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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

  • 작성일 2026-09-01

  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


황석현


  회색빛 갯벌, 우연히 스며든 사랑


  박상영의 소설 세계 「대도시의 사랑법」 도입부에는 연인 규호와 연애를 시작한 지 200일이 지난 시점에서 규호가 홀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영의 실수로 규호 홀로 떠나게 된 여행에서 고영은 공항철도 창밖을 바라보다, 감정의 리듬과 직면한다. “나 홀로 공항철도를 탔다. 창밖으로 회색빛 갯벌이 계속 이어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대도시의 사랑법」, 184-185면) 이 짧은 문장은 연인 규호와의 단절 이후의 감정을 '슬픔'이나 '외로움'으로 바로 치환하는 것이 아닌, 반복되는 비어 있음, 스스로를 검열하는 감정적 카메라, 종종 회색빛으로 필름이 씌워진 삶의 프레임으로 보여준다. 고영은 ‘갯벌’ 속에 발이 빠지듯 감정적 침몰을 겪으면서도 공허에 침전되지 않으며 곧이어 감정적 전환을 시도한다. 

  섹시한 팝가수 카일리 미그노 앨범과 립밤.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립밤을 찾는 행동은 감정을 파국으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한 자기 정동의 능동적 복구 행위이다. 촉촉한 립밤을 바르며 감정의 표면을 다듬는 조심스러운 생존술로 읽을 수 있다. 입술은 말을 시작하는 신체 기관인 동시에 키스·식사·호흡 등 생존과 욕망의 경계 지점이다. 이는 사랑이 머뭇거리는 자리에서 지금 여기 다시 관계의 준비를 하는 미세한 제스처이다. 이는 관계를 살아낸 몸이 감정을 지속하려는 퀴어한 생존술이자 정동적 자기 조율 방식이다. 

  연인 규호와의 감정적 관계는 기계적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모르게 끝나가 보이지만, 여전히 감정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은 도래하지 않을 듯도 보인다. 이 글은 그러한 지속 불가능한 단일한 감정의 리듬, 끊어졌으나 끝나지 않은 애착, 그리고 삶을 살아내기 위한 감정적 생존술을 퀴어 정동1)의 관점에서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가 보여주는 감정의 구조, 감각과 기억의 귀환, 기쁨의 부재가 어떻게 문학적 윤리로 전환되는지를 추적해본다.

  로런 벌랜트는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에서, 우리가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어떤 대상이나 관계가 오히려 그 삶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적 조건으로 변할 때의 정동 상태를 ‘잔인한 낙관’이라고 설명한다(윤조원·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24). 현대의 주체는 여전히 ‘좋은 삶(good life)’의 약속을 좇지만, 그 약속 자체가 자기착취적 생존을 강화하거나 정서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기도 한다. 박상영 소설 속 고영과 규호의 관계 역시 이러한 양가적 구조 안에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착을 통해 버티고 살아가지만, 그 관계는 사회적 제도와 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점차 유지되기 어려운 형태로 변하며, 그럼에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내부에 잔존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들의 감정 구조는 벌랜트가 말한, 지속을 원하는 동시에 그 지속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관계의 역설과 깊이 공명한다.

  고영과 규호가 처음 어떻게 우발적으로 만났던가. 현존하는 퀴어들이 자신의 퀴어함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다문화·다양성 환상 특구 서울 이태원의 지금은 망하고 없어진 한 클럽에서였다. 고영은 마음껏 끼를 발산하는 취한 친구를 말리다가 엉겁결에 그의 팔꿈치에 얻어맞아 클럽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즉흥적으로 도움을 주는 규호와 예외적으로 조우한다. 이러한 우발적 충돌, 감정의 비틀림 속에서 벌어진 행위들이 관계를 시작하게 만든 감정의 비정합적 순간이다. 관계의 탄생 구조가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우연과 잉여의 정동 속에서 발생함을 보여준다. 이때 고영은 혼란된 감정 속에서 느닷없이 규호에게 키스를 하는데 접촉은 감정보다 앞서서 도착한다. 감정이라고 명명하기 전에 이미 발생한 생의 접촉이었다. 이는 정동의 비동시성이자, 상호 주체의 불균등한 감정의 속도 차이를 나타낸다. 사회적 규범 하에서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는 퀴어함을 허락하고 약속해주는 지금은 없어진 클럽에서 시작된 감정과 기억의 귀환은 무뇨즈식 퀴어 유토피아, 여전히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꿈꾸도록 해준다. 규호와 우발적 키스를 감행하고, 고영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피 맛을 통해 자신의 불행 서사를 상기한다. 


  피 맛과 유머, 불안정한 사랑의 윤리


  그는 전 연인으로부터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바이러스와의 동거를 현실적으로 수긍하면서도 자신만의 유머를 잃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팝 여가수 카일리로 명명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박상영식 유머는 고영의 내면에 자리한 불행과 고통을 견뎌내는 자기 보전의 방식이자 퀴어한 감정 윤리의 실천이다. 바이러스는 본래 몸 안에서 익명적으로 작동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고영은 거기에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그것을 자기 몸에서 분리하고, 관찰하고, 불러낼 수 있는 내가 아닌 대상으로 만든다. 이는 고통의 감정을 감당 가능한 거리로 밀어내는 기술이다. 보통 HIV는 ‘전염’, ‘위험’, ‘감염자’, ‘혐오’라는 낙인과 수사로 가득한 질병이다. 하지만 고영은 이를 팝스타 이름으로 유머화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수치화로 전락하지 않게 한다. 자기 안에 도사리는 죽음 대신 재치로 바꾸는 감정 윤리이자 자기 서사의 재구성 방식인 것이다. 바이러스를 자기 서사로 적극적으로 불러들이고, 고영은 ‘이 몸은 여전히 나의 것이다’라는 한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며 퀴어한 감정의 저항을 이어간다. 

  고영이 느끼는 피의 맛은 자신의 감염 사실을 넘어선 감정, 기억, 존재, 죄책감, 자기 윤리가 모두 한 점에 수렴된 감정의 급소이다. 여기서 피는 생물학적 징후를 떠나서 관계의 위험성과 사랑의 불가능성을 감각적으로 일깨우는 은유로 읽을 수 있다. 피는 자기 몸 안의 타자성과 사랑이 주는 친밀함과 그 친밀함 속에 포함된 자기 파괴적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가 규호를 감염시킨 것은 아니지만, 고영은 감정적으로 이미 자신이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에 침몰한다. 피는 사랑과 언어의 시작점에서 터져 나온 자기 존재의 균열이자 사랑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자기 인식의 촉각적 응답이다. 이는 열렬히 사랑하고 싶지만, 감정이 대상의 거기까지 당도하기에는 너무도 위험할 수 있다는 문학적 선언이다.

  규호도 고영에게 비동시적인 정동적·감정적 반응을 느꼈던 것일까. 규호는 고영이 잃어버린 “흰색 루이비통 핸드폰 케이스”(「대도시의 사랑법」, 198면)를 갖다주기 위해 고영의 일터인 뮤지컬 공연장을 예고 없이 방문한다. 회수된 물건이 잃어버린 감정을 촉발한다. 이는 클럽에서 느꼈던 대상을 향한 정동과 감정의 의도적 귀환이며, 연인으로서의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최소한의 신호이자 제스처로 읽을 수 있다. 이후 이들의 연애적 감정은 이성애 중심의 안정된 서사처럼 진행되지는 않지만, 그 불안정성 속에서 더욱 정동적으로 밀착되고 감각적으로 응축되는 관계의 진전을 보여준다. 이는 아직 사랑이라 부를 수 없지만, 몸이 먼저 동의한 정서적 동맹이다. 서로에 대한 확신보다는 정동의 동조가 먼저 있었고, 이 사랑은 느낌의 예감으로 먼저 시작된 관계이자 감정의 예감적 연대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사랑이 로런 벌랜트적 잔인한 낙관의 구조, 관계는 지속 불가능한 전제(고영의 HIV, 배제적 사회제도, 불안한 사회적 신분, 물리적 거리 등)를 이미 품고 있지만 말이다. 

  고영과 규호는 함께 술집으로 향하게 되고 바로 고영의 대학가 자취방에서 자게 된다. 규호는 세 번 만나기 전까지는 섹스를 하지 말자며, 관계의 지속성을 바라고, 동이 터올 무렵 고영은 잠에서 깨어나서 잠든 규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일순간 자신과 세상이 고요해짐을 느끼며(감정의 일시적 정지 상태) 고영은 규호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지고, 그의 지갑을 몰래 열어본다. 사랑의 정적 속에서 타자의 정체를 탐색하는 행동으로 나아가는데 이는 불확실성과 타자에 대한 알 수 없음과 그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타자를 ‘정보’로 환원해 이해하려는 욕망의 기입이라고 볼 수 있다. 

  지갑은 가장 사적인 소지품으로 타자의 신분, 경제력, 소속, 나이, 그리고 삶의 궤적이 담겨있는 상징물이다. 규호를 감정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에 이해 가능한 타자로 규호를 확인하려 한다. 이는 익명성이 풍부한 대도시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안의 구조를 잠재우기 위해 사회적 정보를 정리함으로써 규호와의 관계를 구조화하려는 충동이다. 규호를 설명해주는 나라사랑 체크카드, 간호학원 수강증, 운전면허증 모두 규호의 흔적과 증거물이지만 규호의 감정, 생각, 고통, 삶의 깊이는 알 수 없다. 이는 감정으로 접근할 수 없는 타자의 윤리적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후 규호도 잠에서 깨어나게 되고, 규호는 급하게 자신의 거주지인 인천으로 향한다. 규호가 떠난 자리와 부재감 속에서도 고영은 규호의 존재를 더욱 궁금해하면서도, 대학교 생활과 취업 준비 생활, 아르바이트 등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감정의 복합적 리듬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짜증과 분노와 희망에 수반되는 절망과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땀처럼 뒤집어쓴 채로”(「대도시의 사랑법」, 204-205면) 말이다. 고영은 연애라는 사건에서도 이러한 감정을 마찬가지라 느끼는데,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많이 경험하고 멀리 와버렸다고 생각하며, 무기력함과 권태감을 느낀다. 

  고영의 이러한 자기 인식은 복합적인 정동을 담고 있다. 관계의 공백기를 드러내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고영의 감정이 저수지처럼 깊고 복잡한 정서적 밀도가 축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일상적 사건들의 구조 자체에 자신이 침잠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사랑이라는 사건조차 그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절망을 느낀다. 사회문화적으로 관계된 구조적 의미는 어떤 감정으로 드러나고, 반복되는 자아의 굴절은 짜증으로 나타나며, 불확실성과 어떤 문제에 대한 미해결 상태의 좌절은 분노로, 관계의 가능성을 놓지 못하는 감정의 관성은 희망(도래할 기쁨)으로 나타난다. 일상이라는 매일의 리듬이 주는 탈진은 경미한 절망감으로 축적되다가 이는 감각을 무디게 만들며 감정 또한 새로워질 수 없다는 권태라는 자기 예감을 보여준다. 감정은 멈춰 있지 않지만, 도달할 수 없는 상태로 계속해서 순환한다.

  고영은 규호의 이름을 계속해서 호명하고 싶어한다. 이는 “지독히 일상을 닮아있는 또 다른 한 명에 불과한 규호의 이름”(「대도시의 사랑법」, 205면)이지만, 고영에게 감정의 잔여를 붙잡기 위한 행위이며, 예외적 애착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름을 호명하고 싶어 하는 것은 감정의 잔여를 호출하기 위한 언어적 예감이며, 관계가 살아있다는 최소한의 증거이다. 규호와의 관계에 대한 지속 불가능성과 고영이 느끼는 감정의 현재성을 동시에 가진 퀴어 정동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고영의 무기력과 권태 속에서 재희라는 퀴어한 대학 동창 여자 친구는 관계의 오아시스로 작동하지만, 그녀가 불러들인 모르는 사회인들은 고영에게 지루한 술자리를 선사한다. 모르는 사회인들의 궁금하지 않은 인생사, 연봉 이야기, 이성애 연애담 공유, 군대 이야기 등은 모두 고영에게 지루한 것들이다. 이는 이성애 규범 중심 사회의 감정 구조가 어떻게 반복되고 재생산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고영이 ‘공유된 감정 규범’에서 이탈한 존재로 자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보편적으로 이성애자 남성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의 유형을 반복한다. 직장 연봉은 자본주의적 생산성 중심의 자기 정당화이며, 연애담은 이성애(남녀) 서사 중심의 감정 구조이고, 군대 이야기는 고영이 공감하지 못할 남성성의 동질화 경험이다. 이런 대화들은 친밀해지기 위한 사회적 명분 하에, 이성애-국가-자본주의 생산 구조에 기초한 감정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규범화된 언어를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인정받는 과정으로 작동한다. 고영은 그들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관심도 없을 뿐더러, 진입도 불가능한 감정 구조에 놓여 있다. 고영이 향하는 감정은 ‘몰래 지갑을 열어본 대상에 대한 사랑’, ‘입술의 피 맛’, ‘카일리 미그노의 앨범’, ‘립밤을 바르는 행위’ 등의 정동에 근접한다. 고영은 이러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소외를 느끼지만, 이는 자신이 이성애 남자 중심 세계가 구축한 감정 질서에 들어갈 수 없는 정동적 이질성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이때 고영은 적극적으로 자기 감정의 귀환과 자기 존재의 감각 회복을 선택한다. 고영은 그 자리에서 화장실을 가겠다고 빠져나오며 택시를 타고 이태원 G클럽으로 향한다. 도시의 새벽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시간, G클럽은 규호의 일터이다. 고영이 이성애적 감정 구조가 강요되는 자리에서 벗어나 자기 감정의 리듬이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장소로 향하는 것은 정직한 감정을 따라 살아가려는 주체의 퀴어한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클럽 마감 시간, 일터의 잉여물을 정리하는 규호를 뒤에서 안는 장면은 불확실한 감정을 말로 재현하는 대신, 규호에 대한 감정을 접촉으로 전달하는 고영만의 방식이다. 이는 예고 없이, 말없이 행해지는 퀴어한 접촉의 리듬을 형성한다. 규호는 익명의 대상들로 북적이는 클럽에서 생성된 쓰레기를 버리고 있었다. 쓰레기봉투는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잉여물로 버려지는 것들을 뜻한다. 고영은 이미 수많은 연애 경험 속에서 ‘차이고 버려지는 경험’을 했지만, 쓰레기봉투를 든 규호를 포옹하는 경험은 자신의 사랑도 다시 쓰레기처럼 버려질 수 있지만, ‘나는 지금 그것을 다시 안는 중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정동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읽을 수 있다. 


  젖은 커튼, 함께 살아가는 사랑


  정동적 소소한 사건들의 연쇄 속에서 고영과 규호는 본격적으로 연인으로서의 동맹을 형성한다. 고영은 자취방에 커튼을 사놓고도 2년 동안 달지 않고 구석에 처박아 놓고 있었다. 이를 본 규호는 보쉬 드릴 세트를 큰 결심을 하고 사서 고영의 자취방에 암막 커튼을 달러 와준다. “세상 천지에 규호와 나 둘만이 남은 느낌”(「대도시의 사랑법」, 219면)을 공유하는데, 이는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고 둘만의 공간을 구성하는 감정적 인프라이다. 커튼을 달아주는 행위는 생활을 넘어서는 함께하기 위한 공간의 윤리인 것이다. 고영의 희망적 감정은 커튼처럼 구석에 처박혀 있었지만, 규호라는 타인에 의해 펼쳐지고 고정되는 서사를 보여준다. 

  규호는 클럽 마감을 끝내고 고영에게 서울 낙산공원에 가자고 한다. 대도시 서울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지대의 공원에 올라 지평선 너머로 뜨기 시작하는 해를 바라본다. 둘은 시야가 확 트이는 같은 시점을 공유하는데 이는 미래적 상황과 사건이 도래할 삶의 은유이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규호는 고영에게 정식으로 교재를 고백한다. 이에 고영은 자신은 단 음식을 싫어하며 자기 수치와 존재의 어둠까지 꺼내는 감정의 자기 폭로를 내뱉는다. 이후 내리막길로 돌아선 고영은 신체에 표현되는 정동적 동요를 느끼는데, 규호는 그러한 고영이 감당해야 했을 불행과 고통을 마주하고 수용하며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라고 응답한다. 규호의 행동은 퀴어 관계에서 보기 드문 조건 없는 윤리적 수용의 선언이다. 이는 감정의 판단을 넘어선 존재의 승인이라고 볼 수 있다. 고영과 규호는 ‘정서적 동맹’을 맺던 관계에서 실존과 고통, 자기 폭로, 돌봄, 신뢰로 나아가는 관계의 성숙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감정의 윤리적 실천으로 진입한다. 

  정식 교재를 약속한 후에 규호와 고영은 극적인 연애의 시작과는 달리 아주 지극히 평범한 연애를 수행하며 생활 구조에 집중한다. 취업 준비생이었던 둘 중에 규호가 먼저 성기 확대 전문 비뇨기과에 취업했고, 고영은 계속해서 취업 준비를 하다가 중견 무역회사 신입사원에 합격한다. 그러나 기업은 고영에게 지정된 병원에서 건강 검사서를 요구하고, HIV로 불합격이 걱정되는 고영을 대신해 규호(혈액형이 똑같음)가 대신 신체검사를 수행한다. 극적인 만남과 고백의 정동을 지나 현실 세계의 제도적 장벽과 몸의 불리한 조건에 부딪히며 다시 한번 감정 윤리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서사를 보여준다. 이 장면은 퀴어 서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제도적 현실을 통과하는 감정적 공모와 연대의 순간이자, 몸의 교환을 통한 존재의 보호를 보여준다. 고영은 ‘신체검사서’라는 통과의례에서 다시 ‘감염된 몸’과 마주하는데, 기업과 지정된 병원은 감염된 몸을 수치화하고 배제하려는 제도를 암묵적으로 시행한다. 이에 규호는 고영의 존재를 은폐하고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 몸을 검사하고 서류에 기입하는 퀴어한 사랑을 보여준다. 규호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것이지만, 감염자 고영을 위해 ‘나는 너를 대신 살아내겠다’는 말 없는 연대의 실천이자 감정적 신뢰이다. 

  불확실하고 지연되며 불안정했던 이들의 퀴어 관계는 구체적 일상과 감각적 체험 속에서 하나의 윤리로 수렴된다. 규호가 의사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친형과의 트러블로 고영의 자취방에서 동거를 시작하게 되는데, 각자의 침대를 두고 때때로 함께 누운 밤들을 보내기도 하며, 바쁘고 피곤한 직장 생활, 스트레스성 소비 충동, 연인 간의 싸움, 짧은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러한 삶을 “사랑이며 연애라고 믿는 관계”(「대도시의 사랑법」, 241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연애는 지속 가능한 생존의 패턴으로 바뀌고, 그들의 동거는 사랑이 지속되기 위한 조건으로 기능한다. 대한민국의 결혼제도에 편입할 수 없는 퀴어 관계들이 일상이라는 제도에 적응하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고영과 규호에게 태국 방콕 여행은 도시적 생활의 피로에서 벗어난 여행 속 해방적 감정의 도달구로 작동한다. 호텔을 예약하며 허니문이라고 장난으로 기입하지만, 호텔 운영진의 실재적 환대로 바뀌고, 샴페인과 신혼여행 축하 카드를 받는다. 이는 대한민국 주류 사회가 허용하지 않았던 감정의 일시적 승인이다. 고급 호텔에 숙박하기도 하고, 스콜을 만나 게스트 하우스에 묵기도 하며 로망적 삶과 생존적 삶을 체득한다. 스콜에 흠뻑 젖어 찾은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들은 오랜 연인 관계에서 잊혀졌던 섹스를 하게 되는데, 거기서 둘은 한 몸으로 이어진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말없이 회전하는 실링팬 아래에서 말이다. 감각의 통합과 감정의 체화를 통해서 말이나 서사, 고백을 벗어난 퀴어한 사랑을 보여준다. 이 사랑의 순간은 감각의 리듬, 촉각의 동조, 감정의 물리적 경험화로 이뤄진 것이고, 상호 주체와 대상이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경험이 된다. 그들의 지금 여기에 탄생하는 귀한 사랑을 뒤로 하고 방콕 하늘은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잔인한 낙관』에서 벌랜트는 ‘느린 죽음(slow death)’을 한 번의 재난으로 보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축적되는 피로·질병·소진을 통해 삶이 조금씩 마모되는 상태로 설명한다. 불안정 노동, 취업 경쟁, 건강검진이라는 통과의례, 감염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배제는 모두 몸을 서서히 잠식하는 조건이면서, 역설적으로 그런 조건을 통과해야만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재생산한다. 고영의 HIV 감염, 반복되는 노동과 탈진, 방콕 이후의 공허는 이런 느린 죽음의 조건 속에서 여전히 사랑을 믿고자 하는 애착과 분리되지 않는다. 잔인한 낙관은 이처럼 관계의 구조이면서 몸과 생존 자체를 옥죄는 느린 죽음의 조건에 대한 애착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 식은 고로케 그러나 끝나지 않은 감정


  피로를 탈출하기 위한 해방적 여행에서 돌아와 둘은 다시 피로가 축적되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다가,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규호가 근무하는 병원이 중국에 진출하게 되고, 고영은 규호를 따라 재직하는 기업의 중국 주재원 신청을 하려고 한다. 규호의 중국 지점 발령 신청은 그간 차곡히 해온 준비에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고영의 주재원 신청은 HIV 검사 결과 제출 항목 때문에 좌절되고 만다. 둘이 같이 중국으로 향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규호 혼자 중국으로 향하게 되면서 둘의 연애 감정은 자연스레 정리가 되어 간다. 만남의 지속과 이별의 순간에서 티격태격하다가 공항에서 규호는 먹던 고로케를 고영에게 던져 준다. 출국장으로 향하는 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공항철도에서 고영은 다시 회색빛 갯벌과 밑동만 남은 마른 작물만 멍하니 바라본다. 다 식어버린 고로케, 규호의 이 자국이 선명한 고로케와 함께 말이다. 고로케는 가장 육체적인 형태를 지닌 사물이면서도, 사랑이 끝나갔음을 말해주는 감정의 결정체이자, 다시 뜨거워질 수 없는 관계의 은유로 읽을 수 있다.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 장면은 두 사람의 감정이 감각적 기억의 조각으로서 잔여물처럼 남는 순간을 보여준다. 고영과 규호의 연인 감정은 끝나가면서도 끝나지 않는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하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규호의 부재’와 ‘고영의 기억’을 통해서 완결되어 간다. 회색빛 갯벌은 규호의 부재와 공허한 고립된 감정을 대면하는 자리의 은유이다. 마른 작물과 고로케를 통해 갈라진 감정의 흔적과 끝나지 않은 애착을 보여준다. 고영은 전처럼 감정 전환을 시도하는데, 방전된 휴대폰 배터리로 인해 신나는 노래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다. 이는 고영이 규호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과 동시에 부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 인식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고영과 규호의 연애가 정리되는 방식은 그들의 연애가 단지 기계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흔적과 부재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정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끝나감을 보여준다. 


  우기의 방콕, 실패 이후의 윤리


  규호가 중국으로 떠나고 고영은 순차적으로 진행한 일은 침대 하나를 버리는 일이었고, 재직하는 무역회사에 사표를 내던지는 것이었고, 방콕행 비행기를 끊고 퇴직 기념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퇴직과 함께 현대적이고 우아한 삶을 살리라고 계획한 모든 일들은 무산되고 일상의 리듬은 무너진다. 이 모두가 퀴어한 존재가 삶의 계획성과 사회적 기대를 벗어나며 생존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틴더라는 연애 어플을 통해서 만난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 엘리트 유부남 하비비의 제안으로 방콕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한국의 10월 말은 그리움과 상실감 등 감정의 허기가 깊어 가는 계절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이어지는 감정의 잔여는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사랑 이후의 감각과 부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감정적 방랑을 다룬 서사를 잘 보여준다. ‘늦은 우기의 방콕’은 기억과 욕망이 혼재된 감정이 재정렬되는 장소이다. 또한, 방콕은 규호의 부재를 가장 선명하게 감각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무너진 계획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퀴어한 생존술로 읽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좋은 삶에 대한 표본 같은 엘리트 유부남 하비비와의 만남은 고영에게 새로운 감정의 예감인가, 규호와의 만남 이후 잔여 감정의 그림자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하비비와의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이는 새로운 감정의 시작이 아닌 이전 감정의 그림자 위에서 이어지는 감정적 유예임을 알 수 있다. 하비비와의 방콕 여행에서 고영은 하비비와의 생활 패턴에 맞추어가면서도 계속해서 규호와의 감각적 경험과 기억을 소환한다. 술에 취할수록 모든 게 괜찮아져 버린 우리를 공유하던 순간, 서로를 안은 채 느끼던 방콕의 밤공기를, 자꾸만 흐려지는 방콕의 야경을, 뜨겁고 촉촉한 공기를,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을 다섯 살짜리 꼬마처럼 즐겼던 순간들을 소환한다. 사랑은 서사에서 파생한 감각으로 남는다. 고영은 이처럼 규호와의 과거를 소환하면서 일시적으로 그때 느꼈던 감정의 리듬을 재현하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비비와의 관계는 그 복원을 실패하게 만든다. 

  하비비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엘리트 40대 유부남으로 완벽하게 제도화된 삶 속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감정을 숨기며 제도권 구조에 묶여 사는 사람이다. 엘리트 인재의 사회적 성공, 시력 상실, 유부남, 가족의 병환에도 콘퍼런스 참여 등 고영은 “격무나 스트레스, 예상치 못한 상실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나 잘 알”(「늦은 우기의 바캉스」, 275면)기에 그의 삶과 고통을 감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자꾸만 끊기는 대화의 단절과 어떤 감정의 부재를 느낀다. 규호와 같이 묶었던 방을 그와 함께 지내면서 고영은 깨닫는다. 아무리 과거의 경험을 소환하려 해도, 대상을 향한 감정은 함부로 오지 않고, 기억은 자꾸만 자가 모방되며 하비비는 규호가 머문 자리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오히려 하비비에게 자신을 핵폭탄처럼 빛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고영과의 만남이 일시적인 해방구였을 것이다. 고영은 데이트 앱을 통해 이 남자, 저 남자와 메시지를 나누지만 그것도 지겨워진다. 다시 익명의 누군가들과 소통을 하려 해도 관계는 단순 소비되고, 감정도 순환과 반복 속에서 고갈됨을 보여준다. 이처럼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회상과 반복과 관계의 실패와 감정의 유예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별 후에도 감각의 잔여와 사랑받은 느낌은 살아남는다. 고영은 하비비와 계속 같은 호텔 방에 묵었지만, 그 순간들에도 규호와 방콕에서 있었던 몸이 살아있는 것 같은 감각적 경험을 상기한다. 이는 현재의 주체에게 침투해오는 과거 감정의 지속이었다. 일회용 컬러 렌즈샵과 HIV 예방 복제약을 파는 약국, 스콜을 만나 도로에 누워서 비를 홀딱 맞은 경험 등 가족 같은 느낌을 주는 하비비와는 만들 수 없는 감각적 경험들이었다. 그리고 하비비가 말해주는 어떤 삶의 양식들은 고영에게 견딜 수 없는 무언가를 선사한다. 고영은 하비비가 자신을 호텔 방으로 부른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지만, 관계가 정합되지 않는 참을 수 없는 무게감에 도달한다. 잠든 하비비를 두고 호텔 방을 나왔을 때는 그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하비비는 사회가 인정한 제도권 질서 속에서 상당히 좋은 남자로 기능하지만, 고영은 거기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와 함께 있음에도 ‘사랑받고 있음’이 아닌 ‘고정된 관계의 역할’만을 느끼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적 감옥의 형식 안에 갇힌 접촉에 불과했다. 이와 달리 규호와 느꼈던 젖은 몸과 신체의 일치감은 관계의 진실성이었다. 

  하비비와의 관계를 끝내고, 고영은 규호와 새해맞이 인천 월미도에 놀러 갔던 경험을 소환한다. 거기서 풍등을 날리는데 풍등에 적은 고영의 소원은 세속적 욕망을 지나 규호라는 한 인간이었다. 고영의 삶이라는 서사에 규호가 감각과 감정과 기억으로 크게 자리함을 의미한다. 소원을 적은 풍등을 날리고 추락하는 장면은 그들의 퀴어한 사랑이 도래할 미래적 삶으로 날아가길 바라는 소망이었지만, 그 소망이 좌절되는 운명이 교차하는 아름답고 슬픈 은유로 읽을 수 있다. 구멍이 생긴 풍등은 활활 타올랐다가 먼 검은 바다에 추락한다. 둘의 관계를 암시하듯 말이다. 고영은 규호와의 이별 후에 단지 그리움에 머물지 않고, 부정적인 감정 지형을 겪는다. 상실감과 공허와 악몽과 우울을 경유하며 이별이 남긴 가슴 아픈 삶에 침잠하고, 고영에게 여전히 규호는 지속 불가능한 사랑이었지만, 현실적 기억과 감정으로 살아 있음으로 소설은 끝맺는다.

  벌랜트에게 잔인한 낙관은 한 사람의 심리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현재의 정동 구조’를 가리킨다. 신자유주의적 위기가 상시화된 시대에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와, 이미 아무것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체험 사이의 교착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이 교착은 결단이나 파국으로 쉽게 수렴되지 않고, 애매한 지속과 유예, 불완전한 관계의 유지라는 형식으로 일상에 침전된다. 고영의 감정 역시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관계’, ‘정리되지만 정리되지 않는 애착’의 상태로 머무르며, 하나의 실패한 연애를 넘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정동 구조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박상영은, 퀴어들의 사랑이 때로 배제적 구조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감정은 살아남는다는 점을 섬세히도 기록한다. 고영의 감정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지속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살아 있다. 그것은 서사로 봉합되지 않으며, 임의적 제도 속에 위치하지 않고, 감각 속에서 계속해서 재현된다. 감정은 기억으로 귀환하고, 감각으로 부유하며, 이별 이후에도 계속해서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한다.

  박상영의 퀴어 서사는 관계의 성공 여부를 묻지 않는다. 사랑은 무너졌지만, 고영의 감정은 마치 젖은 커튼처럼 그의 삶 속에서 내려앉아 있다. 박상영이 묻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 끝났을 때 감정은 어디에 남는가’이며, ‘그 감정은 어떻게 살아지는가’이다. 고영은 이별을 통과하면서 상실과 우울, 기억과 몸이 느끼는 정동적 잔여를 살아낸다. 그리고 그 모든 잔여 속에서도 여전히 감정을 느끼고, 때로는 그것을 기억으로 소환하며 버텨낸다. 이것이 바로 퀴어한 감정의 윤리이자, 박상영 문학이 보여주는 정동의 미학이다. 문학은 그렇게, 실패한 관계 이후에도 남아 있는 감정을 위해 쓰인다. 고영에게 규호는 끝난 연애가 아니고, 여전히 살아 있는 감정이었다. 그는 기억을 통해, 감각을 통해, 감정을 지금 이 자리로 계속 귀환시킨다. 이별(상실)은 무수한 감정과 정동이 존재하는 다른 방식이었다.



1) 이 글에서 퀴어는 성소수자의 정체성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퀴어는 이성애 중심의 규범성과 정상성의 질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제도 밖에서 새로운 관계와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존재 방식이자 윤리적 실천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고에서 사용하는 퀴어 정동은 이러한 존재 방식 속에서 형성되는 감각과 정동의 운동을 가리킨다.

참고문헌)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

참고문헌) 박상영, 「늦은 우기의 바캉스」, 『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

참고문헌) 로런 벌랜트, 윤조원·박미선 옮김, 『잔인한 낙관』, 후마니타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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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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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 박상현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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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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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을 위한 유희

사라짐을 위한 유희 —황유원론1) 오경진 그는 불안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밤의 해변에서 저기, 꿈(夢·몽)과 환상(幻·환)을 물거품(泡·포)과 그림자(影·영)로 새겨넣으려는 시인이 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떠밀리듯 들려온다. 잠깐 여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 내가 더 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여몽환포영」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신”(文身)처럼 새겨넣은 그것은 “어둔 밤의 해변”의 “젖은 모래 위” 하나의 형상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에는 지워지고 사라질 글쓰기. 꿈이 그렇듯, 허깨비가 그렇듯, 물거품이 그렇듯, 그림자가 그렇듯. 어른거리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으로 피어올랐다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것. 설령 그것이 진짜 문신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몸은 어차피 스러지는 것, 몰락하는 것, 죽는 것. “진짜 죽음”이 오면 그것 역시 꿈처럼 허깨비처럼 물거품처럼 잊힐 것이다. 그러면 시 쓰기는 다 무엇일까. 저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조차도 결국 망각의 무로 돌아갈 것인데, 그 게송으로 시를 지어봤자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은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을 거니는 것과 같고, 시 쓰기는 어차피 파도가 들이쳐 지워 없어질 모래 위에 “여몽환포영” 하고 한 자씩 새겨 넣어보는 일이다. 세계의 무상(無常) 속에 스러질 것,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사는 절대적인 무(無)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불안을 사랑하는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불안을 사랑한다. 불안의 포로인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시를 짓는다. 문학을 한다. “불안은 가능성에 앞선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2) 무(無)에서 시작되어 무(無)로 흩어

  • 오경진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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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에 대처하는 화자들

불운에 대처하는 화자들 배민정 한때 유행했던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는 말은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발생한 ‘불운한 사건들’을 설명하는 가장 흔한 키워드였다. 마음에 드는 이성은 꼭 짝이 있고, 오랜만에 찾은 목욕탕은 정기 휴일이라는 식의 노랫말1)처럼 불운은 개인의 일상 속 ‘재수 없는 우연’에서부터, 갑작스레 발생하는 사회적 재난, 전염병, 범죄까지 아우른다. 이런 예기치 못한 불운을 맞닥뜨렸을 때, 개인이나 집단은 늘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왔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원인을 규정함으로써 고통을 위로받고, 같은 불행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는 이러한 사건들을 문제화하고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 특정 장치들을 동원한다. 가령 불운의 원인으로 초자연적 힘을 내세워 단숨에 공동체의 균열을 봉합하는 것이 ‘주술’이라면, ‘신정론(神正論)’은 사건의 원인을 사회 구조와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해 집단의 성찰과 개혁을 도모한다. 한편, ‘보험’은 사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피해 손익 측정과 보상 계약을 통해 신속한 사후 처리를 꾀한다.2) 이처럼 정치는 예상치 못한 불운을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다양한 통치 기술을 활용한다. 서로 다른 해법이 경합하는 정치의 장에서 시스템이 붕괴될지 모른다는 대중의 공포는 통제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또한 제도적 일상 안으로 안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인이 겪는 상실감과 두려움은 어떤 제도적 규범이나 보상금으로도 온전히 메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가 불운한 사건을 공적으로 의미화하여 체제의 정상화를 선언할 때, 문학은 그 수면 아래 방치된 개인의 실존적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정치의 공백과 마주한다. 이 공백 안에서, 크고 작은 불운에 빠진 시적 화자들은 그 불행을 계기 삼아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 구조를 감지하고, 새로운 주체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즉 화자들에게 있어 불운은 역설적으로 체제에 길들여진 존재들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주체화의 과정인 셈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불운의 대처법을 통해 제도화될 수 없는 고통이 시적 언어로 복원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 한 남자가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들어선다.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남자는 그동안 자신이 남들보다 적은 이발비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왜 자신만 만 원을 받느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숱이 없어서 금방 한다고.”(민구, 「거울 속의 신」,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아침달, 2021) 개인의 의지나 노력 바깥에서 마주하는 원치 않는 상황을 ‘불운’이라 한다면, 이 시의 화자는 불운한 사람이 맞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호감 가는 외모 조건 중에 적은 머

  • 배민정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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