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파사칼리아의 거울

  • 작성일 2025-04-01

   파사칼리아의 거울

   ―배수아 소설과 음악들

인아영


   최초의 소리


   배수아의 신작 단편 「눈먼 탐정」(『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나온다.1) 스스로 탐정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으므로 아마 무언가를 추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추적하려는 것일까. 살인 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간 살인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과 발자국?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끔찍한 비극? 그런데 그는 “뭔가를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232쪽). 그에게는 살인 사건을 파헤치려는 목적이 없다. 대신 그는 뭔가를 보기를 원한다. 아니, 그러나 그는 ‘눈먼’ 탐정이 아닌가.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뭔가를 보기 위해서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아니라 다른 도구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영혼의 막대기’로, 그의 삼촌이 오래전에 쓰던 물건인데 “수맥의 파장이나 지하 단층의 미세한 진동, 특정 물질의 방사선 에너지”(226쪽)를 감지해서 살인자가 달아난 방향을 추적한다. 다른 하나는 ‘귀’로, 이 청각 기관을 통해 그는 사람과 사물의 사소한 움직임, 동물과 식물의 은밀한 상호작용, 이를테면 돌의 속삭임 같은 것을 감지한다. 눈먼 탐정은 ‘나’에게 말한다. “그 속삭임을 들어 봐”(239쪽).

   배수아의 근작들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의미를 가진 어휘들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의미로부터 멀어져 은은하게 울리는 음향들로 가득하다. 말이라기보다는 소리. 언어라기보다는 음악.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들을 읽기보다는 들어야 한다. 미지근한 여름 강물 위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매미 울음, 오래된 동굴의 광물에 축적되어 있는 음향, 짙은 숲속을 달려가는 기차 신호음, 끝나지 않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확실히 해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들리는 이 소리들은 때로는 웅성거림이나 속삭임, 파장이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들에서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거나, 부풀어 올랐다가 잦아들거나, 되풀이되고 메아리치면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을 보태는 장식이나 에두르는 묘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른 차원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섬세한 구조물. 「눈먼 탐정」에는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체국 앞 우체통에 잠시 멈춘 여인은 우리가 한눈을 파는 사이 한 통의 편지를 재빨리 우체통에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 귀에는 최초의 소리가 산다. 묵직한 편지가 어두운 우체통 깊숙이 툭 하고 떨어지던 소리. (230쪽) (강조는 인용자)


   지금도 기억나는, 우체통 깊숙이 편지가 툭 하고 떨어진 후에도 오래오래 울리던, 어둠을 닮은 최초의 소리. (234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자신을 키워 준 젊은 여인이 바닷가 소나무숲에서 우체통에 은밀하게 넣은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를 떠올린다. 마치 깊고 어두운 심연에 울리는 듯한 그 소리를 ‘나’는 “최초의 소리”라고 부른다. 이것이 최초의 소리인 까닭은 ‘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은 소리이거나 원시적인 음향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근원적인 무언가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눈먼 탐정에게 고백한다. “어두운 우체통 속으로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를 나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고”(239쪽). ‘나’는 여인이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했는지, 편지 안에 어떤 말들이 쓰여 있는지, 편지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고 싶은 말이 수신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편지의 원래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편치를 부치는 행위, 혹은 발화하려는 제스처, 혹은 무언가와 연결되려는 형식 자체에 몰두해 있다. 우체통에 편지가 떨어지는 소리는 바로 그 형식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만드는 은밀한 신호다.



   파사칼리아, 혹은 반복과 변주


   나는 쓴다는 행위에 대해서, 오직 편지라는 형식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없었다. 편지를 쓸 만한 구체적인 대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당시의 모든 글은 근본적으로 편지였다. 나는 어린 나이부터 많은 글을 읽었지만 그건 대부분 누군가가 쓴 편지였다. 나는 책을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편지를 읽으며 자랐지만, 내가 직접 편지를 쓴 적도 받아 본 적도 없었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 52쪽)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 ‘나’가 생일날 과거에 알았던 MJ로부터 편지를 받으며 시작된다.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사이인데 혹시 우연에 의해 잘못 배달된 편지가 아닐까. 편지란 같은 시공간에 있지 않은 누군가에게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이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와 달리, 편지는 수신자에게 도달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배수아의 소설에서 편지는 쓴다는 행위와 구분되지 않으며, 그 인물들은 편지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온전히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 결국 어떤 편지도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마치 수신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영영 잃어버린 것처럼.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에서 편지는 다른 차원의 형식을 암시한다. 정해진 수신자에게 완결된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미를 교란하면서 미지를 향해 열려 있는 형식. 쓸수록 의미가 축적되거나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게 혼합되거나 산란되는 형식. 그 결과물이 수신자에게 도달되든 그렇지 않든 쓴다는 행위는 지금 여기에 없는 무언가와 연결되려는 움직임을 이미 내포한다. 

   「바우키스의 말」(『릿터』 2023년 12월/2024년 1월호)에서도 편지는 제대로 쓰이거나 보내지지 않는다. ‘나’는 우연히 모형 비행기 수집가를 알게 된 이후 그에게 편지를 쓰려고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타이프라이터에 끼우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편지를 쓰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2) 편지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나무가 되어 입을 뒤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작별하는 죽음의 순간에 나무껍질로 변해 버린 그리스 신화의 바우키스처럼. 이 강렬한 이미지는 다른 장면에서 아름다운 꿈처럼 반복된다. 어느 밤 ‘나’는 모형 비행기 수집가와 함께 숲속을 산책하다가 두 그루의 나무를 각자 포옹한다. 고요한 가운데 나무껍질 아래에서 전해지는 나무의 떨림을 느끼면서. 그런데 한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나무를 껴안고 있는 동안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마침내 입 없이도 하나의 어휘가 저절로 말해”(36쪽)지는 것. 무언가를 말하려는 욕망을 느끼는 순간, 입은 나무껍질로 뒤덮였지만, 그제서야 비로소 말이 발설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말을 하기 위해서 입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걸까. 눈먼 탐정의 도구이기도 한 그것은 아마도 귀일 것이다.


   그의 음악은 뚜렷한 시작이 없었다. 오직 앞서서 듣는 행위, 최초의 음이 발현되기를 기다리는 행위, 그것이 전부였다. 음악가는 앞서서 듣는 자였다. 음악가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해서 귀 기울임으로써 그는 음악을 시작하고 있었다. (···) 음악가가 말했다. “이 곡은 약 10분 정도 이어집니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누구라도, 스스로 음악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 바로 그 순간에, 손에 쥔 돌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됩니다. 물론 원한다면 돌을 끝까지 쥐고 있는 것도 가능합니다. 돌을 떨어뜨리면서 그 순간 나타난 하나의 어휘를 입 밖으로 말하는 겁니다. 어떤 말이라도 좋아요. 의미는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으엉 하는 소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순간 떠오른 하나의 어휘를 반복해서, 스스로 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말하는 겁니다. 돌 안에 들어 있던 그 어휘가 음악을 이룰 겁니다.” (···) 말들은 소용돌이치며 허공을 이루었고 허공이 세계의 밀도를 빨아들였다. 돌이 어휘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45~47쪽) (강조는 인용자)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나’가 참석한 음악가의 퍼포먼스는 그 신비로운 과정이 음악으로 재현되는 황홀한 현장이다. 이 공연에서 음악이 만들어지는 단계는 이렇다: 첫째, 침묵 속에서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에 귀 기울이기. 이를테면 바람에 보리수가 흔들리는 소리, 누군가 자갈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 책상 위의 편지들이 흩어지는 소리 같은 것들. 둘째, 피아노 건반 하나를 누르고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듣기.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다시 피아노 건반을 누르기. 셋째, 음악가가 연주하는 동안 청중들이 손에 쥔 돌을 떨어뜨리면서 하나의 어휘를 반복해서 말하기. 이때 돌이 떨어지는 소리와 청중들이 입 밖으로 말한 어휘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뒤섞이고 사람들도 풍경을 이루는 소리의 일부가 된다. 이 세 단계를 거치면서 비로소 하나의 음악이 탄생한다. 이것은 현장에 있는 악기나 목소리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어 그 소리가 사라지면서 끝나는 일반적인 공연과 달리, “지금 여기”에 없는 소리를 들으면서 시작되어 자연과 청중의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사라진다. 리듬과 피치로 구성되는 음악이 아니라 침묵과 잔향으로 이루어지는 음악. 처음에서 끝까지 직진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무(無)로부터 출발해 영원히 닫히지 않는 원을 그리듯 나선형으로 회오리치는 소리. 이 음악이 「눈먼 탐정」의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소리와 공명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다. 둘 모두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한 부드러운 이행이므로.

   음악이 완성되기 위해서 청중들의 어휘가 “반복”되어야 하는 건 왜일까.3) 의미를 지니지 않은 소리, 때로는 파동 혹은 소음에 불과한 소리가 되풀이되면서 비정형의 구조를 만들어 내는 양식이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바로 산문 『작별들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도 잠깐 언급되는 프랑스 소설가 로베르 팽제(Robert Pinget)의 『파사칼리아(Passacaille)』(1969). 이 산문에서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나’는 이 책에 매혹되어 있다.5) ‘나’는 이 소설을 읽다가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오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서로 다른 톤으로 나뉜 목소리들이 희미하게 속삭이다가 꿈처럼 사라지고 종국엔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는 이상한 경험. 이는 『파사칼리아』의 실험적인 구조와 서술 방식에서 기인한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한 농부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는 것. 그런데 이 단순한 에피소드는 여러 버전으로 서술된다. 농부는 어떤 장면에서는 퇴비 더미 위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다른 장면에서는 책상에 기대어 죽은 채로 묘사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건의 세부는 수정되거나 뒤틀리거나 증발되면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사건을 회상하는 인물들의 기억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입장마다 보이는 국면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의 모티프가 다양한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이 구조는 ‘주제와 변주(Theme and Variation)’라는 오랜 음악 양식과 조응한다.5) 그중에서도 (소설 제목이기도 한) ‘파사칼리아(Passacaglia)’는 17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발달한 양식으로 일반적인 변주곡에 비해 엄숙하고 장중한 분위기로 진행되는데, 각 변주들이 뚜렷하게 구분되기보다는 오스티나토(저음선율)로 끊김 없이 이어지는 파스칼리아의 흐름은 이 소설의 구성과 닮아 있다. 그런데 음악 양식으로서의 파사칼리아와 달리 소설에서는 반복은 질서를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흩뜨린다. 농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여러 번 되풀이되는 끝에 확실한 증거를 획득하거나 뚜렷한 기원에 도달하지 않는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에서도 ‘나’가 MJ의 편지를 받은 이후 과거 하숙집에 만났던 음악 교사, 그에게 레슨 받았던 제자 등 다른 이들과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회상하지만, 여러 에피소드가 쌓여 갈수록 과거가 또렷해지기보다는 조금씩 다르게 변주된다. 그리고 이 변주되는 이야기들은 뒤섞이고 흩어지고 부서지고 흐려지고 합쳐지면서 마침내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바우키스의 말」에서 음악가가 ‘나’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떠올린, 바우키스가 나무로 변신하는 풍경은 바로 그런 것이다. “내 음악은 그 바우키스의 변신의 순간에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에 귀 기울이기입니다.”(52쪽) 침묵에서 시작해 청중들의 어휘가 반복되는 불규칙한 소음 덩어리들은 조금씩 흐트러지고 이어지면서 ‘나’를 돌연히 어디론가 이동시킨다.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 옆, 나뭇잎 사이 고요하게 술렁이는 바람 가운데, 저 멀리 하늘에서 날아가는 새 아래, 나무껍질로 얼굴이 뒤덮이기 시작한 바우키스의 몸. 팔은 나뭇가지처럼 갈라지고, 머리카락은 잎사귀처럼 흔들리고, 눈과 귀는 옹이처럼 뭉툭해지고, 두 발은 뿌리처럼 흙 아래로 뻗어 나간다. 어디에선가 사랑하는 연인인 필레몬도 딱딱한 나무로 굳어 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작별하는 최후의 풍경에 접속되는 순간, ‘나’는 말한다. “나는 감자를 캔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해 귀 기울이면서.”(53쪽)



   랜덤 거울


   그런데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이라면 무엇일까. 배수아의 소설에서 서사가 진행되는 듯하다가도 느닷없이 알 수 없는 시공간으로 점프하는 대목들에 힌트가 있다. 「바우키스의 말」에서는 그것이 바우키스가 나무로 변신하는 장면이었다면, 「눈먼 탐정」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두 여자가 걸어가는 장면이다. 소설 후반부에 느닷없이 어두운 산길에서 키가 크고 백발인 여자와 몸이 작고 얼굴이 창백한 젊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해가 질 무렵 거대한 검은 산을 향해 걸어가던 두 여자는 ‘나’에게 민들레 이파리를 먹인 뒤 산속 오두막집으로 초대한다. 자신들을 자매라고 밝힌 두 여자는 죽은 가족과 친구들의 무덤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면서 이제는 가족 중 둘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쓸쓸하고 외롭다기보다는 신비롭고 아득한 분위기가 은은하게 퍼지면서 밤은 깊어 가고 ‘나’와 두 여자는 같은 방에서 나란히 잠이 든다. 앞선 대목, 그러니까 눈먼 탐정과의 에피소드나 자신을 키워 준 여인에 대한 회상과 연결되는 고리가 느슨하고 불확실한 가운데 이 아름답고 은은한 장면은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혼란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눈먼 탐정이 발견하고 싶어 했던, 아니 간절하게 보고 싶어 했던 것이 다름 아닌 이런 느닷없는 장면이 아닐까. 눈먼 탐정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단지 정반대의 것을 보고자 한다. 정반대의 것을 향하는 몸이기를 원한다. 정반대의 것이 있는 방향을 찾아 그것을 향해 나머지 생을 흘러가고자 한다.”(232쪽) “정반대의 것”? 그것은 아마도 「바우키스의 말」에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영혼의 막대기로 자연의 미세한 파장과 진동, 에너지를 조심스럽게 감지하면서 우물을 찾는 눈먼 자. 그는 자신이 직접 볼 수 없으므로 산책의 동행자인 ‘나’가 ‘간접적인 눈’이 되어 무언가를 대신 봐주기를, 아무리 사소하고 평범한 것일지라도 묘사해 주기를, 머나먼 거리에 있는 것들의 진동을 전해 주기를, 그렇게 하여 서로 다른 것들이 손을 마주 잡는 풍경을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그러자 ‘나’는 눈먼 탐정이 정말로 바라는 것이 살인 사건의 단서 같은 것이 아니라 “뒤늦게 먼 곳으로 반사되는 거울상”(233~234쪽)일지 모른다고 짐작한다.

 

   어느 불특정한 순간 에너지와 빛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노란 뱀처럼 굴절되고 그때 무언가가 초자연적인 암흑에 집어삼켜진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차를 두고 임의의 장소에서 한 그루 불타는 나무로 환하게 솟구치며 출현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끝나고도 모든 것이 잊히고 죽은 다음 뒤늦게 우리를 찾아와 등 뒤에서 우리의 목을 껴안는 사후 암시와도 같은 빛. 우리의 삶은 우리 안에 축적된 타인들의 무작위적 거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나는 눈먼 탐정에게 말했다. (233쪽) (강조는 인용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차를 두고 임의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 지금 여기의 장력을 흩뜨리면서 불특정한 시공간을 향해 움직이는 일. 그것을 ‘나’는 거울의 반사 작용으로 이해한다. “우리 안에 축적된 타인들의 무작위적 거울상”이야말로 눈먼 탐정이 지극히 보고 싶어 하던 모습이자 우리의 삶 그 자체라고 말이다. 우리의 눈에는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가만히 두면 스스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랜덤한 장면을 보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미세한 떨림을 느끼도록 타고난 이에게 유독 감지되는 것이지만, 영혼의 막대기나 귀와 같은 도구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으며, 그런 식으로 우리는 머나먼 거리에서도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서로 연결될 수 있다. 나뭇가지로 변해가는 바우키스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비추었던 강둑의 보랏빛 광선에는 하루 종일 감자를 캐다가 숲을 산책한 뒤 음악가의 편지를 읽는 ‘나’의 손이 깃들어 있고, 어둠 속에 똑바로 누워 잠든 자매들이 내쉬는 고른 숨소리에는 젊은 여인의 편지를 잃어버리고 길가에 울면서 앉아 있는 ‘나’의 과거가 스며 있다. “죽은 자의 숨이 거슬러 올라와 생명이 섞이는”(242쪽) 것처럼 정반대의 것들이 무작위로 혼합되어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6) 이 랜덤 거울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비추면서 더 멀고 아득한 곳을 향해, 그리하여 영원한 곳을 향해 부드럽게 움직인다. 이것이 배수아 소설의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이다.



   작별들


   질문은 남는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부터 「바우키스의 말」, 그리고 「눈먼 탐정」에 이르기까지 배수아의 최근 소설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바우키스의 말」은 제우스 신에게 한날한시에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 바우키스와 펠레몬이 나무가 되어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작별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고, 가까웠던 이들과도 인사도 없이 작별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전반에 깔려 있다. 「눈먼 탐정」의 눈먼 탐정은 아예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러 죽음들이 잇따라 출몰하며, 꿈처럼 나타난 산속 오두막의 자매가 잠자는 장면은 죽음의 순간처럼 그려진다.


   우리는 이대로 작별 인사도 없이 작별하게 되리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하지만 누구나, 설사 그게 모형 비행기 수집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누구나 언젠가는 한때 가까웠던 누군가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바우키스의 말」, 24쪽.) 


   불행한 사건이나 죽음은 반드시 살인 사건이 아니라도 일어나며, 신기하게도 악의나 부주의와는 무관해 보이는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는 느낌을 그는 받았다고 했다. 즉 갑작스러운 혹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불행은, 다른 종류의 불행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눈먼 탐정」, 227~228쪽.)


   살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죽음에 대해서, 사랑했던 누군가와 영영 멀어지는 작별에 대해서,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쇠퇴와 소멸을 감당하는 방법에 대해서, 그러니까 멀리 떠나가 버린 사랑하는 것들이 머물러있을 수 있는 한순간에 대해서 배수아의 소설들은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문명의 해진 모서리까지도 읽어 낼 수도 있을까. 전쟁과 질병, 폭력과 사고로 날마다 죽어 가는 우리 곁의 많은 사람들 말이다.

   파사칼리아라는 양식에서 방점은 ‘반복’이 아니라 ‘변주’에 있다. 최소의 저음선율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정해진 구조 안에서도 그 위에 매번 다르게 변주되는 음형, 리듬, 화성은 새로움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운동성을 지닌다. 그러니 문제는 어떤 순간을 반복하면서도 똑같은 자리에 멈춰 있지 않을 수 있는가, 탄생과 소멸이 되풀이되는 동안 새로운 가능성의 틈을 열 수 있는가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새로운 음향들은 제거된 협화음들과의 대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불협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음향들은 그러나 불협화음의 역사적 상(像)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다.“7) 제각기 불규칙한 리듬과 불협화음의 선율로 이루어진 음악이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음향은 과거 협화음들의 세계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역사를 끌어안는다. 마찬가지로 배수아의 소설에서 혼란스럽게 흩어지는 기억, 의미 없는 말들의 메아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속삭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반복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과 연결되려는 애도의 형식이다. 정교하게 설계된 변주 속에서 이 불협화음의 언어들은 먼 곳을 향해 부드럽게 울려 퍼진다. 그 메아리 속에서 우리는 이미 떠나 버렸거나 언젠가 멀어져 버릴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다.



1) 이 글은 배수아의 장편소설 『속삭임 우묵한 정원』(은행나무, 2024)과 단편소설 「바우키스의 말」(『릿터』, 2023년 12월/2024년 1월호)(쪽수는 『바우키스의 말―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행나무, 2024 참조), 「눈먼 탐정」(『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그리고 산문 『작별들 순간들』(문학동네, 2023)을 다룬다. 이하 이 글들에서 인용할 경우 쪽수만 표기한다.

2) 편지를 쓰려는 시도가 자꾸만 실패하는 장면은 「눈먼 탐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눈먼 탐정의 나라를 떠나온 뒤로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써보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이상하게도 잘되지 않았다.”(240쪽) ‘나’는 편지 쓰기에도 실패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편지 보내기에도 실패하고 무언가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3) 나는 다른 글에서 “말을 꺼내려는 인간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이미지는 소설 전체를 장악하면서 여러 번 반복된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 소설이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되풀이되는 것이 바우키스의 이미지일뿐만 아니라 음악가의 퍼포먼스 장면에서 재현되는 음악의 형식 자체이기도 하다면, 이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는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진 여러 패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인아영, 「심사평」, 『바우키스의 말―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행나무, 2024, 8~10쪽 참조.)

4) 이후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배수아는 로베르 팽제의 『파사칼리아』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하지만 『작별들 순간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의 내용이나 줄거리를 소개하지 않고 그것을 읽는 독서 경험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것이었는지 이야기한다. “책의 내용을 굳이 되새기자면, 만약 내용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흥미롭지 않다. (···)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한마디도,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그 어떤 페이지에도, 내가 두 번을 읽으면서 거의 빈틈없이 연필로 여러 겹이나 밑줄을 쳐 놓았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배수아, 「은밀한 이름」, 『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63쪽.)

5) 반복과 변주에 관해서라면 다른 소설에서도 이렇게 언급된다. 내게 말이란 속삭임이며, 항상 다른 속삭임에 앞서서 속삭이고, 다른 속삭임을 따르고, 다른 속삭임을 위한 암시나 전조이며, 다른 속삭임의 변주이고 메아리이며, 다른 속삭임을 똑같이 반복하는, 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는 또 다른 속삭임이다. (『속삭임 우묵한 정원』, 166쪽.) (강조는 인용자)

6) 윤경희는 배수아의 소설들에 나타나는 이 소리의 뒤섞임에 대하여,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이자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의 원작인 『화씨 451』에서 책 애호가들이 산책하며 구송하는 장면을 빌려 와 “자연의 소음과 반향하고 상호 간섭하면서 사람 목소리의 성질도 소진시켜 버리”는 음향 덩어리, 즉 ‘입자 파동 간섭 신호 음’이라고 부른다. (윤경희, 「입자 파동 간섭 신호 음」, 『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50쪽.)

7) Th. W. 아도르노, 문병호·김방헌 옮김, 『신음악의 철학』, 세창출판사, 2012, 130쪽.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비평

답을 주는 소설과 질문하는 소설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답을 주는 소설과 질문하는 소설― 임현의 「고두」와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인아영 1. 이 소설은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특집 《미투(#MeToo) 릴레이 매니페스토, 촛불1》1)에 실린 글에서 서영인 평론가는 김이설의 「부고」와 임현의 「고두」를 붙여 읽는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읽어 보면 상당히 유사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두」에서 제자와 성관계를 맺어 그녀를 임신시킨 윤리 교사 '나'는 「부고」에서 아내가 집을 나간 뒤 강간한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은희'의 아버지와 겹쳐 읽히고, 또 「고두」에서 윤리 교사 '나'의 아이를 임신하여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아이를 기른 연주는 「부고」에서 '은희'의 아버지에게 강간당하여 임신한 아이를 키우게 된 여자와 포개진다는 것이다. 윤리 교사 '나'의 자기변명으로 이루어진 「고두」가 닫히는 시점에서, 아버지가 데려온 여자의 아들에 의해 윤간을 당한 '은희'의 이야기 「부고」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 독해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을 시도해 보는 까닭은 두 소설을 엮어 읽었을 때에야 「고두」의 "교사의 독백으로 윤색되고 은폐된 연주의 존재가, 혹은 같은 피해를 당한 구체적 인간들의 실물성"2)이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해의 목적은 「고두」를 폄훼하거나 단죄하려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비슷한 성폭력의 사건을 다룬 동시대의 두 작품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해 읽음으로써, 이 소설이 가질 수 있는 현재적인 의미를 확장해 보는 것에 가깝다.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문학에 필요한 독법을 가다듬어 보는 동시에, 단독 작품에 대한 독해로는 가능하지 않은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3) 그리고 그 문제의식의 핵심에 '소설은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이 간단치 않은 물음을 우리 모두 '겪고' 있는 시점에서 서영인 평론가가 굳이 「고두」라는 소설을 불러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2년 전이지만, 2017년 제8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하여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 후로, '소설이 성폭력 사건

  • 인아영
  • 2018-09-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1건

  •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비평가님 글을 문동에서 읽은 거 같은데 가물가물....

    • 2025-04-01 01:06:47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