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강 정 시인, 변화는 기획이 아닌, 흘러가는 것
- 작성일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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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기획이 아닌, 흘러가는 것
아르코 문학 작가 펠로우십 선정 작가 서면 인터뷰 – 강 정(인터뷰어 : 허 희 평론가)
“시인은 시신(屍身)이 되었을 때라야 종국에 가서 언어의 진짜 시신(侍臣)으로 남게 됩니다.” 1992년 계간 『현대시세계』으로 등단한 이래, 30여 년간 언어의 최전선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밀어붙여 온 강정 시인은 시인의 역할을 이처럼 역설적으로 정의했다.
1996년 펴낸 첫 시집 『처형극장』은 기존 시의 문법과 질서를 전복하는 파격적인 실험으로 90년대 ‘해체시’의 기수로 그를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후 『활』(2011) 등을 거쳐 2021년 펴낸 『커다란 하양으로』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어의 파괴적인 에너지를 탐구하는 데서 나아가 모든 것이 지워진 '무(無)의 시학'을 탐색하며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해왔다.
최근 2024년 5월 『웃어라, 용!』을 펴낸 지 불과 1년 5개월 만인 지난 10월, 열 번째 시집 『기적』(달아실)을 발간하며 식지 않는 창작열을 증명한 그가 2025년도 아르코 펠로우십에 선정되었다. 펠로우십 선정을 계기로 30여 년간 언어의 경계와 싸워온 시인의 현재와 미래를 묻고 답을 들었다.
변화는 기획이 아닌, 흘러가는 것
— 첫 시집 『처형극장』이 언어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파괴의 에너지로 가득했다면, 가장 최근의 시집 『커다란 하양으로』는 모든 것이 지워진 공간을 탐색하는 듯합니다.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스스로 인식하는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전환점이라고 특정할 만한 지점은 없습니다. 시간이 오래 흘렀고, 그만큼 나 자신이 변화했고, 세상도 변했습니다. 제겐 시를 쓰는 일이 모종의 기획이나 구상 아래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흘러가고 다가오고 변화하는 것들 속에 뒤섞이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나 세계관 등이 저절로 다른 질감, 다른 색조로 다가올 뿐입니다.”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난 10월 10일 달아실 출판사에서 열 번째 시집 『기적』을 발간했습니다. 2024년 5월 『웃어라, 용!』(문학동네)을 발간한 이후 1년 동안 쓴 시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열한 번째 시집을 머릿속으로 굴리고 있습니다. 그 외, 음악 활동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고 몇 차례 공연도 했습니다.”
—『커다란 하양으로』 이후 작가님의 언어는 어떤 세계를 향하고 있는지요. 이번 펠로우십 기간 동안 작업 방향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에 발간한 시집 『기적』을 참조하시면 될 듯합니다. 현실의 숱한 이미지와 서사들 틈새로 비치는 세계의 더 은밀하고 치열한 이면에 대한 탐구가 지속될 것이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세계 또는 인간의 새로운 모델에 대한 나름의 설계도를 짜보려 합니다.”
시 읽기는 온몸으로 딛는 별다른 몸짓
— 작가님의 시는 독자에게 적극적인 해석의 참여를 요구합니다. 의미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 시를 통해 독자들이 어떤 문학적 체험을 하기를 바라시는지요?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시인과 독자의 이상적인 관계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독자를 계몽하거나 깨우치게 하려고 시를 쓰지 않습니다. 시 읽기는 단순히 쓰여진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온몸의 감각과 정서를 통합한 육체적인 체험입니다. 물속에서 숨을 쉬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평소와는 다른 발걸음으로 세계를 딛는 하나의 별다른 몸짓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독자 또한 뭔가를 읽고 듣는 것 이상의 적극적 몸짓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체험된 시가 종국엔 시를 쓴 이를 넘어 그것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온전히 환원되어 새로운 체험의 디딤돌로 작용하게 될 겁니다.”
시인은 총을 쏘고 총을 맞는 자
— 시의 경계를 밀어붙여 온 전위 시인으로서 앞으로의 한국 시, 혹은 시라는 장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언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언어를 파괴하고 침묵을 사유하는 시인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쭙니다.
“질서화된 언어, 제도에 의해 규정된 개념 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억압입니다. 그게 딱히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사람을 완전히 자유로운 환경 속에 풀어놓으면 사람이라는 것 자체의 존재 의미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 언어는 그것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일차적 기능을 갖습니다. 그럼에도 언어는 사람의 모든 것을 포괄하거나 조치할 수 없습니다. 시의 언어는 그러한 양극과 모순 사이에서 계속 언어 자체, 사람 자체에게 질문을 던지는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많은 것을 지시하지만, 지시한 만큼 불발로 그치거나 허방으로 비어버릴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많은 것을 깨닫게도 하지만, 또 많은 것을 놓치게도 합니다. 시는 그 사이에서 스스로 내파하며 궁극의 잿더미로 남아 언어의 불모성을 환기합니다. 시인은 총을 쏘고 총을 맞는 자일 뿐, 그 어떤 것도 지휘하거나 정복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시신(屍身)이 되었을 때라야 종국에 가서 언어의 진짜 시신(侍臣)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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