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안다고 말하는 나의 어떤 것
- 작성일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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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안다고 말하는 나의 어떤 것
김애현
말하자면 그건 오래된 벚나무들 때문일 거야. 한아름이 넘는 그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여기서 저 끝까지 까마득하거든. 생각해 봐, 소실점까지 그들이 꽃을 피운다면 어떤 광경일지 말이야.
꽃잎이 흐드러진 나무 아래마다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집을 세우지.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을 만큼 부드러워 보이는 의자들과 각양각색의 찻잔들과 몸이 아름다운 이국의 티팟과 아직 자르지 않아 온통 저의 색으로 싱그러운 과일들과, 마치 그 모든 걸 빛나게 하는 건 저것 아닐까 싶은 테이블과 정오의 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하얀 파라솔과 바람이 불 때마다 온통 그쪽으로 흔들리는 파라솔 끝의 자잘한 태슬까지. 사람들의 작은 집들은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
처음, 나는 푸딩처럼 흔들렸어. 흔들리면서 생각했지. 아, 나도 여기에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그러더라, 그럼 먼저 비싼 차를 사라고. 나 같은 초보를 위한 꿀 팁이라면서 되도록 향이 은근하고 품위가 있는 걸로 사세요, 하더라고. 왜냐면.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이 만날 당신의 이웃들은 미치도록 친절하니까요. 그들은 수년간의 경험으로 얻게 된 귀한 정보를 당신의 차 한 잔에도 흔쾌히 나눠줄 수 있답니다. 나는 그 말대로 비싸지만 은근하고 품위가 있다는 찻잎을 샀어. 다음날 아침. 감은 눈 위에 내려앉아 있던 빛을 나는 기억해. 당신은 이미 출근한 뒤였지만 서글프지 않았거든. 서둘러 그곳으로 가면서도 눈물 따윈 흘리지 않았지.
나는 이웃들에게 차를 덜어주며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물어 봤어. 이웃들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 어떤 게 필요한지는 자주 와봐야 안다고. 올 때마다 필요한 게 생각나면 그걸 사라고. 하지만 덮어놓고 샀다가는 지금 살고 있는 진짜 집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물론 농담이지만 아무튼 너무 돈을 들이면 못 쓴다고. 기껏해야 봄, 한 계절이라고. 그것도 열흘, 좀 길다 싶으면 거기서 이틀 정도? 더 만끽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잘 생각해야 한다고.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어. 봄은 짧았고 그래서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며 꽃비가 내리는 절정의 시간에도 나는 내 집을 다 완성하지 못했지. 다시 봄이 되기까지 짝사랑처럼 한쪽으로만 기운 마음 때문에 나는 자주 아팠던 것 같아.
당신은 그런 나를 묵묵히 참아 주고 견뎌 주었어. 당신은 그런 남편이었지. 그땐······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걸 믿었었지. 그래서 나는 내 집에 없는 것······ 당신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던 거야.
그곳, 꽃잎이 흐드러진 벚나무 아래 당신을 앉아 있게 하고 싶었어. 등받이가 높은 천 의자에 당신을 앉히고 한 손에 방금 내린 드립커피 잔을 쥐어 준 다음 블루투스를 켜고 낮게 흐르는 강물처럼 당신의 귀로 클래식 음악의 선율을 흘려 넣어 주고자 하는 바람들은 그래서였을 거야. 나는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더 애써야만 했지. 거짓말을 해서라도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와야만 했어. 어떻게든 그래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혼자 피크닉을 온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고 값비싼 향신료를 꾸어 주며 오랜 시간 공들여 모은 정보들을 서슴지 않고 공유해 주는 내 이웃들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처럼. 정말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들이 나와는 무관한 사이란 걸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지.
*
외롭다고.
K는 한숨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희수야,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니, 라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많이?
K의 컴퓨터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쉴 새 없이 뜨고 있었다.
요즘 들어 아주 많이.
그럼······ 하루 휴가 낼까?
몇 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문서함에 쌓인 항목들을 열어 보다가 그냥 내뱉은 말이었다. 물론. 그러면 대개는 희수 쪽에서 아니, 그럴 것까진······ 아니야, 어서 일해, 바쁠 텐데, 하고는 통화를 끊게 마련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테지, 그런 게 K의 의도라면 의도랄까.
진짜?
높고 가파른 희수의 말투에 K는 아차, 싶었다. 부장 말처럼 대가리에서 몸통은 물론이고 꼬리의 꼬리털까지 죄다 바쁜 시기였다. 그런데 희수야······ 지금 상황으로 봐선 그게 말처럼 쉽진 않다고 해야 맞지만 고작 하루 휴가 정도로 이렇게까지 기뻐할 일인가 싶어서 K는 진짜, 라고 말해버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 K는 생각지도 않은 휴가를 억지로 만드느라 골치가 아팠다. 그렇게 급조된 휴가계획서는 몽땅 거짓말이었다. 부장에게 휴가계획서를 메신저로 전송하며 K는 거짓말은 늘 쪽팔린다고 생각했다.
부장이 K를 불렀다.
병원 가는 날이네.
네.
이번이 몇 번째지?
다섯 번째요.
벌써 그렇게나?
······네.
걱정 마. 우리 집 쌍둥이들이 확실한 증거니까.
불임병원을 소개시켜 준 건 부장이었으므로 그는 K의 휴가에 흔쾌히 동의했다.
병원 갈 거라고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 꼭 그렇게 힘을 몽땅 빼먹는 상사 만들고 말이야, 쯧.
그게······.
됐어. 내가 그 사정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튼 고생해. 다녀온 다음에 내가 술 사줄게.
K가 돌아서려는데 부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번엔 잘해 봐 좀. 어떻게든 힘 좀 써보라고.
······.
그렇게 얻어낸 휴가였다.
다음날.
아침부터 머리가 아팠다.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그 뒤쪽으로 한 뼘쯤 규칙적으로 욱신거렸다. 느낌상 쉽사리 가라앉을 두통 같지 않았다. K는 빈속으로 두통약을 삼킨 뒤 거실로 나왔다. 누가 봐도 차에 실어야 할 게 분명한 짐들이 서로 기댄 채로 거실 바닥에 모여 있었다. 크고 작은 짐이 여섯 개였다. 그중 K가 아는 건 두 개의 피크닉 가방뿐이었다. 나머지는 본 적도 없었고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제 저녁 희수의 말로는 하루 반나절 소풍이라고 했다. 이사라도 가려는 거냐고, 대체 이게 다 뭐냐고 물으려다가 K는 입을 다물었다.
이게 다지? 차에 실을까?
아니, 아직 더 있어.
부엌 쪽에서 희수가 말했다. K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두통약을 챙겼다.
국민관광지이지만 협소한 주차장과 간이화장실 그리고 딱 한 개의 매점이 다였다. 이른 도착에도 불구하고 공영주차장은 이미 자리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는 K에게 희수가 말했다.
저기 끝으로 가.
주차장에서 관광지 입구로 걸어가는 길 한쪽으로 길게 일렬 주차가 되어 있었다. K는 그러면 나올 때 차들이 엉켜버려서 안 된다고 말했다.
상관없어.
희수는 어서 가라고 재촉했다. K는 일렬 주차의 맨 끝, 꼬리에 가까스로 차를 댔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는데 이미 희수는 뛰듯 걸어가고 있었다. 이 짐들을 나 혼자 어쩌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K는 차 옆에 서서 희수가 가고 있는 곳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거기까지. 아무리 좋게 쳐준대도 한참이나 멀었다. 게다가 희수는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엔 K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나 빨리 사라져 버릴 줄 몰랐으므로 K는 그녀가 어디까지 갔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어딘지 모를 거기까지. 무려 여덟 개의 짐을 어떻게 혼자 옮기란 거냐고, 젠장.
하긴.
오는 내내 희수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자리부터 잡아야 한다고 했다. 거긴 나무와 나무 사이 약 사오 미터쯤 되는 평지라고 했다. 바로 보이는 강이 제일 부드럽다는 게 희수가 그 자리를 고집하는 이유였다.
K는 꼭 그 자리여야 하냐고 물었다.
- 반드시.
희수는 단호했다.
- 누가 먼저 앉아 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그럴 리 없어. 사람들은 입구 쪽부터 채워지거든.
- 대체 얼마나 자주 갔기에 거기 사는 사람처럼 그런 걸 다 알아?
- 그냥 몇 번······ 아무튼 가보면 알아.
그 자릴 잡기 위해서라면 희수는 차 안에서도 달릴 기세였다. 그러나 K는 좀처럼 들뜨지 않는 마음이 스스로도 무겁게 느껴졌다.
- 강가는 다 거기서 거기 아냐?
- ······.
- 근사한 창가 자리, 뭐 그런 것도 아니잖아.
- ······.
희수가 대답하지 않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 K는 자신의 어떤 말이 희수의 입을 다물게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잘못이라고 스스로를 힐난하며 운전대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잊고 있던 통증이 좀 더 날카롭게 K의 뒤통수를 찔렀다.
희수가 서 있는 곳은 나무와 나무 사이 평지였다. 입구 쪽보다 훨씬 평평했고 안정적이었는데 그녀의 말대로 입구 쪽부터 채워져서 그런지 K가 느끼기에도 조금은 더 조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서 바라보는 강이 부드러운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던 건 첫 번째 짐을 나르며 이미 온 힘의 절반을 써버린 탓일 거였다.
K는 피곤과 피로로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흘러내리는 땀과 가쁜 호흡과 조금씩 더워지는 몸을 통해 맹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K가 짐을 나르며 오갈 때마다 희수가 있는 곳에는 무엇인가 차려지고 세워지고 쌓여 갔다. 어디선가 본 듯 눈에 익숙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K는 거길 꾸미고 있는 희수가 몰입 상태라는 게 낯설고 생경스러웠다. 희수가 꿈꾸는 게 이런 거였나 싶었다.
이미 몸은 지쳐버렸지만 아직 옮겨야 할 짐이 K를 불렀다. 두통약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기분 나쁘게 흐르는 땀과 어딘가 모르게 약간씩 둔해지는 의식 그리고 생각보다 무거운 짐들 때문에 K는 눈부신 햇빛과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를 욕했다. 마지막 짐을 들고 희수가 있는 곳으로 갈 때 K는 눕고 싶고 자고 싶었다. 그깟 피크닉이고 나발이고 간에.
강을 내려다보는 둔덕마다 사람들은 의자를 놓고 파라솔을 펴고 테이블을 놓았다. 저런 게 밖에서 가능해? 할 정도의 물건들이 하나 둘씩 놓여 있었고, 그것들은 마치 어느 예능프로에서 팔기 위해 내놓은 그럴싸한 매물같이 그 집 어느 한 군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희수도 그러려고 꽤나 애쓴 듯 보였다. K는 주위가 이렇게 환한데도 굳이 켜놓은 크리스털 조명과 그 주변에 둘러 앉혀 놓은 여러 개의 패브릭 인형은 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자꾸만 가라앉는 눈꺼풀을 초인간적인 힘으로 밀어 올리느라 사투 중이었으므로 사실 그런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K는 졸린 눈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희수가 하라는 대로 나무 의자에 앉아 강을 바라보았다. 희수는 블루투스의 볼륨을 올리고 K에게 어때? 하고 물었다. 희수의 두 눈이 웃고 있었다.
좋아.
정말?
음, 정말.
커피 마실래?
K는 바닥에 눕고 싶었다. 누워서 두 눈을 감고 한바탕 깊은 잠을 자고 싶을 뿐이었다.
좋아.
거짓말은 늘······ 쪽팔려. K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희수는 휴대용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K의 코끝에 묻었다. 문득 배가 고팠다. 두통 때문에 아침을 건너뛴 탓이기도 하지만 뭘 먹었다고 해도 짐을 옮기면서 다 써버렸을 거였다. K는 모델하우스 같은 희수의 집에서 허기진 채로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
왜 하필. 분명 그렇게 말했어. 왜 하필 거기냐고. 근사한 창가 자리도 아니면서 왜 꼭 그 자리여야 하냐고. 당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렇게 말했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어. 그때까진 상관없었어. 왜냐면 가끔. 그건 어쩌면 나만의 기억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긴 했거든. 그런데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그날은 꼭 그 소리가 떠올라. 왜 하필. 왜 하필······.
나는 새삼 그 질문의 대답을 생각해 보았어. 왜 하필 거길 가자고 했을까, 나는. 근사한 창가 자리도 아니면서 왜 하필 거기로 가자고 했을까, 나는. 강가는 거기서 거긴데 왜 하필 나는 꼭 거기 그 자리에 값비싼 매트를 깔고 등받이가 높은 나무 의자와 접이식 식탁과 가장자리가 아름다운 파라솔 뭐 그런 걸······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은 그런······ 시간들을 원했을까. 레몬 같은 햇빛과 그 사이로 부는 얇은 바람과 탄산음료처럼 튀는 아이들 목소리와 그들을 부르는 어른들의 믿음직스러운 손짓과 활짝 펼친 파라솔 밑의 안전한 그늘······ 그런 말할 수 없이 벅찬 것들에 둘러싸여 있고 싶었을까, 왜 하필 나는.
그날, 당신이 옆에 있었음에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어. 그래서 알았어. 당신의 부재가 이유가 아니란 걸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 때문이 아니야. 물론. 우리에게 아이가 없다는 게 이유였던 적이 있었지. 부인하진 않을게. 하지만 그건 나와 당신, 그 누구에게도 책임지울 수 없는, 그래서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그럴 필요가 없는 이유일 뿐이야. 만약 누구 탓을 하라면······ 그때 그들이랄까.
사실.
그들을 생각할 때면 그들 주변에 뿌윰하게 일던 흙먼지가 제일 먼저 떠올라. 섬광처럼 번뜩이는 피크닉 매트를 펄럭여 땅에 펼치던 남자. 그 옆에 비닐봉지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서 있던 여자. 그들의 피크닉이 계획된 게 아니란 건 그 여자의 손에 들린 비닐봉투만 봐도 알 수 있었어. 관광지 입구 매점 로고가 또렷하게 보였거든. 하긴. 은박지 같은 싸구려 피크닉 매트 밖으로 남자가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까만 정장구두와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까지, 뭐 하나 관광지에 어울리는 게 없었으니 누가 봐도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단 걸 알 수 있었겠지. 더러는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관광지에 오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들 부부는 좀 달랐어.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에 어떤 불길한······ 무엇인가를 더한 느낌이랄까. 이를테면 남자가 매트를 펼칠 때 그 옆에 서 있는 여자의 표정 같은 거. 쿨럭, 밭은기침처럼 뽀얀 흙먼지가 일 때 여자는 두 눈을 꼭 감았거든. 마치 봐서는 안 될 것 앞에 선 사람처럼.
남자는 시끄럽고 요란했지만 여자는 너무도 조용했어. 그 극명한 대비가 주변을 점점 혼란스럽게 만들었지. 아무도 남자에게 경고할 수 없었어. 왜냐면······ 여자의 왼쪽 뺨을 후려치던 남자의 손은 주먹을 쥔 채였거든. 너무도 당당하게. 점점 고조되는 남자의 언성으로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기 때문에 그 손에 얼마나 많은 힘이 실렸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 주위는 눈부시게 맑고 투명해서 아름다웠는데 그 소리가 내겐······ 마치 그 모든 걸 무너뜨리기 위해······ 작정한 것처럼 들렸지. 보란 듯이, 그래, 보란 듯이 남자는 여자를 때렸어. 하지만 정작 여자는 그때조차 두 눈을 감고 있었지. 그 남자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듯이. 그런 여자를 남자는 우리 앞에서 보란 듯이 때리고 있었던 거였어.
어쩌면.
그 남자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아무도 자신을 멈추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아무데서나 여자를 때리는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너희 같은 부류들을 자신 또한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여자를 향한 자신의 자비와 용서와 동정뿐이라고. 여자가 그걸 구걸할 때까지. 그러나 여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어느 쪽이 더 불행한 걸까. 남자였을까 여자였을까 아니면 우리 모두였을까.
그다음은 당신도 잘 알 거야.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단 걸 말이야. 희수야, 희수야. 내 이름 부르던 당신 목소리 그리고 점차 가까워지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경찰차가 거기까지 들어올 줄은 아니,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아마 다들 그랬을걸. 아, 여기까지도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거였구나. 그럴 수 있는 거였던 거야. 그렇게 쉽게 그 길로······. 경찰차가 우리 자리 바로 뒤에까지 와서 멈췄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 아······ 우린 너무 멀리 차를 댔구나.
*
파라솔은 잘 접었어?
참고인 진술 조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희수가 물었다.
응.
그의 대답이 못 미더웠는지 희수는 담에 쓰려면 잘 접어야 하는데, 했다. 지금 상황에 그게 무슨 대수냐고 소리치고 싶은 걸 K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디 그 말뿐일까. 하마터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정도까지 아닌 게 천만다행인 것은 그 남자가 당신을 우습게 안 거였다고, 자기 아내처럼 세상 모든 여자들을 한 주먹감도 안 되게 여기는 평소 나쁜 버릇 때문에 그나마 간단한 타박상으로 그칠 수 있었던 거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아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희수는 말이 없다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뭐래?
K는 일부러 누구? 했다. 희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창에 대고 말했다.
그 새끼, 그 새끼 마누라.
K는 희수가 그렇게 말하는 게 거슬렸다. 그 새끼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새끼 마누라란 말이 그랬다. 그 남자는 누가 봐도 그 새끼가 맞는 거 같은데 그 여자는 그 남자 때문에 늘 그 새끼 마누라란 말을 듣고 살았을 것 같았다. 여자의 멍든 눈가와 감길 듯 낮게 내려앉은 시선이 생각났다. 여자의 얼굴은 그 남자가 그 새끼로 살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말해?
뭘?
알잖아, 내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하는지.
······.
······.
그 여자한테 화난 거 있어?
누구?
그 새끼······ 아내 말이야.
아니, 둘 다야. 그 새끼도 그 새끼 마누라도 다 화가 나.
왜.
그 새낀 그 새끼라서 화가 나고 그 새끼 마누라는 그 새끼 마누라라서 화나.
그럼 왜 도와줬어?
도와줘? 누가, 내가?
그래, 당신이 도와줬잖아! 그 새끼한테 맞고 있는 그 여잘······.
희수는 조수석 창에 머리를 대고 키득댔다. 낮고 가는 신음 같았다. 한편으로는 차갑게 느껴졌달까. 그런 희수가 이상했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 때문에 K는 빠르고 가파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조만간 터져버릴 것 같은 자신을 감지한, 묵직하고 강력한 경고음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경찰차를 타고 간 희수 뒤에 오롯이 남겨져 엉망진창이 돼버린 피크닉의 뒷마무리는 고스란히 자기 몫이었다는 게 생각나 버린 건 K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야?
······.
그러면 왜 그렇게 달려든 건데?
······.
경찰이 올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지 왜 그랬냐고!
시끄러워서.
······뭐?
수군대며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쏟아지고 나둥그러진 피크닉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 제 모양을 잡아 하필이면 먼 데 세워 둔 차까지 끙끙대며 몇 번에 걸쳐 옮기는 동안 남자를 향해 돌진하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희수라는 사실 때문에 K는 자책했다.
- 그 새끼가, 하필 그런 새끼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왜 하필 그런 새끼가 내 옆에 와서는······.
K는 가만히 마른침을 삼켰다. 고작 피크닉을 망쳤다고 달려들었다니. 여자의 붉은 뺨을 보고서도 남자에게 달려들었던 게 그래서였다니. 희수의 용기가 이기심의 발로였다는 게 K는 충격이었다. 그녀에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생각이 얼얼했다.
날 이해할 수 없대도 상관없어.
방금 전까지 키득대던 희수는 냉정하리만치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K는 흘려들었다. 여자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K는 가끔 여자를 생각했다. 아니, 여자의 얼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멍든 눈가가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샌드백처럼 남자의 가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던 여자가 툭툭, K의 생각을 건드렸던 것이다. 뭐랄까. 여자는 마치 고른 숨소리처럼 K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잠시 눈을 감아 보세요, 그러면 보이는 게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멍든 얼굴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거였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부장이 물었을 때 K는 여자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섯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아이 갖는 걸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희수 때문이기도 했고, 고지가 바로 코앞이라는 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적으로 덜 부담이라는 계산으로 덜컥 희수 편에 서버린 자신 탓이기도 했다. 알고 보면 수많은 이 땅의 불임부부로서 K 또한 아이 문제만큼은 마음이 꽤나 무겁고 복잡했다. 그래서 희수와 한편으로 살겠다고는 했지만 전쟁터의 전우애만큼 그 다짐이 끈끈할지는 K 스스로도 미지수였던 것이다. 그것이 가끔 희수를 향한 죄책감 혹은 그 반대인 원망 같은 걸로 둔갑해서 K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면 마음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다. 여자처럼. 두 눈을 감고 있으면 K는 그게 보였다. 푸른 멍은 강처럼 고요하고······ 가여웠다.
석 달쯤 지났을 때.
K는 여자를 다시 보았다. 부장의 배려 차원에서 K에게 배당된 지방출장을 가던 길이었다. 사업장 근처에 숙박도 예약해 둔 터라 회사에서 오전 업무를 마친 뒤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했다. 식사 때문인지 운전 중에 잠이 쏟아졌다. K는 잠시 차도 세울 겸 휴게소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속도를 늦추며 진입하다가 왼쪽으로 관광지 입구가 바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는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뭐야, 옆에 버젓이 휴게소가 있었던 거네. 그땐 왜 작고 초라한, 그 매점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걸까. K는 웃음이 나왔다. 차를 세우려다가 문득 이왕 온 김에, 라는 생각에 K는 관광지로 차를 돌렸다.
국민에게 사랑받는 대한민국 대표 국민관광지. 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표지판은 그때처럼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긴 매한가지였다. 다만 가늘고 빨간 화살표가 알려주는 주차장 가는 길은 줄지어선 차들 때문에 대체 어디가 주차장인지 모르겠는 그날과는 영 딴판으로 훤히 내다보였다. 주차 구획선 하나하나까지 한눈에 다 보일 정도로 텅 빈 주차장은 K로 하여금 그때 그렇게 사람들로 뒤덮였던 관광지가 맞나 싶게 당황스러웠다.
차에서 내려 K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빈손으로 온 느낌이랄까. 괜히 허전했고 신경 쓰였다. 계획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라고 말해 주어야 하나 싶게.
주차장을 빠져나와 입구 쪽 매점으로 갔다. 차로 들어올 때 반 뼘쯤 슬그머니 열어 둔 매점 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영업 중이란 나름의 표시인 줄 알았지만 K의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매점 문은 딱 그 정도로만 열려 있을 뿐 더 이상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았다. 열어 놓은 것도 아닌 그렇다고 닫히지도 않는 매점 문을 통해 K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물건들이 즐비한 진열대가 반대편 벽에 세워져 있었다. 매점 안으로 팔을 집어넣을 수는 있지만 단언컨대 거기까지 손이 닿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매점 문은 열려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닫힌 거였다. 장사를 하겠단 거야 말겠단 거야, 부터 이럴 거면 아예 닫아버려야 하는 거 아냐? 까지 생각하다가 K는 좀 짜증이 났다. 마지막엔 문을 이따위로 해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매점 주인을 향해 이 인간이 누굴 약 올리나 싶어서 가능한 매몰차게 매점 앞에서 돌아섰다.
입구 매점에서 걸어 내려와 왼쪽 공터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 양옆으로 길게 벚나무가 줄 지어 있었는데 봄에 벚꽃이 필 때면 그 아래로 온갖 형태의 캠핑족들을 볼 수 있다고 희수가 말했었다. 금발의 러시아 여자들도 왔었다고, 그 여자애들은 인형 같았는데 그들이 말하는 걸 들으려고 사람들의 귀가 다 그쪽으로 쫑긋했다고, 그래서 알았다고, 러시아 여자애들이란 걸.
- 그날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
- 왜?
- 그냥. 시차 때문에 몽롱한 느낌? 뭐 그랬어.
- 누가 들으면 외국인 처음 본 사람인 줄 알겠어.
K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힐끔 쳐다본 희수의 표정은 자신의 말처럼 명료하지 않은 의식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 그렇게 예뻤어?
그날따라 희수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 한 말이었다.
- 뭐?
- 몽롱했다며. 그 정도로 비현실적인 외모라는 뜻 아냐?
- 아, 걔네들. 예뻤어. 그런데 상스럽더라.
- 상스럽다고?
- 음. 인형처럼 웃으면서 그러더라구, 저것들이 우리를 허락도 없이 쳐다본다고. 개 같은 것들, 그러더라.
- 그걸 어떻게 알아?
희수가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는 걸 K는 그날 알았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말할 줄 알고 들을 줄 안다고 희수가 말했다. 그러나 K는 저것들이, 로 시작한 그 한 줄의 문장으로 짐작건대 희수의 실력이 아주 조금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다른 나라 말도 할 줄 아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희수는 불어도 조금, 이라고 했다. K는 또 있냐고 물었다. 희수는 아직은 그 정도만, 이라고 대답했다.
그날, 흐드러졌던 꽃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나무마다 잎이 빽빽했다. 숨 막힐 듯 짙은 숲길은 몇 달 전만 해도 나무 사이사이마다 빈틈없이 들어선 사람들 때문에 발 디딜 곳이 없었더랬다. 국민에게 사랑받는 대한민국 대표 국민관광지라더니. 이 정도면 모두에게 버림받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싶게 텅 비어 있었다.
K는 걸으면서 반추의 시선으로 멀리 길 끝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나무와 나무 사이 둥글고 완만한, 검은 한 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이 누군가의 등, 그러니까 검은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의 등이란 걸 알고는 K는 속도를 늦추며 걸었다. 길 끝까지 가려던 게 아니었으므로 어디쯤에서 걸음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검은, 누군가의 등을 지나쳐 끝까지 갈까. 아주 조금만, 지나쳤다가 돌아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되돌아갈까.
K는 여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검은 점퍼 차림과 짧은 생머리를 뒤로 묶은 거 말고는 모든 게 처음 보았던 그대로란 느낌이 들 만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한 옆얼굴까지. 여자는 나무 의자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까. 멍든 그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알겠다고, 그거 하나로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불행이 덕지덕지 묻은 그 얼굴이 여자일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 희수가 왜 우리라고 했는지 K는 의아했다.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 무얼 꿈꾸는지 알아야 한다면 그건 그녀의 남편이지 우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희수가 말하는 우리라는 건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K는 알고 싶지도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건 그들의 일이고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그러면서 속으론 그렇게 말하는 부류들을 나 또한 경멸한다고 덧붙이고 싶었다. 희수는 알아, 대답했다. 안다고. 그녀는 마치, 그러면 당신이 알고 싶은 건 대체 뭐야? 묻는 것 같은 얼굴로 K를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문이 닫힐 때 K는 희수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기척 때문이었는지 여자가 고개를 돌려 K를 보았다. 엉겁결에 그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거기엔 여자와 자신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갈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쳐버린 K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에 붙들려 꼼짝할 수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여자는 마치 그 후로도 여전히 낯선 이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K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K는 여자의 눈빛에서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눈치 챘다. 무심하고 그 무엇에도 무관한 시선. 거기엔 K 자신도 희수도 그날의 일도 각인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여자가 다시 강을 바라보았다. K도 여자 너머로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여자처럼 무심하고 그 어떤 것에도 무관한 것처럼 고요했다. 여자는 저 강을 보러 온 걸까. 자기처럼 무심하고 그 어떤 것에도 무관한 것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죽으려는 걸까. K는 속으로 설마, 하며 뜬금없는 자신의 생각을 일축했다.
*
어떤 질문 하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유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기까지 아마도 나는, 내 삶에 무표정했을 거야. 슬픈지 기쁜지 아니면 화가 난 건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얼굴. 여자가 내게 일깨워 준 건 바로 그거였던 것 같아. 그런 표정이 어떤 결말을 보게 될지.
당신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 여자에게 내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었어. 여자의 손에 쥐어 주며 언제든 전화하라고 했지. 도와주겠다고. 아니,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나. 어느 쪽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나는 그러려고 했던 것 같아. 여자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어. 그냥······ 아무 말 없이 그러고만 있는 거야. 마치 그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게 다예요? 라고 눈빛으로 묻고 있었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고맙다든지 고맙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다든지, 무슨 말이라도 여자가 하길 바랐거든. 하지만 여자는 생각난 듯 그 종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경찰서를 나가버렸어.
한번쯤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여자를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어. 나중에야 알았지. 내가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단 걸 말이야. 내 행동에 그 어떤 반응도 없이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듯 바라만 보던 여자가 그제야 이해가 되더라. 어쩌면. 여자는 제 쪽에서 전화를 한다 해도 내가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나 같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 봤을 테니까. 하지만······ 여자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맞는 쪽으로 기울지 틀린 쪽으로 기울지 나는 매번 망설였거든.
어디로든 가야 하는데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날들이 자꾸 먼지처럼 쌓였어. 사실. 여행은 그냥 한 말이었어. 어디로든 가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고나 할까. 그거 알아? 당신이 왜 하필 지금 가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솔직히 말해버릴 뻔했단 거. 당신은 내가 거짓말한단 걸 알았어. 누구와 어디로 얼마 동안 가는 여행인지 그래서 묻지 않았던 거야. 왜······ 하필······ 지금······ 떠나려는 건데. 그때 당신 표정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야. 내가 왜 하필 지금 떠나려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당신의 그 표정을 말이야. 당신도 나처럼 멀리 가려던 거였는지도 모르지. 아니, 이미 멀리 가 있었던 걸까.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서로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어졌던 건지도 몰라. 간단한 안부 인사만으로도 충분한 사이가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누군가는 그게 다는 아니라고 말할 테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걸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고. 당신처럼 말하는 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 왔다고. 그래서 당신 같은 사람들을 잘 안다고.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당신도 나도 그 여자도. 다만. 그래, 다만 당신에게서 멀어지니까 알겠어, 내가 안다고 말하는 당신의 그 어떤 것들이 이제 나와는 무관하단 걸. 당신은 이제 내게 무관한 사람이야. 그곳, 그 벚나무 아래의 친절한 이웃들처럼.
무관하다면서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왜 편질 보냈냐고?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거라 생각해. 당신에게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 내가 당신 때문이 아니란 걸 말이야. 말장난이라고 화내지 마.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잖아, 우리가 어떻게 될지.
하나의 이유를 생각하기보단 수많은 이유를 만들라. 내가 머무는 집의 여주인이자 은빛머리의 엘이 내게 해준 말이야. 나는 이 말이 정말 마음에 들어. 당신은 어때?
*
K는 희수의 편지를 끝까지 읽었고 태워버리기 직전까지 갔으나 그대로 두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걸 어째야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란 게 그 이유라면 이유랄까. 사실 희수와의 결별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었다. 편지에도 썼다시피 희수도 짐작할 만큼 K 또한 그랬으니까. 그러나 막상 손에 받아들고 보니 그 무게가 절대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이 K로서도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K는 몸과 마음이 번갈아 아팠다.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는 병가를 냈다. 그걸 안쓰럽게 여긴 부장은 다른 불임병원을 물색하느라 제 딴으로 열심이어서 K는 하는 수 없이 희수와 헤어지게 된 걸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부장은 더욱 K가 안쓰러웠고 불임 때문에 K의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고 저 혼자 결론짓는 바람에 K는 회사 창립 후 처음으로 일 년 치 휴가를 한 번에 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직원이 되었다. 휴가 내내 부장은 안부 톡을 보냈다. 길고 지루한 명상과 그렇게만 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단 생각만 들게 할 뿐인 명언들이 휴가 내내 K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K는 그 모든 게 희수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편지 때문이었다. K는 희수의 편지를 읽으면서 분노했고, 어느 문장에서는 좌절했으며, 또 어떤 말에는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럴 거면서 왜 편지를 읽느냐고 그걸 다시 꺼내 읽는 자신을 힐난하면서도 K는 희수의 편지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니, 와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라는 희수의 말 사이에서 K는 길을 잃고 헤맸다.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헤매는 자신 때문에 그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잘 안다고 믿었고 그래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K는 자신을 그 편지 밖으로 끌어낼 그 어떤 힘도 갖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비로소 희수의 편지를 태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딱 한 번. K는 불타는 희수의 편지 속에서 몹시 피곤한 얼굴로 자신을 타인처럼 바라보던 자신의 꿈을 꾸었다. 악몽 같진 않았으나 자신을 바라보던 그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 때문에 K는 별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휴가를 하루 남겨 놓고 K는 그곳엘 갔다. 왜 하필. 이유를 찾자면 희수가 머무는 하숙집 여주인의 그 말(편지는 불태웠지만 너무도 반복해서 읽은 나머지 K에게는 그 편지의 내용 모두 기억하는 후유증이 남았다) 때문이었다.
하나의 이유를 생각하기보단 수많은 이유를 만들라.
평일 오전, 국도는 싸늘하고 무거웠다. 곧 눈이 올 것 같은 하늘을 K는 운전하면서 앞 유리창을 통해 힐끔거리며 올려다보곤 했다. 국민에게 사랑받는 대한민국 대표 국민관광지. 텅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 보니 입구 쪽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었다. 양끝으로 한 사람 정도 지나다닐 수 있었는데 아마도 차가 관광지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바리케이드 너머 오른쪽의 매점은 임시휴업을 알리는 손 글씨의 알림판이 출입문에 붙어 있었다. 종이 귀퉁이가 들떠 있는 걸 보니 임시휴업은 좀 오래된 듯했다.
매점 앞을 지나 왼쪽 관광지 입구의 숲길로 들어섰다. 너무도 휑해서 처음 와본 것처럼 낯설었다. 여기까지 온 건 괜한 일이었을까. 그러나 생각과 달리 K는 계속 걸었다.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무심하고 그 어떤 것에도 무관한.
여자가 앉았던 그 나무 의자가 생각났다. 마침 저만치 그곳이 보였다. 걸어가면서 나무 의자에서 조금 떨어진 그러나 그 둘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애써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세워 둔 것처럼 붉은 글씨의 경고판이 의자를 향해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무 의자 옆에 저런 경고판이 있었나. K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나무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의 모습뿐이었다.
나무 의자에 앉아 마주 바라본 경고판에는 동절기 입수 금지, 수영 금지 따위의 경고문구와 함께 사망사고 난 곳, 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빨간색의 ‘사망’이란 글씨는 ‘사고’보다 훨씬 컸다. 사고보다 사망이 더 강조됐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이즈였다. 대체 누가 여기서 죽었단 걸까.
희수가 그랬다. 가까이서 보면 모르는 것들 중에 종종 멀리 보면 훤히 잘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여기서 다시 만난 여자, 그때 그녀의 오른쪽 눈가가 그랬다. 희미하지만 푸르스름해서 멍이란 걸 알 수 있는. 여자는 이곳에서 죽은 걸까.
K는 강가를 향해 고쳐 앉았다. 강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는 희수가 편지 말미에 쓴 문장을 작고 낮게 읊조렸다.
당신, 이미 알고 있었잖아, 우리가 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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