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미완의 봄, Primave

  • 작성일 2026-04-01

[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미완의 봄, Primave


김봄


   이십 대 중반, 나는 강남구 신사동에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6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다년간의 아르바이트 경험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은 자신 있었다. 회사만 아니면 된다, 뭔가 작게라도 만들어 팔 수 있는 가게를 해 보자, 그런 마음으로 사방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강남시장 인근을 걷다 가게 자리를 발견했고 나는 몇 주 동안 매일같이 가게 앞으로 출근해 시간대별·연령별 유동 인구를 조사했다. 신사대로와 압구정대로 사이를 가로지르는 꽤 널찍한 골목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유동 인구가 많았다. 커피 선호도가 높은 소호 사무실이 많은 동네였고, 연령대도 청장년층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권리금도 없이 월세 30만 원만 내면 되는 자리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굳은 의지만 가지고 결심한 바를 밀어붙였다.

   그런데 정작 가게를 계약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물음표로 남았다. 내 머릿속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라는 막연한 테마만 존재했을 뿐 어떤 콘셉트로 가게 이미지를 만들 것인지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가게 이름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데, 무어라 부르지?”


   나는 난데없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그렇게 쿨하고 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미 그 골목 곳곳에 즐비한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들처럼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만들 생각도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으로 어림없는 일이기도 했다.

   커피 가게의 정체성은 커피 원두가 좌우하는 법이니 나는 이태리 원두 ‘라바짜’를 사용하기로 한 것에서부터 가게 콘셉트를 잡아가기로 했다. 당시 주변 가게에서는 9,800원짜리 코스트코 스타벅스 원두를 사서 쓰거나, 그와 비슷하거나 더 낮은 가격으로 유통되는 영세업자들의 원두를 사다 썼다. 대상에서 만든 ‘로즈버드’라는 전문 브랜드는 가격도 품질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내 입에는 좀 가볍게 느껴졌다. 진하면서 크레마가 풍부한 커피를 만들어 승부하고 싶었기에 나는 대담하게도 44,000원짜리 라바짜 원두를 선택했다. 1킬로그램 원두 한 봉지에 100잔 정도 커피를 만들 수 있는데, 컵과 뚜껑, 컵 홀더, 빨대와 같은 부자재와 우유 등의 식재료 가격을 따져 보면 다른 가게에 비해 마진율이 크게 떨어졌다.

   이문이 좀 적게 남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도전하는 것이니만큼 나는 공들여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가게는 작아도 이탈리아 원두를 쓰느니만큼 정통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고 가게 이름을 이탈리아어에서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단어들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고민하다가 ‘봄’을 뜻하는 ‘프리마베라(Primavera)’로 결정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실개천이 녹아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오페라 주역 여성 가수인 ‘프리마돈나(Prima Donna)’도 떠오르는 게 ‘시작이면서 으뜸이 되는, 새롭게 도약하는 마음’을 품기에 좋은 단어였다.

   가게 간판에는 원어에서 철자 두 개가 빠진 ‘Primave’가 걸렸다. 거의 제작이 완료된 벽 간판 안에 전체 글자가 다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왠지 ‘완성되지 못한 프리마베라’가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손님들이 가게 이름의 뜻을 물을 때마다 나는 호기롭게 ‘미완의 봄’이란 의미라고 설명해 주었다. 왠지 모르게 뭔가 완성되지 못한 게 남아 있을 것 같은 여지를 보여 주고 싶었었나 보다, 나는. 듣는 사람들마다 ‘캬’하는 소리를 내며 감탄을 해 줬고 그건 또다시 나를 고무시켰다.

   2001년, 프라마베의 그랜드 오픈을 앞두고 9.11이 발발했다. 어쩌면 가게도 오픈하지 못하고 세상과 함께 멸망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며칠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나는 ‘미완의 봄’을 무사히 오픈했다. 피크 타임이면 내가 만든 커피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손이 무척이나 빠른 나는 30초마다 한 잔씩 커피를 조제해 손님 앞에 내놓았다. 그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파란만장했던 시절이었는데도 나는 좀처럼 지칠 줄을 몰랐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생생한 에너지를 탑재한 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나는 명함 이벤트 같은 마케팅 전략을 자주 활용했다. 손님들의 이름이 담긴 명함을 보면서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이 회사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일까, 상상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중에는 비룡소, 황금가지, 민음사 등의 강남출판문화센터 명함도 많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들의 명함을 책을 읽는 것처럼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읽다 보면 뭔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신기한 기물을 손에 쥔 선무당처럼 집중하다가, 멍해지다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음을 상기했다. 봉인이 해제된 기억들은 쉼 없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처럼 감흥에 젖어 들다가도 자주 선득함을 느끼곤 했다. 다시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결국 나는 다시 시작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얼마 안 되어 나는 가게를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내놓고 학교에 들어갔다. 졸업을 하면서 스터디를 결성해 1년 동안 12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그 당시에 썼던 작품들 몇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언급되기도 했다. 금방 될 것 같다가도 안 되기를 반복하면서 7년이 지났다. 나는 또 새로이 학교에 입학해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10년이면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동안 쏟은 열정과 시간이 아까웠지만 글 쓰며 사는 삶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할 만큼 했으므로 미련 같은 건 없었다.

 

   강남시장 골목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나는 그 골목에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프리마베는 다른 커피 가게로 바뀐 후였고, 이전에 있던 다른 가게들도 이름을 바꾼 가게가 많았다. 나는 그 가게들을 지나쳐 민음사 회의실로 향했다. 10년 전 내게 명함을 건네주었던 손님들이 일하던 건물 안으로, 그들이 부르는 내 이름을 들으며 그곳으로 들어갔다.


   “김봄 작가님 맞으시죠?”


   오랜 습작기 동안 나는 내 본래의 이름을 유지해 응모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이름이 너무 흔해서 그런가 하며 괜히 이름을 탓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성연’이라는 이름으로 접수를 하기도 했었다. ‘성연’으로는 몇 번 최종심에 올랐다. 주역에 능통한 어떤 선생님이 지어 주신 ‘정진’이란 이름으로도 투고를 했었지만 그건 영 신통치가 않았다. 물론 작품이 신통하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농담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발음, ‘봄’이란 이름으로 응모를 했는데, 나조차도 응모한 것을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다 포기하고 학원이나 차려서 학생들을 가르쳐야지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그때 내게 ‘김봄’이란 이름을 부르며 민음사 대표가 전화를 해 온 것이었다.

 시상식장에서 나는 나의 파란만장했던 이십 대의 어느 날, 이곳에서 근무하던 분들의 명함을 받았던 일과 오래 근무하신 분들이라면 제가 타 드린 커피를 드셨을 수도 있을 거라는 소감을 밝혔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과 나는 운명의 수레바퀴 안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은 ‘봄’이란 필명을 아주 낯설어했다. ‘범’에 가까운 인상이라 그런가? 나는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며 머쓱해했다. 내가 ‘봄’에 딱 붙은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하니까. 가증스러운 필명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봄’이라는 단어의 소리가 주는 기운이 좋았다. 그런 작명을 스스로 했다는 게 뿌듯하기도 했고, 나아가 여름, 가을, 겨울도 다 내 이름으로 쓰고 싶어졌다.

   여러 이름을 갖는 것은 성명학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우리 선조들은 대부분 본명(本名) 외에 아명(兒名)을 널리 사용하였다. 성인이 되면 아명을 버리고 관명(冠名)을 지었다. 성명학은 사주팔자의 선천운을 후천적으로 추동(推動)할 수 있는 유일한 가변 수단으로 이름의 운을 따지는 학문이다. 새로 만든 이름의 운으로 변화를 얻으려 함이 성명학의 본질이다. 운명은 변하기에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 한다. 성명학의 관점으로 보면, 나는 새롭게 지은 ‘봄’이라는 필명으로 내 삶을 한층 더 가변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내 이름 봄은 신록으로 찬란해지는 계절의 이름 봄이 아니라 ‘보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물론 ‘보다’와 ‘봄’은 따로 떨어진 단어가 아니다. 봄이 따뜻한 온기가 다가오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따뜻해진 봄볕 가운데 만물이 생동하는 새 계절을 새롭게 보는 ‘새봄’을 봄의 근원으로 두는 이들도 많다. 그립고 보고 싶으면 바라보게 되고, 보다 보면 봄이 오는 것이니.

  내가 ‘보다’의 ‘봄’을 선택하게 된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보고, 더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도, 관찰력도 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잘 관찰하고 잘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그건 내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기에, 나는 여전히 ‘봄’으로 살고 있다. 돌보고, 맛보고, 해 보면서 김봄으로 살아온 지도 어언 15년이 넘었다. 나는 김봄의 정체성으로 권리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요즘에는 나를 본명으로 대하는 사람보다 ‘봄’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더 자주, 많이 만난다. 어디 그뿐인가. 매년, 봄이 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봄’을 연호한다. 어서 와서 온 누리에 만발하라고 소리친다.

   성명학 연구를 살펴보면 사물의 명칭을 명명(命名)하는 것에 대해서 “천지(天地)의 도(道)를 본받은 것을 호(號)라 하고, 소리를 내어 사물의 이름을 명명(命名)한 것을 명(名)이라 하였다.”1)하고 호(號)와 명(名)에 대하여 “천지(天地)의 도(道)를 본받은 것이, 호(號)가 되고, 소리를 내어 사물의 이름을 명명한 것이, 명(名)이 되었다. 명(名)과 호(號)가 소리는 다르지만, 근본(根本)은 같다.”2)고 한다. 따라서 호(號)는 천지(天地)에 대한 숭고한 사명과 의미를 지닌 것이 되고, 명(名)은 사물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근본은 하나로 천지의 도를 본받는 것이 같다고 본 것이다.

   그처럼 나를 ‘봄’으로 불러 주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타고 넘어온 에너지들이 나에게도 도착하고, 나는 남과 다른 ‘봄’으로 나의 정체성을 가르고 있다. 새록새록 연두색 이파리가 솟아나는 새봄은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완료되지 않은 봄인 채로, 언제라도 변화할 수 있는 보는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프리마베! **



1) 『春秋繁露(춘춘번로)』, 「察名號(찰명호)」: “謞而效天地謂地號, 鳴而施命謂之名, 名之爲言.”

2) 같은 책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4월호의 기획 콘텐츠는 ‘작가들의 필명’이에요. 필명으로 활동 중인 시인, 소설가, 평론가 3인이 자신의 필명에 얽힌 이야기들을 독자분들께 전해드립니다. 일상의 시간과 작가로서의 시간을 구분해주는 필명이 세 사람의 글쓰기와 삶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함께 살펴봐 주시길 바랍니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진행 : 윤재민 평론가 패널 :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장웹진 9월호 비평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문장웹진 편집위원이자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그리고 오늘 패널로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전적으로 저의 사심 때문인데요. 그간 제가 글이나 활동하는 것들을 인상 깊게 보았고, 궁금했던 분들 모신 겁니다. 참석자 분들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언제 데뷔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부터 먼저 하실까요? 현재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조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성을 떼고서 필명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교 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안희연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원고에 넣을 약력을 요청받으면 이 정도로만 저를 소개하곤해서 어떤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진 안녕하세요. 저는 2025년에 김기태론으로 창비 신인 평론상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미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1년이 된 것 같고, 조금씩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생활인으로서 돈을 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윤재민 오늘 이렇게 모신 세 분. 연차가 현재 평론가가 3년, 그리고 최선교 평론가가 4년 차 정도 됐죠? 2022년도니까 4년. 그다음에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1년 되셨지요? 이미진 아마 발표 기준으로는 1년이 조금 안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이제 1주년 돼 가시는군요. 세 분들 모두 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시고 계시거나,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드는 분들과 대화 나눠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신인 비평가’로서 가지고 계시는 여러 가지 고민이나 문제나 목표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요.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각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지평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비평가로 데뷔하게 된 각자의 계기가 있을 텐데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최선교 평론가가 된 계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해 보자면 국문과 대학원 수업 과제로 처음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 평론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것에 심취하고 매료된 상태를 무척 즐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매료되었는지 꼭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