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여성 + -향’이라는 함정
- 작성일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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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여성 + -향’이라는 함정
이융희
‘남성/여성 + –향’ 분류의 형식과 한계
올해 초 X(구 트위터)에서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한 연구자가 ‘남성향’ 웹소설을 보는 여성 독자를 찾겠다며 연구 설문을 돌렸는데 다수의 유저가 연구자의 대상 텍스트가 ‘남성향’ 웹소설이 아니라 ‘여성향’ 웹소설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현재는 해당 글이 삭제되었으나, 해당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을 통해 어떤 웹소설이 ‘남성향 작품’으로 프레이밍 되었는가 확인해 볼 수 있다.1)
해당 논문에서는 예시 작품으로 <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전지적 독자시점>, <김대리는 아이돌이 싫어>, <성스러운 아이돌>, <화산귀환>,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 <내가 키운 S급들>, <이세계 착각 헌터>, <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 <백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저 그런 인재 아닙니다>,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 등을 제안한다. 리디, 네이버, 카카오페이지 등 대형 플랫폼과 달리 ‘문피아’는 각 소설에 대한 로우데이터를 제공하는데 상술된 소설의 남녀 통계를 살펴보면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은 남성 20.8%, 여성 79.2%,2) <백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3)는 여성 50.5%, 남성 49.5%,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은 여성 61.9% 남성 38.1%4) <전지적 독자 시점>은 여성 41.8%, 남성 58.2%5)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는 여성 51.9%, 남성 48.1%6) 등임을 고려한다면, 해당 작품을 ‘남성향’이라고 규정한 연구자의 이야기가 시장에서 거부된 까닭을 짐작게 한다.
일련의 사태는 시장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학계에 저항 없이 사용될 때 또는 시장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학계에서 다른 의미로 전유해 해석했을 때 발생하는 단절을 강하게 시사한다. ‘남성/여성 + –향’이라는 이분법이 업계에서 넘어와 학계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만큼 지금 여기의 웹소설을 제대로 분석하고 비평하기 위해선 ‘남성/여성 + -향’이란 이분법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구조에 대해서 고민하고 입법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남성향’과 ‘여성향’의 분류는 두 가지 축을 바탕으로 논의되었다. 한 축은 시장에서 널리 통용되는 서사의 내용과 형식 기준의 분류법이고 또 하나는 소비자들의 젠더적 욕망과 정치적 수행 행위로 보는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전자의 경우 좁게는 서사 내부에 존재하는 작은 기호부터, 넓게는 서사를 직조하는 각 시퀀스의 구조와 연출, 전개를 통해 인물이 획득하는 보상의 성향, 전체 작품의 주제 등에 따라 해당 서사의 종합적인 결과물을 남성적 구조와 여성적 구조로 나눈다. 이러한 분류는 통상 작법서를 통해 시장으로 재생산된다. 시장에서 요구되는 ‘좋은 웹소설’을 교육하기 위한 작법서에서는 웹소설 작가들과 독자, 그리고 유통망이 추구하는 ‘남성향/여성향’의 대상 텍스트를 판타지,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무협 등 하위 장르에 선행하는 상위 범주로 간주한다.
이 안에서 로맨스(판타지)라는 ‘여성향’ 장르와 판타지·무협(줄여서 ‘판무’)라는 남성향 장르로 분류되되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여성향’ 장르와 ‘남성향’ 장르의 독자층 및 서사 구조가 대단히 상이하여 작품을 분별할 수 있다는 인식이다. ‘남성향’ 장르의 주류 독자들이 끊임없는 사이다 전개를 요구하기 때문에 ‘남성향’ 장르의 남자 주인공은 끝없이 욕심을 느끼고 지치지 않고 쉽게 만족하지 않는 식으로 그려진다. 반대로 ‘여성향’ 장르는 주류 독자들이 주인공보다는 주변 인물에 이입하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은 괴로워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독자들이 즐거워하는 장면이 제시된다는 식이다.7) 여기에서 나아가 주로 ‘여성향’ 분류에서는 두 명 이상의 주인공이 관계성을 중심으로 서사를 이어 가고, 다수의 캐릭터가 메인 캐릭터로 제시되는 만큼 서사의 핵심은 한 개인의 성취나 성공보다는 캐릭터 간에 주고받는 감정 교류와 그로 인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관계성이 된다.
후자는 ‘남성향-여성향’의 소비 형태가 독자들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는 구분이라는 점에 천착하여 한국 장르문학 내부의 판타지, 무협,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장르가 가진 서사적 배타성을 강화하거나 해체하는 방식의 정치적 수행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주로 학계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사용된다.
웹소설이 만들어진 초기 한혜원, 정은혜는 아직 ‘여성향’이라는 말이 학계에 들어와 정착되기 전 ‘여성 소설’이라는 범주를 제안한다.8) 이때의 소설은 ‘웹소설’이라는 지금의 콘텐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0세 이상의 여성 회원에게만 자격을 주는 웹 공간(매유동, 이레동, 친니동, 엔젤동, 템프동 등)에서 연재된 소설을 이야기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때 ‘여성’이라는 형식은 장르적 규범에 후행한다는 점이다. 창작자는 서사 텍스트를 ‘동양 판타지’, ‘현대 일상’, ‘현대 느와르’, ‘현대 판타지’, ‘판타지’, ‘고전 판타지’ 등의 소재로 창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웹 공간 중에서도 여성들만의 공간에 제한적으로 유통된다. 이러한 소설은 ‘여성 커뮤니티 내 구성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매개체’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웹 공간의 익명성 또는 대안적 정체성의 생성 가능성을 고려할 때 사실상 소수의 생물학적 남성도 독자로 둘 수 있음’을 가정하지만, 그들 역시 이러한 커뮤니티의 성격상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야만 작품을 소비할 수 있으니 결국 창작 및 소비의 주체가 철저히 젠더 정체성을 토대로 ‘여성성’에 입각해 있다고 기술한다,
김화연은 여성향 서브컬처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일견 주류 문화의 관습들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는 서브컬처조차 ‘남성적인 것이 곧 보편적인 것’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재, 여성들의 콘텐츠에서 ‘여성향’이라는 수식어가 약 2000년대부터 통용되고 있다”9)고 주장한다. 한유희의 관점은 김화연의 관점을 부분적으로 공통되는데 ‘여성향’은 여성의 욕구와 욕망을 주목하고 있지만 ‘여성서사의 반대 서사물’로 제한된다. 연구자에 따르면 “여성서사를 정의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여성 인물이 서사 중심에 위치하며, 여성의 욕망을 다루고 있으며, 여성들이 제작에 참여했는가”의 기준인데, ‘여성향’의 경우 서사의 중심에 ‘로맨스’가 있는 만큼 반여성 중심 서사로 평가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10)
다시 앞서 ‘남성향 판타지 소설’이라는 사태를 이야기해 보자. 시장의 구성에 따르자면 남자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는 ‘판타지 소설’은 ‘남성향’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러한 욕망이 다수의 여성 소비자 욕망을 충족시키며 관계 지향적인 서사로 나아간다면 해당 작품을 더 이상 ‘남성향’으로 볼 수는 없으리라. 또, ‘여성향’을 여성 중심 창작자들의 정치적 선언으로 보기엔 앞서 언급된 ‘여성향(또는 중성향)’ 작품의 작가 성별을 독자가 특정하기 어려울뿐더러, 대상 텍스트의 남성 작가가 스스로를 남성/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무성적 창작일 수도 있는 만큼, 기존 담론의 ‘여성향’이라는 방식으로도 포획할 수 없을 것이다.
신무협 소설의 ‘남성향/여성향’ 혼종적 서사에 대해 논한 송가윤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남성향 + 독자’와 ‘여성향 + 독자’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수용자들의 주 소비 독자층에 맞춰 두 개념을 정의하기도 하였으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듯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남성/여성 + -향’ 명칭 그 자체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규범이 존재하는 것처럼 전제하고 다시 독자에게 명령하듯 재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향’이라는 명칭은 내부의 요소를 이야기하는 방식일 수 있겠으나, 나아가 이러한 소비 자체가 특정한 수신자에게 이루어진다고 규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웹소설 시장에서 ‘남성향’과 ‘여성향’은 젠더에 따른 취향을 가리키기에 앞서 독자들 스스로가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공동체와 더불어 그 안티테제로서 존재하는 집단을 정체화하기 위한 담론으로 수행된다”는 강남규의 분석처럼11) ‘남성/여성 + -향’의 이분법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남성-여성이라는 상대항을 바탕으로 역사적․문화적으로 구성된 기호 체계이다. 이러한 방식을 ‘남성/여성 + -향 + 독자’라는 명칭으로 우회하려고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이라는 기표가 사회적 욕망, 성취, 사랑과 관계, 감정과 연결되는 현상을 자연스러운 본질로 규정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향’과 관련된 웹소설 담론은 다소 공허하게 회전한다. ‘남성/여성 + -향’이라는 장르 문화적 소비 행위이자 서사의 분류체계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이러한 형식이 텍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장르소(genremes)를 어떤 방식으로 탈취하는지 그 구조 자체에 주목한 뒤, 그 이후 ‘남성/여성 + -향’의 논의를 이어 가야 할 듯하다. 마침 이러한 형식을 설명한 학자와 이론이 있다. 롤랑 바르트(Rolland Barthes)의 ‘신화론’이다.
‘남성/여성 + -향’이라는 장르적 신화
롤랑 바르트는 오늘날의 신화를 “하나의 파롤이다”라고 선언한다. 그에게 신화란 “하나의 의사소통 체계, 곧 하나의 메시지”이며 그러므로 신화는 “의미작용의 한 양식이며 하나의 형식”이다. 그는 소쉬르의 기표, 기의, 그리고 기호라는 3차원의 도식을 가져온 뒤 신화라는 “제 2의 기호학 체계를 정리한다. 소쉬르의 1차 체계에서 기호(즉, 개념과 이미지의 결합체)는 2차 체계에서는 단순한 기표가 된다. 신화는 이러한 기호를 탈취해서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는 메타 언어활동(met-langage)”로 작동한다. 신화는 하나의 굴절(inflection)이며 의미를 형식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화는 늘 언어활동을 도둑질하는 것”이다.12) 신화는 이차적인 기호학적 체계이며, 신화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 소재들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순수한 기능으로 환원된다. 신화는 신화화한 소재들 안에서 똑같은 소재만을 발견한다. 이 소재들의 통일성은 모든 소재가 언어의 단일한 위상으로 모두 환원된다는 데에 있는데, 신화는 자신이 관련된 소재가 문학이건 회화건 간에 그 소재에서 단지 하나의 기호만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신화는 오직 일차적인 기호학적 연쇄의 최종적인 항과 관련될 뿐이다.13)
바르트는 현대의 신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예시를 가져온다. 하나는 학생용 라틴어 문법책의 문장 ‘guia ego nominor leo’이다. 이 문장은 술어의 일치에 관한 규칙을 예시하는 하나의 문법적인 실례일 뿐, 어떠한 언어적 의미도 의미화하지 않는다. 오로지 ‘라틴어 문법’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인 구조 속에 탈취될 뿐이다.14) 또 하나의 예시는 바르트가 이발소에서 본 ‘파리 마치’ 잡지의 표지에서 본 프랑스 군복을 입은 흑인 청년이다. 그는 눈을 약간 치켜뜬 채 주름진 프랑스 삼색 국기를 주시하면서 군대식으로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바르트는 이 표지에서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며, 프랑스의 모든 자손은 인종 차별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에서 평등하게 군에 복무한다’라는 의미를 읽어 낸다. 또한 이 표지는 ‘제국주의를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억압적인 지배자라고 부르는 어떤 것에 관해 이 흑인 청년이 보여준 열광적인 충성보다 더 나은 대답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5)
바르트는 이러한 두 예시를 통해 기호학적 체계를 정리한다. ‘흑인 병사가 프랑스 군대식 경례를 한다’에 의해 의미 형성된 시니피앙과 프랑스적 특성과 군국주의의 의도적인 혼합으로 만들어진 시니피에가 있다. 그리고 최종에는 시니피앙을 통해 나타나는 시니피에의 현존이 있다. 사자의 명명법이나 흑인 청년의 경례는 그것 나름의 충분한 근거로 조화를 이루며 그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언어적 기호들의 전체로서 ‘신화’가 형성된 것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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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니피앙 |
2. 시니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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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호 I. 시니피앙 |
II. 시니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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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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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가 제시한 신화의 구조는 위의 그림과 같다. 1, 2, 3은 언어적인 체계의 랑그(혹은 이것에 동화된 재현 양식들)로 대상언어(langage-objet)이다. 그리고 그 아래 존재하는 I, II, III은 체계 자체가 첫 번째 체계에 관하여 말하는 이차 언어이며 메타언어(meta-langage)인 셈이다.17) 이러한 구조를 웹소설로 놓고 본다면, 대중 소설이자 장르문학, 그리고 웹소설이라는 서사 구조적 특질은 모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기호적 산물이 될 것이고, 이러한 양식이 최종적으로 독자들에게 해독될 때 개입하는 II가 바로 ‘남성/여성 + -향’이라는 신화 체계가 될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신화 체계의 문제로 의미가 형식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우발성(contingence)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을 짚는다. 의미는 곧 텅 빈 것이 되면서 메말라 버리고 이야기는 증발하며 오직 문자만 남는다. 형식은 의미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렇기에 바르트는 신화의 형식이 결코 상징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경례하는 흑인 병사는 프랑스 제국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흑인 병사는 상징이 되기에는 과다한 현존을 지닌다. 그것은 풍부하고 생생하며 자발적이고 순진하고 이의 없이 명백한 이미지를 자처한다.19)
‘남성/여성 + -향’이란 명칭은 ‘팬덤’의 집단적이고 가상적인 신체를 기호 삼아 텍스트 내부 장르 규범을 해체하는 해석 체계인 셈이다. 이때의 ‘남성/여성’은 텍스트 안에서 이미 풍부하게 구현된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킨다. 바르트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어떤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왜곡시키는 것’20)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자와 흑인 병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상실하고 단순한 몸짓으로 변형된다. 라틴어 문법의 실례가 왜곡한 것은 사자의 명명법이라는 사건 자체이고 프랑스 제국주의가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일차 언어, 다시 말해서 제복 입은 흑인 병사의 경례에 관한 현상적인 담론이다.
이러한 신화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로맨스 소설이나 로맨스 판타지 소설 등 여성 창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텍스트를 지금의 ‘여성향’이라는 명칭으로 묶어 내는 순간 서사 안에서 존재하던 풍부한 이미지들을 왜곡하고 삭제하며 그 위로 ‘여성’이라는 응고된 개념을 덧씌운다. ‘여성향’이라는 명칭이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장르를 향할 때 신화는 ‘여성’이라는 본질 자체가 그 서사 안에서 존재한다고 명령하고 설득하고 권유한다. 개념을 개인적인 이야기의 신호처럼 배열하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만들며 공감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더욱 명령적으로 되기 위해 개념을 다소 빈곤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해당 텍스트가 ‘여성향’으로 완성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명령적인 특성을 지닌 신화적 빠롤은 응고된 빠롤이며, 그것이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 표백되며 순진한 것이 된다.21) 결국 ‘여성향 웹소설’의 명칭은 특정 장르군의 소비 양태를 ‘여성’적으로만 남겨 놓고 나머지를 모두 소거하는 거대한 명령인 셈이다.
이는 ‘남성향’으로 여겨졌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성향 판타지’라는 명칭은 웹소설의 판타지, 무협이라는 장르가 구축되었던 역사적 맥락을 표백시킨 뒤 그것을 ‘여성’이라는 신화적 개념 안으로 탈취해 온다. 이것을 남성-이성애 장르에 대한 여성 팬덤의 수행적 실천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22) 판타지를 ‘여성’적으로 소비하라는 강력한 명령으로, 기존의 장르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다층적 해석 범위를 제거한 채 오로지 욕망과 구조를 추구하는 웹소설 시장을 ‘남성’이라고 명명하며 웹소설을 보다 납작하게 볼드 처리하는 것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출된 ‘여성향’ 또는 ‘여성 서사’로서의 분석은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젠더적 편견만을 확인하는 동어반복의 오류만 발생한다. 이야기는 변질되고, 텍스트는 오로지 젠더적 신화의 성취나 위력을 증언하기 위한 빈 껍데기로 전락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남성/여성 + -향’의 분류가 상업 시장에서 만들어져 유통되는 기호란 점이다. 웹소설에서 상업 시장은 단순히 소비자들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큰, 제국적인 맥락에서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과 취향, 형식 등을 장악하려는 제국적 플랫폼의 논리가 이 아래에 잠재해 있다. 이러한 용어를 가져와서 운동적으로 해석한 기존의 연구가 과연 웹소설이라는 텍스트의 입법이나 의미에 필요한 방식인지 사유와 반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남성/여성 + -향’이라는 명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명칭을 벗어나야 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 명칭을 수용하되, ‘여성/남성 + -향’이라는 명칭의 의미를 정의하여 전유할 것인가. 이러한 개념을 알기 위해선 웹소설이라는 텍스트가 유통되는 장의 성격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신화 개념은 초기 서브컬처 시장에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플랫폼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기계적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남성/여성 + -향’ 신화 너머
플랫폼은 ‘남성/여성 + -향’ 용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알고리즘 단위에서 ‘남성향’ 작품과 ‘여성향’을 분별하고 상업 서비스를 설계하는 정책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호로 독자의 정보를 기계적으로 처리하려는 플랫폼의 특성을 보여준다.
‘플랫폼은 자원, 노동, 생산, 유통, 소비가 함께 모이도록 다리를 놓는 거간꾼의 장터 같은 곳’으로 ‘산업 시대로 보자면 개별 플랫폼은 공장으로 비유할 수 있고, 플랫폼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데이터는 플랫폼을 가동시키는 가치 생산공정의 원재료이자 현실의 모든 개별적 차이를 표준화하고 시각화해 정밀 해석과 예측이 가능한 상태로 유지해 주는 공통의 최소 분석 단위’이다. 가분체 데이터 처리 공정에 투입되자마자 이전의 재기 발랄하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특징을 잃고 표준 데이터가 되거나, 혹은 개별화된 주체성을 탈각한 채 자본가치를 생산하는 원재료이자 생산의 효율성을 담보하는 분석 자원이 된다.23) 이런 플랫폼 자본주의 속에서 ‘남성/여성 + -향’은 일종의 소프트웨어화(softwarization)된 알고리즘 체계나 다름 아니다. ‘남성/여성 + -향’은 ‘우리의 흔한 개별 심리적 판단이나 직관에서 보편적 결정 기제’로 자리하며 개인의 감각과 문해력으로 선택되어야 할 작품 선택 및 가치판단의 기준을 좀먹고 자동화시킬 우려가 있다.24)
웹소설 플랫폼은 독자들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특정한 행위를 반복하게 만들며, 웹소설 독자가 대문자 ‘웹소설’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개별 작품에 대한 담소만을 나누도록 제한하는 독재적 제국이다. 카카오페이지와 네이버는 ‘댓글’을 통해 작가와 작품의 거리를 가깝게 하지만 ‘자유게시판’ 등의 커뮤니티 공간을 운영하지 않음으로써 웹소설과 커뮤니티에 대한 담론이 발생하는 걸 밀어낸다. 독자는 총체성에 대한 논의를 공간 바깥에서 단발적으로 발화할 뿐이다. 반면 오로지 ‘작품만을 이야기하게끔’ 만든 납작한 독자의 발화는 그 즉시 ‘작가’의 작품만큼 지위를 부여받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 편의 소설을 보고 다음 편으로 넘어갈 때 강제로 노출되는 ‘베스트 댓글’의 UI 구조이다. 댓글은 독자가 소설을 감상한 즉발적 감상이다. 이렇게 남긴 댓글은 마치 작가의 소설처럼 소설을 보는 독자 전원에게 목격되고 좋아요/싫어요 라는 감상으로 평가받는다. 감상은 소설 내부로 편입되고, 소설은 감상으로 축약되는 상호작용의 구조 속에서 창작자와 수용자의 지위는 구별되지 않으며, 독자의 감정적인 발화는 플랫폼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쉽게 착취된다.
플랫폼 시장 체계, 상업적 구조 속에서 ‘남성/여성 + -향’이란 소비 양태를 쉽사리 팬덤의 정치적 수행으로 여길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플랫폼과 시장, 텍스트라는 조건을 그대로 남겨 놓는다면 이러한 이분법은 작품의 내용을 끝없이 ‘남성/여성’이라는 욕망적 주체에 맞춰서 재편하는 자본주의의 호명과 포섭에 가깝다. 우리가 ‘남성/여성 + -향’이라는 이름에 쉽사리 팬덤이나 젠더를 완벽히 정착시키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자본의 절댓값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웹소설 연구나 비평에서 이러한 신화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세 가지 정도의 방법을 통해 신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또는 원론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남성/여성 + -향’이라는 용어를 지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남성/여성 + -향’이라는 명칭이 이 사회에서 만들어져 유통되었던 소비적 맥락을 지워 낸다. 신화에 대한 지적과 별개로 ‘남성/여성 + -향’이라는 소비가 시장에서 실제 범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 이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둔 채 아카데미 내부에서 단절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김화연의 주장처럼 초기 ‘여성향’의 명칭은 서브컬처 내에서도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문화 계층의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한 부족적/젠더적 팬덤 집단의 저항에서 연유하였다. 이러한 논리를 가져온다면 장르문학 시장의 독자들은 노골적인 욕망을 터부시하였던 문예장에서 벗어나고자 ‘남성향/여성향’이라는 구분 속에 자신의 욕망을 기호화하여 그들의 욕망을 인간 본연의 신체적인 욕망으로 보편화함으로써 안전하게 욕망을 투영할 수 있는 안식처로서의 방어기제적 팬덤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학계의 웹소설 연구가 인식론적인 연구로부터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한 존재론적 연구로 넘어가는 추세에 주류 문학에서 소외된 하위문학의 욕망을 호명하고 의미화하는 인정투쟁적 과정에서 시장의 거친 이분법을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25)
두 번째는 ‘남성/여성 + -향’을 포괄하는 다른 형태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화를 벗어나기 위해 신화를 탈취하는 인위적 신화를 생산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신화는 우리가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 그 자체까지도 먹이로 삼는다. 그러니 신화에 대항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화를 신화화하여 인위적인 신화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화를 재구성한 이 신화는 결국 진정한 신화학으로 나아간다. 신화가 언어를 강탈하는 것이 분명한 이상 우리는 신화를 강탈해야 한다. 신화를 강탈하기 위해선 신화를 가지고 또 다른 이차적 체계를 구성해야 한다. 즉 우리는 신화를 두 번째 신화를 위한 출발점으로 사용하며 그 신화의 의미작용을 두 번째 신화의 첫 번째 항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26)
다만 한 개인의 연구자가 이러한 의미를 임의로 만들어 낸다 한들 그것이 다시 시장으로 환원되기란 어려울뿐더러 글 서두에서 이야기한 해프닝처럼 다시금 함정에 빠질 위험이 크다. 연구자는 이러한 한계를 직시하고 신화의 작동 방식을 인지한 상태에서 거리를 둔 채 명칭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여 연구를 이어 가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 ‘남성/여성 + -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되, 그것이 텍스트를 기술하는 팬덤들의 정치적 수행으로 여긴다거나, 또는 텍스트 내부에서 작동하는 중립적 요소를 표현하는 단어에 그치지 않고 한국 서브컬처 소비의 역사에서 파생된 부산물이자 플랫폼이 웹소설을 포섭하기 위한 자본적 호명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연구 내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남성향 판타지’나 ‘여성향 로맨스’는 분석의 출발점이 아니라 분석의 대상이며, 궁극적으로는 ‘남성향’과 ‘여성향’이라는 용어를 벗겨 내기 위한 여정에 불과하다. 서두에서 언급한 해프닝이 문제가 되었던 것도 연구자가 시장의 용어에 거리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연구자가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특정 텍스트를 메타적이고 중립적으로 규정하였다면 그 이후 ‘여성 독자’를 접붙이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 번째는 정말로 신화를 벗어던진 채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그러니까 텍스트 본연의 해석으로 천착하는 것이다. 특정한 웹소설 장르나 범주에 대한 분석은 웹소설이라는 시장 전체를 단번에 포착하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단일한 연구자가 수십만 종의 웹소설을 분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그러니 상업적 큐레이션을 가져와 연구 텍스트를 선정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작업은 좋은 웹소설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누적하는 것이다. ‘남성/여성 + -향’이라는 신화가 강하게 작동하는 건, 1차 구조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높은 조회수를 받고 이슈가 된 작품들의 개별 비평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만 정작 웹소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보편적 작품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누적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각종 프로모션을 차지하는 웹소설들에 대한 지속적 비평의 생태가 있는가? 플랫폼에서 소위 ‘알 박기’를 하고 있는 웹소설 작품들이 왜 대중 욕망에 부응하여 장기간 살아남는지에 대한 분석이 있는가? 이러한 욕망을 오로지 ‘상업적’이라고 괄호 친 채 그다음을 논의하려는 태도는 연구의 기반 없이 과잉된 의미를 덧붙이려는 강박적 해석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남성/여성 + -향’이라는 거시적 논의보다는 개별 작품에 대한 미시적이고도 가속된 논의가 필요하다. 또는 개별 작품을 별도의 논리로 재정 웹소설들의 확장 속도를 따라가는 연구자와 비평가들의 포착 행위 없이 누적되는 집단적 논의는 개별 텍스트와 팬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신화 논리를 공고하게 할 뿐일 테니까.
1) 이재희, 「욕망과 규범의 교차점: 노맨스 남성향 판타지 웹소설 여성 독자의 CP적 감상 문화에 관한 질적 연구」, 『미디어, 젠더 & 문화』 40(3),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25, pp. 247~248.
2) 문피아 <서브 남주가 파업하면 생기는 일> 구매자 통계 (https://novel.munpia.com/207407, 2026.3.7. 접속 확인),
3) 문피아 <백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구매자 통계 (https://novel.munpia.com/113612, 2026.3.7. 접속 확인)
4) 문피아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 구매자 통계 (https://novel.munpia.com/171360, 2026.3.7. 접속 확인)
5) 문피아 <전지적 독자 시점> 구매자 통계 (https://novel.munpia.com/104753, 2026.3.7. 접속 확인)
6) 문피아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구매자 통계 (https://novel.munpia.com/269793, 2026.3.7. 접속 확인)
7) 송가윤, 『신무협 웹소설의 남성향/여성향 혼종적 서사 구조에 대한 독자 반응 경합 연구: 신무협 웹소설 <화산귀환>과 여성 인물 ‘당소소’를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3, pp. 3~6. 연구자는 이러한 개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비교적 빠른 시기에 출간되었던 웹소설 작법서 『밀리언 뷰 웹소설 비밀 코드』(블랙피쉬, 2021), 『나도 웹소설 한 번 써볼까?: 예비 작가를 위한 성공 가이드 24』(교보문고, 2021), 『100만 클릭을 부르는 웹소설의 법칙』(더 퀘스트, 2022), 『웹소설 작가 서바이벌 가이드』(이마, 2017), 『억대 연봉 부르는 웹소설 작가수업: 북마녀의 베스트 작가 실전 트레이닝』(허들링북스, 2021) 등을 넓게 인용하였다.
8) 한혜원, 정은혜, 「한국 웹 기반 여성소설에 나타난 서사적 특성 연구」, 『한국문예창작』 34, 2015, pp. 84~94.
9) 김화연, 「은둔(隱遁)의 전복성: 여성향 서브컬쳐의 회화적 적용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p. 41.
10) 한유희, 「웹소설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상호교차성 연구 – 여성서사의 (불)가능성」, 『대중서사연구』 71, pp. 530~531.
11) 강남규, 「웹소설 『화산귀환』 팬덤의 젠더 정치와 텍스트 수행」, 『여성문학연구』 66, 2025, pp. 409~410.
12) Roland Barthes,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연구소 역, 『현대의 신화』, 동문선, 1997, pp. 263~339 참조.
13) Roland Barthes, 정현 옮김, 『신화론』, 현대미학사, 1995, p.25.
14) 앞의 책, pp. 26~27.
15) 앞의 책, pp. 27~28.
16) 앞의 책, pp. 28~30.
17) 위의 책, p. 26.
18) 앞의 책, p. 30.
19) 앞의 책, p. 31.
20) 앞의 책, p. 36.
21) 위의 책. pp. 30~32.
22) 강남규, 위의 글,
23) 이광석, 「자본주의 종착역으로서 ‘플랫폼 자본주의’에 관한 비판적 소묘」, 『문화과학』 92, 문화과학사, 2017, p. 25.
24) 위의 글, pp. 33~34.
25) 웹소설 연구자들의 동향과 정체성, 그리고 웹소설에 대한 증언의 과정은 졸저, 「국내 웹소설 연구 현황에 대한 비판적 점검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국내 학술 연구논문을 중심으로」, 『비교한국학』 33(1), 국제비교한국학회, 2025. 참조.
26) Roland Barthes(1995), 위의 책,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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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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