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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에 대처하는 화자들

  • 작성일 2026-07-01

  불운에 대처하는 화자들


배민정


  한때 유행했던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는 말은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발생한 ‘불운한 사건들’을 설명하는 가장 흔한 키워드였다. 마음에 드는 이성은 꼭 짝이 있고, 오랜만에 찾은 목욕탕은 정기 휴일이라는 식의 노랫말1)처럼 불운은 개인의 일상 속 ‘재수 없는 우연’에서부터, 갑작스레 발생하는 사회적 재난, 전염병, 범죄까지 아우른다. 이런 예기치 못한 불운을 맞닥뜨렸을 때, 개인이나 집단은 늘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왔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원인을 규정함으로써 고통을 위로받고, 같은 불행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는 이러한 사건들을 문제화하고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 특정 장치들을 동원한다. 가령 불운의 원인으로 초자연적 힘을 내세워 단숨에 공동체의 균열을 봉합하는 것이 ‘주술’이라면, ‘신정론(神正論)’은 사건의 원인을 사회 구조와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해 집단의 성찰과 개혁을 도모한다. 한편, ‘보험’은 사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피해 손익 측정과 보상 계약을 통해 신속한 사후 처리를 꾀한다.2) 이처럼 정치는 예상치 못한 불운을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다양한 통치 기술을 활용한다. 서로 다른 해법이 경합하는 정치의 장에서 시스템이 붕괴될지 모른다는 대중의 공포는 통제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또한 제도적 일상 안으로 안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인이 겪는 상실감과 두려움은 어떤 제도적 규범이나 보상금으로도 온전히 메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가 불운한 사건을 공적으로 의미화하여 체제의 정상화를 선언할 때, 문학은 그 수면 아래 방치된 개인의 실존적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정치의 공백과 마주한다. 이 공백 안에서, 크고 작은 불운에 빠진 시적 화자들은 그 불행을 계기 삼아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 구조를 감지하고, 새로운 주체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즉 화자들에게 있어 불운은 역설적으로 체제에 길들여진 존재들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주체화의 과정인 셈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불운의 대처법을 통해 제도화될 수 없는 고통이 시적 언어로 복원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


  한 남자가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들어선다.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남자는 그동안 자신이 남들보다 적은 이발비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왜 자신만 만 원을 받느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숱이 없어서 금방 한다고.”(민구, 「거울 속의 신」,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아침달, 2021) 개인의 의지나 노력 바깥에서 마주하는 원치 않는 상황을 ‘불운’이라 한다면, 이 시의 화자는 불운한 사람이 맞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호감 가는 외모 조건 중에 적은 머리숱은 치명적인 결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외양을 가꿔주는 미용사를 “거울 속의 신”이라 부른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 시의 진정한 “거울 속의 신”은 화자에 더욱 가까운 듯하다. 그의 적은 머리카락은 남들보다 싼값에 관리가 가능할 뿐 아니라, 새삼 주인 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을 발견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게다가 젖어도 금방 말릴 수 있다는 장점은 미용사들의 수고로움까지 덜어주는 ‘착한’ 약점이 아닐 수 없다. 머리숱이 적게 태어난 것을 감사하기라도 해야 할지, 민구의 화자는 마냥 웃지 못할 하루를 보내며 미용실을 나선다.

  이 시에서 “거울 속의 신”이라는 반전의 감각은 민구 시의 화자들이 공통으로 내보이는 불운의 대처법과도 연관된다. 사실상 민구의 시에서 불운은 일반적 경험이나 상태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상황이기보다, 태어나면서 이미 삶의 승패가 갈리는 가혹한 현실 구조의 문제에 가깝다. 여기서 전지전능한 ‘신’은 될 수 없더라도, “거울 속의 신”쯤은 될 수 있지 않겠냐는 능청스러움은 민구의 시가 지닌 특유한 매력이기도 하다. 시인은 제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외적 문제를 자기 안으로 끌고 들어와, 수용 가능한 형태로 전환시켜 사고하는 데 능숙하다. 가령 자신과 지인들의 죽음에 한껏 혼란스러워하던 화자가 갑자기 “잠에서 깬 기념으로/ 모닝커피를 마셨다”(「굿모닝」, 『세모 네모 청설모』, 현대문학, 2023)라며 상쾌한 마무리를 선보인다거나, “지구는 평평하다”는 뭇사람의 맹목적인 믿음을 의심하던 화자가 “하지만 엄마의 병이 다 나아서/ 검은 머리가 난다면 // 그때는 평평지구”(「평평지구」, 『세모 네모 청설모』)라며 자기 의심을 얄궂게 처리해 버리는 것은 그의 시가 지닌 탁월한 재치다. 

  이 같은 재치 있는 방식은 자기 자신을 소재 삼는 시편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거울 속의 신」이 선천적인 외모 조건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는 거기에 있겠다고 했다」는 자신의 본명 때문에 겪게 된 불운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인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조건a들로 인해 불행을 느끼지만, 이를 색다른 시선으로 그려냄으로써 불행에 빠진 스스로를 기분 좋게 구출시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속셈 학원에 등록했다. 원장 선생님이 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민구요. 그럼 성은? 민이요. 선생님은 또래 아이들이 있는 강의실로 나를 데려갔다. 그러고는 말했다. 자, 모두 주목. 오늘 우리 학원에 새로 들어온 민민구 학생을 소개할게. 


(...)


영구, 맹구, 망구, 탁구. 사람들은 나를 별명으로 불렀다. 야구, 마구, 빡구, 황구, 한 번 쓰고 버리는 별명도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네 동생 이름이 뭐야? 민팔. 정말? 경미. 서울 경 자에 아름다울 미라는 뜻이야. 그럼 민구는 무슨 뜻인데? 일의 자리 중 가장 높은 숫자. 나는 그 이야기를 SF 소설을 쓰는 조셉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를 미스터 나인이라고 불렀다. 


올해 백범일지 독후감 장원은 우리 반에서 나왔다. 나는 그 상을 한 번 받아야 할 운명 같아서 기쁘지 않았다. 문학 선생님은 내 이름을 어디로든 굴러가는 바퀴라고 근사하게 풀이해주셨지만 더 기억에 남는 건 한문 선생님의 수업이다. 여흥 민씨는 드문 성이지. 여흥은 여주의 옛 지명인데 고려 중엽에 들어온 사신이 여흥에 정착해서 생긴 것으로 옥편에서 찾아보면 민망할 민이라는 뜻. 너는 아홉 번 민망할 거야. 


(...)


만약 신 씨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게 맛을 알았을까? 오래전 어머니에게 개명을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새로 쓸 이름의 후보들을 수첩에 적으며 민구와 이별할 준비를 마쳤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똑똑해 보이는 민지석 씨가 기다려도, 단단해 보이는 민준기 씨가 여러 번 시계를 쳐다봐도 그는 오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 있겠다고 했다. 해안가의 갯강구가 다 사라질 때까지. 하얀 마음 백구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

「그는 거기에 있겠다고 했다」(「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부분 


  이름은 개인을 사회 질서 안으로 포획하는 규범적 장치다. 하지만 이 시에서 이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하나의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삶 전반을 지배하는 선천적 운명처럼 다뤄진다. 시인이자 화자의 이름인 “민구”는 자라는 내내 그를 민망한 상황에 빠뜨리곤 한다. 이름은 “민구”고, 성은 “민”이라 했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을 “민민구”로 소개하는 선생님, “구” 자 붙은 별명들을 죄다 끌어와 자신을 놀려대는 친구들은 삶의 중요한 기회에서 미끄러지는 그의 모습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웃지 못할 촌극을 빚어낸다. 

  화자의 성장 과정 속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이 시는 어느 순간, 이름의 의미에 집착하는 화자를 비추기 시작한다. 처음 이름을 지을 때 “민구”는 “일의 자리 중 가장 높은 숫자”라는 거창한 뜻이었지만, 초라한 현실 앞에 그 뜻은 “SF 소설”이나 다름없는 허상이 되고 만다. 이후 문학 선생이 “어디로든 굴러가는 바퀴”로 멋지게 해석해주었지만, 화자는 정작 한문 선생이 족보를 따져가며 미화 없이 해석한 “아홉 번 민망할 거”라는 의미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초반에는 자기 한계를 목도한 화자가 자기 이름에 대한 의미 부여를 위안 삼았다면, 이제 그는 그 한계를 자기 안으로 기꺼이 수용하길 택한 것이다. “민구”는 “민구”라는 이름에 더는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주어진 운명에 휘둘리는 존재이기를 거부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 “민구”는 “만약 신 씨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게 맛을 알았을까?”라며 스스로를 유머화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유머는 고지식한 세계와의 어긋남을 겁내지 않는 태도로서, 이미 한계 지워진 삶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즉 민구 시의 웃음은 보통 기대하는 ‘정상적’인 상황에 못 미치는 부조화를 통해 빚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결여된 자기 삶을 포용하는 주체화의 순간과 연결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아홉 번”, 혹은 그 이상으로 “민구”의 삶은 민망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웃음은 결함투성이인 나날들을 평범한 일상으로 안착시키는 구원이 될 수 있다. 


*

 

  불운한 상황과 그에 따른 수치심을 재치로 승화시킨 민구의 시는 긍정성이라는 상투적인 해법을 현실의 차원으로 끌어내 구체화한다. 사회적 결함으로 비치던 개인의 특성이 소위 ‘정상성’의 질서를 파열시키는 웃음을 통해 평범한 일상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이때 유머는 패배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한 삶 전반에 때 묻지 않은 신선함을 환기한다. 그러나 모든 불운이 이처럼 순박한 웃음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새삼 김승일의 시를 들여다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어깨랑 팔을 때리고 논다. 때리는 게 재밌어서 웃는 친구와 너무 아파 헛웃음이 터지는 친구”(「웃는 이유」, 『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가 등장하는 『에듀케이션』은 웃음까지도 포섭당한 폭력적인 세계가 그려진다. 이곳 화자들은 애초에 죽음과 폭력으로 세워진 사회 질서 안에 살기 때문에, 이들이 겪는 불운은 사회적 권력관계에 따른 배후적 진실로 축소되어 있다. 즉 불균등한 구조에 편입되어 사는 화자들에게 불운이란, 예기치 못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의 불공정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셈이다. 

  어떤 시스템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이들은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난 소년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 소년들은 제도적 억압에 소외와 고통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계몽이나 외설을 떠벌리는 성인이 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세계가 이미 불균등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 소년들은 질서 바깥의 공동체로서, 피·가학적 유희를 즐길 뿐이다. 이들은 결코 단결하거나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3)

  이러한 김승일의 소년 화자들은 대대적인 사회 구조 변화의 시급함을 알고 있기에 되려 그 구조를 벗어나길 꿈꾸지 않는 현대적 주체와 닮아있다. “알고 싶다고 말하랬다고. 알고 싶다는 말만 한다면. 네가 정말로 알고 싶은지./ 선생님이 어떻게 알지?”(「다음」)와 같은 깊은 수렁의 말처럼, 정교한 시스템의 압제를 노출시키는 일은 누구도 이 시스템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 확인을 동반한다. 따라서 김승일이 폭력의 노출을 통해 발생시키는 충격이 별 내용이 없는 충격,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충격에 그친다는 분석4)에서부터 그의 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그의 시가 전하는 충격은 공공연하게 기존 시스템의 견고함을 뚫지도,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알리지도 않는 것일까.

  「같은 과 친구들」에는 기만적인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정면 돌파가 아닌 방식으로 금기를 자유롭게 넘나들고자 한다. 현실과의 대결은 피하면서 저항한다는 감각만을 취하려는 것이다. 이 영리한 “친구들”은 어떤 저항도 내보이지 않음으로써 시스템의 함정을 피해 가려 한다. 그러나 시스템은 어느새 이들의 냉소마저 자신의 구조 한가운데로 빨아들이고 있다.


삼총사라고 알려진 우리 네 명은 어느 날 바닷가 마을의 작은 민박집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좁은 방 한 칸에서 막걸리를 부어 마시며. 우리는 삼총사라고 알려졌는데. 어째서 이렇게 할 얘기가 없는 것일까?


(...)


나는 부모한테 많이 맞았어. 거의 학대 수준이었지. 처음 듣는 학대 이야기에 불현듯 삼총사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우리도 맞았어. 우리도 학대를 당했다니까? 

이것 참 굉장한 공감대로군. 유년 시절에 학대당한 경험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일까? 맞고 자란 우리들의 취향. 우리들의 사랑. 미친 부모를 만난 탓으로. 우리가 서로 닮은 것일까?

아빠가 창밖으로 나를 던졌지. 2층에서 떨어졌는데 한 군데도 부러지지 않았어. 격양된 삼총사는 어떻게, 얼마나 맞고 컸는지 신나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니가 2층에서 떨어졌다고? 나는 3층에서 던져졌단다. 다행히 땅바닥이 잔디밭이라 찰과상만 조금 입었지. 어째서 우리를 던진 것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4층에서. 아빠가 4층에서 나를 던졌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어떻게 4층에서 던져졌는데도 그렇게 멀쩡하게 살아남았어? 게다가 어떻게 그런 부모랑 아직도 한집에서 살 수가 있니? 너한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은 너를 이해한단다. 내가 더 학대받았으니까. 나는 골프채로 두들겨 맞고 알몸으로 집에서 쫒겨났거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그랬구나. 너도 알몸으로 쫓겨났구나. 여름에 쫓겨났니, 겨울에 쫓겨났니? 나는 겨울에 쫓겨났었어.

정말로 겨울에 쫓겨났었니? 아무리 친구의 부모라지만 정말로 너무한 부모들이군. 니가 우리 삼총사 중에 가장 많이 맞고 컸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보니. 더 이상 할 얘기가 딱히 없었다.

- 김승일, 「같은 과 친구들」(『에듀케이션』) 부분


  대학 시절 “삼총사”로 불리던 친구들이 “유년 시절에 학대당한 경험”을 나누고 있다. 딱히 할 얘기가 없어서 시작된 이 대화는 “우리”라는 닮은 존재들을 하나의 “공감대”로 묶어낸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현재 “여행”이라는 체험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유사성을 오로지 “유년 시절”에만 천착해 확인한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첫 연의 “삼총사로 알려진 우리 네 명”이라는 모순된 사실이 제시되었을 때, 이미 “우리”와 “삼총사”의 정체성에는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서로에게 과장된 리액션을 내보이면서, “맞고 자란 우리들의 취향”, “미친 부모를 만난 탓”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일까?”라며 의심하는 태도는 이들 사이에 유대감이 존재하긴 하는지 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여기서 “삼총사”가 외부의 시선으로 정의된 공동체라면 “우리”는 유대감이라는 정서적 관계로 뭉친 공동체다. “삼총사”는 닮아있는 “우리”를 확인하려 거듭 과거로 돌아가지만, 이들이 보게 되는 것은 금기에 대한 자신들의 뿌리 깊은 불신뿐이다.

  한 사람이 먼저 “2층에서 떨어졌”다고 고백하자, 또 한 사람이 “나는 3층에서 던져졌”다고 응수한다. 이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나는 4층에서”라 받아치면서 “삼총사”의 폭로는 막장으로 치닫는 블랙 유머가 된다. 이때 피해자들의 “학대 경험”은 단순히 자기 연민을 드러내거나 타인의 공감과 위안을 얻기 위한 소재이기를 넘어선다. 어느새 이들이 벌이는 ‘불행 경쟁’은 자신들이 사회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주체성을 확인할 하나의 절차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 큰 피해를 고백할수록 더욱 의기양양해지는 이들의 모습은 금기 안팎의 ‘진실을 유일하게 아는’ 혹은 ‘깨어있는 소수’이고 싶은 열망을 반영한다. 폭력의 금기가 유명무실해진 불문율의 세계에서 이들은 “삼총사”라는 외부적 시선에 규정된 집단이 아니라 “우리”라는 정서적 공동체로 자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부터 금기가 허락하지 않는 세계를 겪어온 이 예외적 화자들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항의 제스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이들이 질서로부터 순수히 배제된 공동체가 맞을까. 사실 우리가 외부 시선이라는 사회 기준에 옭아매이는 까닭은, 그 기준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만인은 평등하다는 보통의 믿음에서 출발하여 실상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는, 그 쓰여 있지 않은 규칙을 읽어내야 함을 ‘앎으로써’ 원래 현실이란 그런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안주할 수 있게 된다.5) 폭력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 금기에 위악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는 “삼총사”가 이런 얽매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금기의 바깥이라는 환상에 머무르기만 하는 이 공동체는 불문율이라는 안전한 저항 지대에서 쾌락을 즐기는 데에만 “우리”의 유대감을 소진한다. 불행의 각축전 끝에 도달한 결말이 “더 이상 할 얘기가 딱히 없었다”는 허탈함에 그치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에듀케이션』에서 김승일은 폭력이라는 금기를 매우 축자적으로 읽어내는 한편, 그 금기가 암묵적으로 자행되는 불문율의 세계에 위악적으로 의탁하는 화자들을 앞세웠다. 그리하여 폭력과 금기의 사이에서 사회가 만들어낸 시스템의 환상을 잘 안다는 특권 의식에 갇힌 주체의 자기기만을 폭로한다. 그런 자기 위안이 어떤 위험한 결론에 닿게 될지, 김승일의 시는 경계면에 삐딱하게 서서 조용히 경고를 전하고 있다. 


*


  그렇다면 웃음과 위악이 모두 무력해진 이후에도, 여전히 불운과 마주할 방법이 남아 있을까. 여기에 사회가 만들어낸 문제에 대해 반대 표명을 던지기보다, 그 문제를 무력히 지나가길 택한 화자가 있다. 최근 곳곳에 짙은 허무의 정서를 남겼던 허연의 근작 시집 『작약과 공터』(문학과지성사, 2025)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화자들은 지금의 현실이 그 너머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게 없음을 명백히 확인해 버린 사람 같다. 어떤 우연도 들어설 자리 없는 무기력에 잠긴 화자들은 빈곤한 자기 연민의 성에 갇힌 듯 위태롭다. 

  그런데 허연의 시세계를 들여다보면, 허무주의자는 도리어 가장 삶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역설을 보게 된다. 가령 “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간 사람을 존경할 줄은 안다”(「슬픈 빙하시대 4」,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고 말했던 화자가 “언제나 끝까지 가지 못했다”(「cold case」,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사, 2012)며 허무의 끝을 달려가는 것, 혹은 “염력이 생기기를…… 안녕”이라는 허무맹랑한 말로 겨우 연명되는 현실을 그리면서, 꼭 그 앞에 “우리의 피로 진경을 그렸지”(「추억, 진경산수」, 『너는 언제 노래가 되지』, 2020)라며 내면의 ‘진정성’을 증명하려 드는 것, 그리하여 ‘진정성’ 따위에 무감각해진 현실 안에서 할 수 있는 말을 죄 잃어버린 화자가 “천국은 있다”(「Heaven」, 『작약과 공터』)며 어떤 내용도 담을 수 없게 된 믿음을 버리지도 못한 채, 그저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인은 자신의 글에서 “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6)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모두 다 끝났다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코피를 쏟는 일’”이 “체념의 도(道)”7)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허무주의자들은 궁극적인 목표가 없기에 오히려 매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는 설명8)과 상통할 것인데, 그의 말에 동의 여부를 표하기 전, 우선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그의 시에는 모든 것을 내버려도 끝내 버려지지 않는 믿음이, 즉 ‘텅 비어 버린 믿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허무주의자가 실은 가장 충실한 사람이라는 시인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텅 빈 믿음을 내보이는 그의 시를 다르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 안의 믿음의 내용을 다 비우고도 여전히 믿음을 가지는 충실한 존재라면, 허연의 시가 던지는 절박한 목소리에 응답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일찍 심은 씨앗들이 무사하기 힘든 것처럼

청년 시절 나는

수차례 해고되었고

그러고 나면

바람 속에 서 있곤 했다


이런저런 알바에 시달릴 때마다

나비를 채집하거나

타악기 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


둘이나 셋 중 하나를 고르는 경우는 없었다

늘 그즈음의 일이 떨어졌고

일터에 어울리는 말투를 배우며

한 계절이 갔다


날씨에 단련된 변두리 간판 같은 얼굴로

베이기도 했고

늘어나기도 했고

부러지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그것들이 누설되지 않은 채

내 뒷모습에 남아 있음을


몸을 써서 했던 일들은 흔적을 남겼다

- 허연, 「청년기」(『작약과 공터』) 부분


  이 시에는 자신의 “청년기”를 온통 헛수고로 회고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일찍 심은 씨앗들”이 땅 위로 고개를 틔워보기도 전 “수차례 해고” 당하는 것이 “청년기”의 현실이라면, 화자는 지금 고통과 억울함이 치열하게 밀려드는 청춘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미 그런 숱한 괴로움을 겪은 이후, 즉 “그러고 나면/ 바람 속에 서 있곤 했다”라며 무력감이 모든 것을 지배해버린 “청년기”를 말하고 있다. 단순히 읽으면 이 시는 일찍이 찾아든 불운에 자기 삶 전반을 헛된 것으로 치부하는 허무주의자의 탄식처럼 보인다. 그는 애초부터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선택지를 부여받은 적 없으며, “늘 그즈음의 일이 떨어졌고”, 그에 “어울리는 말투”를 맞춰 써 왔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허연의 시세계에서 허무주의자와 ‘끝까지 간 사람’이 연루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날씨에 단련된 변두리 간판 같은 얼굴”은 “변두리”에 밀려나 겨우 거리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패배자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간판 같은 얼굴”은 풀 한 포기 쉽게 뿌리 내리지 못하는 거리에서, 변덕스러운 “날씨”를 모두 견딘 끝에 남겨진 흔적이기도 하다. 시인이 믿음의 헛됨을 말하면서 줄곧 “간판 같은 얼굴”이나 ‘몸 쓴 흔적’, “뒷모습” 같은 잔해들을 언급하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잔해는 사건이 끝난 이후에도 진실을 찾게 만드는 유일한 토대라는 점에서, “누설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그것들”을 품고 있는 “뒷모습”은 기존의 어떤 믿음의 내용과도 담합하지 않은 새로운 가능성을 지시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듯, “몸을 써서 했던 일들은 흔적을 남겼다”라는 마지막 행은 어렴풋이 허무의 너머를 암시한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내용’이 아니라 볼품없게 남겨진 체념의 ‘흔적’으로 끝맺는 이 시는, ‘텅 빈’ 믿음이 아니라 텅 빈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희망보다 체념을 먼저 배운 자”9)에게 남아 있는 희망이란 보상이나 벌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그저 끝없는 시련을 통과해내는 충실성10)인 까닭이다. 

  이에 허연 시의 허무는 비단 어떤 결과에 대한 패배주의적 정서가 아니라, 실패할지라도 자기라는 내면적 존재를 드러내려는 필사의 시도와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의 화자는 허무로 가득 찬 “진공관을 걸어 나”(「스텔라」, 『작약과 공터』)와 “나비”와 같은 노래를 부르고 “타악기 주자”처럼 설레는 두근거림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가 비워낸 믿음 안에는 언제나 새로운 “바람”이 드나들고 있을 것이기에.


*


  한 영화에서는 ‘머피의 법칙’을 단순히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적은 확률일지라도 그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11) 즉 불운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에서 미약한 가능성의 실현을 위한 필연과 늘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민구, 김승일, 허연의 시는 각각 웃음, 위악, 허무를 통해 불운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대처법은 서로의 허점을 드러내면서 그 허점을 보완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런 점에서 불운에 웃음으로 대처하는 민구의 화자가 가볍다고 말할 수 없으며, 불운에 벗어나려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김승일의 화자가 병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또 허연의 시가 ‘체념’의 정서에 기울어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웃음은커녕 분노나 슬픔조차 남지 않은 자리에서 공백으로나마 믿음을 지켜가는 그의 화자를 패배자라 쉽게 단정할 수도 없다. 늘상 불운에 빠지고 마는 화자들은 자신의 살아있음을 잊지 않음으로써 변화 가능한 세계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어느 날 믿었던 사랑이 우리를 배신한다 해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일 따름이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1) DJ DOC의 노래 <머피의 법칙>(1995)

2) 이승철, <불행을 길들이기: 주술, 신정론, 보험과 재난의 정치>, 《사회와 이론》 53, 한국사회이론학회, 2026 참고.

3) 강계숙, 「신이 죽어서 우리끼리 선생님」, 《문학과사회》 25(3), 문학과지성사, 2012; 송종원,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 김승일, 김상혁, 이제니, 이준규의 시」, 《창작과비평》 39(1), 2011; 차성연, 「‘조합원’의 윤리, 시적인 ‘에듀케이션’ : 김승일 시집 『에듀케이션』 외」, 《월간 현대시》 271, 한국문연, 2012; 함돈균, 「도룡뇽 공동체의 탄생」, 『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 157-184면 참고.

4) 송종원, 앞의 글, 395면.

5)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정치적 요인으로서의 향락』, 인간사랑, 2004, 79면 참조.

6) 허연, 「나쁜 시인이 서 있다」, 『월간 현대시』 36, 월간문연, 2025, 131면.

7) 허연, 『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아르테, 2019, 138면.

8) 허연, 앞의 글, 133면.

9) 위의 글. 131면.

10) 알랭 바디우, 현성환 역, 『사도 바울』, 새물결, 2008, 183-184면.

11)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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