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면 삼키고 쓰면 글이다] 마지막화 : 문학 살롱 초고, 술과 문학 / 서재진 시인, 정성우 소설가
- 작성일 2023-06-01
- 댓글수 0
문학살롱 초고, 술과 문학
서재진, 정성우
- 들어가며
혼자 마시는 술이 간절한 날이 있다. 조용한 공간에서 괜찮은 술을 한 잔 마시며 하염없이 책에 빠져들거나 공간이 주는 분위기에 젖어들고 싶은 그런 날 말이다. 문학살롱 초고는 좋은 술, 책, 분위기 셋 모두를 갖춘 곳이다. 어쩌면 당신은 평생 그곳에서 살고 싶어질 수도 있다.
입구에는 섹슈얼 헬스 케어 브랜드인 체레미 마카와 일러스트레이터 규하나가 협업한 “SAFE DISTANCE FOR EVERYONE!”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스터 모서리의 QR 코드를 인식하면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사이트가 나온다. 위생적이고 안전한 사랑을 목표로 하는 그 프로젝트의 포스터와 함께, 더 안쪽에는 청소년도 구매할 수 있는 콘돔 자판기가 있었다. 요 2개월 동안의 주제를 안전한 성으로 잡아 『섹스할 권리』 등의 책이 벽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전시물들을 보며 안전함을 느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것을 지향하든 그것이 옳은 방향이기만 하다면 이 공간 안에서는 안전하게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편안해졌다. 공간 안은 그리 밝지 않았으나 책을 읽기에는 무리 없는 조도를 가졌다. 술의 종류는 칵테일을 중심으로 위스키 샷이나 와인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문학을 주제로 하니만큼 문학 칵테일을 마시기로 했다.


캣콜링은 독하면서 달콤했는데, 이소호 시인의 시집과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많은 연구 끝에 만들어냈으리라 짐작되는 맛이었다. 『쇼코의 미소』 역시 장미 향이 감돌았고 장미 꽃잎이 띄워져 있어 선하고 다정한 책과 잘 어울렸다.
가만히 앉아 대낮부터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자니 술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술을 마시다 문득 떠오른 시상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 놓거나 글을 쓰다 막히면 냅다 술을 마시러 나갔던 일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술을 마시며 책을 읽은 적도 있고 말이다. 그뿐인가, 한시 중에는 술과 음식을 소재로 다룬 것들이 있고 조선 시대 즈음의 선비들이 시를 짓지 못하면 술을 한 잔 마셔야 했다는 포석정은 이미 유명하다.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문학과 술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 서재진
술을 마실 때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뒤로 미뤄 두는 기분이다.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니고, 단지 뒤로 미뤄 두기만 할 뿐이다. 요즘에는 만화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는데 어제는 허영만 화백의 『타짜』 4부, 「벨제붑의 노래」를 전부 읽었다. 몇 년 전부터 계속 시도했다가 첫 권에서 나가떨어진 부다. 1, 2, 3부 모두 즐겁게 읽었음에도 4부에서만 계속 실패했다. 그러다 어제 결국 다 읽었다. 이걸 술의 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문학살롱 초고에 앉아 있으면서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렸다. 집 근처의, 싼 게 장점인 칵테일 바에 앉아 임솔아 작가의 『최선의 삶』을 다시 읽었던 기억이다. 두 번째였는지, 세 번째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 책을 워낙 좋아하니까. 싼 가격 탓에 시럽 맛이 잔뜩 나는 피치 크러시에다 감자튀김을 하나 시켜 놓고 디스코 조명과 촛불이 뒤섞인 난잡한 빛 아래에서 그 책을 또 읽었다. 즐거웠다.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최악을 선택한 강이처럼 나는 자꾸 다른 악을 선택한다. 그것이 최악이든 차악이든 좋다는 마음으로 선택한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자꾸만 나빠지는 쪽을 선택하는 것은 이토 준지의 만화 중 「사거리의 미소년」 에피소드 중 하나와도 비슷하다. 고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더 큰 고민을 만들면 된다는 말처럼 나는 계속해서 나빠지길 선택하고 있다.
술을 마시는 게 나에겐 그런 일이다. 쓰지 않았다는 말보단 나은, 쓰지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게 하는 일. 어제는 술에 취해서, 오늘도 아침부터 취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일. 최근의 나와 술과 문학을 간신히 연결하자면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문학살롱 초고에서는 근래 들어 가장 재미있었다. 책의 제목을 따온 칵테일을 마시며 아주 오랜만에 문학에 관한 단상들을 떠올렸으니까.
일부 사람들에게 술과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술을 마시며 단상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고, 단상이 떠오르면 술 마시는 걸 멈추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살롱 초고는 쓰기보다는 읽기에 집중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학 칵테일을 선택하면 책을 내어주는 것부터 조용한 분위기와 상냥한 접객 태도까지. 칵테일 ‘헤밍웨이’가 없는 건 약간 의외였으나 그런 것쯤 어쨌든 좋다. 취하면 되는 일이다. 술에 취하면 걱정 같은 것은 사라져 버린다. 그것이 최악이든 차악이든 상관없이 일단 지금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어쩌면 술의 역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정성우, 술과 문학
술은 섞어야 제맛이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동기들과 둘러앉으면 꼭 그렇게 외치곤 했다. A가 막걸리에 검지를 살짝 담근 게 화근이었다. 그가 술을 따라 내게 건네는 모습을 누군가가 지적했다. 이거 안 되겠네, 술은 손맛이라는 거야 뭐야. 물론 장난스러운 핀잔이었으나 A는 상당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술에 닿은 검지의 면적 또한 의도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나는 그의 민망함을 덜어 주고자 얼른 술잔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긴 침묵을 깬 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원래 술은 섞어야 제맛이여. 회심의 반격에 테이블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손가락 양념의 저의는 이어지는 그의 뻔뻔한 강변에 영영 파묻히고 말았다. 막걸리가 좀 달잖아. 내 손은 꽤 짜거든. 딱 이렇게 먹으면 단짠의 극치지. 이후 술을 따라 건넬 때마다 너도나도 앞다투어 손가락을 담갔다. 술게임으로 넘어가면 과자와 번데기를 빠트리기도 했다. 그런 술잔을 받으면 어김없이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술이 지저분해지는 만큼 우리는 웃고 깊어졌다.
나이가 들면서 술에 뭘 타는 게 힘들어졌다. 소맥 한 잔만 마셔도 다음날 뒤통수가 지끈거렸고, 숙취가 심해진 만큼 건강이 염려돼 건더기를 담그는 짓은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솟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의 구호를 5년 만에 들었다. 꽤 과격한 합평 뒤의 술자리였다. 그중 유독 날선 의견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당시 나는 모임의 리더여서 어떻게 분위기를 풀어 가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팔짱을 지르고 안주로 나온 치킨만 노려보는 B와 애써 웃으며 마른침만 쩝쩝 삼키는 C. 소설에 대한 철학도 그들의 자세만큼 달랐다. B는 작가의 개성이 먼저라 여겼고, C는 개성이 중요하다 해도 독자를 무시할 수 없다는 쪽이었다. 그렇게 전혀 타협 없는 냉랭한 테이블 위에 맥주와 소주가 얹혔다. 주변 사람들에게 소주를 마실 건지 맥주를 마실 건지 의사를 묻고 일일이 따르는 중에도 둘은 침묵을 유지했다. 워낙 살얼음판이라 그들에겐 말을 붙이기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중 B가 먼저 팔짱을 풀고 자신의 맥주 컵에 맥주를 따르고 소주 반잔을 섞었다. 물론 술을 누가 따르느냐로 따지는 사람은 없었으나 아무래도 술을 주고받는 분위기였기에 B의 자작은 술자리를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다.
“저도 소맥 좋아하는데.”
그런 말을 붙인 인물은 뜻밖에도 C였다. B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래요? 묻곤 C의 잔에 소맥을 말았다. 그들의 공통점을 더 단단히 겯고자 잽싸게 끼어들었다.
“소맥은 숙취 심하지 않나요?”
내 물음에 C는 피식 웃었다.
“몸 걱정할 거면 술을 마시면 안 되죠.”
B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소주는 그냥 먹긴 쓰고. 맥주는 맛은 있는데, 너무 약해요.”
“그러니까 섞어야 제맛이죠.”
C가 논리를 완성하고 잔을 내밀었다. 소맥으로 의기투합한 둘은 이후 오랫동안 떠들었다. 비록 둘의 소설 철학이 융화되는 일은 없었지만 취기에서 피어오른 유들유들한 분위기가 서로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술을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술의 맛보다는 숙취의 유무를 더 따지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술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안 아프게 하는 술이요, 대답하곤 한다. 다만 아무리 무해한 술이라 해도 혼자 마시면 맛이 없다. 소설과 비슷하다. 열심히 썼는데 읽어 줄 독자가 없다면…… 상상만 해도 막막하다. 술은 섞여야 제맛이다.
- 나가며
문학살롱 초고는 혼자 가도 민망하지 않은 곳이다. 지하에 있어 외부인과 마주칠 일 없고, 칵테일에 책이 딸려 나와 독서를 목적으로 왔다고 가장할 수 있다. 거기에 취기까지 더하면 혼자만의 작업실만큼이나 편안하다. 그러고 보니 술집에서 책을 읽은 경험이 전무했다. 아무래도 알코올은 집중력에 쥐약이니 책과 술을 섞긴 어려웠을 것이다.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꺼내 읽던 책이었다. 특유의 다정하고 섬세한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삶이 그리 헛되지 않았다는 낙관이 가슴에 스며들곤 했다. 단편소설들의 인물을 그리고 또 그리다 보면 작가의 얼굴로 번져 금방이라도 손을 내밀어 줄 것 같았다. 꿈속에서 최은영 작가와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런 날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날, 억울하거나 부아가 치미는 일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날, 그러나 쉽사리 연락할 만한 사람이 없는 날. 그런 날에 문학살롱 초고를 방문한다면 허전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달래지지 않을까.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작품 속 인물이 맞은편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