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몸의 회화
- 작성일 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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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나혜석, 몸의 회화
홍지석
폭풍우가 지나갔다. 맑은 하늘빛이 들 때 그에 비치는 산수초목은 얼마나 명랑한가. 다시 엄동이 닥쳐왔다. 백설은 쌓여
은세계가 되고 말았다. 저 수평선에 덮인 백설은 얼마나 아름답고 결백하고 평화스러운가. 그러나 그것을 헤치고 빛을
보자. 얼마나 많은 요철굴곡이 있는가?(나혜석, 1932)1)
나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글을 좋아한다. 특히 나혜석이 쓴 감각적인 글들, 그러니까 자기 몸의 경험을 묘사한 글이나 본업이었던 화가로서의 경험을 담은 글들이 좋다. “빛의 요철굴곡”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참신한가! 나혜석의 글에서 몸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생생한 표현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 작가의 매력은 그림에 대한 묘사에서 빛을 발한다. 읽으면 곧장 기분이 좋아진다. 글쓴이가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쓴 글이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화가 나혜석이 자랑스러워했던 걸작 회화작품들은 지금 거의 모두 없어진 상태다. 당시 도록이나 신문에 그 그림들이 흑백도판으로 실려 있는데 역시 흑백사진으로는 원작의 느낌을 되살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런대로 작품들의 매력을 감지할 수 있다. 그 흑백도판들을 나혜석이 직접 쓴 감각적인 글들과 함께 읽으면 화가 나혜석의 진정한 개성과 매력에 조금이라도 근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 나혜석,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하고 온 後의 나」, 『三千里』 1932. 1, 전집, p. 490.
김용준 <남산풍경>, 1931(도판출처: 『동아일보』 1931년 4월 21일) [/caption]
화가의 감각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도록』(1924)에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가을의 정원(秋의 庭)>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입선작이다. 아쉽게도 원작이 사라져 지금은 흑백 도판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당신이라면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아무래도 “너무 빽빽해서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가을의 정원>을 두고 “시원시원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은 ‘가을의 정원’을 그린 풍경화인데 그것을 이 화가는 대상(가을의 정원)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상태에서 그렸다. ‘정원 밖’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정원 속’으로 들어가 그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화가는 절대로 “여백이 충만한” 시원시원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대신 나혜석은 정원 가까이에서, 또는 정원 속에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들을 그렸다. 따라서 여기에는 세부의 질감, 감각적 활기가 넘친다. 근원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1931년 동미전(東美展)에 출품한 <남산풍경>을 비교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풍경화를 쏙 빼닮은 이 그림은 멀리서 본 남산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의 ‘남산 풍경’은 확실히 나혜석의 풍경에 비해 “탁 트인” 시원한 전망을 제시한다. 하지만 나혜석의 <가을의 정원>은 김용준의 <남산풍경>보다 좀 더 감각적이다. 생기가 넘친다. 이 화가가 가까이에서 자기 몸으로 직접 감각한 것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무렵 나혜석이 그린 작품들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도록』에는 <봉황성의 남문鳳凰城의 南門>이 실려 있다. 이 해에 조선미술전람회 4등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역시 지금 흑백도판으로만 남아있다. <봉황성의 남문> 역시 <가을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화가와 대상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 아마도 나혜석은 건물 벽면에 바짝 다가가 그 벽면을 실제로 보았을(만져봤을) 것이고 그 생생한 경험을 그림에 담고자 했던 것 같다. 봉황성 남문 벽면의 생생한 질감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림은 답답해졌다.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눈은 쉴 틈을 찾을 수 없다. 이쯤해서 틀림없이 답답하다며 이 그림을 내칠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역시 그림에는 시원한 여백이 있어야 해!”
그런데 1920년대 초반 나혜석은 식민지 조선화단의 주목을 독차지했던 최고 수준의 역량있는 화가였다. 그런 화가가 자신이 그린 풍경화가 사람들에게 답답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나혜석이 대상에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 거기서 본 것들을 그려야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원한 여백을 포기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뭔가가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달큼한 맛_내 몸으로 직접 만난 세계
왜 나혜석은 풍경화를 그릴 때 그렇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경에 바짝 다가가야 했을까? 나혜석이 1926년에 그린 또 다른 풍경화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나정支那町>이라는 풍경화다. 이 작품은 만주의 지나정(支那町), 곧 사람들로 북적이는 '차이나타운'을 그린 풍경화인데 역시 원작은 사라지고 흑백도판으로만 전한다. 이 작품은 앞에서 본 <봉황성의 남문>(1923), <가을의 정원>(1924)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여백이 거의 없는 빽빽한 풍경을 선사한다. 나는 거기서 “갑갑하다”랄까 아니면 “정신없다(시끄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그림 안쪽 저 너머의 건물들과 나 사이에 있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나는 찬찬히 풍경을 관조할 수 없다. 차라리 그 북적이는 분위기에 휩쓸려 있는 것 같다.
이 그림은 나혜석이 ‘지나정’ 한복판에서 그린 것이다. 실제로 나혜석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 그림은 “지나(支那) 기분이 충만하여 있는 시가” 또는 “술집패가 남색, 홍색 합한 것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에 이끌려 그리게 된 작품이다. 물론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나정 한복판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 험난한 과정을 나혜석은 이렇게 묘사했다.
어떻든 하루 아침 12호에다가 그리기를 시작하였다. 과연 콧물 눈물 흘린 아이들로부터 암내가 쏟아져 나오는 중국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우리를 짓는데 정신이 아득하여졌다. 게다가 만주의 명산(名産)인 바람이 휙휙 지나가자 마차 바퀴에 튀어 오르는 흙먼지가 쏵쏵 불어들어오면 한참씩 눈을 감았다가 뜰 때도 있었다. 나중에는 입에서 모래가 썰컹썰컹 씹히고 코에서는 말똥내 쇠똥내가 물큰물큰 나온다. 이렇게 오전 9시에서 10시까지의 광선으로 3일간을 겨우 대강만 사생해가지고 더 다니기가 너무 끔찍스러워서 더 못가고 세세한 것은 집에서 고치고 만들고 하였다.2)
이 묘사는 매우 감각적이다. 이렇게 풍경 “속”에 있으면 풍경 “밖”에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나혜석은 오로지 대상 속에서 대상과 더불어 있을 때만 “달큼한 맛”3)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 달큼한 맛을 느끼려면 결국 그 속에 들어가야 했다. 오로지 거기서만 맡을 수 있는 끔찍한 냄새들이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그녀는 그 달큼한 맛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혜석의 말대로 “호가호식에 편한 거처에서 일생을 괴로움 없이 지내면 그 무엇에 유쾌한 맛을 볼 수 있을까?” 결국 나혜석이 대상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건 자기 몸으로 그 대상과 만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혜석은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듣고, 자기 코로 냄새 맡고 자기 손으로 만지고 싶었기 때문에4)풍경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다.
2)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 『조선일보』 1926년 5월 23일, 나혜석기념사업회, 서정자 편 『원본 나혜석 전집』, 푸른사상, 2013(이하 전집) p.488.
3) 나혜석, 위의 글, p.562.
4) 그 자리에서 몸의 감각들은 서로 통하는 경향이 있다. 시각과 촉각, 시각과 후각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나혜석이 『신여성』 1924년 7월(전집, p. 273)에 발표한 「만주의 여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까만 얼굴 속에서 눈알만 번쩍거리는 중국 노동자가 두 팔을 쫙 벌려서 흙부대를 잔뜩 실은 외바퀴 차 자루를 쥐고 …찌걱찌걱 끌고 간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하고 그의 두 팔의 힘줄은 있는대로 뚜렷이 나타난다. 아아 더워. 그 삐걱삐걱하는 무겁고 괴롭고 강한 소리만 들어도!”
흐늘거리는 시대의 신경을 죄여줍시다
이쯤해서 192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짚어봐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나혜석이 근대 최초의 여성화가였다는 점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와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당대의 엘리트 예술가였다. 이 최초의 여성화가는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적 사회가 못마땅했다.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 강제한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듣고도 못 들은 체 하고 말 없어야 잘 산다”는 식의 요구 내지 “시집가서 벙어리로 삼년, 장님으로 삼년, 귀머거리 삼년”5)따위의 부당한 요구에 이 화가는 분노했다.
벙어리, 장님, 귀머거리로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들이 요구한 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귀로 듣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혜석은 조선의 여성들에게 “암흑을 명랑화하기 위해 어두침침한 골방에서 나오라”고 권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화가에게 골방에서 나와 밖에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그리는 풍경화는 ‘해방’의 미술이었다. 따라서 나혜석은 조선 여성들에게 화가가 될 것을 권했다. “우리의 눈에서 우리의 손끝에서 우리의 만들어내는 예술 우에서 저 흐늘거리는 시대의 신경을 죄여줍시다”6)나혜석에게 성(性)의 해방은 무엇보다 몸의 해방이었고 몸의 해방은 신경(감각)의 해방을 뜻했다. 어두컴컴한 방에 있다가 눈부시게 환한 바깥 세계로 나올 때 내 몸, 내 오감(五感)이 경험하는 저릿저릿한 떨림을 여기에 빗댈 수 있을까? 또한 화가가 되어 그 떨림과 진동을 화폭 위에서 증폭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술의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의 심장이 벌떡거려지지 않습니까?”라고 그녀는 물었다.7)하지만 나혜석이 빛과 색채, 냄새로 가득한 세계를 온 몸으로 감각하여 그린 1920년대의 풍경화들은 지금 대부분 어두침침한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상태다. 기막힌 아이러니다.
5) 김건의, 「은율지방동요」, 『동아일보』 1923년 11월 18일.
6) 나혜석, 「女子美術學舍-畵室의 開放」, 『三千里』 1933년 3월, 전집, p. 600.
7) 나혜석, 위의 글, p. 600.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
대상을 너무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갑갑하고 어지럽고 정신없다. 나혜석의 풍경화를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의 국부적 호감으로만 화작(畵作)”8)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적당히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뒤로 물러나는 일은 게다가 많은 장점이 있다. 대상과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지면 가까이에 있을 때나 그 안에 있을 때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말이다. 따라서 전체에 대한 통찰을 얻으려면 충분히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다. 게다가 대상과 충분히 거리를 두고 물러선 자리에서는 전체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한 ‘관조와 사색’을 누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언제나 일종의 ‘진퇴양난’의 상태에 있다. 어떤 딜레마에 빠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게다. 그를 괴롭히는 질문은 “가까이 다가갈 것인가? 아니면 멀리 물러날 것인가?”이다. 또는 “개별과 순간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전체와 영원을 중시할 것인가?”이다.
양쪽 다 장점이 있다. 풍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가의 감각활동은 활발해진다. 그가 그리는 풍경화는 필경 “감각적인 풍경화”가 될 것이다. 반대로 뒤로 물러날수록 화가의 인식활동이 활발해진다. 이 경우 그의 풍경화는 “사색적인 풍경화”라는 평을 듣게 될 것이다. 미술비평가였던 윤희순(尹喜淳 1906~1947) 선생의 표현을 빌면 전자는 ‘열정의 회화’이고 후자는 ‘이성의 회화’이다.9)
그렇다면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는 어디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려야 할까? 일찍부터 나혜석은 이 문제에 매달렸다. 나혜석은 이렇게 물었다. “이 몸을 어떻게 서야 할까?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10)일단 너무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신경을 죄여주는” 감각활동과 그것을 “내 정신의 것으로 만드는” 인식활동을 다함께 할 수 있는 적당한 자리가 있을까? 그런 자리를 찾기 위해 나혜석은 풍경에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서 보았다. 물론 이 때 지나치게 멀리 물러날 수는 없다. 대상 속에서 대상과 더불어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달큼한 맛을 절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고심 끝에 택한 자리에서 그린 풍경화는 종종 “애매하다”거나 “어정쩡하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나혜석이 1925년에 발표한 <낭랑묘娘娘廟>는 만주 안동현(단둥)의 오래된 건축물인 ‘낭랑묘’를 그린 것인데 나혜석이 찾고자 했던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풍경화가의 자리를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 그녀는 건물로부터 적당히 물러난 자리를 택해 화폭 안에 공간 전체를 아우를 수 있었다.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포착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가까이에서만 볼 수 있는 세부의 질감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대의 비평가들에게 이 그림은 뭔가 어색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일례로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은 이 작품을 두고 “집과 집 사이에 있는 나무가 웃음거리가 되었다”11)고 평했다. 다가가는 일과 물러나는 일, 또는 근경(近景)과 원경(遠景)을 하나의 화면에 종합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8) 김기진, 「제6회 선전 작품 인상기」, 『조선지광』 1927년 6월, 윤범모, 『화가 나혜석』, 현암사, 2005, p. 176. 재인용.
9) 윤희순, 「제10회조미전평(5)」, 『동아일보』 1931년 6월 7일
10) 나혜석, 「경희」, 『女子界』 1918년 3월, 전집, p.165.
11) 김복진, 「제4회 미전인상기」, 『조선일보』 1925년 6월 3일
나혜석 <낭랑묘娘娘廟> 1925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오랜 고민 끝에 이 화가는 마침내 특별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천후궁天后宮>은 나혜석 회화세계의 백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천후궁’은 이 무렵 나혜석이 거주했던 안동현(단둥) 원보산 공원에 있던12) ‘천비’의 사당이다.
사당의 주인공은 천비, 또는 천후낭랑이라 불리는 중국 송(宋)나라 때 여성이라고 한다. 그녀는 “눈이 멀어서 신을 불러 구함을 구하다가 20세의 꽃다운 나이를 최후로 죽고 만” 여성이다.13)“눈 먼 여성”에 대한 연민이 유달리 강했던 나혜석이 그 눈 먼 여성을 기리는 사당을 그린 것이 바로 <천후궁>이다. 이 풍경화가 특별한 것은 풍경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전망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目)처럼 둥글게 개방된 출입문 덕분이다. 여기서 나는 바로 눈앞에 있는 담 벽의 생생한 질감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로부터 답답함이나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문 안쪽 개방된 영역으로 시선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가까운 풍경과 먼 풍경은 한 작품에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게 됐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단번에 ‘전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지금 보이지 않는 담 너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을 보려면 상상을 통해서나마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출입문 바깥에 있는 이상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아예 둥근 출입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그러면 이제 출입문 바깥쪽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혜석 <천후궁> 1926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천후궁>에서 화가가 택한 자리는 결정적인 자리가 될 수 없다. 매우 애매한 자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바로 그 애매한 자리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전에 본 것과 그 다음에 보게 될 것을 함께 고려하게 만든다. 따라서 적절한 자리를 찾는 일, 보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내 눈으로 보는 일을 결코 중단할 수 없다”는 나혜석 특유의 신념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나혜석은 “집에 가져다 놓고 멀리 보고 가까이 보고 뒤집어 놓았다가 눈을 새로 해 가지고도 보고 다른 방에다가 놓고도 하야 잘못된 것을 알아내려고 고심”하면서 그 구도를 얻었다.14)이렇게 내 한 몸을 계속해서 움직이며 보는 일을 나혜석은 “나를 잊지 않는 행복”에 비유했다. 반대로 몸의 요구(감각)와 무관하게 전개되는 관념적 인식과 생활에 대해 나혜석은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땅히 아껴야 할 반드시 사랑하여야 할 우리 몸을 그렇게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굴려 왔으나 지금 앉아서 과거를 회억하니 끔찍스러워 내 뼈와 살에 대하여 눈물을 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15)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혜석은 “어서 속히 내 한 몸이 있는 것을 확인하여야” 하며 그 몸을 “남의 손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남들이 보라는 데로 보지 않고 내 몸으로, 내 자발적 의지로 보겠다는 선언이다. 해방의 선언이다.
12) 장성식, 「월강 이역의 국제도시(8) 산업은성한 안동현」, 『동아일보』 1927년 5월 1일.
13) 나혜석의 설명에 따르면 천후궁이 세워진 내력은 다음과 같다. “그 후 종종 해상의 영험이 출현하므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이 다 崇祭하여 기도를 하면 즉시로 풍랑이 잦아진다고 한다. 명(明)의 永樂중에는 封하여 천비라 하고 廟를 京師에 세우고 후에 이르러 격을 進하여 천후라 칭하였다”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 『조선일보』 1926년 5월 21일, 전집, p.559.
14)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 『조선일보』 1926년 5월 22일, 전집, p. 560.
15) 나혜석, 「나를 잇지안는 행복」, 『新女性』 1923년 11월, 전집, p. 464.
거울 앞, 경희
나혜석 단편소설 『경희』(1918)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흥미로운 서술이 등장한다.
경희는 제 몸을 만져본다. 왼편 손목을 바른편 손으로, 바른 편 손목을 왼편 손으로 쥐어본다. 머리를 흔들어도 본다. 크지도 않고 조그마한 이 몸……이 몸을 어떻게 서야 할까?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16)
인용문에서 화자(경희)는 방금 전까지 만져지던 것(왼쪽 손)이 만지는 것이 되고, 방금 전까지 만지던 것(오른 손)이 만져지는 독특한 경험을 말한다. 『경희』에는 이와 유사한 묘사가 많다. 다음은 보는(보이는) 몸에 관한 서술이다.
“그러면 내 명칭은 무엇인가? 사람이지! 꼭 사람이다” 경희는 벽에 걸린 거울(休鏡)에 제 몸을 비춰 본다. 팔도 들어보고 다리도 내어놓아 본다. 분명히 사람 모양이다. 그러고 드러누운 탑실개와 굼벵이 찍으러 다니는 닭과 또 까마귀와 저를 비교해 본다. 저것들은 금수, 즉 하등동물이라고 동물학에서 배웠다. 그러나 저와 같이 옷을 입고 말을 하고 걸어 다니고 손으로 일하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라고 배웠다. 그러면 저도 이런 귀한 사람이다.17)
인용문에서 경희(의 몸)는 보는 일과 보이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경희는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표현을 빌면 “보는 사람이 그가 보는 것 속에 내존된 자아” 또는 “느낌의 행위(sensing)가 느껴진 것(the sensed)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아”에 해당한다. 18)이렇게 능동과 수동, 주관과 객관이 겹쳐진 몸의 상태에 집중하는 경희는 화가 나혜석과 통할 것인데 그 화가는 자기 몸의 현실에 부합하는 작품을 지향했다. 또는 회화를 통해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실제로 나혜석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그림과 나를 따로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경우”19)를 지향했다. 이 화가는 즐겁게 그 탐구에 임했다. <봉황성의 남문>(1923)에서 <천후궁>(1926)으로 이어진 전성기 나혜석 그림들은 그 값진 결실들이 아닌가!
16) 나혜석, 「경희」, 『女子界』 1918.3, 전집, p.165.
17) 나혜석, 「경희」, 『女子界』 1918.3, 전집, p.169.
18) M. 메를로-퐁티, 오병남 역, 『현상학과 예술』, 서광사, 1983, p.291.
19)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 『조선일보』 1926, 5, 20, 전집,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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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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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공화국 문학 선언제6공화국 문학 선언1) ― 사변적/편집증적 한국문학 시론 ― 윤재민 1. 한국 문학사라는 유령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다. 아주 진부한 대목으로 운을 띄우며 글을 시작할 테니까. 심지어 다음과 같이 약간의 패러디까지 가미해서. 하나의 유령이 한국 문학계를 떠돌고 있다. 한국 문학사라는 유령이. 지금부터 관철하고자 하는 사안을 유령론만큼 적확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는 내가 문학과 관계하는 진부하면서도 일견 특수한 위치에서 나타난 ‘문학사적 충동’의 발로이다. 그것은 기존 문학사 서술에 대한 모종의 불만에 기인하는데, 그렇다고 문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기존 문학사와 전혀 다른 시간성에 한국문학을 내던지고 싶다는 충동에 가깝다. 내가 이런 독단적인 문학(론)을 욕망하게 된 계기는 아래의 대목에 사로잡히고 나서부터다. 한국 문학사가 개별 문학이라는 의미는 한국 문학사의 기준이 한국사 총체 속에 있다는 사실의 소박한 인식을 뜻하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볼 때 이러한 진술은 편협한 지방성, 파행성의 노출로 오해되기 쉬우며 심지어는 배타적 독선적 쇼비니즘 내지는 문화의 보편성을 압살하는 사고방식으로 간주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체 민족의 행복에 감성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문화 파악력은 역사의 추진력이 될 수 없을 것이다.2) 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1973)의 한 대목이다. 두 사람의 문학사 시도는 임화 이래 이식문학론의 성취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민족 공동체의 근대적 주체성을 한국문학 성립의 당위로 삼은 ‘총체적 민족 문학사’의 한 전범으로 남았다. 근대 맹아론으로 간편하게 정리되기도 하는 『한국문학사』의 총체적 관점은 이 시대에는 설명력의 한계가 뚜렷하다. 이식문학론이든 근대 맹아론이든 간에, 더 이상 한국문학에 대한 총체적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상식이다. 내가 『한국문학사』에서 매혹된 사안은 『한국문학사』의 서술 방법이 아니다. 문학사 서술의 당위를 ‘주체 민족의 행복에 감성적으로 작용하는 문화 파악력’에서 구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공동체의 행복과 역사 운동의 작동이 양립할 수 있는가. 위 인용문에 표명된 ‘행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 모호한 대목에 사로잡혀, 그 의미를 내 식대로 번역해본다.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는 행복을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할 수 없는 가치로 본다. 폭력과 모순으로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가 억압되고 핍박받을(말 그대로 행복을 박탈당할) 잠재성이 상존하는 가운데, ‘현세의 행복’이란 이를 망각케 하는 허위이자 기만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아도르노 같은 현자가 아니라면 누가 ‘현세의 행복’을 쉬이 포기하겠는가. 그 양태가 허위이든 기만이든, 우리는 각자의 행복을 추구한다. 나의 행복이 누군가
- 윤재민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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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포기 : 남성적 돌봄의 주권을 반송하는 소설적 방법들상속 포기 : 남성적 돌봄의 주권을 반송하는 소설적 방법들 김건형 최근 소설장에는 가부장이 남긴 재산과 권력, 그리고 그에 딸린 ‘돌봄’의 형태를 상속할 것인가를 두고 머뭇거리거나 항의하는 소설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가령, 성해나의 「스무드」1)는 광장의 ‘아스팔트 극우’ 노인들과 낯선 조우를 통해 한국 사회 고유의 가부장적 희생과 돌봄이 어색한 형상으로 되돌아온 경위를 되살펴 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와 평론의 주목을 받았다. 직접적으로 동시대의 광장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가 구축해 온 고유의 남성적 돌봄과 그 유산을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후속 세대의 곤혹과 고민을 다루는 소설들이 연작에 가깝게 제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계절의 소설에서 “남성의 몸이 시들시들한 수동으로 묘사되”는 “허약한 남성성”이 자주 탐구되고 있으나, 그것은 “서사적 분출구 없이 사실적이기만 한 재현”이었다는 날카로운 진단이 한 입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2) 어쩌면 그 수동적이고 허약한 남성들이 서사에서조차 분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 자체가 동시대의 젠더·정치적 풍경에 대한 적확한 발견일지도 모른다. 다만, 굳이 남성(성)의 분출구를 대신 찾아주는 것보다는, 그토록 서사적 분출, 즉 ‘건강한’ 해법을 찾을 수 없는데도 자주 발견되는 남성(성) 재현이라는 패턴에 주목하는 것이 증상적인 독해가 될 것 같다. 할아버지의 유산, 역사를 다시 마주하는 오싹함 서장원의 「뱀이 있는 곳」3)과 김지연의 「무덤을 보살피다」4)는 모두 사촌지간인 손자, 손녀들이 죄 많은 할아버지의 무덤과 적폐를 ‘파묘’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유산이 과연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실체적인 힘이 있는 것인지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실은 그저 자신이 과민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도, 끝내 각자의 집안이 숨겨왔던 비밀의 핵심에 다가가서 그것을 기꺼이 파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지연된다. 「뱀이 있는 곳」은 할아버지의 유산이 있는 ‘솔잎산장’으로 가는 길 내내 “하진에게 잘못한 사람들”(183쪽)에 대한 생각을 하며 시작한다. 성폭력 무고죄로 고발당한 하진은 자신을 도와줄 직장 동료들의 증언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하면서 하진을 외면하고 있다. 이를 전해 듣는 정인은 “그런 비겁한 선택들이 세상을 망친다고 생각”(184쪽)하며 부아가 치민다. 명백한 성추행 혐의를 고발해도 이를 상업화하는 법조계 자본의 힘에 의해, 깔끔하게 무죄판결이 나고 마는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잘못한 사람들과 비겁한 선택들을 회상해 보면 그뿐만은 아니다. 사소하게는 대책 없이 낭만적이고 무능한 부모들도, 좋은 대학에 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 기숙형 재수학원에서 만났던 사람들
- 김건형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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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2)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2) 최선교 김혜순이 말하는 여성성과 그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 1990년대 여성적 글쓰기 담론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서며 민족민중문학의 하위 범주로 여성문학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은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총 17호에 걸쳐 발간된 여성문학 무크지이다. ‘또문’은 여성운동이 가시화되던 1980년대에 유학파이면서 사회과학 분야에 있던 여성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지만, 동인의 구성원으로서 주부와 대학생까지 포함하면서 불평등한 성 문화를 타개하기 위한 대안 문화를 실천하고자 한 단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또문』의 초기 호에서는 가사노동이나 육아 등 ‘여성’의 재생산 노동의 전면적인 재사유를 촉구하는 기획이 돋보인다. 『또문』이 추진했던 여성적 글쓰기 담론의 의미와 한계를 살펴볼 때 김혜순 시론의 여성성 개념이 갖는 특이점이 드러난다. 1980년대 여성문학이 민족민중문학 진영의 하위 범주로 인식되었던 것과 달리, 1990년대에 들어서 여성문학 진영의 관심사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계급, 민족을 포함하여 정체성의 복합적 성격을 탐색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특히 『또문』이 여성적 글쓰기에 보인 관심은 남성중심적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문화적 실천 대안의 일종이었다. 1992년 발간된 『또문』 9호는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를 특집 주제로 내걸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남성의 말과 전쟁을 벌이려고 남성의 말에 맞추는 것, 그 말로 많은 것을 말할수록 자신의 언어를 더욱 잃게 되는 그 자가당착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가두어 두고 싶지 않다. (...) 프랑스에서는 언어와 정신분석학을 연결하는 매우 이론적인 논의로 ‘몸으로 글쓰기’의 단어가 최근에 크게 부각되어 왔다. ‘몸으로 글쓰기’라는 것은 결국 기존의 언어가 여성의 체험을 풀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여성들이 해온, ‘머리’만도 아니고 ‘가슴’만으로도 아닌 온몸으로 쓰는 모반 행위라 할 수 있다.”1) 이 글은 여성이 부당한 억압을 향하여 억울하다는 외치는 주장을 잠시 멈추고, 근본적으로 여성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재사유해보자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성중심적 권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사용한다고 여겨지던 말들은 이미 남성중심적 의미 체계에 의해 오염된 것이므로, “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 최선교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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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1)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1) 최선교 김혜순은 2002년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을 시작으로, 2017년 『여성, 시하다』를 거쳐 2019년 『여자짐승아시아하기』, 2026년 『공중의 복화술 : 문학은 어디서 시작할까?』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여성시를 대상으로 한 시론을 세워왔다. 명백히 여성과 여성시를 위한 시론이다. 그녀는 여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는 여성시에 대해서 말한다. 이 진술에 대해 해명하거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없다. 그녀의 시론은 기존의 ‘여성적 글쓰기’ 범주에 속하면서 ‘들림’이나 ‘바리데기’ 등의 동양 무속적 상상력을 통해 개성을 확보한다. 한국에는 ‘여류시’라는 말이 있(었)다. 김혜순은 생물학적 성차 개념에 기반을 둔 ‘여류시’라는 일종의 멸칭으로부터 ‘여성시’의 범주를 구분하려고 했다. 시론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님을, 공중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지만 어떤 순간에는 생생하게 발악하기도 하는 구성적 개념임을 설명하고자 했다. 김혜순의 시는 종종 난해하다거나 초현실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 본인은 그러한 평가가 ‘현실’이나 ‘환상’의 개념을 남성적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현실이 무엇이고, 환상이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나의 시를 초현실이라고 부르는가. 그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여성이 현실이라면?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이 쓴 시, 여성시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발성기관, 새로운 발성법에 대한 해독이 필요”1)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구체적인 시 형식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2022년 11월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의 개정판을 펴내며 김혜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시는 여성의 형식을 발명한다. 면면히 내려오는 말하기 방법 말고 다른 말하기 방식 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가 여성주의적 발성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는 김혜순이 여성 시론을 적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말하기 방식을 통해 ‘여성시’의 범주를 설계하고자 함을 암시한다. 단지 생물학적 여성에 의한 시가 ‘여성시’가 아니다. 여성이 말하는 시가 바로 ‘여성시’인 것이다. 시 형식에 대한 김혜순의 관심은 1990년대 한국의 ‘여성문학’ 담론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문학’을 둘러싼 담론들은 그 당시의─대부분 남성이었던─비평가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일 경우에만 미학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혜순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 시
- 최선교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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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하나비(花火)분노의 하나비(花火) ─ 구소현론1) 하혁진 썩은 과일에 사랑을 담아 건네면 신선해진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 「요술 궁전」 중에서 * 오랜만이다. 이런 소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한동안 뜸했던 것은 사실이어서, 구소현의 소설을 읽는 내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잔뜩 화가 난 소설이라니. 이렇게까지 눈치 안 보고 나쁜 소설이라니. 분노의 감정이 차갑게 벼려진 폭력적인 장면들이 설령 보기 좋은 (혹은 보고 싶은) 장면들이 아니더라도 어쩌겠는가. 뒤표지의 표현처럼 그 마음 역시 인간이 가진 ‘진짜’ 마음인 것을. 고백건대 분노가 가득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것이 불순한 마음임을 알면서도 적지 않은 해방감을 느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우리 소설이 그 화를 지나치게 참고 있다고, 너무 오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구소현의 소설에는 곪을 대로 곪은 마음의 종기를 터뜨리는 것 같은 장면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면. 은호는 피곤한 날에 꼭 꿈을 꿨다. 그녀는 꿈에서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죽였다. 평생 꾼 꿈 중에서 최고로 기분 좋은 꿈이었다. 흉기로 목과 가슴과 배를 수차례 찔렀다. 기어가는 도중에도 계속 뒤쫓아가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안면을 가혹할 정도로 가격했다. 눈알을 터뜨리고 광대뼈와 턱뼈를 으스러뜨렸다. 그 뒤 꿈에서 깨기 이전까지는 사람인지 연체동물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하게 시체를 훼손했다. 누군가 ‘꿈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묻는다면 은호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324쪽)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곤란하다. 조시 코언은 “우리는 분노하면 종종 공격을 연상하며, 심지어 둘을 혼동하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며, “하지만 공격은 분노와 달리 행동의 범주에 속한다”2)라고 짚어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구소현의 인물들은 느끼고, 행한다. 인용한 장면에서 은호는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극악무도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죽인다. 꿈이니까 괜찮다고? 그렇다면 소설은 현실인가 꿈인가. 은호가 말하는 ‘꿈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꿈속에 있는가 현실 속에 있는가. 일단은 이렇게 대답해 두자. 끝없는 분노를 생산하고 심지어 부추기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출할 출구는 마땅치 않은 상황, 즉 “분노와 공격의 병목 현상”3)으로부터 이 소설들이 나왔다. 감정은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
- 하혁진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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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 황석현 회색빛 갯벌, 우연히 스며든 사랑 박상영의 소설 세계 「대도시의 사랑법」 도입부에는 연인 규호와 연애를 시작한 지 200일이 지난 시점에서 규호가 홀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영의 실수로 규호 홀로 떠나게 된 여행에서 고영은 공항철도 창밖을 바라보다, 감정의 리듬과 직면한다. “나 홀로 공항철도를 탔다. 창밖으로 회색빛 갯벌이 계속 이어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대도시의 사랑법」, 184-185면) 이 짧은 문장은 연인 규호와의 단절 이후의 감정을 '슬픔'이나 '외로움'으로 바로 치환하는 것이 아닌, 반복되는 비어 있음, 스스로를 검열하는 감정적 카메라, 종종 회색빛으로 필름이 씌워진 삶의 프레임으로 보여준다. 고영은 ‘갯벌’ 속에 발이 빠지듯 감정적 침몰을 겪으면서도 공허에 침전되지 않으며 곧이어 감정적 전환을 시도한다. 섹시한 팝가수 카일리 미그노 앨범과 립밤.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립밤을 찾는 행동은 감정을 파국으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한 자기 정동의 능동적 복구 행위이다. 촉촉한 립밤을 바르며 감정의 표면을 다듬는 조심스러운 생존술로 읽을 수 있다. 입술은 말을 시작하는 신체 기관인 동시에 키스·식사·호흡 등 생존과 욕망의 경계 지점이다. 이는 사랑이 머뭇거리는 자리에서 지금 여기 다시 관계의 준비를 하는 미세한 제스처이다. 이는 관계를 살아낸 몸이 감정을 지속하려는 퀴어한 생존술이자 정동적 자기 조율 방식이다. 연인 규호와의 감정적 관계는 기계적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모르게 끝나가 보이지만, 여전히 감정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은 도래하지 않을 듯도 보인다. 이 글은 그러한 지속 불가능한 단일한 감정의 리듬, 끊어졌으나 끝나지 않은 애착, 그리고 삶을 살아내기 위한 감정적 생존술을 퀴어 정동1)의 관점에서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가 보여주는 감정의 구조, 감각과 기억의 귀환, 기쁨의 부재가 어떻게 문학적 윤리로 전환되는지를 추적해본다. 로런 벌랜트는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에서, 우리가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어떤 대상이나 관계가 오히려 그 삶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적 조건으로 변할 때의 정동 상태를 ‘잔인한 낙관’이라고 설명한다(윤조원·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24). 현대의 주체는 여전히 ‘좋은 삶(good life)’의 약속을 좇지만, 그 약속 자체가 자기착취적 생존을 강화하거나 정서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기도 한다. 박상영 소설 속 고영과 규호의 관계 역시 이러한 양가적 구조 안에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착을 통해 버티고 살아가지만, 그 관계는 사회적 제도와 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점차 유지되기 어려운 형태로 변하며, 그럼에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내부에 잔존한다. 바로
- 황석현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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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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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 박상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사라짐을 위한 유희사라짐을 위한 유희 —황유원론1) 오경진 그는 불안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밤의 해변에서 저기, 꿈(夢·몽)과 환상(幻·환)을 물거품(泡·포)과 그림자(影·영)로 새겨넣으려는 시인이 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떠밀리듯 들려온다. 잠깐 여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 내가 더 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여몽환포영」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신”(文身)처럼 새겨넣은 그것은 “어둔 밤의 해변”의 “젖은 모래 위” 하나의 형상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에는 지워지고 사라질 글쓰기. 꿈이 그렇듯, 허깨비가 그렇듯, 물거품이 그렇듯, 그림자가 그렇듯. 어른거리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으로 피어올랐다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것. 설령 그것이 진짜 문신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몸은 어차피 스러지는 것, 몰락하는 것, 죽는 것. “진짜 죽음”이 오면 그것 역시 꿈처럼 허깨비처럼 물거품처럼 잊힐 것이다. 그러면 시 쓰기는 다 무엇일까. 저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조차도 결국 망각의 무로 돌아갈 것인데, 그 게송으로 시를 지어봤자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은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을 거니는 것과 같고, 시 쓰기는 어차피 파도가 들이쳐 지워 없어질 모래 위에 “여몽환포영” 하고 한 자씩 새겨 넣어보는 일이다. 세계의 무상(無常) 속에 스러질 것,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사는 절대적인 무(無)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불안을 사랑하는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불안을 사랑한다. 불안의 포로인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시를 짓는다. 문학을 한다. “불안은 가능성에 앞선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2) 무(無)에서 시작되어 무(無)로 흩어
- 오경진
- 2026-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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