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2026년 8월호

  • 작성일 2026-08-01

 [8월호를 열며]

   일 년에 한두 번씩, 인천 강화에 있는 한 펜션에 가곤 했습니다. 넓고 깊은 저수지에 맞닿은 그곳은 너무도 고요하고 적막하여 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그런 곳인데요, 처음 그곳에 간 것은 이십 대 중반으로, 이제는 제가 거길 처음 알아냈던 것인지 같이 간 사람이 알아냈던 것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합니다. 그곳에 가면 필연적으로, 오래전 함께 왔던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몇몇과는 여전한 사이지만 몇몇과는 지난 꿈처럼 흐릿한 잔상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그곳에 간 것은 삼 년 전으로, 친구와 달걀 요리를 해먹은 뒤에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고독한 사람들인 것처럼 종일 저수지에 쌓인 눈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때로 한 문장이라는 것은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도 모르는 채, 다만 마주하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 합니다. 「읽지 않음」이 그랬습니다. 저조차도 그 이유를 모른 채로 속절없이 그렇게 되었는데요, 시의 도입부를 읽자마자 지난 계절의 사람들과 그곳을 부유하던 먼지들, 적막과 고요와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안팎에서 제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아니, 하나의 형상으로 성큼, 나타난 것에 가까웠지요. 그리하여 저는 요 며칠 발신음과 신호음에 대해 생각했고 길을 걸었고 하늘을 보았고 사람은 지날 수 없는 교량을 건넜습니다. 사람은 안 되고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새들은 될지도 모르는, 그런 곳이었고, 언뜻 한여름과는 어울리지 않을 생각일지 모르지만 슬픔의 어지러움이 언제 그런 것을 따졌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역시 큰 상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낯설었던 감정이 어느새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쉽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한여름의 폭염과 장마 속에서 문장웹진 8월호와 함께 해주신 분들께, 함께 해주실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모쪼록 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


ㅡ 이주란 소설가 외 문장웹진 편집위원 일동




2026년 8월호 <줄넘기들> ⓒ 정김소리



8월호 표지 그림 작가의 말

“흐린 얼굴들을 떠올리며 제자리 줄넘기”


문장웹진 2026년 8월호 목차

구분

작가

제목

김려

  읽지 않음

  팔도열차

김유림

  그 선물

  그 선물

이자켓

 

  제인

이주빈

  소문내 1956

  일몰

최동은

  산당화 필 때

  새장이 텅텅, 꿈속이 텅텅

최재원

  지지 못하는 별

  잠 못 이루는 밤

최필립

  투구게 모델링

  무이기 위해 잠시 유였던

단편소설

박우연

  하인즈

이갑수

  내 마음이야

장희원

  장정호

주나영

  늦은 새해

평론

이은지

  [연재]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박상현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

오웅진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기획

문장웹진 다시읽기

김진선

  [연재]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다시하자고>(2018년 6월호 수록)

모색

문학의 곁

서현이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 책 읽는 사회를 위한 <KBS 라디오 문학관>

레지던시 일기

하인츠 야니쉬

  Die Schildkröte und der Tiger 거북이와 호랑이
― 한국에서 레지던스 작가로 보낸 4주의 시간

문장웹진 8월호 살펴보기

늦은 새해

늦은 새해 주나영 우기 막바지인 3월 아침, 조식당에 안까지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원은 사다리에 올라 창에 붙은 검은 시트지를 문질렀다. 들뜬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눌렀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해서 창을 가려야 하나 싶었다. 어젯밤 체크인할 때 받은 안내문 상단에는 영어로 ‘침묵의 날(녜삐 데이)’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발리의 불빛과 소음을 줄이며, 투숙객의 호텔 외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건네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아주 조용하게 보내는 풍습이 있거든요.”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호텔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췄고, 손님들도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줄이는 듯했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시트지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래도 한쪽이 다시 들뜨자 시트지 한 장을 떼어 사다리 아래로 내려보냈다. 창의 절반쯤이 드러났고, 유리 바깥 면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케이지-프리 에그 화이트 오믈렛을 주문했다. 쉰을 넘긴 뒤부터 식단과 운동에 부쩍 엄격해졌다. 디종 머스터드 병을 열어 숟가락으로 접시 귀퉁이에 덜어 놓은 뒤, 오믈렛을 잘라 찍어 먹었다. 면도를 공들여 한 듯 턱끝이 말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혜리는 빵 바구니에서 올리브 치아바타를 집어 들더니 박혀 있는 올리브만 손끝으로 빼 먹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었다. 나는 냅킨 상자를 혜리 쪽으로 밀었다가 멈추었다. 혜리는 이미 옆에 놓인 냅킨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혜리는 남편과 전처 사이의 딸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혜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리다. 혜리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호주로 건너간 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혜리를 만났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 남편이 서재에서 혜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방에 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면 물병만 꺼내 돌아왔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먼저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통화를 마친 뒤 혜리의 학교생활과 새로 키우기 시작한 동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몇 장 넘겨본 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혜리는 빵에서 올리브를 하나 더 빼 입에 넣었다. 남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은 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미뤄 왔다. 결혼식은 석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흘 정도 쉬고 오자고 한 것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쯤인 발리에서 혜리를 만나자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서재에서 청첩장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구겨지지 않도록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혜리는 아보카도 스프레드를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한입 베어 물자 빵 껍질이 바스러져

  • 주나영
  • 2026-08-01
장정호

장정호 장희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기가 차고 맑은 곳. 다른 곳보다 해가 빨리 뜨고 지는.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희재에게서 그가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우듬지 너머로 뜨는 어슴푸레한 새벽 동이나 찹찹한 분위기,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임야를 떠올렸다.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허공 속의 한 점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어머니가 복수가 찬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분명히 그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느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른 아침부터 희재와 나는 서둘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입을 헹구고, 어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희재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양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창문으로 머리를 기댔다. 저기 뭐가 죽은 것 같아. 아니다, 다시 보니까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어. 희재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답했다. 한참 후 주위가 고요해진 것 같아 옆을 보니 희재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백반과 우동을 나누어 먹었다. 밥을 다 먹고도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휴게소 뒤편으로 펼쳐진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휴가철이 지나서인지 대체로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왜 그렇게 서둘렀냐고 묻자 희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희재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는 삼 년 전 아내가 간경화로 죽고 난 후 홀로 지내다 언제부턴가 야산에서 지내고 있었다. 양산에 있던 그가 어떻게 산천에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 살게 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미처 주변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냉장고에는 그가 먹다 남긴 반찬들이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희재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부터 기르던 식물들, 호야 나무, 산세비에리아, 스투키가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지가 가득한 집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희재와 희재의 가족이 살았던 집. 희재와 나는 명절이면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오곤 했다. 간간이 희재와 희재의 어머니, 내가 웃을 때면 그는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가 왜 그런 곳까지 가게 되었을까 하고 묻자 희재가 대답했다. 자신도 우연히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뿐 더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뭐든 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죽어버렸으면. 나는 희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본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말이 없고 등이 조금 굽은 왜소한 노인. 그는 묵묵히

  • 장희원
  • 2026-08-01
내 마음이야

내 마음이야 이갑수 퇴근하고 싶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신나는 음악을 듣는다. 눈을 감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린다. 졸업, 제대, 여행, 생일파티, 800만 원 복권 당첨, 첫 키스…… 아니 첫 키스는 빼자. 그리고 명상을 한다. 생각을 비우고 차분하게. 절대 조금이라도 우울해선 안 된다. 어제도 제시간에 퇴근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 회사가 정부의 근로자 지원프로그램 시범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지난달부터 퇴근하기 전에 우울증 지수를 체크 한다. 보건복지부가 대학 연구소와 산학협력으로 개발했다는 ‘뉴진’이라는 우울증 측정기는 헬스장의 인바디 측정기처럼 생겼다. 악력기처럼 생긴 손잡이를 잡고 발판 위에 올라서면 우울증 지수가 100분위로 표시되는데, 우울증 지수가 50이 넘는 사람은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한다. 어떤 원리로 우울증을 측정하는 건지는 모른다. 아무리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몸을 측정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몸을 통하지 않고는 마음을 알 방법이 없으니 둘 사이의 어떤 메커니즘을 알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시범 사업이 끝나고 일반에 공개가 되면 측정 원리도 밝혀질 테니 기다리면 곧 알게 될 일이다. - 80.00 오늘도 실패다.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첫날에는 51이었고, 그날 상담은 5분 만에 끝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신기한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 요즘 기분은 어때요? 강 박사의 첫 질문은 항상 똑같다. -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그냥 괜찮습니다. 처음 그 질문은 받았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 무감각한 것도 우울증세일 수 있어요. 일단 지켜봅시다. 강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지난 한 달간 나를 지켜본 결과는 부정적일 게 분명하다. 내가 상담을 받으며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수치가 올라가고 있으니까.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들을 부러워하며 상담실로 올라갔다. 내 앞에 대기자는 일곱 명, 네 명은 자주 보는 얼굴이고, 세 명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울증 지수가 높아서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다들 정말 우울해 보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상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로 강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이 지원프로그램은 경력형 일자리 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은퇴한 의사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으니까. 정부 입장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좋은 정책이었다. 강 박사도 대학병원에서 정년 퇴임한 정신과 전문의다. 강 박사는 슬램덩크에 나오는 안 감독님을 닮았다. KFC의 샌더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흰 양복 대신 흰 가운을 입고 있다는 것 빼면 정말 똑같았다. 강 박사를 보면 치킨이 먹고 싶었다. - 요즘 기분은 어때요? 자리에 앉자마자 강 박사가 모니터의 차트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전에 없이

  • 이갑수
  • 2026-08-01
하인즈

하인즈 박우연 도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누운 채로 바라본 아킬레스건이다. 분리형 원룸의 미닫이문 너머, 도해는 냉장고 앞에 서 있다. 잠옷으로 입는 헐렁한 티셔츠 밑으로 뻗어 나온 맨다리. 그럴 때면 나는 잠시 내가 누운 곳이 어딘가에 대해 생각했고 곧 도해의 침실 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먹어?” 언젠가 도해의 등을 향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도해는 냉장고 문을 닫은 뒤에야 돌아보며 대답했다. “유산균.” 찬장에서 컵을 꺼내다 말고 도해는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흘낏 보았다. 너도 먹을래? 아주 잠깐이었지만 명백한 사이를 둔 채 날아든 질문에 나는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섬유유연제 없이 빨아 방 안에서 말린 뻣뻣한 수건이 목 뒤쪽에서 까끌거렸다. 도해는 원룸에 옵션으로 딸린 싱글 침대에서 혼자 자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나는 늘 바닥에 얇은 요를 깔고 수건을 말아서 베고 잤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자 하인즈는 언제나처럼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도해가 유산균을 물과 함께 두 번에 나누어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냉장 보관이 필수인, 한 박스에 육십 캡슐이 든 그 유산균은 하루에 한 번 두 캡슐을-되도록이면 공복에-먹어야 했다. 그 계산대로라면 도해는 한 달에 유산균 값으로만 월급의 십분의 일 가까이를 써버리는 거였다. 그때 나와 도해는 대학가에 있는 바에서 일하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 여섯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최저시급이 사천팔백육십 원이던 시절이었고, 열 시부터는 야간 수당이라는 명목하에 칠천이백구십 원을 받았다. 가끔 주말 근무자가 대타를 부탁할 때 생기는 수입과 주휴수당, 손님이 주는 팁까지 모두 긁어모아도 월급은 백이십만 원이 채 안 됐기 때문에, 십이만 원짜리 유산균은 실로 불가사의한 지출이었다. 전공 교과 성적이 뛰어나지 않은 경영학과 학생이 보기에도 그랬다. 장이 안 좋은 편이야? 내가 묻자 도해는 한쪽 입술만 움직여서 웃었다. 그리고 비밀이라도 알려주듯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이게, 힘이 되거든. 그러고는 몇 개의 단어를 입속에서 굴렸다. 힘이랄지, 배짱이랄지, 든든함이랄지……. “왜, 억울한 시비가 붙거나 말도 안 되게 나쁜 일이 생길 때 있잖아.” 도해는 자신의 배꼽 언저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럴 때 내 뱃속에 십이만 원짜리 유산균이 같이 있다고 생각하면, 몇천억 마리나 되는 애들이 날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언저리에서 실존적인 힘이 솟는 느낌이야.” 실존적, 이라는 단어를 도해는 좋아했다. 딱히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도 늘 그 표현을 썼다. 내가 도해처럼 쿨한 언니 같은 느낌으로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했을 때도 도해는 정색하며 말했다. 어떤 스타일인지, 좀 더 실존적으로 묘사해 봐. 나는 도해를 비사이드(B-side)라는 이름의 바에서

  • 박우연
  • 2026-08-01
무이기 위해 잠시 유였던

무이기 위해 잠시 유였던 최필립 미드나잇―꿈과 품과 우리가 머물 태양의 창―영원한 공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동화책을 덮은 엄마의 목소리는 결연했지. 눈 내리는 밤에. 너는 동화가 끝났으니 곧 잠이 들겠지만, 꿈에서도 엄마는 계속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엄마가 사라진 아침에, 그 태양의 창을 넘어 마지막 썰매를 타러 갈 때에. 그러니까,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공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흰 베개 위에 폭설이 나려 진정한 순백이 될 때까지. 커튼을 내리는 손길. 시간이 지나고 이어 커튼을 올리는 손길. 커튼을 내리면 여기가 안이 되는가. 올리면 밖이 되는 걸까. 빛이 있고 없고와 0과 1. 올라간 커튼과 내려간 커튼의 이분법. 상상해 봅시다. 방에 은박 돗자리를 깔고 도도와 스미스와 마루를 초대해 쿠바 샌드위치를 베어 물면요. 도도는 뱀파이어다. 도도는 그래서 미드나잇을 사랑해. 도도는 가끔 스미스와 데면데면해. 그래서 마루, 엄마는 왜 영원한 공허에 대해 말했을까요. 마루는 샌드위치를 질겅질겅 씹으며 창밖을 가리킨다. 빛이, 빛이 들어온다. 도도, 위험해! 뱀파이어 도도는 이 시에서만 뱀파이어라는 설정. 도도는 뱀파이어거나, 뱀파이어를 연기하는 곰인형입니다. 그래서 그 소풍은 어떻게 파했던가. 미드나잇, 커튼을 올리는 손길. 여기는 세인트 패러노이아의 아무도 없는 숲, 혹은 암실. 너는 엄마가 타고 간 로즈버드에 대해 조사한다. 무이기 위해 잠시 유였던. 로즈버드의 연속 사진은 어떤 장소와도 관련이 없었고, 너는 실망하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미드나잇을 (여전히) 사랑해. 너는 대신 로즈버드의 설계도를 정확히 반으로 접어 나뭇잎 한 장을 끼워 넣는다. 이따금 새벽, 햇빛, 다른 이름은 영원한 공허. 커튼이 없는 정글에서 너는 깨어난다. 잘 말린 로즈버드의 연속사진, 사이코패스 벌목꾼에게 머리가 베인 채 나란히 앉아 있는 도도, 스미스, 그리고 마루. 너는 타오르는 심장을 바라보며 실소를 짓는다. 눈밭 위에 붉게 스며든 소풍 친구들의 피. 너는 눈물 한 방울 글썽이며 입을 연다. 도도, 스미스, 마루, 그리고 여전히 꿈속에서 같은 동화를 반복해서 읽고 있을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반쯤은 거짓말. 나는 당신을 생득적으로 사랑했답니다. 비로소 너는 거울을 이해한다. 로즈버드를 이해하고, 커튼을 내리고 올리는 손길에 대해. 엄마가 잠들고 나서도 한참을 읽어준 동화에 대해. 아마도, 그건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린 최종의 결정일지도 모른다고.

  • 최필립
  • 2026-08-01
투구게 모델링

투구게 모델링 최필립 암전 속 꽃가루가 흩날리는 장면. 우리는 그곳에 빛이 있을 거라고, 꽃가루와 꽃가루가 교환한 비말 속에. 알로하 댄서의 동작은 겉보기 움직임을 가지고. 그는 봉을 잡고 웃는다. 봉을 냉큼 핥아보기도 한다. 미래를 위한 커튼콜은 유약을 바른 눈. 그래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버전의 미래가 필요해요: Version 1: 흐린 눈으로 바라본 눈 내리는 고전적 극장 앞의 풍경, 그리고 군상들. Version 2: 너와 내가 그토록 믿은 빛에 관해, 꽃가루를 보지 않았을 때 상종하는 것에 대해. 검시관은 교차하는 꿈을 전시한다. 꿈을 분류한다. 눈 위에 흘린 유약이 핏자국을 따라 흐른다. 나는 너의 손을 잡고 한때 키웠던 풍선 강아지에 대해 떠올린다. 강아지는 살아있지 않았으니까, 풍선 강아지는 비인간이고 우리는 비인간을 책임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비인간에게 코르셋을 입히고, 풍선 강아지는 조일 수 있는 조인트가 있는데 하나, 둘, 셋 세세히 기름칠도 해 둬야지. 오늘은 나의 순번, 내일은 너의 순번, 그리고… 비밀이긴 한데요. 나는 알로하 댄서에게 저지르고 싶었던 모든 것을―그러나 검시관이 전시한 꿈의 논리에는 어긋나지 않게―유지하거나 보수하고 싶었는데. 꿈의 붕괴. 풍선 강아지는 분명 습성에 따라 꽃가루를 헤집고 그 안에서 헬륨 간식 찾기 놀이를 했다. 그사이 너는 검시관 몰래 딥웹에 접속한다. 가끔 화면은 네 불안한 마음을 이해했는지 껌벅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풍선 강아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어요. 그건 풍선 강아지를 개량하거나 그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마련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요. 그러나 너는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 사람. 늘 아무도 모르게 미래를 찾아오는 사람. 해변은 알로하 댄서가 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댄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숙달해야 할까요. 너는 오랜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들이 알로하 댄서가 될 수 없음을 알았어요. 니하우섬은 싱클레어*가 지은 섬. 싱클레어는 로빈스를 낳았대. 로빈스는 당연히 로빈스를 낳았고, 로빈스가 낳은 어떤 로맨스는 그들의 조상인 싱클레어를 기리며 꽃가루를 뿌렸대. 꽃가루는 짐짓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싱클레어가 로빈스를 창시했던 것처럼 온 땅에, 유수풀에, 껌벅이는 모니터에, 해변에 모인 많은 알로하 댄서(실패 예정) 지망생의 치마폭에, 그러니까 올림픽 때문에 우리나라에 비둘기가 많이 사는 것처럼 말이야. 봄이 오고 봄이 가고 봄이 오고 봄이 가는 정동 알로하 댄서 지망생들은 바다를 향해 달렸다. 너는 손을 뻗어 그들에게 가지 말라고 망연히 소리쳤다. 시스템은 우리가 최초에 상상한 첫 번째 버전을 자동 릴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네가 당황한 사이에 나는 풍선 강아지를 놓친다. 풍선 강아지는 난바다를 향해 두둥실 다시 암전. 우리는 어둠 속에서 손을 휘젓는다. 봉이 손끝에 닿는다. 끈적하고 아름다운 봉 위로 꽃가루가 덕지덕지 붙는다. 폭죽 터지는 소리. 그리고 우리가 시험하지 못한 유일한 미래로부터

  • 최필립
  • 2026-08-01
잠 못 이루는 밤

잠 못 이루는 밤 최재원 알집서 깨어난 새끼 모기 새끼 엄마는 아빠는 피 빠느라 바빠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데 왜 어떻게 지도 피 빨 생각을 했는지 여름밤 꽃향기 여기까지 나는데 꽃 대신 피 향기 홀려 헤매는 새끼 모기 꿀도 안 만들어 꽃가루도 안 전해 줘 피만 빨아 먹는 모기 새끼 꿈아 얼른 와서 깨워 가라 나를

  • 최재원
  • 2026-08-01
지지 못하는 별

지지 못하는 별 최재원 자러 갈 때도 아직 깨 있고 일어날 때도 벌써 깨 있고 언제 자? 여덟 시간은 자야 머리 잘 돌아가고 몸도 건강하다며 할머니가 내 생일날 닭을 잡았다 도망칠 땐 꼬끼오 잘만 떠들더니 목을 비틀자 똥만 싸 놓고 죽었다 닭은 닭이었다 닭고기가 되었다 뼈에 붙은 살이 젤로 맛있다면서 살만 통째 발라 준다 나도 그럼 뼈만 빨아 먹고 싶은데 별은 나이를 많이 먹었다 별은 머리가 희게 세었다 별은 깜깜한 데서 일한다 별은 가끔 깜빡깜빡한다 별은 내내 불을 밝히다가 아침을 안치고 그때 졌다

  • 최재원
  • 2026-08-01
새장이 텅텅, 꿈속이 텅텅

새장이 텅텅, 꿈속이 텅텅 최동은 꿈속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잡아 가두었다. 죽은 새. 눈 먼 새. 내가 기른 새. 남이 버린 새. 주인 몰래 도망친 새. 날아가지 않는 새. 물에 빠진 새. 창문으로 날아든 새. 종일 제자리를 빙빙 도는 새. 울지 않는 새. 새장 속에 새들은 저희끼리 싸운다. 저희끼리 잘 논다. 서로 날개를 물어뜯다 뽀뽀를 한다. 머리를 콕콕 쪼고 푸드덕 푸드덕 도망칠 구멍을 찾고. 한 마리 새가 고속버스를 타고 떠났다. 한 마리 새가 우산을 쓰고 나갔다. 한 마리 새가 비자나무 숲으로 날아갔다. 한 마리 새가 아파트 꼭대기를 둥글게 돌았다. 한 마리 새가 냇물을 건너갔다. 한 마리 새가 자전거를 타고 애인을 찾아갔다. 텅 빈 새장을 안고 잠들었다. 두통이 잠들었다. 울음소리가 잠들었다. 멍든 발가락이 잠들었다. 잠이 텅 비었다. 꿈속이 텅 비었다.

  • 최동은
  • 2026-08-01
산당화 필 때

산당화 필 때 최동은 애인은 나를 업고 발끝은 들고 발끝은 들고 징검다리 건너 보리밭으로 가며 겁먹은 내게 “새끼 종달이 한 마리 잡아줄게” 귓속말을 하고 그 말 엿들은 어미 종달새 종달 종달 이 종달 …?…? 애인 이름 부르며 아래로 두 번 위로 두 번 날갯짓하며 날아가고 우리는 공연히 쓰러진 보리 일으켜 세우느라 달빛도 없는 밤을 홀딱 새웠네

  • 최동은
  • 2026-08-01
일몰

일몰 이주빈 시간 흐르는 너의 시간과 뿔 그리고 저마다의 잣대 냉소 추락 추락 추락 이후의 이후의 이후에도 이후를 사진으로 남기지 말 것 눈으로 눈을 절대 붙잡아낼 것 왜 기다리고만 있는 것인가?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비교적 들떠있지만 오 주여! 맙소사 네가 물건들을 던져버리는 것을 본다 나 역시 내가 가진 문제들을 너무 쉽게 던져버린다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 그저 네 곁이라면, 내일이 있을 것만 같다 어떤 사실은 견딜 수 없이 가려웠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고 벚나무 보고 까치 보고 신발 보고 말을 내뱉고 숨을 내쉬고 입을 닫고 입을 열고 하모니카를 불고 입을 열고 눈을 맞추며, 너의 힘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품이 많이 드는 일 신문 속엔 죄다 겁쟁이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싸운다 싸웠다 싸웠으며 싸워왔으며 이긴다 입과 입을 이긴다 입의 입과 진실 진실 그냥 뛰어 지금 당장이라도 말이다 너의 하루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너의 입들을 입들 안의 일몰을 너의 미소 일몰 머리 부수며 걷지 않는다 한다 너를 사랑한다

  • 이주빈
  • 2026-08-01
소문내 1956

소문내 1956 이주빈 남자 비평가에겐 개밥쉰내가 대학생답게도 이 부분에선 미지근한 콜라처럼 아프리카 아이스잭 그건 내가 십 년 동안 피운 담배이다 모두에게 읽힐 거라면 나는 처음부터 시를 선택하지 않았다 엄지랑 새끼 걸고 예를 들어 excuse는 변명에 관한 단어이다 excuse me는 나를 예외로 해달라는 뜻이다 실례합니다 실례할 짓을 왜 합니까 규범 외의 것입니:다 발각되기를 원하는가?ㅋ 당신은 발각될 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텅 비어있으므로 죽은 새를 부탁할게 글쎄 이봐 친구 나는 자네가 지난 밤 무슨 일을 벌였는지 과녁이 큽니까? 그 위에서 신나게 탭댄스 kick 업계 평가 ㅈ 오해 마시길 :) 지저귀다 입니다 노력해봤지 노력해봤 자지 물론 누구누구 후장 빨 바에 그 후장 양 갈래로 찢고 장렬하게 전사 너넨 그냥 이걸 전사 차례를 기다려봐 주인공은 네가 아니야 내 성질 알잖아 이 모든 건 허구임을 밝힙니다 알지? 아닌가? Crack

  • 이주빈
  • 2026-08-01
제인

제인 이자켓 그는 동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롱하게 앞면과 뒷면이 다르게 빛남을 재차 확인하며 그 확인을 유보하며 보유한 몽롱의 앞면과 뒷면이 재차 겹쳐 짐을 안고 옹구 잃고 소매가 그를 진정시키는 동안 빛남을 재차 확인하며 차의 뒷맛이 개운치 않음을 말해주려 했다 너무 오래 끓였다고 너무 오래 나무 아래서

  • 이자켓
  • 2026-08-01

염 이자켓 긴긴밤 그대는 긴긴밤 부정하고 나는 구부정히 콩을 센다 서리태 병아리콩 긴긴밤 백태 긴긴밤 속 그대 긴긴밤과 부정하고 소금 바위에 앉아 혀를 건진다 나는 구부정히 묵은 셈을 가늠한다 달밤아 날밤아 녹두야 겨자씨 신발장 쓸어두고 현관문 좁게 열면 밤과 막역하여 바투 앉아 한 바람 쐰다 바람은 나를 태우고 피우지 않은 것을 보이고 콩알을 그리는 선은 크다 향이 태우지 않은 향이 휘두르듯 닿은 발소리가 입이 트여 서리태 병아리콩 긴긴밤 백태 목이 메어 긴긴밤 그대 앞니 반절만큼 턱을 열고 내 등 업으러 오는데 부리가 물들었다고 한다

  • 이자켓
  • 2026-08-01
그 선물

그 선물 김유림 Ⅰ 문을 열 때부터 그것은 선물이었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너에겐 선물이었다. 너는 그 선물을 너무나도 귀중하게 여겨서 늘 그 안에서 살았다. 나도 같은 곳에서 살았지만 그것을 너만큼 귀중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래서 그 선물은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내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 선물 안에서 사는 너를 보았고, 너의 몸을 자주 만졌다. (손을 들어 만져보자.) 너의 몸은 분명히 그 선물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 선물 안에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더 이상 그 선물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그 선물의 일부로서의 너의 몸은 말라 있었다. 만지면 부스러질 것만 같아서 쉽게 만지지 못했다. 만지기 위해서는 흰 장갑을 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만 할 것 같았다. 당연히 너는 화를 내겠지만……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너의 몸을 만졌다. 그것 은 너무 말라있었다. 어떤 부스러기 같은 게 떨어질 거 같았다. 그것을 주운 뒤 뭉쳐서 다시 네 몸에 붙여야 할 거 같았다. 그 선물 안에 사는 사람 즐거운 사람 행복한 사람 나는 그 사람(인 너)에게 다가가 키스했다. 볼에는 그래도 적당히 온기가 있어서 만지기 좋았고, 입술을 대기도 좋았다. 둘 중 무엇을 해줄까요? 나는 너에게 물었고, 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그 입술은 그러나 너의 입술이기도 했고, 나의 입술이기도 했다. 나는 나의 볼을 너의 입술에 가져다 댈 수도 있었고, 나의 입술을 너의 볼에 가져다 댈 수도 있었다. 나는 헷갈렸다. 둘 중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키스했다. 그런 것이 키스인 것인지도 몰랐다. Ⅱ 나는 그래,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전부 담아두기 위해. 입술이 귀라면 입술에. 귀가 입술이라면 귀에. Ⅲ 이제는 그 선물이 한 겹 벗겨진 것만 같았다. 그걸 줍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어디일까? Ⅳ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걸을 수 있었을 텐데. 밖으로 나와서는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안에는 들어간 적이 없는 것 같았고, 너와 사랑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살아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서로 엉켜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 자체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 뿐이지. 그 사실을 부인하려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그 사실―을 주머니에 넣고 옷깃을 세웠다. 그래도 안으로 바람이 들이쳤다.

  • 김유림
  • 2026-08-01
그 선물

그 선물 김유림 그러나 그 선물은 여전히 그 방 안에 있었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내가 있는 곳이 그 방과 무척 먼 곳이었음에도 그랬다. 나는 일어나 (그게 어디에 놓인 것이든지 소파이기만 하다면) 소파로 다가갔는데, 소파에서 그 선물을 풀어 보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가느다란 연결이 있었고, 그 연결이 그 소파의 탁한 색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매듭을 풀기만 한다면, 어디서든 너에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 김유림
  • 2026-08-01
팔도열차

팔도열차 김려 그는 냄새를 맡는 데 귀신이었다 칠판을 지우고 돌아온 밤에도 손등에 묻은 분필가루에서 없는 남자의 체취를 먼저 찾아냈다 낮 동안 수없이 많은 정답을 가르쳤지만 집에 오면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답안지는 늘 찢어졌다 어느 날 그가 칼을 든 채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지금 죽여버린다 그러자 입에서 굴러 나왔다 팔도열차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자고 했다 우리는 밤거리를 걸었다 불 꺼진 타로 점집을 지나 쇼윈도 속 매달린 별자리들이 천천히 목을 돌리는 것 같았다 불 밝힌 해장국집 김 서린 창문 너머 사람들은 저마다 무사한 얼굴로 국을 떠먹고 있었다 그는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남자에게 나를 아느냐고 물었다 없었다 없는데도 한 사람은 찾고 다른 이는 찾는 척했다 가로등이 눈을 감은 사이 아이 손을 잡고 도망쳤다 그림자가 떨어질 때까지 달렸다 전화번호를 버리고 주소를 버리고 봄도 버렸다 그 열차는 지금 어느 밤을 지나고 있을까 폐역 같은 목소리가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막차가 지나갔다 나는 손등을 털었다 분필가루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 김려
  • 2026-08-01
읽지 않음

읽지 않음 김려 새의 배를 오래 보고 싶다며 A는 저수지 마을로 들어갔다 지도의 물가마다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만 A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늘 서른 번째 메일을 보냈다 내일은 A의 생일이다 수화기에서는 발신음만 오래 살아남았다 새벽 네 시, 싱크대에서 저수지 물소리가 났다 청첩장을 들고 B에게서 도망쳤다 결혼식 사진 속에서 나는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겨울이 오자 B의 이름을 검색창에 쳤다 백스페이스를 오래 누르는 밤이 많았다 생일마다 자정이 되면 B는 가장 먼저 메일을 보냈다 생일이 지나도 메일은 오지 않았다 신호음이 길게 울리는 공중전화 셔터가 내려진 사무실 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모르는 동안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다 나는 물가 쪽으로 걸어갔다

  • 김려
  • 2026-08-01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Die Schildkröte und der Tiger 거북이와 호랑이

[레지던시 일기] Die Schildkröte und der Tiger 거북이와 호랑이 ― 한국에서 ‘레지던스 작가’로 보낸 4주의 시간 하인츠 야니쉬 (번역 김서정) I. 존중받는 느낌. 한국에서 보낸 4주간(2026년 3월 28일부터 4월 24일까지)을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이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받은 대접,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정성, 나의 책과 문학 작업에 대한 존중. 내 책들(원서와 한국어 번역본)은 남이섬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그림책 홀이나 서울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물 진열장에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 모두 내 책을 잘 알고 있더군요. 희한하게도, 내 책의 글과 그림에 대한 명확하고도 박학한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희한하게도, 그림책의 언어와 그림의 어울림에 대해 아주 꼼꼼하게 인지하고 언급하는 코멘트도 있었습니다. 나는 내 책을 한국에서 낸 출판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책의 어떤 부분은 원본을 살짝 벗어나 새로운 포맷을 입기도 했는데, 그 섬세한 만듦새에 완전히 납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볼프 에를브루흐가 그림을 그린 (한국어본 제목 : )의 한국어본은 원본과 달리 세로가 더 긴 포맷으로 나왔습니다. 책 속의 작은 왕에게 갑자기 더 큰 공간이 주어졌는데, 그게 이야기와 아주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한국에서 머무르는 4주 동안 나는 출판인, 번역자들과(글자 그대로 모두 여성이었지요)(* 역주 : 독일어의 명사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있습니다. 작가는 보통의 경우 남성형 명사와 여성형 명사를 모두 씁니다. ‘대화 상대(남성형)과 대화 상대(여성형)’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출판인과 번역자의 여성형만 쓰고 이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모두 여성인 게 아주 인상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성) 그림책 작가들과 (남성) 그림책 작가들, (여성) 글 작가들과 (남성) 글 작가들과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책을 보여주고, 의견을 주고받고, 책도 주고받았습니다. 친절한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이 ‘책나라’ 사람들은 특별한 책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실히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II.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그쳤던가? 짧은 되돌아봄. 모든 것은 트리에스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24년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바닷가 도시에서 나는 내 문학 작업에 주어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았습니다. 경사스러운 시상식은 말 그대로 경사스러운 잔치가 되었습니다. 16살 난 우리 딸은 “내 생애 최고의 파티”였다고 하더군요. 70개국에서 온 600명 이상의 사람들이 IBBY 총회에 모였습니다. 어린이문학에 대한 사랑 하나로 뭉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었지요. IBBY는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International Board on Books for Young People의 약자입니다.

  • Heinz Janisch
  • 2026-08-01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문학의 곁]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을 때 ― 책 읽는 사회를 위한 서현이 1. ON AIR 스튜디오 출입문에 불이 들어왔다. 붉은색의 ‘ON AIR’ 글씨가 선명하다. 드디어 큐 사인이 떨어지고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났다. 이제 소설 속 단어는 목소리 연기자 성우들을 만나 살아 움직일 것이며 쉼표ㅇ와 숨표는 호흡이 되어 깊이를 더할 것이다. 숨을 쉬기 시작한 문장은 음향효과를 만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고 음악을 만나 날개를 달 것이다.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나면 또 하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사진. KBS 제작 모습 2. 오프닝 혹은 여정의 출발 소설이 라디오 드라마를 만나기까지의 여정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전부터 시작된다. 1년 전부터 작품을 준비하는 경우는 특별히 의미가 있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작가의 탄생 100주년이라든가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 삼일절 특집 같은 기획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별한 기획이 아닌 경우 통상 3~4개월 전부터 준비한다. 라디오 드라마가 만나고 싶은 소설에 제한은 없다. 다만 어려운 점은 존재한다. 만남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 요소는 2차 저작물 저작권료다. KBS 측에서 책정한 저작권료를 상대측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만남은 성사될 수 없다. 라디오 드라마와 소설의 만남을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물은 다시 듣기(=다운로드)다. 다시 듣기도 넓은 의미에서 저작권에 포함이 되겠지만 다시듣기만을 제한하는 곳도 있다. 이 경우 최대한 조정해 보지만 불발되면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는 만날 수 없다. 3.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의 주파수 맞추기 라디오 드라마의 주파수와 잘 맞는 소설은 어떤 작품일까? 주파수를 궁합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 사이에 궁합이라는 게 존재할까? 당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궁합이 잘 맞는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간단하게 정리하면 ‘소설을 읽었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서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다. 소설가들은 반문할지 모른다. ‘소설 문장은 서술과 묘사로 이뤄져 모든 상황을 그림으로 그릴 수는 없다. 그리고 소설은 책을 덮은 후에도 깊이 사유하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게 소설의 힘이자 매력이다. 더구나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은 의미와 가치보다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경향이 뚜렷했고 그 결과 기발한 방법으로 형상화하는 소설들도 대거 발표되었다. 다양화된 소설 중에는 읽는 즉시 이해가 되는 작품도 있지만 두세 번 읽어야 하는 작품도 있다. 그런데 라디오 드라마 청취자들은 방송을 듣는 동시에 그림그리기를 원하고 듣는 즉시 이해하기를 원한다. 바로 그 차이, 읽는 소설과 듣는 라디오 드라마 주파수의 차이를 맞추는 게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방송 글의 기본은 구어체이면서 쉬워야 한다. 방송 진행자들이 하는 말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간혹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있을 때 진행자는

  • 서현이
  • 2026-08-01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당장 주워 쓸 수 있는 견출지가, 이름과 이름 사이 틈에 떨어져 있었다면 ― 동시대 문학 존재론에 관한 재고 오웅진 이언 보고스트는 아마존 사이트에 게재되었던 하나의 책 리뷰를 통해 비평이라는 행위의 본성에 관하여 질문한다.1) 그 리뷰어의 견해에 따르자면 지젝이라는 이름의 이 평론가는 자신의 책 제목을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2)로 결정하는 과정에 있어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평론가가 이 책을 통해 비평의 주제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혹은 단지 비평 행위 자체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 혼동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젝은 세상의 많은 현상들을 소급적(retroactive) 인과 관계로서 진단하는데 이는 라캉의 일부 시선을 빌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레이엄 하먼은 지젝의 이러한 소급적 인과성이 지나치게 인간 지각에 제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모파상이 아직 세상에 도착하지도 않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혹은 그것의 태도를 예상하여 표절한다는3) 식의 환상(적인, 그러나 환상을 통해서만 능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 곳곳의 풍경)은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쓸모를 지닌다. 인간이 파악하거나 감각할 수 없는 형태의 시공간에 관한 문학의 응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것에 이미 많은 문학이 자신만의 언어로 대답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다수의 시도 속에서 특히 평론이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객체로 잴 수 있는 것, 잴 수 없는 것 메이야수는 FHS(Fiction Hors-Science)라고 직접 이름 붙인 특정한 문학 장르를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SF소설과는 구별되는, ‘과학의 바깥 세계에 관한 소설’을 뜻하며 그는 FHS 소설의 대표적인 예시로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을 언급한다. 소설에선 전기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된 내용과 설정으로부터 메이야수는 SF 이상의 문학적, 그리고 존재론적 시도를 본다. 하지만 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네, 젊은 친구. 그것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거야. 우리는 무로 돌아갈 거라네. (…) 하지만 갑자기 모든 게 변해서 설탕이 써지고, 납이 가벼워지고, 돌을 놓았을 때 돌이 떨어지는 대신 날아가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4) 사변은 형이상학과 구분된다. 형이상학이 대상들 사이의 고저(高低)를 정렬하는 작업이라면 사변은 차라리 현재보다 더 큰 규모의 ‘보편·일반’을 회복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지향하는 운동(impetus)이 완전 다르지만 지금-여기라는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비슷한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면서도 좀 더 작은 이름, 보다 더 작은 이름(보다 더 작은…)을 향해 먼저 달려가 깃발 꽂는

  • 오웅진
  • 2026-08-01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미워하는 만큼 사랑하기 - 예소연과 주디스 버틀러를 읽으며1) 박상현 1. 사랑할 수밖에 걔가 뭐가 그렇게 좋아? 여사가 물었을 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해. 그러자 현구 아저씨가 다른 점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충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다른 점도 분명 있었다.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애였다, 이해신은.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조금 더 어른스럽고 규칙 같은 것이 그나마 존재하며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어느 정도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하라는 압박이 주어지는 그런 세계. (「너의 나쁜 무리」, p. 95-6) 그 순간 나는 여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상상을 했고 그건 어떤 최초의 결심과 영영 실패할 다짐과도 같았다. (「너의 나쁜 무리」, p. 112) “그런 세계”에 대한 이 고집스런 애착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우리에겐 ‘보통의 삶’에 대한 많은 서사적 자원이 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 반대편의 삶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험생활에 열중하다가 남부럽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고, 스펙 쌓기와 연애를 잘 병행하다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어느덧 자신도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라는 기대로 연상되는 보통의 삶에 한편,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정작 자신이 왜 그토록 이런 삶에 집착하는지 ‘보통의 인간’이 되기를 염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아주 사소한 시절」, p. 71)던 이들에게 이 애착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 번쯤 보통의 삶이 주는 환희를 만끽해보았느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너의 나쁜 무리」, p. 94) 한다는 사실 뿐이다. 보통의 삶에 대한 이들의 애착은 정말이지 막연한 것이다.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자신의 손녀(‘나’)에게 은밀하고 사소한 연애사들을 훌훌 털어놓고, 당신은 아쉬울 게 없는 것 같다며 손녀에게 개평을 준 남자친구(‘현구 아저씨’)의 뺨을 때리는 ‘여사’는 누가 보아도 보통의 인간이 되기는 글러 먹었다. 차라리 아주 난잡하고 무람없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방식”(p. 110)이라고 정당화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좀처럼 보통의 삶에 대한 애착을 거두질 못한다. “나(=여사)는 그러지 않고 살기가 힘들어.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고

  • 박상현
  • 2026-08-01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3) 이은지 1. 마음의 신체화 무목적적인 ‘제작’에 경사될 수밖에 없는 기술(기계)의 한계를 인간이 ‘실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기술의 삶이 함께 나아가는 전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소환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을 견인하는 수단인 기술(techne)에 대해서는 “참된 이성이 수반하는 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1)으로, 실천을 견인하는 수단인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서는 “인간의 좋음과 관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2)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제작과 실천의 수단이 모두 “마음가짐”으로 정의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음’이 아닌 ‘마음가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의도하는 마음의 상태에 부합하게끔 처신하는 것으로서, 행위이자 태도를 가리킨다. 즉 마음가짐이란 특정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몸가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제작과 실천을 위한 수단을 발휘하는 일이란 제작하거나 실천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몸의 상태를 갖추는 일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맨 처음의 글에서 은둔을 바탕으로 한 마루야마 겐지의 창작론이 “몸과 마음의 균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3)을 확인했었다. 또한 푸코가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신체를 단련하거나 글 쓰는 훈련과 같은 반복적인 연마를 통해 ‘자기 제작’의 실천에 도달하는 ‘자기 수련(askêsis)’을 강조했던 것을 살펴보았었다. 두 사례는 제작과 실천이 몸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전 글에서는 외부의 입력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체계’로서의 기계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의식을 형성하는 ‘닫힌 체계’로서의 인간과의 접속을 통해 함께 변화하는 피드백 관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었다. 이때 이 순환 관계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4) 의식이란 인간이 환경과 자신의 관계를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도 언제나 몸의 접촉, 몸의 작용이 선행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은 환경과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생겨나는 과정이다. 마음은 신체화된 경험적 과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있는 것이다.”5) 마음과 정서, 느낌 등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해당 학문이 태동한 이래로 “마음을 컴퓨터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처리하는 체계”6)로 본 기

  • 이은지
  • 2026-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