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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 작성일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100년 전 멋진 신혼여행의 기억

   -염상섭의 『해바라기』와 나혜석의 결혼 전후


박진영


   노처녀 결혼 풍경


   신부 나이 스물넷이면 노처녀인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신랑이라고 첫혼인일 리 없었다. 암만해도 결혼식을 버젓하게 치러야 했다. 둘 다 유명 인사다 보니 결혼 소식이야 진작에 왁자그르르 퍼졌고, 신문에 신랑 신부 사진까지 실렸건만 그래도 아쉬웠다. 내친김에 결혼 기사 아래 청첩장을 내기로 했다.

   “저희는 목사 김필수 씨의 지도를 받자와 4월 10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옵나이다. 이날에 귀댁 왕림의 광영 주심을 엎드려 빕니다. 경신년(1920) 4월 3일, 김우영 · 나혜석.”

   신문에 청첩장을 광고한다고 발칙한 일은 아니다. 대체 뉘 집 아들딸인지 이름이 없는 게 문제다.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청첩장은 신랑 신부가 아니라 부모 이름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무릇 결혼이란 당사자들의 일이기에 앞서 엄연히 집안 대사인 까닭이다. 요즘에야 신랑 신부가 나란히 팔짱 끼고 걸어 들어가는 일도 흔하다지만 여태 청첩장 문화는 그대로 아닌가?

   이만한 기세라면 혈기 넘치는 청년들이야 박수 칠 법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못마땅하다 못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둘 다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내로라하는 집안 자식들이었다. 그나마 넷째, 다섯째 자식이라서 불행 중 다행이지만 대체 무슨 남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시아버지는 기어코 폐백을 물리치고 술잔이나 기울이러 나갔다. 하기야 목사 주례에 답사랍시고 감히 신부가 한마디 아니라 일장 연설을 떠든 예식이었으니 결혼식이고 피로연이고 애당초 안 들어선 게 차라리 나은 지경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랑 신부는 이튿날 식전 댓바람부터 양가에 차례로 들이닥쳐서는 신혼여행 떠난답시고 들썩여 놓고는 훌쩍 기차를 탔다. 신부는 두 주일쯤 예정이라고만 무지르고는 어디로 가는지 신랑에게도 도통 알려 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잡아끌다시피 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무래도 웬만한 신혼여행이 될 리 만무했다. 

   신랑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호사 김우영, 신부는 진명여학교 최우등 졸업생이자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화가 나혜석이다. 


사진1. 나혜석 결혼사진 (1920) 출처: 수원시립미술관



   남도 신혼여행


   사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잠시 여관에 들렀다가 호남선으로 갈아탄 신혼부부는 한밤중에 목포에 도착했다. 열 시간 넘게 걸린 곤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인력거 잡아타고 곧장 여관에 들어서서는 하녀 이름부터 대는 신부가 영 수상쩍다. 초행길이 아니었던 셈이다. 신부는 3년 전 그 여관 2층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추억했고, 영문 모르는 신랑은 얼추 짐작이 나섰지만 섣불리 입을 열 계제가 아니었다. 아직 신혼 둘째 날 밤이었으니.

   부산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하녀와의 사연인즉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신부는 3년 전 도쿄에서 다니던 학교를 빼먹고 홀로 바다를 건너 예까지 달려왔더랬다. 치근덕거리는 옆방 사내를 피해 그날 밤새 하녀가 곁을 지켜 주었다. 신랑의 의심은 곧 풀렸더라도 당연히 정곡은 친절한 하녀가 아니며, 의사라나 하는 그 못난 사내도 아니다. 이튿날 새벽녘에 잠이 깬 신혼부부가 잠자리에 누워 나눈 이야기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신혼부부는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갔다. 

   신부는 그 섬에다 꼭 묘비를 세워 주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3년 전 그때 첫사랑이자 옛 연인. 그날 이후 고작 며칠을 못 버티고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 영원한 임. 말하자면 신부는 자기 옛사랑의 무덤 앞에 새신랑을 끌고 온 셈이렷다. 기묘하고도 대담한 신혼여행을 계획한 신부의 마음 한구석에는 엊그제 남편이 된 사람에게 미안함이 컸고 혹시나 싶어 조바심도 났지만 다짜고짜 끌려오다시피 한 신랑도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무덤부터 찾아야 했다. 병석에 누운 임과 짧은 만남이 그대로 영이별이었던 탓이다. 나무패 하나 나뒹굴 뿐 엉망이 된 봉분을 가다듬고, 묘비를 번듯하게 깎아 세웠다. 못 잊을 임과 매일 교환하던 사랑의 일기를 자기 사진과 함께 불살라 비석 밑에 묻었다. 비문에는 신혼부부의 이름을 같이 새기되 신랑의 양보로 신부의 이름을 앞세웠다. 신부는 소복 차림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처음이자 마지막 젯술을 바쳤다.

   기발하고 엉뚱하며, 유쾌하다면 유쾌하고, 또 도발적이라면 도발적인 신혼여행이지만 억지로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다. 나혜석과 김우영의 신혼여행을 둘러싼 유명한 일화다. 무덤 속에 누워 옛사랑의 묘비와 제사상을 받은 이는 젊은 시인 최승구다. 최승구는 한때 도쿄의 천재로 손꼽혔으나 이미 조혼했던 터다. 흔한 염문 가운데 하나였고, 어차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늘날 눈으로는 나혜석의 신혼 기획이야말로 당찬 신여성의 일면이겠으나 100여 년 전에야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린 이 신혼여행 이야기는 안타깝게 요절한 옛사랑 최승구를 기념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나혜석 자신의 사랑과 청춘을 애도했다. 또 그녀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처럼 멋진 이야기로 바꿔 놓은 것은 한때 그녀를 연모했던 한 살 아래 염상섭의 솜씨다. 실명 그대로는 아니었으되 누구 이야기인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나혜석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였다. 염상섭의 『해바라기』는 파격적인 신혼여행을 설계하고 직접 실행한 신부 나혜석의 복잡다단한 심경을 담백하고도 섬세하게 그렸다.

   염상섭은 마음속 그녀의 이야기를 1923년 『해바라기』 라는 제목의 소설로 신문에 연재해서 온 세상에 퍼트렸고,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해바라기』는 염상섭의 첫 번째 신문 연재소설이자 첫 창작집이다. 


사진2. 염상섭 『해바라기』(1924)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사진3. 염상섭, 『견우화』(2024), 나혜석 그림.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파리에서 엇갈린 사랑, 전쟁 같은 이혼


   좋게 말하자면 통 큰 사내로되 깎아 보자면 변변찮은 핫바지처럼 그려진 김우영도 매력적이다. 김우영은 그만큼 나혜석에게 푹 빠졌더랬다. 나혜석과 김우영의 이야기는 물론 소설이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요란한 결혼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10년간의 부부 생활이었고, 또 그에 지지 않을 만큼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이혼으로 마감했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추문이었다.

   김우영은 유능한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했으며, 나혜석은 천재적인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거칠 것 없지만 두 사람에게는 너무 좁은 세상이었다. 그래서 부부 동반으로 세계 일주 여행에 나섰다. 무려 2년 가까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가로질러 유럽과 미국에서 꿈같은 나날을 누렸다. 그러다가 기어코 말썽이 생겼다. 김우영은 법률학의 산실 베를린, 나혜석은 예술의 고향 파리에서 더 큰 꿈을 펼칠 때였다. 마침맞게 천도교 지도자이자 당대 명사 최린이 미국을 거쳐 유럽에 머물고 있었다. 지구 반대 방향으로 돌던 나혜석과 최린이 하필 파리에서 만난 격이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한눈을 팔았고, 추한 소문이 돌고 돌았으며, 끝내 김우영에게 이혼당했다.

   천하의 나혜석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으나 가족과 세상이 한꺼번에 등을 돌렸다. 나혜석은 당당한 자기변호와 함께 파격적이고 신랄한 주장을 담은 「이혼 고백서」라는 명문장으로 응수했다. 오늘날 새겨들어도 아깝지 않은 절절한 문장들이건만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최린은 나혜석을 모르는 체했다. 나혜석은 공개적으로 최린에게 소송을 걸기도 했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삶에 지친 나혜석은 초창기 여성 해방 운동의 동지 김일엽을 찾아 수덕사에 들어갔으나 세상을 향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나혜석은 몸과 마음이 모두 병들었고, 한번 굴러떨어진 나락에서 헤어날 길을 찾지 못했다.


사진4. 나혜석 『개척자』(1921)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묘비 없는 개척자의 기억


   신혼 무렵 나혜석이 목판화로 새긴 『개척자』가 새삼스레 다가온다. 당대를 대변하는 최고의 잡지에 실린 작품인데, 뜻밖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묵묵히 땅을 갈고 있는 농부의 뒷모습이 강렬하다. 척박한 시대를 일구며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갈망하는 고독한 개척자의 자화상이다. 

   나혜석에게 사랑과 예술은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전부였다. 사랑과 예술은 언제나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꿈꾼다. 오로지 단 하나의 개인,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사랑과 예술의 본질이다. 나혜석은 결혼과 가족도 그러해야 하고, 사회도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직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기초 위에서만 민주적인 인간관계가 꽃필 수 있기 때문이다. 

   나혜석의 신념을 기억하고 존중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동시대의 작가가 염상섭이다. 염상섭의 『해바라기』가 아니었더라면 나혜석의 신혼여행은 한갓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로, 어쩌면 방탕한 신여성의 일탈쯤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염상섭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개인,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실천하며 책임지려는 여성의 내면을 공들여 그렸다. 그런가 하면 과감하고 진취적인 여성의 속내에서 꿈틀대는 삿된 욕망과 냉정한 이해타산도 솔직히 드러냈다. 현실 세계의 나혜석이든 소설 속의 주인공이든 마냥 신비롭고 이상적인 모델은 아닌 까닭이다.

   자기 목소리를 빌려준 나혜석은 염상섭의 소설을 읽으며 어떻게 생각했을까? 별다른 말이 없었던 모양이니 적어도 화를 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고 보면 『해바라기』 표지 그림은 아마도 나혜석이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염상섭은 『해바라기』를 출간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두 번째 창작집 『견우화』를 같은 출판사에서 펴냈는데, 『견우화』 표지에 나팔꽃을 그려 준 이가 바로 나혜석이다. 

   그런가 하면 『해바라기』라는 제목은 영 와닿지 않는다. 훗날 염상섭은 이 소설의 제목을 조금 밋밋하게 『신혼기』로 고쳤다. 염상섭이 『해바라기』를 『신혼기』로 바꾼 그해 겨울, 그러니까 1948년 12월,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자 지난날의 신부 나혜석은 신원 미상의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끝내 무연고자 시신으로 수습되었다. 염상섭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은 그녀의 최후를 한참 뒤에야 전해 들었다.

   옛사랑의 묘비를 세우며 자신의 새출발을 다짐한 나혜석, 사랑과 예술의 해방을 꿈꾼 선구적인 여성 나혜석은 정작 자신의 묘비를 남기지 못했다. 그녀의 묘비는 일찌감치 염상섭이 세워 준 것이나 다름없다.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2월호의 기획 콘텐츠 ‘단 한 권의 책’에서는 시인, 연구자, 학예사 3인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을 독자분들께 소개합니다. 김명순 작가의 『생명의 과실』부터 염상섭의 『해바라기』, 류달영의 『소심록』까지. 각각의 책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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