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안미란 아동문학가, 어리다고 모르지 않아요
- 작성일 2025-12-19
- 댓글수 0
어리다고 모르지 않아요
아르코 문학 작가 펠로우십 선정 작가 인터뷰 - 안미란 아동문학가(인터뷰어 : 안세진 평론가)
안미란은 1996년부터 약 30년 간 동화 작가로 활동을 이어왔다. 그의 동화는 언제나 노동, 인종, 장애, 자연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다룬다. 소수자와 다양성에 대한 사려 깊은 문제의식과 사회 문제에 대한 소신 있는 목소리를 토대로 안미란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2024년에는 작품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창비, 2023)가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아너리스트’ 후보로 선정되어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세계총회에 작품이 소개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어느덧 활동 30년차를 맞는 그의 소회는 어떨까. 서면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달에 『이건 진짜 비밀인데』(길벗어린이, 2025)라는 앤솔로지 작품집이 나왔어요. 제가 쓴 것은 「이상한 생일잔치」(길벗어린이, 2025.11.)라고 사육 돼지의 이야기예요. 개인 창작집은 『다랑이 마을에 어서와!』(사계절, 2025.06)을 냈는데 멧돼지와 너구리 이야기예요. 최근 쓰는 이야기에 동물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데요, 지금 붙잡고 계속 고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시로 넘어오는 야생동물과의 공존이라든지, 사역 동물이 은퇴한 후의 생존권 같은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물은 문학 작품 속에서 어린이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어린이의 욕망을 대변하기 좋아요.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어린이 문학에서 동물 등장인물이 사랑받는 이유기도 하고요. 『다랑이 마을에 어서와!』 속 킁킁이와 두드리처럼 어린이들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행복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습니다.
-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최초 등단이 1996년 1월에 동쪽나라아동문학상에 동시 부문 수상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문학상이 없어졌고, 등단 증빙도 여의치 않아 공식적으로는 2000년 출판사 공모에 당선된 것을 이력으로 삼는데요, 어찌 되었든 창작 이력이 30여 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것 같지만, 펠로우십 작가라는 명패로 응원과 격려를 주시니 힘이 나긴 합니다.
작년 이맘때쯤 펠로우십 지원 서류를 쓰면서 문학을 기반으로 한 저의 활동 전체를 총 점검하고 정리하는 계기기 되었습니다. 누군가 소감을 물었다면 ‘비록 재주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군. 나 정말 수고했어, 진짜 열심히 달렸네.’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그러니 선정된 게 순전히 ‘로또 당첨’이라는 식의 농담은 하지 말아주세요. 속상해요.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초고를 넘기긴 했습니다. 모 출판사와 동물원의 변화와 미래를 생각하는 작품을 써보기로 했었거든요. 제국주의 국가의 영토 확장을 과시하고 귀족들의 고급 취미와 부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동물원은 전시와 사육이라는 역할을 담당해왔지요. 하지만 생명의 존엄함을 생각하는 많은 이가 동물원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교육과 종 보전을 위해 동물원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고요.
동물원을 배경으로 어린이들과 여러 동물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제가 어떤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서 쓰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작업하는 동안 즐거웠어요. 야생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소백산으로 방사된 붉은여우, 유튜브 방송 출신 이력이 있는 북미여우, 외교 선물이었던 사막여우, 기증을 빙자한 유기를 당한 북극여우 등이 등장합니다. 장르로 따지자면 판타지이고요. 삽화 작업 들어가기 전에 원고 수정을 해야 하는데, 마음만 바쁘네요.
- 약 30년 간 동화 작가로 꾸준히 활동해 오셨습니다. 2024년에는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2023)가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아너리스트’ 후보로 선정되어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세계총회에 참여하시기도 했죠. 창작을 지속해 오면서 ‘쓰는 이유’나 ‘아동 문학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으실까요? 최근 몇 년간의 작품을 돌아볼 때, 작가님이 스스로 인식하는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을 말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종의 콤플렉스 같은 건데요, 저는 철학을 전공했어요. 그리고 80년대 민주화 투쟁 시기에 20대를 보낸 세대입니다. 직간접적으로 운동권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초기작부터 지금까지 거대 이데올로기, 혹은 뭔가 올바름을 설파하는 주제를 반드시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 이게 진짜 예술이야? 문학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슴을 울려야 하는 건데 왜 그렇게 못 쓰는 거지? 하는 조바심이 날 때가 많아요.
동물 이야기로 좁혀서 생각하더라도 제가 쓴 동물담은 엄밀히 말하면 우화에 가깝거든요. 주제의식이 과해서 재미와 감동을 놓치는 거지요.
넓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하고 좋은 일이 또 생길 거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을 제대로 담고 싶습니다.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린이가 진정한 주인공인 서사에 대한 고민은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숙제처럼 껴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 작가님의 동화에는 언제나 소수자와 다양성에 대한 사려 깊은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노동, 인종, 장애, 자연 등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있는 작품의 스케일에 새삼 놀라기도 하고, 그러한 레이어를 ‘동화’라는 포맷 안에 녹여 내시는 능숙한 방식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작가님께서 집필에 있어서 중요하게 고려하는 부분과, 또 그러한 주제의식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하나의 완성된 동화로 실현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듣고 싶습니다.
어리다고 모르지 않아요. 어린 사람들은 특유의 직관적이고 솔직한 태도로 삶의 정수를 곧장 파악할 때가 있어요. 이주노동자의 권리, 난민 문제, 장애, 환경, 정치 등등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들 앞에 놓일 때도 어린이들은 에둘러 말하지 않아요. 단지 경험의 폭이 좁기 때문에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모를 뿐입니다.
저는 제가 듣고 보고 겪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을 쉽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어린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의 눈으로 이 사건을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런 측면을 늘 고려하면서 글을 씁니다. 그런데 어린이처럼 쉽게 말하려면 제 자신이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말과 글로 뱉어지지가 않아요. 어린이청소년문학을 하는 사람의 즐거움이자 괴로움이겠지요.
- 성인의 입장에서 작가님의 동화를 읽으며 관성적으로 침잠해온 현실의 감각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냥 씨의 동물 직업 상담소』에서 경쾌하게 터져 나오는 “그냥”이라는 대사를 들으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동화만이 전달/전승할 수 있는 문학적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작가님께서 깊이 탐구하고 계시는 ‘동심’ 또는 ‘놀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놀이’가 없다면 어린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의 놀이를 잘 보면 단순한 경쟁만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상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욕망을 충족시키기도 하며 타인을 이해하는 힘도 기르지요. 동화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놀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모험을 떠나 새로운 존재를 만나고 성장하는 한바탕 놀이판인 거지요.
제 작품 속에 나오는 어린이의 ‘놀이’ 장면은 종종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어린이가 새로운 정책을 내놓는다든지 제도를 바꾸는 건 어렵잖아요? 하지만 『투명한 아이』(어린이나무생각, 2015)의 주인공들은 푸키로 별로 가는 우주선 놀이를 합니다. 놀이 속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인 ‘눈’을 위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주 시민증을 만들어냅니다. 『참 다행인 하루』(낮은산, 2016)의 주인공은 태풍 때문에 학교마저 휴교한 날 혼자 집에 남습니다. 무섭고 두려울 수 있지만, 태풍 꼬마의 아이를 환상 속 놀이로 불러내 난파선 놀이와 구조대 놀이를 한바탕 신나게 하고 무사히 집을 지켜냅니다. 『내겐 소리로 인사해줘』(마음이음, 2022)의 주인공들은 시각장애가 있든 없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놀이 속 모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동화는 그저 어린아이 장난 같은 놀이 혹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꿈꾸어야 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 디지털 플랫폼 시대, 독서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오늘날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독자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특히 아동 문학의 영역에서 이와 같은 매체적 변화가 야기할 영향에 대해 생각해 오신 바를 질문드려요.
아동 문학은 다른 장르의 작가들보다는 독자와 만날 기회가 많이 보장되어 있는 편입니다. 어린이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애쓰는 어른이 학교, 도서관, 가정에 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어른들조차 디지털 기기에 자신의 집중력을 도둑맞고 스크린 속 대리 경험에 자아가 빼앗기는 상황이니 사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디지털 교과서 도입에 저는 반대합니다. 전자책으로 제 동화를 읽은 반과 종이책에 줄 그으며 읽은 반의 어린이들은 질문 수준부터 차이가 납니다. 후자에게서 훨씬 더 깊이 읽기가 가능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린이들이 디지털 매체를 활용해서 독후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추천하는 책의 북트레일러를 만들거나 네 컷 카드 뉴스, 숏폼 영상도 만들더군요. 하지만 행간의 의미를 더듬으며 읽는 소리 내어 읽기, 종이책을 넘기며 읽기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어린이 문학은 ‘귀로 들어도 참 좋은’ 문학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기, 어린이 스스로 소리내어 책을 읽기는 아동의 독서 발달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주르르 흐르는 디지털 스크린의 독서 경험은 번쩍하는 섬광을 따라 마치 메뚜기가 뛰는 것 같은 독서입니다. 그보다는 황소처럼 느리게 천천히 멀리 가는 독서가 필요합니다. 매체 변화가 야기할 영향은 엄청 날 것입니다. 그 고민 이전에 우리는 어린 시절 독서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곁의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과제입니다.
- 마지막으로, 앞으로 만나게 될 작가님의 작품에서 특히 주목해 주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현재 구상중인 작품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나누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요. 어린이 독자들은 주인공만 기억하지 작가는 안중에도 없답니다. 그러니 저의 작품이라고 더 주목하며 읽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보다는 어린이 독자들이 얘는 진짜로 내 편, 내 친구야 라고 느낄 수 있는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모색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 권예진
- 2026-09-01
문장웹진 모색
호주 도서관의 공간혁신과 문학 생태계를 살펴보다.[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호주 도서관의 공간혁신과 문학 생태계를 살펴보다. - 시드니·멜버른 도서관 탐방기 - 김성하(인천광역시교육청중앙도서관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 담당자)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로 선정되어 7박 9일간의 호주 국외연수에 참여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번 연수는 오랜 시간 도서관을 일터이자 삶의 공간으로 삼아온 사서로서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도서관과 문학, 문학과 지역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 생생한 현장을 살펴보는 뜻깊은 여정이었다. 5월 19일 저녁, 인천공항을 출발해 10시간 넘는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상공에서 마주한 붉은 여명은 긴 비행의 피로를 단숨에 잊게 만들었다. 도착해서 처음 만난 생명체는 현지에서 흔히 ‘쓰레기새'라 부르며 홀대한다는 호주흰따오기, ‘아이비스(Ibis)’였다. 노천카페 주변을 서성이며 사람들이 남긴 빵 조각을 가로채는 녀석들의 모습은 낮선 도시의 첫인상을 도리어 친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하버 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마주하니, 비로소 이번 연수가 실감났다. 1. 시드니(Sydney): 전통과 혁신이 어우러진 도서관 문화의 현장 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시드니 작가 축제(Sydney Writers' Festival)가 한창 열리던 5월 21일,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을 찾았다. 1826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주 전체 도서관 서비스 개시 200주년을 맞이한 곳이다. 정문의 웅장한 사암 돌기둥이 인상적인 이곳은 1942년에 완공된 고풍스럽고 웅장한 구관 '미첼 빌딩'과 호주 이주 200주년을 기념해 1988년에 지어진 후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마친 '신관'이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한 도서를 열람하는 공간을 넘어 거대한 박물관이자 미술관의 역할의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웅장한 열람실은 벽면 전체를 채운 고서들과 클래식한 목재 책상,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지적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높은 곳의 책을 꺼낼 수 있도록 연결된 2층 구조의 난간과 계단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어린이도서관은 천장에 책들이 마치 새처럼 날아다니는 듯이 조형물이 매달려 있었고, 독창적인 도서 소개 사인물은 아이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의 자료는 관내열람만 가능하다. 법정 납본 제도에 따라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출판되는 모든 도서의 원본과 역사적 기록물을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 주립도서관의 핵심 임무이기 때문이다. 분실 위험이 있는 관외대출을 금하고 오직 관내 열람과 연구만을 허용하여 아카이브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었다. 도서관이 운영하는 '펠로우십 프로그램(Fellowship Program)'은 역사학자와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최소 1,000AUD에서 최대 120,000AUD에 이르는 파격적인 창작
- 2026-09-01
문장웹진 모색
30년 만에 만난 호주[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30년 만에 만난 호주 김중석(시옷책방 상주작가) “호주라니!” 상주작가 우수시설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기대했던 해외연수의 행선지가 호주라는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전 해에는 유럽으로 다녀왔다고 알고 있었던 터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호주라니. 하지만 연수를 하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 되돌아보는 지금까지도 호주가 너무 좋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여정에 많은 문화공간과 아름다운 자연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고 새로운 창작을 향한 에너지와 영감을 듬뿍 채운 시간이었다. 사실 호주는 30년 전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곳이었다. 그때는 결혼식을 마치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코스를 따라 몇 팀의 신혼부부들과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딘가에 내리고 밥을 먹고 멋있는 자연을 보며 감탄했지만, 자세한 것은 모두 다 머릿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기억에 선명한데 또 어디를 갔더라? 캥거루를 만나서 먹이를 주기는 했는데 이제는 어느 동물원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나의 호주는 아주 오래전 앨범을 뒤져야만 나오는 추억 속의 나라였다. 호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이미지는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코알라 그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멋진 공원들 그리고 원주민들의 미술이었다. 그때의 호주와 지금의 호주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기대감을 잔뜩 안고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맑고 청명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제까지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였다는데 다행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 ‘날씨요정’이 있었는지 여정 내내 좋은 날씨 덕분에 즐거운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오니 그때의 호주가 조금씩 떠올랐다. 커다란 나무들, 온통 영어로 만들어진 간판들(아주 당연하지만) 익숙함이 밀려왔다. 며칠의 여정 동안 인상 깊었던 몇 개의 장면들을 기억해 본다. 1. 라이온 킹 뮤지컬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우리 일정에는 뮤지컬 ‘라이온 킹’이 관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작자로서 부끄럽지만 뮤지컬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공짜 티켓이 생겨서 다녀온 게 전부였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미 영화로는 보았던 것이니 대충의 스토리는 이해가 되었다. (아! 영어의 벽. 이럴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해둘걸, 이라는 후회) 공연이 시작되기 전 놀라웠던 모습은 극장의 분위기였다. 판매원이 돌아다니며 맥주와 음료와 음식을 팔고 옆 사람과 떠들고 인사하며 사진을 찍고 객석에서 바로 보이는 무대 옆쪽 매점에서 음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공연 전의 풍경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본 것은 무대 미술과 의상이었다. 한정된 무대에서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로 이루어졌을까? 무대의 일정 부분은 회전판을 사용하고 어떤 부분은
- 김중석
- 2026-09-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