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 작성일 2026-02-01
- 댓글수 0
[문장웹진 다시 읽기]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오한기 「더 웬즈데이」(2012년 5월호 수록)
현재(문학평론가)
독자일 때는 몰랐는데, 글을 직접 쓰게 되고서야 느끼는 바가 참 많다. 그중 제일 뼈저리게 다가오는 것은(그리고 이전에는 차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자기가 쓴 지난 글들을 들춰 보는 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나는 사실 들춰 볼 용기조차 없는 타입이라서 가능하면 이 세상에서 흔적을 아예 지워 버리는 편인데, 그럼에도 어떤 글들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그리고 이런 갑작스러운 기습을 하루에도 수십 번 당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전에는 이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 잘 몰랐다. 습작이 몇 없어서 그랬던 것도 있고, 습작할 땐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야말로 무색무취한 글들을 썼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쓰는 글에 나만의 개성이랄 게 생기면서부터 고통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들 기저에 깔려 있는 내 흉한 자의식과 대면해야 한다는 고통 말이다.
이 지면에서 나는 《문장웹진》에 발표되었던 지난 작품 중 하나를 골라 다시 읽는다. 그래서 청탁을 받고 잠시 고민했다. 편집위원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는 작가를 공개 처형하는 기획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기획 단계에서 어떤 악의가 있으셨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운을 떼는 바람에 적어도 이 글에 한해서는 그런 기획이 되고 만 것 같다(제 책임). 이왕에 부관참시를 할 것이라면 눈치 없이 무턱대고 좋아하는 작가를 다룰 게 아니라 내가 평소부터 골탕 먹이려고 벼르고 있던 작가를 하나 골라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호감이 가는 쪽은 최대한 배려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고민과는 무관하게 오한기의 「더 웬즈데이」를 다루기로 했다. 「더 웬즈데이」는 2012년 《문장웹진》에 처음 공개된 이후 그의 첫 소설집인 『의인법』에 수록되기도 한 작품이다. 오한기는 『의인법』을 출간한 뒤로 단 하루도 제대로 숙면을 취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의 끔찍한 악몽을 다시 헤집는 걸 그도 그리 달가워할 것 같지는 않기에, 곧장 그의 얘기를 하는 대신 차라리 내 얘기로 잠깐 둘러 가 볼까 한다.
방 안에서 책만 읽던 독자일 땐 몰랐는데, 나와서 보니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막상 문인들을 실제로 만나 보면 다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많은 문청들이 공감할 만한 얘기겠지만 나 또한 작가들을 처음 만나고 충격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뭐야, 글이랑 너무 다르잖아···.’ 나는 아직 문인들을 그리 많이 만나 본 편은 아닌데, 그래서 면역이 없어서 그런가 대개의 경우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작가들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이 괴리가 반드시 모든 작가에게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작가는 조금 더 솔직하기에 쓰는 글과 차이가 거의 없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작가는 뭔가 많이 감추는 듯한 느낌도 들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작가는 아주 대놓고 평소의 자기랑은 다른 모습을 연출하기에 거꾸로 솔직해 보이는 경우도 있다. 플로베르였던가? 글쓰기에서 최대한 난폭하게 굴기 위해 생활을 차분하게 정돈한다고 했던 게.
그런데 이는 첫 번째 깨달음과 맞물린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남들 보고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나야말로 내가 쓰는 글과는 천지 차이인 사람이다. 나는 내가 극히 사회성이 떨어져 실제로는 어디 가서 농담 한마디 못 하는 재미없고 시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글에서는 가능하면 유쾌해 보이려고 능청을 떠는 편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얼마나 끔찍한 나르시시스트인지 들키고 싶지 않기에 습관적으로 자기혐오를 가장한 엄살을 부리기도 한다. 때문에 글 속의 나는 언제나 나보다 더 유연하고, 달변이며, 좀 더 성찰적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위장이 매번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첫째로 우선 위장이 그 자체로 불충분하게 느껴질 때가 그렇다. 이게 위장인 게 티가 나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그래서 이 어설픈 위장이야말로 혹여 내가 한사코 원치 않았던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불쑥 솟아오를 때 말이다. 또 한편 글이 아닌 실제의 나를 보여 줘야 할 때가 그렇다. 날 글로만 보던 사람과 대면했을 때의 그 민망함··· 언젠가 내가 다른 작가들을 만나고 그랬듯, 혹시 이들도 나에게서 똑같은 괴리감을 감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날 배려하느라 모두가 모른 척하고 일부러 속아 넘어가 주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외려 나를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노출하고 말 수도 있겠다는 이런 불안감들과 마주하게 되면 나는 이전의 꼴도 보기 싫어진 가면을 새로운 가면으로 바꿔 쓰거나(다만 이번에는 들켜도 덜 민망할 수 있도록, 덜 화려하고 덜 요란한 것으로), 가면 쓰기를 아예 포기하는 것을 고려하게 된다. 글쓰기가 방향을 잃게 되자, 점차 내가 그토록 외면하고자 했던 내 얼굴을 글 속에서마저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오한기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지만 그도 왠지 괴리가 큰 타입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웬즈데이」의 한상경이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포르노 소설가 한상경은 연애도 한 번 못 해 봤을 것 같은 샌님이지만 그가 쓰는 소설에서만큼은 난봉꾼이다. 문학, 특히 소설의 특징은 망상을 어느 정도는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한상경은 적어도 백지라는 세계 위에서만큼은 그 세계의 왕으로 군림한다. 그러나 이 현실은 언제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전형적인 예술지상주의자”인 한상경은 젊은 작가들이 흔히 앓는 문학적 야심과 곤궁을 의인화한 듯한 인물로서 한마디로 걸작을 쓰겠다는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이 욕망은 좋으면서도 싫다. 글을 쓰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기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모든 권태의 원인이 되기도 하므로. 나는 저 수많은 어중이떠중이와는 좀 다른 글을 써 보고 싶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나 또한 평소에 내가 무시하던 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글들을 써내고 말기 때문에(심지어는 안 하느니 못한 끔찍한 무리수들을 연발하느라 어쩌면 그들보다 더 형편없는 작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에), 이 욕망은 다시 극심한 권태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실패를 한두 번 겪다 보면,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그 누구보다 신중한 작가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신중이라는 표현보다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떤 양자택일의 딜레마에 갇히게 되는 셈이다. 미련한 작가가 될 것인가, 시시한 작가가 될 것인가?
대체로는 이 딜레마에 발이 묶이는 순간 게임은 이미 끝이 난다. 뭘 선택할 것도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글들을 써내느라 어영부영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말이다. 「더 웬즈데이」의 한상경은 걸작을 쓰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걸작은커녕 터무니없는 기행만을 벌이다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반면 어딘지 관조적이고 이성적인 화자는 그런 한상경의 야망을 내심 고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종일관 그를 빈정거리며 생활을 위해 에로 영화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일에만 매달린다. 그리고 이후 오한기 소설에서 한상경은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린다.
1) 걸작을 쓰고자 하는 포르노 소설가(한상경)
2) 소설이 쓰기 싫은 소설가(불혹의 오한기)
십 년 전의 오한기와 오늘날의 오한기 사이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 한상경이라는 인물의 유무다. 매니지먼트 소속의 기획 작가가 된 오한기는 과거의 야심도 보람도 없이 육아와 생활에 찌들어 쓰기 싫은 글들을 억지로 쓰거나, 짜증 나는 다른 작가의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 나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그의 작업실 화이트보드에 의문의 메시지를 써 놓고 사라진 것을 본다. “오한기가 이러니까 개새끼지.” 누굴까? 작업실을 같이 쓰는 동료 작가? 화장실 수리를 위해 다녀간 수리 기사? 장난치고는 정도를 넘어선 것 같다. 그는 문장을 지운 뒤 의문의 침입자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긴다. “Who are you?” 정체불명의 침입자는 이후에도 그가 작업실을 비운 틈을 타고 들어와 끊임없이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그렇게 그들은 화이트보드 위로 기이한 문답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Who are you?
나? 10년 뒤 오한기. 오한기는 여전히 개새끼.
10년 후 오한기는 행복해?
네 인생? 망했잖아.1)
자신을 10년 뒤의 오한기라고 지칭하는 그는 대체 누굴까? 사라진 얼터 에고 한상경의 원혼? 아니면···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오한기에게서 사라져 버린 건 한상경이 아니라 오한기였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오한기는 자신을 오한기라고 착각하고 있는 한상경인 셈이다. 이러한 가정이 옳다면 곧바로 뒤따르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진짜 오한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가 실제로 만나 본 문인들은 거의가 지쳐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 왠지 실망했던 것 같다. 뭔가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물아일체로 선망하던 작가들이 한창일 때 쓴 글들을 얼마 전에서야 보고 들어온 거니까, 열심일 때의 그 모습만 봤으니까.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이제는 불혹이 넘어 부모가 되거나··· 아니면 단지 먹고사는 데 급급해져서 작가 생활을 이어 갈 뿐, 혼이 완전히 죽어 버린 채 관성적으로 작업을 지속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파티는 이미 진작에 끝났으며, 너는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데 누가 누구를 배신했고 왜 나는 실망을 했을까? 단지 내가 기대했던 거랑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조차도 황당한 당시의 내 감정에 대해 곰곰이 다시 생각을 해 보면,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나는 단순히 문학이 아닌 뭔가 다른 것들을 기대하고 들어왔던 것 같다. 이를테면 행복 같은 것. 그래서 무엇보다도 미래의 나 자신한테 배신당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내가 만난 문인들의 지친 표정이 오히려 내게 위안이 되거나 어떤 지표가 되기도 한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 「센시니」가 다루는 것도 바로 이 불길한 평행 이론이 가져다주는 변덕과 위안이다. 스페인 히로나에 거주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던 젊은 칠레 작가인 화자는 어느 날 알코이 문학상의 수상자 명단에서 루이스 안토니오 센시니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센시니는 과거 아르헨티나에서 명망 높았던 원로 작가였으나, 지금은 스페인에서 잊힌 채 소규모 지방 문학상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 가고 있다. 평소부터 센시니를 흠모해 마지않던 화자는 그에게 존경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긴밀한 서신 왕래가 시작된다. 이들의 서신은 문학에 대한 애정 어린 한담보다는 대체로는 작가로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주를 이룬다. 어느 지방 문학상이 당선 확률이 높은지, 심사 위원들의 성향은 어떤지, 같은 원고를 제목만 바꿔서 여러 곳에 투고하는 법 등등. 센시니에게서 묘한 연대감을 느끼는 화자는 그를 일종의 선배이자 다가올 미래의 자신으로서 인식하게 된다. 이윽고 서신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화자는 센시니의 아들 그레고리오가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시절 실종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아내와 딸 미란다와 함께 고향을 떠나 마드리드의 외진 동네에 위치한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들의 실종은 센시니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그가 지방 문학상에 집착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함임이 드러난다. 그러던 어느 날 센시니의 편지가 갑작스레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는 센시니가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삶을 지병으로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과거의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걸까? 일단 나 자신은 아닌 것 같다. 다른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내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외면하길 택하는 나약한 타입이라서. 아마 이런 식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채, 그러면서도 뒤돌아볼 용기가 없어 벽만 보고 선 채로 오들오들 떨다가 죽음만을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과거의 내가 누군가를 위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면식도 없는 한 작가의 십 년 후로부터 모종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를 들어 십 년 후의 누군가에게 말이다. 아직은 그게 누가 될지 잘 모르겠다. 오한기는 갓난아기였던 딸아이를 아기띠에 안아 재우며 선 채로 「바게트 소년병」을 썼다고 한다. 센시니 역시 아내와 딸이 잠들고 난 뒤의 늦은 밤에 부엌 식탁에 앉아 글을 썼다고 한다. 딸 미란다에게도 문학을 전공하게 할 것이냐는 젊은 작가의 편지에 센시니는 다음과 같이 답장한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네. 우리 공주님은 의학을 전공할 거야.”
|
《문장웹진》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25년 한 해 동안 진행한 <문장웹진 Rewind>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라는 이름으로 이어 갑니다. |
1) 오한기, 『소설 쓰기 싫은 날』, 민음사, 2025.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