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민병일 수필가, 사물의 숨결을 따라, 방랑과 사유의 길로
- 작성일 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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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숨결을 따라, 방랑과 사유의 길로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 작가 인터뷰, 민병일 수필가
민병일 작가는 시인이자 수필가, 사진작가, 그림작가로 활동하며 인문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창작 활동을 보여주는 예술가이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시각예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다.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산문집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아우라, 2011), 『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문학판, 2016), 『창의 숨결, 시간의 울림』(나남출판, 2021), 『행복의 속도』(문학판, 2021), 『담장의 말』(열림원, 2023), 『나무 새 꽃, 느림의 미학』(열림원, 2025)과 사진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열림원, 2009) 등을 펴냈다. 또한 철학 메르헨 『바오밥나무와 방랑자』(문학과지성사, 2020), 『바오밥나무와 달팽이』(문학과지성사, 2023)와 번역서 『붉은 소파』(중앙일보 중앙북스, 2010)을 출간하였다. 소설가 박완서와 함께 작업한 티베트·네팔 기행 산문집 『모독』(열림원, 2014)에는 그의 사진 150컷이 수록되어 있다. 문학적 성취 역시 높이 평가받아 제7회 전숙희문학상(2017), 제32회 성호문학상 대상(2021), 제1회 신격호 샤롯데문학상 대상(2024) 등을 수상하였다. 문학이 여러 장르의 예술과 어떻게 만나고 확장될 수 있는지를 꾸준히 보여주며, 사유 깊은 산문의 가치를 탐구해 온 민병일 작가와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근, 산문집 『나무 새 꽃, 느림의 미학-숲에는 천 개의 아르고스 눈이 있다』(496쪽, 양장본)를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제가 10여 년간 매일 오후 2시면 숲을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산문집입니다. 오랜 세월 나무 새 꽃 바위 곤충을 만나며 숲을 인문학적·예술적 대상으로 사유하고자 한 책입니다. 아래 글이 이 책을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숲길을 걸으며 진정 소망한 것은 풍경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숲길에 은폐된 ‘숲’ 혹은 ‘나무’에 대한 이중적 의미(Zweideutigkeit), 즉 눈이라는 거울에 비친 숲길의 이면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사랑하는 숲길은 풍경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사유의 풍경이 그려지는 공간이다. 숲길에서 나무 새 꽃을 통해 만나고 싶었던 것은 존재와 인간 본질에 대한 사색이었으며, 숲길을 걸으며 ‘존재물음에로(Zur Seinsfrage)’ 나아가는 것이었다. 나무 새 꽃은 어쩌면 인간의 또 다른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나무의 아름다움은 ‘사물로 하여금 자신의 사물 존재 속에 스스로 고요히 머무르도록 놓아두는(das Ding in seinem Dingsein auf sich beruhen lassen)’ 것이다. 이 점이 나무를 지상의 거룩한 우주목으로 만든다.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나무만큼 신뢰성(Verläßlichkeit)을 주는 사물이 또 있을까? 사람이든 나무든 자기 안에 고요히 머무를 힘은 진실로 통하는 신뢰성을 주기 때문에 사람에게선 믿음을, 나무를 바라보면 고요(Ruhe, 평안)를 느끼게 된다.”
또한 광주화랑 초청으로 일반인들을 위한 미술 강연을 총 세 차례 시행하였습니다. 강연은 2025년 8월 20일, 9월 17일, 11월 5일에 열렸으며, 강좌명은 <민병일 교수의 명화 인문학 산책 - 재미있는 명화 인문학 이야기. 숨, 쉼 그리고 느낌표>였어요. 광주 예술의 거리 미로센터 2층 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수필 분야에서는 2명만 선정되었는데 치열한 경쟁 결과 선정된 것에 대한 책임을 느낍니다. 다양한 문학 활동을 통한 사회적 공헌은 무엇일지, 힘든 일상에서 문학이 갖는 역할에 대한 고민은 무엇인지, 문학이 전해주는 온기 깃든 희망은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를 고민해 왔습니다. 펠로우십을 통해 더 치열한 문학적 각성, 멈춰있지 말고 끝없이 나아가라는 격려, 성장의 계기로 생각합니다. 좋은 작품을 창작하여 문학예술에 대한 강연과 다양한 문학활동을 전방위적으로 확장하는데 역동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그 의미를 새겨봅니다.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러 방향의 작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우선, 문학 계간지에 2025년 봄호부터 겨울호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민병일의 미학 에세이〉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또한 2025년 6월에는 프랑스의 명문 출판사 아르망 콜랭(Armand Colin)에서 제 책 『바오밥나무와 방랑자』의 불한대역판이 출간될 예정이라, 국제 독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2025년 7월 26일(토)에는 하동 평사리문학관의 초청을 받아 문학 강연을 진행할 예정이며, 8월 19일에는 광주 대건문화관에서 새 산문집 『나무 새 꽃, 느림의 미학-숲에는 천 개의 아르고스 눈이 있다』를 중심으로 독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입니다.
- 시집, 산문집, 사진집, 번역서 등 굉장히 다양한 장르의 책을 펴내셨어요. 얼마나 어렵고 다채롭게 즐거운 작업일지 감히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동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문학, 더 나아가서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감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학이란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구도의 길로, 수도사처럼 낮고 외면받은 자리에서 인간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제가 잘 할 수 있는 공간에서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중심이 문학이고 책입니다. 다른 것들은 매체 미학적인 측면에서 고려되는 것들이고요. 제가 작업하는 책들은 문학적으로 찾아야 할 ‘푸른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인 노발리스의 장편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Heinrich von Ofterdingen』, 즉 우리에게 『푸른 꽃』으로 알려진 작품 속 이야기처럼, ‘창’을 주제로 쓴 책 『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와 ‘담’을 주제로 쓴 책 『담장의 말』에서 사물들은 저를 꿈꾸게 하는 ‘푸른 꽃’이라는 ‘뮤즈’입니다. 사물들은 저를 끊임없이 내면으로의 신비한 방랑을 떠나게 하니까요.
- 그림도 그리셨어요. 저서 '바오밥나무와 방랑자'에서 “그림은 글쓰기의 또 다른 유희이며, 동화에 숨겨진 또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신다고 밝혀주셨습니다. 문학과 다른 예술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 더 청해듣고 싶어요.
고대 그리스의 서정 시인이며 철학자인 케오스의 시모니데스(기원전 556~468년)의 말 “회화는 말하지 않는 시이며,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테제는 잘 알려진 것입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작품 활동을 한 것은 10년도 채 안 되지만, 그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포클레스부터 셰익스피어, 하이네, 월트 휘트먼, 발자크, 모파상 등 300권이 넘는 문학책들을 탐독하며 그림에 끊임없이 문학적 자양분을 심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기 드 모파상의 소설 한 대목을 인용하며 그림에 문학적 영감을 받은 것을 고백하고 있지요. 큰 화집 여섯 권 분량을 빼곡한 활자로만 채운 그의 서간 문집 속 문장은, 어느 문학가도 흉내 내지 못할 사유와 문체로 무장되어 있는데, 고흐는 끊임없이 미술이라는 예술을 문학의 창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이 글쓰기의 또 다른 유희라면 글쓰기 역시 세상이라는 캔버스에 그려야 할 그림이겠지요. 문학과 다른 예술이 연결되는 방법은, 미술적인 예술적인 상상력을 문학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낯설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끊임없이 예술적인 ‘것’들을 문학적인 ‘것’들과 만날 수 있게 불온한 꿈을 꾸고,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 산문집 '담장의 말' 에서는 담장이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자 정신의 오두막이라고 표현해 주셨어요. 담장이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면서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매력이 있다고 인터뷰도 해주셨고요. 하나의 사물이 무한한 영감을 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작가님께 영감을 주는 대상은 무엇일지 여쭙습니다.
제가 독일 유학 중에 모았던 오래된 사물들입니다. 그것들은 특별한 골동품이 아니고 우리 삶 속에서 함께 숨 쉬어 온 사소한 것들입니다. 오래된 사물들에는 20세기의 인문 정신이 들어있다고 생각해서요. 예를 들면 아주 사소한, 한 백 년 된 색색깔의 고운 ‘색실’로부터 반세기가 더 지난 ‘과자 깡통’, ‘람페’ 등…… 발터 벤야민이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에서 「찬장」, 「회전목마」 등을 통해 보여준 사유 깊은 미학적 에세이 같은 이미지를 품고 있기 때문일까요. 오래된 사물들은 부르크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정신의 교역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물들은 끝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사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자기의 내면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달빛 같은 것일 테니까요.
- 요즘 수필 장르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필이 활발히 창작되는 시기이기도 한데요.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일까요?
수필의 저변이 확대되는 현상은 긍정적인 일입니다. 문제는 질적인 면에서 내용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는가입니다.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과 문학지 수필 신인상, 전국의 여러 수필문학상 수상작들을 보면 대부분 ‘신변잡기 류의 글’, ‘수기성 글’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필 문학의 딜레마가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와 소설에서는 오래전부터 문학정신이 견고한 아름다운 작품,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사유 깊은 작품, 동시대를 살아가는 고민, 역사의식 등이 작품에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나타나지만, 수필 장르는 문학의 아류로 여겨지며 미몽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필, 즉 산문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통렬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학에서 수필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리멸렬한 점은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대상을 낯설게 보여주는 문학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은 수필이란, 문학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문학을 통해 보여주어야 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가?에 대해선 관점에 따라 결이 조금씩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 아름다운 수필이란 첫째, 인간 내면을 깊고 다양하게 탐구하려면 글에 사유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수필에 사유가 없다면 그 글은 추억이나 반추하는 일기장에 있어야 하겠지요. 둘째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미학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심미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니체가 예술에 대해 말한 것처럼 “존재의 끔찍함과 부조리에 관한 역겨운 생각”을 미의 범주에서 다루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산문 「티파사에서의 결혼」은 문학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습니까. 셋째 인간에 대한 연민과 온기가 담겨있으면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으면 누가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넷째는 수필 특성상 진술을 하더라도 문장과 문단에서 문학적 형상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학적 형상화를 하지 못하는 것은 직접 진술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글을 수기로 몰아가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문학으로서의 수필에는 대상을 낯설게 보여줄 수 있는 문학성을 담보해야 합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낯설게 하기’란 진부한 카테고리에 글을 가두는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지요. 신변잡기성 글, 수기성 글을 쓰고 수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술은 대상을 단순, 모방, 반복, 재생산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낯설게 하기’를 의식하지 않고 진술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술한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좋은 수필을 만들기 위하여 치열하게 고민하는 글쓰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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