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인 날들
- 작성일 20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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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협성마리나 G7]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인 날들
천운영
1. 여행과 나날
여행 짐 꾸리는 데는 꽤 능숙하다 자부하는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좀 고심을 많이 했다. 여행자와 거주자를 오가는 ‘여행과 나날’을 위해 필요한 것들. 가방 하나에 담을 수 있을 만큼만, 있어야 하는 것과 있으면 좋은 것 사이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필요한 것만 추려서. 목표는 기내용 캐리어 하나였는데, 추울까 불편할까 모자랄까 들었다 놓았다 하다 보니, 24인치 캐리어에 백팩까지 꽉 채우고 말았다. 그런데 또 막상 가서 풀어 보니 텀블러는 두 개나 챙겼으면서 꼭 필요한 약주머니는 통째로 두고 왔다. 비상약이야 그렇다 치고 일정 시간에 복용해야 하는 처방약들은 어쩌란 말인가. 짐을 풀다 말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내과를 찾아갔다.
딱 보기에도 연식이 오래된 병원이었다. 새로 진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진단서로 약만 처방받으면 될 일이니 상관없었다. 나이 든 간호사와 더 나이 든 대기실의 환자들. 대화로 짐작건대 서로의 사정까지 다 알고 지내는 단골들만의 병원인 듯했다. 할머니가 진료실에 들어간 지 꽤 지났는데 나올 기미가 안 보이자 간호사가 내게 다가와 변명하듯 말했다. 치매야 치매, 하루가 멀다 하고 와서 약 내놓으래. 소화 안 되고 허리 쑤시고. 약을 그렇게 드시니 소화가 안 되지. 오늘은 아들이 돈 훔쳐 갔다고 하소연. 원장님은 그걸 또 다 들어줘. 힘들게 왜 그걸 다 받아 주고 있냐고.
환자의 비밀인지 간호사의 하소연인지. 정감 있다 해야 할지 대책 없다 해야 할지. 오랜 기다림 끝에 들어간 진료실에서 마주한 것은, 데스크 간호가 왜 그리 세세히 문진을 했는지 알겠는 의사의 상태. 허리가 기역자로 꺾여 머리가 거의 책상에 닿을 것 같았는데, 그나마도 목을 못 가누는 어린애마냥 흔들흔들 매가리가 없는 것이, 의사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환자처럼 보였다. 의사가 내게 물었다.
어디 불편해? 불편한 거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다 들어줄게. 요즘 뭐 힘들어?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지혈증약을 먹어야만 되는 몸 상태를 말해야 하나. 하도 글이 안 써져서 이 먼 곳까지 왔다 말해야 하나.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의사가 재촉했다. 지금 고통스러운 게 뭐야? 다 말해 봐. 저 깊은 곳의 통증까지 끌어올려야 하나 어쩌나. 여기가 내과인가 정신과인가 성당인가. 그냥 처방전이나 내주시라고요, 하고 싶었다. 내게 들을 하소연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번엔 다른 걸 들어야겠다 나섰다.
어디 심장 소리 좀 들어 보자.
의사가 다짜고짜 청진기를 들이댔다. 숨소리도 아니고 심장소리. 나는 얼결에 외투를 벌리고 가슴을 밀었다. 이곳저곳 청진기가 지나갔다. 거기서 무슨 소리가 들리겠나 싶은 곳까지 구석구석. 이제 그만하시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을 때, 의사가 마침맞게 청진기를 떼며 웃었다.
잘 뛰고 있네. 잘 뛰고 있어.
못 뛰고 있으면 여기 왔겠냐고요, 할 뻔했다. 내 심장이 잘 뛰고 있는데 왜 당신이 즐거운 것이냐 물을 뻔했다. 진료를 한 게 아니라 치료를 받은 거 아니냐 따질 뻔했다. 어쨌거나 처방전은 받아 챙겼다. 병원을 나서면서 계단 입구에 걸린 간판을 살펴보았다. 나무 간판에 명조체로 새겨진 병원 이름. ‘000냇과의원’. 내과가 아니라 냇과. 사이시옷 맞춤법 개정이 도입된 지가 대략 40년 전. 적어도 40년 전에 개업한 병원. 그런데 맞춤법 개정 이전에도 내과가 아니라 내과 아니었나? 혹시 내과가 아니라 냇가라 쓰려 했던 것 아닐까? 내과인지 냇가인지에서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심장소리를 들었나. 매일매일이 노인들의 하소연인 그의 나날에서, 짐을 잘못 꾸려 우연히 발을 들인 여행자는 어떤 즐거움이었나. 잘 뛰고 있는 중년 여자의 심장소리는 어떤 소리를 냈나. 쿵쿵 쿵쿵? 쿵쾅 쿵쾅? 그런데 언제였나, 내가 누군가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때가. 쿵쿵 쿵쿵.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했던 날은? 그날 저녁 숙소에 들어와 다음 문장을 썼다.
‘냇가에 앉아 내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2. 삼랑진에서 다대포까지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숙소를 나와 어딘가로 갔다. 애초에 부산을 선택한 이유. 낙동강, 을숙도, 철새도래지, 부산항. 지난해 말부터 순천만을 시작으로 서천과 군산 금강 하구 철새도래지를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본격적인 탐조 활동은 아니고 그저 새들의 장소에 머물다 오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좋았다. 철새 도래지하면 낙동강 하구가 아니었나. 부산에 머물며 을숙도에서부터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주남저수지까지 둘러볼 계획이었다.
을숙도는 세 번 갔다. 큰고니, 큰기러기, 청둥오리, 백로, 재두루미. 숨을 죽이고 보았다. 작은 몸짓 날갯짓 하나하나에도 감탄하면서. 화명생태공원으로 가 낙동강 생태탐사선도 탔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다 을숙도에서 철새들을 둘러볼 거라고 예상했으나, 배는 을숙도 못미처 방향을 돌려 화명으로 돌아왔다. 겨울철새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설계된 동절기 노선이었다. 그래야 맞지, 철새들을 방해하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 생각이 짧았다. 대저토마토로 유명한 대저가 딸기의 시배지라는 것도 해설사를 통해 들었다. 화명에서 구포까지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구포역 앞 유명한 만둣집 군만두를 사 먹었다.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라도 하듯 군만두 1인분을 포장해 달랑달랑 들고 기차를 탔다. 일 마치고 퇴근하는 가장의 기분이었다.
부산역으로 나가 즉흥적으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어디쯤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삼랑진.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 세 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곳. 그래서 삼, 랑, 진. 그때까지만 해도 삼랑이 아니라 삼량인 줄 알았다. 오래전 철도관사 마을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도. 마을 구경을 하고, 세 갈래 물결이 합쳐지는 곳까지 아주 느린 걸음으로 다녀 왔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일몰을 맞았다. 낙동강을 옆에 끼고 달리는 무궁화호. 오늘의 기차는 실직하고 하릴없이 걷다 돌아가는 가장을 싣고 가는구나. 차창 밖으로 낙동강 붉은 노을이 딱 그런 색이었다.
낙동강 탐사의 마지막은 다대포 해수욕장이었다. 낙동강이 을숙도를 지나 바다와 한 몸이 되는 곳. 강이 함께 품고 내려온 육지의 흙이 을숙도를 만들어 냈다면, 거기에 겨울철 세찬 계절풍이 더해져 다대포의 사구를 만들어 낸다. 해변을 따라 해안사구와 사구에서만 자라는 사구식물, 갯벌과 물결자국의 언덕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물과 모래와 바람이 만들어낸 다채로움.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어쩐지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낙동강을 따라 삼랑진에서 다대포를 오가는 동안 쿵쿵, 심장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은 것이 언제였었나. 심장이 뛴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매일 길을 나섰다가 돌아오던 모든 순간 심장이 뛰었다. 새 떼들의 날갯짓 소리 같기도 했다.
3. 다시 나의 나날
머무는 동안 짐이 늘었는지 가방이 모자랐다. 그래서 여행을 떠날 땐 가방을 반쯤 비워 두어야 하는 법인데. 체감으로는 한 일주일쯤 있다 가는 것 같은데 벌써 한 달이라니. 한 달이면 쓰고 있던 원고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소설 구상도 할 줄 알았다. 여행은 덤이었다. 일지를 살펴보니 여행이 일상이고 글쓰기는 덤도 안되는 부스러기다. 첫날의 첫 문장은 뒤를 잇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어지려나? 심장소리에 관하여 쓰게 될까? 내과가 아닌 내과의 의사에 대해 쓰게 될까? 삼랑진 대합실에서 훔쳐 들은 남녀의 대화는, 그 맥락을 파악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짐이 늘어난 만큼 무언가도 채워졌으면 좋겠는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게 언제 어떻게 뿜어져 나올지는, 그건 나도 모를 일이다. 다시 나의 나날에서 불쑥 들어와 가슴을 열고 심장소리를 들려주는 날이 있겠지. 귀가 트이고 말문이 열리는 날이 있겠지.
다음 그곳에서 한 달을 보낼 다른 작가들에게 팁 하나를 보태자면, 커튼을 닫지 말고 잠을 잘 것.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 당신의 아침을 열 테니. 그리 며칠 지내다 보면 해뜨기 직전 눈이 떠지고 일출을 기다리는 기분이 퍽 괜찮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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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는 문학 레지던시에 머문 작가들의 에세이입니다. 입주 기간 동안의 하루와 작업 과정,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마주한 감각과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작품 너머 창작의 현장과 작가의 내면을 함께 전합니다. 레지던시에서 보낸 시간의 의미를 독자와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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