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텅 비어 있는 ‘나’들의 우주(적 연대)

  • 작성일 2025-12-01

  [편집위원 기획 –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텅 비어 있는 ‘나’들의 우주(적 연대)


김수이


1. ‘자아의 무화’와 ‘무위의 주체’에 대한 열망

과거로 회귀하는 일은 늘 가능하다. 기억과 글 속에서는 더욱더. 십여 년 전 우리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격한 열망을 뿜어내는 말들로 즐겁게 소란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세상에서 피로와 불안에 찌들어 있었지만, 찌들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


기획된 광고가 먼저였는지, 대중 사이에서 싹튼 유행어가 먼저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2015년에 한 신용카드사가 내세운 이 문구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상의 곳곳에서 이 말들은 가볍게, 그러나 강력하게 번져나가면서 아무 행동과 생각을 하지 않는 ‘나’에 대한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열망을 공론장에 풀어놓았다. 대중이 열광한 ‘아무것도 안 함’의 의사 표명은 ‘주체성의 반납/포기/해체의 의지’나 ‘무위(無爲)의 주체성’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편향성의 사태를 한껏 부추겼다. 동시에, 경제와 사회 발전을 위협할 수 있는 ‘무위’의 사태를 광고와 유행어라는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언어 유통 장치를 통해 무마하는 이중의 역할을 했다.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개인이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 주체’로 광적으로 변신해 가는 비극을 파헤친 한병철의 명저 『피로사회』(문지, 2012)가 출간되어 널리 읽히던 무렵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나’에 대한 사회적 열망의 기원을 찾아 조금 더 회귀해 보자. “난 누구? 여긴 어디?” ‘멘(탈)붕(괴)’의 비명을 대신하는 이 말이 처음 유행한 것은 1990년대였다. 역시 유행어가 먼저였는지 히트곡이 먼저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인기 힙합 듀오 ‘듀스’가 부른 「우리는」(1993년 발표)의 후렴에 유사한 문장이 들어 있다.2)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지금 저 멀리서 누가 날 부르고 있어./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젠 우린 앞을 향해서만 나가겠어.” 정체성과 처소를 상실했으나 “누가 날 부르고 있”기에 “앞을 향해서만 나가겠”다는 외침은, 희망에 차 있으면서도 무모하게 다가온다. 앞으로만 무한히 질주하라는 파시즘적 자본주의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다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 곡의 제목이 ‘나’가 실종된 세상의 ‘우리는’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우리’는 사회의 문제점과 위험한 방향성이 그대로 농축된, 연대하는 공동체보다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집단에 더 가까운 까닭이다. 그리고 1990년대의 마지막 해에 한 통찰력 있는 시인은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묻지조차 않는/못하는 사람들을 대거 발견했다.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의자 고행”을 하는 ‘사무원’(김기택, 「사무원」)이었다.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깊은 경지에 들어”3)간, 자본주의 시스템의 자동기계가 된 인간이 비단 ‘사무원’만은 아니었음은 말할 것이 없다.

단순하게 도식화하면, 21세기 초의 한국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음을 하려)는 ‘무위의 주체’들은, 20세기 끝에 출현한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하는 몰주체의 후손이자 이탈자라고 할 수 있다. ‘(먹고)살기 위해’ 자신을 갉아먹으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이 시대의 ‘나’들은 사회가 강제하는 점점 더 많은 일, 더 확고한 (몰)주체성, 더 비대한 자아 획득의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살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출구를 찾고 있다. 일은 물론 사회활동을 전혀 하지 않거나(점점 늘어나는 은둔 청년과 중년들), 어쩔 수 없이 조금 ‘미쳐서’ 살아가거나(점점 증가하는 번아웃 증후군,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정신질환),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후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점점 더 늘어나는 자살4)). 한편, ‘안’이 무너진 사람들의 일부는 희생양을 찾아 ‘밖’을 향한다. 존재 내부의 붕괴를 타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상쇄하려는 것이다. 소모적인 삶 속에서 자기 자신과 멀어진 이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나’를 방어하기 위해 무고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한다.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존재를 혐오하고 무력화하는 데 소중한 삶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다(점점 심각해지는 연령․계층․젠더․장애․정치․국가․종교 등의 각종 혐오, 범죄, 전쟁, 자연 파괴 등). 

“왜 인류는 항상 뭔가를 해야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 걸까?”5) 스티브 테일러(Steve Taylor)는 지난 6천 년간의 인류사를 자아(ego)의 폭발적 팽창에 따른 ‘타락(The Fall)’의 역사로 규정하는데, 이 질문을 광활한 탐사의 맨 처음에 둔다. 그리고 2025년 말 현재, 한국 사회에는 한 인기 드라마 속 속물적인 ‘인사부장’의 목소리로 사태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 울려 퍼진다. “당신, 왜 이렇게 자아가 비대해?”6)


2. “거대한 흉터”의 텅 빈 존재들, 살아지는/사라지는 기술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이 세계에서

백 년은 살아야겠지

미치지 않고서 그럴 자신이 있겠니

- 김소연, 「편향나무」 중에서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지난겨울 죽은 나무를 버린 적이 있었다. 마른 뿌리를 흙에 파묻고서 나무의 본분대로, 세워두었는데, 지난겨울 그렇게 버려지면 좋았을 내가 남몰래 조금씩 미쳐갔다. 남몰래 조금만 미쳐보았다. (…) 마음에 들었다. (…)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


너는 어떠니. (…)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었다.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들었다. 지난겨울 내가 내다버린 나무에서 연둣빛 잎이 나고 연분홍 꽃이 피고 있는데 마음에 들 수밖에. 지난겨울 내가 만난 젊은이가, 아니 돌멩이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돌멩이가 되었다. 

- 김소연, 「i에게」 중에서 


김소연의 시집 『i에게』(아침달, 2018)는 우리 시단에서 서정적 자아 ‘나’의 독점적 지위가 처음으로 흔들리던 시기에 탄생했다. 이 시집이 ‘나’의 이야기를 ‘너’의 이야기와 병치하고, ‘나’의 혼잣말을 ‘너’와의 대화로 연결해 나가는 것은 이런 배경과 밀접하다. 시집 제목에 쓰인 ‘i’는 정체성, 내면의 아이, 개인 등을 내포한 ‘작은 나(小我, ego)’를 상징한다. 김소연은 나-i가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이 세계”에서 형성과 소진과 변화(젊은이-돌멩이-나)를 반복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음을 고백한다. 살아가는 일의 참담함이 일상화한 이곳에서, 이 세계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자 진실과 함께. 

“죽은 나무”처럼 “버려지”고 싶은 마음과 “남몰래 조금씩 미쳐가”는 비밀을 지닌 나-i는 부서진 내면을 너-i와 공유하고 함께 연대하기를 원한다. 김소연은 언어의 질적 비약을 통해 존재의 확장과 도약을 꾀한다. 가령, ‘나’의 쓰라린 자기혐오를 ‘너’의 삶과 마음을 묻는 다정한 안부로 바꾸는 것이다. “밥만 먹어도 내가 참 모질다고 느껴진다 너는 어떠니.” 분명 ‘나’와 마찬가지로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면서,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일에 “매일매일” 실패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나’와 ‘너’(한 존재의 다른 명칭인)의 자아를 뜻하는 ‘i’를 소문자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화와 실패의 개체이자 공동체인 ‘i’, 한쪽으로 치우친 ‘편향나무’7)에 비유된 ‘i’는, 그렇다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의 실존적 좌표 상실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너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마음에 든다고 말했”고, “나도 그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고 네가 말하지 않아”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어디로든 가야만 하는 것. 자아의 과잉을 강제하는 이 세계가 개인에게 허용한 거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다. 이에 따르든 따르지 않든 개인은 내적 파열과 후유증을 어떤 형태로든 감당해야 한다. 사회의 구조적인 질서와 폭력의 끝에는 그것을 내면화해야 하는 ‘나’들이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라는 걸 알아챈다면/진짜로 미칠 수 있겠니”. 김소연은 시 「편향나무」를 세상의 모든 i에게 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으로 끝낸다. 자기 처리와 치유가 삶의 최대 과업이 된 시대, 각자가 할 일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가 된 현실을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진짜로 미치”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미치지 않고 살”기 힘든 세계에서는 “진짜로 미치”는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반응이자 윤리적인 행위가 된다. 오해가 없도록 부연하면, 이 시대의 개인이 자신을 해하는 ‘나’를 “알아차”리고 쾌차하기 위해서는 그 흉터-자아가 형성된 광기의 현장을 온몸으로 통과해야 한다. 

스티브 테일러에 의하면, 현대의 폭력과 광기는 전체와 분리된 자아(개인성)가 지나치게 발달한 인류 최대의 사건인 ‘자아폭발(Ego Explosion)’의 역사적 산물이다. 자아의 분리 및 팽창은 약 6천 년 전 인류가 급격한 기후 변화에 맞서 고안한 생존 기술로, 이후 인류는 조화에서 혼란으로, 삶에 대한 긍정에서 우울로, 온전한 정신에서 광기로의 극적인 전환이라는 “거대한 퇴보”의 길을 걷게 된다. 수백만 년의 인류사에서 불과 몇천 년 동안에 ‘자아폭발’은 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불평등, 여성 억압, 물질주의, 내적 불화, 삶은 덧없다는 선형적 시간 인식, 생태계 대재앙 등을 초래했고, 타자에 대한 공감, 우주의 전체성과 영혼의 힘에 대한 인식을 상실하게 함으로써 인류를 타락하게 했다.8)9) 이런 견지에서, “자기 자신의 거대한 흉터”가 된 ‘나’는 자아폭발이라는 문명사적 사건의 핵심 피해자이며, ‘자아의 무화’와 ‘무위의 주체’에 대한 사회적 열광은 폭발하며 산산이 흩어진 ‘나’들이 일으키는 또 다른 차원의 사건이다. 동양의 언어로 말하면, “지금 세계는 인간 ‘주체’의 범람으로 ‘니들’의 세계인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다)의 공동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몸과 마음의 공동체가 깨진 상태다.”10) 깨진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부서진 ‘나’를 돌보는 일이 선행되고 병행되어야 한다. ‘자아의 무화’와 ‘무위의 주체’에 대한 열망은 이 존재론적 귀환의 긴 행렬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오염되고 병든 세계에서 지독한 자기성찰을 행하며 20세기와 21세기를 살아온 시인이 있다. 쓸쓸해서 머나먼11) 시간을, 현대문명과 인류의 병을 대신 앓는 운명을 자임하며 고통스럽게.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일찌기 나는」)12) 서른 살에 최승자는 첫 시집의 첫 줄에 가차 없는 자기 부정의 문장을 썼다. 그리고 가장 근래에 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지, 2016)에서 “(인류의 깊은 무의식과 얇디얇은 유의식)”(「TV를 보면서」)을 비집고 자라는 ‘아무것도 아닌 나’의 실상에 대한 앎의 감각을 ‘시원병’이라고 칭한다. “내 죽음 이후에도 新生 햇빛이 비친다는 것을/안다는 사실 그것이 始原病이다”(「내 죽음 이후에도」). “(무 속에서 살아 있음이여/살아 있음이여)”(「존재는」).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 최승자, 「나의 생존증명서는」 전문


최승자가 필사적으로 해온 자기성찰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매우 자립적인 ‘나’에 기반한다. 최승자의 ‘아무것도 아닌 나’는 체제가 명하는 자아의 폭풍 성장을 거절하고 자발적으로 현실의 오지에 칩거하며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타자와 물질을 자아 팽창의 수단으로 삼는 법을 알지 못하는 ‘나’, 타락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은 ‘나’인 셈이다. 자아폭발의 대혼란 속에서 타락한 사람들과 달리, 지구의 절반에는 인디언, 폴리네시아인, 시베리아 원주민 등의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왔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지금 많이 사라졌으나, 대신 명상, 공감의 물결, 민주주의 실현, 여성의 권리와 동물권, 생태계 보호 등을 위한 대중운동이 전 지구로 확산하며 ‘타락 초월 시대’를 열고 있다.13) 조금 덧붙이자면, 타락한 사람들과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구도는 ‘나’의 내면에도 존재한다. 타락한 마음과 타락하지 않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다. 시심과 동심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후자의 다른 이름이다. 최승자에게 시(詩)가 “절대고독”과 함께 “생존”의 필수 에너지가 된 것, 부패한 세계에서 “썩지 않”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부정하기 위해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살고자 한 것은 하나로 연결된 일이었다.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올 여름의 인생공부」, 『이 시대의 사랑』). “제 나이도 모르던 아이가/환갑을 맞아 그걸/잊지 않으려 애쓰는 모양이/더 아이 같다”(「환갑」, 『빈 배처럼 텅 비어』).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 되어 꽃들과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는 여기에서 최승자는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세계의 참상을 직시하고 살아낸다. 세계 전체가 병들었는데, ‘나’만 병들지 않을 방법은 없다. 최승자는 거대한 병동에 입원(‘입주’와 구별되지 않는다.)해 있는 ‘인류’라는 병자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와의 오랜 불화 끝에 “내 손가락들 사이로/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가 “빠져나가”는 것을 본다.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전문


최승자는 이 문명도 인류도 변화하는 삼라만상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으며, 모든 “人爲는 우리 모두를 지치게 만드는 족쇄”(「그 언행도」)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낯가리고 울다 웃는 이 文明의 본성/쓸쓸히 한 문명이 걸어가고 있습니다”(「쓸쓸한 文明」). “설상가상 그 위에 또 눈 오고 비 오리라/그것이 인류이다”(「그것이 인류이다」). 비로소 그녀는 병든 세계와의 오랜 싸움을, “어언 수천 년”의 깊이로 쌓인 고통과 우울을 내려놓기로 한다. “빈 배처럼 텅 비어/나 돌아갑니다”. ‘빈 배’는 텅 빈 무위의 존재와 삶을 가리키는 장자(莊子)의 유명한 비유이거니와, “삶이 그 자체로 흘러가게 하라. (…) 그저 흐름에 내맡긴 채 흘러가라.”14)는 전언을 담고 있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권력과 자본의 무한 욕망 체제에서 이탈해 온 최승자는 ‘흐르다/흘러가다’라는 술어를 평생 즐겨 썼다. 잃어버린 사랑하는 ‘너’와 치욕과 죽음을 향해 흘렀던 최승자의 강고한 ‘나’는 이제 자연의 섭리를 따라 빈 배처럼 텅 비어 돌아간다-흘러간다.  

빈 배처럼 텅 빈 존재의 본질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나(자아)’라는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최승자는 텅 비어 있음을 ‘무(無)’가 아닌, ‘허(虛)’나 ‘공허(空虛)’의 기표로 쓴다. 일찍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는 “무한 공허 무한 공허”(「영화에서」)의 우주-세상-삶에서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인 ‘나’로 돌아간다. 최승자가 한 문장으로 전해 온 근황은 이렇다. “이미 나는 허허벌판 위의/흰 허공 속에서 살고 있다”(「끓어 넘치는」). 허허벌판 위의 허공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세상 만물이 “무한 공허”를 현시하는 무한 변화의 공동체이며, 모두가 허공의 일부이자 허공 자체로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내 죽음 이후에도 新生 햇빛이 비친다는 것을 아”는 ‘시원병’이 준 “始原痛”(「아득히」)은 이제 모든 것이 본래 통해 있음을 아는 ‘시원통’(始原通)으로 변주된다. 시 「詩는」에서 최승자는 ‘시’가 무한 공허의 “共有의 하늘” 아래 흐르는 “사회적 江물”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나’라는 자아가 쓴 인위(人爲)의 산물인 ‘시’가 “새들이 하루 종일 마시는/몇 모금의 물”이나 하늘 속 “구름 두어 그루”의 무위(無爲)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아예 처음부터 다른 것일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녀가 허공 속에서 세상 만물과 연결된 ‘무한 공허의 나’로 살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이제 당신은 모를 수 없게 됩니다

당신이 당신임을 알게 되는 것이

당신에게 새로이 생긴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

- 김소연, 「디버깅」(『촉진하는 밤』, 문지, 2023) 마지막 연


디버깅(debugging)은 프로그램의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어 고치는 일을 뜻한다. 김소연에 의하면, 우리는 자아가 특정 시대와 사회 속에서 구성된 하나의 프로그램임을 “모를 수 없게” 된 세상에 살고 있다. 갈수록 획일화하는 자아 프로그램의 오류를 수정하고, ‘나 자신인 나’를 되찾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새로이 생긴 유일한 목적”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거대한 흉터라는 걸 알아차”린 후에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진짜로 미치”는, “극에 달하”15)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쳐서. 

자기 안의 깊은 곳의 정신에 귀 기울이며, 어두운 무의식을 의식과 하나로 통합한 ‘전체성’의 진정한 자기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칼 융은 ‘개성화’16)라고 불렀다. 각자의 개인은 미세한 차이로 계속 분화하면서 문득 서로 공명한다. 김소연과 최승자는 이 은밀한 여정을 우리에게 공유함으로써 누구든 홀로 해내야 하는 존재론적 과업을 독려한다. 김소연은 ‘너/당신’과 간헐적으로 연결된 이 시대의 ‘나’의 심연을 향하고, 최승자는 머나먼 길을 거쳐 텅 빈 본질의 ‘나’와 만물의 무한 허공을 살아내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시인은 자아 중심의 주체성에서 모두가 연결된 공동의 존재성으로 나아가는 점에서 통하며, 각기 그 도정의 다른, 새로운, 극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온전히 바쳐 걸어가야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을.


  3.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하)는 ‘무위의 주체’는 ‘명상’이라는 말로 잘 알려진 ‘내면소통’17)의 주체이기도 하다. 내면소통은 “늘 거기 그렇게 고요함으로 존재하는 배경자아를 알아차리는” 일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을 해내는”18) 일이다. 노자가 말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원리와 통한다. 명상하는 사람은 생각, 감정, 경험, 기억, 행위 등이 모두 ‘나(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일으키는 소음임을 알아차리고, 텅 비어 있고 고요하며 온전한 ‘나(배경자아)’의 자리로 물러난다. 

텅 빈 온전한 ‘나’로 돌아가는 일은 타자 및 세계와의 관계 재편을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최근 우리 시가 1인칭 ‘나’의 단독정부를 허물고, 비인칭 등의 다양한 인칭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에 대한 다각도의 탐색을 거쳐, 다시 1인칭 ‘나’를 깊이 성찰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를 둘러싼, 그러나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이 어지러운 사태를 더없이 미묘하고 섬세하게 시화하는 시인은 황인찬이다.


엄마, 얘가 왜 여기 있어 그럼 지금까지 다 꿈이야?


그렇게 물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만 엎드려 있었다

― 황인찬, 「당신 영혼의 소실」(『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2023)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다>

다시 내 머리 위 어디쯤

메시지가 떠오른 것만 같았고

- 부활은 안 할게요

그렇게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 황인찬, 「당신 영혼의 소실」(『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2023)


황인찬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현실과 꿈의 혼선, “아무도 없는” 곳에 존재-부재하는 미상(未詳)의 아무(?), “당신은 지금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누구(?), “내 머리 위 어디쯤 메시지가 떠오른 것만 같”은 느낌을 감지하는 나(?) 등은 텅 비어 있고 고요하며 온전한 배경자아로서의 ‘나’가 출현하는 다양한 순간의 흔적들이다. 황인찬의 시에 펼쳐진 끝없는 고요와 적막은 발화의 주체가 침묵 자체라는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황인찬의 시는 그가 삶의 도처에서 이행하는 내면소통의 행위이며, 이를 언어로 기록하는 (불)가능한 작업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견고한 절대역학의 우주에서 불확정의 양자역학의 우주로 갑자기 빨려 들어간 듯,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자신에게 묻는 이와 다른 존재인가? 황인찬 시의 독특함은 바로 이 물음과 혼란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최저치의 적극성에서 생성된다. “내 마음”의 바깥이나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언제나 거기 있는, 고요하고 텅 빈 배경자아가 언어를 통과하면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어긋남과 누락이, 황인찬 시의 미묘한 미학의 요체인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을 해내는 내면소통의 주체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 순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주체다. 무위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를 억지로 하는 인위(의도, 목적, 욕망 등)와 결별하는 것이다. ‘온전한 나’를 되찾는 내면소통은 인위를 내려놓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하)는 무위의 순간에 실현된다. 그런데 내면소통은 개인의 내적 평화를 구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내면소통은 ‘나’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내면소통을 통해 ‘온전한 나’로 거듭나는 동안 사회구조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내면의 성장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구성원 전체가 연결된 “정치적이고도 공동체적인” 문제인 것이다.19)

‘나’를 관찰함으로써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앞서 언급한 칼 융의 ‘개성화’ 원리와 함께, 놀랍게도 인류 최대의 지적 성과인 양자역학에 의해 뒷받침된다. 관찰하는 순간 세계가 다른 모습으로 출현-붕괴하는 것은, 이 세계가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촘촘한 그물망”이며 우리는 그 전체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자 사회 운동가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양자론의 발견이란, ‘사물의 속성은 그 사물이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발견”20)이라고 요약한다. 모든 존재는 어떤 행위 이전에 ‘존재(하는)’ 자체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뜻이겠다. 이 점에서 연대(의 윤리)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 질서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이다. “나의 건강한 삶”이 ‘나’의 노력(행위)을 넘어, 모두가 연결된 ‘무수한 우주’의 약속(섭리) 실현에 달려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약속을 확인하고 종용하는 공간이 ‘마트’라는 것은 얼마나 이상하고도 적절한가. 마트는 현대사회의 ‘나’들이 일상적으로 이합집산하는 자본주의의 멀티버스, 연대와는 거리가 있는 곳, 욕망이 폭발하고 꺾이는 가운데 자기를 잃어버리기 쉬운 곳이니까 말이다.21)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창비, 2024)



2025년 마지막 기획은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입니다.
‘21세기 문학’은 어느새 사반세기라는 상당한 시대적 지층을 형성한 문학사적 과거이자 현재요, 이보다 훨씬 긴 시간 우리가 숙고해야 할 미래 지평이 되었습니다. 21세기 한국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도’는 우리 시대의 문학이란 무엇이었는지/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탐색하기 위한 의미 있는 청사진을 제공할 것입니다.



1) 각각 삼성카드사의 숫자카드 V2(모델 유해진)와 LINK(모델 이나영) 광고 문구.

2) 나무위키의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항목 참조. 이 구절에 대해, “폴 고갱의 작품 제목인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3) 시 속에서 이 경지는 ‘30년간의 장좌불립(長座不立)’으로 불린다. - 김기택, 『사무원』, 창비, 1999.

4) 2024년 기준, 한국에서 10대에서 40대까지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통계 작성(1983년) 이래 처음으로 자살이 40대의 사망원인 1위에 올랐다. 자살로 인한 총 사망자는 전년보다 894명(6.4%) 늘어난 1만4,872명이다. - 「40대 사망원인 1위 ‘자살’… 전체 자살률 13년 만에 최고」, <한국일보>, 2025.9.25.

5) 스티브 테일러, 우태영 역, 『자아폭발』, 서스테인, 2024, 31쪽.

6)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 2025.10.25~11.30 방영. 25년을 머슴처럼 일한 대기업에서 하루아침에 좌천당한 ‘김부장’이 부당한 대접에 항의하자, 후배인 인사부장은 ‘김부장’의 유효 만료된 사회적 자아를 겨냥해 반말로 일갈한다.

7)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나무다. 개인의 독특한 성향과 인지 편향 등을 함축하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8) 테일러는 인류학, 역사, 철학, 심리학, 예술, 종교 등의 광범위한 연구자료를 근거로, 기원전 4천 년경 사하라시아(북아프리카에서 중동을 거쳐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대)에서 일어난 건조화가 ‘자아폭발’의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 스티브 테일러, 앞의 책, 1~311쪽.

9)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자아폭발은 인류에게 발명・창조성・합리성의 새로운 능력을 선사해 문명을 발전하게 했고, 고도의 자기성찰 능력을 부여해 자아폭발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제공했다. - 위의 책, 151~156쪽.

10) 황규관, 「‘니’와 인간의 공동체」, <창작과비평>, 2025, 여름, 58쪽. ‘니들’은 김혜자의 시 「니들의 시간」에 쓰인 연해주 우데게족의 언어다. ‘니’는 형체가 있고 없는 모든 존재자와,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을 초월해 거기 깃든 모든 영혼을 뜻한다. - 같은 글, 53쪽.

11) 최승자의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지, 2010)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12)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지, 1981.

13) 스티브 테일러, 앞의 책, 78~124쪽과 325~389쪽.

14) 오쇼, 류시화 역, 『장자, 도를 말하다』, 청아출판사, 2006, 17쪽.

15) 김소연의 시집 『극에 달하다』(문지, 1996)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16) 칼 융, 김세영・정명진 역, 『RED BOOK』, 부글북스, 2020, 9~416쪽.

17) ‘명상’이나 ‘내면소통’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의도와 판단을 계속 내려놓으면서 지금 여기의 ‘나’를 계속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일을 뜻한다.

18) 김주환, 『내면소통』, 인플루엔셜, 2023, 18쪽.

19) 위의 책, 19~21쪽 참조.

20) 카를로 로벨리, 김정훈 역,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샘앤파커스, 2023, 97쪽과 99~100쪽.

21) 분량이 이미 넘친 탓에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진행 : 윤재민 평론가 패널 :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장웹진 9월호 비평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문장웹진 편집위원이자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그리고 오늘 패널로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전적으로 저의 사심 때문인데요. 그간 제가 글이나 활동하는 것들을 인상 깊게 보았고, 궁금했던 분들 모신 겁니다. 참석자 분들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언제 데뷔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부터 먼저 하실까요? 현재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조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성을 떼고서 필명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교 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안희연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원고에 넣을 약력을 요청받으면 이 정도로만 저를 소개하곤해서 어떤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진 안녕하세요. 저는 2025년에 김기태론으로 창비 신인 평론상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미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1년이 된 것 같고, 조금씩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생활인으로서 돈을 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윤재민 오늘 이렇게 모신 세 분. 연차가 현재 평론가가 3년, 그리고 최선교 평론가가 4년 차 정도 됐죠? 2022년도니까 4년. 그다음에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1년 되셨지요? 이미진 아마 발표 기준으로는 1년이 조금 안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이제 1주년 돼 가시는군요. 세 분들 모두 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시고 계시거나,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드는 분들과 대화 나눠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신인 비평가’로서 가지고 계시는 여러 가지 고민이나 문제나 목표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요.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각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지평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비평가로 데뷔하게 된 각자의 계기가 있을 텐데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최선교 평론가가 된 계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해 보자면 국문과 대학원 수업 과제로 처음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 평론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것에 심취하고 매료된 상태를 무척 즐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매료되었는지 꼭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