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가을의 일
- 작성일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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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수 없어 다른 자세로 읽었을 뿐이다. 읽기와 쓰기로 점철된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이 온 것일까. 적어도 자세에 대해서라도. 시간이 누적되어 온 결과가 몸 곳곳에서 나타난다.
3년째 쓰고 있는 장편소설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마라톤의 마지막 구간을 부상당한 채 뛰고 있는 상태랄까. 이미 나는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고 원래 고질적으로 아프던 곳에 통증을 느낀 지는 제법 되었고 새로운 곳도 아프다. 이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을까. 인생 첫 소설을 그것도 장편소설을 이게 소설이긴 한 건지 의심하면서 한 달 만에 썼던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느리게 뛰면서 완주를 고민하게 되었을까.
소설을 쓰게 하는 것이 마감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청탁이나 계약이라는 외부적인 마감이 없는 작가였다. 대부분의 마감은 내가 스스로 약속한 마감이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만큼 지키기 어려운 게 또 있을까.
스스로 마감을 만들고 내가 만들어낸 마감을 지키기 위해 다이어리를 펼친다. 7월은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지냈다. 올해의 계획은 장편소설을 끝내는 것인데 하반기의 시작이니 아직 여유가 있구나, 하면서. 단편소설 초고를 하나 쓰면서 장편소설의 뒷부분을 고민하면 되겠다 싶었다. 소설에 대한 계획이 언제나 제일 먼저이다. 그러나 파워 J가 무색하게 요즘 나는 되는 대로 쓰면서 산다.
어떤 날은 한 줄 쓰고 오늘 해야 할 모든 것을 다 한 것 같은 문장이 있다. 어떤 날은 어떤 생각을 해내고 오늘 할일뿐 아니라 일주일 치를 다 해낸 것 같은 생각이 있다. 나는 한 문장을 썼고 이후에 어떤 문장으로 풀려 나갈지 모를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런 문장과 생각이 산책 도중 떠오르면 걸음을 멈추고 메모를 한다.
한 문장과 하나의 생각은 단편소설에서는 제법 큰 부분이지만 장편소설에서는 조금 괜찮은 부분일 뿐이다. 헤밍웨이의 말처럼 쓰레기일지라도 초고를 다 써야 마음이 놓이는데 장편소설은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른다. 어쨌든 지금 나는 2번째 소설집을 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생각이 날 때 단편소설도 써두려고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편소설에 비해 단편소설의 초고를 끝내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나는 완성의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산책을 하면서 에세이에 뭘 쓰면 좋을까도 생각해 본다. 소설이 아니라 가볍기도 하고 아주 오래간만에 쓰는 에세이라 어렵기도 하다. 청탁이 오면 무엇을 쓸까를 생각하는 걸로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에 따른 문장을 틈틈이 모으다가 어느 시기쯤이 되면 파일을 새로 만들고 쓴다.
산책 도중 바라보는 것 중 제일 마음이 쓰이는 건 나무이다. 크기가 주는 존재감 때문일까. 신도시가 시작되는 곳에 이사를 온 이후 나는 나무가 심기고 자라고 죽는 걸 지켜본다. 나무는 새 터전에 자리 잡기를 종종 실패한다. 지난여름 산책에서 나에게 예쁨을 받았던 붉은 꽃이 아름다운 배롱나무들이 올해는 영 시들시들하다.
나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죽고 끝내 살아나기도 한다. 나무의 세계는 복잡하다. 죽은 줄 알았던 가지에서 새잎이 돋아나는 걸 본 적이 있다. 반면 전체를 잘 살리기 위해 가지를 쳐야 할 때도 있다. 어떤 나무는 마른 채로 버티다가 정비 사업이 시작되면 둥지가 잘리고 뿌리째 뽑혀 나가서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 집 앞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2층에 있는 작업실의 책상 앞에 앉으면 그 나무의 우듬지가 보인다. 작년 늦은 봄 원래 있던 나무가 죽어 새로 심은 나무이다. 그런데 이 나무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병충해에 시달렸다. 나무는 겨울이 되어 잎을 다 떨구더니 봄이 되자 다시 빠르게 잎을 틔었다. 건강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후 다른 집 느티나무가 잎을 틔워 우리 집 느티나무를 앞질렀다. 그리고 얼마 후 알았다. 우리 집 느티나무의 어떤 가지에는 잎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티나무는 반은 죽고 반은 산 채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책상 앞에 앉아 새들이 느티나무의 죽은 가지를 오가며 노는 것을 보곤 한다. 나는 요즘 새의 이름을 궁금해 하고 있다. 예전에 나무와 풀꽃의 이름을 궁금해 했던 것처럼. 오후 다섯 시의 산책로에 어김없이 나타나던 후투티, 공원 산책로에서 내 앞을 통통 뛰어가던 물까치, 그리고 뒷마당에 빨간 열매를 먹던 딱새, 물가를 유유히 헤엄치고 날아가는 오리와 백로까지. 하지만 내가 알아낸 이름들이 정확한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곤줄박이로 추정되는 새가 찾아와 때죽나무 열매를 먹었다.
새소리를 들으며 더위에 지친 나무와 점점 더 무성해지는 풀들을 보면서 아주 가끔 산책을 하는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8월 마지막 주 매년 구입하는 다이어리의 전체 라인업이 공개되었다. 작년 다이어리를 보면서 뭘 살까 고민하던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9월이 되면 미리 사놓는 다이어리 때문인지 한 해가 다 갔다는 조급함이 느껴지곤 한다. 추석 연휴도 있고, 그러고 어영부영하면 겨울이고 연말이고 새해이다.
다이어리 구입 시즌이 되면 올해의 목표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거의 매년 같은 목표를 세우고 있다는 걸 안다. 소설, 운동, 외국어 같은 것들.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건 어쩌면 소설뿐일지도 모르며 내가 지속하는 것도 사실은 소설뿐이다.
새 다이어리를 고르는 일은 내년에는 어떤 삶을 살지 생각하는 것이다. 주간이 가로형인 것이 나을까, 세로형인 것이 나을까. 내년에는 기록할 것이 많은 해를 살게 될까. 그냥 간단한 일정과 메모만이라면 A6로도 충분할 텐데. 루틴을 만들려면 시간 단위가 기록된 것으로 골라야겠지. 한 권에 모든 것을 통합할 건인가, 쓰임에 따라 노트를 분리할 것인가, 등등.
매년 다이어리를 사고 쓰면서도 이 고민을 매번 한다. 올해는 작업과 생활을 분리해서 2권의 플래너를 썼다. 소설 작업만 따로 기록하는 건 내가 지금 뭘 얼마큼 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어 괜찮았다. 날짜가 박힌 플래너 외에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진 노트도 함께 쓰는데 생각만 하고 있던 산책 노트를 내년에는 만드는 것이 어떨까.
고민은 끝나지 않았는데, 다이어리 판매 사이트는 오픈하자 서버가 다운되었다. 일요일인데 다들 이렇게 열심히 내년을 준비하는 건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내년의 다이어리 구성을 더 고민해 보기로 하고, 구입은 단편소설 초고를 마무리한 후로 미룬다.
일주일 내내 문장 하나가 있는 것이 나은지 없는지로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문장이 소설이 시작된 문장이라 있으면 주제가 선명해지지만 그래서 이야기를 한정시키는 건 아닌지 하는 고민. 일단 초고는 있는 채로 마무리하고 파일을 닫았다. 어찌 보면 사소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고민이 시작되면 판단이 잘 서지 않아 같은 자리를 계속 서성이는 꼴이 되고 만다. 아무도 대신 해주지 않고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단 초고를 마쳤으니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내 보면 보일 것이다.
이 에세이만 마치면 이제 여름의 일이 끝난다. 조금 쉬다가 날씨가 선선해지면 가을의 일을 시작할 것이다. 장편소설을 다시 꺼내고 처음부터 읽고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쓰고 산책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내년의 다이어리를 사서 고이 모셔 놓을 것이다. 그 다이어리에는 ‘아무것도 아닌 날, 축하해’라는 문구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 소설을 생각하고 쓰는 아무것도 아닌 날들 가운데 아주 가끔 특별한 날이 오기도 할 것이다.
연말이 오기 전에 초고를 마치고, 그렇게 해서 올 한 해를 이 장편소설의 초고를 마침내 완성한 해로 기억하고 싶다. 장편소설은 한 번의 완주 후에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 그러니 내년에는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든 해야겠지. 내가 충분히 뛸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뛰지 않거나 뛰다가 멈추는 건 괴로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설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계속 이렇게 주춤거리는 건 반드시 힘들어질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들어도 뛰게 하고 쓰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 아무도 시키지 않은 소설을 계속 쓰는 일,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괴로워도 한다는 것, 괴로워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작업. 그것이 오래 소설 쓰는 자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그래도, 그래서 아는 것도 있다. 초고를 마치면 아주 잠깐이지만 뿌듯하고 내가 자랑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완주를 해낸 자만이 느끼는 그 마음을 향해 오늘도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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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곽재식 인터넷에 누가 “자동차 엔진오일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엔진오일에 정말 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다고 해 보자. 이런 덧글을 달면서 기대하는 것은 엔진오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동차 수리 일을 하는 사람이나 엔진오일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담아 써 주는 대답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오래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들이 각자의 엔진오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엔진오일 우습게 보다가 저는 큰코다친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 비슷한 답을 기대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기대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공유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이라는 종족이 원시 시대 때부터 갖고 있던 아주 오래된 습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동안 이런 덧글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챗GPT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더군요.”라고 자기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본 내용을 복사해서 덧글로 붙여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덧글에 엔진오일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써 두어서 열심히 읽어 보았는데 다 읽어 갈 때쯤 보니까 맨 마지막에 “이상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본 결과입니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덧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거의 모든 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도대체 이런 덧글은 왜 달리는 걸까? 질문을 했던 나는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물어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덧글은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달린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 대규모 언어모델, 즉 LLM 방식으로 운영되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결과를 받아 본 뒤에 그 결과를 남들과 같이 공유해 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정에서 나온 동기는 조롱받을 이유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계각층에서 LLM 방식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다른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요즘 그렇게 유행이라고 하는 최신 첨단기술인 인공지능을 내가 이렇게나 잘 이용해서 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나는 요즘 뭐든 인공지능에게 물어봐. 너무 편하고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다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사회가 탄생할 거라는 이야기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매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는 거창한 환상마저 슬그머니 서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앞서갈 거라는 환상이다. 지금 치열한 경쟁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문장웹진 다시 읽기]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2017년 8월호 수록) 김진선 어느 강의 시간,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면을 소개해 주셨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날 이후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에는 《문장웹진》이 빠지지 않고 있다. 햇수로 17년, 매달 1일이면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접했다. 나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보니 아닌 일이다. 맞다, 이것은 고해성사. 나의 죄를 고합니다. 나는 장르 편식이 있어서 시를 제외한 소설, 비평, 기획 등은 대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장웹진 다시 읽기’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다시 읽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마주한 글을 여러 번 살피고,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침내 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작은 2017년 8월호에 수록된 조연정의 이라는 비평이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한 비평만큼은 피하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죗값을 달게 받는 거 같다. 이 글은 윤이형 소설가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 고민하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 문학적 재현,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에서 《문장웹진》 2017년 4월호에 수록된 조강석의 에 의문을 표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먼저, 윤이형 소설가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밑줄은 인용자 강조)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은 왜일까. 이 질문들은 의무(‘써야만’), 제약(‘안 되는’), 판단(‘비판적인’), 자기인식(
- 김진선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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