이제는 좀 복잡해졌다고들 했다.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면 약의 성분이 계속해서 복잡해져야만 한다고들 했다···
···전부 주워들은 이야기였다. 솔지의 역할은 제조된 물건을 가져다가 주변에 판매한다고 해야 하나 일단은 준다고 해야 하나 여하간 몸을 움직여 여기에서 저기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몫몫을 나누어 돌리는 그런 거였다. 여하간 그런 거. 평소에 솔지는 자주 그렇게 말을 마무리하곤 했다. 여하간 그런 거야. 그러면 솔지의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아, 그런 거, 하고.
솔지의 영업 방식을 말해 보자면 퍽 평범했다. 처음에는 그냥 주고, 다음에는 판매하였다. 그 과정에서 솔지는 페퍼로니 피자를 떠올린 적이 있는데 그것은 솔지가 이전에 잠깐 일했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페퍼로니 피자 한 조각을 시식하라고 무료로 나누어 주다가 맛이 좋아 손님들이 자꾸 찾게 되자 정식 메뉴로 등록해 그다음부터는 무료로 주지 않고 돈을 받은 일과 비슷하기도 안 비슷하기도.
솔직히 안 비슷하지···. 솔지의 평범한 영업 방식은 가능한 다른 방식들에 비해 번거롭지도 않고 벌이도 괜찮았다. 상대를 서서히 약물에 중독시킨 뒤 점점 더 큰 금액을 부를 수도 있었지만 솔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서히 약물에 중독시킨 뒤에도 항상 같은 금액을 불렀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였다. 값을 계속 올리는 경우 구매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야, 너 이거 범죄야. 몰라? 내가 다 걸고 너는 신고할 거야. 이 씨발년아. 구매자들은 화가 나면 이것이 범죄라는 것을 새삼 되짚어 주거나 대뜸 욕을 했고 솔지는 으음, 구태여 그런 말로 귀를 더럽히며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솔지는 일정한 금액만을 제시해 구매자들에게 신뢰받았고 귀를 더럽히는 일도 거의 없었다.
솔지에게 있어 귀는 무엇보다 소중한 기관이었는데 그 이유는 동생이 잠들기 전에 주무르기를 좋아하니까. 솔지의 귀는 끝이 뾰족하고 귓불이 납작하니 얇아 누군가 한 번 꼬집은 만두피 같았는데 솔지의 남동생인 종희는 그런 솔지의 귀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잠들기 전에 꼭 솔지의 귀를 주무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야만 단잠에 들었다. 아무래도 종희의 귀는 한쪽이 반쯤 잘려 나갔기 때문일까? 반쪽짜리 귀는 아무리 만져도 만지다 만 것 같은 모자람을 줄 테니까.
종희는 훈련 중 사고로 귀가 잘려 유도를 관둔 뒤로 한낮에도 매일매일 얕은 잠. 더 해봐, 더 해봐, 바로 이럴 때 뭔가 해야지, 하는 코치들의 목소리가 머리통을 쪼갤 듯 울리는 한밤에는 솔지의 귀를 만지며 울다가 아이같이 깊은 잠. 눈앞에 자연스레 상연되는 왜곡된 풍경을 차단하듯이 눈꺼풀을 닫아 버림. 자정에 가까워지자 솔지는 어김없이 종희의 방으로 들어가 종희 옆에 누웠다. 나이에 맞지 않게 두툼한 종희의 손이 솔지의 귀를 더듬거리지도 않고 단번에 찾아내었다. 솔지는 종희의 손에 만져지고 있는 자신의 오른쪽 귀와 만져지지 않고 있는 왼쪽 귀 모두 동시에 조금씩 열이 오르고 있구나, 귀는 둘이 아니고 하나인 기관이구나, 생각하다가 어느 날 종희가 잠결에 힘을 줘 내 귀를 뜯어버리면 어쩌지, 걱정해 보기도 했다. 나란히 배치해 볼 만한 장면이었다. 귀 주무르기와 귀 뜯기. 주물러진 귀는 따끈하고 물렁해서 뜯기에 좋을 것 같고··· 종희가 도무지 그런 힘을 낼 것 같지 않아 속상하고.
솔지는 곤히 잠든 종희를 확인한 뒤 이마에 작게 자른 패치를 붙여 주었다.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적당히 잘라서 매일매일 붙여 주었다. 그것은 열이 끓는 아이의 이마에 젖은 물수건을 얹어 주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솔지는 작게 자른 패치 중 종희의 이마에 붙여 주기에는 모양이 밉게 잘린 것을 하나 골라 가장자리에 불을 붙였다. 너울너울 피어나는 연기를 들이마신 뒤 팔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그리고 교도소에 가게 되는 환영을 보았다. 제자리에서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되풀이하며 적당히 끊어서 매일매일 보는 환영이었다. 솔지는 교도소에 들어가 벽을 보며, 때때로 어째서인지 흠씬 얻어맞은 얼굴로 양 볼 가득 수박을 먹으며,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해 온 처음의 작은 선택들을 다시금 생생히 경험하였다. 그때 그건 하지 말 걸 그랬지? 말소리가 들리면 뭐 꼭 그렇지도 않아, 대답하곤 했다. 그때 그건 할 걸 그랬지? 말소리가 들리면 아니 뭐 꼭 그렇지도 않아.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모든 창문을 닫아 놓은 캄캄한 방에서 귀가 먹먹하도록 울려 대던 천둥소리가 멎고 이제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며 낮은 휘파람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솔지는 종종 소리를 보고 빛을 들었는데 오늘은 소리가 소리로서 명징하게 들려, 들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노래를 흥얼거렸다. 제대로 된 마무리도 없이 음조와 억양에 차이를 두며 이 노래에서 저 노래로 눈을 깜빡이고 눈살을 찌푸리고 손등을 긁고 다리를 흔들흔들··· 입안에 싱거운 침이 고였다. 혀로 침방울을 만들어 입 밖으로 내뱉자 그것이 매끄럽게 빛나는 커다란 수정으로 변하였다. 수정이 바닥에 떨어지자 꽃봉오리가 터지듯 조각조각 깨지며 아카시아 향이 났다. 이 많은 조각들을 어쩌지?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 된 솔지가 산산조각 난 수정 위에 서서 발밑으로 번져 가는 피를 내려다볼 수 있을까? 그러지 않아도 돼 솔지야,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들리고 사실로 보였다.
살아가는 솔지에게 있어 삶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하나는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반까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급식을 먹고 친구들과 운동장을 돌며 대화하거나 그때그때 교실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며 대화하지 않기, 또 하나는 일하기(배신하기), 또 하나는 종희에게 귀 내어 주기. 나머지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규칙의 범주에 둘 수 없었다. 범주에 두지 않은 일 중에 솔지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일은 일주일에 한두 번 혹은 많게는 세 번 새벽같이 눈을 떠 교복을 챙겨 입고 학교 근처에 있는 미용실에 들르는 일이었다. 가서 머리를 만져 달라고 하는 거였다. 만져 달라고 하기보다는 감겨 달라고 하는 거야. 그거나 그거나. 그거나 그거나가 아니야. 여하간 그런 거였다.
보육원을 운영하는 솔지의 엄마 아빠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종은에게 머리를 내어 주는 일은 종희에게 귀를 내어 주는 일과는 전혀 다른 온도의 일이어서 솔지는 몸속에서 머릿속에서 귓속에서 차츰차츰 고여 찰방거리는 알 수 없는 물의 온도를 중간으로 맞추기 위해 그러니까 너무 높아진 체온을 낮추는 일이 보다 필요하겠다 싶은 날에 아침 일찍 미용실을 찾았다. 길게 자란 머리칼을 들추어 그 사이로 신선한 공기가 드나들게 하는 일은 가볍고 상쾌하고 시원했다. 엉켜 있는 생각들을 풀지 않은 채로 텅 비워 내고 잊기에도 좋았다. 그리고 종은은 찬물로만 손을 씻고 찬물로만 머리를 감겨 주기 때문에 항상 손이 부르터 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너무 차기도 해서···
···나는 차가운 손을 좋아하나?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솔지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서울 중구에 위치해 있고 미용실은 학교 본관에서 나와 후문 쪽 등나무길의 내리막을 저항 없이 터벅터벅 내려가다 보면 보였다. 거꾸로 되짚어 보자면 교실이 모여 있는 학교 본관에 도달하기 전에 후문 쪽 등나무길을 오르지 않고 방향을 조금 틀면 거기에 미용실이 있었다. 미용실의 양옆으로는 무인 카페와 빵집과 정미소, 케이크 가게, 공사 중인 배수구와 부동산과 민영 주차장이 있었는데 솔지는 그곳들을 제대로 쳐다본 적도 들러 본 적도 없었고 (민영 주차장은 걷다 보면 몇 걸음 침범하게 되긴 했다.) 미용실 간판이 눈에 보일 때부터 그 간판만 노려보며 걸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금방 도착했다.
모처럼 가을이 되었는데 내내 흐린 날씨였다. 보통이라면 이때쯤에는 맑고 먼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을 텐데 작년과는 달리 그렇지가 않았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흐리다고 해요. 미용실 의자에 앉아 세로로 긴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솔지가 휴대폰으로 날씨를 확인하며 말하자 종은은 그 뒤에 서서 솔지의 새까만 머리칼을 너울너울 들추어 찬 공기가 드나들게 하며 그러니? 하고 물었다.
네. 그렇다고 비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고요.
너희 나이에도 날씨에 관심을 두는구나. 몰랐네.
날씨가 중요해요. 몸속의 폐하고 관련이 있거든요. 혹시 폐가 약하세요?
폐에 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튼튼해. 늘 움직이다 보니 손목이 안 좋지.
그렇구나, 그치만 폐도 항상 움직일 텐데··· 솔지가 종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하면, 선천적으로 폐가 약한 솔지가 어딘가에서 전해 듣기로, 폐가 약한 사람은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급격히 우울을 느끼게 돼 활기가 없어진다는 거였다.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활기가 없어질 확률이 높은 날씨에는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것이 맞지 않겠어요? 활기가 없어지면 물구나무를 선 채로 정수리를 쪼개 온몸의 피를 싹 다 빼 버리고 싶기도 해 여러모로 곤란하니까요. 비가 내리기 직전의 습한 날씨에는 정말로 숨이 차서 걸어 다니기도 힘들어요.
얘가 징그러운 소리를 하네. 그런데 들어 보니 그렇겠다. 이제 머리 감게 저쪽으로 가자.
솔지는 시키는 대로, 종은을 따라 종은이 말하는 저쪽으로 갔다.
그런데 너 한의원이나 약방에 다니니?
아니요? 왜요?
어디서 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해서···.
그럴 리가 없는데요···.
솔지는 자신만만하게 자기 팔을 들어 킁킁거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니면 말고. 나쁜 냄새가 난다는 뜻은 아니었어.
네!
종은은 어제 사 둔 빵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솔지의 머리칼을 정성스럽게 감겨 주었다. (솔지도 종은에게 빵을 조금 얻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두피를 오랫동안 찬물에 불리고 뒤쪽까지 구석구석 샴푸를 한 뒤 다시 찬물로 깨끗하게 헹구어 주었다. 그런 다음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짜낸 뒤 드라이기로 미지근한 바람과 찬바람을 번갈아 쏘아 말려 주기까지 하면 대략 30분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솔지는 말을 하다가 말다가 웃다가 손톱을 뜯다가 비닐을 씹다가 음악을 듣다가 티브이를 보다가 거울을 보다가 몇 분 동안은 유리창 너머로 아침 이슬이 내린 주택가 풍경을 보았고 종내에는 꾸벅꾸벅 졸았는데 종은은 얼음을 가득 담은 컵에 커피를 타 마시며, 졸고 있는 솔지를 깨우지 않고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마침 손님도 없고··· 어리고 싱싱한 머리칼을 신경 써서 한 줄로 땋아 주고 싶어졌다. 체육 시간에도 거뜬하려면 두 가닥보다는 세 가닥이 좋겠지, 곰곰이 생각한 종은이 솔지의 머리칼을 세 가닥으로 동등하게 갈라 어긋나게 엮기 시작했고 짠, 인제 그만 일어나 봐.
···.
제 머리가 이상해졌어요.
졸다가 깬 솔지가 말했다.
내 눈에는 괜찮은데. 이상하면 다시 풀어 줄까?
아니요?
솔지는 오래된 벨벳 소파에 놓아두었던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그럼 또 올게요, 인사한 뒤 미용실을 나섰다. 평소보다 늦게 나선 편이었지만 지각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학교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평소의 호흡으로 오르며 자신이 졸고 있는 사이 땋아진 머리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왜 땋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왜 나는 중간에 깨지도 않고 계속 졸았을까? 머리를 땋아 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을 때마다 한 줄로 땋은 머리칼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세 갈래로 갈라 촘촘하게 땋아서인지 움직일 때마다 이마가 당겼는데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고 도리어 튼튼한 밧줄을 매단 것처럼 여겨져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내 머리칼을 잡고 죽기 살기로 매달려 볼 수도 있겠고. 왠지 씩씩하게 걷게도 되고. 그치만 또 다른 누군가 악의를 갖고 잡아당기고자 한다면 단번에 잡아챌 수도 있으니 위험하기도 해. 땋은 머리를 한 나에게 있어 그보다 더한 위험이 있을까?
아마 있고자 한다면 있을 거야, 오늘은 운동장에서 있을 체육 수업을 대신해 강당에서 졸업생 강연이 있는 날이었다. 솔지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여자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졸업생은 여자였고, 현재 자신이 속한 대학 연구회의 여름 모임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할 예정이라고 앞서 공지가 돼 있었다. 연구회의 여름 모임이라는 거 전혀 궁금하지 않아, 솔지는 생각했지만 그런 솔지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강연은 예정대로 4교시에 진행될 거였다. 솔지는 그전까지 해야 할 수행 평가 과제가 있었는데 아직 안 했다. 수행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솔지는 매점에서 꼬미루미 요구르트와 트롤리 젤리를 사 들고 본관 계단을 올랐고 (둘 다 사과 맛이었다.) 계단을 오르다가 같은 반 학생인 보하를 마주쳤다.
나 너 머리 땋은 거 처음 봐.
나도 그래.
그러고는 보하는 내려가던 계단을 마저 내려갔고 솔지는 올라가던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솔지는 그냥 머리를 풀어 버릴까 잠깐 고민했는데 실제로 풀지는 않았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게 된 것이 잠깐 어색했는데 그럭저럭 견딜 만한 어색함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 않은 어색함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를테면 뒷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조용해지는 어색함. 누구도 솔지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말을 걸지도 않고 천장에서 커다랗고 정교한 손이 나타나 갑자기 머리 위에 모래를 흠뻑 부은 듯이 조용함. 솔지는 뒤에서 두 번째, 창가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책상에 책가방을 놓아두고 말없이 주위를 살폈다. 교실 천장이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다. 너무 가까워 보여서, 천장에서 내려오는 형광등 불빛이 닿은 자리가 그거, 마치 백자처럼 창백하게 빛났다. 교실에 있는 모든 학생의 이목구비가 새하얗게 지워진 채로 다만 반질반질한 백자 같았다. 예쁘다, 조심히 다뤄야지 깨지면 아플 거야.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커튼이 부푸는 건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고 그런 건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 좀 이상해···. 그러니까 솔지밖에 모르는 형태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들이 있었다. 탕! 누군가 캔의 고리를 꺾고서 음료를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들릴 수 있는 걸까? 솔지는 얼굴을 찡그리고서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렇게까지 크게 들리는데? 솔지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라는 건 잘 몰랐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생각이 나에게도 있어.) 그랬기에 누구도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말을 걸지도 않고 커다랗고 정교한 손이 갑자기 머리 위에 모래를 흠뻑 부은 듯이 조용한 교실을 견디다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제는 내가 싫어졌구나?
하지만 그것은 솔지의 오해였다. 교실 안의 학생들은 솔지가 나타나서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 아니라, 옆 반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뒷문이 열리자 괜히 겁을 먹고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겁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겁이 많다면 그만큼 상상이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솔지의 옆자리에 앉은 겁이 많은 나영이와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겁이 많은 아야코가 참고서 한 페이지에 사이좋게 얼굴을 파묻고 잘린 두 발을 댕강댕강 그려 넣으며 알지 이거 네 발이다, 모르네 이거 네 발이야, 하고 실랑이를 벌이다 이제는 내가 싫어졌구나? 하는 겁이 많은 솔지의 나지막한 물음에 뭐라고? 고개를 들어 방금 생각난 듯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아무도 솔지를 안 싫어해. 지금 왜 이렇게까지 조용해졌느냐 하면 말이지··· 어쩌고저쩌고. 그사이 교실이 다시 시끄러워졌고, 천장이 원래대로 다시 높아졌으며, 모두의 이목구비가 다시 제대로 보였다.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솔지는 다시 한번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내가 오해했구나?
그래, 그렇다니까, 그렇다면··· 솔지는 자신이 상황을 오해했음을 깨닫고 언제나처럼 무언가를 하기 위해 자기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작은 공 모양의 사과 맛 젤리를 꺼내 먹으며 먼젓번에 읽다 만 책을 조금 더 읽고, 독서 기록장에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나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을 요약해 적었다. (이처럼 이 소설의 미덕은 인물들이 행렬의 앞이 아닌 뒤를 따를 줄 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 다음 1교시 문학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스도쿠를 풀다가 대각선으로 숫자 3이 자꾸 겹쳐서 포기하고, 수업이 시작되자 영어 관용구 표현을 직접 손으로 써 가며 몰래 공부했다. 솔지의 수행 평가 과제이기도 한 영어 관용구 표현을 중심으로 에세이 작성하기.
① Piece of cake: 케이크 한 조각.
└ 무슨 뜻일까요? 아주 쉬운 일. 정말로 케이크 한 조각처럼 쉽다!
② Break the ice: 얼음을 깨다.
└ 무슨 뜻일까요? (대화를 시작할 때)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다.
③ Bite off more than one can chew: 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베어 물다. (솔지의 메모: 좋아)
└ 무슨 뜻일까요? 감당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맡다.
④ Bark up the wrong tree: 틀린 나무에 짖다.
└ 무슨 뜻일까요? 잘못된 사람이나 방법을 선택하다.
└ 예문: If you think I did it, you’re barking up the wrong tree.
└ 표현의 유래: 사냥개가 사냥감이 없는 나무 아래에서 짖는 모습에서 비롯되었음.
⑤ Let the cat out of the bag: 가방에서 고양이를 꺼내다.
└ 무슨 뜻일까요? 비밀을 누설하다, 몰래 하려던 일을 드러내다.
└ 예문: I wanted it to be a surprise, but my sister let the cat out of the bag.
└ 표현의 유래: 중세 시장에서 사기를 칠 때 자루에 담긴 돼지를 팔겠다고 하고 실제로는 고양이를 넣어 속이는 사례에서 비롯되었음. 자루를 열어 고양이가 나오면 속임수가 들통나는 것과 동시에 비밀이 밝혀지는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다.
└ 비슷한 의미의 관용구: Spill the beans. 비밀을 실수로 말하거나 누설할 때 사용하는 표현. 콩을 쏟다, 라고 해석하지만 그 뜻은 비밀을 무심코 말해 버리다···
…콩을 쏟는다는 표현에는 여러 개의 치아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고 그게 아주 재미있다고 솔지는 생각했다. 콩은 와르르 쏟아지려나 우르르 쏟아지려나? 그리하여 솔지는 Spill the beans라는 관용구 표현을 골라 에세이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사람 다섯 명 정도가 들어가 누울 수 있는 좁다란 글을 쓸 거야. 사람 다섯 명 정도가 들어가 누울 수 있는 좁다란 글에서, 솔지는 10월의 한 목요일,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담임선생님의 호출로 교무실에 가게 된다. 거기엔 세 사람의 친구 민지, 차은이, 가영이가 서 있다.
너희 왜 거기 서 있어?
우리가 복도에서 무심코 콩을 쏟았거든. 그런데 그 콩이 다 네 거야.
어떻게? 와르르? 우르르?
와르르였던 거 같애···.
우르르일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여하간 너희가 나처럼 관용구를 한 번이라도 공부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콩이 와르르 쏟아진 상황에 처한 솔지는 담임선생님 앞에 서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희고 작은 얼굴을 비스듬히 아래로 숙인다. 교무실 문 너머로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학생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솔지도 발소리를 따라 제자리에서 슬쩍 발을 굴러 본다. 왠지 또 하고 싶어져 한 번 더 해 본다. 솔지의 발밑에는 나른한 오후의 태양빛이 네모반듯하게 드리워져 있고 그 가장 밝고 환한 자리에서 얌전히 한발 물러나는 솔지야, 네가 네 잘못을 안다면 선생님은 너를 용서해 줄 거야, 하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솔지의 에세이는 점수가 크게 깎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래서 솔지의 쏟아진 비밀과 잘못이란 게 대관절 무엇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하게 서술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의 중심 소재를 명확히 서술할 것!) 그러거나 말거나 에세이 속에 있는 또 다른 솔지는 담임선생님의 책상에 놓인 네 개의 폴리프로필렌 서류함을 노려보고 있다. 용서? 요옹서어어? 하고 반발해 생각하고는 저는 그게 잘못인 줄 몰랐어요, 하고 거짓말로 대답하고 있다. 거짓말을 하며 마음속으로 분명하고 순진한 기쁨을 맛보고 있다. 그것은 잘 익은 사과의 단맛과도 같은 기쁨이다. 비밀을 만드는 기쁨보다야 못하지만 어쨌든 그래도 그것은 기쁨이다. 그 기쁨에 들떠 솔지는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늘 궁금해하였던 것을 숨기지 않고 질문하게 된다. 누구를 만나게 되더라도 대뜸 질문하고 싶어지거나 혹은 영영 숨기고 싶어지는 그런 것을 다소 정리된 목소리로 그건 그런데요 선생님, 선생님은 어떤 소리를 우연히 들었는데 그 소리가 계속 듣고 싶으면 어떻게 하세요? 그런 어려운 질문을 왜 하는 거니? 너 잘못했냐고 안 했냐고? 아니요 아니요 그러면요 선생님, 선생님은 어떤 어둠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 어둠을 계속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세요?
솔지는 수행 평가 과제를 마무리하고 약간 풀이 죽은 채로 혼자 운동장을 걸었다.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마음에 들게 고칠 자신이 없었다. 솔지의 마음에 들게 고치려면 솔지가 우연히 듣게 된 어떤 소리와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어둠을 잇거나 잘라 충분히 설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우연을 잇거나 잘라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솔지의 언어가 모자랐다. 지금 운동장에서 솔지의 귀에 들리는 우연한 소리와 솔지의 눈에 보이는 우연한 어둠은 과거에 우연히 듣고 보았던 어떤 것 그러니까 솔지가 끝끝내 기억에서 몰아내지 못하고 반복해 떠올리게 되는 그것과는 달랐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는 것처럼, 그것은 뚜렷하면서도 또 그다지 뚜렷하지 않게 남아 있었다. 손장난으로도 우연을 다시 만들어 낼 수는 없구나, 솔지는 생각했다. 몰랐는데, 우연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때 가까운 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쉬는 시간까지 발야구를 하던 학생들의 공이 저 멀리 호를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얻어맞은 가여운 공이 날아가고 있구나. 솔지는 공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정면으로 되돌려, 운동장에 있는 처음 보는 학생들의 얼굴과 이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언젠가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과 이 중에 누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더라도 졸업하고 나면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아무것도 아닌 생각이 될 거라는 생각 그리고 앗, 거기 공 좀 던져 줘! 라는 말소리. 뜻밖의 환호성을 듣게 된 일은 솔지에게 꽤나 좋은 자극으로 남아 솔지는 있는 힘껏 공을 던져 주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차분하게 떠올려보게도 됐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방금 들은 뜻밖의 환호성, 길 가다 주운 글리코 캐러멜, 주머니가 달린 옷, 달아나는 것이 즐거운 보육원 아이들의 뒷모습, 친구들, 절교, 체온계, 담요, 잠, 조용히 하는 법, 종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웃긴 이야기들, 베란다, 정신활동 훈련, 약간의 돈, 작은 공, 작은 요령들, 격자무늬 창, 아까징끼, 엄마 아빠 나 종희가 어겨서 해결되지 않은 모든 약속··· 다 괜찮지만 사실 죄다 형편없음. 그치만 내가 있는 곳을 싫어하고 싶지 않으므로 어떻게든 다 괜찮음. 솔지는 목소리를 아주 작게 해 중얼거렸고, 지나가던 위 학년의 학생들이 쟤 좀 이상하다, 하고 짧게 말을 나누었다. 이상하고 웃기고 슬픈 것. 죽은 것 말고 살아 있는 것. 솔지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좋아하기도 하였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도 있었다.
하루에 배정된 모든 수업을 듣고 나서 (4교시에 졸업생 강연이 있는 동안 솔지는 강당에 가지 않고 운동장에 앉아 다른 학년의 학생들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낙엽이 떠 있는 연못을 들여다보았고 그것을 들켜서) 오후에 남아 교실 청소를 하고 함께 청소한 학생들과 조금 지친 기색으로 인사를 나눈 뒤 몇몇은 학원으로 몇몇은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솔지는 학원으로도 집으로도 향하지 않고 학교 등나무길 가장자리에 잠깐 우뚝 서 있었다. 화단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서서 기다렸다. 솔지가 보기 원하는 장면은 멀리서 종희가 우산을 손에 들고 달려오는 모습. 그건 본래부터 종희가 항상 하던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본래부터 그 모습을 보고 여기, 손을 흔드는 사람이니까. 이따가 우산 가져가도 돼? 비가 쏟아지면 불어난 강물 쪽으로 가 보자.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 최근에 물속에 낮은 둑을 심었대. 응, 그러자. 늦지 마.
그러나 종희는 이제 솔지에게 가져다줄 우산 같은 것은 잊어버렸다. 일기예보가 틀려 당장에 비가 쏟아진다고 하더라도 종희는 우산을 들고 솔지에게 오지 않을 거였다. 솔지는 가끔 그런 종희를 두들겨 패고 싶었는데 종희가 하필 맞은 것만 기억하게 될까 봐 그러질 못했다. 종희의 행동은 솔지에게 있어 가장 알기 쉬운 것이었는데 이제는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됐다. (그러나 솔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이제 솔지의 행동도 종희에게 있어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솔지가 온종일 거기 서서 오지 않는 종희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솔지는 대략 한 시간 동안 그러니까 서 있을 수 있는 만큼 어쩌면 서 있고 싶은 만큼 서 있다가 마치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서늘한 마음이 들 때면 아차차, 재빨리 뒤돌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소리 내 걸어갔다. 걷는 도중에 함께 일하는 익명의 삼촌에게 파란색 항공 우편물에 관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골목에 숨어 아무렇게나 잘린 작은 패치를 하나 태우고 연기를 들이마신 뒤 맥이 빠져, 거인은 수영을 잘해서 큰 배는 필요 없다는 아이들의 말을 엿듣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그거 정말이야? 말을 걸기도 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그 아이들이 대답 없이 돌로 긋는 흰 선을 발로 밟기도, 육교를 건너는 무표정한 세 사람의 남자를 지나치기도 했다.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물리 선생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물리 선생님도 솔지를 내려다보았을까?) 지하상가의 조그맣고 눅눅한 가게에서 오래된 물을 사 마시기도 하고, 계단을 올라서 나오는 길에 불에 그을린 유리 조각을 주워 눈가에 대고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 보기도 했다. 솔지는 그런 방법으로만 태양을 마주 볼 줄 알았고 다른 방법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구름이 지나가고 해는 서서히 지고 바람은 조금만 불었다. 어떤 게 더 안 좋은 걸까? 구름이 지나가는 것도 해가 서서히 지는 것도 바람이 조금만 부는 것도 애초에 안 좋은 것들이 아니었기에 더 안 좋은 것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도 참 수수께끼야··· 솔지는 중얼거렸다. 그런가··· 솔지는 물을 많이 마셔 오줌이 마려웠는데 마땅히 오줌을 눌 만한 곳이 없어 가까운 강가를 향해 걸었다. 잡초가 무성한 강가에 다다르자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안쪽으로 쓰러진 나무를 반복적으로 타 넘으며 죽어라, 죽어라, 외치는 덩치가 작고 여윈 중학생들. 야, 너희. 못되게 굴지 마. 그 나무는 이미 죽은 건데. 솔지가 말하자 말을 뚝 그치고는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솔지는 중학생들이 멀어질 때까지 빤히 지켜보다가 길게 자란 풀들 사이에서 오줌을 누었다. 그러고는 쪼그려 앉은 자세로 하품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것은 솔지의 버릇이었는데 태생적인 결함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약간 번거롭기는 한 버릇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금방 하품이 나왔고 솔지는 뒤처리를 하고 일어나 교복 치마를 털고 어둑해진 발밑을 보며 걸었다. 여행안내 책자와 벌레들, 차 찌꺼기, 모카신, 소형 전구, 유리 장식들, 씨앗들, 성냥갑, 플라스틱 물통, 커다란 얼음 무더기와 그 아래 죽은 고양이가 두 마리 보였다. 두 마리 다 척추 몇 대가 으스러진 듯한 기묘한 모양으로 네 발을 벌리고 죽어 있었다. 누구한테 얕잡아 보였을까? 솔지는 죽은 고양이들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누가 이 고양이들을 얕잡아 보았을까? 솔지는 고양이 사체에 각각 올려진 커다란 얼음 무더기를 맨손으로 치워 주고 얘네한테는 흙도 무거우려나, 조금 고민하다가 그 위에 다시 축축한 흙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농담 중에 한 개씩, 두 개를 골라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가까이서, 그다음에는 멀리서. 그것들은 솔지 말고는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이었다. 솔지 말고는 아무도 듣고 웃지 않는, 그러나 때때로 빛을 발하는 솔지만의 불행이었다.
흙이 묻은 두 손은 강물에 담가 씻었는데 손톱에 자꾸 이끼가 끼었고 그 탓에 아무리 씻어도 미끌거려 몇 번 더 헹구다가 적당히 더러운 채로 두었다. 그러는 동안 해가 완전히 저물어 가로등이 있는 곳까지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걸어야 했는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솔지는 별말 없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여기저기 넘어질 뻔하며 걸었다. 걸으며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속 걷게 됐다. 강물에서 나는 물비린내와 젖은 풀냄새, 흙냄새에 멀미가 났다. 다시마나 미역, 감태 같은 해조류를 좋아하는데도 그랬다. 허허롭고 심심해 주변을 둘러보아도 바람에 흔들거리는 가늘고 긴 풀들과 솔지 말고는 크게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공기 속에 홀씨 같은 무언가가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날아다녔고 저 반대편에서는 어이, 어이, 하고 운동하는 남자들의 구령 소리도 들렸다. 계속해서 불어오던 강바람이 어느 순간부터 솔지의 등을 부드럽게 떠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솔지는 그것이 신기해 어두운 강이 있는 쪽을 계속해서 돌아보며 알겠어, 집에 가야지, 나도 집에 가야지, 하고 즐거워하다 스스로가 우스워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지가 살면서 이해하고 싶었던 것들이 웃고 있는 솔지의 등 뒤로 다가와 상냥하게 솔지를 끌어안는다면 그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축복이어도 저주여도 상관없어. 안긴 채로 등을 기대고 가만히 있을 거야. 내가 있는 곳을 좋아하고 싶어.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안겨 있는 것 말고 밀치거나 도망치거나 거스르거나 하는 다른 적절한 가능성은 솔지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솔지야, 그리고 날들이 지나가고, 몇 년 뒤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상체가 잘린 적막한 시신 한 구가 빗물에 불어난 강물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해지게 되는데 그가 솔지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 임아라 그가 돌을 키우자고 했을 때 나는 딸기를 먹고 있었다. 케이크에 얹은 것치고 과즙이 실해서 턱이 저릿했다. 나는 테이블 매트에 포크를 내려놓고 오른뺨을 어루만졌다. 입안에 머금은 걸 삼켰는데도 신맛이 가시질 않았다. 어금니에 들붙은 씨가 거슬려서 자꾸 혀끝으로 더듬댔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돌을 키우자는 거지. 문득 씨가 아니라는 게 떠올랐다. 딸기의 겉에 박힌 점들 말이다. 그게 열매고, 그 속에 더 작은 씨가 있다는데, 그렇다고 그걸 달리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골라낸 씨를 검지에 뱉었다. 침과 뒤엉켜서인지 꽤 부푼 것 같았다. 자기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한테? 그래, 우리한테. 그의 윗입술에 묻은 생크림이 바르르했다. 나는 그것을 닦아 주려다가 관두고 나이프를 집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면 으레 주는 플라스틱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직원이 물었을 텐데. 그가 뭐라고 답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초는 없고, 나이프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손잡이에 달린 마개를 열었더니 성냥 두 개비가 쏟아졌다. 돌을 키우기도 해? 응, 돌도 키울 수 있대. 그는 컵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또 커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 컵은 가장자리가 겉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물이 넘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서랍에 들어박힌 처지길래 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발끈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다. 너무 말짱하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 이후 그의 커피는 그 컵에만 내줬다. 똑같은 컵이 있었는데 이미 버렸다는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왜 돌이야? 손이 가는 건 싫다며. 그렇다면 돌 만한 게 없지. 그가 살며시 컵을 기울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슬쩍슬쩍 드러나는 둥근 밑면을 바라보면서 유난히 까맣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에 닿을 때마다 닳았을 테니까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하얀 컵과 대비되어서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너머에 있는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흰자위를 바삐 오가는 걸 보아하니 뭔가 숨기고 있었다. 실은 주문했어. 나는 잼이 덕지덕지한 접시를 토닥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몫의 케이크는 모로 누운 채로 사이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겹겹인 시트에서 반쪽짜리 딸기들을 빼낸 흔적이었다. 언제부턴가 버터에서 여물의 향을 맡았다. 내가 투덜댔더니, 그는 여물의 근처라도 가본 적이 있느냐며 놀렸다. 그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는데, 어째서 끄덕였는지 의문이었다. 미리 이름을 지어 주자. 그가 반절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새 눅눅해진 받침대가 흔들려서 잠시 애를 먹었다. 나는 식탁에 흐트러진 빵 부스러기를 그러모으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검지에 뱉은 씨앗이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로 옮았을 텐데, 전연 기억나지 않았다. *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따끈한 물줄기를 쏘였더니 순식간에 케이크가 일그러졌다. 폭우를 맞은 모래성처럼 쉬이 뭉그러졌다. 자잘한 건더기는 배수구를 향해 미끄러지고,
- 임아라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심심심심 임승훈 심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심심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심심해서 집안을 싹 바꿔봤어."라든지, "심심해서 머리핀을 또다시 찾아봤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심심함이란 일종의 수사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유는 있는데 말하기 귀찮거나,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고. 대체 그 심심함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그만한 에너지를 들여서 굳이 무언가를 저지르냔 말이다. 하지만 이 년 전 급작스럽게 아내인 진서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심심함에 시달렸다. 사실 위의 말들은 주로 진서가 한 거였다. 그녀는 '심심해서 뭐뭐 했어'란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나는 때로는 재치 있고 수사적인 그녀의 화법이 귀여웠고, 때로는 완곡적인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고, 때로는 자기 마음에 시달리다 지쳐버린 그녀가 답답해 종종 짜증이 났었다. 왜 그녀는 본심을 밝히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심심. 진서는 왜 심심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진서와 나의 기질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다. 뭐 대단한 농담도 아니다. 대화하다가 내가 무심코 '지금'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잽싸게 내 말을 자르고 '이 순간-'이라고 흥얼거리는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바로 오늘'이라고 대꾸해주곤 했다. 섹스할 때도 그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비장한 표정으로, "어디, 오늘 자네 실력 좀 확인해 보겠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진서 언니, 그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옷을 훌렁 벗었다. 그 무렵 우린 홍명희의 소설 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진서와 광명 본가에서 아버지가 내놓은 책 박스를 뒤적이게 되었다. 진서와 나는 그 속에서 을 꺼내 들고 "우리도 이거 보자, 보자."라며 집에 가져왔다. 그 소설에서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임꺽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꺽정이 언니, 이 우라질 놈의 목을 뎅강 자를깝쇼? 진서는 또한 예민하고 침울한 사람이기도 했다.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툭 내뱉고는(주로 꿈에서 내가 자기가 키우던 양을 잡아먹었느니, 섬세한 사람에겐 섬세한 날이 있다느니 했다), 긴 침묵에 빠지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스 부호처럼 짤막하고 건조한 말을 하긴 했으니 완벽한 침묵은 아니고, 침묵의 근사치에 이르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이틀 정도. 그러다가 그 침묵(의 근사치)에서 벗어나서 문득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였다. "심심해서 LA갈비를 만들어봤어."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내 사랑은 진서의 사랑과 조금 달랐던 걸까? 확실히 나의 사랑엔 고통이 없었다. 친구의 후배였던 진서를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까맣고 가느다랗고 풍성한 단발머리,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녀는 왠지 어떤 정물 같았다. 그런 그녀를 나는 힐끔힐끔 쳐다봤는데, 그때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후, 한 달 뒤에 우린 연애를 시작했고,
- 임승훈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 이승은 수연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다른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었다. 월급이 높은 편도 아니었고 학원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지만, 수연은 아이들과 지내면서 학원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 손에 샤프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우개 똥을 굴리며 수학은 왜 배워야 하는 거예요? AI가 있잖아요. 이제 수학은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투덜거리다가도 방긋 웃으며 떡볶이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작은 규모의 학원은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한 편이라고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학원에서 일하는 삼 년 동안 수연은 무탈하게 지냈다. 월급이 밀리지도 않았고, 선생님들과 의견도 잘 맞았다. 크게 아프지도 않았고 사소한 말다툼을 빼고는 우재와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지냈다. 출근하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재미난 퀴즈를 생각했고 퇴근하면서는 그날 볼 OTT를 고르고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와 장 볼 것들을 체크했다. 수연은 아이들이 수포자가 되지 않도록 일차함수와 연립방정식을 쉽게 이해할 방법을 고민했다. 주말에는 가성비 좋은 맛집을 찾아두었다. 우재와 외식을 하고 집에서 OTT를 보는 것 말고 다른 걸 해 보고 싶기는 한데 뭘 해야 할지, 우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이었다.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지고 나서 이런 고민은 사라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리고 며칠 후에 천장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집주인이 옥상에 방수포를 깔아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정 불편하면 나가라고 한 이후로 수연은 하루 종일 집과 돈을 생각했다. 부동산 앱을 다섯 개 깔고 대출 조건을 알아보면서 진짜 고민이 시작되었다. 늘 아끼면서 지냈지만 모아 놓은 돈은 없었고 집값은 훌쩍 뛰어있었다. 대출 조건은 까다로웠고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매달 빠져나갈 이자를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이사를 해야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은 막막한 게 아니라 뻔했다. 수연이 갈 수 있는 집은 반지하 아니면 또 다른 재개발 지역이었다. 수연은 자신의 상황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하고 싶었다. 그래야 느닷없이 찾아온 이 난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빗물에 얼룩진 천장과 벽지를 보며 누워있던 어느 날 수연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삶을 그려보았다. 이 동네에 지낼만한 집이 없다면 살던 동네를 떠날 수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학원 일을 할 수도 있고 학원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 다양한 선택지가 펼쳐지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연은 오랜만에 설레었다. 하지만 우재의 생각은 달랐다. 네가? 아무 연고도 없는데 혼자서? 지방에서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우재의 말에 수연의 설레던 마음은 사라졌다. 우재야. 응? 그냥 잘될 거라고 말해주면 안 돼? 너 차도 없고 운전도 못
- 이승은
- 2026-09-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1건
솔지는 자기 반사적인 독백을 통해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하며 사건화되지 못한, 환하게 비치는 태양 때문에 더욱 어둠에 가려진 우연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 놓으려고 한다. 분해되기 힘든 합성 마약에 빠지는 것도, 특정 신체 기관과 감각-우연한 모든 것들은 자신의 부분이니까, 그러므로 잘려나간 동생의 귀 또한 사라진 게 아니다.-에 집착하는 것도 쉽게 잊혀졌거나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없는 것들을 다시금 복원하기 위한, 기투적 존재자에서 신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자로 비약하려는 존재론적 분투이자 신과 같은,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만을 인정하는 태양에 대한 한 필멸자의 외로운 도전이다. 모든 우연한 것들이, 사소한 것들이 하나가 되었을 때야 동일한 강이 아닌 하나의 강에 외로운 존재자의 시체가 두둥 떠다닐 것이다. 하나의 강이니까. 결국 솔지는 솔지가 아니라고 솔지가 솔지에게 말한 것이다. 그 솔지는 동일한 솔지가 아닌 우연한 솔지와 솔지가 만난 하나의 솔지이니까. *소수자 담론을 이렇게 독특한 문체로,구성으로, 주제로 펼쳐나갈 수도 있군요. 근래 본 작품 중에 정신적으로 가장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