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하고 장난스런 노이즈
- 작성일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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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in문학]
‘여성, 노동’같은 전통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문체, 주체’와 같은 비평 키워드나 ‘번역, 상호텍스트성’같은 문학적 키워드, ‘환상, 무의식’같은 인접학문 그리고 ‘빅데이터, 가상현실’같은 미래용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학의 키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비평in문학]의 새로운 비평 기획입니다.
불온하고 장난스런 노이즈
송효정
1.
근래 사실주의적 사회영화들에서 사실성, 역사,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이란 굳건한 미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장과 법정은 최근 한국 영화에서 민주적 가치와 정의가 탐문되는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광우병 촛불집회(2008)와 광화문 촛불집회(2016-2017)를 경유한 광장의 정치는 공론장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갈망을 담은 사회파 영화 내지 실화 소재 영화를 통해 반영되어 왔다. 사법정의와 헌법적 가치에 대한 갈망은 법정영화에서 빈번히 재현되고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정치에 무관심했던 세속적 인간의 자각과 변화를 통한 계몽의 기획을 보여준다. <변호인>에서 <택시운전사> 그리고 최근 <1987>까지가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이다.
정치를 소재로 했지만 이들은 주류 상업영화적 기획 속에서 세심하게 조율된 내러티브 기반의 캐릭터 중심 영화들이며 사실상 탈정치적 영화들이다. 권력의 외설성이 드러나는 장면의 위험성을 뭉개기 위해 이들은 신파성, 코미디, 가족주의를 끌어들이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정의의 좌절과 변혁의 패배를 회고적으로 돌아보는 애도의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감성적으로 파고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에 대한 정동적 열망을 동력으로 삼는 경향을 통해 비폭력과 질서를 강조하는 합의 가능한 시민적 상식의 가치를 상업적 동력으로 삼아 이를 공감의 가치로 포장한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급진주의에 대한 부정, 혁명, 전복, 교란의 기피, 이들을 질서로 다스리려는 소프트한 계몽의 태도가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근래에 나는 IMF 이후 한국 영화의 사회적 상상력에 대한 학술발표를 통해 혁명에 대한 열망이 억압되고 코뮌에 대한 상상력이 부재한 채 이타주의적 공감을 요청하는 사회파 영화가 대두되고 있음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한국 사회에서 천만 관객을 기록한 사회영화의 대척점에서 검열 및 표현의 자유 논쟁과 연관된 영화들을 겹쳐 보았다. <자가당착>(2010)까지의 2000년대 이후 곡사형제의 괴란한 영화와 미술과 영화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정윤석의 근작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2017)와 같은 작품이다.
사실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에 긴박된 전자의 것들은 유기적인 것과 비장한 것이라는 한 쌍의 변증법적 조합을 세련된 상업성으로 위장할 줄 안다는 점에서, 예이젠시테인과 소비에트 내러티브 영화미학의 ‘세속적’ 후계자들일지도 모른다. 단일한 주인공을 거부하며 집단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드라마 <1987>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대개 이들은 지난 보수정권 시기에 검열에 대한 사고를 내면화하여 이를 웰메이드의 외견으로 은폐한다. 이러한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 즉 민주주의와 헌법적 가치의 상식적 지평이다. 한편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논쟁을 일으켰던 후자의 작품들은 정치적 소재에 편향된 프로파간다의 외양을 지닌 듯하지만 실상 교육하고 깨닫게 하며 거리를 두는 방식에는 관심이 없다. 곡사의 영화는 더더욱 내용보다 형식에 관심을 두는 아방가르드의 맥을 잇고 있으며, 정윤석의 작품은 프로파간다를 표방하여 프로파간다를 공격하는 작품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예술의 결과를 모방하는 키치(Kitsch)와 예술의 과정을 모방하는 아방가르드(Avant Garde)를 구분하였다. 그는 키치를 보편적 문해력의 산물이자 대중들의 도시화 및 산업주의와 함께 만들어진 대량생산품으로 보고 그 결과라 할 수 있는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대중예술을 허깨비로 보았다. 키치는 문화의 타락이자 아카데미화 된 시뮬라크라(simulacra)를 원료로 사용하며, 무감각을 환영하고 북돋운다. 키치는 스스로를 팔지만 그럼에도 거대한 판매장치가 키치를 위해 만들어져 있다. 물론 키치에도 다양한 수준이 있어, 일부는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위험스러울 만큼 높은 수준의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키치란 기만적인 것이다.1)
오늘날 사회파 영화는 이런 의미에서 키치 같은 것이다. 사실주의적 재현의 권능을 신뢰하는 사회파 영화들은 사실/허구의 분할선을 모호하게 뭉개면서 허구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들을 제시하며 사실의 유일성에서 이데올로기적 메시지의 정당성을 찾는 방식으로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상식, 민주주의, 정의에 대해 경건하며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이러한 영화들은 관객의 몰입을, 이해와 참여를 요청한다. 기본적으로 시장과 자본에 무심한 독립영화로 제작된 후자의 작품들이 품은 태도 즉 장난, 조롱, 부조화, 교란은 앞선 상식의 영화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가치이다. 아방가르드 경향에 가까울 후자의 영화들은 내용(정치)의 급진성보다 형식의 급진성에 관심을 둔 채 시장의 시뮬라크라를 폐기하며 혁명과 폭동의 무질서한 에너지 쪽으로 선회한다.
1) 클레멘트 그린버그, 「아방가르드와 키치」, 『예술과 문화』, 조주역 역, 경성대학교출판부, 2004, 13-33쪽 참조.
2.
바디우는 「현재의 이미지」에서 오늘날 민주주의가 보편적 찬가가 되었으며, 대의제 민주주의와 이것의 헌법적 조직화가 우리의 정치 생활의 무조건성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혁명의 이념이 부재하게 된 이후로 우리의 세계는 시장 민주주의라는 합의적이고 외설적인 이미지 하에 살게 되었으며 민주주의 자체가 물신화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유일하게 급진적인 비판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며, 이러한 비판을 이끌어낼 수 없는 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유곽에 머물고 말 뿐이라는 것이다.2)
그는 장 주네의 희곡 『발코니』에 등장하는 유곽과 봉기(혁명)의 관계를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로 해석한다. 여기서 문제는 민주적이고 시장적인 세계의 이미지들(유곽의 이미지들)이 지닌 미묘한 유연성과 매력적인 외설성 뒤에 숨은 벌거벗은 권력이 그 자체로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권력은 우리를 이미지로부터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이미지에 힘을 부여한다.
근래의 사회적 영화에서 이러한 외설의 이미지들은 고문실(<변호인>, <남영동 1984>, <1987>)과 금장로(<택시운전사>, <화려한 휴가>)로 대표된다. 그리고 이들을 극복하는 더 민주적인 개혁의 이미지로 법정과 광장을 제시하며 헌법과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 배후에 있는 벌거벗은 권력의 이미지를 관객은 알지 못한다.
더 민주적인 개혁이란 모두에게 편안하고 안전한 개혁, 바디우 식으로 말한다면 ‘포르노그라피적이지 않은’ 제안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위험하고 급진적인 비판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나와야 한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했던 장 주네는 사르트르를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이 두려워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겁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장 주네는 생애를 통해 이스라엘과 프랑스인과 비폭력저항주의의 편에 서지 않고, 팔레스타인과 알제리인과 블랙 팬서의 반란에 지지를 보냈다.
상식의 지평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합리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계몽적 기획을 내장한 오늘날의 사회파 영화들은 웰메이드로 포장된 채 정치의 심미화에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가. 주제에 대한 공감이 요청을 넘어선 강요가 될 때 정치적 올바름이 도덕적 순결성을 요청하는 종교가 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볼 시점이 되었다.
발터 벤야민은 2차 대전 당시 정치의 심미화를 꿈꾸었던 파시즘의 대안으로 예술의 정치화를 선언한 바 있다. 벤야민에 의하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원본성, 일회성, 진품성’의 물질적 특성을 지닌 아우라적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본래 종교적 제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던 예술의 특성인 아우라의 몰락으로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변화가 초래되었는데, 본래 가지고 있던 종교적 가치가 해체되고 예술의 정치적 기능이 등장한 것이다. 예술의 새로운 사회적 기능인 정치적 기능에 대항하는 예술의 기능으로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로 맞서는 공산주의를 예로 언급한다.3) 독일 파시즘의 예술 활용에서 정치의 심미화의 전형을 볼 수 있다면, 푸돕킨이나 베르토프 같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작품에서는 예술의 정치화의 전형을 찾을 수 있다. 벤야민 역시 대중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무기력에 상응하는 코뮤니스트 멜랑콜리의 상태를 벗어나 파시즘의 정치의 미학화에 맞서 적극적으로 미학의 정치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2) 알랭 바디우, 「현재의 이미지」, 『오늘의 포르노그라피』, 강현주 역, 북노마드, 2015, 18-19쪽 참조.
3)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벤야민 선집 2』, 최성만 역, 길, 2007, 92-96쪽 참조.
3.
“포르노그라피는 사물이 아닌 주장의 이름이다.”4)
4) Walter M. Kendrick, The Secret Museum: Pornography in Modern Cultur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7, p.31.
이 글에서 나는 전시의 영화가 아니라 경험의 영화, 공감의 영화가 아니라 수행의 영화를 기대하며, 합의 가능한 가치를 품은 시민사회라는 가상을 넘어서기 위해 포르노그라피와 프로파간다를 기능적으로 정의하며 사용할 것이다.
포르노그라피는 혁명과 같은 정치적 상상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린 헌트에 의하면 근대 초기 유럽에서 포르노그래피는 대부분 섹스의 충격을 이용해 종교적·정치적 권위를 비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특히 교회, 국가, 세속경찰과 대립하던 작가, 화가, 판화가 들이 포르노그라피를 만들어 왔다. 포르노그라피의 작가들은 이단자, 자유사상가, 난봉꾼 등 위험한 무리에서 나왔다.5) 칸토로비츠는 여전히 왕의 신체에 정치적 정당성이 부여되던 구체제 변동기에, 왕의 신체를 세속화하는 포르노그라피가 정치비판에 동원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경우, 단순히 국왕 혹은 왕족의 성적 음탕과 무절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정치 과정 자체가 육체와 성에 유비될 수 있는 의미론적 자질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근대 프랑스 혁명기 때 ‘발견’된 포르노가 보여준 정치적 외설성은 68혁명 세대의 성혁명이 보여준 음란의 근대성과 내재적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68혁명은 프랑스의 낭테르 대학에서 <빌헬름 라이히와 성본능>이라는 강연회로 인한 대학교 당국과의 투쟁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68혁명의 다음과 같은 강력한 모토들은 모두 급진적인 성 혁명적 선언으로 보인다. “아무 구속 없이 즐긴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섹스를 할수록 나는 더욱 혁명을 하고 싶어진다.”
(한편 제프리 슈나프는 ‘군중 포르노(mob porno)’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바디우적 의미의 포르노그라피적인 것과 대조적인 개념이자 유곽의 시뮬라르크와 유사한 의미로 보인다. 그는 군중의 정치적인 움직임이 파노라마 사진을 통해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미국의 대중정치에 포르노적인 스릴을 불러일으키며 활용되는 양식을 지칭한 바 있다.6)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의 사회파 영화들이 활용한 대규모 군중 신이 보여주는 감성 경험은 어쩌면 이러한 군중 포르노가 제공하는 것과 가까울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프로파간다 역시 혁명의 산물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전위로서의 정치와 예술에서 프로파간다는 매우 중시되었다. 프로파간다란 일반적으로 사상이나 가치의 전파를 통해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이자 반대하는 자에게 행하는 여러 형식의 대중적 설득으로 정의된다. 소련에서는 프로파간다의 매체 중 특히 영화의 경우에 주목했다. 레닌이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술은 영화라 한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대중이 영화를 장악하게 되면 대중계몽의 가장 강력한 수단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즉 영화가 테일러시스템에 이용됨으로써 자본주의적 착취의 수단이 되는 것에 대항하여 역으로 영화를 사회주의 권력이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5) 린 헌트, 「외설, 그리고 근대성의 기원, 1500년부터 1800년까지」,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전소영 역, 알마, 2016, 27쪽.
6) 제프리 T. 슈나프·, 「대중 포르노그라피」, 『대중들』, 제프리 T. 슈나프·매스 튜스 편, 양진비 역, 그린비, 2015, 38-42쪽 참조.
3.
우회로를 돌아왔다. 곡사형제의 <철의 여인>(2008, 단편), <자가당착: 시대인식과 현실참여>(2010, 장편)를, 그리고 정윤석의 <호치민>(2007, 단편),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2017, 장편)는 왕의 신체를 세속화하는 포르노그라피이자 영화를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보는 작품들이다. 지난 10년간 이적, 음란, 불온을 시비해 온 역사에서, 이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조야한 미장센과 B급 정서를 표방하고 있는 반문화적, 반상식적, 반민주적, 반웰메이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정부 혹은 국가라는 비인격적 개념과 왕(혹은 지도자)이라는 인격적인 개념을 어떠한 방식으로 사고하는가를 보여준다.
우선 두 개의 사건을 붙여 본다.
(1) 2011년 8월 14일 <자가당착>은 영등위로부터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는다. 제한상영가 등급은 있지만 실질적 제한상영관이 없던 현실에서 사실상 상영금지 처분과 다름없는 등급이었다. 반사회적, 반윤리적, 반국가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특별 계층에 대해서 경멸적 혹은 모욕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고, 개인의 존엄을 해치는 수준이 극심하다는 이유에서다.
제작 측에서 재심을 요구했으나 9월 22일 두 번째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 앞선 등급판정이 정치적 사유, 즉 영화적 주제의 불온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폭력성을 들고 나왔다. 특정인의 목을 자르고, 국가지도자의 비하폭력 등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마네킹의 목을 쳐 선혈이 낭자한 장면에선 실제처럼 느껴져 특정인의 살인 장면이 연상되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다.는 등 개인의 존엄을 윤리적으로 위반하는 폭력성과 자극성이 큰 이유가 되었다. 두 차례의 등급결정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특정인과 연관된 폭력적이고 음란한 장면이었다.
하나는 유력 여성 정치인으로 연상될 법한 여인의 목을 치는 참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속옷 입은 여성이 남자 석고상(분수대 아기처럼 생긴)의 성기를 만지는 장면이다. 이에 2012년 11월 1일 영화인들, 문화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함께 제한상영가 취소를 위한 행정소송에 들어가게 되었다.
2013년 두 차례의 재판 끝에 5월 10일 법원 1심 판결에서 원고 측이 승리하였고, 작품은 제작된 지 5년의 시간이 흐른 2015년 극장 개봉하였다.
(2) 박정근은 대학을 중퇴하고 아버지의 사진관을 물려받아 운영하는 사진사였다. 그는 권용만(이후 밴드 ‘밤섬해적단’ 멤버) 등과 함께 인디레이블 ‘비싼트로피’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2012년 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선전용 SNS 102개를 리트윗하고 ‘우리민족끼리’에 올라온 혁명가 등 30여 건을 트위터를 통해 유포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찬양 및 고무 죄로 구속되었다. 여기에 박정근이 직접 작성한 트윗 103건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박정근은 실제 자신의 트위터에 “김정일 카섹스”, “김정일 가슴 만지고 싶다” 등 김정일 우상화에 대한 희화화의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검찰이 구형한 혐의는 북한을 조롱하는 내용의 트윗을 올린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끼리’의 트윗을 그대로 리트윗했기에 이적표현물 내용을 전파하였다는 것에 맞추어졌다. 이 사건은 트위터에서 게시물을 리트윗한 행위로 구속된 세계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재판에서 박정근 측은 자신이 예전에 반(反)조선노동당을 내세우던 사회당 당원이었으며 북한 정권을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해 리트윗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학적인 의미로 올린 농담성 트위터임을 입증하는 것이 변호의 관건이었다. 2012년 11월 1심 결과 박정근에게는 징역 10개월과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판결의 요지는 ‘이적행위에 대한 미필적 인식’이 인정되므로 이적행위의 목적도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정근 측과 검사 모두 항소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2013년 8월 28일 상고심에서 박정근은 무죄혐의를 받았다.
영화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의 후반부는 박정근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및 재판 과정을 일부 다루고 있으며, 지난 2017년 8월 24일 개봉하였다.
4.
곡사형제의 영화는 전통적 예술론, 즉 동일성의 원리 혹은 ‘연민과 공포’를 야기하는 예술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이 사람을 보라>(2001), <반변증법>(2001), <시간의식>(2002). <정당정치의 원리>(2003),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의 축적하라>(2003) 등 초기작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어 왔다. <자살변주>(2007), <임계밀도>(2007), <Digression/Degression>(2009) 등 실험적 단편은 이미지와 노이즈를 임계점까지 밀고 나가는 아방가르드한 작품이었다. 위 두 경향을 뒤섞어 극단으로 몰아붙인 작품이 <고갈>(2008)이다.
이후에 나온 <철의 여인>(2008)과 <자가당착: 시대인식과 현실참여>(2010)는 얀 스반크마예르(Jan Svankmajer)의 아방가르드적인 초현실주의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실사, 애니메이션, 이미지 실험이 결합된 작품이다. 스톱모션, 콜라주, 실사, 의도적인 화면 스크래치 등이 활용되었다. <철의 여인>에서는 여성 마네킹이 주인공이며 정황상 특정 정당의 상징적 여성 정치인의 얼굴이 등장한다. <자가당착>에서는 경찰 마스코트인 포돌이 마네킹이 주인공이어서 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며, 이 작품에도 역시 특정 정당의 상징적 여성 정치인이 등장한다. 두 편의 작품에는 쥐의 탈 내지 쥐 인형이 등장하기도 한다.
정윤석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공공성과 개인의 행동권을 탐문해 온 감독이자 아티스트이다. 영화와 미술의 경계에서 실험적인 작품들인 <호치민>(2006), <별들의 고향>(2010), <먼지들>(2011) 등을 작업해 왔다. 장편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2013)는 지존파, 삼풍백화점, 국가적 살인, 문민정부 등을 키워드로 삼아 1990년대가 어떠한 시대였는가를 반추하는 작품이다. 정윤석은 2011년부터 6년간 밤섬해적단 공연 기록에 타이포그라피, 80-90년대 반공주의 푸티지, 북한 활극영화, 그래픽 이미지를 뒤섞은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초기 실험적 단편 <호치민>과 연관성이 깊다. 이는 한대수 9집 <고민> 수록곡인 ‘호치민’을 문자 위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곡사의 <철의 여인> 전반부에 여성 마네킹은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여러 자극을 받는다. 텔레비전에서는 1980년대 하드바디적인 육체성이 과시되고, 서가에는 혁명과 불온에 대한 서적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 한 책이 서가에서 떨어지자 마네킹은 그 책을 집어 들어 그 안에 꽂힌 옷본을 보고 재봉틀을 돌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마네킹에게 자극을 주고 어떠한 행동을 촉발하게 한 계기가 된 책은 빌헬름 라이히의 『성혁명』이다.
정윤석의 <호치민>은 한대수의 동명 곡에 과감한 타이포그래피와 간단한 이미지를 입힌 뮤직비디오 같은 단편이다. 한대수의 파격적인(?) 랩이랄까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호치민’은 하나의 코드만으로 진행되는 데스메탈 곡이다.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제국주의 등 큼직한 문자 타이포가 뜨지만 곡은 특정한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마지막에 ‘You’re a ~’로 반복되는 엔딩 부분에 제시되는 구엔아이콱, 판추치린, 구엔타트랑, 트란바람 등은 호치민이 정권의 사찰을 피해 사용한 가명들이다. 또한 청량리, 빨대기, 신발대 등은 한대수가 어감이 좋아 활용한 무의미한 단어들이다. 여기에 손문, 장개석, 박정희, 정태춘이 뒤섞인다. 제국주의와 미국에 맞선 공산주의 혁명가 운운하는 견고한 의미보다 가명들, 빨대기, 박정희, 정태춘이 혼재되어 버리는 기이한 뒤섞임 속에서 의미는 교란되고 엄숙주의가 조롱되고 있다. 한편 <철의 여인>에도 벽에 걸린 명예의 전당에 마르크스와 체 게바라 등 혁명가의 합성사진들 중에 박정희의 얼굴이 놓여 있는데, 이러한 맥락도 <호치민>의 노선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근작들에 주목하면 <자가당착>의 주인공 포돌이에게는 하반신이 없다. 작품의 전반부는 포돌이가 자신의 하체를 조립하려 하는데 끊임없이 쥐떼들이 나타나 이 작업을 방해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포돌이는 자신의 방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장면을 어머니에게 들키게 되는데, 이때 포돌이에게는 하체가 없기에 그는 자신의 성기를 상상지체로 감각한다. 한편 이후에 왜소한 성기 모양을 갖춘 하체를 조합한 포돌이 앞에 불타는 남근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자가당착>은 유력 여성 정치인의 목을 베는 장면을 넣었는데 이 장면은 앞선 <철의 여인>에도 등장한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검열 과정에서 작품의 성적 불온성보다는 특정 정치인을 연상시키는 인물에게 가해지는 정치적 불온성이 더 적극적인 시비에 붙여졌다는 사실이다.
한편 정윤석의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는 우파에게 종교 교리처럼 받아들여지는 가치를 조롱하는 작품이다. 가장 대표적인 모독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파의 상상력 속에서 종북주의의 상징인 김정일이다. 작품에는 김정일을 의도적으로 조롱하기 위한 격상의 표현들이 난무한다. 밴드 밤섬해적단은 노래 가사를 통해 민주주의와 진리를 내세우는 북한의 정치와 기독교의 논리를 비난하기도 한다.
이질적인 사물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곡사 영화의 경이로움과, 사운드와 이미지의 과감한 충돌을 보여주는 정윤석 영화 형식의 미덕까지 지면에서 다루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만 여기서는 이들의 작품이 오늘날 사회파 영화의 대척점에서 보여주는 바에 대해 주목하며 잠정적인 마무리로 나가겠다.
온건한 정치성과 공감 가능한 상식의 지평을 존중하는 상업적 사회파 영화와 달리 곡사와 정윤석의 작품들은 불온, 음란, 혁명의 뉘앙스를 이미지와 노이즈의 조합으로 보여주는 도발의 영화이다. 이러한 도발로 인해 작품은 제작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 논쟁 시비에 붙여지거나, 제작 이후 제도적 검열에 걸려들었다. 상업적 검열 과정을 내면화하여 외설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웰메이드 영화와 다른 지평에서 이들은 포르노그라피, 프로파간다의 형식이 지닌 열기와 에너지를 제어하지 않고 밀고 나간다. <자가당착>은 국가 존엄의 이미지와 공권력의 상징을 희화화함으로써 제한상영가를 받았다.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는 제도적인 영화 검열과 다른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상에 대한 제한과 검열에 대한 도발을 다루고 있다.
안전하고 위생적인 상업적 정치영화들이 교양 있는 시민의 영화가 되고 광장에서는 질서와 비폭력주의가 존중되어 왔다. 상식과 질서를 만들어내는 저변에서 제어되지 않는 에너지와 역동성을 지닌 실험들이 이루어져 왔으며, 이러한 불온하고 장난스러운 노이즈와 이미지가 이른바 ‘유곽의 이미지들’에 저항하며 우리 시대 표현의 자유와 검열에 대한 논쟁의 저변을 확장해 왔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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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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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비평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 박상현
- 2026-08-01
문장웹진 비평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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