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의 병리학
- 작성일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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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병리학
ㅡ 유선혜와 차현준의 시를 중심으로
송현지
1.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몸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내세운다. 이 요구는 여성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을 폭로함으로써 당시에도 강한 호소력을 가졌지만, 그 구체성과 상징성으로 인해 약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특히 ‘자기만의 방’이라는 표현은 독립을 위한 물질적 요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여성 창작자만이 아닌, 청년 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확장되어 활용되어 왔다.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 금융 자기 계발서의 제목이나 그들의 주거 형태를 분석하는 사회학적 키워드로 변주되는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울프가 제시한 이 조건은 단순히 경제적 여유를 갖추거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여성의 몸이 가사 노동과 돌봄을 위해 수시로 침범되며 공동의 재화처럼 사용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정기적 수입의 필요성은 생존을 이유로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양도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며, 독립된 방에 대한 요청은 몸이 침범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울프가 요구했던 저 경제적·물리적 조건이란 타인에게 뺏긴 자신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대어 오늘날 청년 세대의 거주 불안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만이 아닌, 신체의 주권 문제와 함께 살펴보면 어떨까. 고시원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하며 정민우가 그들의 불안정한 거주 자체가 아닌, 잦은 이동으로 인해 소유물을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그들이 삶을 ‘요약’한 채 살게 되었음을 포착한 것처럼 말이다.1) 이처럼 방의 문제가 주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게 되는지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방을 살펴보는 작업은 소재주의적인 탐색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임대된 방에 머무르는 유선혜 시의 화자와 내면의 방을 관리하는 차현준 시의 화자를 중심으로 청년 세대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을 상상하고 변형하며 자신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동시대 청년들의 인식 구조를 가늠해 보려 한다.2)
2. 임대된 몸과 구멍의 존재론: 유선혜의 경우
유선혜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청년 인물들은 주로 좁고(「흑백 방의 메리」), 어두운(「Nirvana」) 방에 머문다. “조립형 서랍장이 쓰러져가”는 방에서 “싸구려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종이컵에 섞”(「잡종의 별자리」)어 마시고,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그들의 모습은 “세상의 시세를 감당할 수 없”(「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는 동시대 빈곤한 청년들의 초상이다. 여기서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 “원룸”(「원룸에서 추는 춤」)이라는 점은 특별히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주방과 화장실이 한데 합쳐 방이 곧 집이 된 이 주거 형태는 아무런 완충지대 없이 거주자를 세계와 맞닿게 하는 구조를 갖는데, 청년 1인가구가 이를 주요한 주거 형식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그들이 보호막 없이 세계와 온몸으로 맞부딪치고 있음을 은유한다. 방의 형태는 그들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구조적으로 드러내는 셈이다.
이는 관념적인 수사라기보다 물리적으로 실감되는 것이기도 하다. 원룸의 얇은 벽을 타고 넘어오는 소음과, 창문 하나만을 사이에 둔 외부의 시선은 수시로 방 안의 신체를 침범하며 울프가 강조한 몸이 침범당하지 않을 권리는 원룸에서는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데 유선혜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방의 또 다른 결정적 특성을 포착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원룸을 비롯해 그들이 머물고 있는 방 대부분이 ‘임대된 장소’라는 점이다. 기실 생애의 특정 시기를 통과하는 청춘이란 누구나 거쳐 가는 “객실을 빌”(「하얀 방」)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지만, 유선혜가 그리는 풍경이 “원룸의 창문을 내다보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모텔의 벽이 보”(「원룸에서 추는 춤」)이는 곳이라는 사실은 그가 이 장소를 통해 청춘 일반의 임시적 속성이 아닌, 세계의 구조적인 조건을 강조하고자 함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 원룸과 모텔이 나란히 배치된 풍경은 두 공간이 모두 ‘빌린 방’이라는 동일한 층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모텔과 나방』에 수록된 모텔 연작의 주요 무대인 ‘모텔’을 기존 관점에서 확장하여 읽을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동안 유선혜의 모텔은 남녀 간의 성애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점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지며 사랑의 행위가 “탈낭만화”3)된 “세속화된 공간”4)으로 해석되었지만, 이곳이 원룸과 마찬가지로 ‘임대된’ 장소라는 조건을 전면에 놓는다면, 모텔 연작이 제기하는 문제는 신체의 점유와 양도의 문제로 조금은 새롭게 재구성된다.
리모컨으로는 이 방의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불 속에 있었고
손가락을 움직여 전체 등과 세 개의 부분 등을 차례대로 껐다가 켰고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와 최신 영화의 장르별 목록도 죄다 눌러보았다.
그 사람이 보자고 했던 드라마는 누군가에 의해 3화까지 시청된 기록이 있었고 리모컨을 내려놓자 예고편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확실히 그 드라마가 주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그 사람과의 행위도 나쁜 느낌은 아니었어.
그건 완전한 합의에 의해 순조롭게 진행된 사건이었지.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 인간이었을까?
이 방에 체크인을 하던 순간부터 혹은 불을 끄고 속옷을 벗은 순간부터?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만지고 내가 복수라도 하듯이 그 사람의 성기를 쥐던 시점부터?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가진 행위에 열중하던 그 와중에 나방이 방 안을 날아다니고 무언가가 분출되고 분열하는 것 같았던
8할 정도 여자였던 그 모든 순간으로부터?
[···]
내 옆에 누워 있던 것이 커다란 날개를 떠는 벌레였다면 그것을 안아줄 수 있었을 테고 이 방을 이용했던 사람들은 시청 기록을 남겼다. 이 방을 다시 방문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금연 객실에서 담배를 피웠으며
기침이 났다
악취에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적어도 느끼는 척하는 방법은 확실히 알았고 권리와 사상과 의무가 없는 척하는 법도 알았는데
나는 돌아누웠고 환기가 안 되는 창 밖에서 경적이 울렸고 옆방에서는 대답처럼 신음이 들렸으며 그 소리는 비명에 가까워서 확실히 연기는 아닌 것 같았다. 형광등이 타닥댔고 목에서 침 냄새가 났다. 씻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 「모텔과 리모컨」(『모텔과 나방』) 부분
관계 후 모텔에 혼자 남아 몸과 감정의 기억을 복기하는 모텔 연작 속 여성 화자가 자신의 행위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모습은, 남성의 설득이 행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는 서술(“합의에 이르기까지 그의 설득이 다소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모텔과 변기」)과 맞물리며 이곳을 젠더 폭력의 현장으로 바라보게 했다.5) 그러나 모텔이 임대된 장소라는 점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보면, 이는 젠더 권력의 문제를 넘어 신체의 결정권을 양도하는 구조적 장면으로 확장된다. 다시 말하자면, 끊임없이 자신의 판단과 정체성을 회의하는 화자의 모습은 사회가 인정하는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정상성의 질서에 내맡겨야 했던 존재의 곤혹을 드러낸다. 그의 행위는 결국 사회적 승인과 맞바꾸는 대가로 자기 신체의 결정권을 내어주는 일종의 거래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힘을 얻는 것은 이 연작에서 시인이 계속해서 화자를 “나방”과 겹쳐 놓기 때문이기도 하다. “틈을 비집고”(「모텔과 인간」) 방에 투신하려는 나방처럼 화자는 여타의 인간들과 동일한 행위를 할 수 있는 ‘방’에 머물러 외로움을 해결하려 한다.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가진 행위에 열중”한다면 자신 역시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가 마주하는 것은 “방 안을 날아다니”는 나방과 “무언가 분출되고 분열하는 것 같”은 부서진 자기 자신뿐이다. 모텔 연작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방의 잔해들, 가령 “수면 위를 떠다니고 있”는 “나방의 사체”(「모텔과 변기」)와 “창문을 억지로 닫”아 부스러진 “나방들의 몸통”, “방충망에 끼어 바스락거”리는 그것의 “으스러진 날개”(「모텔과 나방」)는 ‘나방’이란 ‘방’에 투신하려는 ‘나’를 언어로 조합하여 만든 분신으로 보일 정도다.
이 외에도 남자가 떠난 모텔에서 앞선 투숙객이 남긴 “유행하는 드라마”(「모텔과 인간」)의 시청 기록을 화자가 뒤따라 재생하는 장면이나 그가 유일하게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이미 선택지가 정해진 리모컨 버튼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미래가 “자동으로 재생되는” “예고편”처럼 이미 예정된 수순을 따를 것임을 암시한다. 모텔이 이런 “방으로 가득 차 있”(「모텔과 나방」)다는 서술을 통해 유선혜는 수많은 청년 주체들이 이 거대한 임대 질서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욕망에 따라 행위하지 못하고 몸의 결정권을 사회에 양도하고 있음을 서늘하게 환기한다.
그러나 유선혜는 이러한 방을 “세계의 축소판”(「모텔과 냉장고」)으로 제시하며 “우리가 이 방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하얀 방」,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라는 인식에 이른 청년들을 보여 주면서도6) 그들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자기만의 방’을 재발견하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누구도 대신 채우거나 점유할 수 없는 자기 내부의 고유한 구멍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형이상학 시간에 교수님이 물었습니다.
양말에 뚫린 구멍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저 그 부분이 벌어진 양말만이 있나요, 양말의 부재로 생겨나는 어떤 것이 있나요?
그날부터 나는 구멍에 관해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존재가 무엇인지부터 논해야 했지만요.
하나의 구멍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은 이리저리 주무르면 도넛 모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같은 원리에 의해 인간의 몸도 도넛 모양으로 만들 수 있지요. 우리는 입에서 위, 장에서 항문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구멍, 물리적인 구멍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욱여넣으면 토해내는 것이 우리의 순리입니다.
[···]
생생하게 우리를 찾아오는 빈자리. 나는 이것들을 구멍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영혼에도 구멍이 있다고 믿고 있어요.
[···]
누군가는 영혼의 구멍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고,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구멍이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것들을 보세요. 우리에게 빈 곳을 채워 넣으라고 명령하는 구멍의 중력. 비어 있는 것의 질량. 갈구하는 묵직함.
[···]
도넛을 도넛으로 만드는 것. 매끈하게 코팅된 설탕시럽도 고르게 올려진 초콜릿칩도 아닌 그것.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
구멍, 구멍입니다.
[···]
사랑이나 정의, 투쟁 혹은 혁명으로도
틀어막을 수 없는 틈새
없는 것들로 정의되는
여집합으로만 서술할 수 있는
고집스러운 빈자리
그것의 이름을 짓기 위해 필멸의 운명이라거나 실존적 고독, 이런 거창한 단어들을 들먹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구멍
존재의 구멍
구멍의 존재
그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 「구멍의 존재론」(『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부분
‘인간’의 질서에 속하려고 했던 앞선 화자의 노력이 외로움과 같은 영혼의 구멍을 메우고자 한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이 시에서 화자는 구멍이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어떤 힘이 작동하는 자리라는 새로운 인식에 다다른다. “도넛”이 구멍이 있어 ‘도넛’으로 존재하듯 인간 역시 구멍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논리를 통해 그는 구멍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한다. “빈 곳을 채워 넣으라고 명령하는” 중력처럼 작동하는 구멍의 성질로 인해 그 안에 무언가를 계속해서 욱여넣게 되긴 하지만, “빈자리”는 그 자체로 존재인 이상 결코 완전히 메워질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그에게 영혼의 구멍을 갖는 일이란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최소 단위의 공간을 자신의 몸에 확보하는 일이 된다.
메울 수 없는 구멍을 진정한 ‘자기만의 방’으로 삼는 이 방법은 다소 모호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유선혜가 이 구멍을 점점 크게 만드는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 일반적인 잣대로는 엉뚱하게 여겨질 법한 상상들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예컨대 화자가 “사실은 두 발이 변색된 인형이라거나 밤하늘이 흰색 콘크리트 벽에 큰 빔 프로젝터로 쏜 그림자라”는 상상, 죽은 그의 “외할아버지가 어딘가에 살아 있어서 내 소식을 몰래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괄호가 사랑하는 구멍」,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과 같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 방법은 “꾸는 꿈을 입 밖으로 꺼내면 죄다 끝장나버릴 거라며 겁을” 주는 세상에서 “망해버린 꿈들을” “기어이 써버리는”(「반납 예정일」,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일, 말하자면 정상성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다른 이의 행동을 따라 하며 애써 외로움을 채우려 하기보다 유선혜의 화자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그리고 자신의 엉뚱함을 기꺼이 긍정함으로써 비로소 몸을 임대 당한 피로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저당 잡혔던 자신의 미래를 되찾는다.
3. 관리되는 방과 확장되는 지평: 차현준의 경우
유선혜가 임대된 방에 머무르며 자신의 몸 역시 타인에게 빌려주게 된 청년 세대의 무력감을 드러낸다면, 차현준은 외부의 방이 아닌, 신체 내부에 마련해 두고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방을 제시한다.7) 『온몸일으키기』는 자신의 몸에서 그러한 방을 발견한 화자가 그 안에서 식물을 기르고, 다시 그것의 모종을 나누는 과정을 하나의 서사로 전개하는 시집이다. 시집의 첫 시인 「아이솔레이션」에는 이 방이 발견된 과정이 자세히 설명된다.
“댄서 선생님”에게 “아이솔레이션”이라는 춤을 배우던 화자는 몸을 부위별로 분리하여 움직이는 과정에서 가슴과 배 사이에 “오돌토돌” “손으로 만져지는” 부분을 감지한다. 몸의 각 부분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어야 매끄럽게 진행되는 이 춤을 계속 배우기 위해서 화자는, 자신의 느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이 건넨 “초록매실”을 마시며 이 이물감을 서둘러 소화해야 한다. 그러나 초록매실을 넘기는 순간에도 그가 계속해서 의식하는 것은 몸의 그 지점이다(“가슴과 배 사이로 넘김이 좋은 초록매실”). 자신의 몸을 정확하게 통제하는 기술을 습득하려는 시도를 방해하는 이 알 수 없는 지점, 다른 이에게는 이물질과 같지만 그에게는 분명하게 감지되는 이 지점은 그가 사회가 요구하는 매끄러운 움직임의 질서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채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 나갈 토대가 된다.
이제 시집은 그가 “명치보다 더 안쪽”에 방을 마련하여 여러 식물을 들여와 기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셔츠를 입었을 땐 이렇게 하면 된다. 통풍이 잘되는 곳을 찾아간다. 가슴팍에 있는 단추 두 개를 고른다. 윗단추와 아랫단추 사이에, 그러니까 명치보다 더 안쪽으로. 복도까지 닿게 손을 집어넣는다. 이것이 내가 확보해놓은 부지에 찾아가는 방법이다.
[···]
당귀밭에서 빠져나와
당귀 방에서 빠져나와
복도에 늘어선
적근대 방
치커리 방
상추 방
케일 방
겨자 방
호박잎 방······
내가 자처한 방들······
오늘 점심은 쌈밥을 먹으려고 했다. 두부를 으깬 강된장도 올려 먹으려고 했는데······ 나는 도통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얼마 전 집 안 냉장고 구석에서 녹고 얼고 녹다 잿빛으로······ 물컹해진 치커리의 퀴퀴한 냄새. 치커리를 처분했던 일이 떠오른다. 냉장고는 당황하지 않았다. 냉장고 앞에서 나는 당황했다. 지금도 밭 구석에서 뭉쳐지고 물컹해질 당귀들······
이거 봐, 복도에 또 멈춰 섰잖아
셔츠 밖에서 들어온 흰 김이 복도를 감싸고 나를 감싸고 나서야 복도에 멈춰 섰다는 걸 깨달았다. 당귀 방으로 흰 김이 들어가려 할 때 나는 당귀 방이 아닌 복도 밖으로 뛰쳐나간다.
셔츠 단추들 사이로 당귀 진물을 가득 묻히며 빠져나오는 축축한 몸
[···]
아무것도 못 하면 어떡해?
구름이 감싸고 토닥거려준대도······
그러고선 당귀들에게 찾아가 스콜을 흩뿌려놓는다면······
나는 니트릴 장갑을 갈아 끼고 셔츠 단추들 사이를 지나 단숨에 당귀 방을 향해 손을 집어넣는다.
― 「당귀 방」 부분
당귀, 적근대, 치커리, 상추, 케일, 겨자, 호박잎 등 그가 내면의 방에서 키우는 식물이 모두 먹거리라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이는 그의 방이 차후 활용할 수 있는 것을 길러 내는 생산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차현준의 시에서 “이 경험을 써먹어보고 싶단 생각”(「적재접속」)이 들었다거나, 무언가를 “오래 써먹고 싶어요”(「아바나 일화」)라고 말하는 등 ‘써먹는다’는 표현이 무언가를 활용하여 결과물을 낼 때 종종 사용된다는 점까지 염두에 둔다면 이 식물들은 쓸모로 환원될 수 있는 재료이자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사 창작 수업”(「붙여놓기」)을 듣거나 무언가를 “문장으로 받아 적”어 “누구의 입이나 눈에다 전해주고 싶은 생각”(「거기에 무성한 측백나무와 아카시아에 대해」)을 하는 『온몸일으키기』의 화자가 시인과 구분되지 않는 청년 예술인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 식물들은 이후 다른 것들과 조합되어 창작물로 내놓을 수 있는 언어, 영감, 지식, 감각 등의 비유적 형상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만의 특별한 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그 안이 어느새 식물들로 빽빽하게 채워졌다고 해서 곧바로 특별한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한 향내를 풍기는 식물들은 그 자체로 만족감을 주고, 이를 “모두 뜯어 먹는 생각만 하면” 즐겁기도 하지만 그는 곧 그것들이 “싱싱”한지 아니면 “밍밍”한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잠시라도 관리를 소홀히 하면 식물들이 곧 “뭉쳐지고 물컹해”질 것이라는 예감은 방 안의 상태를 강박적으로 점검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못 하면 어떡해”라는 불안 속에서 “당귀 방을 향해 손을 집어넣”는 행위를 반복하던 화자는 결국 “이명”을 얻어 “바닥에 쓰러지듯이 누워 있”(「당나귀」)게 된다.
이명이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소음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는 “스스로 만들어낸 의무”에 스스로가 얽매여 “의무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고 이를 부단히 개발하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을 발견하여(“할 거 되게 많다”, 「구조 조정」) 성실하게 수행하려는 화자의 모습은 ‘자기 관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점검하고 규율하는 청년 세대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이때 차현준의 ‘당나귀’는 유선혜의 ‘나방’과 마찬가지로 당귀 사이에서 탈진한 ‘나’의 모습을 언어로 조합해 만든 형상으로 보이는데, “경쟁력 있는 걸음”을 요구하는 질서에서 이탈한 채 천천히 (“당나귀 보폭으로 걸어간다”) 걸어가게 된 화자의 상태는 이 형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가시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의욕적으로 식물을 기르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 화자는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마냥 누워 “생각하는 근육만 감수분열처럼 늘어”나기를 기다리기보다 “온몸일으키기”(「온몸일으키기」)를 선택한다.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방법을 모색하던 그는, 장갑의 내부를 바깥으로 뒤집어 “속에 묻혀 있던 단면을 정반대로 끄집어내자” 너른 들판이 펼쳐졌던 「적재접속」의 전복적 상상력을 ‘써먹는다’. 방의 반대편으로 나와 들판을 달린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면 “방부터 충분히 길러”(「키트」)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때 그가 선택한 ‘쿠바’는 우리나라와 달리 ‘당나귀’처럼 걷는 이들이 많은 곳이라는 점에서 일견 도피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반대편에 위치한 이 나라가 마치 명치 안으로 손을 집어넣듯 우리나라를 안쪽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8) 이곳은 가장 깊은 내면에 대응하는 전략적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 쿠바는 그의 내부를 전복하기 위해 설정된 또 하나의 방인 셈이다.
쿠바에서 화자는 그간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 놓으며 내면과 외부의 위치를 전복시킨다. 그곳의 택시 기사에게 자신의 “내력들”과 한국에서 겪었던 불안을 고백하며 (“한국이 / 좀 빨라요 // 거기에 가면 / 제가 저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바나 일화」) “지금 여기서 낭비해도” 된다는 기사의 답변을 얻은 그는, 모든 경험을 꼭 써먹지 않아도 된다는 강박에서 잠시 벗어난다. “한국행 항공권을 취소”하고 “적금 계좌 하나를 중도해지”한 그가 “메일과 카톡”이 울리는 핸드폰을 “뒤집어” 놓거나 자신을 “솔직하게 열어 // 젖을 수 있는 내부”를 다 젖게 한 뒤 “버텨왔다면” 안의 것이 “빠져나가도 좋다고 소리” 지르자”(「남쪽 물결」) 비로소 다른 곳을 향해 “첫발을 내딛”(「도착하기」)을 수 있게 되는 장면은 그의 방이 잠시나마 지구의 반대편까지를 포함하는 영토로 확장되는 순간이자, 미래에 대한 여유를 되찾는 순간일 것이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다-체-rium」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인큐베이터에는 반백여 모종 샘플러가 놓여 있다.
이따금 찾아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선을 머물게 할 모종을 찾는다.
[···]
어느 모종 유닛 하나를 불쑥 집더니 그 사람은 졸지에 나에게 이 모종을 키우게 된 경위까지 물었다.
: 나는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참 동안 더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종을 어디서 발견했는지, 혹시 발명한 것인지부터 어떻게 이어 기를 수 있었는지 이어온 경로의 동선을 처음부터 다시 걸어내야 했으니까, 이윽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야무지게 잘 설명해내고 싶기 때문이었지.
사람들은 모종을 가져가도 되는 건가, 가져가기 시작한다.
― 「다-체-rium」 부분
이 작품에서 화자는 자신의 방에서 길러 낸 “모종”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준다. ‘모종’인 이상 그것이 어떻게 자라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화자는 이 가능성을 ‘나만의 것’으로 붙잡아 두며 관리하려 하기보다 그 몫을 이제 다른 이들에게 넘긴다. 이러한 비움을 통해 그는 자기 착취적이라 할 정도의 불안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지게 되는 한편, 세계는 그가 길러 낸 다채로운 가능성을 나누어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이 기른 내면의 모종을 나누는 방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기만의 방을 세계의 지평만큼 넓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9) 자신의 방을 더 이상 혼자 관리해야 할 내면의 생산지로 두지 않고, 가능성을 나누는 방식으로 타인과 접속하는 공간으로 전환하는 이러한 모습은 ‘자기만의 방’을 공유와 접속의 장으로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일 것이다.
4. 빈방의 연대
이상에서 임대된 방의 문제를 ‘구멍의 존재론’으로 맞서는 유선혜의 시와, 강박적으로 관리하던 내면의 방을 세계로 뒤집어 그 작동 방식을 전환하려는 차현준의 시를 살펴보았다. 두 시인이 공통적으로 방을 비워 두는 것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한다는 점은 그들의 시가 지니는 메타적 성격과 나란히 두고 볼 때 이 시집들이 최근 청년 세대에게 깊은 공감을 얻은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시인의 말
나가자
여기서 나가자
방을 내버려두자
이 방이 너만을 위한 방이 되지 않도록
오로지 방을 위한 방이 될 수 있도록
관두자
제발
다 관두자고
― 유선혜, 「오로지 방을 위한 방」(『모텔과 나방』) 부분
모종이 다시 인큐베이터 안에 놓이는 모습까지도
나는 끝내주게 잘 길러내고 싶었고
모종은 다시 누군가의 손에 들리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다시 나와 같이 살게 될 수도 있는 건데
아무렴
― 차현준, 「다-체-rium」 부분
가령, “시인의 말”을 고치는 과정을 다루는 「오로지 방을 위한 방」에서 유선혜의 화자는 “이 책은 완전히 실패작”이라며 시집을 규정하던 문장을 지우고 자신의 시집을 “오로지 방을 위한 방”으로 둔다. 「다-체-rium」에서 차현준의 화자는 “아무렴”이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길러 낸 모종의 미래를 그것을 가지고 가는 이들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차현준이 『온몸일으키기』의 뒤표지에서 이 시집을 “생활체”로 표기하며 “이 생활체를 접하는 생활체의 기분, 상황, 사고방식, 배경지식 등의 조건에 따라 이 생활체는 변모할 수 있”다고 적은 대목과 함께 읽어 보자면, 이는 자신의 시집을 하나의 고정된 의미나 사적 소유물로 한정하지 않겠다는 말로 읽힌다.
이들의 시가 최근 청년 세대에게 공감을 얻는 현상, 아니 어쩌면 이보다 더 나아가 시를 읽는 일이 ‘힙’한 일로 여겨지는 오늘의 분위기는 이러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어느 때보다 ‘자기만의 방’을 갖기 어려우며, 설령 갖는다고 해도 끊임없이 이를 통제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동 세대 시인들이 마련한 ‘시’라는 장소는 청년들이 각자의 불안과 결핍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공유지이자 마음대로 상상해 볼 수 있는 빈방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 오래전 울프가 홀로 창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작가에게 요청했다면, 오늘날의 시인들은 그런 방을 갖기 어려운 현실을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를 시라는, “머릿속의 구멍을 점점 크게 만”(유선혜, 「괄호가 사랑하는 구멍」)드는 세계로, 각자의 방식대로 “모종”(차현준, 「다-체-rium」)을 기를 수 있는 비어 있는 방에 남겨 두는 셈이다. 그 빈방에서 우리는 각자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느슨한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의 구멍을,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아 불안한 가능성을, 이제는 밖으로 꺼내 놓아도 좋지 않겠냐고 묻고 있는 시 안에서 말이다.
1) 정민우, 『자기만의 방: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 이매진, 2011, 194쪽.
2) 이 글에 인용된 유선혜의 시는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 2024)와『모텔과 나방』(현대문학, 2025)에, 차현준의 시는 『온몸일으키기』(문학과지성사, 2025)에 수록된 것이다. 이하 유선혜의 시를 인용할 시 작품명과 시집명만을, 차현준의 경우에는 작품명만을 표기하도록 한다.
3) 조연정, 『시 보다 2025』추천의 말, 문학과지성사, 2025, 134~135쪽.
4) 김보경, 「청년성과 사변 시의 형식-유선혜론」, 『문학과사회 하이픈』2025년 겨울, 23쪽.
5) 최다영 해설, 「사랑에 빠지기엔 아직 일러」, 『모텔과 나방』, 186쪽.
6) 이는 청년들이 임시로 빌린 모텔 방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처럼 자신의 신체 역시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는 기후 위기 이후 더욱 확산된 종말론적 감각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이는데, 그들은 세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예컨대 “발암물질과 인공감미료도 아주 많이 먹을 것”(「원룸에서 추는 춤」)이라고 내뱉는 그들의 말 속에는 생존조차 보장되지 않고 어떤 진화나 미래도 기대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자신을 방치해버리는 자포자기의 심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7) 차현준의 시에 유독 방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미 다음과 같은 평론에서 언급된 바 있다. 최선교 해설, 「Is it tasty?」, 『온몸일으키기』; 송연정, 「기이한 집들이」, 『문학과사회』2025년 여름호; 조대한, 「또 다른 방―차현준론」,『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겨울호. 이러한 논의는 대체로 방의 운동성과 역동성에 주목할 뿐 방을 드나드는 화자의 움직임이 지속될 때 발생하는 피로와 강박의 문제까지는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방의 역동성만이 강조될 경우 차현준의 화자가 왜 이토록 집요하게 ‘온몸일으키기’를 시도하는지, 그리고 그 시도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놓칠 위험이 있다. 이 글은 차현준의 방을, 움직임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청년 세대의 병리적 조건이 형성되는 장소로 읽고자 한다.
8) 채널예스, 「[젊은 작가 특집] 차현준 “글을 종이 위에 맘껏 저지르세요”」, 2025.6.18. https://ch.yes24.com/article/details/81230
9) 그러나 차현준의 화자가 내부의 방을 관리하는 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쿠바로 떠난 여행이 그 방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된 이동이었듯, “인큐베이터”(「다-체-rium」) 안에 모종을 둔 채, 그것이 잘 길러질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만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청년 세대의 문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순간적인 기분 뒤에 다시 돌아오는 불안을 견뎌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인지도, 혹은 병증마저 관리의 대상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 조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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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문장웹진 비평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 박상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사라짐을 위한 유희사라짐을 위한 유희 —황유원론1) 오경진 그는 불안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밤의 해변에서 저기, 꿈(夢·몽)과 환상(幻·환)을 물거품(泡·포)과 그림자(影·영)로 새겨넣으려는 시인이 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떠밀리듯 들려온다. 잠깐 여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 내가 더 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여몽환포영」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신”(文身)처럼 새겨넣은 그것은 “어둔 밤의 해변”의 “젖은 모래 위” 하나의 형상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에는 지워지고 사라질 글쓰기. 꿈이 그렇듯, 허깨비가 그렇듯, 물거품이 그렇듯, 그림자가 그렇듯. 어른거리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으로 피어올랐다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것. 설령 그것이 진짜 문신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몸은 어차피 스러지는 것, 몰락하는 것, 죽는 것. “진짜 죽음”이 오면 그것 역시 꿈처럼 허깨비처럼 물거품처럼 잊힐 것이다. 그러면 시 쓰기는 다 무엇일까. 저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조차도 결국 망각의 무로 돌아갈 것인데, 그 게송으로 시를 지어봤자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은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을 거니는 것과 같고, 시 쓰기는 어차피 파도가 들이쳐 지워 없어질 모래 위에 “여몽환포영” 하고 한 자씩 새겨 넣어보는 일이다. 세계의 무상(無常) 속에 스러질 것,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사는 절대적인 무(無)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불안을 사랑하는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불안을 사랑한다. 불안의 포로인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시를 짓는다. 문학을 한다. “불안은 가능성에 앞선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2) 무(無)에서 시작되어 무(無)로 흩어
- 오경진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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