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다시 서정을 위해

  • 작성일 2024-10-01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있었다.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시라고 믿었던 것과 시인들이 시라고 믿는 것의 간격은 제법 폭이 넓었다. 나는 마치 한 시대가 저물어 버린 곳에 불시착한 이방인처럼 낯선 시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를 그토록 전율케 했던 감정들은 이제 낡았다고 했고 식상하다고도 했다. 서정은 80억 사람들의 가슴속에 매 순간 처음처럼 피고 지는데 어째서 시는 그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버려두고 낯선 곳으로만 가려 하는 것일까. 날마다 겪어내는 고독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과 추억은 한낱 쓸모없는 감정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설마 시인이라는 오만한 부류들이 세상 모든 내면의 감정들을 이미 다 표현해 버렸다는 당돌한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수많은 의문의 문장을 쓰면서 오히려 우리의 서정은 날마다 새롭고, 결코 소모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점점 갖게 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반성, 아름다운 풍경이 가져다주는 전율 같은 것들이 왜 난해와 무의식의 문장 앞에서 작아져야 하는가 말이다. 


   독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낯섦과 새로움이라는 시인들만의 가치를 위해 독자들을 따돌리고 철옹성 같은 성벽을 두른 것일까 아니면 입맛에 맞지 않는 감정과 정서를 차려내는 시와 시인을 독자들이 차갑게 외면해 버린 것일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정 시인들과 그 감성을 꿈꾸던 이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시는 낯섦을 얻고 서정을 잃었다. 독자를 잃고 시인을 얻었다.


   시는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서정시가 낭만과 설렘의 시골길이었다면 지금의 시는 신문물이 즐비한 잘 구획된 신도시의 화려한 길인지도 모른다. 서정 시인이 정류장마다 서 있는 독자들을 태우고 가는 버스 기사였다면, 현대시를 쓰는 시인은 정해진 목적지로만 향해 가는 택시 기사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럿이 함께 타지만 각자의 감성에서 타고 내리는 버스 승객이 서정시의 독자였다면, 거침없이 하나의 목적지로 달려가는 택시를 기다리는 이들이 현대시의 독자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딱히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고 쉽게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변화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일면 인위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수만 명인 시대를 살지만 독자의 수는 가늠하기 힘들다. 추측하건대 시인이라 불리는 사람의 숫자보다 순수 독자들의 수가 오히려 적을 거라는 생각을 놓을 수 없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분신처럼 엮어낸 1쇄조차도 판매되지 않는 현실이 이를 방증해 주고 있다. 시인들은 서로 시집을 주고받는 시집 품앗이를 하고 있다. 시집을 사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다. 일각에서는 시집을 주고받는 이런 세태를 비판하며 시집은 돈 주고 사서 보자는 외침이 있지만, 순수 독자의 개입이 없는 시인들끼리의 시집 사 보기가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것과 뭐 다를까.


   ‘도대체 뭔 말인지도 모를 글을 읽고 싶겠어요?’

   어느 독서모임에서 왜 시집을 읽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다. 왜 시인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쓰고 있을까. 자신들만 아는 이야기를 허공에 외쳐대고 있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쿵 하고 가슴에 떨어지지만 그걸 독자 탓으로 돌리고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어느 분야에서든 앞서가는 이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들로 인해 우리는 가보지 못한 곳에 발을 딛게 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너무 멀리 가버리면 독자들은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엔 흩어지고 만다. 좋은 세상이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다. 모두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인과 그 시인이 쓴 시를 읽어 주는 대부분의 독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은 스스로만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독자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한때 흔한 풍경이었던 옆구리에 시집을 끼고 다니던 독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그 옆구리들은 지금 대부분 시인이 된 것 같다. 80, 90년대 이후 대중들의 감성을 지켜주던 서정시의 맥이 끊긴 후 그 당시 서정의 절정에 있었던 ‘홀로서기’의 독자들은 더는 공급되지 않는 감성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 시인이 되는 쪽을 택했다. 흐려진 서정 탓에 독자들은 하나둘 시를 떠나거나 시인의 길로 들어서고 나니 독자의 공간은 텅 비게 된 것이겠다. 시는 점점 대중성을 잃고 전문화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많은 시인들이 서정성 짙은 시를 쓰고 있다. 그런데 왜 서정시는 부활하지 못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그 무렵 우리 시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변화라는 것이 전통 서정시의 감성적 정체의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일면 자연스러운 것으로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움을 모색하는 엘리트 집단에 의한 위에서부터의 변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등단이라는 기이한 제도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뽑는 자’의 위상은 어쩌면 권력이다. ‘뽑는 자’는 방향을 설정하고 ‘뽑히는 자’는 경향을 살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거기에다 뽑는 자의 이름들은 오래 또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된다. 단언컨대 신춘문예나 문예지, 그리고 수백 군데의 문학상 심사위원들이 한 3년 정도만 매년 우수한 서정시를 연속해서 뽑는다면 대한민국 문학은 새로운 서정의 시대가 올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베스트셀러나 서점 매대의 명당자리는 유명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시집들로 즐비하고, 가만히 순서를 더듬다 보면 낯선 시인의 이름은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몇몇 이름들은 주기적으로 출현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시인이 아닌 이들에게 내밀었을 때 과연 아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필부필부가 읽기에는 다소 난해한 시들이 우리 문학을 견인하고 있는 현상을 과연 자연스럽다 할 수 있을까. 물론 문학과 예술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정체하지 않고 발전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가 문화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저 홀로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시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문학은 대중의 것이다.

   소수의 권력이나 패거리가 독식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의 공감과 이해 속에서 좋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아야지 몇몇 시인들끼리, 혹은 교수나 평론가들 사이에서만 상찬 받는 문학은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현시점에서 과연 문화 대중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와 기성 시인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가 일치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런 불합리가 연속되는 한 독자들은 시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시보다 더 좋은 게 널리고 널린 세상이다. 


   시가 다시 독자들에게 돌아가면 좋겠다. 

   시는 너무 멀리 있고 독자들은 저만치에서 등을 돌린 채 외면하고 있다. 전기도 없는 마을에 냉장고며 세탁기가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감성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난해하고 실험적이고 새롭기만 한 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문학성 짙고 창의적인 시도 물론 필요하지만, 독자가 뭔 말인지 알아듣고 공감할 수 있는 서정시가 독자들의 가방 속에, 책상 위에 다시 놓이면 좋겠다. 일상에 지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시달리는 각박한 세상 속 결핍의 존재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연대가 되어 주는 시. 독자가 마음을 기대고 쉬어 갈 수 있는 시. 고단한 삶을 살아내느라 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감성을 다시 촉촉하게 적셔 줄 그런 시가 독자들 속으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시가 서정의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감성의 두레박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아름다운 서정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우리들 가슴속도 그랬으면 좋겠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