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무덤
- 작성일 201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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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무덤
나푸름

누군가의 수면을 지켜보는 건 무료한 일이었다. 병실 한편에 방치돼 있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아마도 생의 마지막을 함께할 요량으로 골랐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앉아 책을 펴들었다. 오제는 산에서 돌아온 페르귄트를 병상에서 맞이하고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임종한다.* 이미 읽은 책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몇 줄이 눈에 익었는데 내용은 희미했다. 책을 덮었다. 아버지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살아간다기보다 죽어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병실을 나섰다.
지희가 보고 싶었다.
몇 분 전에 받은 문자메시지 때문이었다. 나와 술을 한잔하고 싶다고 쓰여 있었다. 영국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돈을 낭비하고 생활을 낭비했다.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시간들은 지나고 보니 어느새 과거가 되어 있었다. 잊고 있던 거리의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나도 그녀와 술을 마시고 싶었다. 제법 비싼 술집에서 맥주를 시켜 놓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고 싶었다. 나는 우리가 자주 가던 술집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지희는 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옆에 앉았더니 오히려 그쪽에서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문자 보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퉁명스럽게 답했다.
“술 마시자며.”
“영국에는 언제 온 거야?”
“방금 왔어.”
우리는 줄곧 함께해 온 친구처럼 술을 마셨다. 문득 그녀가 왜 술도 주문하지 않은 채 혼자 앉아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은 살면서 수도 없이 일어난다.
*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op. 46 <오제> 제3막에서 오제는 아들 페르귄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다.
안주 하나에 맥주 몇 병을 주문했을 뿐인데 값이 꽤 나올 것 같았다. 수중의 돈이 얼마 되지 않아 걱정이었다. 사정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입원한 후로는 집에서 가져갈 수 있는 돈이 없었다. 현금과 통장 잔액을 포함해 이십만 원 정도가 지금 가진 전부였다. 이런 곳에서는 칵테일 몇 잔에 동날 액수였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옛 애인에게 주머니 사정 같은 건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시켜 놓은 술을 모두 비우자 취기가 돌았다. 때마침 연락 온 그녀의 일본인 친구가 선뜻 와주기로 했다. 친구가 오기 전에 우리 몫의 계산을 끝내기로 하고 파인트 크기의 라거를 하나씩 시켰다. 지희는 나를 오랜만에 보았으니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전부 부담할 자신은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버린 후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 자리에서 계산하는 모습을 빤히 볼 수 없어 괜히 천장만 바라보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희와 나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관광지 근처에 있는 데다 템스 강과도 가까워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그때는 영국 출신 작가들의 책이 테이블마다 꽂혀 있었다. 나는 주문한 맥주가 나올 동안 습관적으로 책의 첫 문장, 길게는 한 단락을 읽어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이곳에 낭비했음에도 단편 하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술에 취하거나 지희에게 치근거리느라 바빴다는 것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내 시선은 주로 천장에 머물곤 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책장과 거기에 꽂힌 수많은 책들이 실물과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었다. 책들이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 술을 마시고 보면 도무지 실제와 구분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때때로 그림 속의 책들이 진짜인 양 책을 고르는 척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초점이 흐려진 시야 사이로 벽에 그려진 책들이 흔들렸다. 곧 떨어지는 책들에 압사당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고행이라도 하듯 제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지금은 천장을 가득 메우던 책들이 그림 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책들은 사라지고 텅 빈 책장만 남겨진 것이다. 테이블마다 꽂혀 있던 책들도 자취를 감췄다. 그 책들을 모두 순서대로 열거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는데, 막상 떠올리려 하자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끝도 없이 떨어지는 책들에 의해 죽어가는 누군가를 상상했다.
눈만 겨우 뜰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자, 아버지는 천장을 보고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그는 정신이 들 때마다 손을 더듬어 무언가를 찾았다. 그 무언가가 책이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원하는 책이 잡히기 전까지 더듬거림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책만이 그를 위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옛날부터 책들이 그를 배반하고 말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보살펴 주었어도 그것들이 아버지에게 준 거라곤 살모넬라와 쉬겔라균 정도였다. 오직 아버지만 이를 부정할 뿐이었다. 책에 비해 어머니와 나는 당신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지희가 부른 마유리라는 여자는 꽤 예뻤다. 지희보다도 예뻐서 나는 마유리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녀들은 나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나는 오갈 데 없어 술집에 있는 사람처럼 술이나 축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유리가 왜 이런 어색한 자리에 왔는지 의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예쁜 여자 덕에 눈이 즐거워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전 애인과 함께라면 사양이었다. 지루해진 내가 이제 그만 자리를 파할까 싶은 찰나에, 그녀들은 느닷없이 화제를 돌렸다. 모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은 마신 술에 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 있었다. 대화 주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영국에 있는지로 흘러갔다.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는 거야?”
지희는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있던 나를 보는 게 말이 되냐며 따지고 들었다. 어떻게 왔는지 설명해 주려 했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들은 곧 입을 다물고 내 쪽을 향해 눈을 빛냈다.
“열 번 넘게 전화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안 받았던 거니?”
9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두 도시 간의 거리 때문인지 통화 감이 좋지 않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죄스러운 마음이 커져 금방 가겠다고 대답해버렸다. 하지만 말처럼 빨리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학교가 개강한 이후로 아버지의 병간호는 버거운 일이 되었다.
“아버지는요?”
“아직 주무신다.”
어머니는 수십 년 동안 아버지 곁에서 그의 하중을 책시렁같이 견뎌낸 사람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일 년이 넘도록 결판나지 않는 병치레에 눈에 띄게 지쳐 가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 그녀는 아버지에게 당신이 죽으면 이 서재도 함께 묻어 주겠노라고 쏘아붙였다. 어머니의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린 나는 그녀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혼곤한 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때도 우리는 아버지에게 책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버지의 안부를 제외한 다른 대화를 이어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병을 이겨내길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어서 빨리 결판을 내주면 좋으련만.”
나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자 마유리는 “긴상은 마마보이네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말에 괜히 상처를 받을 차였는데 지희가 다시 원래의 주제를 꺼내들었다. 내 속마음이라도 읽은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빨리 올 수 있었던 거야?”
비행기를 탄 기억은 없었다. 인천공항에서 수속을 밟은 일도 없었고, 이민국에서 방문 목적을 묻는 날카로운 질문을 받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는 병원에서 나와 이곳까지……
“걸어왔지.”
두 여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이제 그런 농담은 그만 해, 하는 눈초리였다. 그래도 그게 내가 아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걸어왔어.”
둘은 저희들끼리 고개를 맞붙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며 따지고 싶었다. 안다. 믿건 안 믿건, 그것은 우리가 헤어졌을 때처럼 지희가 결정할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정말로 이곳까지 걸어온 기억밖에 없었다. 그녀가 믿어 주지 않는 것이 섭섭했다. 지희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 그래, 하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주를 집어 먹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나를 달래듯 실실 웃었다. 대체 그게 뭐가 믿어 주는 거냐며 따지고 싶었는데, 화를 내더라도 태도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아 포기해버렸다.
“한국은 언제 돌아갈 건데.”
그게 문제였다. 요즘 들어 잠이 많아진 아버지의 상태도 슬슬 걱정됐다. 자고 있을 때와 깨어 있을 때가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으나 눈을 뜨고 있을 땐 그래도 산 사람이라는 생각에 병원비가 덜 아까웠다. 한국에 있는 사람을 떠올리니 나는 지금 영국에 있는 것이다, 하는 문장이 실제로 다가와 불안해졌다. 왔던 것처럼 걸어 돌아간다 해도, 이런 깜깜한 밤중에 길이라도 잘못 들면 시베리아에서 동사한 시체로 발견될지도 몰랐다. 편안한 방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백만 원이 넘는 돈을 들여 한국행 티켓을 끊어야 했다. 하룻밤 새에 엄청난 원화 폭등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수중의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데 옛 애인이나 만나러 간 정신 나간 자식으로는 보이기 싫었다. 아버지는 지희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돈을 줄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나는 고작 술 한잔 마시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걱정 마. 왔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지희의 긍정적인 성격이 얼마나 나 자신을 좀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었는지 떠올랐다. 그녀는 언제나 내 걱정과 우려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쪽은 나였는지도 몰랐다.
“이 상태로 어떻게 돌아가라는 거야?”
“일단 걸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별수 없이 지희의 말을 듣기로 했다.
우리는 새벽 두 시의 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걸었다. 늦은 시간이라 가로등을 제외한 모든 불빛들이 사라져 있었다. 쇼윈도 속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상점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내가 없던 몇 년간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나에게는 지희가 있었다. 이제 얼굴이 예쁜 그녀의 친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조연이었다. 이게 영화라면 ‘긴상은 마마보이네요.’라는 한 대사를 치기 위해 캐스팅된 것이다. 그녀의 활약은 거기서 끝이었다. 왜 술집 앞에서 헤어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걷다 보면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리라 여겼는데 한참을 걸어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리에서 밤을 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들이 이렇게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밤거리를 쏘다니게 된 건 내 탓이었다. 나는 왜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곳에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았을까. 사실 비행기를 타야 했다면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았을 확률이 컸다. 일단 항공권을 결제하는 손이 떨렸을 테니. 옛 연인을 향한 그리움 같은 건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때가 좋은 거, 뭐 그 비슷하게 합리화시켰을 것이다.
나는 이곳을 좋아했다. 좋아했기 때문에 몇 년 동안이나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버킹엄 궁전이나 타워브리지를 구경하러 온 돈 많은 아시아인 취급을 받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그것 역시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덕에 쉽게 다른 이들에게 잊히기도 했고, 언젠가 떠날 사람이었기에 무책임한 일들을 죄책감 없이 벌일 수도 있었다. 모든 기억들은 길가의 쓰레기들처럼 쉽게 버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분류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폐기물처럼 땅에 묻고 그 일부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책이 사라진 도시에는 담을 데 없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을 발로 차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다. 거리는 지저분한 문장들로 낙서될 것이다. 나는 그런 징조들을 느끼며 그녀들을 따라갔다. 곧 낯익은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말했다.
“저기 두 블록만 더 걸어 들어가면 계곡이 있어.”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우연히 길을 잃고 헤매다 발견한 장소였다. 도심 속 공원과 같은 입구와는 달리 들어가면 갈수록 깊고 울창한 숲이 나왔다. 예전에는 이곳을 거닐며 쓸데없이 공원만 많은 나라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우리는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유리는 갈수록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가장 이상한 것은 열심히 우리를 따라오는 마유리의 밑도 끝도 없는 성실함이었다.
숲에 들어서자 지희는 나무 사이로 갑자기 스컹크가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러기를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예전에 그 방귀가 마리화나 냄새와 같다는 얘기를 듣고 스컹크가 출몰하는 지역에만 가면 코를 킁킁대곤 했다. 나는 지희에게 너만 원한다면 스컹크 따위 얼마든지 잡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점점 내가 술에 취하는 것 같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가 스컹크보다도 귀여워 키스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놓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계곡에 버려진 낡고 작은 보트 한 척을 발견했다. 하나뿐인 노가 그마저도 반으로 부러져 있어 제 기능은 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꼴이었다. “이걸 타면 한국으로 갈 수 있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마유리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고 지희는 오랜만에 한국에 갈 수 있게 됐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결국 마유리 또한 강한 호기심을 무시하지 못하고 우리 셋은 다 함께 한국에 가기로 했다. 보트에 오르자 그녀들은 생각한 것보다 나쁘지 않다며 나를 응원했다. 어쩌면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노를 잡은 내가 중간에 앉고 지희는 내 앞에, 마유리는 뒤에 앉았다. 사랑스러운 두 여자와 함께 한국에 갈 생각을 하니 절로 힘이 났다. 반쪽짜리 노로 바닥을 밀어 보트를 출발시켰다.
오늘따라 달도 밝고 구름도 없다며, 지희는 밤 소풍을 나온 사람처럼 좋아했다. 우리는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감탄했다. 보트가 나아갈수록 강물의 폭이 넓어지고 물살이 거칠어졌다. 배가 방향을 잃지 않게 노를 단단히 잡아야 했다. 노를 잡지 않은 손으로 지희에게 수작을 걸기 위한 타이밍을 노렸는데, 그녀는 마치 의식적으로 날 피하기라도 하듯 내 쪽으로는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지희의 태도만 본다면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과거도 없는 것 같았다. 외면하고 싶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우리가 헤어질 때, 지희는 만약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우리 사이의 중요한 것도 잃어버리게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네가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바람피우지 않고 기다릴게.
거짓말하지 마.
도대체 지희가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궁금했다. 바람피우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그녀가 나와 함께 한국에 남아 있는 일이 불가능했기에 한 말이었다. 지희는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뱃속의 아이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도 책의 접합 부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삶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살이 약해지고 있었다. 내 힘으로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멀리서 수풀이 무성한 지대가 달빛에 어렴풋이 드러났다.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보트는 홀린 듯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후에는 수풀에 둘러싸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프리카의 여왕> 에 나오는 험프리 보가트가 되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체면을 구기지 않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를 저어도 보트는 조금씩 제자리에서 맴돌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애초에 나는 찰스 선장 같은 육체파도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지희와 마유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들은 즐거울 것만 같았던 모험에 이런 역경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지 대답을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뒤에서 노로 강바닥을 짚으며 보트를 밀고 그녀들은 앞에서 수풀을 헤치며 길을 만들기로 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마유리를 위해 지희가 시범을 보였는데, 마유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딴청을 부렸다. 이런 상황에서 돕지도 않고 뭘 하는지, 저 여자는 예쁜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일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런 식으로 몇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다. 숨을 돌리기 위해 굽은 허리를 폈더니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날이 점차 밝아 왔다. 그때부터는 조금 수월해졌다. 적어도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그녀들은 백치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의사는 아버지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며 어머니와 나를 겁주었다. 우리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책을 찾는 그 손…… 그것은 분명 그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을 때보다 더 간절해 보였다. 아버지의 손을 잡은 어머니는 자신을 쳐내는 분명한 힘을 느끼며 아버지의 수명을 가늠했다. 저 인간은 나를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아버지는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책은 그를 구원해 주지 못할 것이었다.
바다에 도착하자 한국과 영국의 거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만 겨우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구분해 주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노를 저어서는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녀들은 바다의 투명함과 끝없이 펼쳐진 해안절벽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입을 모아 조금만 더 가면 한국이 보일 거라고 외쳤다.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날짜변경선을 넘어가는 엄청난 거리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한국의 바다에 인접했다면 이렇게 깨끗할 리 없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바다에서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금방이라도 굶주린 식인상어가 나타나 우리를 잡아먹어 버리거나, 갑작스러운 파도에 보트가 뒤집혀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내 앞에 보이는 광경에 압도되어 침만 삼키고 있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아들이 몇 시간째 잠잠하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딱히 떠올리지 못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쪽에서는 말이 없었다. 꼭 이런 상황을 전에도 한 번 맞닥뜨린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가 울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목 끝까지 찬 말을 억지로 삼키며 상대방이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
“빨리…… 빨리 와야겠구나.”
예상과 달리 어머니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아까의 통화보다 조금 더 목소리가 낮아졌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미 너무 울어,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마음이 차분해졌는지도 몰랐다. 부모 중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서늘한 원망이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또다시 금방 가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안부는 묻지 않았다. 이제 정말이지 빨리 돌아가야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아버지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책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것이 누구의 책인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에는 별 관심 없이 잘 재단된 책을 모으는 일에만 온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 그저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이면 됐다. 아버지의 서재는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단순히 보관을 위한 장소였다. 어릴 때의 나는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고 그는 매번 내 부탁을 거절했다. 거절할 뿐만 아니라 책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칠까 서재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외출한 사이, 서재 안으로 들어가 뜻도 알지 못하는 책을 읽다 잠든 적이 있었다. 돌아온 아버지는 내가 책에 손을 댔다는 사실에 화가 나 밤새 서재 문을 잠가 놓았다. 어머니는 나를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고, 나는 아침이 될 때까지 책이 퍼붓는 끔찍한 저주를 들으며 떨고 있어야 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아버지의 바람대로 그와 그의 책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책의 망령이 오래전에 내 아버지를 결딴낸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다. 내가 알아채지도 못한 어릴 때 책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 식으로 그가 도통 자식을 돌아보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유년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에야 그가 책을 읽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서재 가득 책을 쌓아 놓았음에도 그는 유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지식에 대한 두려움이든 자신의 무지몽매에 대한 절망이든 아버지는 책의 겉면에만 온 관심을 쏟았다. 정말로 책을 모으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그래서 그게 무얼 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책의 내용에는 괘념치 않았던 것일까. 왜 그가 어린 나를 서재에 가두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적어도 서재에 몰래 들어가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책에 대한 나의 순수한 관심이 그의 무지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꼈으리라. 나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는 이해받으려 한 적이 없었다.
작게 일렁이는 파도가 보트를 흔들었다. 잔물결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바람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불어왔다. 보트는 물결에 휩쓸려 절벽 근처로 밀려났다. 나는 그 옆으로 보트를 대고 낭떠러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지희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따라오라며 그녀에게 소리쳤다. 지희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 내 뒤를 따랐다. 파도가 점점 거세지자 발만 구르며 구경만 하던 마유리도 보트에서 발을 떼고 절벽에 매달렸다. 마지막 사람까지 절벽에 오르자, 보트는 반쪽짜리 노와 함께 맥없이 주변 바위에 부딪혀 조각났다. 수풀 사이에서 너무 오래 지체한 탓인지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 왔다. 뒤에서 지희나 마유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걱정됐지만, 제 앞가림이 우선이었다.
한참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마유리가 밑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마유리가 점처럼 보일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마유리는 내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이목을 끌기 위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는 말인 것도 같았다. 뭐라는 거냐고 묻자, 다행히 마유리가 예쁜 얼굴에서는 나올 수 없을 것같이 큰 목소리로 말해 지희가 중간에서 전하지 않아도 됐다.
“사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여긴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네요!”
왜 이제 와서 그러는 거냐고 물으려 했으나 방해꾼이라고 생각했던 속마음을 들킨 것도 같아 그만두었다. 멀리서 지희와 그녀가 가깝게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예쁜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 자기가 아닌 지희에게만 수작을 부리는 것에 화가 난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떠볼 여유는 없었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번호 정도는 교환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일단 한국에 가야 연락도 할 일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대관절 저런 남자가 뭐가 좋았던 거냐고 물었을 테고, 지희는 네 생각처럼 그렇게 엉망인 사람도 아니라고, 혹은 그러게, 내가 눈에 뭐가 씌었었나 보다고 대답했겠지.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마유리에게 손 인사를 건넨 후 열심히 절벽을 기어올랐다.
벽에 붙어 있는 무수히 많은 끈들이 시야에 걸린 건 절벽 위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올라갔을 때였다. 그것은 나무뿌리나 풀에서부터 뻗어 나온 거라고 보기에는 무척 얇았으며 틀에 짜인 것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무시하고 지나쳐도 괜찮을 만큼 작은 부분이었는데도 눈에 거슬렸다. 호기심에 근처에 있는 끈 하나를 잡아 보았다. 익숙한 감촉에 당황해서 예상보다 힘을 주고 당긴 것이 화근이었다. 순간 끈과 함께 책 한 권이 획 빠져나와 머리를 치고 바다 밑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희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거기에 뭐가 있냐고 물었다. 잡아당긴 것은 짜임이 보일 정도로 확연한 가름끈이었다. 그것도 어릴 적부터 질리게 보아 왔던 것이었다.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불안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당장에라도 달려와 네가 지금 왜 여기에 있냐고 책망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절벽을 깎아 만든, 끝도 보이지 않는 책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혀 낯설지 않은 모양새였다. 내 유년 시절의 한 부분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던 아버지의 책장이었다.
고개를 돌려 지희를 쳐다봤다. 그녀를 책장에서 멀리 떨어뜨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고작 책이었다. 그것은 아무런 위험 요소도 포함하지 않은 단순한 책들의 나열에 불과했다. 나는 불안한 흥분 속에서 책장을 둘러보며 책의 질감과 아버지의 흔적들을 눈으로 훑었다. 지희는 낌새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나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고 먼저 간 마유리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처럼 훌쩍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는 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겨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얼굴 속에서 비난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야.”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좀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라 무엇부터 사과해야 할지 몰랐다. 너 정말 술 취한 것 같아. 그녀는 코를 먹으며 나에게 소리쳤다. 그런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니 나는 정말 너밖에 없어, 라고 말하자 그녀는 이거나 먹어라, 하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정말로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벽에 늘어선 책장에서 책 몇 권을 뽑아 아래로 던졌다. 어떻게든 그 안으로 몸을 접어 넣으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떨어진 책들은 바위에 부딪혀 짐승의 시체 조각처럼 넝마가 되거나 바다 깊은 곳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책이 사라진 자리로 들어가 절벽에 핀 꽃이나 풀처럼 고개를 내밀고 매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절벽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람이 부는데도 깨끗하고 맑았다. 우리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다 벼랑 끝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하나둘씩 솟아오르는 형상은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무척 낯설어, 우리는 그들이 화살을 겨눌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먼저 소리를 지른 건 지희였다. 한 무리의 인디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술관에서 토템을 볼 때는 세상에서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저 낯선 얼굴을 한 외국인들이었다. 그들은 불어를 구사했다. 책장에 있던 책들 중 몇몇이 불어로 쓰여 있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아버지는 때때로 제목도 읽을 수 없는 외국의 원서들을 감촉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사들였다. 그중에는 불어회화입문에 관한 책도 있었다.
“에뜨-부 시누아즈(중국 사람인가요)?”
“농, 즈 쒸 꼬레앙(아니요, 한국 사람이에요).”
지희가 침착하게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이럴 때일수록 첫인상이 중요해. 차분한 그녀와 달리 그들의 화살이 두렵기만 했다. 어떻게든 책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금방이라도 그들의 화살이 내 몸을 관통할 것 같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옛 연인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노력한 것만큼의 효과도 없어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인디언들은 그녀의 대답을 듣자 더는 말이 없었다. 중국인이 아닌 아시아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았다. 그쪽에서 더 이상 물어보지 않자 지희가 나서서 나에 대해 설명했다. 어젯밤에 갑자기 보고 싶다고 한국에서 찾아온 전 애인이에요, 라고 소개하는 듯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적개심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일었다. 인디언 중 한 명이 말했다. 지희의 말에 따르면 네 문학사적 가치를 말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버럭 화를 내니, 지희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절벽으로 고개를 내민 원주민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제 등에 매달아 놓은 화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더는 대답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한국에 가는 걸로 제 가치를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그들은 등을 돌려 저들끼리 회의하기 시작했다. 절박한 표정으로 지희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지희는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들이 날 인질로 삼겠대. 네가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상황의 심각성에 비해 지희의 표정이 너무 차분하여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도망가자고 말했다. 지희의 표정은 단호했다. 나 홀로 절벽에 매달린 채 한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잘못한 건 죄다 아버지인데.
그때부터 나는 절벽의 오른쪽으로 이어진 책장을 따라 이동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지희가 생각나 가는 걸음이 늦춰졌다가도,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인디언들의 모습이 떠올라 길을 재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가다가는 내일이 돼도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갈수록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부터 왼쪽 무릎이 젖어들고 있었다. 오줌인지 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지희를 생각하면 깊은 상처가 난 것이 나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제목도 알지 못한 책들로 다른 이들이 언어를 배웠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가 원치 않는 소식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의 몸이 식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 나에게 어떤 아버지였든지 간에, 그에게로 도달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어머니의 남편이었다.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가족보다 책에 집착했던 그가 스스로의 책을 덮는 순간을 이제 와 놓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체를 했다간 지희가 인디언들의 화살에 죽을지도 몰랐다. 벌써부터 지희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아이 잃은 그녀를 이음새가 약한 헌책에 비유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책들은 언제 보아도 새것처럼 흠 하나 없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한가득 바다 속으로 던져버렸다. 어차피 읽을 수도 없는 책들이지 않은가. 두 발을 책장 안에 집어넣고 옆으로 이동하며 책을 밀어뜨렸다. 발이라도 디딜 곳이 생기자 가는 길은 조금씩 수월해졌다. 그렇게 가다 보니 지희도, 나를 바라보던 인디언들도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가끔씩 발뒤꿈치로 낯익은 책이 발을 두드리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모르는 척 나아갔다.
책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절벽 끝이 보였다. 그 끝에는 내 몸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창문이 머리보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이제 몇 개의 책장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죽은, 앞으로 죽어갈 책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신 아버지를 가지지 않았던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 창문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지막 칸에 다다르자 한 줄 위의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닿지 않는 책장 대신 근처에 있는 책 한 권을 붙잡고 올라섰다.
아버지가 병상에 눕게 된 뒤, 그 옆에서 그의 책들을 읽어 나갔다. 한 권씩 끝마칠 때마다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마음이 달떴다. 언제라도 아버지가 일어나 나를 자신의 서재에 가두어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까스로 몸을 지탱해 주는 책의 질감이 새삼스레 아버지의 손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나를 버텨 준 적이 있던가. 모르겠다. 다만 아버지가 그렇게 된 후, 한번은 깊이 잠든 그의 손을 내 쪽에서 잡아 본 일이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그때는 생각보다 딱딱한 감촉에 놀라 손을 쉽게 놓았다. 아버지의 손은 생각보다 앙상했고 이전보다 연약해져 있었다. 온기가 있지 않았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른손을 뻗어 허공에 난 창문을 붙잡았다. 어떤 방법인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는데 허공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창문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공기에서 바다 냄새가 사라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창틀을 단단히 잡고 허리를 뒤틀어 골반까지 쑤셔 넣었다. 남은 발까지 창문 안쪽으로 집어넣은 후에야, 나는 간신히 장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애인이 제일 먼저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늦었냐며 만신창이인 나를 일으켜 애교 있게 팔짱을 꼈다. 작은 입을 우물거려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그것은 몹시 부적절한 말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 위로 지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페르귄트는 결국 자신을 기다리던 연인을 떠난다. 마을로 돌아온 그는 오제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애인은 나를 어머니 곁으로 이끌었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무릎이 꺾여 혼자 힘으로는 서 있을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땅속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관을 바라보며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통화했을 때보다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보이지 않은 지 오늘이 사흘째다.”
나는 어머니에게 다시는 영국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버지의 관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바다를 보았다. 거친 파도가 일던 바깥과는 상관없이 물속은 아주 고요했다. 아버지는 부드러운 모랫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또다시 제 주변을 더듬었다. 밖으로 던진 책들이 그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더듬는 것을 멈추었다. 하늘에서 책이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느리지도, 방향을 잃지도 않은 채 그것들은 모두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곧 서재가 텅 비었다. 모든 책들이 그와 함께 물의 무덤 속으로 수장된 것이다. 아들의 여정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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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푸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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