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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ㅌㅊ’냐고 묻고 답하는 사람들에게

  • 작성일 2020-07-01

[문학더하기(+)]

2010 다시-읽기 Re-View
- 《문장웹진》에서 실시한 2010년대 문학 설문 결과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에 대한 리뷰



‘ㅍㅌㅊ’냐고 묻고 답하는 사람들에게

- 최진영,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실천문학, 2013)



임지훈




1.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서 그런 글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정도면 ㅍㅌㅊ’냐고 묻고, 거기에 답하는 글들. ‘평균은 된다’는 말인 ‘평타친다’에서, 초성만 남긴 이 물음에서 대상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새로 산 차, 튜닝한 컴퓨터, 집 안의 인테리어, 방금 자른 머리 등의 일상에서부터 직업과 연봉, 주식의 성패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서로에게 평균을 묻고, 평균을 답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번 s전자에서 단타로 n% 먹었는데, 이 정도면 ㅍㅌㅊ인가요?’, ‘20대에 1억 모으면 ㅍㅌㅊ?’, ‘조립으로 컴퓨터 맞췄는데 이 정도면 가성비 ㅍㅌㅊ?’……. 사람들은 이렇게 인터넷 공간에서 서로에게 ‘평균’을 묻고 답하며 대한민국의 평균에 대한 일종의 담론을 형성하고, 이는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사람 구실하는 것 아니냐’는 일종의 척도를 형성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평균을 묻는 질의응답들에서 진짜 평균은 없다. 그들이 묻고 답하는 평균이란 늘 일상을 초과하는 수치들, 혹은 적은 노력으로 많은 금전적인 이득을 취한 사례들이 대부분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들이 말하는 평균이란 그 바닥의 상위 10% 언저리에 가까운 이야기들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이 ‘ㅍㅌㅊ?’라는 물음은 가장된 공손함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래도 이 정도는 되지 않아?’라는 기만 말이다. 혹자는 이러한 방식을 공손을 강조하던 한국 사회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자기 증명과 인정 욕구의 발산은 나보다 못한 자들에 대한 기만과 모욕이기도 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질문의 저의는 자신의 노력과 성공에 대해서 객관적인 잣대나 판단을 요구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한편으로 이 물음은 ‘이 정도의 노력으로 이 정도의 성공을 쟁취한 나’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 약자들, 타자들을 향해 있고, 그들을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에 저의가 있다. 그러므로 이 질의응답은 다음과 같이 변역될 여지를 갖는다.


‘당신은 왜 그러고 살아.’
‘그러면서 당신은 왜 살아.’


2.
최진영의 장편소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의 주인공 원도는 그런 사람이다. 왜 사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남들에게 폐만 끼치고 사는 사람.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자식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잉여인간. 사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이유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사회적인 성공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져 버린, 죽음에 한없이 가까워져 버린 중년의 남성.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그런 원도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소설이다.
아니다. 이렇게 설명하자면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한 편의 계몽소설처럼 느껴진다. 인생의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하고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라고 결국에는 윽박지르고야 마는 소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이 특별한 건 그 물음과 대답의 과정에서 아무런 숭고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소설은 원도의 삶을 그의 유년 시절에서부터 성인기, 장년기에 이르는 시간들을 비순차적으로 보여주며 그가 얼마나 저질이며 못된 삶을 살았는가를 조망한다. 그 시선을 따라 비춰지는 원도의 모습이란 배고프다며 울다가도 엄마가 밥을 차려 주면 숟가락을 집어 던지며 더 크게 우는 아이이고, 친구를 배신하고 가족을 버리고, 그저 자기 자신만을 아는 것 같은 치졸하고 야비한 모습이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살아야 할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람, 살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사람, 영영 성공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실패한 인간, 그게 바로 원도의 모습이다. 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고,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원도는 응당 죽어야 할 자식처럼 느껴진다. 작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도 때문에 파산한 자들 중 몇몇은 원도처럼 걸인이 되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도 있다. 그들과 그의 가족은 분명, 원도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결국 자신의 불행이 되어버린 장민석의 불행과 맞닥트렸을 때, 죽어야 할 사람은 장민석이 아니라 원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 혹은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공원에서 담배를 구걸하다 문득 원도를 떠올리고는, 죽어버려라 개새끼야, 욕을 내뱉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작품의 말미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지금 여기, 당신.


지금까지 원도의 기억을 쫓아온 당신도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그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소설을 읽어 온 독자라면 이런 물음이 낯설고도 버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가 살아야 할 이유가 존재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좀처럼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편으로 소설의 제목인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삶의 이유를 찾는 물음이 아니라 ‘그러고도 왜 죽지 않았느냐’는 성토이기도 하다. 대체 그렇게까지 해놓고서, 왜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주인공이자 악인인 원도를 향한 성토.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게 다일까?


3.
하지만 다시금 소설을 살펴보자. 왜 그는 그런 사람이 되었나. 친구를 등쳐먹고, 수많은 사람들의 돈을 횡령하고, 자식에게 손찌검을 하고, 아내를 방기하는 남자 원도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나. 그는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것일까. 한편으로 그건 그의 품성이 그러한 탓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그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게 잘못된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는 게 현명한 것이라는 암묵적인 사회적 지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그러니까, 눈 먼 돈이 많아서, 그걸 횡령하면서 사는 ‘보통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오직 원도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정말 죽어야 하는 건 ‘원도’만이었을까? 이 모든 불행과 슬픔의 원인은 그가 악인이기 때문이었던 걸까? 그리고 한편으로, 그의 부모들은 그의 잘못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는 것일까?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 역시 아니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다.


그래서 소설의 말미에서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244쪽) 타인의 삶에 대해 살고 죽는 것의 가치에 대해 묻는 당신은 누구이고, 어떤 위치에 있기에 그것을 묻고 판단할 수 있느냐는 물음. 그렇기에 소설의 질문은 단순한 성토가 아니라 독자를 향해 되돌려진다. ‘당신은 왜’, “죽지 않았는가”. 당신은 그 질문에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느냐고, 이 질문 앞에서, 당신은 자신의 추악함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그렇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소설의 플롯만이 아니라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질문 그 자체이기도 하다.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역전된 질문.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물을 때 우리는 얼마든 숭고한 가장(假將)을 할 수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친구를 위해, 대의를 위해, 부모님을 위해,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뭐든,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가장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삶의 영층위를 겨냥하지 않고 그것을 비껴가며 스스로를 마취시킨다. 그러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그러한 숭고한 가장을 손쉽게 벗겨버린다. 마치 영화 <쏘우>(제임스 완)에서, ‘네가 왜 죽지 않아야 하는지 나를 설득해 봐’라는 살인범의 질문처럼 말이다. 정리하자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들은 늘 더 나은 것들, 이상적인 것들, 숭고한 것을 향해 겨눠지지만 내가 죽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가장 구차한 지점, 가장 낮은 차원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설은 구차한, 우리 삶의 가장 저차원에 존재하는 날것의 모습을 아주 효과적으로 포착해 낸다.
이 질문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든 치부는 있고, 감출 수 없는 잘못은 있다. 나는 그 순간 정말 정당했는가. 그럴싸한 대의를 이유로 손쉽게 부정을 저지르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가. 나의 정의로움이란 비겁함을 감추기 위한 한낱 치장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가. 때문에 소설은 ‘내가 이런 행동을 했지만, 그건 이런 이유였어’처럼 인과를 따지며 그것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이유에서 이런 행동을 했지만, 정말 그런 행동은 정당했던 걸까’를 되묻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서술이 이 지독한 인간 ‘원도’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의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지, ‘그러니까’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비겁함과 치졸함을 대면하게 만드는 대답이기도 하다. 당신은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느냐고 말이다. 너 스스로 묻고, 너 스스로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겠느냐고.


대실이요, 숙박이요?
여관 주인이 묻는다. 원도는 말이 없다.
자고 갈 거요?
주인이 다시 묻는다. 망설이는 원도.
거기 혼자요?
더럽고 병든 원도를 마뜩찮게 쳐다보며 주인이 묻는다.
……나 혼자요.
원도가 대답한다.


4.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 말할 수 있는 자는 죽어버린 진실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었으니 상관없고, 살아남은 사람은 더 잘살아야 했다. 잘사는 기준은 타인의 시선과 인정으로 만들어졌다.
대박 나세요.
부자 되세요.
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기준이 명료한 만큼 원도의 인생도 명료해졌다. 과거는 없으며, 현재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현재보다 중요한 미래. 원도는 시간을 조각내어 불필요한 과거를 분리수거도 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러자 확실히, 삶은 세련되고 윤택해졌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정도면 ㅍㅌㅊ?’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기대하는 답변은 ‘그건 평균 이상입니다. 당신은 대단해요’일 것이다. 혹은, 당신의 잘남과 뛰어남에 ‘열폭’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거나. 당신의 노력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도 없다. 다만 그렇게 묻는 당신은 비겁하다고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그렇게 얻어낸 명료함에 대해 위험하다고, 당신은 지금 위험한 사람이자, 위험에 처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누군가는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게 문학의 역할이다. ‘ㅍㅌㅊ?’냐는 물음에 대해, 평균은 무엇이냐고, 그게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거기에 미달된 지점에도 사람은 있다고 묻고 답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도 물어야 한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평균이 되길 소망하는 당신은 누구이고, 그것에 대답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그리하여, 당신은, 혹은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1)

1) 소설의 플롯이나 장치들을 감추기 위해 주요한 갈등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더불어 소설의 전개를 짐작 가능하게 할 여지가 있어 인용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페이지를 부기하지 않았다.















임지훈

작가소개 /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을 통해 평론 활동 시작.


《문장웹진 202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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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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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지훈
  • 202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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