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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자와 셀트리온

  • 작성일 2025-12-01

  [편집위원 기획 -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화이자와 셀트리온

  — 김사과 혹은 21세기 한국-소설의 한 표정


윤재민


   1. 비물질 도시공간


   김화진의 소설 「새 이야기」는 오늘날 서울에 홀로 거주하는 도시적 존재의 일상과 욕망에 대한 낭만적인 우화이다. 소설의 일인칭 화자인 진아는 아직은 자리 잡지 못한 웹툰 작가다. 그녀는 어렵게 연재를 따내고 독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살피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낸다. 매 순간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도 자신의 일상을 놓치지 않는, 이 고단한 일인가구 여성 창작자의 낙은 소소하다. 성수동이나 불광천같이 서울 시내 한강 북쪽의 정비된 수변 일대를 산책하거나 썸남 천희가 선물한 대파를 잘라 자취방에서 떡볶이나 닭발 같은 매운 음식을 해 먹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지루하고 불안정한 시간을 견뎌 내는 중이다.

   어느 날 진아의 일상에 기이한 환상이 찾아온다. 그것은 갑자기 천희가 선물한 대파가 진아에게 말을 건네면서 시작된다. 대파는 대뜸 썸남 천희가 오래전부터 진아를 짝사랑해 온 청둥오리임을 폭로한다. 대학 시절의 진아를 보고 첫눈에 반한 청둥오리가 어렵사리 인간이 되어 그녀 곁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진아는 살아남기 위한 지극히 ‘인간적인’ 시절을 통과하는 서울에서의 모든 순간이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한 시절이었음을 느끼며 잠시 위로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기 어려운 사적 환상을 웹툰의 소재로 사용하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도시인 진아의 환상 체험 그리고 이를 소재로 한 창작의 욕망은 흥미롭다. 도시에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익명적 존재의 삶의 양태와 그들에 의해 생성되는 도시의 비물질적(immaterial) 공간 양식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도시공간은 막강한 위정자나 위대한 건축가의 기획을 한참 초과한다. 인간적인 양태의 모든 것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각양각색의 과밀함으로 끓어오르는 공간이다. 그 안으로 수많은 익명적 존재들이 각자의 욕망과 꿈을 안고 모여든다. 그들의 비전은 실현되기 전까지 어느 정도 망상적 성격을 띨 터이다. 하나 실은 바로 그 망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야말로 그들을 도시에 현전하게 하는 비물질적인 역량이다. 도시는 무차별적으로 이들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들의 적합성을 매 순간 시험한다. 모두에게 365일/24시간이 ‘평등하게’ 주어지는 가운데, 각자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요령껏 살아 내야 한다. 그렇게 극도의 혼잡과 과밀함 속에서 척도 없이 흘러가는 존재들이 그저 자신에게 귀속되는 욕망 혹은 망상과 관련된 공간을 스스로 창안하며 밀집한다. 「새 이야기」는 성수동이나 마포·은평구 일대 수변 지역을 불안하게 점유하며 살아가는 도시적 존재 양태를 비물질적 공간 양식과 결부시켜 포착해 낸다.

   척도 없이 증식하는 인간적인 욕망을 담지한 비물질 공간은 20세기 후반기 소설의 도시적 사유와 글쓰기에 첨가된 가장 흥미로운 스타일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은 여기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텍스트이다. 이 소설은 13세기 세계 최강국 황제 쿠빌라이 칸과 이탈리아 민족의 신화적 인물인 마르코 폴로가 나눈 가상의 세계 도시 방담 형식을 띤다. 황제는 자신의 왕궁에서 유라시아 전역에 흩뿌려진 도시의 형태를, 물리적인 제약을 초월하여, 자신의 의지와 권능으로 형상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방대하게 펼쳐진 황제의 영토에 두 발로 직접 걸어 들어온 여행자를 불러들여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도시들을 추출해 낼 수 있는 모델 도시’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한다. 그러나 교역을 위해 수많은 도시공간을 몸소 누비며 신체에 아로새긴 여행자의 감각은 세계 최고 권능의 자의식과 합치되지 않는다. 황제는 마르코 폴로의 증언에서 자신의 권능(모델 도시)의 편린을 확인하고자 집요하게 캐묻고 여행자는 황제의 기대를 에두르는 대답으로 저버린다. 칼비노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이 양극단의 도시적 관념을 대화의 형식으로 뒤섞는다. 그리하여 쿠빌라이 칸의 의지(관념)와 마르코 폴로의 체험(감각) 양쪽 어느 쪽에도 온전히 기울지 않는, 그저 양자의 뒤섞임 속에서만 존재할,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도시 공간이 텍스트로 가시화된다. 이러한 칼비노의 글쓰기-기획은 쿠빌라이 칸 치세의 신비한 중세 도시 방담이라는 역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도시의 형태는 그 목록이 무한하다. 모든 형태가 자신의 도시를 찾고 새로운 도시들이 계속 탄생하게 될 때까지. 모든 형태의 변화가 끝나고 나면 도시의 종말이 시작된다.

  지도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로스엔젤레스, 교토, 오사카 같은 도시와 형태 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물망들이 넘쳐난다.1)


   칼비노가 가시화하고자 하는 도시의 특성은 그것의 역사적 실체가 아니다. 칼비노는 물리적인 시간을 초과하여 인간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흡수/응축된 이형의 공간으로 순환하며 번성하는 지구 규모 대도시의 비물질적 속성 그 자체를 구현하고자 한다. 실질적인 권력이나 물리적인 건축으로 구현할 수 없는 문학적 언어로서만 가능한 도시적 존재론 혹은 도시적 사유의 스타일을 지향하는 것이다. 쿠빌라이의 대도(大都)에서 오늘날의 아시아 메트로폴리스를 포괄하는, 칼비노가 선취한 초시간적인 도시적 존재의 산문적 글쓰기는 20세기 후반 대도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존재들을 다루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되었다. 김사과의 글쓰기는 바로 이 사이에 한국의 도시주의 그리고 그와 결부된 존재 양태를 아로새기는, 21세기 한국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표정이다. 



   2. 고독한 헨리 치나스키와 역행자 군중


   앞으로도 ‘한국문학사’라는 게 쓰일 수 있다면, 나는 최소한 21세기의 첫 사분기만큼은 김사과의 시대로 명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글쓰기가 보여 주는 일관된 방향 때문인데, 그것은 한국인이라는 뭉뚱그려진 집합적 존재가 나아가고자 하여 결국 도달해 내고야 만 모종의 21세기적 상(像)을 향한 상승의 욕망과 관련된다. 교우관계와 학업 스트레스가 중첩된 서울 중산층 가정 청소년의 신경증적 난동(『미나』)에서부터 시작된 이 상승 욕망은 초창기에 ‘분노’라 명명됐다. 이후 분노를 자양분 삼아 캠퍼스로 도약한 아이는 도시 곳곳을 누빈다. 그 와중에 분노는 가라앉기는커녕 더 중증의 신경증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과정은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문학성’이라는 것을 획득했다고 전해지는 한국문학의 어떤 특징(trait)과도 관련된다. 분노하는 청소년의 행위로의 이행과 관련된 ‘성장’의 욕망이 대학생 날건달로 전환되는 양상과 관련된 ‘문학성’ 말이다. 그러나 21세기 김사과가 이를 구현하는 스타일에서는 『젊은 날의 초상』과 같은 ‘북구의 음울한 소설 나부랭이나 철학’의 ‘과장된 어법’이나 ‘미문 취향’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셀린느, 헬리 밀러, 조지 오웰이 파리나 런던에서 쓴 수필들, 장 주네와 장 콕토 그리고 윌리엄 버로스와 부코스키” 같은, “빈대로 뒤덮인 지난 세기의 낭만”2)을 빙자한 20세기 도시 빈민이자 지하 생활자들에게서 빌려 온 감각이 두드러진다. 그것이 학업 스트레스로 뒤틀린 능력주의적 보상 심리 그리고 이와 괴리하는 히스테리적 자기 인식과 뒤범벅되어 가시화된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십 차례 꼼꼼히 검토를 해 보았지만 내 삶에서는 별다른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상상 속에서 미래의 나는 왜 오피스 빌딩으로 빽빽하게 넓고 탁 트인 도로가 있는 깨끗한 도시의 커피하우스에서 미소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부공장에서 흰 모자를 뒤집어쓰고 고무장화를 신고 커다란 주걱을 들고 두부를 휘휘 젓고 있단 말인가. 도대체 나의 빛나는 야망과 비전은 어디로 사라졌나.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는 했나. 아니 없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것을 학교에서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믿었다. 그런데 캠퍼스에 가득한 유럽풍 건물들에서 풍겨 나오는 여유와 권위는 도대체 왜 나한테 아무런 위안과 격려가 되지 않는가. 왜 나는 초대장도 없이 비밀스러운 사교 파티에 숨어들어 온 것과 같이 불안하고 두려운가. 나는 돌아갈 영혼의 집도 없고 낡은 사진집을 들여다보며 보듬을 소중한 감정도 없고, 없고 또 아무것도 없고 또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야망과 비전을 가득 쌓을 커다란 공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쌓이지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돈과 노력과 시간을 지불했단 말인가. 그 지불을 댓가로 학교가 약속해야 하는 것은 야망과 비전이 아닌가. 아니 그래야만 한다. 학교는 그것을 약속해야만 한다. 대학이란 학생들의 깨끗하게 빈 영혼에 허영과 야망과 비전을 잔뜩 채워 넣으면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는 평범한 인생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치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겁과 허영심으로 가득한 주도적 계층의 한 명이 되어 사회가 계속해서 평화롭게 흘러가는 데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대학이 담당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이 아닌가.3)


   이나는 자신이 선취한 대학이라는 상징 자본의 사회적 효능감에 절망한다. ‘대학생’에 걸맞은 상징 자본이 굴러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나는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그녀가 원하는 건 그럴듯한 야망과 비전이라는 명목으로 행복한 대학생으로 살게 하는 허위의식이다. 하나 그러기엔 이미 너무나도 계몽된 주체라는 게 문제이다. 대학(생)은 그녀가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기엔 낡고 작은 그릇이 되어 버렸다. 대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방황과 패악을 일삼는 가난하고 고독한 이문열식 탕아가 되기에 문학 서클은 예전 같지 않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그러한 가운데 ‘나의 야망과 비전을 쌓을 커다란 공간’에 대한 욕망만은 뚜렷하게 남겨져 있다.

   이나가 추구하는 ‘야망’과 ‘비전’은 그녀가 더 높은 단계로의 상승 욕구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상승 욕망은 일관된 정체성이 아니라 분열된 인식으로 나타난다. 이나의 내면에서는 옷깃이라도 스쳤다면 서로가 소스라치게 놀라 누가 먼저랄 거 없이 황급히 자리를 뜰 게 분명한 양극단의 존재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 자기주장을 펼친다. 이나는 분열된 인식으로 세계를 두 겹으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월세를 내지 못한 조선족과 외국인노동자가 매달 몇 명씩 쫓겨나는 다 무너져 가는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이나의 삶과 잘 설계된 사회보장제도와 높은 실업률을 배경으로 한 유럽의 치즈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나는 도저히 그 둘을 조화시킬 수가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나는 치즈의 곰팡이와 벽지의 곰팡이 사이에서 잔잔하게 흔들린다.”4)  

   이런 분열증은 초창기 김사과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일찌감치 주목된 바 있다.5) 그러나 분열 자체를 현시하는 태도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모호했다. 이나와 같은 김사과 소설의 분열증적 존재가 내뿜는 양가적 정동의 추세를 담아내는 명확한 기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서울이다. 김사과 소설에서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세계 수위권의 대도시라는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공간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이를 초과한다. 그것은 물리적·상징적인 행정구역을 넘어 전 국토에 걸쳐 증식하고 복제되는 비물질 공간의 기표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우스웠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울을 흉내 내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서울이 아니라 바보처럼 되어 갔다. 사람들은 서울 자동차에서 차를 사고 서울 여행사를 통해서 갔다. 우리는 모두 그게 웃기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웃기지 않게 될지를 알 수 없었다. 우스워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서울로 갔다.6) 


   모든 ‘한국인’이 서울을 산다. 서울은 분열증적 존재의 양가적인 정동이 평평하게 펼쳐져 만들어 내는 비물질적 공간이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서울은 강남구 신사동 사백칠십삼다시칠 번지에 있었다.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서울은 용산구 이태원동 오십다시십이 번지에 있었다. 하지만 지정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서울은 평양에 있었으며,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은평구 뉴타운에 있었고,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롯데월드에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서울은 뉴욕 주 뉴욕 시 파크 애비뉴와 렉싱턴 애비뉴 사이에 있는 이스트 씩스티쎄컨드 스트리트에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우리는 서울의 지도를 그려 보았다. 완성된 지도는 미국식 아침 식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7) 


   「매장」에서 김사과는 비판적 수사(rhetoric)로 집요하게 서울의 존재론을 따져 묻는다. 나와 y는 강박적으로 서울 시내 골목 곳곳을 누비며 서울이라는 공간을 알아 간다. 두 사람에게 서울은 세상의 척도이자 자신이 인식하고 당면한 모든 문제가 발견되는 공간이다. 그들은, 서울과 서울-아님만이 존재하는 인식 지평으로, 서울 안에서 서울을 내파하는 지적 실험을 끊임없이 감행하여 이에 저항하고자 한다. 그러나 20세기 구미의 초현실·포스트모던 문화운동에서 영감받은 나와 y의 사보타주는 서울이라는 세계를 바꾸거나 파괴하기는커녕 대도시 서울을 되레 헤테로토피아적 문화공간으로 채색한다. 그들의 야망과 비전은 서울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외래 힙스터 문화의 복제로 점철되는데, 서울을 파괴하려는 욕망이 되려 서울을 증식시킨 것이다. 자신을 거스르는 모든 시도조차 빨아들여 자기 확장의 재료로 만들어 버리는 서울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 새로운 세계를 생산하는 투쟁이 자신이 적대하고자 하는 세계를 더 ‘풍요롭게’ 한다. 최종적으로 그들이 서울의 증식을 막을 전략이라고 짜낼 수 있는 건 자신을 포함하여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모든 존재의 적극적인 소멸뿐이다.8) 

   김사과 소설에서 서울은 기존 세계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가시화되는 ‘새로움’을 향한 모든 야망과 비전을 포괄하여 증식하는 비물질 공간의 기표다. 궁핍과 가난에서 분출하는 헨리 치나스키적 충동이나 랭커셔의 광산 노동자를 바라보는 조지 오웰의 분노와 연민, 불안정한 입지 때문에 돌아 버리기 직전 상태로 서울을 산책하는 일인가구 웹툰 작가의 망상과 열망, 부동산과 재개발로 한밑천 잡아 보려는 ‘평범한’ 중산층-되기 욕망이 있는 그대로 펼쳐지는 곳. 칼비노가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의 대화로 비물질 도시 공간을 가시화한다면, 김사과는 고독한 헨리 치나스키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부의 추월차선을 꿈꾸며 매진하는 역행자 군중 간의 대화적 스타일로 서울이라는 이름의 비물질 도시공간을 구현한다. 종류 불문의 비전과 야망이 제멋대로 증식하는 도시적 존재의 글쓰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고독한 헨리 치나스키와 역행자 군중 간의 ‘대화적’ 글쓰기가 향하는 방향이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소멸이나 승리로 나타나지는 않은 채 글로벌 사회의 대세를 따라 흘러간다. 



   3. 두 도시 이야기: K-맨해터니즘


   김사과에게 있어서 서울이란, 한국인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역사적 공간의 흔적이나 겯고 트는 주요 전장에 그치지 않는다. 보다 상위의 도시공간을 지향하는 비물질적 상승·복제 운동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분열증적 욕망을 봉합하는 한국어-기표이다. 김사과가 상정하는 21세기 서울은 ‘뉴욕식 아침 식사’를 즐기다가 가끔 ‘정신 나간 산책’을 위해 뉴욕에 머무를 수 있는 태도가 새삼스러운 시절의 표상이다. 마치 이 시대를 지혜와 어리석음의 시대이자 믿음과 의심의 세기이며 빛과 어둠의 계절이자 희망의 봄과 절망의 겨울이 공존하는 스타일로 구현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시대를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라고까지는 못 하겠다. 입시 스트레스에 얽힌 서울 외곽도시 중산층 가정 청소년의 ‘분노’에서 강남 브랜드 아파트 입주민으로서 겪는 번민이나 마약에 찌들어 ‘하이’ 상태로 서울을 배회하는 정키들의 시대를 프랑스 혁명기 런더너에 빗대고 싶지는 않다. 김사과가 그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적 존재의 시절이란, 세계의 최저점도 최고점도 아닌 그럭저럭 살기에 나쁘지 않으나 어딘가 불편하여 이대로 안주하기에는 찝찝한 어중간한 시대다. 그러한 가운데, 김사과가 천착하는 한국인-도시적 존재들은 뉴욕과 같은 ‘상위의 선택지’라는 추세를 향해 흘러간다. 운 좋게 거기에 당도한 어떤 존재는 서울에서 보다 훨씬 고자극의 도파민 하이의 착란상태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혹시 내가 신인가? 마돈나인가? 설마 도널드 트럼프인 걸까? 하지만 만약에 미셸 오바마라면? 원대하게 뻗어 나가는 망상의 끝에서 감동과 서글픔 그리고 더 털린 지갑을 깨닫는 순간까지 걷고 또 걷기. 산책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이 신선하고 고약한 자기 고문은 뉴욕을 체험하는 유일한 방법이다.”9) 서울을 연고로 하는 도시적 존재의 광기는 뉴욕에서 강도를 더해 간다. 더 이상 ‘위’가 없는 욕망의 공간에서, 도시적 존재의 자아는 평평하면서 비대하게 확장된다, “나, 관념의 나폴레옹은 절대 질 수 없다. 왜냐하면 원대하게 미쳤기 때문이다.”10)

   그녀의 뉴욕 산책은 20세기에는 ‘세계 제2의 도시’였던 뉴욕의 위상에 영감을 받은 수많은 현대예술·기획자들을 좇는 것이기도 하다. 뉴욕은 행정 권력이나 물리적인 공간을 초과하는 오로지 밀집한 군중의 유동적인 점유만을 남기고자 한 20세기 후반기 아방가르드 도시 건축기획의 실험실로 인식되기도 했다.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이러한 도시건축을 ‘이론’의 차원으로 격상시킨 대표적인 인물로서, 맨해터니즘(Manhattanism)을 주창한 바 있다. 그는 1970년대 뉴욕 맨해튼의 현 상태에 대한 회고적 도시 건축이론에서, 격자 형태로 구획된 각 지역의 도시공간을 응축한 거대 마천루의 과밀함으로 수놓인 맨해튼 특유의 어바니즘에 주목했다. 근대적 도시공간 이론을 거부하며 자본과 테크놀로지로 군중을 흡수하는 급진적인 과밀화는 ‘자기 자신을 기념하는’ 맨해튼식 마천루 군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맨해튼은 급진적인 상승의 욕구와 테크놀로지가 선사하는, 개별 마천루 각각이 하나의 도시공간인 도시 군도이자, 도시적 존재의 척도 없는 상호 교통과 흐름으로 극도로 과밀한 감각과 정동으로 들끓는 우리 문명 최첨단의 이념을 체현한 대도시다. 맨해터니즘은 이 같은 종류의 마천루로 점령된 20세기 대도시 공간 특유의, 착란상태(delirium)에 기반한 초현실적 공간 기획 선언이다.11) “맨해튼은 서구 문명의 종착 지역이다. 폭발적인 인적 밀집과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침입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맨해튼은 1950년대부터 혁명적인 ‘혼잡의 문화(the culture of congestion)’를 발명하고 시험하는 신화적인 실험실이 되었다.”12)

   콜하스에게 있어서 맨해튼이 칼비노가 추구했던 초현실적 비물질 도시 스타일과 같은 선상의 건축적 모태이자 이상향으로 인식되었던 건 의미심장하다.13) 김사과의 도시적 스타일은 칼비노와 콜하스의 초현실적 도시주의의 계보 위에서 비물질 도시공간을 반복·복제한다. 김사과가 쓴 많은 글에는 뉴욕(특히 맨해튼)의 흔적이 담겨 있는데, 최근 장편인 『바캉스 소설』은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사례이다. 『바캉스 소설』은 단순명쾌한 플롯에 어디선가 본 설정들로 가득 차 있는 소설이다. 철 지난 할리우드식 플롯을 표방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마치 드 팔마 감독의 제주도 로케 고딕 멜로드라마 시나리오 설정 같다. 이를 구성하는 디테일 또한 클리셰적인 글로벌 담론과 설정들로 범벅되어 국적 불명의 공산품스러움을 배가한다. 네덜란드계 영국 재벌 가문 출신으로 뉴욕에서 왔다는 주인공 이로아의 전 고용주인 ‘악당’ 뤼카스 휘트먼의 설정은 임마누엘 월러스틴 또는 조반니 아리기 위키피디아 항목의 의인화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이런 유형의 인물이 뉴욕을 벗어난 픽션에서 멀쩡하게 그려지는 건 어려운 일인데, 어떠한 반전도 없이 거기에 패트릭 베이트먼 스킨까지 덧씌워져 있다. 이로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는 서초구 반포동 48평 아파트를 신줏단지 모시듯 끌어안은 부자 엄마의 가난한 딸로서 불문과 출신으로서는 운 좋게 자수성가했다. 그렇게 이 이상 올라갈 ‘위’가 없는 가운데 ‘아래’를 착취하는 쾌락 살인마 뉴요커와 그에게 선택되어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세상에 진입한 21세기 ‘서울 사람’이 맞세워진다.

   이러한 대치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상황 자체가 명백하게 뤼카스 휘트먼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그저 이력서 취미란에 ‘프랑스 혁명사 연구’가 쓰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휘트먼에게 채용된 로아는 용산에 마련된 장기 20세기적 인공 낙원에 갇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 공간의 일부로 스며든다.


  완벽하게 산뜻하고 깨끗한, 모든 것이 고해상도로 이루어진, 그림자도 무게도 없는 도시의 완벽한 유령이 되는 경험을 FWIS는 그녀에게 선사했고 그것은 솔직히 마약보다 황홀했다. 끝없는 회의와 세미나, 느닷없이 찾아오는 재택근무 시즌, 주기적인 상담과 건강검진, 깜짝선물처럼 받는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매주 탄생하는 개념들, 평가들, 바이러스처럼 신비로운 그래프, 패턴 인식, 처리, 오류 감지, 삭제, 조정, 테스트, 설정, 재설정, 미세 감지, 테스트, 최적화, 라벤더 향 가득한 마사지와 최면 치료, 또 다른 테스트와 인터뷰, 원격회의, 원격 테스트, 회의와 인터뷰와 평가 외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무했다.14)


   로아에게 이는 그다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뤼카스 휘트먼에 의해 굴러 들어온 기회와 인맥을 생각하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만성적인 정신적 불안과 착란이라는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되는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이다. 직장에서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쇼핑 중독으로 이어지고 돈이 필요해지자 갈수록 대담한 선물 단타 투자로 천문학적인 부를 손에 넣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도시적 존재의 초현실적 상승 욕망이 맨해튼을 복제한 비물질 공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바캉스 소설』은 김사과가 천착해 온 비물질 도시 스타일을 그 궁극의 상위 호환인 맨해터니즘적 착란과 겹쳐 놓는다. 서울을 바라보며 사는 주류 한국인이 품은 모종의 상승 욕망은 서울을 ‘뉴욕식 아침 식사’ 모양으로 지향하는 스타일-운동을 넘어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 속하는 제주도를 엇비슷한 글로벌 도시주의(맨해터니즘)적 양식으로 복제하는 데 이른다. 김사과의 도시적 스타일이 서울을 벗어난 ‘K-맨해튼-군도’의 운동으로 증식하는 것이다.



   4. 심리스 샌드박스의 유령


   모든 것을 빨아들여 오직 차이만을 남겨 놓는 도시적 글쓰기는 비물질 도시 공간의 무한한 확장을 시사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의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진단이 합당하다면, 김사과의 도시적 스타일은 필연적으로 시간에 의해 말살된 공간 이후(post)를 지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말살된 공간은 어디로 가는가. 

   『바캉스 소설』의 주요 배경인 제주도는 ‘뉴욕식 아침 식사’ 모양의 비물질 도시공간의 확장판이다. 도시적 존재의 욕망을 담기 위한 용도로 기획된 이러한 종류의 ‘확장’은 물리적인 용적률을 한도 없이 초과한다. 글로벌 자본에 의해 건축된 시타델 마라라는 과밀한 공간은 제주의 풍토와 이에 맞춰 살아온 생활양식과 무관하게 제주도를 맨해터니즘의 위성 지역으로 편입한다. 온갖 종류의 도시적 욕망이 한도 없이 받아들여져 밀집하는 비물질 공간 그리고 이를 오가는 글로벌 엘리트와 그 워너비들의 이동 양상이 지구의 공간적 특성을 점유하는 중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공산품으로 갖춰 놓은 쾌적한 시타델 마라 같은 공간은 우리 행성의 극소 부분에 불과하다. 이런 종류의 전 지구적 공간 네트워크에 너무 많은 이들의 기대와 욕망이 몰려 있다. 반대로 그 외부에는 앞으로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통제 불가능한 카오스적 실재(the real)가 펼쳐진다. 소설에서 시타델 마라 건설은 기상이변과 해수면 상승으로 제주도가 아열대 습윤 기후에서 열대기후 지역이 되어 버린 상황에 대한 새로운 ‘타개책’이라 제시되는데, 과연 이러한 선후관계 인식이 합당한지는 한번 의심해 볼 만한 일이다. 비물질 도시공간 ‘안’으로 모든 것들이 극도의 과밀함으로 수렴하는 가운데 그 바깥의 불확실성과 비관론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고 있다. 끝 갈 데 없는 최악의 시대가 예측되는 가운데 차선의 아늑함으로 모든 것이 쏠린다. 글로벌 자본 운동에 따른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 운동이 ‘K-맨해튼-군도’로 확장되면서 여기에 속하지 않는 공간을 일괄적으로 ‘말살’하고 있다.

   김사과의 최근 소설은 바로 이런 증식과 말살 이후를 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한데, 이런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몰보이」에 주목하고 싶다. 이 소설은 팬데믹 시국으로 입사가 취소된 사회 초년생이 즉흥적인 결정으로 방콕으로 이주하여 ‘몰보이 탐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막연하게 취업 길이 막힌 ‘나’는 방구석에서 인스타그램 피드를 부유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우연히 방콕의 한 고급 살롱에서 피부 관리사로 일하는 동창 선희와 DM을 주고받다가 즉흥적으로 방콕행을 결심한다. 서울에서 방콕으로의 이주라는 적잖은 신변의 변화를 겪었음에도 ‘나’의 일상과 행태는 본질적으로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나’의 방콕 생활은 방구석에서의 SNS 질과 아무런 위화감 없이 연결되는데, 물리적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기제가 바로 방콕의 초대형 쇼핑몰이다. 방콕 쇼핑몰은 ‘나’에게 익숙한 스마트폰 스크린에 펼쳐진 비물질 세계와 위화감 없이 동기화된 심리스 공간이다. SNS와 초대형 쇼핑몰을 마치 스크린을 스윕하듯 이동하는 ‘나’의 존재 양태는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 시대에 적응한 신체를 시사한다. 이런 공간 안의 ‘나’에게는 딱히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지루할 틈도 없다. 쇼핑몰 안에 펼쳐진 온갖 패션 브랜드를 구경하다가 배가 고프면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서 늦은 브런치를 먹거나 누군가 버린 종이 신문을 주어서 시시껄렁한 기사를 읽으며 시간을 때울 수 있다. 마치 소셜 미디어 활동 같다. 우연과 즉흥의 연속으로서 시공간을 초월한 무한한 가능성을 선사하는 듯하나 사실 이미 갖춰진 공간 설계 또는 알고리즘의 무한루프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몰보이」의 배경인 방콕의 초대형 쇼핑몰은 시타델 마라와 같은 맨해터니즘 군도 네트워크의 한 꼭짓점으로 이해될 수 있기도 하다. 쇼핑몰은 뤼카스 같은 글로벌 엘리트나 로아 같은 자수성가도 아닌 ‘나’에게 허락된 샌드박스적 비물질 공간의 물질적 토대이다. 여기에 동기화되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극소한 대도시 네트워크를 위화감 없이 부유·이동하는 도시적 감각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점차 방향감각을 잃게 되어 쇼핑몰-샌드박스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영원히 현재를 배회해야 한다.

   ‘나’가 길을 잃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비물질 샌드박스 공간을 지금까지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하기 위해 렘 콜하스가 제네릭 시티(Generic City)라고 지칭한 건축 개념에 주목하고 싶다. 제네릭 시티는 20세기 초중반기 맨해튼의 마천루 이후의 과밀·혼잡·쾌락·테크놀로지를 집적한 글로벌 건축양식 개념이다. 마천루가 중력을 거스르는 철근·콘크리트와 각종 상승 장치(엘리베이터) 그리고 공기정화 기법으로 끊임없이 솟아오른다면, 제네릭 시티는 마천루를 가능하게 한 모든 기술과 양식(혹은 그 이상)을 활용한 ‘지구를 덮는 거대한 안전 이불’이다.15) 과대망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건축기획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글로벌 스케일로 군중과 물산을 집적하여 연결·규격화하는 두 개의 공간 양식인 공항과 쇼핑몰이다. 오늘날 공항과 쇼핑몰은 점차 유사해짐과 동시에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쇼핑몰은 전 세계의 공산품을 하나의 장소로 모아 배치하는 유사 관광·여행의 공간이다. ‘더현대’와 인천국제공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비행기 타는 일을 제외하고는 갈수록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오늘날 공항은 그 자체로 쇼핑의 공간이다. 규모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다시 말해 더 많은 군중의 혼잡과 밀집이 일어나길 원할수록, 공항과 쇼핑몰은 서로 더 가까워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군중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그저 포괄적으로(generically) 그저 커다랗게 담아내기 위한 기획의 결과이다. 글로벌 교통과 쇼핑이라는, 과거에 없었던 무한한 이동과 소비가 가능하면서도 어떤 것도 특별할 수 없는 일반적인(generic) 공간이 항공 체제와 시스템 에어컨으로 덧대어져16) 무한히 절합-연결된다. 모든 차이를 담아내고 흘려보낼 뿐인 밀집과 혼잡 속에서의 광활함은 한편으로 안락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정상(normal)에 대한 환각(hallucination)과 섬뜩한 평온함(eerie calm)이 도사린다.17) 

   한국의 방구석에서 방콕으로 이주한 ‘나’의 이동 경로는 제네릭 시티(공항과 쇼핑몰) 안에서의 그것인데, 그녀가 감지하는 몰 안에서의 ‘사라짐’의 감각 또한 그렇다. 그것은 에스닉 식음료에서부터 글로벌 사치 브랜드를 총망라한 만국 공통의 공산품들 사이를 ‘자유롭게’ 부유하고 이를 향유하는 가운데, 쇼핑몰 그 자체에 동기화되어 존재 자체가 극단적인 일반성(generality)으로 수렴되는 과정을 시사한다. 그렇게 ‘나’는 SNS와 매개된 제네릭 시티의 심리스 공간이라는 밀실을 배회한다. 제네릭 시티가 그 안의 존재들에게 주조하는 ‘일반성’의 압력과 감각은 ‘나’만이 느끼는 게 아니다. 방콕의 대형 쇼핑몰은 그녀보다 한발 앞서 급진적으로 동기화된 ‘몰보이’라 부르는 미아들로 이미 가득하다. 그들은 “특정한 정신적 고립/절망 상태에 빠져든 아이들이 최신식 쇼핑몰과 미스터리한 정신적 반응을 일으켜, 몰 안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가두”18)는 방식으로 사라진 존재들이다. 여전히 쇼핑몰에 기거하는 게 분명하지만 한번 사라진 몰보이를 다시 본 사람은 없다. ‘나’의 쇼핑몰 배회와 시간 죽이기는 몰보이 중 하나인 클레이 콴을 찾는 과정이다. 탐정으로서 이러한 ‘나’의 탐문과 조사는 탐정이라는 직업적 행위와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쇼핑몰 어딘가에서 들리는 클레이 콴의 목소리를 탐색하는 중이다. 제네릭 시티라는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는 샌드박스 밀실과 동기화된 감각을 이용하여 몰보이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다. 

   실종된 몰보이를 탐색하는 ‘나’의 역량은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 이후를 살아가는 도시적 존재의 ‘말살된 공간’에 대한 감각을 시사하는 듯하다. 말살된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끔히 사라지지 않고 왜곡된 채, 뚜렷이 존재하지 않지만, 불투명하고 감지하기 어려운 흔적, 다시 말해 유령으로 귀환한다. 몰보이는 제네릭 시티라는 물적 공간과 SNS로 대표되는 비물질 공간감이 절합된 시대의, 불안정한 반(半)가시적인 존재 양태를 암시한다. 호시탐탐 아이들을 유혹하여 자신과 같은 유령으로 만드는 방콕 쇼핑몰이라는 심리스 샌드박스 공간을 21세기의 블라이 저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몰보이 탐정인 ‘나’의 미션은 쇼핑몰에 빙의한 피터 퀸트의 정체를 밝히고 가능하다면 그를 구제(驅除)할 각오가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이는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나’를 비롯한 오늘날의 도시적 존재들은 말살된 공간 이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여 ‘나’의 탐문은 지금으로서는 그저 클레이 콴의 음성을 감지하는 선에서 이루어질 따름이다. ‘나’는 쇼핑몰 개장 내내 몰보이들이 느꼈을 ‘사라짐’을 감각하다 밤에는 몰을 나와 선희와 함께 방콕 시내를 배회한다. 비물질 샌드박스 공간의 실존적 감각 안팎을 매일매일 오가는 것이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저 자신이 당장 해야 할 일을 자기만의 감각으로 탐문하며 유령적 존재로 가득한 비물질 도시공간과 끊임없이 불타고 있는 ‘바깥세상’을 동시에 엿보는 매개적 탐정-존재로서, 현재를 지속할 따름이다.


   낯선 이계의 밤, 나는 환청 같은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클레이 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며, 뭔가를 해야 한다고, 당장 더 늦기 전에, 그러나 내가 탄 오토바이는 끝없이, 내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문득 나는 어떤 작지만 중요한 기회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감지했고, 그 기회가 마침내 바꿀 수 없는 과거로 확장되어 가는 것을 인식했으며,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후회를 달콤한 레모네이드처럼 음미하다, 아직 확정되기 직전의 바로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영원히, 바랄 뿐이었다.19)



   5. 화이자와 셀트리온


   김사과의 도시적 스타일은 21세기 서울에서 맨해튼을 거쳐 종국에는 SNS와 제네릭 시티가 말끔하게 절합한 심리스적 비물질 공간을 부유하는 과정에 다다랐다. 이를 한국어로 쓰여진 칼비노적 의미에서의 도시적 존재의 초현실적 스타일의 한 절경이라 말하고 싶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특정 스타일에 대한 겉치레적인 의태나 모사, 일종의 문학적 ‘한국어 패치’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한국문학과 관련된 도시적 추세와 형식에 천착한 결과다. 그 내용을 채우는 원동력은 주류 한국어 사용자들의 명백한 상위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상승 욕망이다. 그리고 이는 상위기표를 향한 (이에 대한 저항과 반대조차 포괄하는) 정동과 욕망을 과밀하게 투여한 증식과 복제 운동으로 가시화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증식과 복제를 수행했다는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의 목적과 의미일 터이다. 나는 그것이 21세기 첫 사분기 주류 한국인들의 실존에 대한 탐구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세계를 뒤덮는 거대한 이불의 ‘안락함’ 속에서 모두가 서서히 미쳐 가는 가운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김사과는 그 안에 머무르면서도 그 바깥을 수시로 감지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구십여 년 전, 몇 주간 이어지는 극심한 장마를 못 견디고 서울 시내를 배회했던 상허와 같이 말이다. 한반도의 일 년 기후에서 여름 장마는 한밤중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혹한기 그다음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차악의 기후에 속한다. 1930년대 장마철 경성을 배경으로 한 한 소설에서 상허는 지질하고 비속한 식민지 모던 풍속을 직시하면서도 모든 조선인이 성을 갈아 일본 이름을 쓰게 될지도 모를 최악의 시대를 예감한 바 있다(「장마」). 김사과의 배회는 한국의 장마는 물론이고 방콕의 열대기후 습도에서마저 ‘해방’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녀의 배회는 시스템 에어컨과 데이터 센터로 무한히 이어진, 제네릭 시티-SNS 공간의 ‘안락한 일반성’ 밖 어딘가에 존재할 더 나쁜 미래에도 가닿는다. 첨단 공학 기술과 과학적 소비 심리학 끝에 다다른 감각에서 기인하는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듯한데, 이후의 향방은 아직은 미지수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치 마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정도뿐이다.


   도시는 고통과 쾌락을 넘나드는 마법사. 흑과 백을 모조리 백과 흑으로 탈바꿈하는 순수한 교환의 사신, 상호 동등한 만능 협정, 영원한 시소게임의 창시자··· 요는 도시란 등가교환 그 자체. 그런데 왜 연속된 등가교환은 나만 모조리 잃게 만드는 것 같지? 솔직히 나도 오리무중이지만 아무튼 그 무정한 자리바꿈에 대해 이해해 주십사 이 자리에서 독자들에게 요청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그 이해가 없이는 도시를 둘러싼 야망, 정신 나간 광기와 환상의 논리를 도저히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20)


   김사과는 안과 밖의 위치가 바뀌는 마법과도 같은 착란상태를 전시하며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건다. 도시공간 안에서의 방향감각 상실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하자고 말이다. 그것은 각자가 욕망하는 ‘즐거운 나의 도시’가 아니라, 비물질 도시공간의 과밀함 속에서의 척도 없는 상호 교통의 무차별한 흐름을 일단 감지하라는 식으로 읽힌다. 21세기 첫 사반세기 주류 한국인들의 욕망과 정동의 추세가 다다라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비물질 도시공간의 현 상태를 인식하라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보자고.

   이것이야말로 김사과식 ‘복제’에서 우리가 추출해야 할 잠정적인 의의라고 생각한다. 김사과의 비물질 도시 스타일은 오늘날 주류 한국인들 전체의 ‘흐름’을 좇는다. 그것은 이미 맨해터니즘식 착란을 수반하는 복제·증식을 초과해 버린 우리 시대가 이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일종의 생동성 실험같이도 느껴진다. 김사과라는 글쓰기-기계는 이를 추적 감시하는 한국인 전용의 가장 유망한 복제 시약(제네릭 의약품) 생산공장이다. 이상하게 읽힐지도 모르겠지만, 김사과의 스타일을 그 노하우가 집적된 한국문학의 셀트리온이라 이름 붙일 수는 없을까. 셀트리온 같은 바이오시밀러 업체는 화이자 같은 글로벌 제약회사의 효과 검증된 의약품 성분을 그대로 본떠 유의미하게 복제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사업적 존재가치를 획득한다. 김사과가 생산하는 스타일리시한 복제 시약은, 셀트리온의 비즈니스 모델이 그렇듯이, 오늘날 ‘주류’ 한국 사회의 필요에 의해 출현한 불길하고 매혹적인 일반의약품이다. 김사과가 제조하는 복제 시약품과 생동성 실험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일단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마지막 대목을 곱씹으며 함께 ‘이다음’을 감지해 보는 건 어떨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21)



1) 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역,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2007, 176쪽.

2) 김사과, 『풀이 눕는다』, 문학동네, 2020, 171쪽.

3) 김사과, 「이나의 좁고 긴 방」, 『02』, 창비, 2008, 79~80쪽.

4) 위의 책, 81~82쪽.

5) 김영찬, 「앙팡 스키조」, 같은 책, 256쪽 참조.

6) 김사과, 『나 b 책』, 창비, 2021, 19쪽.

7) 김사과, 「매장」, 『02』, 창비, 2010, 231쪽.

8) 위의 책, 235쪽.

9) 김사과, 『바깥은 불타는 늪/정신병원에 갇힘』, 알마, 2020, 9~10쪽.

10) 위의 책, 60쪽.

11) Rem Koolhaas, Delirious New York: The Retrospective Manifesto, New York: The Monacelli Press, 1994, p. 293.

12) D.M.A, Rem Koolhaas and Bruce Mav, S, M, L, XL, New York: The Monacelli Press, 1995, p. 24.

13) 로베르토 가르지아니, 김원갑 역, 『렘 콜하스/OMA 불가사의의 구축』, 시공문화사, 2018, 105쪽 참조.

14) 김사과, 『바캉스 소설』, 문학동네, 2023, 54쪽.

15) 로베르트 가르지아니, 김언갑 역, 『렘 콜하스/OMA 불가사의의 구축』, 시공문화사, 2018, 321~33쪽 참조.

16) 에어컨 시스템(에어 컨디셔너)은 지구를 덮는 제네릭 시티라는 이불을 덧대는 가장 중요한 테크놀로지로서, 건물의 조직과 공존 방식에 돌연변이 공간(정크 스페이스)을 출현시켰다. 렘 콜하스, 임경규 역, 『정크 스페이스/미래도시』, 문학과지성사, 2020, 9~12쪽 참조.

17) D.M.A, Rem Koolhaas and Bruce Mav, Op.cit., pp. 1250~1205 참조.

18) 김사과, 「몰보이」, 『하이라이프』, 창비, 2024, 244쪽.

19) 위의 책, 266쪽.

20) 김사과, 서문, 「비행기와 택시를 위한 문학」, 『하이라이프』, 창비, 2024, 10쪽.

21)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2007, 207~208쪽.



2025년 마지막 기획은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입니다.
‘21세기 문학’은 어느새 사반세기라는 상당한 시대적 지층을 형성한 문학사적 과거이자 현재요, 이보다 훨씬 긴 시간 우리가 숙고해야 할 미래 지평이 되었습니다. 21세기 한국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도’는 우리 시대의 문학이란 무엇이었는지/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탐색하기 위한 의미 있는 청사진을 제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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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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