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과 언어
- 작성일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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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 작가들의 필명]
옷장과 언어
이자켓
저는 작가로 마주하는 첫 만남에서 대부분 필명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럴 때 꺼내입는 자켓은 한 벌이 아닙니다. 제게는 각기 다르게 디자인된 자켓이 여러 벌 있고 매 시기 골몰하던 것을 나름대로 다르게 직조해 보며 다른 답을 해 봅니다. 각기 진의를 담은 것이라 하나만 꼽아 진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 글은 그중 한 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번 다르긴 하여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면 ‘자켓’을 말할 때 문학을 빼놓은 적은 없습니다. 필명에 관한 질문은 질문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지만, 저는 그보다 이전에 ‘자켓’에 대한 질문자이기에 이 명명에 문학을 둘러싼 어떤 관점이 깃들어 있음을 염두하고 있으니까요.
문학은 무상을 가장한 유상의 것입니다. 자연히 주어지는 것 같지만 물질적 지불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불은 따르기 마련이고 그러한 점에서 거래처가 불분명한 자영업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인위 속에서 예상치 못한 덤이 따라옵니다. 신기루 같은 덤은 원두 찌꺼기가 담긴 쓰레기봉투를 내놓을 때, 건너편 상점의 불이 꺼졌을 때, 공산품을 포장하고 있을 때 거미처럼 있다가 사라집니다.
이 가게는 폐점한 다이보 커피가 여전히 연중무휴하듯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를 따릅니다. 매일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처럼 때로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잊으며, 한편으로 옷을 입어야 하는가 되물으며 가게를 열고 닫지요.
저는 특별히 옷을 모으거나 자주 구매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빈티지와 구제를 구분하며 옷의 내력과 미학을 따르는 이도 아닙니다. 다만 옷을 입고 살기에 되도록 편하고 잘 맞는 것을 갖추어 오래도록 입습니다. 지금 옷장에 있는 옷들은 대개 10년이 넘었거나 비교적 새것인 제품들은 제 성정을 잘 아는 이들에게 선물 받은 것입니다. 제가 추구하지 않아도 삶에는 여러 변화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의도를 가지고 추구하는 변화는 문학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면 충분하다고 여겨왔습니다. 작년 봄에는 꿰맬 수 없이 해진 것들을 정리하였으니 어떤 옷들은 이미 그리고 아직 내가 착용하는 옷들은 무형이 되어 갑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내게는 주요한 옷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시장에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사다 준 잠바의 모습을 한 것인데 짙은 쪽빛에 표면이 매끄러운 것입니다. 스포츠를 위한 바람막이 디자인이었고 지금도 즐겨 입는 필드 재킷의 디자인과도 닮았습니다. 품이 넉넉하고 부담 없이 입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그것을 입고 그와 비슷한 색채의 어둠 속에서 맹꽁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입고 배드민턴을 치러 한겨울에 나섰다가 추위에 떨며 스테인리스로 된 벤치에 웅크려 있을 때 친구들과 이름 모를 동네 아이들이 패딩을 벗어 제 위에 쌓아 두기도 했습니다. 그때 옷더미 속에서 포근한 어둠을 보았고 드문드문 소리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을 벗고 의류 수거함에 내어 두기로 했을 때 나는 하얀 가재를 묻고 왔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 갑니다. 그것은 얇지도 두텁지도 않은 간절기에 어울리는 잠바였습니다.
옷장 속의 옷들은 어떤 것을 꺼내도 불편함이 없고 멋대로 자라는 털이나 걸을 때 인식한 다리처럼 낯설지 않습니다. 옷들은 나를 놀라게 하거나 이질적으로 만드는 데 관심이 없고 다만 제가 그것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만남을 야기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꽤 오래 입었음에도 이따금 내가 예상하지 못한 범주의 조합이 만들어지곤 합니다. 그런 날은 마음이 선명하여 조금 더 걷습니다.
모든 언어는 필시 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우리를 조우하러 오는 그들은 소통을 위해 옷을 입고 옵니다. 그러나 비니를 쓴 자가 비니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때 걸친 것으로 그를 명명합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이곳에 온 셈입니다.
옷차림은 공간과 문화적인 것에 따라 변모하고 그 의미를 달리합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내가 끝내 만나고 싶은 것은 걸친 것이 아니라 벗겨진 것입니다. 벗기 위해 걸친 것입니다. 벗고 있기에 걸친 것이 아닙니다. 벗기 위해 걸친다는 것에는 접촉을 고려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제게 명명은 수용소의 번호들처럼 무한히 늘어나는 것과 명백히 구분되고 ‘자켓’은 임의적이지 않은 분명한 것이 됩니다. 재킷이 양산되고 보급되는 것과 달리 자켓은 구분되어 불리고 각기의 부름에서 고유한 명명입니다. 나는 제한하여 제안합니다.
유별나다.
유별은 다름이 있다는 것이죠. 사전에서 두 가지 용례를 더 찾을 수 있는데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작별하다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종류에 따라 나누어 구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걸친 이름은 개별적인 관점에서 유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별보다는 본래의 성질을 알아보거나 덧대며 구별하는 것이며 끝내 유별을 고할 방식입니다. 그렇게 재킷의 어원과 작별을 고합니다.
재킷은 그 자체로 몇 가지 성격을 띨 수 있지만 그것이 전통적인 방식을 따를 것인지(이마저도 전통의 허술함에 따라 유머가 되곤 합니다.) 통상적으로 어울리던 것을 잊고 다른 맥락을 가진 것과 섞어 입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조합은 한정된 것을 통하여 다른 것을 만들어 보는 것이고 자태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재킷을 두고 때론 실오라기에 몰두할 수도, 그것을 모두 풀어 다시 짰을 때 여전한 것인지 등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실밥이 홀로 있습니다. 예절을 거절하며 동떨어져 실밥이 숙식합니다.
멀뚱히 실밥을 지켜봅니다. 살뜰히 옷의 구멍을 꿰매면서. 이 옷은 소매와 목둘레가 해졌습니다. 바느질하다 손을 비추어 보면 손가락이 보입니다. 때때로 다른 것도 비춥니다. 실밥을 지켜보는 동안 저런 색감의 옷이 없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문장으로 표현하기에 오묘한 색입니다. 누군가 저 색의 이름을 지었을까요?
청소기를 돌리다 멈춰 서서 실밥을 쥐어 책상에 올려 둡니다. 실밥은 어느 날 책상에서 이미 떠나고 없습니다.
저는 옷장을 하나 조립했습니다. 설명서에는 2, 3명의 기호 인간이 그려져 있고 혼자 조립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뒤판이 될 판자는 방의 절반을 넘는 크기여서 이사 직후 짐이 널브러져 있던 방에서 난처하게 발을 조심히 디디며 각 부품을 연결했습니다. 어찌저찌 옷장이 될 것을 눕힌 채로 조립하고 나니 세우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도 안간힘을 써서 그것을 세웁니다. 그러고 보니 두 개로 이루어진 미닫이문이 무언가 엉성합니다. 중심을 향해서 여닫혀야 할 것이 한 모서리 쪽으로만 향해 있습니다. 안에서 옷을 꺼내는 것에는 지장이 없어 그대로 쭉 사용하고 있습니다.
2, 3명과 함께 했다면 달랐을까요? 나는 그런대로 옷장을 좋아합니다. 아마 세계에는 옷장을 잘못 조립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다시 만들기에 힘에 부쳐 그대로 두고 사용하는 사람들 또한 있겠지요. 두 개의 미닫이문에 달린 손잡이는 설계된 것과 달리 열고 닫으며 맞부딪히게 되었고 굵직한 흠이 몇 개 생겼습니다. 때때로 그것을 만져 보기도 합니다. 더불어 잘못 조립된 미닫이문은 완전히 밀폐될 수 없습니다. 완벽히 닫힐 수 없는 옷장은 항시 틈을 가지고 열려 있고 그곳을 통해 다른 존재들이 내부를 누빌지도 모르죠. 의미장 안에 여러 벌의 옷이 있습니다. 옷이 많으면 그들은 서로를 밀치지 못하고 그저 포개어집니다. 있는 대로 축소됩니다. 옷이 많으면 그들은 기억에서도 축소됩니다. 간절기에 몇 번 입어야겠다 싶었던 것을 어떤 해에는 완전히 잊고 계절이 지나 옷을 정리할 때 찾곤 합니다. 옷을 꺼내어 입으면 포개어지는 동안 생긴 주름이 보이고 상의는 상의를 벗어나고 하의는 하의를 벗어납니다. 우리는 때로 상의하는데 상이하여 하이(遐邇)로 거리가 있는 이들을 불러 모읍니다. 미닫이문을 닫을 때 기우뚱하며 끝내 닫히지 않는 옷장을 조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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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4월호의 기획 콘텐츠는 ‘작가들의 필명’이에요. 필명으로 활동 중인 시인, 소설가, 평론가 3인이 자신의 필명에 얽힌 이야기들을 독자분들께 전해드립니다. 일상의 시간과 작가로서의 시간을 구분해 주는 필명이 세 사람의 글쓰기와 삶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함께 살펴봐 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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