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1)
- 작성일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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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 과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 겹쳐 읽기
한영인
1. ‘우익 성장소설’은 가능한가?
2023년 3월 3일,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타계했다. 그의 부음을 접한 순간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그의 작품은 다름 아닌 「세븐틴」(1960)이었다.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사육」(1958)이나 『만엔 원년의 풋볼』(1967)처럼 흔히 오에 문학의 ‘정수’로 거론되는 작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음을 전하는 기사에도 이 작품은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자신의 독서 편력을 작품 창작 과정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대목이 단연 흥미를 끄는 『읽는 인간』에도 이 작품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수많은 대표작을 두고 오직 이 작품만 강렬하게 떠올린 걸까.
가장 단순한 대답은 그것이 내가 읽은 오에의 첫 작품이었다는 것쯤이 될 것이다. 내 동년배라면 젝스키스가 주연을 맡은 하이틴 영화를, 요즘 세대라면 2015년에 데뷔한 13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의 이름부터 떠올릴 ‘세븐틴’이라는 단어에는 확실히 청춘의 퍼포먼스를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기대했던 것도 그와 같은 밝고 싱그러운 젊음의 이미지를 흡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아 나의 부푼 기대는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말에 이르러 이 작품은 나를 처음의 기대와 완전히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다. 물론 이런 어긋남은 바탕 없이 이루어지는 독서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 어긋남만으로 「세븐틴」이 내 뇌리에 그토록 깊이 각인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야 했다. 왜 「세븐틴」이었을까.
이 작품은 구성이 복잡하거나 형식이 난해해서 이해하기 곤란한 작품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은 만큼 어딘가 범속하고 선정적인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여기서 실제 일어난 사건이란 1960년, 당시 17세 소년이었던 야마구치 오토야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연설회에 참석한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를 단도로 찔러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전후의 가장 유명한 우익 활동가”1)로 손꼽히는 아카오 빈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아 16세의 나이로 대일본애국당에 입당한 야마구치는 범행을 저지른 해 옥중에서 ‘칠생보국, 천황폐하 만세’라는 유서를 남긴 후 목매달아 자살하고 만다. 「세븐틴」은 야마구치를 모델로 삼아 비대한 사춘기의 자의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혐오로 빠져든 한 소년이 우익 테러리스트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2)
방금 등장한 ‘성장소설’이라는 단어에 내가 느꼈던 당혹감의 핵심이 응집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말하자면 「세븐틴」은 이제까지 내가 접해 본 적 없는 방향으로 내달려간 젊음의 파국적인 성장담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전후 민주주의자로서 오에가 천황제를 비판했다는 정치사회적 의미 때문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성장 서사로서 지닌 독특하고 이질적인 면모 때문에 내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게 아닐까. 그 이질적인 면모는 이 작품이 ‘우익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과연, ‘우익 성장소설’은 성립 가능한 개념인가? 성장소설(교양소설)은 사실 탈정치적인 장르다. 거기서는 현실 정치 질서를 구획하는 이념적 적대의 구조보다 자신의 진실한 내면과 그 대립자로서의 세계라는 구획선이 한층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세계가 자아와 대립하고 자아를 억압하는 외적인 힘으로 표상되는 한 그것이 좌익적 색채를 띠는지 우익적 색채를 띠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성장소설이 근대의 이념들과 무관하기만 한 건 아니다. 가령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많은 소설들은 성장의 내러티브를 중요한 요소로 포함한다. 이 글이 제목을 빌려온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성장 서사 사이에 어떤 내적인 연관성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면 그 주된 이유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겨냥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근대의 하부구조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구조적인 힘이 자본주의와 이를 하부구조 삼아 구축된 이데올로기라면 그 안에서 세계에 맞서 개인이 긋는 투쟁의 전선이 어디에 그어질지 자명하다. 각종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포획되어 진실을 바로 보지 못했던 주체가 세계의 기만과 폭력의 메커니즘을 깨닫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투쟁하는 주체로 성장해 나간다는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성장의 문법이다. 우익 성장소설이라는 표현이 낯설게 들리는 이유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익적 세계관이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우익으로 성장하는 일이란 그저 세계가 깔아 놓은 길을 그대로 걷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이나 한국처럼 ‘극우 반공주의’가 오래 지배한 나라에서 우익은 그 사회의 주류이자 기득권으로 군림해 오지 않았던가? 3)
그렇지만 ‘극우 반공주의’가 군림했던 한국과 일본에서도 우익의 초상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분열적이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좌익 이념뿐 아니라 우익 이념 역시 그것이 극단화될 경우 거기에 대한 유무형의 제재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익은 좌익과 싸우는 동시에 자유주의와도 긴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익 성장소설을 단지 과대망상적인 반공주의자의 시대착오적인 모험담이 아니라 근대 세계를 지배하고 규율해 온 자유주의 이념의 임계를 예기치 않게 드러내는 흥미로운 서사 양식으로 읽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과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을 겹쳐 읽으며 그와 같은 독해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 사회정치적 ‘난제’로 떠오른 일군의 남성 청년 집단의 정치적 (무)의식을 얼마간이라도 검토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2. 자위하는 ‘세븐틴’
오에의 「세븐틴」은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소년이 가족들의 눈을 피해 욕실에서 몰래 자위행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필요 이상으로 길고 적나라하게 이어지는 자위행위에 대한 묘사를 읽고 눈살을 찌푸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을 펼치자마자 “벗기면 벗길 수도 있는 포피가 발기하는 장밋빛 귀두를 부드러운 스웨터처럼 감싸 주고, 그걸 가지고 열에 녹은 귀두지를 윤활유 삼아 자위 가능 상태가 되는 성기가 좋고 내 성기가 바로 그렇다. (...) 나는 자위의 고수가 되었다. 사정하는 순간에 자루 끝을 쥐듯 포피 끝을 잡고 정액을 포피 안에 가두는 기술까지 발명했다.”는 소년의 고백을 마주하면 누구라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못 볼 걸 보았다는 듯 재빨리 책장을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 자위행위를 둘러싸고 소년이 겪는 모종의 분열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적인 모티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빅토리아 시대가 아니다. 십대 남성 청소년이 즐기는 자위행위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같은 반문에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만큼 오늘날 자위행위는 정상적인 성적 쾌락 추구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년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책방에서 선 채로 읽은 성의학 책에는 자위의 해로운 점이란 거기에 대해 느끼는 죄의식뿐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193면) 하지만 소년이 만끽했던 해방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소년은 또다시 “모두들 나를 향해 저 자식은 상습적으로 자위하는 놈이다, 저 얼굴색하고 흐리멍덩한 눈 좀 봐 하며 혐오스러운 동물이라도 보듯 침을 뱉고 있을 것이다.”(197면)라고 두려워하면서 수치심에 휩싸이고 말기 때문이다. 소년이 거듭해서 휩싸이는 그 죄책감과 수치심은 어떤 구조를 통해 작동하는 걸까.
소년은 자위행위가 정상적인 행위라는 점을 ‘과학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소년은 죄의식과 수치심에 시달린다. 일종의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ic disavowal)’의 구조를 취하는 이 간극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객관적 지식을 표방하는 성의학 담론이 결국 소년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없애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년이 자위행위에 대해 지니는 분열(자위행위가 정상적이라는 성의학적 지식의 타당성과 그걸 인지함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수치심 사이의 분열)에는 전후 아메리카니즘이 토대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질서의 임계를 근본적으로 건드리는 민감한 문제가 내재해 있는 게 아닐까? 여기서 소년이 읽은 성의학 책에 잠시 주의를 기울여 보자. 자위행위가 비도덕적이거나 일탈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욕 해소 수단이라는 관념을 일반화 시킨 건 ‘킨제이 보고서’로 유명한 알프레드 킨제이의 연구 이후로 알려져 있다. 곧이어 미국을 중심으로 의학적 차원에서 자위행위의 무해성에 대한 논의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소년이 읽은 성의학 책 역시 그와 같은 연구 조류에 토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서 자위행위에 대한 옹호는 성적 자유주의의 신장과 결을 같이하기에 소년이 접한 성의학 책을 미국의 전후 자유주의의 담론적 실천의 한 양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미제(美製) 담론이 기능부전에 빠지는 이 장면은 미국식 자유주의 (성)담론이 분열된 존재를 통합하는 총체적인 윤리적 거점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오쓰카 에이지는 이 작품에 드러나는 성적 묘사를 냉소하며 “‘남근’의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은 오에 겐자부로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로 이어지는 한심스러운 부분”4)이라고 일갈했지만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면 이 미제 자유주의 담론의 실패 양상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이 실패를 직시함으로써 이 작품을 전후 민주주의의 전개와 이에 따라 ‘미국화하는 일본’에 대해 그 당시 많은 사람이 느꼈으나 의식 아래로 밀어 넣어 버린 모종의 심리적 분열과 원한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해 생각해 볼 물음이 하나 있다. ‘자위행위는 정말 일탈적이거나 도착적인 음란행위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행위일까?’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자유주의적 (성)담론에 따르면 이에 대한 답변은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반문도 제기될 법하다. ‘그게 그렇게 정상적인 행위라면 왜 공개된 곳에서 행할 경우 국가가 나서서 처벌하는 걸까?’ 실제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개된 장소에서 자위행위를 할 경우 공연음란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자위행위는 폐쇄된 사적 공간에서 수행될 때는 정상성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사적 영역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비정상이자 범법으로 낙인찍히는 기묘한 이중성을 지닌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의 작동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공과 사의 분할에 근거하는 자유주의는 자위행위가 사적인 영역에서 수행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얼마든지 정상적인 것으로 용납한다. 하지만 그것이 사적인 영역의 테두리를 벗어났을 때 비정상적인 도착으로 간주하고 처벌하고 추방한다.
깔끔한 도식이지만 이런 도식으로는 소년이 강박적으로 사로잡히는 수치심과 공포감의 정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소년은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골방에 숨어들어 은밀하게 자위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관념에 따르면 소년의 행위는 도착적인 음란행위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행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유주의적 해법은 소년에게 아무런 심리적 지지대가 되어 주지 못한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소년이 왜 그토록 자위행위를 한다는 사실이 남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하느냐에 있다. 어쩌면 그건 대부분의 자위행위가 통제되지 않은 성적 백일몽을 동반하기 때문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자위행위를 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남에게 밝힐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자위행위 하는 동안 어떤 상상을 하는지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위행위에는 그 행위 자체의 정상성과 그 행위가 수반하는 성적 백일몽의 비정상성 사이의 분열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적 규범을 따르는 한 자위행위에 수반되는 성적 몽상 자체를 문제 삼기 어렵다. 여기서 문제 삼기 어렵다는 것은 자유주의가 온갖 성적 백일몽 자체를 긍정한다기보다 그것을 판단하고 처분할 일관성 있는 내적인 척도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미국식 자유주의 (성)담론은 자위행위를 정상성의 범주 내로 포섭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방금 살펴보았듯 거기에는 쉽게 봉합할 수 없는 모종의 분열이 내재해 있다. 자유주의 (성)담론은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폐쇄된 사적 영역에서 행해지는 자위행위가 문제될 게 없듯 개인의 두뇌에 갇혀 있는 망상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문제를 비껴간다. 하지만 문제는 그와 같은 ‘모른 척’을 통해서는 소년이 간절하게 바라는, 책임감 있는 누군가가 “내 문제에 개입해 주기를 바라는”(204면) 욕망이 충족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내 문제”는 공적인 시민이자 사적인 개인 사이의 분열을 포괄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학생으로서 정치 사안에 좌익적인 견해를 가지는 ‘나’와 매일같이 이상한 망상에 빠져 자위행위를 즐기는 ‘나’ 사이의 분열이라고 해도 좋겠다.
자위행위 끝에 사정한 소년은 목욕탕 여기저기에 튄 자신의 정액을 물로 씻어내려 애쓰지만 “말랑말랑한 조그만 덩어리가 틈새에 끼여서 좀처럼 씻겨 나가지 않”(195면)아 애를 먹는다. 그와 동시에 그는 거기에 누나가 우연히 앉는다면 임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휩싸인다. 소년의 이런 망상은 그가 ‘자유주의적 주체’로 살아가는 데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년이 이런 망상에 사로잡히는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혐오감과 수치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과연 이 간극과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존재론적인 대안을 마련해 줄 수 있는가? 「세븐틴」은 이와 같은 물음 앞으로 독자들을 거듭 닦아세운다. 근친상간의 망상은 자신의 성기를 흔드는 동안 “구름 한 점 없는 여름 한낮의 바다에서 침묵에 잠긴 행복한 나체 군단이 조용히 해수욕을”(194면) 즐기는 장면을 떠올릴 만큼 황홀했던 기분을 일거에 사라지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소년은 자위행위를 시작할 때만 해도 “여름이 될 때까지 나의 근육은 단단해질 거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잘 발육해 바다에서 여자애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194면)라는 낙관에 부풀지만 자위행위를 마치고 근친상간의 망상에 도달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허술하고 한심한 신체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 근친상간의 망상은 쾌락 원칙을 제어하는 현실 원칙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이다. 이는 그의 누나가 현재 소년을 지배하는 강력한 현실의 질서를 구성하는 요소임을 의미하며 그래서 소년은 거듭 그녀의 존재를 혐오하고 부인한다. 소년에 따르면 그의 누나는 고도 근시로 안경을 썼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평생 결혼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자위대 병원에 들어가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매일 책만 읽는 한심한 인간이다. 동시에 그녀는 자위대에 복무하는 간호사답게 정치적으로는 ‘보수 반동’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에 비해 소년은 “관내 고등학교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데모 행진에도 나간 적이 있고 학교신문에 기지 반대 운동에는 고등학생도 참가해야 한다는 투서를 넣”(200면)을 정도로 ‘좌익적’이다. 하지만 소년의 좌익적 가치관은 누나가 설파하는 ‘현실론’ 앞에 무참히 패배한다. 누나는 자위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소년에 맞서 “지금 일본에 주둔한 외국 병력이 철수하고 일본의 자위대도 해체되어 일본 본토가 군사적 진공상태가 된다면, 예를 들어 남한과의 관계 같은 게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갈”(200면) 리가 없다고 반박한다. 소년은 유엔의 존재를 들먹이며 자위대의 존재를 거듭 부정하려 하지만 이미 전쟁이 일어난 뒤 유엔군이 개입해 봤자 수많은 사람이 죽은 후일 뿐이라는 누나의 반박 앞에 말문을 잃고 만다.
소년은 누나의 논리에 밀리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급속하게 초조해진다. 소년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며 눈물까지 흘리지만 누나는 소년의 그런 반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이어 나가며 비아냥댄다. “그래, 다음 선거에서 어디 한번 진보당이 정권 잡아 보라 그래. 그래서 기지에서 미군도 몰아내고 자위대는 깨부수고 그리고 세금은 내리는 거지. 실업자도 없애고 경제성장률도 쑥쑥 올리는 거 구경 한번 해보자. 나도 괜히 남에게 멸시받아 가며 자위대 간호사 노릇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노동자가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 완전히 환상적인 이야기네······”(203면)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성을 상실한 소년은 “고함을 지르며 누나의 이마를 냅다 걷어”차고 “누나는 찻상 쪽으로 손을 뻗은 채 벌러덩 나가자빠”진다. 소년은 깨진 안경 파편에 찔려 피가 흘러내리는 누나의 창백한 얼굴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다 창고를 개조해 만든 자기만의 방으로 숨어들 듯 도피한다.
3. 냉소하는 아버지, 무기력한 자유주의
소년이 저지른 발작적 폭력은 미숙한 정신이 강고한 현실의 논리에 맞닥뜨렸을 때 발생할 법한 외상적인 돌발 행동에 가깝다. 이때 소년이 대면한 현실 질서는 냉혹한 국제 정치의 규범만이 아니라 근친상간에 대한 터부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문명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런 대립 구도가 으레 전제하는 하나의 일반적 요소, 즉 아버지의 자리가 빠져 있다. 소년의 아버지는 집 안에서 일어난 소년과 누나의 싸움을 애써 모른 척하고, 소년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아들이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데도 태연히 신문이나 뒤적이고 있다. 그게 바로 아버지가 생각하는 미국식 자유주의적인 태도다. 근무처인 사립 고등학교에서도 절대 학생들을 강제한다든지 학생들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게 아버지의 자랑이었다.”(203면)
작품 초반에 등장한 미국식 자유주의 (성)담론의 실패는 미국식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그의 아버지에 이르러 더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아버지가 신조로 삼는 미국식 자유주의의 핵심은 타인에 대한 차가운 무관심과 그 자연스러운 귀결인 무개입이다. “언젠가 아버지 학교의 학생이 사창가에 드나드는 사건으로 스무 명이나 체포되어 매스컴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서 학생들의 방과 후 생활까지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신조라며 태연하게 지나갔다.”(203면) 여기서 소년의 아버지는 패전 이후 일본 사회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아메리카니즘’의 부박함을 상징하며 전전의 보수파가 그 허약함과 퇴폐성을 들어 비난하는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의 한계를 체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토록 경멸하는 아버지와 소년은 서로 진보-리버럴 이념의 허약함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소년의 좌익적 가치관이 누나의 현실론 앞에 무기력하듯 아버지의 미국식 자유주의 이념 또한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싫어하고 경멸하며 별 볼일 없는 선생으로 취급”하게 만들 뿐이다.
미국식 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아버지는 소년이 누나를 발로 차서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을 보고도 소년을 꾸짖지 않는다. 단지 “넌 이제 누나한테 대학 등록금 얻어 쓰기는 글렀다.”(205면)고 비아냥댈 뿐이다. 전후의 아메리카니즘의 풍조를 유행처럼 두른 아버지는 철저히 속물화되어 차가운 현금 거래 외에 그 어떤 인륜적 가치도 인정할 수 없게 된 불능의 존재다. 동경대를 졸업하고 유명 방송국에 취업했지만 지금은 “마약중독자 같은 꼴로 재즈에 도취되어 있는”(207면) 형에 대한 묘사에서도 이른바 ‘미국식 자유주의’의 허약함과 퇴폐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소년은 “가족 모두의 이해와 사랑 속에서 성장하며 변화해 가야 하는 시기”(208면)를 통과하고 있지만, ‘미국화 된’ 현실의 가족은 그와 같은 인륜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을 일본의 의인화된 표상으로 읽는다면 그를 둘러싼 가족들은 그의 실존이 행복하게 합치될 수 있는 ‘일본적인 인륜성’을 탈각하고 ‘미국식 자유주의의 퇴폐풍조’에 길들여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전후 일본 사회가 내달렸던 ‘미국화’에 반발하는 우익의 심정을 어렵지 않게 간취할 수 있다. 5)
앞서 자위행위가 이 소설의 핵심적인 모티프라고 말했거니와 이는 단지 사춘기 소년이 으레 지닐 법한 성적 욕망만 지시하지 않는다. 잠시 우뚝 솟았다 사정의 순간 초라하고 볼품없게 쪼그라든 소년의 성기는 중일 전쟁 이후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패전의 잿더미를 직면하게 된 일본 현대사의 은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년을 괴롭히는 수치심으로부터 우리는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를 통해 내달렸지만 결국 패전을 통해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으로부터 꼼짝없이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민족적 수치심’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둘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존재를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서만 확인하려 든다는 데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소년은 타자의 시선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나를 보며 비웃던 타인들의 눈으로부터 내 얼굴을 이런 식으로 감추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자유롭게 해방된 기분일까.” 생각하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그 강박에 뒤따르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이다. 한편 일본 현대사에서 그와 같은 타자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지식인들의 발언을 살펴보다 보면 공통적으로 전도된 인정 욕구가 발견되어 흥미를 끈다.6) 거기서 인정 욕구는 일본이 서구라는 타자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간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으로 표출되고 있다. 오쓰카 에이지가 그저 한심하게 치부했던 “‘남근’의 빌둥스로만”에 보다 복잡한 사정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세븐틴」에 등장하는 남근의 표상에는 일본이 경험한 근대 국가의 ‘빌둥스로만’이 겹쳐 있으며 동시에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부정, 반동의 심리가 서사의 무의식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누나와의 싸움에서 완패한 뒤 극심한 혼란에 시달린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 이 세상은 남의 것이고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213면)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유년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와 같은 고통 없이 우리는 성장을 맞이할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소년의 자각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태의 전환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뼈아픈 고통에 직면한 소년이 하는 일이라곤 다시 자위행위에 몰두하는 것뿐이다. 소년은 자위하면서 아버지와 엄마의 성관계 장면을 망상하다가 이내 자신은 아버지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엄마가 간통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닐까 상상한다. 이와 같은 망상은 외설적인 것이지만 실상 자위행위를 지탱하는 근간은 이와 같은 외설적인 환상에 있다. 꿈의 기능이 잠의 연장에 있다면 자위행위의 기능은 환상으로의 도피에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 도피는 자아와 대립하는 세계의 현실성으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다. 소년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포기하는 대신 “이 세상의 누군가가, 정열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간단하고 확실한 무엇을 나에게 제시해”(214면) 주길 갈망한다. 하지만 세계를 단숨에 제압할 그런 “간단하고 확실한 무엇”이 존재할 리 없다. 자신을 구원해 줄 ‘세상의 이치’를 여전히 타인으로부터 구한다는 점에서 소년의 바람은 그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내성적인 성장의 문법과 어긋난다. 따라서 소년이 “온 세상을 바꾸고 보강하는 것은 모두 타인들”(218면)이며 “나란 인간은 현실 세계를 조금도 바꾸지 못하는 놈”(218면)이라는 자학에 휩싸이는 것은 필연적이다. 나와 타인, 세계가 소년의 인식 하에서는 절대적인 위계로 구획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서 내적인 교통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년이 맞닥뜨린 절대적인 고립은 다음날 학교에서 벌어진 800미터 달리기에서 오줌을 지리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함으로써 완성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타인들의 현실 세계에서 선의를 찾아내기 위해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229면) 하지만 타인도 현실 세계도 아니라면 그는 불안한 자신의 실존을 어디에 의탁할 수 있을까? 가능한 답은 두 가지다. 자기 자신이거나 또는 타인과 현실 세계의 논리를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존재하는 ‘대안적 사실의 공간’이거나. 그렇지만 살펴봤듯 소년의 자아는 이미 대타자의 시선의 침탈을 받아 수치심으로 얼룩져 있다. 따라서 현실 세계의 지배 논리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대안적 세계의 의탁은 필연적이다.
(2편에서 계속)
1) 야스다 고이치 지음, 이재우 옮김, 『일본 ‘우익’의 현대사』, 오월의봄, 2019, 125면.
2) 오쓰카 에이지 역시 이 작품을 “정신과 신체의 빌둥을 그린다는 점에서 교양소설적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오쓰카 에이지 지음, 선정우 옮김, 『감정화하는 사회』, 리시올, 2020, 107면.)
3) 흔히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좌익과 우익의 구별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상례지만 개별 국민국가의 역사 전개 과정에 따라 ‘우익’의 면모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령 야스다 고이치에 따르면 일본에서 우익을 성립시킨 역사적 계기는 구미 열강의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국권 수호 운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 우익은 반미, 반서구, 반근대, 반자본주의의 이념과 접합되었으며 태평양 전쟁 당시 제기되었던 ‘근대초극론’에 이르러 정점에 달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순응 여부로 우익과 좌익을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논의를 단순화한다는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경우 반자본주의, 반미주의를 기치로 내건 ‘우익’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게 보면 우익은 크게 두 가지 전선을 갖는 것 같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대한 복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저항의 전선과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저항의 전선이 그것이다. 우리는 ‘우익’ 하면 흔히 후자를 떠올리게 된다. 일본의 경우 패전 이후 미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면서 우익들이 대거 ‘친미 반공주의’ 노선으로 변모했고, 한국의 경우에도 일본의 하위 파트너로 위상이 정립되면서 비슷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우익’을 이와 같은 두 가지 성격을 망라하는 용어로 사용하지만 맥락에 따라 강조하는 점에 차이를 두려고 했다. 가령 여기서 ‘주류로서의 우익’은 2차 대전 이후 양국에서 사회정치적 기득권으로 자리매김한 ‘친미 반공주의 우익’을 뜻한다.
4) 오쓰카 에이지, 위의 책, 107~108면.
5) 물론 모든 우익이 ‘미국화’에 반발했던 것은 아니다. 전전에 귀축미영을 부르짖으며 반미의 선봉에 섰던 우익은 패전 이후 ‘친미반공’으로 대거 노선을 선회한 바 있다. 그럼에도 당시에 ‘정통 우익’을 자처했던 사람들 중에는 전전의 아시아주의를 계승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960년대 일본의 우익 학생운동에서는 “‘대미 자립’, ‘자주헌법 제정’, ‘일미안보 파기’, ‘전후 체제 타파’를 슬로건”으로 삼아 활동하기도 했다.(야스다 고이치, 앞의 책, 233면) 몇몇 구호만 놓고 보면 과거 한국의 민족자주(NL) 계열 학생운동의 그것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6) 관련한 일본 지식인들의 담론은 나카무라 미츠오, 니시타니 게이지 외 지음, 이경훈, 송태욱, 김영심, 김경원 옮김, 『태평양전쟁의 사상』, 이매진, 2007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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