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문학이었다
- 작성일 2025-10-01
- 댓글수 0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노작홍사용문학관)
결국은 문학이었다
노작홍사용문학관 정란희 작가
노작홍사용문학관의 상주작가로서 가게 된 영국 연수는 나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들었다. 공항에서 일행들의 반짝이는 미소가 나를 맞아주었을 때부터 이 연수가 이상하고 진기한 체험이 될 거라는 예감이 번쩍이긴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토끼를 따라간 앨리스처럼, 나는 그렇게 영국으로 가는 토끼굴로 뛰어들었다. 토끼굴은 작고 좁으면서도 끝이 없었다. 작은 공간에 끝없이 갇혀 있었지만 동시에 이동하고 있었고, 14시간이 지나 낯설고 기이한 ‘영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굴러떨어졌다.
영국은 나에게 해리포터의 나라이기 이전에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였다. 전 세계인이 지켜본 올림픽 개막식을 자국의 문화 콘텐츠로 가득 채워 문화 강국의 자부심을 뿜어냈던 나라, 최근에는 브렉시트와 경제불황이라는 말로 더 많이 회자 되는 나라, 그러면서도 문학 선진국을 생각하면 여전히 1, 2위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는 나라, 그것이 내가 영국에 대해 가진 단편적인 인식의 대부분이었다.
영국 연수에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영국작가 루이스 캐럴의 동화, 1865년)가 직면한 놀라움과 진기함을 보고, 듣고, 체험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낯섦’이었고, 이전에는 본 적 없던 ‘놀라움’이었고, 듣지 못한 ‘새로움’이기도 했다. 직접 보고 체험한 문화는 새로웠고 많은 영감과 배울거리,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놀라움’은 토끼굴 속 나라의 진기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앨리스 자신의 이상한 변화-쪼그라들고, 커지고, 목이 길어지고, 당돌해지고- 때문이었을까? 앨리스의 영국 연수는 앨리스가 체험한 문화 강국 영국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영국에 도착한 앨리스가 그 나라에서 겪은 진기한 변신 이야기이기도 하다.
1. 에든버러 북 페스티벌
세계 최초의 문학 도시인 에든버러는 옛 스코틀랜드왕국의 수도답게 문화와 정치, 관광의 중심지였다. 특히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 『해리포터』의 작가 J.K 롤링, 『아이반호』를 쓴 월터 스콧 등 많은 작가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다.
우리가 에든버러 북 페스티벌에 도착한 날은 8월 19일, 비가 오리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하늘이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8월 9일부터 24일까지 16일 동안 진행되는 축제장은 무척 안정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본관으로 여겨지는 건물 2층에 오르자 어린이들이 동화책을 들고 한 줄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연을 마친 동화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어린이들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동화작가는 밝은 표정으로 어린이들의 이름과 함께 정성스레 사인을 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다정한 풍경이었다.

다양한 책과 일러스트와 어린이들의 참여 마당을 둘러본 다음, 관계자 미팅을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그때 바로 눈에 띈 것은 차양 아래에서 쿠션을 베고 눕거나 엎드린 어린이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작가 한 명이 그림책을 펼쳐 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서너 명을 뺀 어린이들 대부분이 편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발끝을 까딱거리며 누워서도 작가의 말에 웃거나 호응을 보내기도 했다. ‘어른의 말은 바른 자세로 듣는 거’라는 교육에 길들여진 나에게 아주 선선하고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문화의 차이도 있겠지만, 신비주의적 권위 없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듣는 독서’를 하며 책과 만나는 어린이가 앞으로 책을 싫어할 리는 절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 청소년들이 ‘책을 읽지 않고 미디어에 빠져들어 고민’이라는 나라가 갈수록 많아지는 시대에 어쩌면 가장 편하고 쉬운 접근이 그들에게 책과 친구가 되게 하는 지름길일 지도 모른다.
관계자에게 ‘에든버러 책 축제 700개 프로그램 중 어린이 프로그램 비중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북스타트 운동을 처음 만든 나라답게 유아 독서와 문화복지, 시민단체와의 네트워킹, 독서 챌린지, 글쓰기 등의 프로그램 또한 무척 풍성했다. 또한 전날 <황석영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김주혜의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의 쾌거로 K-문학이 세계인들의 관심을 모으는 이때, <황석영 작가와의 만남>이 유럽의 독자들에게 우리 문학을 더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2. 스코티시 스토리텔링센터
세계 최초의 현대식 스토리텔링 전용센터인 스코티시 스토리텔링센터는 주민들과 방문객들을 위한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서 스코틀랜드의 옛이야기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들을 선보이는 곳이다. 또한 그곳을 찾는 누구에게나 스코틀랜드에 관한 전통구술문화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센터 다니엘 아베크롬비(Daniel Abercrombie) 팀장이 말해주었던 운영 철학은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였다.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여행자의 격언이라는 이 말은 창작자, 배우, 관객의 깊은 공감과 폭넓은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 같다.
스코틀랜드 전통문화기금으로 운영되는 스토리텔링센터는 해마다 10월에 스토리텔링 축제 또한 주제별로 진행한다. 날씨가 추워지고 어두워지고 모든 축제가 끝난 시기에 비로소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집필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1층에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카페와 전시관, 스토리텔링 관련 서적과 기념품 파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것처럼 하나같이 여유로워 보이고 친절했다.
우리는 100석 규모의 네더보우 극장에서 지난해 센터 수상작인 <늑대가 태양을 삼킬 것이다>라는 공연을 관람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사냥으로 멸종된 늑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의 옛이야기에 해학과 익살, 욕심꾸러기 캐릭터가 호랑이인 것처럼 영국의 옛이야기에서는 영웅이나 악당 캐릭터로 늑대가 자주 등장한다. 지금은 인간의 사냥으로 멸종된 두 동물이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 속 친구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숱한 예술작품에 지금까지도 호랑이와 늑대가 큰 소리로 호명되는 것은 그 동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미안함이 남아서인 줄도 모르겠다.
‘노르웨이 선조들은 늑대 두 마리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고 믿었다~’
로 시작하는 배우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보름달과 소녀 그림이 선명했던 그림자극의 단출하면서도 정감 있던 무대 또한 눈에 선하다. 그리고 무척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시니어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옛이야기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많은 시니어 층을 위해 우리 공연계도 옛이야기들을 무대에 올려도 좋을 것 같았다.

3. 노리치 국립문예창작센터
이야기의 도시 노리치에는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익숙한 노리치 국립문예창작센터가 있었다. 중세 상인 로버트 톱스(Robert Toppes)가 1430년경에 발트해 참나무로 지었다는 드래곤 홀은 긴 역사를 담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대들보에 용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서 드래곤 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 공간은 건축 당시에는 수입된 상품을 전시 판매하는 무역회관이었다. 로버트 톱스 사후에는 주택, 술집, 상점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교류의 장, 문학 행사를 여는 축제의 장으로 쓰이고 있다. 매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20여 명의 작가들이 와서 작품 발표를 하거나 이웃 주민들과 함께 소통하고 문학으로 연대하는 곳이기도 하다.
국립문예창작센터는 현재 문학 워크숍, 강연, 축제, 학교 대상 교육 프로그램, 가족을 위한 창작 이벤트 등 문학 관련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상시 진행하고 있다. 또한 문학 관련 전문가들이 국제적으로 협업하고 교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ILX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2024년에서 2026년까지는 ILX가 ‘도약하는 시기’로 정해서 활동하는 중인데 영국, 인도네시아, 우크라이나 등과 함께 우리나라도 함께하고 있다.
작가 집필실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벽면 책꽂이에는 국립문예창작센터에 다녀온 우리나라 작가들의 저서가 꽂혀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4. 돌아오는 길
유서 깊은 공공도서관과 박물관, 여러 서점들을 방문하고 마지막으로 간 곳은 런던 해리포터 스튜디오였다.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를 구현해 낸 세트장, 영화 제작에서 쓰인 실제 소품들, 특수효과 장치들이 실내 스튜디오와 야외 공간까지 빼곡히 차 있었다.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 사이에서 어린이들의 감탄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살인적인 영국 물가에도 여행객이 끊이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결국 문학이다. 문학 작품이 주는 재미와 감동이 독자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문화 보존도 사회를 지탱하는 귀중한 자산이 되지만, 무엇보다 문화 산업에 중요한 부분은 글, 문학이다.
처음 내가 북스타트 운동을 알았을 때, 영국은 정부와 관련 단체와 시민들이 손을 잡고 독서 교육을 충실히 해가는 나라, 작가들이 되도록 집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제도들을 마련해 가는 나라, 교통요지에 공공도서관을 세워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라였다. 그때 그들이 많이 부러웠다. 하지만 달라졌다. 지금은 우리도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1300여 개의 공공도서관이 항상 독서 운동을 벌이고, 국가 주도하에 국제교류와 창작지원사업, 문학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 등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고 시대에 발맞춰 새 사업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연수가 내 문학의 방향과 우리 문학의 좌표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독서 시스템의 안정성이 피부에 와 닿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나라의 문화 강국으로의 도약과 노력이 내 눈에 가장 먼저, 크게 들어왔다. 이는 그동안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온 예술가들의 노력과 국내 예술인 복지와 창작 지원, 국제교류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지속된 노력으로 문화의 위상을 바꿔 독서 문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앨리스가 체험한 이상한 나라의 ‘놀라움’은 토끼굴 속 나라의 새로움과 진기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본질은 어쩌면 앨리스 자신의 변화-쪼그라들고, 커지고, 목이 길어지고, 당돌해지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학 강국의 모습에 위축되어 쪼그라들고, 그들의 문화를 바라보며 생각이 커지고, 우리의 문화 콘텐츠와 현재 상황을 보며 우쭐해지고, 끝내는 당당해지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잠에서 깬 앨리스는 서둘러 집으로 달려간다. 영국 연수는 꿈속 이야기 같지만, 앨리스가 체험한 기억은 그녀에게 뚜렷한 사실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이 세상에 남게 될지도 모른다.
|
<2024 문학기반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시설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문학의 나라 영국의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를 탐방하고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5년 8월 18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6박 8일간의 참여자들의 이야기들은 문장웹진–모색 10월호에서 총 6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모색
제1회 서울제대로도서전, 또 하나의 작은 책 축제를 만나다[도서전 참관기] 제1회 서울제대로도서전, 또 하나의 작은 책 축제를 만나다 정대훈 프롤로그 서울국제도서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오늘 또 하나의 도서전을 찾았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최근 출판계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새로운 시도라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현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행사장에 도착한 시간은 개장 약 30~40분 전. 예상했던 것처럼 행사장은 한산했다. 몇 년 전 서울국제도서전이 지금처럼 대규모 축제로 자리 잡기 전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드문드문 모여 있었고,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도서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 노들섬에 도착했을 때. 서울국제도서전의 여운을 안고 또 하나의 책 축제를 찾아왔다. 맑은 하늘만큼이나 오늘은 조금 여유로운 도서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개장 전 풍경. 아직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오래전 서울국제도서전이 지금처럼 북적이기 전, 그 시절의 익숙한 풍경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느긋하게 책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운 책의 열기 개장과 동시에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행사장 규모는 서울국제도서전의 대형 부스 몇 개를 합친 정도에 불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게다가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지 않았다. 부스마다 멈춰 서서 책을 펼쳐 보고, 출판사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이동했다. 덕분에 행사장의 동선은 한참 느렸지만, 그만큼 책을 중심으로 한 시간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족 단위 관람객과 어린이를 동반한 방문객도 많았고, 조선대학교 학생들의 단체 관람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어린이책과 그림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출판사 부스의 분위기였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젊은 직원들이 운영하는 부스를 많이 볼 수 있었다면, 이곳에서는 작은 출판사의 대표나 편집장이 직접 독자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책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더 깊게 이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 불과 몇 분 만에 달라진 풍경. 조금 전까지 한산했던 공간은 개장 시간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긴 대기 줄로 바뀌었다. ‘오늘은 여유롭게 둘러보겠구나’ 했던 기대는 이때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던 내부. 공간은 크지 않았지만, 출판사와 독자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발걸음은 느렸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책 위에 머물러 있었다. 도서전의 또 다른 즐거움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이번에도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조선대학교 양경언 문학평론가였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그랬지만, 도서전은 책만 만나는 공간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업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묻고, 짧은 대화 속에서 새로운 소식도 듣게 된다. 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다시 연결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 정대훈
- 2026-07-01
문장웹진 모색
2026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와서[도서전 참관기] 2026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와서 정대훈 1. 다리가 아팠다, 그런데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다리가 아팠다. 서울국제도서전에 들어선 지 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분명 책을 보러 왔는데 이상하게 계속 걷고만 있었다. 한 부스를 보고 나오면 또 다른 부스가 나타났고, 저쪽에 사람이 몰려 있어, 가보면 또 다른 줄이 있었다. 잠시 앉아 쉬고 싶었다. 그런데 앉을 곳이 없었다. 커피 한잔 마시며 오늘 본 풍경들을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행사장 안 카페는 이미 만석이었다. 결국 사람들이 선택한 곳은 전시장 한쪽 벽과 통로였다. 누군가는 가방을 베개 삼아 쉬고 있었고, 누군가는 오늘 받은 전단과 굿즈를 정리하고 있었다. 책은 느린 매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며 머무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그런데 책 축제에 온 사람들은 멈추지 못하고 계속 걷고 있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한 것은 아무도 쉽게 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와, 너무 많다. 어디부터 봐야 하지?” “아 힘들다.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데 자리도 없네.” 힘들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다시 다음 부스를 향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책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 이상한 모순에서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을 바라보는 질문이 시작됐다. 2.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 책을 사러 온 사람들일까, 그냥 책 곁에 있고 싶은 사람들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사람들이었다. 특히 젊은 여성 관람객들이 많았다. 20대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방문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행사장 곳곳을 누볐다. 그런데 조금 걷다 보면 묘한 장면이 보였다. 길게 늘어선 줄. 그런데 그 줄 끝에는 늘 책이 있지는 않았다. “여기 줄 서 있는 거예요?” “이벤트 참여하시려면 저쪽 끝부터 서셔야 해요.” 사람들은 이벤트를 기다렸다. 한정 굿즈를 찾았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 상품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책 축제인데 책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처음에는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런데 행사장을 오래 걷다 보니 조금 다른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들은 책을 영영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책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아닐까. 과거에 비해 지금의 독자는 조금 복잡하다. 좋아하는 출판사의 세계관을 소비하고, 책 주변의 귀엽고 탐스러운 물건들을 소유하고, 작가와 연결되는 어떤 새로운 경험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책은 목적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출입구가 되고 있었다. 3. 가장 작은 공간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 — 어쩌면 독립 출판이 보여준 취향의 힘? 첫날. 흥미로운 것은 크고 화려한 부스에만 사람들이 몰렸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파가 가장 천천히 움직였던 공간 중
- 정대훈
- 2026-07-01
문장웹진 모색
공허 view[레지던시 일기 – 협성마리나 G7] 공허 view 정용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하지 않기’였다. 뭘 하려는 노력은 그만두고 뭘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일찍 일어나는 것. 까다로운 연락을 주고받는 것. 확인하고 결정하고 결심하는 것. 크고 작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 사느라 바빴다. 어떤 이유로, 혹은 이유도 모른 채, 분주했다. 급한 일에 시달렸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처리하려 들었고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정작 소중한 일이나 가치 있는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뒤로 미루었다. 이상하다. 의미 있는 일은 안 하고(못하고) 무가치한 일에 온 힘을 다하는 삶이라니. 살기와 쓰기는 겨룰 수 없다. 둘은 체급이 다르다. 쓰기는 살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살기의 눈치를 봐야 쓰기는 존재할 수 있다. 살기가 자리를 비우거나 잠이 들어야 비로소 초원에 나올 수 있는 약하고 약한 쓰기. 일상의 사각에 숨어 읽고 쓰는 것. 그것도 대단하지만, 그만큼 소중하지만, 때로는 생각한다. 삶의 운동장 전체를 다 사용해서 쓰면 얼마나 좋을까. 페소아가 그랬듯이 온종일 허구의 존재들하고만 놀면 얼마나 좋을까. 두려움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몇 개로 가능하다면 수십 개로 분화해서 모두에게 삶을 허락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과 공상으로 사면을 채워 그 안에서 영원해지고 무한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협성마리나 G7 39층 숙소. 그곳을 떠올리면 차가운 2월의 허공이 느껴진다. 커다란 창밖으로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 1,200대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주차장. 창문에 이마를 대고 멍하니 그것들을 봤다. 그렇게 있는 것이 좋았다. 허공에 떠서 아래를 바라보는 3인칭 화자의 기분은 이렇겠지. 높은 고도와 그만큼 텅 빈 풍경. 이따금 새가 날고 몇 차례 비가 내리는 것 외엔 언제나 비어 있던 저 허공. 거기에 눈을 두고 오래 있으면 곧 공허해졌다. 나는 그 풍경을 미술관의 그림처럼 응시했고 그 작품의 이름을 ‘공허 view’라고 지었다. ‘공허’의 정의가 궁금해서 사전에서 찾아봤다. 내부 감정이 황폐해지고 환상과 소망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하지 못하거나 단순히 기계적인 반응만을 보이는 주관적인 정신 상태. 이런 상태에서 개인은 확신, 열성, 타인들과의 연결됨을 상실하고 무감각, 권태 그리고 피상적인 감정에 시달린다. 대부분의 설명과 표현에 동의하지만 ‘황폐’, ‘기계적인 반응’, ‘시달린다’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내부 감정의 구조와 지탱하고 있는 것들이 무너질 수는 있다. 무너질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을 황폐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청소를 하려고 물건을 빼놓은 빈방을, 새 물을 채우려고 물을 다 뺀 수영장을, 더럽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그 ‘뷰’는 공허했
- 정용준
- 2026-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