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지문 너머로 하나의 선율이

  • 작성일 2026-03-01

   [편집위원 기획 - 문학, 음악, 장면들]


   지문 너머로 하나의 선율이


아를



   최초의 기억은 들렸던 것이다.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 할머니는 늘 자기 전에 적혀 있는 그것들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생경한 목소리와 리듬으로 그것들은 발화되었고 그 목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거기에 분명히 있었지만 어느 영겁 너머 다른 차원에서 내려오는 작은 신의 목소리처럼 들렸기에 그 소리의 흐름 속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나 또한 내가 무엇인지, 내가 있는 곳을 잊어버렸다. 그 뜻 모를 말들을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거의 기도처럼, 주문처럼, 노래처럼 들렸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전해지고 또 쓰인 것들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로 전해졌고 어린 나는 그것들을 어설프게나마 소리 내어 보기도 했다. 그 유년의 밤 동안 할머니는 나의 유일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어린 나의 두 귀가 되어 주는 밤의 훌륭한 안내자였다.

   구전. 우화. 신화. 전설. 민담. 시대를 넘어서도 계속되는 이야기들. 되풀이되는 노래 같은 것들. 요정. 고블린. 거인. 요괴. 도깨비. 기사와 문지기. 바드와 리라. 검과 용사. 광장의 하프 소리. 그것들은 때때로 꿈속을 수호하며 때론 일상의 그림자들이 되어 호출하면 응답할 것만 같았다. 

   들려지는 것들이 쓰여질 때, 쓰여진 것들이 들릴 때. 적혀 있는 것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귀로 전해지는 것. 반복해서 전해지고 지금도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것. 어느 날 들렸던 하나의 목소리가, 어느 한 구절이 누군가를 살렸다면, 그로 인해 살아갈 수도 있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빌어 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에 기대어 계속 갈 수 있었던 수많은 시간들로부터 지금도 계속되는 어떤 순간들이 지속될 수 있었을 뿐이고 그다음이 있기를 그 순간들로부터 감히 바랄 수 있었던 것이다. 늘 목숨처럼 붙들고 있지만 동시에 늘 너무 아득하기만 한 것에 대해 대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끝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며칠 동안 정신이 몇 번이나 나갈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셀 수 없을 정도로 꿈을 정말 많이 꿨는데 잠깐의 꿈에서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 꿈속의 소리였겠지만 귓가에서 목소리는 오래 머물렀다. 병실의 침대가 아니라 이제 마침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나는 온 건가? 눈을 뜨면 나의 옆에 누워 그것을 읽어 주는 할머니는 없었지만 나는 들었다. 이곳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세월을 넘어서. 그 밤 이전의 무수한 밤들로부터, 그 밤의 영겁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를. 초연해지고자 열망하는 마음을 이미 초월해 있는 곳으로부터 목소리는 들린다는 것이. 나의 뼈의 일부는 부러졌고 언제까지 누워 있어야 할지 그때는 몰랐다. 부서진 건 뼈뿐만이 아니라 또다시 산산조각 나 버린 내 자신이었다. 왜 이런 시간이 올 때마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어 버렸으면 아닌 다른 생각이 먼저 떠오르지는 않는 걸까.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믿음이 부서진다는 건 믿음이 있다고 또다시 믿었던 내가 있었다는 거겠지. 그게 뭐 알 바, 라는 듯이, 소리는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지속된다. 병실에 누워 있는 나는 그 불경 소리를 듣는 어린 내가 되어 누워 있는다.

   누워 있는 동안 다시 병원의 일상 속에서 들리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 귓가에서 맴도는 소리. 음악. 음악이 아닌 것. 그 전부이며 아무것도 아니며 그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는 것. 정말 최악인 건 이어폰도 이어플러그도 낄 힘조차 없을 때. 하지만 들려온다. 물방울 맺히는. 맺혀 흐르는. 물소리. 물결이 물결로 굽이치는. 끝도 없이 퍼져 나가는. 이름에 물이 있어서 그런가. 물처럼 살아라, 할머니의 목소리. 들린다. 그들의 목소리. 눈을 감으면 들려온다. 꿈속을 타고 귓가에. 결코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계속되는 슬픔이 있다. 그리고 아껴 듣는 음악들. 부적과도 같은. 거꾸로 솟는 음계들을 상상한다. 더는 없어도 없다는 것과도 상관없이 계속되는 목소리들. 살고 싶게 하고, 살고 싶게 하는 것들이 정말 살게 하듯이. 어느 날은 곤두박질쳐 죽고 싶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살아라, 하는 것들, 흘러, 흘러가라는 것들. 이 모든 것들은 도대체 무엇이고 왜 언제고 되돌아오고 들려오는 것인가. 어째서 계속되는 것인가. 살고 싶지 않을 때도 그 소리들은 들려온다. 살고 싶지 않은 마음과도 상관없이. 삶보다 어쩌면 더 질긴 것 같은 그것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살 수도 있는 것인지. 공중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그저 공중이 있다고 믿고 싶은 건지. 바닥까지 떨어지고 거꾸로 솟아오르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공기 중에 떠돌며 귓가를 맴도는. 너와는 상관없이, 너의 상태와도 상관없이. 그들과도 상관없이. 무수히 너를 다독이는. 너를 따라오는 소리들.


   어떤 친구들은 가끔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가끔은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 묻고 싶지만 어떤 결계라도 있는 것처럼, 나는 입을 뗄 수가 없다. 그들은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거기에 없다. 그 허밍이 빛의 테두리처럼 그들의 곁을 두르고 있을 때, 나는 잠시 그 곁에 있었기에 그것을 들을 수 있었을 뿐. 그 순간은 우연도 필연도 운명도 아닌 것 같다. 살아 있게 하는 것과 살아 있다는 건 너무 다른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생경함 속에 너는 어떻게 전부를 걸 수 있니. 하지만 늘 너는 전부를 건다. 그 생경함만이 너의 전부인 것처럼. 아껴 읽었던 것들. 아껴 들었던 것들. 기대어 울었던 성전과도 같았던 것들. 그 시간들 속에 내가 살았다는 것보다도 더 사실인 것 같았던 종잇장 사이의 숨 쉬고 있는 세계. 견뎌야 하는 소리들보다 더 실제와 같았던 음률들. 울림들. 나는 그걸 뭐라 불러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른다. 그것들 때문에 네가 살았으며, 그때를 살게 한 감각들의 일부가 죽은 것만 같아도 여전히 맴돌아 어느 날의 너를, 나를 또 다시 살게 한다는 것만을. 전부 다 부질없구나 때로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 소리와 구절들을 쫓아 여전히 가는구나. 너는 가고 있구나. 그 궤적을 따라 숨을 쉬는 것처럼 너는 부르고 있구나. 살아가는구나. 꿈꾸는 것을 들으며, 그 들리는 것들을 따라 한없이 가고 있구나. 

   할머니의 불경 읽는 소리는 죽을 때까지 내 귓전을 맴돌 것이다. 할머니의 할머니가 죽은 이후에도,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죽고 난 이후에도 그랬듯이. 할머니로부터 나에게 들려왔던 것처럼. 그들의 입과 나의 입을 통해 전해질 것이며. 그리고 내가 죽은 이후에도. 소리는 이어지고 전해질 것이다. 물론 나는 내가 죽은 이후를 알지 못한다. 다만 시대를 거쳐 어느 날 내게 들린 것들에 기대어, 어느 날의 내가 살아가듯이. 어떤 경로를 통해 지구 정반대 편의 음악이 내게 와닿기도 하는 순간들처럼. 그리고 그 소리들을 따라 어느 기원을 향해 가기도 하는 것처럼. 상상할 수 없는 곳의 상상할 수 없는 이의 무엇보다 절박했을 소리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금 이 순간 너머의 먼 미래까지도. 죽음 이후 들릴 무언가를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있게 하는 것이다.


   작은 교실 모퉁이에 앉아 문장을 따라가다 앉은 곳을 잊는 시간. 도서관 책장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무언가를 한없이 기다리는 시간. 난간에 기대어 앉아 붙든 것을 소리 내어 읽으며 견디는 시간. 내가 듣는 것은 나의 목소리였지만 문장들을 따라가는 나의 목소리는 이미 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떤 구절들은 자연스럽게 암송하게 되었고 그 어떤 구절로 인해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음을 믿으며, 그 불가능 너머를 더듬어가며. 볼 수는 없어도 그것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믿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시간들 때문인지 혼자 있을 때면 여전히, 무언가를 읽을 때면 종종 소리 내어 읽어 본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좀 신비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분명 텍스트를 읽고 있지만 그것이 음악처럼 들리는 순간이. 그리고 문자 너머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순간이. 마치 들리는 것처럼 읽히는 순간이. 그들을 통해 쓰여진 것들을 나는 소리 내어 읽어 본다, 가 아닌 불러 본다, 에 더 가까운 순간이. 이렇게 불러야지 하고 그것들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선율이 되어 흘러나왔을 뿐. 그들도 언젠가 이것들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들리지 않지만, 어떤 순간이 겹쳐진다. 어느 시간대의 목소리가 또 다른 시간대의 목소리와 포개어진다. 비록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기에 실제로 겹쳐질 수는 없었다 해도 어느 시간대의 목소리가 또 다른 시간대의 목소리와 공명했다는 것만으로도 이것은 분명한 사건이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울림으로. 잠시, 조우했다는 것. 이것은 읽기 너머의,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읽기의 가장 두근거리는 순간이다. 그의 호흡을 통해 나의 호흡을 얹어 보고 그 운율을 따라 그 속으로 가만히 걸어가 보는 일, 사라져 보는 일, 상상해 보는 일. 때로는 음악처럼 들리는 순간의 목격자, 청자가 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순간들이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마주할 수 있게 된, 상상만 해 보았던 그들의 목소리와 그 호흡은 대부분 일치했고, 호흡은 일치해도 목소리는 상상과 전혀 다를 때 또한 있었다. 나는 이 일치와 비-일치의 순간을 마주할 때의 무언가 해방되는 것 같은 짜릿함이 좋았다. 한 음악을 아주 오랜 시간 반복해서 들으면, 그다음이 저절로 예측되는 순간이 있다. 여기서 이 음계로 전환되지, 이다음 구간에는 이 구간이, 하고 다가올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의 짜릿함처럼. 



   ❄

   2025년의 연말, 나는 k와 h와 함께 작은 낭독극을 준비했다. k의 시를 읽는 날들이 있었기에 h와 나는 만나게 되었을까? 그럼 k와 나는? h와 k는? 그럼 k와 h와 나는? 우리 셋의 공통점이라면 아마도 거의 유령과 같은 기분으로 각자의 어떤 시간들을 지나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엉뚱한 면이 있다는 것? (물론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h가 k의 시들로 이루어진 낭독극을 구성했고 나는 그 낭독극을 위한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했다. 행사 당일, 나는 미리 준비한 음악들을 극의 구성에 맞게 재생시키고 k와 h와 나는 여러 막으로 나뉘어 배치된 시들을 번갈아 가며 낭독했다. 

   오늘과 같은 시간을 생각하면 나는 늘 2016년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 2016년 나는 애정하는 친구들과 함께 파크사운드라는 밴드를 만들었는데, 그들의 시와 목소리를 정말 사랑했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었다. 처음 그들의 목소리에 나의 목소리를 얹어 보고 서로의 목소리 위에 서로의 목소리를 얹으며 어떤 소리들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 서로가 합을 이루며 함께 만들어 내는 소리가 참 좋았다. 혼자 음악을 만들고 무대에 오르고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던 그 순간에는 또 다른 두근거림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셋이기에 셋이 모였기에 할 수 있는 무언가였으니까. 파크사운드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각자 무언가를 썼고 그것을 셋이 함께 만든 소책자에 담았고 곡으로 만들어 낭독하고 불렀다. 

   어떤 날의 목소리가 어떤 날에 겹쳐지며 어떤 날로 이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여전히 홀로, 때로는 둘이서, 셋이서 그 순간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무언가를 계속하고 있다. 목소리는 겹쳐지고 겹쳐진 목소리 위에 또 다른 목소리가 겹쳐지고, 다른 시간대 위에서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그 목소리들을 따라 나는 앞으로도 계속 가 볼 생각이다.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3월호의 기획 콘텐츠 ‘문학, 음악, 장면들’에서는 세 분의 필자가 음악과 문학을 둘러싼 고유한 에세이와 선율 들을 들려드립니다. 한번은 가장 먼 곳에서, 몇 번은 내 안에서 뒤섞이고야 말았던 장면들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진행 : 윤재민 평론가 패널 :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장웹진 9월호 비평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문장웹진 편집위원이자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그리고 오늘 패널로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전적으로 저의 사심 때문인데요. 그간 제가 글이나 활동하는 것들을 인상 깊게 보았고, 궁금했던 분들 모신 겁니다. 참석자 분들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언제 데뷔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부터 먼저 하실까요? 현재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조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성을 떼고서 필명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교 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안희연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원고에 넣을 약력을 요청받으면 이 정도로만 저를 소개하곤해서 어떤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진 안녕하세요. 저는 2025년에 김기태론으로 창비 신인 평론상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미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1년이 된 것 같고, 조금씩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생활인으로서 돈을 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윤재민 오늘 이렇게 모신 세 분. 연차가 현재 평론가가 3년, 그리고 최선교 평론가가 4년 차 정도 됐죠? 2022년도니까 4년. 그다음에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1년 되셨지요? 이미진 아마 발표 기준으로는 1년이 조금 안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이제 1주년 돼 가시는군요. 세 분들 모두 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시고 계시거나,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드는 분들과 대화 나눠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신인 비평가’로서 가지고 계시는 여러 가지 고민이나 문제나 목표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요.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각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지평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비평가로 데뷔하게 된 각자의 계기가 있을 텐데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최선교 평론가가 된 계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해 보자면 국문과 대학원 수업 과제로 처음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 평론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것에 심취하고 매료된 상태를 무척 즐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매료되었는지 꼭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