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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상희 아동청소년문학가,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

  • 작성일 2025-12-19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작가 인터뷰-최상희 아동청소년문학가(인터뷰어 : 최다영 평론가)

 

 

최상희 작가는 옥탑방 슈퍼스타(2011)를 시작으로 늪지의 렌(2025)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아동청소년문학을 집필해왔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2011년 블루픽션상, 2014년 사계절문학상 대상, 2016SF어워드 중단편 부문 우수상 등이 있다. 닷다의 목격(202동1)과 앤솔로지 나를 초월한 기분(2025)가 문학나눔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이력이 있다. 2025년에는 문학주간 협력스테이지 프로그램인 어린이-청소년 문학으로 닿기에 패널로 참여하였다. 이번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에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최상희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때로는 청소년 소설가로, 때로는 여행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상희 작가를 만나보자.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난여름에 <늪지의 렌>이라는 청소년 소설을 출간하고 학교와 도서관에서 강연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유전자 조작 시술이 의무화된 미래의 세계를 무대로 합니다. 시술을 받은 아이들이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발작을 일으키자 정부가 소집령을 내려 강제 구금하고 이 폭력적인 상황에서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의 연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 작가님께 이번 펠로우십이 가지는 개인적·창작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쓴다는 건 고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읽어주고 있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 깊고 어두운 밤을 견딥니다. 펠로우십 선정은 그 희미한 소망이 닿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선가 내 글을 읽어주고 있구나, 잘 해내고 있구나, 그러니 더 써보라는 응원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물론 무척 기뻤습니다.

 

- 펠로우십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구상 중인 프로젝트나 작업 방향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두 권의 소설집과 일러스트 북 출간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한 권은 출간했고 나머지 두 권은 작업 중입니다. 강연이나 북토크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있었습니다. 작가란 답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던진 질문에 독자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답을 찾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들어볼 기회를 늘 갈망하죠. 지난가을 문학주간 2025’ 대담에서 다양한 독자들을 만난 경험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 최근 몇 년간의 작품을 돌아볼 때, 작가님이 스스로 인식하는 창작의 변화 혹은 전환점은 무엇인가요?

 

2019년에 출간한 <닷다의 목격> 이후로 SF 혹은 판타지 소설이라고 분류되는 이야기를 많이 썼습니다. 2016년에 3SF어워드에서 중단편 부문 우수상 수상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수상작 그래도 될까SF라는 걸 상을 받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상도 받았으니 이왕이면 잘 써볼까, 잘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제 소설은 이전에도 줄곧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 짓지 않고 경계 없이 자연스레 넘나들었습니다. 판타지란 우리에게 몹시 익숙합니다. 호박이 마차가 되고, 늙지 않는 소년이 날아다니는 섬이 있고, 침대 밑에는 요정이 살고, 창밖으로 나를 지켜보는 외계인의 존재를 어린 우리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죠. 제가 그리는 판타지와 SF의 세계는 현실과 몹시 닮아있습니다. 판타지와 SF는 오히려 현실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거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실과 살짝 어긋나는 틈을 만들어 그곳을 들여다보는 일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렇게 세계를 다른 눈으로, 혹은 겹겹이 쌓인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풍부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쓰려고 합니다.

 

- 창작을 지속해 오면서 쓰는 이유문학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2011년에 등단해 이것저것 썼습니다. 처음에는 쓰고 싶은 것을 썼는데 언젠가부터 써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2016년부터였어요. 그해 우리는 강남역 살인 사건을 목도했고 그 뒤로 문학계를 비롯해 사회 전역, 심지어 학교에서까지 미투 운동이 일어났고 어느 때보다 공고해진 여성들의 목소리와 연대를 경험했습니다. 저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런 일들과 절대 무관하지 않고 여성들의 목소리에 함께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성 그리고 소수자의 이야기들에 집중해서 쓰고 있습니다. 일련의 과정으로 자연스레 비인간 동물과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 세계는 연결되어 있고 세상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고 싶고, 그런 이야기들을 쓰고 싶습니다.

 

- 최근 사회나 세계의 변화 속에서 작가님이 특히 문학으로 응답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문화적 풍요를 누리며 SNS 등을 통해 폭넓은 소통과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럴수록 사람들은 결핍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이야기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이 겪고 앞으로 겪게 될 많은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혐오와 편견, 차별과 폭력이 전부가 아니길 바랍니다. 소통과 공감, 우정과 사랑, 상냥함과 다정함이 있어 그래도 이 세상은 유지된다는 걸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외와 소통의 문제는 제가 계속 써나갈 이야기일 것입니다.

 

- 디지털 플랫폼 시대, 독서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오늘날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독자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고전적인 종이책이 살아남는 건 다소 힘겨운 일이겠죠. 전통적인 독서 방법을 고수하는 독자들은 아주 소수가 될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거의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정의와 신뢰, 선과 악, 사랑과 우정 같은 추상적인 명사를 여우가 말하고 용이 불을 뿜는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됐죠. 문화와 역사, 각종 지식과 정보도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인류와 함께 존재했고(어쩌면 인류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세상을 지탱해온 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였습니다. 이 세상이 지속되는 한, 그것이 어떤 형태든지 이야기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이어질 것입니다.

 

- 지금의 젊은 작가 세대후배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함께 잘 견뎌 보아요.

 

- 독자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작가님의 작품에서 특히 주목해 주었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줄곧 써온 것은 소외된 이들과 감추어진, 혹은 숨겨진 것들입니다.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다움과 품위를 지키며 살아남고자 애쓰는 이들에게 눈이 가고 마음이 쓰입니다. 작지만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그 모든 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 아동문학을 쓰는 일은 어떤 특별한 기쁨을 경험하게 하나요? 작가님께 아동문학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른이 되고 오랫동안 옛 친구들을 잊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됐죠. 그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했고 이상한 버섯을 먹고 목이 늘어나기도 하고 빨간 머리에 아주 수다스럽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 친구들이 준 상냥한 위로와 가슴 벅차게 넘치는 기쁨이 기억났어요.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동문학은 아무리 어둡고 슬픈 이야기라도 결국은 희망을, 완전히 단념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희망을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아동문학의 주인공들은 대개 현재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하며 좀 헤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갑니다. 때론 힘차게 달리기도 하죠. 그런 에너지가 좋아서 청소년소설을 쓰는 것 같습니다.

 

- 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델 문도(2014)와 관련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들은 세계 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분제나 가정폭력 등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로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이 책은 호주에 사는 제 친구 데이비드 씨가 보내온 메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화상 때문에 온몸에 붕대를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남자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1분 동안 달려 물웅덩이에 몸을 던져 목숨을 건졌다고 했습니다. 데이비드 씨는 제게 말했습니다. ‘1분 동안 달리며 그 남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너무 고통스러워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삶이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요?’ 그러면서 이 이야기를 제가 꼭 소설로 써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너무 끔찍한 이야기고 타인의 불행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할 가치가 있는가?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인가? 그래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작가란 잘 아는 것에 대해서 쓰기도 하지만 모르는 것에 대해 알 때까지 써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비록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써보는 것입니다. 희미하게나마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아홉 편의 단편이 바로 그것입니다.

 

- 속눈썹, 혹은 잃어버린 잠을 찾는 방법(2023)더 이상 도토리는 없다(2022)에 수록된 소설의 확장판으로, 세 친구의 소소한 일상과 우정이 그려집니다. “작고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다정한 마음으로” “세상은 유지되는지도 모른다작가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소설을 채우는 여러 아름다운 장면 중 작가님께 가장 소중한 장면은 어떤 것인가요? 그건 어떤 방식으로 작가님의 마음을 지켜주고 있나요?

 

오란의 이모가 서점 앞에서 밥을 주던 고양이 코점이를 오란과 녹주, 차미가 함께 찾아다니던 밤의 풍경을 제일 좋아합니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면 종종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를, 저만치 빠르게 사라지는 작은 그림자를 감지하며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론가 연결된 문을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속눈썹, 혹은 잃어버린 잠을 찾는 방법).” 외면하지 못하는 다정함과 단념하지 않는 용기,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이 깊은 밤 희미한 별처럼 빛나, 그런 작고 소중한 것들이 저를 지탱하고 쓰게 합니다. “그것은 부드러운 밤의 공기를 만질 때의 느낌 같을 것입니다.

 

- 작가님께서는 여행 작가로도 활동하고 계신데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집필 활동을 이어가시는 모습이 너무나 대단하게만 느껴집니다. 여행 에세이를 쓰는 일은 청소년 소설을 쓸 때와 비교해 어떤 즐거움을 안겨주나요? 같거나 다른 지점이 있을까요? 또 향후 방문하고 싶은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낯선 장소에서 종일 몸을 움직이고 나른한 상태로 잠이 들어 청소와 냉장고 속의 음식물, 마감 같은 건 잊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멀리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역시 집이 좋구나 생각합니다. 여행 에세이를 쓸 때의 나와 소설을 쓸 때의 나는 다른 사람인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역시 같은 사람이겠지만 여행 에세이를 쓸 때는 약간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즐거운 기억을 쓸 때는 조금 웃으며 쓰기도 합니다. 오래전에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스웨덴에서 여름의 끝자락과 짧은 가을, 깊은 겨울을 지냈는데 그곳의 숲과 시나몬롤과 프린세스케이크를 늘 그리워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방문해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 소설과 관련해 현재 관심 있는 주제는 무엇이고 앞으로의 집필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여성과 비인간 동물, 환경에 관해 생각하고 아마도 계속 그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 같습니다.

 

- 작가님은 어릴 때 어떤 아이였나요? 어린 시절의 작가님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어떤 이야기일까요?

 

거의 모든 것이 두렵고 어렵고 고민 많고 겁도 많지만 안 그런 척하느라 부단히 애쓰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책을 좋아하지만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꿔본 적도 없는 아이였습니다. 딱히 꿈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내게 이런 말을 꼭 해주고 싶습니다. 줄넘기와 달리기를 열심히 하고 걱정할 시간에 일찍 자라!

 

- 요즘 읽고 계신 책이나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독자분들께 어떤 책을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김혜순 시인의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를 옆에 두고 매일 시를 서너 편 정도 느리게 읽고 있습니다. 아름답게 일렁이고 황홀한 꿈같고 어쩐지 조금 무섭고 슬픈 언어들을 눈으로 마음으로 꾹꾹 눌러 담고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시작합니다. 글이 안 풀리거나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켄 리우의 단편을 읽습니다. 다정하고 고독한 세계가 그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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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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