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함기석 시인, 존재에서 무한으로, 무한에서 무로
- 작성일 202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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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서 무한으로, 무한에서 무로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 작가 인터뷰, 함기석 시인(인터뷰어 : 성현아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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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작가는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한 이래, 독창적인 언어 실험가로서 한국 시단을 빛내왔다. 그는 수학적 사고와 기하학적 감각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시적 실험을 감행해 온 시인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계속해서 미지를 향해 야간행군을 강행할 것”이라고 스스로 포부를 밝혔던 것처럼, 그는 한국 현대시의 개척자로서 여전히 성실히 분투하고 있다. 함기석 작가는 제10회 박인환문학상, 제8회 이형기문학상, 제13회 이상시문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까지 '국어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 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음시', '모든 꽃은 예언이다', 그리고 올해 출간된 '개안수술집도록'까지 포함하여 총 9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비평 작업 역시 병행하여 시론집 '고독한 대화', 비평집 '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를 집필하기도 했으며 동시집과 동화집도 간행한 바 있다. 함기석 시인이 시도해 온 문학적 해부는 읽는 이들에게 생경함과 동시에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런 그와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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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9권의 시집을 출간하셨어요. 쉼 없이 창작을 이어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분야의 작업을 함께 진행해 주시기도 했고요. 굉장히 놀랍고 요즘도 바쁘시리라고 생각해요.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근에 시집 '개안수술집도록'(민음사, 2025)을 출간했습니다. 시집 전체를 하나의 거대 병동으로 은유하여 각 부에 해당하는 다섯 개의 영역을 병동 k, 병동 o, 병동 r, 병동 e, 병동 a로 지칭했습니다. 시집 전체가 코리아(korea), 그러니까 이 땅의 참혹한 과거와 현재, 국가와 사회와 개인의 폭력적 권력관계, 아물지 않는 상처와 흉터, 그로 인해 태동하는 공포와 불안, 이 모두에 대한 시 쓰기의 악몽과 고뇌에 대한 의학적 언어해부도인 셈입니다.
“시 쓰기의 악몽과 고뇌에 대한 의학적 언어해부도”라니 놀랍습니다. 이어 오셨던 작업을 계속 갱신하고 확장해 나가시는 점 또한 인상적입니다. 벌써 함기석 시인님의 다음 작업도 기대하게 됩니다. 시집 '개안수술집도록'의 ‘병동 e’ 파트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각적인 효과가 강렬했어요. “독창성과 실험성을 향한 시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이러한 기호학적이고 공학적인 시적 실험이 독자로부터 유리되거나 어설픈 낭만으로 귀결되어 오독될 위험도 있다고 박혜진 평론가가 해설에서 언급하셨습니다. 물론 함기석 시인님의 작품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만, 독자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만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이 많으셨으리라고 생각해요. 어려움도 있으셨을 것 같다고 감히 짐작해 보았는데요. 말씀을 청해봅니다.
이 장시는 현실의 무수한 장소들이 무수히 중첩되면서 무한으로 나아갔다가 무로 귀환하는 절망적 폐허 속으로의 흑화과정, 어둠 속에서 빛 또는 빗줄기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는 두 존재의 탄생과 그들의 사멸을 축약한 백화과정, 그 백색의 공백지대에서 좀 더 큰 문장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과정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물과 존재, 현상과 언어에 대한 개념시의 의학적 전개도인데 존재에서 무한으로 무한에서 무로 무위로 그 무위의 검은 황야에서 다시 가까스로 새로운 존재로 재생하는 자연과 우주의 운동성을, 그 운동 메커니즘을 스텝별 시 쓰기의 현장을 통해 사실적으로 복기하고 현장검증하려 했던 겁니다. 이 시가 독자로부터 유리되거나 오독될 수 있다는 말씀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전위적 시 형식을 창안할 때 단 한 번도 낭만적 포즈나 치기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나 동물의 살가죽은 단순한 치장도구가 아니라 자기 육체의 실존적 비명이자 실재입니다. 표면의 형식은 육체 안의 말 할 수 없는 감정들의 가장 전복적인 기호일 수도 있습니다.
직접 시론을 설명해 주시니 이번 시집이 더 잘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창작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물적 경제적 지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나아가 나라는 개인과 우리의 역사, 사회라는 공동체의 영향 관계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조망하고 비판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오래전부터 장시 시리즈를 구상하고 작업 중인데요, 이번 펠로우십 지원은 그 작업을 가속화하는 중간 연료 보급소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전의 제 시세계가 소우주라면 이보다 좀 더 커진 세계로 팽창 확장해가는 여정입니다. 천천히 느릿느릿 진행하고 있습니다. 보다 숙성된 와인을 맛보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피와 땀과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1992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고 정말 많은 작품을 쓰셨어요. 등단 30년째에 하신 인터뷰를 살펴보았는데요. 시인님께서도 시는 막막하고 어렵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시는 길들여지지 않는 암흑, 야수의 공간”이라고도 말씀해 주셨는데요, 창작을 지속해 오면서 ‘문학의 역할’ 혹은 ‘시의 정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시는 무수히 많은 가지를 뻗은 무한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저에게 시는 인식의 역습 혹은 인간의 재탄생을 촉구하는 자극제에 가깝습니다. 이 세계와 인간, 자연과 우주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서 나를 해방시켜 견고하게 굳은 세상을 다시 감각하고 수용하고 사랑하게 하는 전복적인 매질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어떤 수단적 도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저에게 시의 낱말, 어구, 문장 들은 독립적 생명력을 가진 각각의 생물체들입니다.
최근 몇 년간의 작품을 돌아볼 때, 작가님이 스스로 인식하는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은 무엇인가요?
시 창작은 늘 변화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먼저 파악해 설계도를 그려놓고 시를 쓰지는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지점들을 향해 몸으로 먼저 시행하고 사후에 제 몸과 글의 변화 양태와 양상을 논리적으로 재정리하고 보완 수정하는 편입니다. 변화나 전환점은 아니지만, 시와 함께 동시 창작, 동화 창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예전보다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등단 이후 33년 동안 시인으로 살아오셨어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를 창작해 주시기도 하셨고요. 후배들 역시 시인님에 대한 존경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젊은 작가 세대―후배 시인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별로 없습니다. 저를 비롯한 선배 세대 시인들의 시적 한계와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대안 방향과 길을 치열하게 모색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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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서면으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밀도 있는 인터뷰를 통해 함기석 시인이 병든 세계의 구조와 지친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며, 언어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나가고 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쉼 없이 자기 방식을 해체하고 다시 구축해 온 그의 시적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앞으로 그가 써 내려갈 시를 통해 독자인 우리 역시 또 다른 방식으로 ‘개안’하게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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