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문학이었다
- 작성일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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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노작홍사용문학관)
결국은 문학이었다
노작홍사용문학관 정란희 작가
노작홍사용문학관의 상주작가로서 가게 된 영국 연수는 나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들었다. 공항에서 일행들의 반짝이는 미소가 나를 맞아주었을 때부터 이 연수가 이상하고 진기한 체험이 될 거라는 예감이 번쩍이긴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토끼를 따라간 앨리스처럼, 나는 그렇게 영국으로 가는 토끼굴로 뛰어들었다. 토끼굴은 작고 좁으면서도 끝이 없었다. 작은 공간에 끝없이 갇혀 있었지만 동시에 이동하고 있었고, 14시간이 지나 낯설고 기이한 ‘영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굴러떨어졌다.
영국은 나에게 해리포터의 나라이기 이전에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였다. 전 세계인이 지켜본 올림픽 개막식을 자국의 문화 콘텐츠로 가득 채워 문화 강국의 자부심을 뿜어냈던 나라, 최근에는 브렉시트와 경제불황이라는 말로 더 많이 회자 되는 나라, 그러면서도 문학 선진국을 생각하면 여전히 1, 2위에서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는 나라, 그것이 내가 영국에 대해 가진 단편적인 인식의 대부분이었다.
영국 연수에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영국작가 루이스 캐럴의 동화, 1865년)가 직면한 놀라움과 진기함을 보고, 듣고, 체험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낯섦’이었고, 이전에는 본 적 없던 ‘놀라움’이었고, 듣지 못한 ‘새로움’이기도 했다. 직접 보고 체험한 문화는 새로웠고 많은 영감과 배울거리,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놀라움’은 토끼굴 속 나라의 진기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앨리스 자신의 이상한 변화-쪼그라들고, 커지고, 목이 길어지고, 당돌해지고- 때문이었을까? 앨리스의 영국 연수는 앨리스가 체험한 문화 강국 영국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영국에 도착한 앨리스가 그 나라에서 겪은 진기한 변신 이야기이기도 하다.
1. 에든버러 북 페스티벌
세계 최초의 문학 도시인 에든버러는 옛 스코틀랜드왕국의 수도답게 문화와 정치, 관광의 중심지였다. 특히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 『해리포터』의 작가 J.K 롤링, 『아이반호』를 쓴 월터 스콧 등 많은 작가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다.
우리가 에든버러 북 페스티벌에 도착한 날은 8월 19일, 비가 오리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하늘이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8월 9일부터 24일까지 16일 동안 진행되는 축제장은 무척 안정되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본관으로 여겨지는 건물 2층에 오르자 어린이들이 동화책을 들고 한 줄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연을 마친 동화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어린이들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동화작가는 밝은 표정으로 어린이들의 이름과 함께 정성스레 사인을 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다정한 풍경이었다.

다양한 책과 일러스트와 어린이들의 참여 마당을 둘러본 다음, 관계자 미팅을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그때 바로 눈에 띈 것은 차양 아래에서 쿠션을 베고 눕거나 엎드린 어린이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작가 한 명이 그림책을 펼쳐 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서너 명을 뺀 어린이들 대부분이 편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발끝을 까딱거리며 누워서도 작가의 말에 웃거나 호응을 보내기도 했다. ‘어른의 말은 바른 자세로 듣는 거’라는 교육에 길들여진 나에게 아주 선선하고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문화의 차이도 있겠지만, 신비주의적 권위 없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듣는 독서’를 하며 책과 만나는 어린이가 앞으로 책을 싫어할 리는 절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 청소년들이 ‘책을 읽지 않고 미디어에 빠져들어 고민’이라는 나라가 갈수록 많아지는 시대에 어쩌면 가장 편하고 쉬운 접근이 그들에게 책과 친구가 되게 하는 지름길일 지도 모른다.
관계자에게 ‘에든버러 책 축제 700개 프로그램 중 어린이 프로그램 비중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북스타트 운동을 처음 만든 나라답게 유아 독서와 문화복지, 시민단체와의 네트워킹, 독서 챌린지, 글쓰기 등의 프로그램 또한 무척 풍성했다. 또한 전날 <황석영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김주혜의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의 쾌거로 K-문학이 세계인들의 관심을 모으는 이때, <황석영 작가와의 만남>이 유럽의 독자들에게 우리 문학을 더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2. 스코티시 스토리텔링센터
세계 최초의 현대식 스토리텔링 전용센터인 스코티시 스토리텔링센터는 주민들과 방문객들을 위한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서 스코틀랜드의 옛이야기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들을 선보이는 곳이다. 또한 그곳을 찾는 누구에게나 스코틀랜드에 관한 전통구술문화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센터 다니엘 아베크롬비(Daniel Abercrombie) 팀장이 말해주었던 운영 철학은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였다.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여행자의 격언이라는 이 말은 창작자, 배우, 관객의 깊은 공감과 폭넓은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 같다.
스코틀랜드 전통문화기금으로 운영되는 스토리텔링센터는 해마다 10월에 스토리텔링 축제 또한 주제별로 진행한다. 날씨가 추워지고 어두워지고 모든 축제가 끝난 시기에 비로소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집필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1층에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카페와 전시관, 스토리텔링 관련 서적과 기념품 파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것처럼 하나같이 여유로워 보이고 친절했다.
우리는 100석 규모의 네더보우 극장에서 지난해 센터 수상작인 <늑대가 태양을 삼킬 것이다>라는 공연을 관람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사냥으로 멸종된 늑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의 옛이야기에 해학과 익살, 욕심꾸러기 캐릭터가 호랑이인 것처럼 영국의 옛이야기에서는 영웅이나 악당 캐릭터로 늑대가 자주 등장한다. 지금은 인간의 사냥으로 멸종된 두 동물이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 속 친구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숱한 예술작품에 지금까지도 호랑이와 늑대가 큰 소리로 호명되는 것은 그 동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미안함이 남아서인 줄도 모르겠다.
‘노르웨이 선조들은 늑대 두 마리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고 믿었다~’
로 시작하는 배우의 노랫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보름달과 소녀 그림이 선명했던 그림자극의 단출하면서도 정감 있던 무대 또한 눈에 선하다. 그리고 무척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시니어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옛이야기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많은 시니어 층을 위해 우리 공연계도 옛이야기들을 무대에 올려도 좋을 것 같았다.

3. 노리치 국립문예창작센터
이야기의 도시 노리치에는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익숙한 노리치 국립문예창작센터가 있었다. 중세 상인 로버트 톱스(Robert Toppes)가 1430년경에 발트해 참나무로 지었다는 드래곤 홀은 긴 역사를 담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대들보에 용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서 드래곤 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 공간은 건축 당시에는 수입된 상품을 전시 판매하는 무역회관이었다. 로버트 톱스 사후에는 주택, 술집, 상점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교류의 장, 문학 행사를 여는 축제의 장으로 쓰이고 있다. 매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20여 명의 작가들이 와서 작품 발표를 하거나 이웃 주민들과 함께 소통하고 문학으로 연대하는 곳이기도 하다.
국립문예창작센터는 현재 문학 워크숍, 강연, 축제, 학교 대상 교육 프로그램, 가족을 위한 창작 이벤트 등 문학 관련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상시 진행하고 있다. 또한 문학 관련 전문가들이 국제적으로 협업하고 교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ILX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2024년에서 2026년까지는 ILX가 ‘도약하는 시기’로 정해서 활동하는 중인데 영국, 인도네시아, 우크라이나 등과 함께 우리나라도 함께하고 있다.
작가 집필실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벽면 책꽂이에는 국립문예창작센터에 다녀온 우리나라 작가들의 저서가 꽂혀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4. 돌아오는 길
유서 깊은 공공도서관과 박물관, 여러 서점들을 방문하고 마지막으로 간 곳은 런던 해리포터 스튜디오였다.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를 구현해 낸 세트장, 영화 제작에서 쓰인 실제 소품들, 특수효과 장치들이 실내 스튜디오와 야외 공간까지 빼곡히 차 있었다.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 사이에서 어린이들의 감탄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살인적인 영국 물가에도 여행객이 끊이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결국 문학이다. 문학 작품이 주는 재미와 감동이 독자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문화 보존도 사회를 지탱하는 귀중한 자산이 되지만, 무엇보다 문화 산업에 중요한 부분은 글, 문학이다.
처음 내가 북스타트 운동을 알았을 때, 영국은 정부와 관련 단체와 시민들이 손을 잡고 독서 교육을 충실히 해가는 나라, 작가들이 되도록 집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제도들을 마련해 가는 나라, 교통요지에 공공도서관을 세워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라였다. 그때 그들이 많이 부러웠다. 하지만 달라졌다. 지금은 우리도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1300여 개의 공공도서관이 항상 독서 운동을 벌이고, 국가 주도하에 국제교류와 창작지원사업, 문학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 등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고 시대에 발맞춰 새 사업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연수가 내 문학의 방향과 우리 문학의 좌표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독서 시스템의 안정성이 피부에 와 닿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나라의 문화 강국으로의 도약과 노력이 내 눈에 가장 먼저, 크게 들어왔다. 이는 그동안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온 예술가들의 노력과 국내 예술인 복지와 창작 지원, 국제교류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지속된 노력으로 문화의 위상을 바꿔 독서 문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앨리스가 체험한 이상한 나라의 ‘놀라움’은 토끼굴 속 나라의 새로움과 진기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본질은 어쩌면 앨리스 자신의 변화-쪼그라들고, 커지고, 목이 길어지고, 당돌해지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학 강국의 모습에 위축되어 쪼그라들고, 그들의 문화를 바라보며 생각이 커지고, 우리의 문화 콘텐츠와 현재 상황을 보며 우쭐해지고, 끝내는 당당해지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잠에서 깬 앨리스는 서둘러 집으로 달려간다. 영국 연수는 꿈속 이야기 같지만, 앨리스가 체험한 기억은 그녀에게 뚜렷한 사실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영원히 이 세상에 남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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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문학기반시설 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선정된 우수시설 담당자, 상주작가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문학의 나라 영국의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를 탐방하고 우수사례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2025년 8월 18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6박 8일간의 참여자들의 이야기들은 문장웹진–모색 10월호에서 총 6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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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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