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손홍규 소설가, 소설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 작성일 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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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 작가 인터뷰 - 손홍규 소설가(인터뷰어 : 안세진 평론가)
손홍규는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후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청년의사 장기려』(다산책방, 2008), 『이슬람 정육점』(문학과지성사, 2010), 『서울』(창비, 2014), 『파르티잔 극장』(문학동네, 2020),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문학사상, 2021), 소설집 『사람의 신화』(문학동네, 2005),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2008),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지성사, 2012), 『그 남자의 가출』(창비, 2015),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창비, 2020) 등을 꾸준히 발표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2018년에는 “꿈의 언어로 폭력의 기원을 더듬는 실험적인 서술”(권택영)이라는 심사평과 함께 중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이외에도 황순원문학상, 현대문학상, 채만식문학상, 김승옥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등단 25년차를 맞아 새로운 소설집을 준비 중인 그와 서면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2024년 9월에 연작소설집 『너를 기억하는 풍경』(문학과지성사, 2024)을 출간하였고 새로운 소설집 출간을 준비 중입니다.
-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소설을 쓰다 보면 스스로 창작의 고비를 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시기가 있습니다. 한 편의 장편소설을 탈고하여 출간하거나 그동안 발표했던 단편을 엮어 소설집을 출간할 때 그렇지요. 그럴 때마다 지난 몇 년에 걸친 작업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번 펠로우십은 새로운 소설집 출간을 앞둔 저에게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의 문학적 행보를 격려 받았다는 점과 더불어 새로운 소설 미학을 실현하려 애쓴 노력 역시 격려 받았다는 점입니다. 저는 책을 출간할 때마다 주목을 받거나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소설가는 아닙니다. 책을 출간할 때마다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기분보다는 오히려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떠안았다는 기분이 드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는 소설가답게 지난 작품에 연연하지 않고 새 작품을 쓰는 용기를 발휘해야 하고 익숙한 길이 아닌 낯선 길로 여행을 떠날 수 있어야 하는데 펠로우십은 저에게 그런 용기를 주었습니다. 또한 펠로우십은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하며 어떤 방식이든 상관 없다는 자유를 누리는 만큼 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책임감을요.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난 몇 년 동안 제가 소설에서 실현하고 싶었던 건 단선적인 시간관념을 극복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아우르는 이야기의 장을 만드는 것이었지요. 기억을 재구성하여 과거를 재발견하는 기존의 방식에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어요. 소설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어 소설이 삶이 되고 삶이 소설이 되는 기적과도 같은 한 순간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삶이 이야기가 되는 순간처럼, 그러니까 현실이 토대가 되어 한 편의 소설로 변모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와는 정반대의 순간도 있을 테니까요. 즉 이야기가 삶이 되는 기이하게 비현실적이면서 지극히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순간을 포착하려 했습니다. 사실 소설 쓰기 바깥의 영역에서 제가 시도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많지 않겠으나 무얼 시도하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미학적 목표를 작품에서 온전히 실현하는 일이기에 지난 몇 년 동안 써왔던 작품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중입니다.
- 2001년 등단 이후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창작을 지속해 오면서 ‘쓰는 이유’나 ‘문학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최근 몇 년간의 작품을 돌아볼 때, 작가님께서 스스로 인식하는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을 말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설은 새로운 시대와 세계로 진입하는 중인 것 같아요. 이 새로운 시대와 세계를 무어라 규정하든 예전과 비교해서 소설의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건 부인하기 힘들다고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소설이 무얼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겠지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것들을 의심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법이니까요. 소설 쓰기는 어느 때나 쉽지 않았으니 새삼스럽게 쉽지 않다고 투덜대서는 안되겠지요. 사실 소설을 쓰다 보면 늘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창작 방법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제가 인식하는 세계와 실재하는 세계 사이의 괴리가 불러일으키는 혼란 같은 문제들을요. 저는 오랫동안 소설은 하나의 예술이기에 기꺼이 고립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제가 해왔던 일이 고립을 감수한 게 아니라 고립을 핑계 삼아 난제를 회피하고 저의 불철저함을 숨기려 했던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혼란을 느끼면 예술이라는 이름 뒤로 숨으려 했던 게 아닌지 자문하게 된 거지요. 물론 저에게 소설은 언제나 예술입니다. 참담한 건 항상 그 예술 뒤에 저 혼자 숨으려 했다는 거지요. 외롭고 쓸쓸한 모든 이들과 더불어 그 뒤에 숨었더라면 그곳이야말로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가장 깊은 그늘 속에 있으면서도 가장 환한 공감의 장이 되었을 테니까요.
- 최근에는 연작 소설집 『너를 기억하는 풍경』을 출간하셨죠. 1980년대 기찻길 마을을 배경으로 ‘수’, ‘준’, ‘영’, ‘민’, ‘희’ 다섯 아이의 모습을 애수의 시선으로 섬세히 조감하는 작품입니다. 소설 속 다섯 명의 아이들이 겪는 서로 다른 이야기에는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시대의 무게가 드리워 있기도 한데요, 해당 연작 소설을 집필하게 된 계기를 청해 듣고 싶습니다.
연작 소설집과 관련해서 저한테는 두 가지 풍경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집필하던 무렵의 일이지요. 딸아이와 함께 고향에 내려가서 옛 터널 앞에 선 적이 있습니다. 기찻길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발길 드문 산허리에 터널만은 남아 있거든요. 그 앞에서 아이와 손을 잡고 섰을 때 아이가 느낀 두려움이 그 손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저는 나이 지긋한 중년이 되었는데, 저 역시 무서웠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어둠이 한 걸음씩 물러나 터널 내부가 드러나지만 한 걸음 물러서면 그 어둠이 당장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가왔으니까요. 새까맣고 새까매서 괴물의 벌린 입처럼 보였지요. 다른 하나는 소설집을 출간한 뒤 아이와 함께 고향의 대숲 앞을 지날 때였지요. 소설에서 묘사했던 대숲은 오래전에 사라졌는데 고향 마을 근처에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대숲이 생겨났더군요. 아이가 대숲 앞에 멈춰서더니 저를 돌아보았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신비로워.” 아이는 오래도록 대숲을 바라보았지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대숲을 바라보는 아이, 그 아이를 바라보는 저,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대숲. 그 풍경이 제 소설집의 모든 걸, 제가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걸 다시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느끼고 있는 걸 오래전에 저 역시 느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제가 어떤 풍경을 기억하면 그 풍경 역시 저를 기억한다는 걸, 오래전 대숲 앞에서 느꼈고 그 경험이 연작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즐거웠던 건 저 역시 까맣게 잊었던 옛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어서였지요. 한 사람을 기억하니, 그 사람을 기억하는 모든 풍경이 제 안에서도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의 풍경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풍경이 되었지요. 가장 강렬한 이미지란 가장 강렬한 정서와 결부된 이미지가 아닐까 해요. 풍경을 떠올렸는데 그 풍경이 품고 있던 감정마저 떠오르는 경우들이 있듯이 말이지요. 이른바 시대의 무게란 그 당시 말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풍경에 의탁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겠지요.
- 세대 혹은 시대의 문제를 그간 중요한 제재로 다루어 오신 만큼, 이에 대한 작가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지금의 젊은 작가 세대―후배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규정하기는 힘들겠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속해 있는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사실만은 불변이겠지요. 과거에는 이 시스템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으로 규정했으나 시스템 역시 일종의 유기체여서 영원히 고정된 상태는 아닐 겁니다. 시스템이 어떻게 진화하든 우리는 거기에 속한 존재일 테고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시스템에 여전히 예속된 상태일 겁니다. 저는 작가들이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건 제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시스템이 진화할 수밖에 없는 까닭 역시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노력이 있기 때문일 테지요. 어느 시대에나 작가는 세계의 붕괴를 지탱하는 마지막 인간들이었습니다. 마지막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지만 외롭기 때문에 이 세계가 무너지는 걸 막아내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아마 어떤 시대보다 지금 이 시대의 작가들이 더 외로울 겁니다. 비유하자면 기초가 단단해서가 아니라 지각이 흔드는 대로 움직이며 충격을 분산해 지진을 견뎌내는 내진 건물처럼, 저 아래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이 세계의 모든 흔들림을 받아내는 당신들, 지금도 외롭게 흔들리는 당신들, 저는 항상 젊은 당신들에게 감사할 겁니다.
-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작가님의 작품에서 특히 주목해 주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작가님의 신작을 기다리는 독자 분들을 위해, 현재 구상중인 작품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나누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첫 소설집 『사람의 신화』(문학동네, 2005)와 첫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에서 한평생 몰두할 문학적 화두를 밝힌 셈입니다. 우리가 상실한 신비로움을 되찾아 사람과 귀신의 구분이 불필요한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 마술 같은 현실과 현실 같은 마술을 담은 이야기, 그럼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새로운 존재로 고양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갈팡질팡했지만 그동안 제가 시도하고 모색했던 소설적 방법론이 마침내 출발 지점이었던 그곳으로 귀환하여 새롭게 태어난 작품집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랄 뿐입니다. 인간이 꿈꾸었던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세상은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 눈앞에 있으니까요. 그 세상을 독자와 더불어 경탄하며 바라보고 싶습니다. 소설을 쓰던 그 첫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던 청년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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