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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영찬 평론가, 우울에서 사랑으로

  • 작성일 2025-12-19

우울에서 사랑으로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작가 인터뷰-김영찬 작가(인터뷰어 : 최다영 평론가)

 

 

2003년 경향신문으로 비평 활동을 시작한 김영찬은 첫 비평집 비평극장의 유령들(2006)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사랑의 혁명(2025)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다. 국문학 연구와 리타 펠스키 번역에서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또 그는 2005년 현대문학상, 2007년 대산문학상, 2011년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증상-유령들의 목소리를 따라 읽는 것으로 비평을 정의하는 김영찬 작가와 이번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선정을 기념하여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 최근의 활동이나 출간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근 네 번째 비평집 사랑의 혁명(문학과지성사, 2025)을 출간했습니다. 2024년에 출간한 언어와 혁명혁명 이후의 한국문학(, 2024)1960년대 문학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폈다면, 이번 비평집은 주로 2017년 이후 읽은 한국소설에 대한 비평을 실었습니다. 이 시기에 내가 읽은 한국소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회적 재난의 트라우마를 힘겹게 헤쳐나가고 있었고, 나름의 언어와 형식으로 시대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 소설의 글쓰기를 떠받치고 있는 동력이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소설에서 사랑은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기다림의 고통이자 동시에 역으로 고통스러운 삶의 재건축을 열망하는 기저의 동력으로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비평집은 사랑의 혁명이라는 타이틀 아래 그 사랑의 언어를 헤아리고 받아 적으려고 한 나름의 비평적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와 더불어, 식민지 시대부터 1960~70년대, 1990년대를 아우르며 기억해야 할 한국소설의 흐름과 맥점을 짚어보는 글들도 함께 묶었습니다. 이제는 멀어져간 그 근대문학의 유령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헤아리는 것 또한 저로서는 오늘의 한국문학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시대적 실천으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첫 평론집 비평극장의 유령들(2006)의 서문에서 비평이 할 일 중 하나는 밑바닥에서 웅성거리는 그 유령의 목소리들을 세심히 따라 읽고 그에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며 그것의 공과를 따져 헤아리는 것이다. () 그것을 통해 나 안의 증상과 대화하는 작업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청년 김영찬의 비평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절 선생님께서는 비평을 통해 선생님 안의 어떤 증상과 대화하셨는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비평을 무엇이라 정의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오래전 했던 말을 이렇게 새삼 소환해주시니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저는 비평이란 문학이 앓고 있는 증상을 읽어내는 일종의 정신분석적 임상 치료와도 흡사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비평이란 문학의 언어를 귀 기울여 듣고 거기서 드러나는 증상을 비평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작업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임상 치료의 중요한 수단인 전이가 작품과의 대화적 공간에서도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비평적 글쓰기에서 전이의 공간은 작품과 비평가의 역동적인 대화와 상호관계가 발생하는 공간이며, 비평가의 언어를 작품에게 되돌려주는 협력과 협상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작품으로부터 비평가인 의 증상을 거꾸로 되돌려받는 역전이가 발생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비평가인 저에게 작품과 대화하는 작업은 그 안에서 의 무지와 편견을 교정하는 것은 물론 의 실존적 자리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나 안의 증상과 대화하는 작업이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일일 테지요.

 

- ‘증상-유령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분석적 방법론은 김영찬이라는 이름을 2000년대 비평을 대표하는 목소리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어떤 도구를 통해 문학을 읽고 분석하시나요? 혹은 선생님의 비평에 어떠한 관점이 더해지거나 덜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증상-유령으로서의 문학이란 문학이 이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잉여이면서도 불행한 시대를 제 몸으로 앓는 증상이자 시대가 떨쳐버리려 해도 떨쳐버릴 수 없는, 그리고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로서 지니는 고유한 가치를 말하기 위한 표현이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숨어 있는 그 증상을 읽어내는 것은 문학 읽기인 동시에 시대 읽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평가-지식인으로서의 의 좌표를 읽고 확인하고 조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세월이 조금 흘렀지만 분석의 관점이나 도구가 크게 변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은 제게는 사유의 길잡이이자 분석의 유용한 도구입니다. 다만 세월이 흐른 만큼 문학의 이모저모도 변화를 겪었고, 오늘의 문학을 바라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프레임이나 도구들도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관점의 큰 변화보다는 이런 현실적, 이론적 변화의 산물들을 제 비평의 프레임 안에서 제대로 소화하고 갱신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직 그 갱신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만, 부지런한 읽기와 쓰기를 통해 어떻게든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내딛어 봐야겠지요.

 

- 비평의 우울(2011)에서 2000년대 문학의 중요한 특징으로 더 이상 복수심을 품거나 가상의 복수를 꿈꾸지 않는 모습, “내면의 바깥으로 느슨하게 유희적으로 풀어헤쳐버리는 문학적 태도를 강조하신 게 인상 깊었습니다. 이는 실제 현실이 아닌 2차 현실로서의 텍스트를 그 자신의 상상력과 글쓰기의 참조대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현상현실과의 긴장과 불화하나의 포즈나 언어 내부에서 관습적으로 소비한다는 진단과도 공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2025년 오늘날 한국문학과 내면’, 한국문학과 ‘2차 현실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잘 아시는 것처럼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문학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특히 신경숙 표절 사태와 문단 내 미투 운동을 겪으면서, 기존의 문학성이라는 가치가 심문에 부쳐지고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학의 흐름이 대두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1990년대와 2000년대, 그리고 2010년대 중반까지 오래도록 이어져온 문학의 장기 90년대가 붕괴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와 함께 이후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변화 중 하나는 현실과 문학의 거리가 소멸되는 현상이었습니다. 이는 문학이 현실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게토화된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하면서 그 내부에서만 순환되고 소비되는 차원에서 벗어나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그것을 토픽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선 당시 제가 비판했던 자기 충족적 자율성을 실천적으로 돌파하는 문학사적 지각 변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한편, 현실과 문학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없애고 그 둘의 동일시가 급진화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도 물론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런 문제는 오래전 제가 텍스트가 서로를 참조하고 서로를 낳는 2차 텍스트의 과잉 현상이라고 했던 현상과 정확히 반대 지점에 놓인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측면에선 문학성의 새로운 재구성 과정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실천적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테지요. 무엇보다 지금은 내면이라는 프레임이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제가 이즈음 주목하는 것은 그보다는, 오늘의 한국소설이 가상의 열정이 지배하는 시대에 어떻게 그 가상의 전유와 재배치를 통해, 그리고 새로운 언어와 관습의 발명을 통해 지리멸렬한 현실을 돌파하고 일상을 혁명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학적 고민의 폭을 더욱더 넓혀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사랑의 혁명(2025)에 수록된 비평의 전이가 말해주는 것에 따르면 선생님께 동료란 독아론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주는 사람, 서로가 서로의 집요한 분석가가 되어주는 사람으로 정의됩니다. 그렇다면 지난 20여 년간 가장 소중하고 뜻깊은 동료는 누구였나요? 그분들과 나눈 우정은 어떤 특별함을 안겨주었으며 선생님이 어떤 협소함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나요?

 

비평의 동료에 대해서는 비평의 전이에 대해 쓴 그 글에서 조금은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만난 비평가들은 우정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배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많은 비평가들이 오래전 저를 포함해서 모두 비평가로 등단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세미나를 같이 했던 동료이기도 하고요. 그들로부터 받은 배움비평가로서 (함께) 살아가기를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명을 거론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컨대 김형중에게서는 단도직입하는 명쾌함과 날렵함을, 이수형에게서는 의제 설정의 시야와 신중한 접근법을, 신형철에게서는 (저에겐 없는) 문학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기예를, 차미령에게서는 꼼꼼하고 성실한 분석의 자세를, 복도훈에게서는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교양적 지식의 활용을, 강동호에게서는 신선하고 도발적인 이론적 시야를, 김미정과 오혜진에서는 알게 모르게 내면화된 남성 중심적 문학주의의 편협함에 대한 교정을…… 뭐 그런 식이지요. 이 외에 저에게 배움을 나눠준 더 많은 비평가들이 있지만 이 자리에서는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여하튼 그들 모두를 포함해 이들의 비평이 모두 저에겐 제 비평의 편협과 협애를 (사후적으로) 교정해주는 분석가의 자리에 위치한 안다고 가정된 주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번역 작업도 활발히 이어오셨습니다. 특별히 리타 펠스키를 주로 번역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으며 그 과정은 어떤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나요?

 

심진경 씨의 소개로 읽어보았는데 퍽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너무 오래돼 기억이 가물하지만 그때가 아마 학술장과 문학계에서 근대성 담론이 한창 펼쳐지던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남성 중심적으로 편향된 근대성 이론을 심문하고 근대성의 젠더에 대해 말하는 저자의 논리가 당시 담론장 속에서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둘 다 박사논문을 쓰기도 전이었고 비평 활동을 하지도 않았던 때라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번역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출판계약을 하고 나서 바로 후회하기는 했지만요. 어찌어찌해서 겨우 끝내고 나온 결과가 그래도 썩 나쁘진 않았고 당시 반향도 어느 정도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여러 번역 작업을 함께한 심진경 선생님과 명작은 시대다(2023)에 수록될 소설 선정을 함께 하기도, ‘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코너를 국민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셨지요. 단순히 가족이 아니라 국내 지성사를 쌓아가는 귀중한 동료가 아닐까 싶습니다. 단독 작업을 하실 때와 이처럼 누군가와 함께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싸웁니다!(^^) 그래도 아무래도 같이 작업하다 보면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도 하고 도움도 주고받을 수 있어서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게으름을 피울 때면 채찍질도 하고요. 그럼에도 글쓰기는 결국 각자의 고독한 몫이어서, 그런 점에서는 혼자 하는 작업과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 2018무라카미 하루키, 사라지는 매개자와 1990년대 한국문학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90년대 한국문학에 끼친 영향을 다룬 논문을 발표하셨습니다. 하루키는 한국소설 전반의 형질 변화와 관련 있으며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요, 구체적인 개별 사례들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개별 사례라고 하면 조금 애매한데요. 제가 그 글에서 말한 새로운 문학 개념의 구성이라는 측면 말고도, 실제로 1990년대 한국 작가들이 하루키에게 받은 영향이 그들 소설에 알게 모르게 침윤되어 있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효서, 정정일, 장석주, 윤대녕, 김연수 등의 소설들이 그렇지요. 그리고 넓게 말하면 하루키는 1990년대 한국문학의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서도 사라지는 매개자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1990년대 한국소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포괄될 수 있는 문학이었고, 그것을 매개했던 것이 하루키 문학이었습니다. 당시 아무도 그 문학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요. 실은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명명의 회피 자체도 역사적으로 분석되고 해명될 필요가 있는 특이한 현상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후 그 포스트모더니즘의 매개자로서의 하루키라는 이름은 망각되었죠.

 

- 최근 박태순 소설을 엮는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이 박태순 초기 문학의 동기였다는 논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박태순 소설을 엮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 독자분들께 박태순 문학의 가치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2003년부터 10년 동안 매주 거의 빠짐없이 1960년대 소설 읽기 세미나를 했었습니다. 1960년대에 나온 모든 소설들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는데요, 최근 나온 박태순 중단편전집을 함께 엮은 분들이 저를 포함해서 모두 이 세미나의 멤버였습니다. 이때 발견한 작가가 바로 박태순입니다. 박태순은 문학주의적 문학성이라는 주류적 가치와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쳤던 작가였고, 그래선지 창비문지그룹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해 제대로 된 평가에서 소외되었던 작가입니다. 기존의 문학성혹은 문학적 규범에 안주하지 않고 그 바깥에서 다른 문학의 가능성을 실천했고 소설이라는 협소한 장르를 넘어 르포르타주, 기행문 등 비소설 장르로까지 문학세계를 확장시키면서 문학을 삶의 현장에 최대한 밀착시키려 노력했던 박태순의 문학적 여정은 오늘날 새롭게 재평가될 가치가 충분합니다. 박태순 중단편 소설전집은 2003년부터 시작된 이런 오랜 문제의식의 일차적 결실입니다. 이후 산문과 장편 전집까지 출간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지만, 여러 문제로 시간은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 강동호 평론가는 비평가 김영찬을 중립주의자로 일컬은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중립주의자란 주류 패러다임이 야기할 수 있는 권력과 갈등을 제거하고, 중단시키는 담론적 기술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와 같은 가치로서의 중립, 혹은 중립이 개시하는 정치적·윤리적 공간이야말로 김영찬의 비평적 사유와 글쓰기의 위상학적 성격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상찬하였습니다. 특별히 중립주의자의 중요성은 논의의 전선을 확대시키는 존재라는 점에 있을 텐데요, 이러한 평은 비평의 영역으로서 중립에 대해 사유하게 합니다. 물론 중립은 유보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비일관적이거나 모순적이고 양립 불가한 입장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만 생성되는 비평의 역동성에 우선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중립주의자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비평 영역으로서의 중립은 무엇이며 어떠한 중요성을 내포한 것일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도 그 글을 읽어보았는데요, 저도 미처 정확하게 의식하지 못했던 저의 비평적 태도를 어느 면에서는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저의 실물적 실체를 초과하는 과분한 칭찬인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제 입장에서 달리 말하자면, 강동호 선생이 사용한 중립이라는 태도는 어떤 주류적 입장에도 귀속되지 않으려는, 그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비주류적 입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이념적 프레임과 주류 담론에 포박되지 않으려는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자유로운정신이라고나 할까요. 나쁘게 말하면 회색인적 리버럴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요. 어찌 됐든 어느 하나의 입장에 환원되지 않고 독단을 경계하려는, 그리고 주어진 규범과 규격을 벗어나려는 지향이 제 비평의 근저에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런 측면에서 자유주의자, 리얼리스트, 모더니스트, 구조주의자 등 그간 비평장에서 저에게 붙여진 모순되면서도 다양한 레테르들은 어쩌면 그 어느 것도 제가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저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요즘 비평 쓰기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이 가을을 보내고 계신가요? 혹은 최근 재미있게 읽거나 중요하다 판단되는 평론으로 무엇에 주목하고 계신가요? 저와 독자분들께 추천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최근에는 2025년 겨울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 예정인 동시대 문학사(4) 폭력편의 한 꼭지를 탈고했습니다. 분노와 충동을 주제로 삼아, ‘충동의 서사로 포괄될 수 있는 우리 문학사의 돌연변이라 할 수 있는 소설들의 계보학을 살펴봤습니다. 각기 소설들의 의미와 가치에 걸맞은 제대로 된 명명을 부여받지 못하고 한국문학사가 온전히 평가하지 못했던 별종들의 문학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재미있게 읽은 비평은 강동호의 좌파적 웃음-최근 소설에 나타난 유머의 정치에 관하여입니다. 11월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글이라 아직 정식으로 출간되지는 않았는데요, 김기태, 예소연, 김멜라의 소설을 중심으로 최근 소설에 나타난 좌파적 상상의 흔적을 추적하고 재구성하는 글입니다. 저로서는 이 비평이 분석하는 작품 중 일부는 어느 면에선 보수주의적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동호의 글은 예컨대 의 재전유나 유머를 통해 어떻게 작품이 그것을 내적으로 견제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지를 매우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좌파적 우울이 배회하고 좌파적 상상력이 실종되다시피 한 오늘의 한국문학에서 텍스트의 배면에 숨어 있는 일상의 혁명과 좌파적 유산의 (불연속적) 계승에 대한 요청을 적극적으로 채굴하고 구원하려는 구성적 실천으로서 퍽 흥미롭고 유익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추천합니다.

 

- 요즘 읽고 계신 책이나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독자분들께 어떤 책을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계속해 다시 읽는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고, 다른 하나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입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고 아이디어를 주는 책이라 제게는 일종의 길잡이이자 충전기 같은 느낌입니다. 요즘은 자본론을 다시 펼쳐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다가 도중에 포기했던 라캉의 에크리도 다시 시도하고 있습니다. 독자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고 하면……, 딱히 뭐라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재미있게 읽고 저에게 유익한 책이었다 해서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닐 테니까요. 오히려 스스로가 찾아가고 발견하면서 자기에게 좋은 책을 만들고 자기만의 목록을 쌓아가는 그 과정 속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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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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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도서관의 공간혁신과 문학 생태계를 살펴보다.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호주 도서관의 공간혁신과 문학 생태계를 살펴보다. - 시드니·멜버른 도서관 탐방기 - 김성하(인천광역시교육청중앙도서관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 담당자)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로 선정되어 7박 9일간의 호주 국외연수에 참여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번 연수는 오랜 시간 도서관을 일터이자 삶의 공간으로 삼아온 사서로서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도서관과 문학, 문학과 지역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 생생한 현장을 살펴보는 뜻깊은 여정이었다. 5월 19일 저녁, 인천공항을 출발해 10시간 넘는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상공에서 마주한 붉은 여명은 긴 비행의 피로를 단숨에 잊게 만들었다. 도착해서 처음 만난 생명체는 현지에서 흔히 ‘쓰레기새'라 부르며 홀대한다는 호주흰따오기, ‘아이비스(Ibis)’였다. 노천카페 주변을 서성이며 사람들이 남긴 빵 조각을 가로채는 녀석들의 모습은 낮선 도시의 첫인상을 도리어 친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하버 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마주하니, 비로소 이번 연수가 실감났다. 1. 시드니(Sydney): 전통과 혁신이 어우러진 도서관 문화의 현장 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시드니 작가 축제(Sydney Writers' Festival)가 한창 열리던 5월 21일,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을 찾았다. 1826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주 전체 도서관 서비스 개시 200주년을 맞이한 곳이다. 정문의 웅장한 사암 돌기둥이 인상적인 이곳은 1942년에 완공된 고풍스럽고 웅장한 구관 '미첼 빌딩'과 호주 이주 200주년을 기념해 1988년에 지어진 후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마친 '신관'이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한 도서를 열람하는 공간을 넘어 거대한 박물관이자 미술관의 역할의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웅장한 열람실은 벽면 전체를 채운 고서들과 클래식한 목재 책상,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지적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높은 곳의 책을 꺼낼 수 있도록 연결된 2층 구조의 난간과 계단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어린이도서관은 천장에 책들이 마치 새처럼 날아다니는 듯이 조형물이 매달려 있었고, 독창적인 도서 소개 사인물은 아이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의 자료는 관내열람만 가능하다. 법정 납본 제도에 따라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출판되는 모든 도서의 원본과 역사적 기록물을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 주립도서관의 핵심 임무이기 때문이다. 분실 위험이 있는 관외대출을 금하고 오직 관내 열람과 연구만을 허용하여 아카이브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었다. 도서관이 운영하는 '펠로우십 프로그램(Fellowship Program)'은 역사학자와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최소 1,000AUD에서 최대 120,000AUD에 이르는 파격적인 창작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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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만난 호주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30년 만에 만난 호주 김중석(시옷책방 상주작가) “호주라니!” 상주작가 우수시설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기대했던 해외연수의 행선지가 호주라는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전 해에는 유럽으로 다녀왔다고 알고 있었던 터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호주라니. 하지만 연수를 하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 되돌아보는 지금까지도 호주가 너무 좋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여정에 많은 문화공간과 아름다운 자연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고 새로운 창작을 향한 에너지와 영감을 듬뿍 채운 시간이었다. 사실 호주는 30년 전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곳이었다. 그때는 결혼식을 마치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코스를 따라 몇 팀의 신혼부부들과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딘가에 내리고 밥을 먹고 멋있는 자연을 보며 감탄했지만, 자세한 것은 모두 다 머릿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기억에 선명한데 또 어디를 갔더라? 캥거루를 만나서 먹이를 주기는 했는데 이제는 어느 동물원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나의 호주는 아주 오래전 앨범을 뒤져야만 나오는 추억 속의 나라였다. 호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이미지는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코알라 그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멋진 공원들 그리고 원주민들의 미술이었다. 그때의 호주와 지금의 호주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기대감을 잔뜩 안고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맑고 청명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제까지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였다는데 다행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 ‘날씨요정’이 있었는지 여정 내내 좋은 날씨 덕분에 즐거운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오니 그때의 호주가 조금씩 떠올랐다. 커다란 나무들, 온통 영어로 만들어진 간판들(아주 당연하지만) 익숙함이 밀려왔다. 며칠의 여정 동안 인상 깊었던 몇 개의 장면들을 기억해 본다. 1. 라이온 킹 뮤지컬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우리 일정에는 뮤지컬 ‘라이온 킹’이 관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작자로서 부끄럽지만 뮤지컬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공짜 티켓이 생겨서 다녀온 게 전부였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미 영화로는 보았던 것이니 대충의 스토리는 이해가 되었다. (아! 영어의 벽. 이럴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해둘걸, 이라는 후회) 공연이 시작되기 전 놀라웠던 모습은 극장의 분위기였다. 판매원이 돌아다니며 맥주와 음료와 음식을 팔고 옆 사람과 떠들고 인사하며 사진을 찍고 객석에서 바로 보이는 무대 옆쪽 매점에서 음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공연 전의 풍경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본 것은 무대 미술과 의상이었다. 한정된 무대에서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로 이루어졌을까? 무대의 일정 부분은 회전판을 사용하고 어떤 부분은

  • 김중석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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