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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과 3층 사이에서

  • 작성일 2019-03-01

[문학 더하기+(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안지영





서울대 미술관(MoA) - '여성의 일(Matters of Women)' 전시
제2회 여성아트페어(KWAF) - '고개를 들라, 이 많은 유디트들아' 전시
이소호, 『캣콜링』(민음사, 2018)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혹은 문학과 윤리는 꽤나 오랫동안 한국문단을 지배해온 틀(frame) 중 하나이다. 이를 틀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두 개념쌍이 무언가를 명확하게 만드는 동시에 무언가를 잘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세계를 보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틀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비가시적인 문제들이 두드러지거나 가시화 되어야 하는 문제가 꽁꽁 숨겨지기도 한다. 이에 따라 틀 설정은 공적 담론의 선점과 관련하여 첨예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동안 한국 문학장 내에서 미학과 정치를 둘러싼 논쟁은 기존의 틀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의 진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학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틀 짜기를 필요로 할 때 문단 내에서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담론들 간의 대결이 형성되어왔다.
2000년대 중후반 일어난 '시와 정치' 논쟁 역시 그러하다. 이 논쟁은 2000년대 들어 출현한 '미래파' 시가 '미학'과 '정치'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이 80년대 민중시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의 포문을 연 진은영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고 고백한다.1) 그리고는 랑시에르의 이론을 통해 그동안 한국문학사에서 가정되었던 정치성의 편협함을 지적하며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틀을 새로이 설정하고자 하였다. 미학을 미적 판단과 미적 감수성을 다루는 문제로 특수화시키는 대신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 문제로 규정함으로써 예술이 필연적으로 '정치'와 관계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최근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둘러싸고 문단 내에서 벌어진 논쟁은 '시와 정치' 논쟁을 정확히 뒤집어 놓은 양상을 띤다.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여성-서사들 '정치적으로는 올바르나' 충분히 '미학적이지 않다'는 진단이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이 문학의 자율성과 비평의 거리두기를 억압할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 문학과 문학비평이 자칫 경직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2) 요컨대 진은영이 '미래파' 시의 정치성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쟁점을 제기하였다면,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페미니즘 이슈의 재부상은 '미학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새삼 질문하게 한 셈이다.
한데 이 문제는 비단 문단에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지난 해 12월 27일부터 2019년 2월 24일까지 서울대 미술관(MoA)에서 열린 '여성의 일(Matters of Women)' 전시는 정치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 사이의 간극과 봉합되지 못한 균열을 보여주었다. 이 전시의 2층에는 2015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페미니즘의 재부상과 관련된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었다. 그 중에서도 티셔츠, 에코백 등 2층에 전시된 페미니즘 굿즈는 시의에 따라 한시적 응집성을 띠는 페미니즘 정치의 실천들과 관련하여 페미니즘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파급력을 각인시킨다. 굿즈는 기획·판매·소비되는 과정에서 일상에서의 실천을 촉구하며 이를 통해 여성들 간의 연대(혹은 '화력')를 증명한다. 나아가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 사태처럼 예상치 못한 파급효과로 이어진다는 점3)에서 페미니즘 정치의 운동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1)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년대 시에 대하여」, 『창작과 비평』142, 2008(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6쪽).
2) 같은 책, 265쪽.
3) 2016년 넥슨의 게임 캐릭터 목소리를 녹음한 김자연 성우가 '여자는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SNS에 올린 일을 빌미로, 이 성우의 목소리가 게임에서 삭제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2015년 페미니즘 재부상 이후 한국에서 여성 예술가가 경험한 최초의 백래시라 할 수 있다. 이후 상당수의 웹툰 작가들이 김자연 성우와의 연대 의사를 표시하자 "메갈리즘에 찬동하는 작가들을 거부합니다"라며 검열 캠페인 '예스컷' 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2층의 전시공간이 페미니즘 정치의 현재를 대변한다면 3층은 페미니즘 미술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3층에는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11명의 작가들의 회화, 드로잉, 사진, 영상 등 다양한 작업들이 전시되었는데, 문제는 2층과 3층의 전시 흐름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2층을 보고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된 전시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관람객의 기대를 3층의 전시는 만족시키지 못한다. 반대로 2층의 전시를 보고 실망했던 관람객이 3층에서야 '제대로 된' 전시를 볼 수 있었다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모순된 반응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혼란은 '여성의 일'이라는 전시명과 전시내용에 대한 미술관 측의 소개말에도 반복된다.


여성은 세대를 거쳐감에 따라 다양한 '일'을 겪습니다. 어떤 문제는 평생에 걸쳐 지속되기도 하지만, 어떤 문제들은 특정 세대에게 더욱 강하게 체감되기도 합니다. 공통적으로 여성이기에 겪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일들은 나와는 다른 성별이나 다른 세대의 문제로 여겨져 '나' 혹은 '우리'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간과되기도 합니다. 여성 미술가들 또한 여성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안은 그들이 여성이기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며, 그들은 그러한 체험을 표현함으로써 '예술가'라는 이름이 갖는 동질성에 균열을 냅니다.4) (밑줄_인용자)

4) 전시내용에 대한 소개는 서울대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http://www.snumoa.org/Moa_new/programs/exhibitions_review.asp?sType=c)


전시명만 보고 '여성의 일(works)'에 대한 전시인 줄 알았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을 뿐더러, 전시소개에도 일(matters)로 뭉뚱그려지는 여성의 경험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일'이라는 표현이 내용 소개에서는 '문제'라는 단어로 은근슬쩍 바뀌기도 한다. 여기에는 페미니즘 이슈를 '문제적인' 것으로 내세우기를 꺼려하는 어떤 망설임이 엿보인다. 여성이 소외되는 구체적 사회현실이나 그 안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 대신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장들이 대부분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여성이기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에 초점을 맞추어 '예술가'라는 동질성에 균열을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는 문장은 '여성 예술가'와 '예술가' 사이에 경계선을 그으며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 특수한 것으로 의미화 시킨다. "'예술가'라는 이름이 갖는 동질성"은 무엇이며 여성 예술가의 경험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동질성에 균열을 낸다는 것일까. 과연 여성 예술가들에게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예술가라는 정체성은 분리 가능한 것인가. 이에 따라 '여성의 일' 전시는 전시된 개별 작품들의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예각화 된 쟁점을 던져주지 못한다. 오히려 페미니즘 정치와 미학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2층과 3층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게 만든다.
'여성의 일' 전시만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제2회 여성아트페어(KWAF) '고개를 들라, 이 많은 유디트들아' 전시는 이러한 점에서 조금 더 수긍할 만한 접근을 보여준다.5) 가령 '양성평등'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여성의 일' 전시 팸플릿과 달리 "여성으로 읽혀왔거나 여성으로 살아온 작가들이 참여"한다며 퀴어 배제적인 양성 평등 담론을 비판하고 있다. 이 전시의 주제는 '살아남은 여성'이었는데, 이는 여아 낙태나 강남역 사건과 같은 여성에 대한 증오 범죄를 비롯한 페미사이드가 일어나고 있는 한국에서 '생존자'로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삶을 상기시키는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중의적 의미로 사용된다. 다음은 전시회 팸플릿과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전시회 '서문'이다.

5) 이 전시는 2019년 1월 26~27일까지 세종컨벤션센터 B1 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웹페이지(https://www.kwaf.space)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애끓게 허공에 울려 퍼지던 생존자의 부름에 응하여 여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였다. 기존의 정상성 규범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아남은 열여섯 몸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폭력적인 사회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열여섯 여성들. 살아남은 숨을 날카롭게 내쉬며 모든 이분법적 경계의 목을 자르는 열여섯 유디트들. 이들은 남성이 차지해 온 미술의 역사를 비집고 들어가 남성의 이름으로 쌓아올려진 역사의 숨통을 끊기 위해 오늘도 갤러리에 발을 디딘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도시를 구한 유디트처럼, 남성에게 빼앗긴 예술의 현장을 되찾기 위해 오늘도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든다. (밑줄_인용자)


여기서 전시 참여 작가들은 "모든 이분법적 경계의 목을 자르는 열여섯 유디트들"이라고 호명되며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를 전복시킨다. 나아가 이 전시회는 "남성의 이름으로 쌓아올려진 역사의 숨통을 끊기 위해", "남성에게 빼앗긴 예술의 현장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투쟁의 장으로 의미화 되며, 이는 전시 포스터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으며, 정치적 여성 예술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는 모토로 이어지고 있다. 이 전시는 정치와 미학의 경계선을 허물며 급진적인 '정치적 여성예술'을 모색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거리두기도 없다. 그들에게 '예술-하기'란 곧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연화 된 젠더 폭력에 저항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예술은 명사에서 동사로 변용되며 '무기'로서의 전위적 성격을 획득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젠더 이슈의 부상과 관련해서 정치와 미학에 대한 새로운 틀을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을 숙고하게 된다. 제2세대 페미니즘의 주요 의제였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는 여성의 경험을 정치 구조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 대한 틀 자체를 바꾼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와 남성성/여성성의 성별 이분법에 의해 작동되었던 위계적 민주주의를 대신하여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의 도래를 촉구하는 것이다.



최근의 시집 가운데 이소호의 『캣콜링』(민음사, 2018)은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접근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경진이'로 지칭되는 '타자화 된 자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기 삶을 오브제화 하는 한편, 자신의 가족('경진이네')을 대상으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미러링(mirroring)으로서 가족로망스를 활용하고 있다. 이 시집에서 적대의 전선(戰線)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패러디의 주체이자 대상인 '우리'의 분할선이 어디에 그어지느냐에 따라 그 싸움의 양상이 달라진다. 이 시집은 '우리'라고 뭉뚱그려지는 관계 안에서도 불화의 기운을 감지해내며 '우리' 안에 있는 왜곡된 권력 구조를 직시한다.


불행히도 엄마의 자궁은 1989개의 동생을 낳은 후로 늙고 닳았다
젖을 빠는 대신 우리는 자궁에 인슐린을 꽂고 매일매일 번갈아 가며 엄마 다리 사이에 사정을 했다
그때마다 개미가 들끓었다

잘 들어 엄마
엄마는 이제 여자도 뭣도 아냐
내가 이렇게 엄마 다리 사이를 핥아도 웃지를 않잖아
봐 봐
이렇게 손가락 세 개를 꽂아도 느낄 줄 몰라 엄마는
― 「경진이네­거미집」 중에서


딸을 강간하는 아버지가 발화주체로 등장하는 김언희의 「아버지의 자장가」(『트렁크』, 1995)의 충격과 비교하면, 이소호의 시가 주는 충격은 조금은 낯선 것일 테다. 두 시 모두 근친상간을 암시하고 있지만, 「경진이네­거미집」의 경우 딸에 의해 어머니가 강간당하고 있다. 이 시는 가부장제에 공모하는 주체로서 어머니를 호출하며 그녀를 단죄한다. 딸들은 엄마를 모욕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지만 이것이 이러한 모녀관계는 이 시에 달린 벨벳거미에 대한 각주에서 드러나듯 대를 이어 내려오는 멜랑콜리적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6) 상징적 모친살해에 대한 욕망이 변형되어 나타난 「경진이네­거미집」을 비롯해 가부장제에 연루되어 있는 가족구성원에 대한 분노는 폭력적인 언설로 표출된다. 이들은 서로를 먹잇감으로 삼아 혐오의 정동을 분출한다. 가부장제 안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작동시키는 것은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점이나 그 안에서 강요되는 딸, 언니, 여동생으로서의 역할분배가 얼마나 서로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지가 되풀이된다.7) 하지만 이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를 향한 혐오의 문법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이소호의 시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전복적 반사경으로 되비춰줌으로써 재현 그 너머를 비춘다. 가부장제 안에서 서로를 향해 폭력을 겨누면서 여전히 '우리'라는 관계 안에 있는 가족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지긋지긋하게 우리로 묶이는 그런"―「마이 리틀 다이어리­경진이네」) 혐오의 언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틈새를 발견하려 한다. 이것이 이소호가 개척하고 있는 '정치적 여성예술'의 새로운 국면이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의 영역에 있던 억압들을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방식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선을 의문시하며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장을 가시화함으로써 말이다. 아무리 전위적인 정치나 미학일지라도 그것이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공회전에 그칠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근본적인 질문과 계속해서 부딪혀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낡고 식상한 반격에 허물어 버리지 않도록 날선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예술이 계몽의 역할을 자임하던 시대는 한참 전에 끝났다. 하지만 예술의 종언은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는 초대장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 도래한 페미니즘은 기존의 틀에서 배제되었던 몫 없는 자들을 그 싸움터에 불러 모으고 있다. 이제 정치와 미학의 새로운 연대를 고민해야 한다.

6) 이 시의 각주에는 다음과 같은 주가 달려 있다. "벨벳 거미는 자살적 모성 보호가 있는 곤충으로, 산란 후 어미가 자식들에게 자기 몸을 먹이고 내어준다. 이는 모성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 극단적 모성은 숙명이다. 자식의 미래는 어미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는 이것에 관한 다큐를 보고 엄마에게 욕을 하셨다. "거미 같은 년"이라고. 나는 그날을 기억한다. 엄마는 아이처럼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서럽게 울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어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어미를 먹어치워야 하는 딸들과, 그러한 자기 딸들을 다시 비난하는 어미의 역사가 반복됨을 현시하고 있는 것이다.
7) 당연히 가부장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나타난다. "아빠만 모르는 전쟁, 피 흘리지 않는 살해, 죄 없는 살인자다/우리는 가족이니까 영원히/자식/새끼니까 나는 말 없이/엉덩이를 까고 온몸으로/부성애를 느낀다 가족이니까 말 없이/아빠에게 총을 겨누고/외친다//[공 공 칠]/빵!" (「나나의 기이한 죽음―페이트와 다양한 오브제」 중에서)















작가소개 / 안지영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청주대 국어교육과 조교수로 재직중.


《문장웹진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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