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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손택수 시인, 소리의 질서에 귀를 기울이면

  • 작성일 2025-12-19

소리의 질서에 귀를 기울이면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작가 인터뷰 - 손택수 시인(인터뷰어 : 최다영 평론가)

 

*

 

199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시인 손택수는 호랑이 발자국(2003)부터 눈물이 움직인다(2025)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시집을 발간하고 여러 동시 앤솔로지에 참여하였다. 청년기에는 실천문학의 주간을 거쳐 대표직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1 임화문학예술상, 2020년 조태일 문학상, 2023년 오장환 문학상과 고산문학 대상, 2025 풀꽃문학상이 주요 수상 경력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에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사랑은 우리를 늘 새로운 이해로 이끌어가는 것이라 말하는 손택수 시인을 만나보자.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집 눈물이 움직인다(창비, 2025)를 출간하면서 독자들과의 만남이 부쩍 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선 주간에 출간이 겹치면서 노출도 되질 않고 어지러운 시국에 태평하게 책 홍보하는 것도 면구스럽고 해서 안팎으로 좀 시무룩해 있었는데, 찾아 읽는 독자들이 조금씩 있는 것 같아요. 산후우울증 기간이 끝나가는지 자연스럽게 새로운 작업도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대학 민주화 운동을 하시다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고현철 선생 10주기 백서에 산문을 실었고, 해남 땅끝문학관에서 송기원 선생 1주기 추모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거기 도록에도 작가론을 붙였습니다. 선배 문인들의 생애와 작품을 갈무리하면서 저의 문학 행로도 돌아보는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들과의 만남 중에는 학생들을 만나는 게 즐거운 일인데, 최근엔 십 수년 전에 담양한빛고등학교에서 만났던 학생이 작가가 되어 재회를 하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올해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은 함윤이 소설가가 그 주인공이죠(웃음)

 

-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연속과 단절의 시간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도의 지원을 받았으니 의식적으로 좀더 초점화된 작업들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이런저런 궁리와 모색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떠돌다가 돋보기 속으로 모여서 발화를 준비하고 있다고나 할까, 일상 가운데 휘발되기 쉬운 에너지들이 모이고 있다고 할까, 동분서주하던 생계 활동들이 절제되면서 모처럼 등단을 준비하던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여간 저로선 순도 높은 일종의 몰입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하나의 매듭이 지어지면서 후반기 작업을 향한 새 가지들이 뻗어나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새 시집을 출간한 뒤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표면적으론 붓이 멈춘거죠. 그런데 이 시간은 사실 완공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축물의 비계와도 같아서 작가들에겐 다음 단계를 위해 꼭 필요한 안거의 시간이기도 하죠. 현재로선 내세울 수 있는 프로젝트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다음 작업이 의지나 설계 너머의 차원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은 갖고 있습니다. 아마 내년쯤이면 그 결실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막연한 이야기이도 할 것 같아서, 조금 더 첨언하자면, 심리학 용어 중에 렐리기오(Religio)’라는 말이 있는데 다시(re) 결합한다(ligio), 다시 생각한다는 뜻이죠. 내부의 메시지에 자아가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해요. 삶에 에너지를 주는 원천으로서의 자신의 뿌리를 주목하는 태도이죠. 자기실천을 위해서는 반드시 렐리기오의 상태를 견지해야 진정한 개성화가 달성된다고 해요. 그 과정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파열의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지금 저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 최근 몇 년간의 작품을 돌아볼 때, 작가님이 스스로 인식하는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은 무엇인가요?

 

작년에 작고하신 김현경 선생의 책을 만든 인연이 있어서 가끔 뵐 일이 있었는데, 용인 댁을 방문했을 때 생전의 시인 김수영이 썼다는 메모장들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1966년에 쓰인 산문생활의 극복담뱃갑의 메모에서 김수영은 수첩을 지니고 다니기가 귀찮아 담뱃갑에 메모를 해두는 버릇이 있음을 밝히는데 제가 그 실물을 만난 거죠.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수가 많으니 제반사에 너무 밀착하지 말라’,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이런 자잘한 메모들인데 주목 거리는 내용이 아니라 메모를 적어둔 담뱃갑 자체에 있죠. 김수영은 이 메모란 것이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진리도 아니지만, 그것이 다름 아닌 옹색하기 짝이 없는 담뱃갑에 적힐 때 나대로의 이행(履行)의 전후관계에서 보면 한없이 신선하고 발랄하고 힘의 원천이 된다면서, 그 순간 자신은 딴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자못 벅차오르는 어조로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이죠. “딴사람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김수영의 담뱃갑에 가장 많이 적혀 있던 메모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음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당부를 합니다. “잡지사의 원고료의 액수와 날짜, 사야 할 책 이름, 아이들의 학비 낼 날짜와 액수, 전화번호, 약 이름과 약방 이름, 외상 술값......”. 그의 말대로 이런 자질구레한 숫자와 암호 속에 우리들의 생활의 전부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 시는 이런 범속한 자리들을 마주하려는 궁리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김현경 여사의 말 중에 또 기억나는 것은, 김수영은 틈만 나며 테두리 없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해요, 그 거울을 저도 슬쩍 들여다 보았죠. 담뱃갑 메모지와 나르시스트의 거울. 제겐 그게 굉장이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 창작을 지속해 오면서 쓰는 이유문학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사람을 육체와 장소와 시로부터 떼어내고자 하는 기획이 가장 성공한 곳이 서울 같은 대도시 아니겠어요. 어디에나 있는 서울은 거대한 추상입니다. 추상은 개념화 의지인데 우리 삶의 디테일을 막연하게 반복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고유한 풍토로서의 차이가 사라지고, 차이의 경험도 상실케 돼요. 하지만 거기서도 시적 풍경을 발견하는 게 시인들이잖아요. 저는 오랫동안 살았던 고양시 삼송동의 어느 술집 슬레이트 집 처마 밑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의 모습을 제 개인의 명승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산의 모습이 얼마나 천변만화하는지 몰라요. 대기와 빛 그리고 바람의 상태에 따라 바위 빛깔이 달라지는데 세계 어디 멋진 풍광과도 바꿀 수 없는 비경 중의 비경이죠. 비경은 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관계들로 끝없이 개방적으로 재구성됩니다. 왜 하필 거기냐, 하면, 글세요, 하여간 대체불가한 고유의 기운을 제가 느끼는 곳입니다. 어쩌면 술과 슬레이트가 제 안의 어떤 기억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사람이 근대적 지각과 운동양식에 갇혀 있으면 있을수록, 직접적인 감각의 체험세계로부터 그만큼 더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저는 그런 방식으로 풍경을 살아갑니다. 일산에 살 때 호수공원을 자주 찾았거든요. 30년 동안 바다를 보고 산 제게 호수공원이 속에 찼겠습니까? 가소롭기 짝이 없더군요. 그것도 약품을 타고 전기를 활용해서 맑은 위선적인 물 아닙니까? 그런데 살아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도시에 저마저 없다면, 약품에 의해 겨우 유지되는 물빛이라도 없다면, 내 삶은 얼마나 더 팍팍해질 것인가, 그러니까 그 물빛이 더 눈물겨워지더군요. 바슐라르도 비슷한 말을 했지요. 자신은 파리의 소음들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몽상에 젖어든다고 말입니다. 손쉬운 이분법을 넘어서서 자연이 희박한 도시 속에서 오히려 자연과 생명의 감수성을 더욱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는 말을 저는 사랑합니다.

 

- 최근 사회나 세계의 변화 속에서 작가님이 특히 문학으로 응답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진은영 선생이 올해 나온 시집의 추천사에서 메리 올리버의 말을 인용했더라구요.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사랑과 질문의 리듬을 따라 뛰는 심장박동음이 제 시라는 건데, 제 시의 과거이자 미래를 꿴 표현 같아서 기쁘고도 놀라웠습니다. 다만, 여기에 하나를 더해서 트라이엥글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삼각형의 마지막 한 변은 첫시집부터 지금까지 제가 포기한 적이 없는 그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 그늘이 언어이든 존재이든 사회이든 저의 고백과 타자들의 고백을 경청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 같아요. 반복에 굳이 차이가 있다면 초기의 경험적 고백보다 언어에 대한 고백이랄까, 좀 더 근원적인 문제들로 시야를 넓혀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저의 경우 다름이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깊어져서 오는 것이라는 걸 생각할 때 저의 트라이엥글이 만들어내는 울림은 절취선이 분명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어쨌든 완벽한 삼각형이 아니라 불완전한 균열을 품고 있는 게 트라이엥글이잖아요? 시는 특히 그 균열을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디지털 플랫폼 시대, 독서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오늘날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독자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언어도 매체이니까 작가도 미디어의 변화에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와 작가는 같은 순간의 다른 현현이다’. 옥타비오 파스의 언명인데요, 다른 현현같은 순간이 문학장의 활기를 근본적으로 견인하고 있는가, 에 대해선 유보적입니다. 예술공간이란 것이 삶의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말하자면 일상의 속도에 소멸되지 않는 브레이크 장치 같은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사회는 그마저 하나의 소비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어요. 미디어의 변화를 외면하지 않고 지켜 보는 것, 그래서 문학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를 영원히 완료되지 않는 진행의 것으로 끝없이 질문해보는 것, 이것이 제가 새로운 미디어들을 맞는 방식입니다. 문학은 제도 너머를 늘 지향하는데 현실적으론 출판 매체나 문학상이나 대학 같은 문학제도와 늘 함께 해야 한다는 모순을 어떻게 에너지로 만들 것인가는 미해결의 질문으로 늘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2003)에 수록된 아버지의 등을 밀며는 단 한 번도 목욕탕에 데려가주지 않던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에야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발견하고 그간의 비밀을 알게 되는 정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은 언제 읽어도 눈물이 솟구치게 합니다.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둘 사이를 넘어 각자가 자신의 설움과 화해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시간이 오래 묵은 서글픔을 눈 녹듯 씻어주는 것일까요. 이제 약 30년 차에 이르는 시인으로서, 신인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넉넉히 이해하고 포용하게 된 것이 있으신가요?

 

시도 가족도 사랑도 너무 이해하려고 기를 썼던 것 같아요.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은 늘 새로운 이해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를 사랑은 했죠. 제가 시 쓰는 거 참 대책없어 하셨는데, 언젠가 그러시는 거에요, 쓰잘 데 없는 짓이긴 하다만 그래도 아들놈이 아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 보라고 말입니다. 쓸모 없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저는 문학이론으로 시를 배운 게 아닙니다. 그걸 첫시집의 자서로 삼았어요. 지금도 제겐 그 말씀이 시를 쓰게 하는 가장 큰 힘입니다.

 

 

-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한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2022)에는 라는 시어를 포함해 듣는 일이 자주 언급됩니다. 가령 귀의 가난은 나이 들며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지는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잘 들리지 않게 되자 되묻지 않으려고/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하는 동안 조금은 자상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비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는 화자의 자세가 인상 깊었습니다. 머뭇거릴 섭에서도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머뭇거려야 한다는 깨달음이 그려지지요. 그렇다면 이 시기에 듣는 일은 시인님께 왜 시의 출발지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했는지, 시인님께서 일상에서 놓치지 않고자 더욱 귀 기울이는 영역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귀가 제 콤플렉스거든요. 유년시절에 귓병을 심하게 앓았어요. 지금도 청력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더 잘 들으려고 하는 거죠. 콤플렉스가 저를 조금은 자상한 인간으로 만든 셈입니다(웃음). 그리고 뭐랄까, 구술문화시대의 문화 향수라고 할까, 노래든 이야기든 저에게 처음 온 문학이 바로 귀를 통해 왔으니까요. 시는 문자화되고 난 뒤에도 상상적인 청자를 늘 염두에 두고 쓰는 장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쓰고 난 뒤에 잘 됐나 안 됐나 입을 움직여서 낭독을 해봐야, 즉 몸으로 검증을 해봐야 뇌나 눈에 속지 않을 수 있는 거죠. 낭송가들 만나면 저는 눈에만 주도권을 주지 않고 소리의 질서에도 관심을 가진 시인들과 시들을 주목해달라고 합니다. 어슐러 르 귄 같은 작가도 그런 얘길 하더군요. 퇴고를 할 때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입술이라도 움직이는 시늉을 해서 어색한 데가 없나 몸으로 검증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언어가 생각만 갖곤 안돼요. 언어도 숨결이니까요.

 

올해 출간된 시집 눈물이 움직인다(2025)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이별하는 돌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요, “돌을 쥔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온기가 있다/나의 체온이 건너간 것이다/건너간 것이 체온만은 아니어서/떠나는 거 서운치 않게, 지는 해를 따라가서/민박집에 주저앉았던 옛일도 떠오른다 () 돌을 만지던 손을 코끝으로 당겨본다/희미한 물 냄새가 있다/비가 지나간 걸 기억하고 있는가읊조리는 목소리를 통해 한 존재와 한 존재의 만남에 스민 경이로움을 새삼 상기하게 됩니다. 화자의 체온이 옮겨감에 따라 돌도 온기를 품게 되는 모습, 언젠가 비에 젖었던 돌의 기억이 화자에게 물 냄새로 건너가는 모습 등은 맞닿은 존재들 간에 주고받는 것이 서로의 기억의 무게이기도 하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은 시인님의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나요? 그리고 온기와 기억을 주고받은 소중한 인연 중 지금 가장 떠오르는 분은 누구인가요?

 

옛날에 중국의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여자가 말했어요. “내 방 창문 아래에서 100일 밤을 의자에 앉아 지새운다면 그때 당신의 사람이 되겠어요,” 아흔아홉번째 되던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쟁취되는 순간, 사랑은 동사가 아니라 명사가 되고 맙니다. 돈 주앙의 말대로 사랑의 즐거움은 옮겨가는 데 있는 거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놓음으로써, 끝없이 실패함으로써 새로운 시를 향해 나아가는 길만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를 통해 다음 시집이 오고 있는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 이 시를 쓰고 나서 한 권 분량의 연시들을 스케치하였습니다. 그리곤 묻어놓았죠. 제 나름으론 뜸을 들이고 발효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릴 때 책을 읽어주던 맹인 소녀가 언뜻 떠오르기도 합니다. 시집 내면 점자 시집도 내겠다고 했는데 아직 약속을 못 지켰어요.


- 가장 최근에는 산림파괴, 기후생태위기 등에 대한 경각심을 담은 앤솔로지 창백한 지구를 위한 시에 시와 산문을 실으셨습니다. 선생님의 시에서 화자는 지구 곳곳의 대참사들을 오직 뉴스로만 소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반성합니다. 이 기획에 참여하는 일은 시인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요? 시와 환경 문제는 어떻게 더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를 다루는 시에서 강조하거나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서울국제작가축제의 주빈 작가로 미국에서 활동 중인 김주혜 작가가 제 일터인 노작홍사용문학관을 방문했어요. 기념 강연 중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습니다. 초청받아 간 외국의 황폐한 들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개에게 작가가 들고 있던 생수병의 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두도 나누어주죠. 개는 고개를 돌립니다. 현지인들은 그런 작가의 모습에 흥미를 느끼며 웃다가 자신들이 품고 있던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는데 개는 겨우 한 술 뜨다 맙니다. 작가는 생각하죠. 나는 이렇게 유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저들은 어찌하여 같은 생명을 타고나 저리 굶주린 채 죽어가고 있는가. 신은 어디에 있는가. 가슴에 통증이 옵니다. 그것이 눈물을 쏟게 합니다. 눈물 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예술은 지속적인 이같은 질문과 통증으로부터 하염없이 샘솟는 샘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날 들은 다른 에피소드 하나는 이렇습니다. 작가가 톨스토이문학상 상금을 호랑이보호기금으로 내놓겠다고 했을 때 향후 5년 동안의 계획을 듣고 싶다고 했나 봐요. 그러자 그 책임자는 5년이 아니라 수십 년의 기간을 두고 생각하라 했다나 봐요. 5년이 아니라 30, 40년의 지원이 가능한 가치라는 확신이 들 때 지원하라는 답을 듣고 작가는 반성합니다. 일순간의 연민이나 연대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지속적으로 글을 쓰겠다고 했어요. 꺼낸 김에 에피소드 하나 더. 새끼 새가 바닥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나무 위에서 부모일성 싶은 새들이 울고 있었어요. 사뭇 애절했습니다. 작가가 죽은 새에게 다가가자 주변 사람들이 조류독감이며 이런저런 바이러스를 경계하며 손사래를 칩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다음 날 아침까지 나무의 새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종이박스를 관으로서 삼아서 나무 위의 새들에게 보여줍니다. 이제 아기와 작별을 고하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일은 없게 내가 장례를 치러줄게. 작가는 눈이 마주친 어미새들이 놀라 달아나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상자를 나무 위로 들어올립니다. 그 과정을 새들이 가만히 지켜보죠. 나무 아래 매장을 마치자 새들은 울음을 그치고 날아갑니다. 문학은 눈물이자 사랑이고, 사랑이 눈물을 움직이게 합니다. 속류 생태시나 환경시 혹은 언어의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를 해야 합니다.


- 시인님께서는 그간 정말 많은 동시를 쓰기도 하셨습니다. 사계절 동시집 전봇대는 혼자다(2015), 창비청소년시선 의자를 신고 달리는(2015), 나의 첫 소년(2017)에 시를 실으셨지요. 한눈파는 아이(2019)라는 손택수 동시집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시를 쓸 때와 달리 동시를 쓰는 일은 어떠한 기쁨을 안겨주나요? 대상 독자가 다른 만큼 동시를 쓸 때 특별히 어떤 점에 유의하고자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아동문학은 수신자와 같은 그룹에 있는 사람, 즉 어린이에 의해 씌어지지 않죠. 이것은 예술형식으로서의 아동문학이 어떤 면에서는 성인문학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두 가지 코드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는 어린이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종종 어린이의 옆이나 뒤에 있는 어른을 무의식적으로 향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이중초점이 아동문학장을 관류합니다. 그러니까 동시도 태생적으로 그 내부에 순수한 어린이를 바라보는어른들의 시선을 내장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러한 시선이 향하는 것은 타자로서의 어린이요 그 어린이를 감상하는 것은 어른 자신에 그치기 쉽습니다. 어른 시인이 아동을 순수한 존재로 바라보는 위치에 서는 경우 그 시는 아동 독자를 위한 시가 아니라 대개는 아동을 소외시키는 시가 되기 십상이죠. “동시는 먼저 시가 되어야 하고, 그 위에 다시 동시로 되어야 한다는 이오덕의 동시론은 문학예술로서의 품격을 지닌 시의 면모와 그 너머에 대한 지향을 통해 독자적 장르로 있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시이면서 시를 넘어서는 운동성. 동시의 이 운동성이 시를 자극합니다. 그리고 청소년시는 고 김이구 평론가와 제가 중심이 되어 만든 건데, 전사로 나라말 출판사에서 내던 계간지 <청소년문학>에서 박상률 작가와 함께 성장시라는 장르종을 개념화한 적이 있거든요. 성장소설이 있으면 성장시가 있다, 한 편의 단편소설 같은 성장통을 가진 시들, 그러니까 윤동주나 기형도, 유하 같은 시인들의 흐름을 계보화해보자 해서 시작한 게 청소년시까지 이어진 거죠. 처음엔 다들 뜨악해했는데 지금은 젊은 시인들이 많이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봄이 짧고 여름이 길어진 탓인지 청소년 화자들이 우리 시에 대거 등장한 거죠. 일반 시집도 여름이라는 제목이 많고 소년 소녀 화자들이 그 어떤 시대보다 유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실천문학을 빼고 시인 손택수의 생애를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천문학에서 기획과 편집의 중심 역할을 하셨고 20113월에는 대표로 취임하셨습니다. 그 시기 실천문학은 실천포럼, 문예지 혁신 등의 행보를 통해 관성화된 문단의 갱신을 위해 노력했는데요, 동료들과 함께 이러한 활동들을 도모해나가는 일, 문학을 통해 연결되는 일은 삶에 어떤 특별함을 경험하게 했나요?

 

. 보람과 비애가 함께 있던 시절이네요. 삼십대 초반에 부산에서 <게릴라>, <신생> 같은 잡지를 창간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장편소설 전문 잡지 <자음과모음> 창간 준비를 마친 상태였는데 실천 쪽에서 선배들이 연락을 해왔어요. 저희 세대만 하더라도 민주화운동 세대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거든요. 상황이 어렵다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죠. 자유와 실천 중 실천을 표나게 내세운 이 출판사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80년대부터 활동한 잡지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일 년 가까이 매달 운영위를 소집하여 신구 세대 교체에 뜻을 함께 합니다. 아울러 이 출판사와 소원해진 일세대 선배 작가들, 가령 수안보에 계시던 박태순 선생, 유랑 생활을 하고 계시던 송기원 선생을 찾아뵙고 의발을 물려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회의의 여러 선생님들께 전환의 이유를 충실히 고하였습니다. 작가회의의 기관지로 출범한 잡지였으니까요. 동시에 실질적으로 출판사를 이끌어갈 젊은 비평가들과 작가들로 편집위와 기획위를 구성하면서 다양한 경험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포럼을 진행하였습니다. 제주 강정마을, 용산참사 현장, 고공농성장, 희망버스를 타고 실천의 작가들이 세계의 비참을 정면으로 마주한 시절이기도 합니다. 잡지와 출판이 온몸을 온몸으로 밀고갔다고나 할까요.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온정들이 문학장 안팎에서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백락청 선생은 귀한 원고를 투고해주셨고, 1980년대 빨치산의 딸로 옥살이를 한 출판인 이석표 선배는 당시 문화유통에 사장으로 계셨는데 문인들의 일년치 술값을 끊어주기도 했습니다. 현기영 선생은 몇 억이 넘는 인세를 단 한 번도 독촉하는 바 없이 기다려주었습니다. 직원들의 월급을 줄 수 없었던 초기에 몇몇 작가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융통해준 자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난하였지만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그런데, 곧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출판사의 이권에 눈이 먼 문인 주주들 몇이 자신들이 지명한 인물들로 이사회를 구성할 것을 강요해온 것입니다. 명분은 전임 대표의 해태와 배임을 문제 삼아 구속시켜야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전임 대표와 구원 관계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공적 기구를 사적 원한을 푸는데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법적 투쟁에만 몇 년이 걸리는 일에 에너지를 소진할 수 없었습니다. 전임대표로부터 돌려받을 것은 돌려받고, 돌려줄 것은 돌려주면서 법 운운하는 골치 아픈 상황들을 넘어가고자 하였으나 이내 새 대표에 대한 공격이 가해졌습니다. 제가 그때 겨우 마흔, 새까만 후배였으니까요. 마포경찰서 경제2과에 그들은 자신들의 후배를 고발하였습니다. ‘실천의 이름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끌려간 선배들은 있었으나 경제사범으로 끌려간 일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너무 비참했죠. 그 사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바꿔놓은 것일까요. 참으로 참혹한 시절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문단의 어른들이 주동자들에 대한 엄중 경고를 한 뒤 사태는 겨우 완화되었는데 동력을 잃어버린 새 체제는 오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문학에 치열한 작가들일수록 쉽게 지치고 궂은 일에 관심을 갖길 꺼려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무리들의 지속적인 방해, 그리고 사사건건 들이대는 주식의 논리, 모략질에 공동체의 꿈은 무력하였습니다. 직원에서 주간을 거쳐 대표까지 청춘을 바친 출판사를 떠나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퇴임을 하며 주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이가 공적 자산을 사유화하려는 자일 것이라는 주의를 주었지만 사유화 작업은 주도면밀하고도 치밀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제가 나온 이후 작가 90인이 집필거부 선언을 하는 등 의기에 찬 반발이 있었으나 지리멸렬한 생존의 현장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익힌 이들을 대적하기엔 너무 무력했던 것 같아요. 출판사가 주식조각으로 변하면서 공공재로서의 실천이 담당했던 역할은 자연스럽게 기억의 너머로 희미해져갔습니다. 슬픈 것은 그 희미한 이름에 매달려 연명하는 이들이 언제나 큰 목청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10년만에 처음으로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문예지의 변화도 문학사의 변동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그 당시 참여했던 편집위원들을 포함한 여러 담당층들이 이 시기를 기록해주길 희망합니다.


- 이후 노작홍사용문학관의 관장으로 취임하신 뒤에는 백조를 복간하셨습니다. 향후 백조를 통해 어떤 구상들을 이어가고 싶으신지, 우리 문학의 주요 과제로 주목하고 계신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희 세대만 하더라도 국어시간에 <장미촌> <금성> <개벽> <폐허> <백조> <문우> 같은 동인지들 이름을 외웠던 기억이 있는데요, 요즘 학생들은 백조하면 새를 먼저 떠올리는 것 같아요(웃음). 예나 이제나 문학청년들의 곤궁하고 초라한 형편이라는 게 그리 크게 차이는 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종로 낙원동에 백조사가 있었는데 송판 책상 하나, 헌 무명이불 한 채, 헌 양복 몇 벌, 원고용지 신문지 등이 도깨비 쓸개 같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곳에서 합숙을 하며 잡지를 냈다는 노작의 글이 있습니다. 얼마나 공간이 비좁았는지 다들 새우잠을 자서 야밤에 누가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그 자리가 죽 떠먹은 자리처럼 온데간데 없어져서 낭패를 겪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구요. 여기에 시대 상황도 녹록치 않았죠. 노작 선생이 기미만세의거에 참여해서 옥살이를 하시기도 했고 불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일경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기도 했으니까 더더욱 검열과 감시가 심했어요. 발행인을 구하지 못해서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나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으로 바꾸어가면서 간신히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의 그 가난하고 높은 정신을 백 주년에 맞춰 새롭게 조명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어요. 문단에 조촐한 밥상 하나를 차린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문예지들과 달리 공공기관에서 내는 매체니까 상업출판사들과의 경쟁보다는 공공성이 더 도드라지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편집위원들도 객원 형식으로 3호씩을 책임지고 계속 교체를 했어요. 그러다 보면 여러 한계도 있겠지만 다양한 주체들이 매체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 제일 문제는 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거죠. 제가 관여하면 저의 네트워크들이 작동하게 될 테니까요. 저는 운영자금을 확보하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하였습니다. 시청에서는 왜 이렇게 높은 원고료를 책정했는지 볼멘소리가 있거든요. 관료들을 이해시키면서 문학의 공공성이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 설득하는 과정이 녹록치 만은 않습니다. 그를 위해서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금 신청도 하고 이런저런 공모사업에 참여도 하고 지역 문인들과 교감도 나누면서 매체의 지속성을 담보해가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또 다른 문제는, 지역의 이해를 어느 정도까지 반영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제가 있어야 하고, 지나친 절제는 지역 내에서 불화의 요인이 되기도 하거든요. 앞으로 <백조>가 특정 출판사의 이해나 문학제도의 관습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문학 생태계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렌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 요즘 시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이 가을을 보내고 계신가요? 일상 속에서 시인님을 멈춰 세우는 풍경은 무엇인지, 어떤 장면이나 순간 속에서 시적인 것을 만나고 계신지, 시인님의 눈에 담긴 이 계절의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근에 동탄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일산과 동탄을 오가다 보니 노독이 쌓일대로 쌓인거죠. 이사하고 난 뒤 버스로 서너 코스 구간은 그냥 걸어다니는 습관을 들였어요. 어지간한 길은 걸어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저 반복에 지나지 않던 데면데면한 풍경들이 새뜻하게 다가옵니다. 몇 해째 그저 통과하기에 바빴던 골목길의 간판들이 처음처럼 자태를 드러내고, 올 해 들어 초면인 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걸 보면서 아 은행나무였구나, 비로소 마음에 인화됩니다. 수없이 왔으나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던 풍경들이 어디 은행나무뿐일까요. 아주 와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미지와 비의들로 가득 차 있는 일상들을 마주하면서 올 가을은 제가 지상에서 처음 맞는 가을처럼 느껴집니다.


지금의 젊은 작가 세대후배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얼마 전에 혼자 글만 쓰시다가 치매가 오셔서 가족도 없이 요양원에 들어가신 시인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6인 병실인데 대부분 천정만 보고 있거든요거기 한 귀퉁이에서 그 시인은 평생 동안 자신을 단련시킨 언어의 근육이 시키는 대로 국어사전을 보고메모를 하고가만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보고 있더라구요요양보호사들 말로는 그 분은 하루가 지루할 틈이 없다고 하더라구요다행히 그날은 저를 알아보시고 대뜸 하시는 말씀이 요즘은 시집을 어떻게 내냐고 하는 거에요그 상황에서도 새시집 출간 궁리를 하고 계셨던거죠슬프기도 하고감동적이기도 하고 그랬어요.

 

독자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작가님의 작품에서 특히 주목해 주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자연은 소수자입니다제가 청록파는 아니라는 거 기억해 주시면 고맙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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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 권예진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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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호주 도서관의 공간혁신과 문학 생태계를 살펴보다. - 시드니·멜버른 도서관 탐방기 - 김성하(인천광역시교육청중앙도서관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 담당자)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로 선정되어 7박 9일간의 호주 국외연수에 참여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번 연수는 오랜 시간 도서관을 일터이자 삶의 공간으로 삼아온 사서로서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도서관과 문학, 문학과 지역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 생생한 현장을 살펴보는 뜻깊은 여정이었다. 5월 19일 저녁, 인천공항을 출발해 10시간 넘는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상공에서 마주한 붉은 여명은 긴 비행의 피로를 단숨에 잊게 만들었다. 도착해서 처음 만난 생명체는 현지에서 흔히 ‘쓰레기새'라 부르며 홀대한다는 호주흰따오기, ‘아이비스(Ibis)’였다. 노천카페 주변을 서성이며 사람들이 남긴 빵 조각을 가로채는 녀석들의 모습은 낮선 도시의 첫인상을 도리어 친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하버 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마주하니, 비로소 이번 연수가 실감났다. 1. 시드니(Sydney): 전통과 혁신이 어우러진 도서관 문화의 현장 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시드니 작가 축제(Sydney Writers' Festival)가 한창 열리던 5월 21일,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을 찾았다. 1826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주 전체 도서관 서비스 개시 200주년을 맞이한 곳이다. 정문의 웅장한 사암 돌기둥이 인상적인 이곳은 1942년에 완공된 고풍스럽고 웅장한 구관 '미첼 빌딩'과 호주 이주 200주년을 기념해 1988년에 지어진 후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마친 '신관'이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한 도서를 열람하는 공간을 넘어 거대한 박물관이자 미술관의 역할의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웅장한 열람실은 벽면 전체를 채운 고서들과 클래식한 목재 책상,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지적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높은 곳의 책을 꺼낼 수 있도록 연결된 2층 구조의 난간과 계단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어린이도서관은 천장에 책들이 마치 새처럼 날아다니는 듯이 조형물이 매달려 있었고, 독창적인 도서 소개 사인물은 아이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의 자료는 관내열람만 가능하다. 법정 납본 제도에 따라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출판되는 모든 도서의 원본과 역사적 기록물을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 주립도서관의 핵심 임무이기 때문이다. 분실 위험이 있는 관외대출을 금하고 오직 관내 열람과 연구만을 허용하여 아카이브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었다. 도서관이 운영하는 '펠로우십 프로그램(Fellowship Program)'은 역사학자와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최소 1,000AUD에서 최대 120,000AUD에 이르는 파격적인 창작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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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만난 호주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30년 만에 만난 호주 김중석(시옷책방 상주작가) “호주라니!” 상주작가 우수시설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기대했던 해외연수의 행선지가 호주라는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전 해에는 유럽으로 다녀왔다고 알고 있었던 터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호주라니. 하지만 연수를 하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 되돌아보는 지금까지도 호주가 너무 좋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여정에 많은 문화공간과 아름다운 자연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고 새로운 창작을 향한 에너지와 영감을 듬뿍 채운 시간이었다. 사실 호주는 30년 전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곳이었다. 그때는 결혼식을 마치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코스를 따라 몇 팀의 신혼부부들과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딘가에 내리고 밥을 먹고 멋있는 자연을 보며 감탄했지만, 자세한 것은 모두 다 머릿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기억에 선명한데 또 어디를 갔더라? 캥거루를 만나서 먹이를 주기는 했는데 이제는 어느 동물원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나의 호주는 아주 오래전 앨범을 뒤져야만 나오는 추억 속의 나라였다. 호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이미지는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코알라 그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멋진 공원들 그리고 원주민들의 미술이었다. 그때의 호주와 지금의 호주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기대감을 잔뜩 안고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맑고 청명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제까지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였다는데 다행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 ‘날씨요정’이 있었는지 여정 내내 좋은 날씨 덕분에 즐거운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오니 그때의 호주가 조금씩 떠올랐다. 커다란 나무들, 온통 영어로 만들어진 간판들(아주 당연하지만) 익숙함이 밀려왔다. 며칠의 여정 동안 인상 깊었던 몇 개의 장면들을 기억해 본다. 1. 라이온 킹 뮤지컬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우리 일정에는 뮤지컬 ‘라이온 킹’이 관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작자로서 부끄럽지만 뮤지컬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공짜 티켓이 생겨서 다녀온 게 전부였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미 영화로는 보았던 것이니 대충의 스토리는 이해가 되었다. (아! 영어의 벽. 이럴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해둘걸, 이라는 후회) 공연이 시작되기 전 놀라웠던 모습은 극장의 분위기였다. 판매원이 돌아다니며 맥주와 음료와 음식을 팔고 옆 사람과 떠들고 인사하며 사진을 찍고 객석에서 바로 보이는 무대 옆쪽 매점에서 음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공연 전의 풍경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본 것은 무대 미술과 의상이었다. 한정된 무대에서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로 이루어졌을까? 무대의 일정 부분은 회전판을 사용하고 어떤 부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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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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