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모임-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3
- 작성일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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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문장웹진 독자모임]
언제나 다층적인 읽기를 위한 좌담 3
참여 : 김주선(사회, 문학평론가), 김영삼, 송민우, 이다희, 이서영
김주선 : 세 번째 《문장 웹진》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우다영의 「노크」(《현대문학》 3월호), 이주혜의 「아무도 없는 집」(《창작과비평》 2018 봄호),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나온 양안다의 첫 시집 『작은 미래의 책』(현대문학, 2018)입니다. 먼저 우다영 작가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읽기에 이 소설은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장르적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집중해서 따라 읽다 보면 기이하고 낯선 두려움 속에서 어떤 긴장감을 계속 느끼게 됩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파파와의 관계는 정말 묘한데, 이건 운하임리히가 적절히 섞인 에로틱 스릴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랄까요.
김영삼 : 혹시 요즘 원하는 게 그거예요? 로맨스 서스펜스?
(일동 웃음)
김주선 : 로맨스…를 원하고 있습니다. (웃음)
이다희 : 이거 꼭 실어 주세요. (웃음)
이서영 : 아이고. (웃음)
김주선 : 감사합니다. 에로틱이라고 안 해주셔서. (웃음)

김영삼 : 본인의 욕망이 보이는 것 같아서. (웃음) 아무튼 소설을 재밌게 읽었는데요. 제게 이 소설은 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다 또 다른 위험에 빠지게 되는 스토리로 읽힙니다. 주인공에게 옛 연인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 위험을 알리는 사람은 옛 연인의 현재 애인이죠. 뭔가 전해 줄 게 있다면서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우연한 접선에 주인공은 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왠지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후 선배의 소개로 파파를 만나게 되면서 그녀는 위험을 피하려고 하지만 결국 ‘파파’라는 사람이 야기하는 또 다른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선배의 역할이 이중적으로 읽혀요. 한편에서는 주인공을 초대하고 파파를 소개해 주는 선배가 파파의 공급책처럼 보여요. 음식도 많이 시키고 사라지잖아요.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말이죠. 근데 이 선배도 ‘파파’의 먹잇감이었는데, 누군가의 사고를 알리는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고 대신 그 자리에 주인공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운명의 엇갈림이 「노크」에 자주 등장합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은 덤프트럭과의 충돌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죠. 그런데 소설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옛 연인의 애인이 덤프트럭에 치여서 못 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위험한 운명이 계속 엇갈려요. 우연이나 변수에 의해서.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 상태에 처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런 게 우다영 작가의 직조방식처럼 보이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서영 : 저도 이 소설이 좋았어요. 섬세한 무늬를 가진 장면들이 마치 단층처럼 몇 겹씩 쌓여 가며 거대한 층리를 구성해 낸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각종 세목을 세우고 통합하는 것에도 굉장히 능숙한 작가라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리고 비교적 단순할 수도 있는 접근이지만 이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노크’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것에 의한 것일까, 계속 추적해 가면서 읽으려 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한 충분한 답을 제 스스로 마련하지는 못했지만, 소설에서 끊임없이 파생되는 질문들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김주선 : 그 파생되는 질문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 파파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서영 : 가령 그 ‘노크’라는 것에 응해 문을 열어젖히고 만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언제, 어디서 ‘노크’를 하는 것일까 하는 단순한 질문들이요. 그리고 확실히 파파라는 캐릭터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함이 있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소설의 구성 자체가 거대한 덫을 연상시키게끔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대개의 좋은 이야기들이 그렇듯, 어딘가 미로와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서늘하고도 섹슈얼한 장면들이 마치 미로의 벽처럼 소설 속 길을 구성하고 있어요. 장면 하나하나를 더듬어 가며, 분명 어디에선가 교묘하게 흘러가고 있을 트릭들을 조금씩 감지해 가며, 그 속에서 기분 좋게 헤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다희 : 파파의 존재가 상징적인 해석을 자꾸 하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읽는 건 소설을 읽는 좋은 독법은 아닌 것 같았어요. 소설이 계속 환상과 현실,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면서 의뭉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파파도 차원이 다르지만 의뭉스럽긴 마찬가지고요. 저는 그 안개 같은 것을 더듬거리며 따라가는 게 더 맞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형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소설을 분석하기가 어려웠어요.
송민우 : 저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좀 더 주목해서 읽었어요. 소설 초반부에 주인공이 전화를 받는 장면이 나오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이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서술이 나오는데요. 그로 인해 주인공은 “풍경의 일부”(34쪽)가 되고 말아요. 그래서 그런지 저도 처음부터 주인공의 존재가 희미하게 느껴졌어요. 이러한 존재의 희미함은 이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유지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인공이 땅에 발 딛지 못한 채 떠다니는 유령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이 소설 속 세계는, 우연과 운으로 작동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 소설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좀 더 확신을 갖게 돼요. 누군가가 위기에 빠질 때, 다른 누군가는 위기에서 벗어나요. 이 명확한 차이가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는 아무런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보여요. 그리고 주인공은 옛 애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감정의 동요를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낯선 남자인 ‘파파’와 갑자기 함께 있게 됐을 때도 그렇고요. 타인에 대한 감정개입으로부터 한 걸음 살짝 뒤로 물러나 있는 것 같다고 할까요.
전반적으로 소설은 찜찜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 보는데, 아무튼 저도 특히 ‘파파’의 질문을 주의 깊게 봤어요. 단둘이 존재하는 호텔방에서 난생처음 본 ‘파파’가 질문을 하잖아요. 옛 연인의 애인인 여자가 찾아오겠다는 일과 자신과 함께 있는 일 중에 무엇이 더 무서운 일이겠느냐고. 그 장면은 확실히 긴장감이 생기는 지점이었어요.
김영삼 : 바로 그 운과 우연에 대해 집중해서 말할게요. 앞서도 말했듯이 우다영 작가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변수와 우연’에 의해 순간적으로 개인들의 운명이 엇갈릴 수 있는 공간으로 보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소설만 봐도 몇 번의 운명의 엇갈림이 있어요. 먼저 주인공과 옛 연인의 애인이 그렇죠. 위험에 처한 위치가 뒤바뀝니다. ‘파파’도 그래요. 어릴 적 그는 어느 부잣집의 잔디를 깎아 주고 나오다가, 그 집의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던 공을 잡기 위해 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게 돼요. 부모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아마 아이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때 파파가 그 아이와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음을 느끼는 장면이 있죠. 아이의 좋은 운이 다 자신에게 왔다고 생각하죠. 또 주인공과 선배의 운명도 한 통의 전화로 인해 교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운명의 엇갈림이 참 개연성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 작가의 방식이 있는 것 같아요. 인과관계도 필연성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 운명 같은 거잖아요. 작가는 소설에서 ‘구멍’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빠질 수도 있고 다른 이가 빠질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온갖 우연에 의해 구멍에 빠질 수도 있고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죠. 재밌는 사실은 이 ‘구멍’에 대한 서술이 「조커」(《문장 웹진》 2015 11월호)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나온다는 점이에요. 거의 같은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작가가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구축하고 있는 세계의 흔적인 거죠.
이와 관련해서 재밌는 상상을 해봤는데, 작가가 한 소설에 등장했던 어떤 인물을 다른 소설에 등장시키는 방식을 떠올렸어요. 그러니까 「조커」에서 ‘구멍’에 대해 이야기했던 옆집 사람이 「노크」에서 ‘구멍’에 대해 말하는 옛 애인과 같은 인물 내지는 유사한 사고를 하는 인물일 수 있는 거죠.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세계를 생각해 봤습니다. 예컨대 아주 매력적인 인물인 ‘파파’를 스핀오프 한 서사를 만들 수도 있죠. 또 그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을 통해 스핀오프 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우다영 작가는 스핀오프, 스핀오프 하면서 우연과 변수가 지배하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연과 변수가 가득한 우다영식의 세계. 이게 아니고서는 한 편의 소설에 드러나는 우연한 일들과 그에 대한 인물들의 비현실적 반응에 대한 해석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다희 : 그런 점이 있긴 한 것 같아요. 비가 계속 쏟아지는데, 호텔 내부에도 수로가 있잖아요. 호텔 꼭대기에서부터 모든 층을 돌아 내려오는 수로. 그런데 물은 무거운 물체이니까 어쨌든 아래로 쏟아질 텐데, 주인공은 언제 호텔방으로 쏟아질지 모르는 무거운 물을 머리 위에 두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호텔방도 하나의 구멍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이에요.
이서영 : 확실히 구멍이라는 이미지가 재밌는 것 같아요. 뻥 뚫려 있는 구멍에서 연상되는 것은 결국 끝없는 허기와 결핍, 그리고 죽음인 것 같아요. 예컨대 룸서비스를 시킨 선배가 떠나고 난 뒤, 파파와 내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은 매우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어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식욕’이 일어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남녀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을 주었는데요. 분명 왕성한 식욕에 의해 식사를 하고 있는데도, 왜 그 둘에게서 죽어 있는 이들과 닮은 모습이 보이는 걸까 싶었어요. 채워 보려고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 그러한 ‘없음’의 상태를 감당할 수 없어 고통스러운 것이겠죠. 실제로 ‘끔찍한 허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왠지 그 표현을 본 순간 ‘나’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 같아요.
김영삼 : 소설의 문체도 독특한 것 같아요. 좀 틈이 있어요. 이렇게도 읽을 수 있고 저렇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 독자의 상상력을 계속 자극한다고 할까요. 특히 대화에서 그런 걸 많이 보여줍니다. 암시적인 말들이 많아요.
김주선 : 그 문체가 작가가 보여주는 우연성이나 우발성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당분간 계속 이런 세계 속에서 맴돌겠죠? ‘파파’가 굉장히 중요한 충고를 해주는데 주인공이 하필 또 그걸 못 듣잖아요. 또 파파는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어떤 무서운 게 어디로 가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게 소설에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나중에 우다영 작가가 이 부분에 관해 탐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다희 : 파파는 운명 그 자체로도 보여요. 파파는 구두 디자이너인데 “운명은 구두를 신는 순간 발아래서 시작되어 다시는 이전에 서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라고 말하니까요. 또 파파는 중요한 충고를 하는데 주인공은 그 충고를 못 듣죠. 달리 말해 운명은 항상 암시를 주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그 충고를 못 들어요. 충고를 들으려면 충고를 들을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어렵고요. 대개 운명이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를 해줘도 그게 중요한 것인지 알지를 못하죠. 미래나 운명이 인간을 압도하지만 막상 그걸 겪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네요.
김영삼 : 그 말에 적극 동의해요. 소설에 나타나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많은 장면들이 있잖아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들이요. 누군가는 이게 현실이냐고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건 틀림없이 현실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실은 논리적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이거죠. 우다영 작가는 이런 소설을 왜 썼는가. 제 답은 이겁니다. 누구나 구멍에 빠질 수 있다. 구멍에 빠진 존재가 나였을 수도 있다. 즉 타자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었을 수도 있었어요. 우리는 운명과 변수 속에서 정말 찰나의 차이로 피한 거죠. 이렇게 보면 소설의 윤리적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김주선 : 네. 우연, 운명, 또 우연과 운명의 관계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한 사유가 더 깊어지면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진 소설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주혜 작가의 「아무도 없는 집」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작품은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부부의 상실감이나 애도를 깔고 있습니다. 각자 애도하는 방식이 다른데 그건 부부 각자의 삶의 형식이 반영된 모습처럼 보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흥미로운 지점이고요. 어떻게 읽으셨나요?
이다희 : 여기서 규는 산부인과 의사이지만 아이를 추상체로밖에 못 느끼는 존재로 나오잖아요. 규에게 각각의 아이는 하나의 특별한 개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 거죠. 하지만 저는 자기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규의 마음이 이해됐어요.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아이를 무작정 사랑할 수는 없거든요.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건 당위 같은 것이지 필연적인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남편인 녕은 완전히 반대예요. 카데바를 봐도 언제나 개성을 찾는 사람이니까요. 둘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죠. 동시에 소설은 규의 모순적인 모습에도 공을 들여요. 규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사람처럼 나오지만 어쨌든 자기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밤을 꼬박 새기도 했고, 아이의 상실에 대해 정말 큰 아픔을 갖기도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규가 교전 지역에 가서 성교육을 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은 소설을 살리는 지점이 돼요. 소설 후반부의 규는 성교육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화를 내잖아요.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하면서 자꾸 아이를 낳고 또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지역민들을 보며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인데, 여기에는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규의 온갖 감정이 들어가 있어요. 인간이 가진 복잡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해요.
또, 저는 아이의 자살 이유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좀 답답했는데, 부부가 아이를 받아들이기 전에 아이가 먼저 등을 돌렸다고 이야기 되어 있어서 공백이 채워진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누군가가 자살한다고 했을 때, 물론 어떤 하나의 특별한 이유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삶이라는 게 차곡차곡 눈이 쌓이다가 푹 내려앉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아이의 죽음은 그렇게도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소설의 짜임새가 좋다는 느낌입니다.
송민우 : 작가가 인간의 몸을 굉장히 과학적으로 바라보는데요. 인간의 몸이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할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잘 전달해 주는 것 같아요. 저는 소설에 관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소설 초반부에 “‘주무르다’”라는 동사가 있는데요. 강조 표시가 되어 있잖아요. 이렇게 어떤 특정한 행위나 느낌에 대해 드러내놓고 강조하는 게 소설 미학적 차원에서 좋은 방식인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친절하게 다 알려주는 느낌이에요. 좀 더 세심하게 써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제목도 너무 명백해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좀 가리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인물의 작명에 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저는 ‘녕’, ‘규’, ‘네모’라는 추상적인 이름이 지어져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를 못 찾았어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름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소설이 잘 안 읽혀요. 그런데 사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이 소설에만 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제가 생각할 때 많은 한국 소설이 작명 문제에 무관심한 것 같아요. 이름을 통해 캐릭터가 보이는 게 아니고 이름을 통해 캐릭터의 인위성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아, 인공적 존재구나’ 뭐 이런 느낌이요. 인물의 이름이 소설의 분위기나 내용 속에서 필연적인 방식으로 태어나지 않은 거죠.
김주선 : 이름에 대한 미학적 자의심이 첨예하지 않다, 이름이 소모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 말씀이죠?
송민우 : 네. 물론 한국 소설에서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긴 해요. 예컨대 이기호 작가의 ‘시봉’ 같은 인물이요. 하지만 그런 작품이 많진 않은 것 같습니다.
김영삼 : 말씀하신 부분이 소설을 읽어 나가고 분석하는 데 영향을 미치나요?
송민우 : 아무래도 인물이 선명하지 않아서 그런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김영삼 : 저는 내용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게요. 저는 이 소설이 타자의 아픔과 관련해서 읽을 수 있는 작품 같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 사이가 아이의 죽음을 기점으로 크게 멀어졌는데, 소설은 각자가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직시하고 있어요. 특히 규의 삶이 던지는 질문이 재밌어요. 가까운 사람의 고통과 먼 사람의 고통 중에서 중요한 건 대개 가까운 사람의 고통인데, 규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갖거든요. ‘정말로 먼 곳에 있는 사람의 고통보다 가까운 사람의 고통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어?’라고 묻는 거죠. 규가 한창 교전 중인 나라에 가서 고통 받는 이들을 구하는 모습은 우리의 평범한 윤리 감각을 흔드는 것 같아요.
또 녕은 자신을 상당히 합리적인 인간으로 생각하지만 아이의 죽음 이후 프로포폴을 맞잖아요. 의사-죽음을 체험하는 거죠.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괴롭지만 실제로 죽지는 못하는 불가항력 상태에 빠져 있어요. 어떤 장면을 보면, 즉 자기 아이의 깨진 머리를 수술로 직접 복구하는 장면에서는 이별을 대하는 녕의 강인한 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녕에게서는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아내인 규에게 돌리는 비합리성도 보입니다. 한마디로 녕은 상당한 감정 과잉 상태로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중이죠.
제가 이렇게 두 사람의 애도 방식을 비교하는 이유는 이 소설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아픔을 이겨 나가는 태도의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이 소설은 두 사람이 서로가 모르는 공간에서 서로가 공유할 수 없는 경험을 하면서 아픔의 시간을 겪고 있지만, 오히려 그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었던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아픔을 직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참 역설적인 방법인데, 헤어지고 나면 같이했던 순간순간들이 다시 소중하게 기억되는 것과 같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규이고 녕이기를 바라는 장면이 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애도 방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아요. 서로의 아픔을 통감하겠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입니다.
이서영 : 좋은 말씀을 들은 것 같아요. 저 역시 이 소설에는 인간의 생애에 대한 훌륭한 성찰과 그것들끼리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양새에 대한 직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그건 이 작가만의 체험과 사유, 연륜에 의해 가능한 깊이라고 생각하구요. 그런데 저는 조금 걸렸던 부분이 있었어요. 이 소설은 제 개인적인 느낌에, 감상적이게 되는 순간을 매우 경계하며 쓰인 것 같았는데요. 왠지 감상적인 것에 대한 경계가 너무 심해지다 보면 오히려 역으로 생기게 되는 허울과 그것으로 인한 감상성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차라리 용기 있게 밀고 나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고 느꼈어요. 분명 투철하게 주제를 밀고 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독자로서의 제가 그곳에 진입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 온몸으로 밀고 나가던 주제의식에 함께하다가 갑자기 길을 잃는 경우가 있었어요. 아마 각 에피소드의 길이와 재빠른 장면전환 때문일까 싶기도 했어요. 한 인물에게 꽂혀 시선이 머물고 이입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또 제목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요. 제목이 ‘아무도 없는 집’이잖아요. 집을 육체로 등치시키는 상상력은 굉장히 근원적인 것이고요. 존재가 빠져나간 집은 결국 카데바와 연결이 되겠지요. 한데 저는 이렇게 커다란 상징을 던지고 나서는, 그 상징의 나머지 세목을 맞춰 가는 과정에서 더욱 치밀해져야 한다고 여겨요. 근원적 상징을 뼈대로 둔 판을 깔게 되었다면, 그 판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예상 밖의 느낌을 가지게 되길 요구하게 돼요.
김영삼 : 냉철하게 아픔을 이겨내는 규와 아픔에 빠지고 젖는 감상적인 방식의 녕은 서로의 처리 방법을 잘 몰라요. 모를 뿐만 아니라 서로의 방식을 경멸하거나 감상적으로 판단해요. 서로가 서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만 바라보는 거죠. 텍스트를 읽을 때 무언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바로 거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작가의 미학적 실수나 서투름이 아니라 작가의 미학적 의도로 읽을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작가가 진정성 있는 사유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서사의 기술로 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문장을 짜내는 거죠. 그래서 정리하자면, 이 작품은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송민우 : 저는 생각이 좀 다른데요. 저는 이 소설이 사유가 중요한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 소설이 보여주는 사유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이 소설이 보여주는 사유의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어요. 아이의 죽음이라는 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가진 각기 다른 태도에 대한 조명과 사유는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유의 ‘깊이’가 훌륭했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아서요. 또 타자의 아픔이라는 주제는 한국 문학장 내에서 굉장히 많이 다뤄졌는데, 물론 그런 주제는 계속 다루어져야 하지만, 이 소설은 예전에 발표된 소설이나 논의에서 많이 나아간 것 같지 않아요. 때문에 타자의 아픔이라는 차원에서 이 소설을 바라보면 소설이 가진 매력이 조금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영삼 : 첨언해야겠습니다. 타자의 아픔이라는 주제를 바디우가 말한 ‘사건 이후의 충실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때 지속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주제를 다루는 소설에 관해서 ‘뭐가 다르지?’라고 서둘러 판단하기 전에, 어떤 태도와 애도 방식을 말하고 있는지 느낌표를 가지고 봐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다희 : 저도 비슷한데요. 이미 이러한 주제의 소설은 다 나왔다는 말보다는 뭔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다른 점에 관해 말해 주는 게 좋다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소설의 핍진성 때문일 수도 있고 제 취향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소설의 플롯이 미학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름에 관해서는 저도 약간 의문이에요. 저는 녕이 여자 이름 같고 규가 남자 이름 같거든요.

김주선 : 이름 문제는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제 양안다 시인의 첫 시집 『작은 미래의 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나온 시집인데 다른 시집보다 훨씬 적은 시를 싣고 있고, 판형도 더 작아서 읽는 느낌이 확 다릅니다.
김영삼 : 독자를 위한 한 마디, 시도 적고 책도 작지만 표지가 예쁩니다.
김주선 : 네, 확실히 예쁩니다. (웃음) 어쨌든 분량 문제는 최근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정말 짧은 소설이 나오고 있고, 그 짧은 소설을 묶어서 책도 나왔죠. 그래서 시의 분량이 적은 시집이 나왔다는 게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송민우 : 몇 년 전부터 민음사에서 경장편 소설 시리즈를 꾸준히 내고 있는데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것 같아요. 지금은 예전의 대가들이 써낸 3, 4권짜리 장편소설을 읽기 힘든 시대인 것 같고요. 물론 그렇게 된 지 좀 됐지만. 어쨌든 짧은 분량의 글이 좋은 반응을 보이니까 다른 출판사에서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설과 시는 다른 것 같아요. 소설은 괜찮은데, 시집에 실리는 시의 분량이 적은 건 소설과 달리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김주선 : 어떠셨어요?
송민우 : 이건 그냥 정말 독자로서 하는 말인데, 책값이 분량에 비해 너무 비싸요.
(일동 웃음)
김영삼 : 저는 항상 문학예술은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이런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 같아요. 시의 경우 뭐 소설도 그렇지만 한 권으로 묶여 나오는 데 오래 걸리잖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시인의 생각을 자주 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좋죠.
이다희 : 팬들의 입장에서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송민우 : 언젠가 ‘한국 문학은 너무 비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어쨌든 시집이기 이전에 책은 상품이니까요. 저는 첫 책을 낸 작가들이 갖고 있을 법한 신인으로서의 힘, 그런 걸 믿고 찾는 편인데, 아무튼 창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이 문예지를 일일이 사서 보지 않고 대개 단행본으로 볼 텐데, 시집이 나오는 데 3, 4년 혹은 5, 6년이 걸리니까 독자와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굉장히 적잖아요. 그러니까 분량은 적더라도 독자에게 자주 다가갈 수 있는 방책으로서 괜찮은 것 같아요.
김영삼 : 그러면 우리 8,000원 봐줍시다.
(일동 웃음)
송민우 :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독자와의 교감인데, 평론가로서 독자를 만나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평론집은 시집이나 소설집보다 나오는 데 더 오래 걸리고, 나와도 많은 사람들이 두루 읽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뭔가 평론도 변화가 왔으면 좋겠어요. 책의 형태로든 뭐든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해요.
이다희 : 시집에 실린 시의 분량이 적어진 건 분량의 규범화를 깨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또 물리적인 형식이 바뀌면 분명 시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날 텐데 그 변화의 추이도 지켜봐야 할 것 같고요. 그런데 어렵고 길게 읽어야만 하는 글도 있잖아요. 이 시집은 정말 가볍고 휴대성도 좋아요. 그런데 판형이나 시의 분량을 생각했을 때 어렵고 힘들 게 읽어야 할 책과 멀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어요.
김영삼 : 이다희 시인은 창작자로서 어떤 걸 더 원해요? 팝 같은 느낌으로 많이 팔리는 것과 시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소수의 독자에게 환영 받는 것 중에.
이다희 : 저는 그 두 마음이 충돌하는 것 같아요. 이 시의성을 타고 싶다……. (웃음)
(일동 웃음)
김영삼 : 고백합시다. 우리! (웃음)
이다희 : 저에게도 양가적인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웃음)
김주선 :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웃음)
이다희 : 어쨌든 그런 마음과 고전이 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있어요. 하드커버로 돼서 서재에 꽂히고 싶은 욕망과 매끄럽고 가벼운 시집이 되어 가방 속으로 쏙 들어가고 싶다, 그런 마음이죠. (웃음)
송민우 : 핀 시리즈 특징 중 하나로 해설이 빠지고 에세이가 들어간 점을 꼽을 수 있어요. 평론가들이 관습적으로 써오던 해설이 점점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생각이 드는데요. 정확한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많은 독자들이 평론가들의 해설에 대해서 ‘어렵고 재미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보고요. 그리고 그런 의견들이 절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평론가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거나 해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방식이 과연 유쾌한가 하면, 그렇지는 않고요. 평론가의 존재와 해설의 존재를 마치 불결한 것처럼 취급해 배제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얘기해 보고 싶네요. 평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그 입지를 줄여 나가고 있지만, ‘비평적 행위’는 리뷰나 대담과 같은 다른 형식을 통해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거든요. 이제 막 평론가가 된 저 같은 신인의 입장에서 이런 변화를 보고 있으면 여러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핀 시리즈에 수록된 시집 속의 에세이의 존재는 신선한 시도로 보입니다.
김주선 : 여러 이야기가 나왔는데, 핀 시리즈가 잘 되기를 모두 응원합시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 얘기를 해보죠. 전체적으로 시 세계가 어두워 보입니다. 모르는 게 많고, 뭔가에 짓눌려 있고, 답답하고, 자기가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 속의 인물 같고, 진실과 거짓이 헷갈리고, 도망치고 싶고, 그저 웃고나 있고, 그런데 자꾸 주위 사람이 죽고, 자기도 죽고 싶고, 뭐 이런 부정적인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김영삼 : 제가 본 이 시집의 키워드는 ‘경계’입니다. 세상의 어떤 경계 앞에서 그 선을 넘고 싶어 하지만, 때론 그 경계를 넘어버렸지만, 그 때문에 상처 입고 아파하는 존재들이 이 시집에 가득합니다. 「비슷한 정서」에서는 바다의 경계선 앞에서 머뭇거리며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 있어요. 「전주곡」에서 이 경계는 ‘말’로 드러나는데, 뭔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차마 하지 못하면서 머뭇머뭇하는 인물들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 어디에 그 시작이 도사리고 있을까 싶었는데, 대답은 「이토록 작고 아름다운」 시리즈에 있어요. 이 시편들의 공간에 작가의 창세기가 있어요. 그 공간에는 과거 ‘나’, ‘선생’, ‘장’, ‘엘리’, ‘몬데’가 있었어요. 해변가에서의 즐거운 추억도 있고, 시와 영화만으로도 충분했던 그들의 청춘이 나와요. 그런데 동시에 거기에는 ‘나’와 ‘선생’의 밀회가 있었어요. 아찔한 경계를 넘어버린 후 ‘선생’은 자살했고, 어떤 이유에선지 ‘장’도 자살했어요. 이후 그들에게 현실은 죽음과 아픔과 ‘선을 넘지 마’와 같은 경계들이 가득한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화자가 자꾸 ‘경계’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 차마 어떤 말을 하지 못하고 아파하는 것, 그래서 자꾸 영화나 꿈과 같은 다른 공간으로 도망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서영 : 저는 이 시적 화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시적 공간 속을 기꺼이 헤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 시집 자체가 마치 한낮에 꾸는 꿈결처럼 읽혔던 것 같아요. 더불어 그 속을 배회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일인칭이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꿈결이라 장악하지 않고, 꿈결이므로 배회한다는 느낌이에요. 궁금했던 건, 아무리 꿈결이라도 그건 시인 자신이 만들어낸 풍경인 거잖아요. 왜 이 시집은 유독 꿈을 닮은 풍경들로 구성된 걸까, 이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꿈을 만들었을까 싶었어요. 꿈이라는 것은 결국 언뜻 보면 아름답지만 결국 껍데기라면 껍데기라고 할 수도 있을 세상일 텐데요. 그래서 이 꿈을 찢고 나간 이후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어요. 그 무대의 휘장을 걷어내라는 요구는 어딘가 폭력적이게 되는 것일까 싶지만요. 모든 꿈이 지워지고 나서 남는 최후의 한 마디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요.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다 걷어내고 난 뒤에 남게 된 무언가를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시 속에 분명 아름다운 고백도 있고 무거운 침묵도 있는데 진짜로 토로되는 자기라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달까요. 더불어 이 시인이 꾸는 꿈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기획 하에서 이루어진 것, 얼개를 짜맞춰낸 것이라는 점에서 마치 영화의 각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저는 그 지점이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맨 처음에 실린 작품 「전주곡」에서도 어느 날 교정을 걷다가 여기가 영화 속이라는 걸 알아버렸다는 각성에서 시작되고, 맨 끝에 실린 에세이에도 엔딩 크레딧을 언급하며 왠지 장막을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서 재밌었어요.
송민우 : 저는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거의 연애시로 읽혔어요. 실패한 사랑 이야기와 그 흔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시적 화자가 사랑의 이상적 형태가 무엇인지 고백하는 장면도 나오고, 마지막에 수록된 에세이에도 사랑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시인에게 일관된 자기 세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마 이 세계는, 제 식으로 표현하면, ‘사랑이 곧 사라질, 입가에 묻은 거품과 같은 세계’라는 생각이에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주곡」에서는 그리움의 정서가 많이 느껴져요. 2인칭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는 것같이 느껴졌고요. “분명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라는 구절이 그 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 말은 곧 끝내 ‘너’가 오지 않았다 혹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도 읽혔어요. 이 시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시들이 축조된 것 같더라고요. 타인의 부재를 견디는 것이 서정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양안다 시인의 시들은 1인칭 ‘나’와 2인칭 ‘너’ 사이의 엇갈림이 잘 드러나는 서정시 같아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시들은 문학사에서 물론 많지만, 아무튼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오늘날 시가 ‘사랑’을 말하는 방법의 핵심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홀로 남게 된 인간의 표정과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돼요. 사랑이 끝나고 나면 견딜 수 없이 아프잖아요. 그 아픔을 겨우 견디고 견뎌 끝내 언어로 표현한 것이 결국 서정시가 아닌가 싶어요. 시적 화자들이 세계나 현상에 대해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결국 견디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고요. 그래서 시적 화자들의 모습을 계속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애정을 갖고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시들이 많았습니다.
이다희 : 저는 이 시집에 실린 시 전체를 하나의 연애시 흐름으로 느꼈어요. 제가 보기에 이 시집에 실린 각각의 시들은 서로 연이 섞여도 상관없을 것 같거든요. 가령 두 번째 시의 두 번째 행이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이 강하게 오진 않아요. 이런 작법에 관해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어쨌든 이건 작가의 특색인 것 같아요. 순간순간 애틋해진 문장들에 관해서도 말하고 싶은데요. “신이 잔디를 자라게 했다면 우리는 초원을 가꿔야지. 그게 사람이고 그게 사랑이잖아.”(「루저 내레이션」) 이런 문장이나, “밝은 곳에서 나는 내가 보이지 않아요 그 사람을 사랑한 뒤의 일이에요”(「작은 미래의 책」) 같은 문장을 보면 사랑의 감정이 확 들어서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연애시라는 말에 동의해요. 또 연애시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 '너와 나'의 문제라는 데 있어요. 그 문제가 출발역이자 종착역이라고 할까요? 원동력이라고 할까요? 시 구조의 자유로움은 곧 시에서 '너'의 자유와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시를 읽으면 뭔가 배려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웃음)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약간 섬뜩한 지점들도 있어요. 관계의 미궁이나 단절을 돌파하는 문장들이 그래요. 이 모순적인 느낌이 한 시에서 엮어지는 모습이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김영삼 : 저는 시 세계를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관해 이야기해 볼게요. 핵심은 ‘영화’라는 시어에 있는 것 같아요.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을 영화화한 영화, 이 영화 속의 영화, 또 이 영화 속의 영화, 이런 구조로 만들어진 세계요. 「불가능한 질문」, 「펀치드렁크 드림」과 같은 작품에서 이 반복되는 구조에 대한 시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화자들은 자꾸 이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경계 앞에서 막혀버렸기 때문이죠. 「이상 기후는 세계의 조울증」을 보면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와 책을 보며 우리는 세계로부터 격리되려 했다”고 해요. 이들은 남들이 보지 않는 영화와 책을 보면서 그들만의 세계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세계가 그들을 허락하지 않으면 마치 이상 기후 때문에 섬이 생기는 것처럼 스스로 섬으로 들어가요. 시에서는 피동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스스로를 격리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것을 영화 속으로, 꿈속으로 들어간다고 봐도 되는 것 같고요. 프렉탈처럼 반복되는 구조가 양안다의 세계로 보입니다.
시인의 형식과 세계가 이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이 뒤따라오죠. ‘그게 볼 만한가’, ‘재밌는가’ 이런 건데요. 저는 재미있어요. 답을 내리기 전에 한동안 아파야 하는 것처럼, 딱 그 위치에 있어 보이거든요. 다만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아픔을 치유하거나 언어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방법은 아직 못 찾은 느낌이에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영화 속 주인공들이었다”(「이상 기후는 세계의 조울증」)라는 표현처럼, 이들에게 아직 집은 멀어 보입니다.
김주선 : 앞으로 뭘 쓸지는 모르겠는데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시가 있어요. 제가 보기에 「작은 미래의 책」에 시인이 무엇을 쓰려 하는지 나타나 있는 것 같아요. 이 시에 “아무도 보호하려 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페이지가 넘어간다 넘어가면 경고 없이 사건은 시작된다 그래 우리는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태어난 거야, 곁에 없는 네가 말한다”는 구절이 있거든요. 이 부분을 읽으면 굳이 덧붙일 것도 없이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게 있죠. 뭘 기록할지는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김주선 : 마지막으로 취향 저격 시를 이야기해 주세요.
이서영 : 저는 「오늘의 숲」이 좋았어요. 미묘한 위로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이다희 : 저는 표제작인 「작은 미래의 책」이 제일 좋았어요. 특히 마무리가 좋았어요.
송민우 : 저는 「레몬 향을 쫓는 자들의 미래」가 좋았어요. 이 시에서 화자가 사랑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해도 똑같고 저렇게 해도 똑같을 거야’라는 식이잖아요. 그런 회의적인 태도가 어느 정도 제 마음에 들었어요. “같은 고백을 던지면 매번 같은 위로를 받을 거”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래도 끝내 침묵의 편으로 되돌아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백의 내용은 같을지라도,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매번 달라지니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니까.
김영삼 : 저도 「레몬 향을 쫓는 자들의 미래」가 좋았어요. 작가 이상에 대한 오마주가 들어 있는 작품인데, 온통 초록인 세계에서 느낀 이상의 「권태」를 자기식으로 잘 변주해서 쓴 것 같아요. 권태로운 사랑과 권태로운 이별과 권태로운 죽음의 세계로 바꾼 거죠.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김주선 : 저는 「미열」이요. 마음이 아팠어요.
김주선 : 세 번째 독자모임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모두 늦은 시간까지 수고하셨어요
일동 :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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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소개 / 이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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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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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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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곽재식 인터넷에 누가 “자동차 엔진오일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엔진오일에 정말 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다고 해 보자. 이런 덧글을 달면서 기대하는 것은 엔진오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동차 수리 일을 하는 사람이나 엔진오일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담아 써 주는 대답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오래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들이 각자의 엔진오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엔진오일 우습게 보다가 저는 큰코다친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 비슷한 답을 기대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기대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공유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이라는 종족이 원시 시대 때부터 갖고 있던 아주 오래된 습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동안 이런 덧글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챗GPT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더군요.”라고 자기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본 내용을 복사해서 덧글로 붙여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덧글에 엔진오일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써 두어서 열심히 읽어 보았는데 다 읽어 갈 때쯤 보니까 맨 마지막에 “이상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본 결과입니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덧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거의 모든 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도대체 이런 덧글은 왜 달리는 걸까? 질문을 했던 나는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물어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덧글은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달린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 대규모 언어모델, 즉 LLM 방식으로 운영되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결과를 받아 본 뒤에 그 결과를 남들과 같이 공유해 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정에서 나온 동기는 조롱받을 이유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계각층에서 LLM 방식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다른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요즘 그렇게 유행이라고 하는 최신 첨단기술인 인공지능을 내가 이렇게나 잘 이용해서 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나는 요즘 뭐든 인공지능에게 물어봐. 너무 편하고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다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사회가 탄생할 거라는 이야기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매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는 거창한 환상마저 슬그머니 서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앞서갈 거라는 환상이다. 지금 치열한 경쟁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문장웹진 다시 읽기]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2017년 8월호 수록) 김진선 어느 강의 시간,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면을 소개해 주셨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날 이후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에는 《문장웹진》이 빠지지 않고 있다. 햇수로 17년, 매달 1일이면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접했다. 나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보니 아닌 일이다. 맞다, 이것은 고해성사. 나의 죄를 고합니다. 나는 장르 편식이 있어서 시를 제외한 소설, 비평, 기획 등은 대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장웹진 다시 읽기’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다시 읽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마주한 글을 여러 번 살피고,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침내 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작은 2017년 8월호에 수록된 조연정의 이라는 비평이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한 비평만큼은 피하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죗값을 달게 받는 거 같다. 이 글은 윤이형 소설가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 고민하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 문학적 재현,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에서 《문장웹진》 2017년 4월호에 수록된 조강석의 에 의문을 표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먼저, 윤이형 소설가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밑줄은 인용자 강조)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은 왜일까. 이 질문들은 의무(‘써야만’), 제약(‘안 되는’), 판단(‘비판적인’), 자기인식(
- 김진선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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