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든 데려가는 것
- 작성일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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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곁]
어디로든 데려가는 것
― 열심히 책과 흘러가는, 출판 마케터 ‘파도’(@pado.sil)
하유정
책만 믿고 서울로 온 지 4년이 지났다. 옷이 좋아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했던 스무 살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할 전개라 종종 미안할 때가 있다. 하지만 더 미안한 건, 나는 항상 20대 초반의 기억을 늘 지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실습이 많은 과라 돈은 권력 같았는데 나는 그 한 글자가 없어서 항상 눈치를 살폈다. 필요한 재료를 사기 위해 시장에서 발품 파는 친구들 옆에서 나는 가성비를 따진다는 번지르르한 말로, 그저 저렴한 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값비싼 브랜드를 이야기하는 대화에서도 나는 그 옷을 사기 위해 몇 시간을 일해야 하는지 계산하다 실소를 터뜨리며 꿋꿋이 생계를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패션은 얼마나 유행이 빠른지, 일주일만 지나도 비슷한 옷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혼란에서 트렌드라는 생애 주기에 맞춰 가격을 보지 않고 턱턱 사는 동기들을 보며,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흘기며 참던 날들이 계속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게 죽도록 싫었던 나는 점점 작아졌고 결국 권태기가 온 연인처럼 옷과 멀어지게 되었다. 좋아하면서 관심 없는 척하는 현실이 쪽팔려서, 그 알량한 자존심이 싫어서 가장 더럽게 헤어지는 일, 옷과 잠수 이별을 택했다. 좋아하는 게 싫어지면 도망칠 구석이 없어진다. 인생에 불호만 남은 날이 이어지자,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책상에 언제 산지 모르는 몇 권의 책이 있었다. 두껍고 단단한 물성,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그대로 남아 있는 글자들이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알려주는 듯했다. 몇 장을 읽으니 내가 그토록 원했던 그 말,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라는 위로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비어 있는 지갑이 티 나지 않는 곳, 모두가 공평한 자격으로 둘러볼 수 있는 서점을 자주 갔었다. 유명한 작가와 책, 출판사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아는 거 없지만 갈 곳이 없어서 틈만 나면 갔다. 그 당시 가장 놀랐던 것은, 분명 한 달 전에도 순위에 있던 책들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그 의미가 베스트셀러 혹은 스테디셀러라는 것을 알지만, 내가 알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만 지나도 흥미가 떨어지는 게 당연한 거였는데, 사람들은 책을 질려 하지 않는구나.’ 감출 수 없는 의아함을 품은 채 책 한 권을 집었고, 그때 만난 장류진 작가의 책 『달까지 가자』가 내 인생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나의 고향 부산은 제2의 수도라고 하지만, 결국 지방이기에 작가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고 그때는 더욱더 없었다. 책을 향한 관심이 깊어지던 어느 날, 부산 동구 초량동에 있었던 창비부산에서 ‘4인 4색 소설 토크’ 행사 진행 소식을 접했고, 장류진 작가가 온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신청하여 운 좋게 선정되었다. 더불어 출판사 측에서 선정된 사람들에게 낭독 희망 여부를 물었는데 주저 없이 내가 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의외로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는 생뚱맞은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아야 함도 알았기에. 더불어 책을 향한 진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떨리는 마음으로 행사 당일만을 기다렸다.
그날엔 ‘문학’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에너지를 느꼈다. 코로나가 유행했던 2021년 여름, 마스크를 쓴 얼굴들에서 가지런히 피어나는 맑은 호기심과 흰 천으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는 다정한 미소에 반하게 된 것이다. 각자 살아온 삶의 형태가 다른 사람들이 그저 같은 책을 읽고 모였을 뿐인데 왜 우리는 서로 연결되고, 개개인은 더 또렷해지며, 바이러스가 침투할 틈조차 주지 않았던 것인가. 이 말도 안 되는 경험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연신 어지러웠다.
한껏 취한 기분을 겨우 달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을 끝냈고, 장류진 작가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에 결국 엄청난 선포를 하고야 말았다. “작가님, 저 출판 마케터가 꿈이에요. 그리고 작가님 책을 마케팅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확신에 찬 나의 말에 작가님은 사인과 함께 ‘곧 만나요!’라는 다정한 말을 남겨주셨고, 나를 한 방에 쓰러뜨린 이 한마디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곧 만나자는 약속을 어기면 큰일 날 것처럼 며칠 내내 안절부절못했고, 곧이어 내 안의 새로운 스위치가 켜져 나조차도 의심했던 꿈이 더 위태롭고 아름답게 부풀었으며 그날을 기점으로 옷에서 책으로, 부산을 떠나 서울로 도착해 수많은 선택과 고난을 거쳐 현재 출판 마케터 4년 차가 되었다.

2021년, ‘4인 4색 소설 토크’에서 장류진 작가님께 받은 사인
내가 근무하고 있는 흐름출판은 인문·사회, 과학, 경제 경영 분야를 중점으로 출간하고 있다. ‘살아가는 힘이 되는 책’을 펴내며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며 정확한 숫자와 결과로 미래를 예측해 보는 책을 독자의 곁에 가닿을 수 있게끔 홍보하고 많이 파는 것이 주된 업무이자 숙명이다. 책이 서점에 입고되기 전부터 자리를 잡을 때까지 서점 담당자와 소통하는 영업을 함께 하고 있지만, 조금 더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은 독자에게 직접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는 온라인 홍보이다.

‘메이드 인 출판사’ 릴스 콘텐츠(@nextwave_pub)
흐름출판 인스타그램(@nextwave_pub)에 접속해 보면 책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마케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도(본인)와 박대리(존경하는 나의 사수, 박중혁 과장님 @parkdaerii)라는 닉네임을 쓰는 두 사람이,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 열심히 출판계 소식을 전하는 릴스 콘텐츠 ‘메이드 인 출판사’ 시리즈가 발행되는 금요일이면, 주제에 따라 공감, 위로, 응원의 댓글이 잔뜩 달린다. 우리가 온라인 홍보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브랜딩’인데 독자의 시선을 끌고 흥미를 자아내 결국 우리의 팬으로 전환하는 브랜디드 콘텐츠를 만들고 있고, 출판사들의 비슷한 콘텐츠 사이에서 어쩌면 따분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독자가 우리 영상에서는 웃고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홍보를 이어가고 있다.
‘메이드 인 출판사’ 시리즈는 2024년 4월에 처음 시작되었고, 릴스 콘텐츠가 유행하고 점점 더 많아지는 시기에 바로 뛰어든 덕분에 우리를 팔로잉하는 독자를 넘어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빠르고 더 멀리 닿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카드뉴스 형식으로 책을 다루는 출판사 직원의 일상을 담았었는데, 인스타그램의 변화가 두드러졌던 시기에 자사 콘텐츠 형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방향을 제시한 과장님과 달리 사실 나는 조금의 두려움이 있었다.
겁이 났었다. 책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았다. 이 마음은 촬영에서도 이어졌는데, 전반적인 출판계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비판적으로 일침을 가하는 내용 혹은 화제가 되는 책에 대해서 말할 때 정말 어디까지 닿을지 몰라 나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조금씩 하게 된 것이다. ‘그 말은 하지 말걸’, ‘이 말은 하지 말자’ 혼자 갈등하며 몇 차례 촬영에 임한 결과, 실체 없는 고민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자는 우리의 콘텐츠에 반응했다. 속 시원하다는 말, 다음에는 이런 내용을 다루어 달라는 부탁, 재밌어서 계속 보게 된다는 응원. 그때부터 나는 카메라 너머의 독자를 상상하며 출판계 소식을 정확히 전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 임하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터놓은 말이 독자가 듣고 싶었던 말과 동일하다는 것을 느낀 결과였다.
점점 높아지는 조회 수와 콘텐츠가 발행되는 금요일을 기다리는 독자가 많아지던 2024년 10월, 두 번째 시리즈를 선보이기로 했다. 늘 시작이 어려워 머뭇거리는 나에게 과장님은 사람을 모으는 콘텐츠의 힘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영상으로 재밌게 책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보여줄 때라고 말씀하셨다. 1분 동안 책을 소개하고, 실제로 판매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획과 편집은 과장님이 맡아주셨으니 나는 마케터의 본분을 살려, 즐겁게 읽은 책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일타 강사처럼 하얀 칠판에 열정적으로 글을 써가며 왜 이 책이 흥미로운지 설명하는 콘텐츠 ‘출판 일타 강사’는 그렇게 주 1회 수요일마다 발행되기 시작했다. 소설, 에세이, 인문,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소개하는 콘텐츠들이 점차 조회 수 100만, 200만을 넘어 450만을 기록하는 수치와 유의미한 판매를 보여주었고, 현재는 타 출판사의 광고를 받으며 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각자의 계정에서 함께 발행하고 있다.

‘출판 일타 강사’ 릴스 콘텐츠(@pado.sil, @parkdaerii)
수치보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해가 갈수록 독서율이 감소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알고리즘에 난데없이 등장한 책이 재밌어 보인다면 흔쾌히 반기고, 자신 또한 즐겁게 읽은 책이라면 추천의 댓글을 더하며, 누군가의 궁금증에 답 댓글로 의견을 남겨준다. 그리고 이 다정함과 환영이 만든 연결의 현장이 우리의 콘텐츠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표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책이, 펼쳐보지 않으면 재미를 경험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화가 사람들의 눈과 손에서 다시 태어나고 더 나아간다. 이보다 더 값진 일이 있을까.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자랑하고 싶은 일화를 소개하려 한다. 최근,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준 DM을 받게 되었다. 우리의 릴스 콘텐츠를 보다가 용기가 생겨 작은 마음을 조심스럽게 보낸다는 말로 시작되었는데, ‘평소 책에 대해 관심은 많았지만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덕분에 한 발자국 내디디게 되었어요’라며 응원의 연락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만든 콘텐츠를 통해 용기를 내게 되었다는 말씀을 보고, 가장 먼저 책의 곁에 서겠다고 결심했던 2021년의 나를 떠올렸다. 이 연락 덕분에 더 이상 지우고 싶은 과거가 늘지 않았으며, 나 역시도 한 발짝 더 내디뎌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출판 마케터로 살면서 작아지고 세상이 징그러워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건 책으로 이어진 은인들이었다. 계속 영상을 찍어달라고 말씀해 주시거나 책이 재밌어 보인다며 구매했다는 댓글을 남겨주시는 독자님들, 2025년에 처음으로 참가했던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양손 가득 선물을 안겨주던 독자님들. 게다가 그토록 꿈에 바랐던,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던 장류진 작가와 우연히 만나 ‘곧 만나요!’에 대한 후일담을 나눈 시간까지. 나는 여전히 책을 무기로 사람들에게 빚지는 삶을 살고 있다.
사람을 제외하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건 예상하듯이 당연히 문학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자사의 책처럼 뾰족한 글을 읽다가 종종 건조한 목마름을 느끼곤 했다. 더 이상 내 마음이 무언가를 받아들일 힘이 없어 버거워지고, 내 그릇이 좁아져 상식과 사실을 채워 넣을 공간이 부족해서, 그래서 지금의 내 모습으로 말고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질 때면 곧바로 문학을 집었다. 문학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고, 타인이 되어보는 연습을 돕는다. 혹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기반으로 다루는 문학이라면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내 삶에 스며들어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평생 기억하게 만든다. 나는 이것을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중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를 읽고 느꼈으며, 영광의 기회로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열린 북토크 사회를 보았던 현장에서 연이어 문학이 주는 힘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문학의 배경이 된 곳에 과거를 기억하고자 모인 사람들,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 기꺼이 함구하지 않는 인간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이 쓰고 사람이 읽는 책은 정말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나는 그 끝을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한정된 수명이 주어진 우리와 달리 책은 죽지 않고 계속 숨 쉴 것이다. 불멸하는 글자처럼.

『혼모노』 북토크 사회를 맡았던 현장
문학은 계속 나를 부추겨 어디로든 나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더 많이 문학을 경험하길 바란다.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삶만 주어지기에, 우리는 부단히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상황에 흔쾌히 들어가 그 삶을 살아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세상을 똑바로 보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다르게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 홀로 해낼 수 없다. 나의 몸을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의 틈을 발견하지 못하고, 문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니 문학 속 낯선 인물이 말을 걸어온다면 재빠르게 손을 내밀자. 그리고 책을 덮고 나면, 당신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상상하며 더 좋은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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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곁〉은 창작자뿐 아니라 문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확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책이 독자에게 닿기까지의 과정에 머무는 사람들, 문학과 독자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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