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 작성일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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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소영현
사이보그 글쓰기는 본원적 순수함이라는 기반 없이, 그들을 타자로 낙인찍은 세계에 낙인을 찍는
도구를 움켜쥠으로써 획득하는 생존의 힘과 결부된다.
- 도나 헤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72쪽.
1 은유로서의 미친년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2019)에는 젊은 여직원에게 집요하게 이른바 ‘작업’을 걸고 “사적인 접근”1)이 여의치 못할 때 “공적으로”(200쪽) 폭언을 쏟아내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업무를 지시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을 일삼는 남성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만나는 에피소드이다. 그만큼 현실에서 상시 발생하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정의가 구현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 특히 가부장적 성격이 여전한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이런 일은 대개 불쾌나 모욕감이 쌓인 끝에 여직원 혹은 피해자가 퇴사하는 경우로 끝나게 된다. 그나마도 자발적 퇴사보다 더한 피해를 입는 일이 허다하니, 최소한의 피해로 상황이 정리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흔하디흔한 여성혐오적이고 비윤리적인 상황에 대한 사례 모음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디디의 우산』 속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작가는 화자 김소영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동생 김소리의 입을 빌려, “미친년이 되더라도”(202쪽) 사무실 사람들에게 김소영이 겪고 있는 불쾌와 모욕감,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위협과 불안”(202쪽)을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짚는다. 거꾸로 이해해보자면, 위협과 불안을 말함으로써 그녀 자신이 미친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친년은, 말하자면, 스스로 사회의 상식, 그것은 황정은 식으로는 종종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상식이 된 악의 세계 바깥으로 자신을 내보내는 일이 된다. 여기서 미친년은 상식의 세계 너머의 정상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 된다.
2 낙인으로서의 미친년
미친년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 너머 정상성을 역설하는 말이 된다. 바로 그런 초월성의 획득을 통해서나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삶의 비정상성을 바로잡기 위해 억압적인 사회적 틀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도약이 ‘미친년 되기’라고 한다면, 『디디의 우산』에서 작가도 밝히고 있지만, 그 ‘미친년 되기’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로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그만큼의 의미를 획득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현실의 차원에서 보자면 스스로 미친년이 되는 일보다는 미친년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더 많다고 해야 한다. 미친년이 되기를 원하지 않지만, 미친년으로 지목되거나 명명되어 내쳐지는 일, 어쩌면 ‘미친년 되기’의 본격적인 의미는 이것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미친년은 정상성 바깥에 놓인 여성에게 붙이는 낙인의 이름이거나 누군가를 정상성의 바깥으로 떠밀면서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한 거짓 논리와 같은 것에 가깝다. 부모의 이혼으로 열 살 무렵 존재도 모르던 외삼촌 부부에게 맡겨졌던 시절에 대한 화자의 회상인 손보미의 소설 「밤이 지나면」2)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정신 나간 여자, 외숙모는 그 여자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아니, 처음에는 그저 맞장구를 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결국에 외숙모는 좀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맞아, 완전 정신이 나가 버렸다니까. 미친 여자야. 미친년. 그러고 나서야 외숙모는 혼자 거실에서 티브이로 <그림 명작 동화>나 <작은 숙녀 링> 같은 만화 영화를 보고 있던 내 존재를 기억해내고는 큰 소리로 묻곤 했다. “아이쿠, 너 내 말 들었니?”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면 외숙모는 부엌 식탁에 모여 앉은 ‘정신이 나가지 않은’ 동네 아주머니들과 ‘정신 나간’ 여자-혹은 기타 등등-에 관한 대화로 다시 돌아갔다.(9쪽)
비밀이 없고 소문이 무성한 작은 마을 공동체는 외부에서 유입된 존재를 좀체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화제에 오르고 또 ‘정신 나간 여자’에서 ‘미친 여자’, 아니 ‘미친년’으로 불린다고 해도 그건 아마도 그 누군가와는 들어맞지 않는 규정일 수 있다. 화제에 오르는 이는 쉽게 교체될 수 있는 것이다. 당시는 개울이 흐르고 소를 키우기도 하는 논밭이었던 경기도 작은 마을이 고층 아파트로 변하던 시기로, 공동체의 구성원이 전면적으로 바뀌던 때였기 때문이다. 부모 아니 가족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화자가 마음을 주고받았던, 당시 공사장 근처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여자가 동네 사람들에 의해 ‘미친년’으로 규정되었다.
그녀를 두고 “이혼을 했고 자식이 죽었는데, 그녀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거나 “동네 남자들을 ‘꼬시려 든다’는”(27쪽) 식의 정보가 떠돌았고, 예지몽을 꾼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정보들의 조합으로 화자는 그녀의 모습이 “라푼젤처럼 길게 기른 머리를 뒤로 땋아내”리고 “아랫단이 치렁치렁한 스커트를 입고 손가락마다 반지를 끼고” 입술을 붉게 칠한 “아주 마르고 약간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을 품”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화자에게 일견 미친년이 외롭고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매력적인 존재로 상상된 것인데, 이는 아마도 화자가 그녀에게서 낯선 곳에 던져진 자신과의 공감의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자신에 대한 과장 혹은 허위 없이 온전히 자신의 고통을 대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시기였던 것이리라.
당연하게도, 실제의 그녀는 상상 속 마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살짝 통통한 체형에 남자아이처럼 머리카락이 짧았고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던 그녀는 때리기까지 하던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생계를 꾸리며 이리저리 떠도는 존재였다. 마지 피어스의 소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1976)를 두고 장애학 연구자인 앨리슨 케이퍼가 정확하게 짚어주었듯, ‘미쳤다’는 진단은 가난한 (유색인) 여성과 문화적 규범 안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에게 행해질 가능성이 높다.3) ‘미쳤다’의 여부와는 관련이 적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아이를 낳은 적도 없는 여자로, 말하자면 가부장제에 입각한 가족의 정상성 바깥에 놓여 있던 그녀를 ‘미친년’으로 낙인찍던 시절이기도 하다고 회상하며 별일 아닌 듯이 지나가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생계 부양인과 주부로 이루어진 부르주아 가족 범주의 바깥에 놓인 여성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까지, 십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지냈던 외삼촌 부부를 떠나 이후에는 자신의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소설에서 화자의 현재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식류품점 그녀를 떠올리기 위한 회상이었음에도, 소설 전체에서 어린 화자를 ‘납치’했다던 사건 이후의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급작스럽게 떠맡게 된 ‘거의 남과 다를 바 없는’ 아이에게 냉대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리 반기지도 않았던 외삼촌 부부에 대한 선명한 기억들, 가령,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라고 여기면서도 식사 자리에서조차 제대로 챙겨줘야 할 아이로 생각하지 않았던 에피소드들을 나열해두면서도, 화자는 종종 성인이 된 이후의 관점으로 그 시절의 실제 상황을 보정하거나 조정한다. 이후의 외삼촌, 외숙모 심지어 외사촌의 성격적 일면까지 파악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되기도 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면,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서술에는 좀 거리를 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화자 자신에 대한 최신 정보나 식류품점 그녀에 대한 정보를 누락한 일은 꽤 의도적인 것처럼 읽히는 것이다.
어딘가로 떠나달라는 아이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사고가 난 후, 그녀는 화자에게서도 그 마을에서도 떠났다고 한다. 이후의 그녀에 대해 화자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한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만들어낸 상처와 그에 대한 복수처럼 부모가 사고로 죽었다거나 그들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꾸며내고 그런 이야기에서 은밀하게 위안을 얻게 되거나 그런 자신에게서 죄의식을 떨칠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상황, 아마도 그런 것들이 열 살 아이에게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불러왔을 것인데, 화자의 회상은 아마도 어째서 식료품점 그녀가 화자를 데리고 떠났을까를 궁금해하면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추해보자면, 자신과 마음을 나눴던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려던 행위가 아마도 그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돌발적인 해법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겠다. ‘미친년’이라는 낙인 바깥으로 나아가는 일, ‘미친년 되기’의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과도 같은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성장했음에도, 성인 화자가 그 시절에 대해 회상하는 것은, 자신이 또 한번 선 바깥으로 떠밀어버린 그녀에 대한 죄의식의 환기일 것이며, 동시에 그녀 또는 화자 역시 그 ‘밤’과 같은 시간을 여전히 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내쳐지고 떠밀린, 미친년의 자리는 또한 공감의 자리이기도 한 셈이다. 꽤 긴 시간 동안 지속되는.
3 망상적 세계 속 미친년 혹은 미쳐가는
미친년이 되고자 하든 미친년으로 낙인찍히든 이 미친년은 가면이거나 위장이다. 사회문화적인 의미를 갖지만, ‘미쳤다’와 실제 그녀들의 신체적-육체적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가면과 위장 아래에서 그녀들은 누구보다 ‘온전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 스스로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그들이 속해 있는 세계, 그 소설 세계 내부를 둘러보자면 어떠한가. 과연 그러한가. 소설 속 세계에서 그녀들은 ‘온전한’ 존재들인가.
전하영의 소설 「시차와 시대착오」4)에는 미친년에 관한 우리 사회의 온갖 진부한 상상들이 망라되어 있다. 임신 중에 아이를 잃은 상처로 고통받는 여성이 있고, 예술적 재능을 펼칠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고통받는 여성이 있다.
아내는 달라졌다. 아이를 잃었다는 사건이 그녀 안에 잠재된 어떤 스위치를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주 머리가 아프고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아주 의기소침해졌다가도 들뜬 기분을 자제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고, 조그만 의견 차이도 견딜 수 없어하며 명식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아내는 옆집 사람들이 벽에다 대고 계속 자기 험담을 한다며 불안해했다. (…)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고. 작고 마른 아내는 발코니의 수납장 뒤에 숨어 눈을 질끈 감고 끝없이 중얼거렸다. 사실이야 어떻든 그녀의 감정만큼은 진실되어 보였다. 여보, 중앙정보부는 이제 없어. 지금은 안기부 시대라고. 명식은 이성적으로 그녀를 설득해보려고 수차례 시도했다. 말이 안 통하면 화도 냈다. 왜 자꾸 그런 헛소리를 하냐고.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는 신문을 찢고 TV를 깨부수며 중앙정보부가 없다고 소리질렀다. 지금 그게 중요해?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하냐구. 그녀는 상처받은 얼굴로 명식에게서 몸을 돌려 흐느껴 울다가 그를 밀치고선 자기를 죽여달라고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왔다. 당신 날 믿지 않지. 날 믿지 않는 거지.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거지. 그녀는 가슴을 치고 몸을 덜덜 떨며 악을 썼다.(164쪽. 밑줄 강조: 인용자)
그녀들의 고통은 상상된 것이 아니다. 아이를 잃은 여성은 두통과 불면에 시달리고 조절되지 않는 감정의 기복에 고통받는다. 급기야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일삼는다거나 감시한다거나 하는 식의 정신질환의 병식을 드러낸다. 다수의 여성이 임신 및 출산과 연관된 몸의 변화에 따른 심리적 변화 즉 우울증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증상을 겪기도 한다. 소설 속 여성에게는 정신질환의 병식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자신만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와 수군거림, 자신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던 보이지 않는 존재들로 숨죽이며 지내던 그녀는 어느 시점부터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집-정신병원-으로 옮겨가야만 했”다.(203쪽)
물론 그녀의 발병이 몸을 중심으로 한 생물학적인 차원으로만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먼 친척이 경영한다는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스무 살의 그녀는 열 살이나 나이가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처럼 독일로 혼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했고 그런 삶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기도 했었다. 아이를 잃은 그녀를 두고 남편은 그녀의 실재하는 고통을 외면하고 그녀의 고통을 부인하며 화를 내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대응했다. 이후로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귀가를 늦췄고 관심을 줄여갔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고통 안에 침잠하여 그 고통 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미친년이 되었는가. 그녀는 미친년인가.
그녀가 아이의 상실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면, 남편 이명식은 오히려 거대한 망상적 세계를 만들어갔다. 중년 남성의 미소지니의 면모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소설로도 읽히는 「시차와 시대착오」에서 화자인 명식은 현실에 존재하는 딸의 진면목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여성들의 경제적 무능력에 대한 편견을 자신의 딸에게 고스란히 적용하는 보통의 한국 중년 남성의 면모를 보여준다.
아들이었어. 분명 아들이었을 거야.(164쪽)
근수는 어땠을까.
명식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선 깜짝 놀랐다. 이근수라고 거의 소리 나지 않을 정도로 작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명식은 아들을 낳으면 ‘근수近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170쪽)
기이하게도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심장이 멎어버린, 성별을 확인하기도 전에 잃은 아이, 그 실체 없는 아이를 ‘읽어버린’ ‘아들’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공기처럼 호흡하는 남성으로서, 아들이 있었으면 하는 갈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에서 아들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아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그 아이가 태어났더라면 아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으로 그를 나아가게 한 것이다. 편집증적으로 구축된 망상의 세계 안에서 그는 ‘없는’ ‘아들’에 깊이 의존하면서, 현실의 상실을 견디거나 혹은 딸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며 산다.
소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자기 셰계를 사는 부모 아래에서 분열적 성별 지향성을 갖는 딸을 뒤쫓는다. 그녀 이미루는 어릴 적부터 ‘남자아이’가 되고 싶었던 열망이 끝내 좌절되는 시간을, 내내 분열적인 시간을 산다. 그녀의 생애 전체가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남자아이가 될 수 없었지만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엄마가 집을 떠나야 했던 때에도 결국 죽었을 때에도 슬펐지만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희생의 끝에서 엄마가 원했던 삶을, 아빠가 원했던 아들 그 이상이 되어 그녀가 대신 누릴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에게도 상대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그런 시간을 보냈으나, “그녀가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라고 무시했던 소수의 남자 동기들”이 “무슨 연줄인지 경력도 없이 대학에 출강하고 기관에 정규직으로 취직하며 위로, 더 위로 올라갔”다.(184쪽) 가족 내에서든 사회 내에서든 좁혀서 예술계 내에서든 성별의 한계를 무화하고자 한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많은 것들이 성별로 결정되었다. 필리스 체슬러가 여성이 미치게 되는 계기 가운데 하나로 거론하는 것은 사회문화적 거세의 경험과 연관된다.5) 이명식의 눈에 “어떤 몰입과 흥분, 과도한, 한때는 그가 ‘열정’이라는 개념으로 착각했던 알 수 없는 에너지로 충만해져 반짝거리는 눈동자”(174쪽), 즉 예술가적 자질은 딸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말인 “아내의 흔적”(174쪽)으로 요약되어 버린다.
편집증적인 망상의 세계를 살고 있는 아버지가 지극한 정상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면, 이미루의 어머니와 이미루는 우울증적, 분열증적 운명을 살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미루의 어머니가 미쳤다면, 이미루도 미쳐가는 중이다. 그들을 우울증적으로 분열증적으로 살게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그들의 삶은 여성들이 가부장제 체제 안에서 주어진 역할에 한정된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뭔가를 하려고 할 때라면 피하기 어려운 삶의 형태라고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미친년인가. 미쳐가는 중인가. 우리 모두가 거대한 망상의 세계이기도 한 가부장제를 살고 있음을 환기하자면, 누가 미쳤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4 정신병의 ‘모계유전설’
「시차와 시대착오」에서 미루는 일생에 한 번은 “환청을 듣거나 환각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예감”(205쪽)을 안고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누구의 예감인가. 미쳤다는 것을 종종 젠더적 요소와 결부해서 살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종종 여성에게 미쳤다는 것은 내쳐지거나 떠밀린 수동적 피해자의 자리를 연상시킨다. 최근에는 사회문화적 남성이 되고자 하는 열망의 좌절로 남성이자 여성인, 아니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분열증적인 존재가 되는 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미쳤다는 것에 관한 가장 친숙한 인식 가운데 무엇보다 영향력이 강한 것은 정신병의 ‘모계유전설’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의학적으로 근거 없는 낭설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믿음은 우리의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 있기도 하다. 그 낭설이 2020년대의 서사에도 여전히 등장하고 있는 것은 소설이 담고 있는 현실이 그런 공기를 품고 있어서인 것이다.
심지어 ‘모계유전설’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마구잡이로 사용되어 버리는 편이기도 하다. 그 계보는 종종 할머니나 이모로도 확장된다. 최근 소설에서 그 범주는 고모로까지 확장되었다. 자매처럼 키워진 이모, 부모를 대신한 돌봄을 제공했던 이모와 고모들, 최근 한국소설에서 이모와 고모들은 가족이라고도 아니라고도 말하기 애매한 상황에 놓인 그녀들을 통한 가족 관계의 재사유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가족의 힘이 세다는 것을, 여전히 가부장제에 기반한 가족 정상성의 억압이 강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킨다. 동시에 그 안에서 여성들에게 허용되는 자리와 역할이 거의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또한 상기시킨다. 시대에 따른 변화 요청 속에서도 시대착오적 시간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으며, 그렇기에 미쳤다는 것의 범주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소연의 소설 「사랑과 결함」6)에서 항우울제 및 각종 신경안정제를 오랫동안 복용해 온 순정이 겪는 심리적 불안감이 그녀의 성정으로부터 온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젊은 나이에 간병 일을 하며 열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을 키웠고, 남동생의 대학 뒷바라지를 다 한 후에야 자기 삶의 빛나던 시절이 다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결혼 적령기를 한참 지나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가 곧 이혼을 하고 남동생 가족과 함께 살게 된 소설 속 화자의 고모 순정은 화자의 엄마인 올케를 온 힘을 다해 미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가 미워했던 것은 누구였을까. “사랑스럽고 인심이 좋으며 넉살 두둑한 마흔 중반의 여자. 하지만 애 딸린 남편에게 소박 맞은 여자.”(164쪽) 사람들의 눈에 비쳤던 순정의 모습 어디에도 항우울제 및 신경안정제를 오랫동안 복용해야 할 만큼의 심리적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지는 않다.
이십 년이 지난 후 화자인 성혜도 소량의 항우울제를 복용한다. 그녀의 우울증에 관한 한,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인들 가운데 굳이 적어 보자면, 그녀가 심리적 불안감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적은 월급으로 집도 없이 살고 있는데, 앞으로도 그 삶이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어서일 것이다. 여성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일 자체가 심리적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악조건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여성들이 겪는 고통이 구조적이고 은유적인 것이면서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해야 한다면, 이 고통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성혜의 남자친구 수는 말할 것도 없이 순정의 남동생이자 성혜의 아버지에게 그것은 그저 “유전”의 문제로 그러니까 여성의 육체성의 문제이자 여성의 몸을 통해 유전되는 정보로 쉽게 환원되어 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정신병도 유전이야. 유전.”(179쪽)이라고 말하는 자리에서 그녀들의 생애 자체라고도 해야 할 그녀들의 고통은 은유적 의미조차 상실하고 여성들의 몸에 갇혀 버린다.
‘모계유전’이라는 말이 나에게 주는 비관적 함의는 대단했다. 내가 정말 정신적으로 큰 문제를 겪게 되었는데 그 원인이 모계유전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겪어온 모든 고통이 엄마의 유전자적 결함으로 치환되고 고모의 인생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조울증은 할머니의 유전자적 결함으로 치환되는 거겠지.(182-183쪽.)
물론 예소연이 「사랑과 결함」을 통해 정신병의 ‘모계유전설’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연령과 경험이 다르며 가족 내, 사회 내 각기 다른 자리에 놓여 있는 여성들에 대한 사회의 이해가 여전히 정신병의 ‘모계유전설’과 같은 거짓 믿음에 의해 지속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환기하며 비튼다. 예소연의 소설을 통해 ‘미쳤다는 것’은 좀더 엄밀한 의미에서 육체를 통해 발현되는 실재하는 억압이자 고통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하여 예소연의 소설 식으로 표현하자면, ‘미쳤다’는 긴 시간 아니 거의 평생을 한 집에서 살았음에도 여전히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여성들의 삶이 품고 있는 ‘기괴한 얼굴’을 환기하는 말에 가깝게 된다. 그러니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167쪽.) 미쳤다는 것의 젠더를 둘러싼 지금껏 반복되는 오해와 편견들을 세심하게 알아챌 좀더 예리한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1) 황정은,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200쪽.
2) 손보미, 「밤이 지나면」, 『사랑의 꿈』, 문학동네, 2023.
3) 앨리슨 케이퍼, 이명훈 옮김, 『페미니즘 퀴어 크립』, 오월의봄, 2023, 195쪽.
4) 전하영, 「시차와 시대착오」, 『시차와 시대착오』, 문학동네, 2024.
5) 필리스 체슬러, 임옥희 옮김, 『여성과 광기』, 위고, 2021, 147-148쪽.
6) 예소연, 『사랑과 결함』,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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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공화국 문학 선언제6공화국 문학 선언1) ― 사변적/편집증적 한국문학 시론 ― 윤재민 1. 한국 문학사라는 유령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다. 아주 진부한 대목으로 운을 띄우며 글을 시작할 테니까. 심지어 다음과 같이 약간의 패러디까지 가미해서. 하나의 유령이 한국 문학계를 떠돌고 있다. 한국 문학사라는 유령이. 지금부터 관철하고자 하는 사안을 유령론만큼 적확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는 내가 문학과 관계하는 진부하면서도 일견 특수한 위치에서 나타난 ‘문학사적 충동’의 발로이다. 그것은 기존 문학사 서술에 대한 모종의 불만에 기인하는데, 그렇다고 문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기존 문학사와 전혀 다른 시간성에 한국문학을 내던지고 싶다는 충동에 가깝다. 내가 이런 독단적인 문학(론)을 욕망하게 된 계기는 아래의 대목에 사로잡히고 나서부터다. 한국 문학사가 개별 문학이라는 의미는 한국 문학사의 기준이 한국사 총체 속에 있다는 사실의 소박한 인식을 뜻하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볼 때 이러한 진술은 편협한 지방성, 파행성의 노출로 오해되기 쉬우며 심지어는 배타적 독선적 쇼비니즘 내지는 문화의 보편성을 압살하는 사고방식으로 간주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체 민족의 행복에 감성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문화 파악력은 역사의 추진력이 될 수 없을 것이다.2) 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1973)의 한 대목이다. 두 사람의 문학사 시도는 임화 이래 이식문학론의 성취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민족 공동체의 근대적 주체성을 한국문학 성립의 당위로 삼은 ‘총체적 민족 문학사’의 한 전범으로 남았다. 근대 맹아론으로 간편하게 정리되기도 하는 『한국문학사』의 총체적 관점은 이 시대에는 설명력의 한계가 뚜렷하다. 이식문학론이든 근대 맹아론이든 간에, 더 이상 한국문학에 대한 총체적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내가 『한국문학사』에서 매혹된 사안은 『한국문학사』의 서술 방법이 아니다. 문학사 서술의 당위를 ‘주체 민족의 행복에 감성적으로 작용하는 문화 파악력’에서 구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공동체의 행복과 역사 운동의 작동이 양립할 수 있는가. 위 인용문에 표명된 ‘행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 모호한 대목에 사로잡혀, 그 의미를 내 식대로 번역해본다.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는 행복을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할 수 없는 가치로 본다. 폭력과 모순으로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가 억압되고 핍박받을(말 그대로 행복을 박탈당할) 잠재성이 상존하는 가운데, ‘현세의 행복’이란 이를 망각케 하는 허위이자 기만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아도르노 같은 현자가 아니라면 누가 ‘현세의 행복’을 쉬이 포기하겠는가. 그 양태가 허위이든 기만이든, 우리는 각자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의 행복이 누군가
- 윤재민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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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포기 : 남성적 돌봄의 주권을 반송하는 소설적 방법들상속 포기 : 남성적 돌봄의 주권을 반송하는 소설적 방법들 김건형 최근 소설장에는 가부장이 남긴 재산과 권력, 그리고 그에 딸린 ‘돌봄’의 형태를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머뭇거리거나 항의하는 소설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가령, 성해나의 「스무드」1)는 광장의 ‘아스팔트 극우’ 노인들과 낯선 조우를 통해 한국 사회 고유의 가부장적 희생과 돌봄이 어색한 형상으로 되돌아온 경위를 되살펴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와 평론의 주목을 받았다. 직접적으로 동시대의 광장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가 구축해 온 고유의 남성적 돌봄과 그 유산을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후속 세대의 곤혹과 고민을 다루는 소설들이 연작에 가깝게 제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계절의 소설에서 “남성의 몸이 시들시들한 수동으로 묘사되”는 “허약한 남성성”이 자주 탐구되고 있으나, 그것은 “서사적 분출구 없이 사실적이기만 한 재현”이었다는 날카로운 진단이 한 입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2) 어쩌면 그 수동적이고 허약한 남성들이 서사에서조차 분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 자체가 동시대의 젠더·정치적 풍경에 대한 적확한 발견일지도 모른다. 다만, 굳이 남성(성)의 분출구를 대신 찾아주는 것보다는, 그토록 서사적 분출, 즉 ‘건강한’ 해법을 찾을 수 없는데도 자주 발견되는 남성(성) 재현이라는 패턴에 주목하는 것이 증상적인 독해가 될 것 같다. 할아버지의 유산, 역사를 다시 마주하는 오싹함 서장원의 「뱀이 있는 곳」3)과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피다」4)는 모두 사촌지간인 손자, 손녀들이 죄 많은 할아버지의 무덤과 적폐를 ‘파묘’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유산이 과연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실체적인 힘이 있는 것인지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실은 그저 자신이 과민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끝내 각자의 집안이 숨겨왔던 비밀의 핵심에 다가가서 그것을 기꺼이 파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지연된다. 「뱀이 있는 곳」은 할아버지의 유산이 있는 ‘솔잎산장’으로 가는 길 내내 “하진에게 잘못한 사람들”(183쪽)에 대한 생각을 하며 시작한다. 성폭력 무고죄로 고발당한 하진은 자신을 도와줄 직장 동료들의 증언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하면서 하진을 외면하고 있다. 이를 전해 듣는 정인은 “그런 비겁한 선택들이 세상을 망친다고 생각”(184쪽)하며 부아가 치민다. 명백한 성추행 혐의를 고발해도 이를 상업화하는 법조계 자본의 힘에 의해, 깔끔하게 무죄판결이 나고 마는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잘못한 사람들과 비겁한 선택들을 회상해 보면 그뿐만은 아니다. 사소하게는 대책 없이 낭만적이고 무능한 부모들도, 좋은 대학에 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 기숙형 재수학원에서 만났던 사람들
- 김건형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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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2)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2) 최선교 김혜순이 말하는 여성성과 그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 1990년대 여성적 글쓰기 담론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서며 민족민중문학의 하위 범주로 여성문학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은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총 17호에 걸쳐 발간된 여성문학 무크지이다. ‘또문’은 여성운동이 가시화되던 1980년대에 유학파이면서 사회과학 분야에 있던 여성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지만, 동인의 구성원으로서 주부와 대학생까지 포함하면서 불평등한 성 문화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 문화를 실천하고자 한 단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또문』의 초기 호에서는 가사노동이나 육아 등 ‘여성’의 재생산 노동의 전면적인 재사유를 촉구하는 기획이 돋보인다. 『또문』이 추진했던 여성적 글쓰기 담론의 의미와 한계를 살펴볼 때 김혜순 시론의 여성성 개념이 갖는 특이점이 드러난다. 1980년대 여성문학이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하위 범주로 인식되었던 것과 달리, 1990년대에 들어서 여성문학 진영의 관심사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계급, 민족을 포함하여 정체성의 복합적 성격을 탐색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특히 『또문』이 여성적 글쓰기에 보인 관심은 남성중심적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문화적 실천 대안의 일종이었다. 1992년 발간된 『또문』 9호는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를 특집 주제로 내걸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남성의 말과 전쟁을 벌이려고 남성의 말에 맞추는 것, 그 말로 많은 것을 말할수록 자신의 언어를 더욱 잃게 되는 그 자가당착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가두어 두고 싶지 않다. (...) 프랑스에서는 언어와 정신분석학을 연결하는 매우 이론적인 논의로 ‘몸으로 글쓰기’의 단어가 최근에 크게 부각되어 왔다. ‘몸으로 글쓰기’라는 것은 결국 기존의 언어가 여성의 체험을 풀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여성들이 해온, ‘머리’만도 아니고 ‘가슴’만으로도 아닌 온몸으로 쓰는 모반 행위라 할 수 있다.”1) 이 글은 여성이 부당한 억압을 향하여 억울하다는 외치는 주장을 잠시 멈추고, 근본적으로 여성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재사유해보자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성중심적 권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사용한다고 여겨지던 말들은 이미 남성중심적 의미 체계에 의해 오염된 것이므로, “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 최선교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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