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호
- 작성일 2026-07-01
- 댓글수 0
[7월호를 열며]
얼마 전 김애란 작가의 인터뷰 방송을 보았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그중 인간에겐 있고 AI에게는 없는 것으로 ‘망설임’을 말한 것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유려한 조언을 건네지 못하고 주저하고 침묵하는 인간의 배려와 품위, 그 모습을 짚어주신 것도요.
요즘은 독자분과 만나는 자리에 가면 한 번씩 꼭 AI와 문학에 관한 말을 듣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AI가 뛰어난 창작 능력을 갖추게 되면 창작자의 입지가 위축되지는 않을지 우려하는 분도 있고, 그럼에도 인간의 개성적인 언어는 쉽게 대체될 수 없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AI와 창작을 둘러싼 열띤 논의와는 별개로 AI는 이미 일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AI에게 식물을 잘 키우는 방법을 묻고, 간단한 문서 작업에 필요한 도움을 받기도 하며, 때로는 가까운 친구에게도 꺼내지 못하는 속엣말을 털어놓곤 합니다. 반면에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답변을 내놓는 AI를 경계하며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있고요. 당연한 말이지만, AI를 대하는 시선이 저마다 다르기에 AI를 활용한 창작에 관한 문제도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번 문장웹진 7월호 편집위원 기획에서는 ‘AI와 문학’를 주제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 AI를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과 태도를 조망합니다. AI를 사이에 두고 어느 한쪽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창작과 기술이 만나는 자리를 고민해 보며 새롭게 이야기 나누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을 함께 따라가며 기술과 인간 사이에 놓인 가능성과 물음을 살펴봐 주시길 바랍니다.
ㅡ 정다연 시인 외 문장웹진 편집위원 일동
2026년 7월호 <어쩌면 아주 오랜 질문> ⓒ 정김소리
7월호 표지 그림 작가의 말
“사람과 도구의 낡고도 새로운 동행.
그 끝에서 우리는 무슨 카드를 뒤집게 될까.”
문장웹진 2026년 7월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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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작가 |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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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김호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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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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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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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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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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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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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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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
나일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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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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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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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이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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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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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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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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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다시읽기 |
김진선 |
[연재]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2017년 8월호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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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 <AI와 문학> |
곽재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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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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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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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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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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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곁 |
이세옥 |
문학/텍스트가 등장하는 여섯 가지 기획 ― 웹진 《비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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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일기 |
최영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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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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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전 참관기 |
정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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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7월호 살펴보기
[도서전 참관기] 제1회 서울제대로도서전, 또 하나의 작은 책 축제를 만나다 정대훈 프롤로그 서울국제도서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오늘 또 하나의 도서전을 찾았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최근 출판계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새로운 시도라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현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행사장에 도착한 시간은 개장 약 30~40분 전. 예상했던 것처럼 행사장은 한산했다. 몇 년 전 서울국제도서전이 지금처럼 대규모 축제로 자리 잡기 전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드문드문 모여 있었고,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도서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 노들섬에 도착했을 때. 서울국제도서전의 여운을 안고 또 하나의 책 축제를 찾아왔다. 맑은 하늘만큼이나 오늘은 조금 여유로운 도서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개장 전 풍경. 아직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오래전 서울국제도서전이 지금처럼 북적이기 전, 그 시절의 익숙한 풍경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느긋하게 책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운 책의 열기 개장과 동시에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행사장 규모는 서울국제도서전의 대형 부스 몇 개를 합친 정도에 불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게다가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가지 않았다. 부스마다 멈춰 서서 책을 펼쳐 보고, 출판사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이동했다. 덕분에 행사장의 동선은 한참 느렸지만, 그만큼 책을 중심으로 한 시간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족 단위 관람객과 어린이를 동반한 방문객도 많았고, 조선대학교 학생들의 단체 관람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어린이책과 그림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출판사 부스의 분위기였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젊은 직원들이 운영하는 부스를 많이 볼 수 있었다면, 이곳에서는 작은 출판사의 대표나 편집장이 직접 독자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책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더 깊게 이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 불과 몇 분 만에 달라진 풍경. 조금 전까지 한산했던 공간은 개장 시간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긴 대기 줄로 바뀌었다. ‘오늘은 여유롭게 둘러보겠구나’ 했던 기대는 이때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던 내부. 공간은 크지 않았지만, 출판사와 독자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발걸음은 느렸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책 위에 머물러 있었다. 도서전의 또 다른 즐거움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이번에도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조선대학교 양경언 문학평론가였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그랬지만, 도서전은 책만 만나는 공간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업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묻고, 짧은 대화 속에서 새로운 소식도 듣게 된다. 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다시 연결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 정대훈
- 2026-07-01
[도서전 참관기] 2026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와서 정대훈 1. 다리가 아팠다, 그런데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다리가 아팠다. 서울국제도서전에 들어선 지 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분명 책을 보러 왔는데 이상하게 계속 걷고만 있었다. 한 부스를 보고 나오면 또 다른 부스가 나타났고, 저쪽에 사람이 몰려 있어, 가보면 또 다른 줄이 있었다. 잠시 앉아 쉬고 싶었다. 그런데 앉을 곳이 없었다. 커피 한잔 마시며 오늘 본 풍경들을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행사장 안 카페는 이미 만석이었다. 결국 사람들이 선택한 곳은 전시장 한쪽 벽과 통로였다. 누군가는 가방을 베개 삼아 쉬고 있었고, 누군가는 오늘 받은 전단과 굿즈를 정리하고 있었다. 책은 느린 매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며 머무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 그런데 책 축제에 온 사람들은 멈추지 못하고 계속 걷고 있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한 것은 아무도 쉽게 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와, 너무 많다. 어디부터 봐야 하지?” “아 힘들다.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데 자리도 없네.” 힘들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다시 다음 부스를 향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책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 이상한 모순에서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을 바라보는 질문이 시작됐다. 2.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 책을 사러 온 사람들일까, 그냥 책 곁에 있고 싶은 사람들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사람들이었다. 특히 젊은 여성 관람객들이 많았다. 20대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방문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행사장 곳곳을 누볐다. 그런데 조금 걷다 보면 묘한 장면이 보였다. 길게 늘어선 줄. 그런데 그 줄 끝에는 늘 책이 있지는 않았다. “여기 줄 서 있는 거예요?” “이벤트 참여하시려면 저쪽 끝부터 서셔야 해요.” 사람들은 이벤트를 기다렸다. 한정 굿즈를 찾았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 상품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책 축제인데 책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처음에는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런데 행사장을 오래 걷다 보니 조금 다른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들은 책을 영영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책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아닐까. 과거에 비해 지금의 독자는 조금 복잡하다. 좋아하는 출판사의 세계관을 소비하고, 책 주변의 귀엽고 탐스러운 물건들을 소유하고, 작가와 연결되는 어떤 새로운 경험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한다. 책은 목적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출입구가 되고 있었다. 3. 가장 작은 공간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 — 어쩌면 독립 출판이 보여준 취향의 힘? 첫날. 흥미로운 것은 크고 화려한 부스에만 사람들이 몰렸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파가 가장 천천히 움직였던 공간 중
- 정대훈
- 2026-07-01
[레지던시 일기 – 협성마리나 G7] 공허 view 정용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하지 않기’였다. 뭘 하려는 노력은 그만두고 뭘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일찍 일어나는 것. 까다로운 연락을 주고받는 것. 확인하고 결정하고 결심하는 것. 크고 작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 사느라 바빴다. 어떤 이유로, 혹은 이유도 모른 채, 분주했다. 급한 일에 시달렸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처리하려 들었고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정작 소중한 일이나 가치 있는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뒤로 미루었다. 이상하다. 의미 있는 일은 안 하고(못하고) 무가치한 일에 온 힘을 다하는 삶이라니. 살기와 쓰기는 겨룰 수 없다. 둘은 체급이 다르다. 쓰기는 살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살기의 눈치를 봐야 쓰기는 존재할 수 있다. 살기가 자리를 비우거나 잠이 들어야 비로소 초원에 나올 수 있는 약하고 약한 쓰기. 일상의 사각에 숨어 읽고 쓰는 것. 그것도 대단하지만, 그만큼 소중하지만, 때로는 생각한다. 삶의 운동장 전체를 다 사용해서 쓰면 얼마나 좋을까. 페소아가 그랬듯이 온종일 허구의 존재들하고만 놀면 얼마나 좋을까. 두려움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몇 개로 가능하다면 수십 개로 분화해서 모두에게 삶을 허락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과 공상으로 사면을 채워 그 안에서 영원해지고 무한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협성마리나 G7 39층 숙소. 그곳을 떠올리면 차가운 2월의 허공이 느껴진다. 커다란 창밖으로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 1,200대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주차장. 창문에 이마를 대고 멍하니 그것들을 봤다. 그렇게 있는 것이 좋았다. 허공에 떠서 아래를 바라보는 3인칭 화자의 기분은 이렇겠지. 높은 고도와 그만큼 텅 빈 풍경. 이따금 새가 날고 몇 차례 비가 내리는 것 외엔 언제나 비어 있던 저 허공. 거기에 눈을 두고 오래 있으면 곧 공허해졌다. 나는 그 풍경을 미술관의 그림처럼 응시했고 그 작품의 이름을 ‘공허 view’라고 지었다. ‘공허’의 정의가 궁금해서 사전에서 찾아봤다. 내부 감정이 황폐해지고 환상과 소망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하지 못하거나 단순히 기계적인 반응만을 보이는 주관적인 정신 상태. 이런 상태에서 개인은 확신, 열성, 타인들과의 연결됨을 상실하고 무감각, 권태 그리고 피상적인 감정에 시달린다. 대부분의 설명과 표현에 동의하지만 ‘황폐’, ‘기계적인 반응’, ‘시달린다’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내부 감정의 구조와 지탱하고 있는 것들이 무너질 수는 있다. 무너질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을 황폐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청소를 하려고 물건을 빼놓은 빈방을, 새 물을 채우려고 물을 다 뺀 수영장을, 더럽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그 ‘뷰’는 공허했
- 정용준
- 2026-07-01
듀엣 조우리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그날부터 시작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말이에요.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이니까, 난 열여덟이었고 그 애는 열일곱이었죠. 따지고 보면 고작 몇 달 터울일 뿐이긴 해도 엄연히 내가 언니거든요. 그 애는 끝까지 한 번도 날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지만요. 왜 그랬을까. 아마 우리 사이가 정말 자매처럼 가까워지는 것만은 원치 않았던 모양이지요. 어쩌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몰라요. 원래의 내 성격이라면 깍듯이 예의를 차리라고 한 소리 했을 거거든요. 그런데 왜인지 그 애에게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내 어깨에 손을 올려도 그냥 그러도록 내버려 두게 되었으니까. 그날, 장 선생님이 서울역으로 직접 마중을 나가서는 가회동 우리집으로 그 애를 데려왔지요. 그 애를 처음 본 순간 난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어요.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오만하게도 그때까지 난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태어나 한 번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란 없었지요. 누구나 날 보면 예쁘다고 칭찬하기 일쑤에, 내 스스로 느끼기에 제법 똑똑하기도 했으니까요. 노래야 두말할 것도 없고, 춤도 물론이고요. 그래서 장 선생님이 내가 혼자서는 데뷔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도무지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내가 어디가 못나고 무엇이 부족해? 왜 혼자서 무대에 서지 못한다는 거야?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장 선생님 앞에서는 말도 못 꺼내고는 밤새 뒤척이면서 혼자 속앓이만 해댔거든요. 그런데 그 애를 보니까 알겠는 거예요. 나에게 부족한 건 바로 저 애였구나. 그러니 이젠 됐다. 다 됐어. 안심이 다 되더라고요. 나중에 이야기해 주었죠. 난 네가 있으니 됐다고. 난 너만 필요하다고. 우리의 첫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이었어요. 아뇨. 그 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어지간히 긴장을 했던 모양이죠. 그저 내 손을 한번 꽉 쥐고 말더군요. 아주 세게.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그 애가 들어오던 순간이 생생해요. 한여름이었지요. 날이 무더워서 마당에서 기르던 화초들이 축축 처지니까 살림을 봐주던 순천댁 아주머니가 사방에 찬물을 끼얹고 있었거든요. 순천댁 아주머니는 부지런하긴 해도 손끝이 야무진 편은 아니에요. 화단과 화분에만 조심히 물을 뿌리는 게 아니고 숫제 사방에 던져대듯 하니 마당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는데, 먼저 들어온 장 선생님이 철퍽 소리가 나게 물웅덩이를 밟고는 새로 맞춘 모시 양복이 다 상하게 생겼다며 투덜거렸더랬죠. 그러거나 말거나 순천댁 아주머니는 계속 물을 뿌려대고 그 바람에 마당 한구석엔 작은 무지개가 피어났어요. 난 대청마루에 앉아 킥킥 웃기만 했지요. 아마 수박도 먹고 있었나. 그때까진 장 선생님한테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었으니까,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퍽 재미났죠.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몰랐거든요. 들어와. 누가 또 와요? 내가 이야기했잖아. 수희는 솔로가 아니라 듀엣을 해야 한다고. 무슨 시스터즈니 하는 거, 정말로 하신 말씀이었어요?
- 조우리
- 2026-07-01
굳은 모양을 보면 정미래 여상길 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새가 그냥 새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참새라거나, 아니면 그냥 어떤 새. 그런데 여상길 씨가 대뜸 직박구리네요, 했다. “네? 직박구리요?” “작년 봄인가. 웬 새 한 마리가 요 안으로 휙 들어오더니 안 나가고 버티더라고요.” 여상길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마우스를 딸깍거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그의 모니터를 보았는데, 바탕화면에 무언가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가 기계적으로 새 폴더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우지, 오목눈이, 동고비… 내 시선은 아랑곳없이 그는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 ‘새 폴더(N)’를 클릭했다. 공교롭게도 직박구리라는 이름의 폴더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두 가지 생각에 잠겼다. 이 황량한 오피스 빌딩 안에서 그 텃새가 대체 뭘 먹고 1년 넘게 연명했나. 그리고 여상길 씨는 어떻게 그게 직박구리라는 걸 알았나. 조류학자도 아니면서. 설마 매일 저렇게 새 폴더를 만드는 것도 다 조류의 학명을 외우기 위한 학습 활동의 일환이었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그 새가 어느 층 타일 위에 배를 깔고 퍼져 있는 걸 목격했다. 영락없이 죽은 것 같았지.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명복을 빈다, 직박구리. 속으로 삼가 조의를 표하려던 찰나 녀석이 꽁지깃을 살그머니 털었다. ✹ 몇 해 전, 내가 맡고 있던 슈팅 게임의 한 맵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벌어진 적이 있다. 공들여 설계된 전장, 그 살풍경을 평화로이 가로지르던 비둘기. 그 사이에서 누군가 찾아낸 것이다. 지면에 내려앉은 비둘기를 밟으면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을. 제 몸집의 몇 배나 되는 유저의 캐릭터를 등에 태우고— 버그였다. 하지만 유저들은 그걸 전략으로 삼았다. 새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시야를 확보했다. 멀리 있는 적들을 탕! 탕! 신나게 쏴 죽였다. 버그가 패치된 날, 개발팀에선 그 폐허에 ‘새를 밟지 마시오!’라는 벽보를 곳곳에 붙였다. 누구에겐 빤하게 잘못된 오류가 또 누구에게 가서는 더없이 괜찮은 전술이 되었던 순간. 나는 그때 세상일이란 게 참 모호하고, 또 그래서 이상하게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경한 감각에 휩싸였더랬다. 나는 새삼스럽게 ‘오픈캠프’를 휘— 둘러보았다. 아무 일 없이 주 40시간을 버티는 것. 그것이 이곳, 오픈캠프의 최종 퀘스트였다. 열린 야영지라니. 듣기에는 그럴듯했다.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 같기도 한 게. 하지만 사실은 권고사직이 난무하는, 구조조정과 생존 사이의 막간 스테이지일 따름이었고… 오픈캠프로 발령이 난 넉 달 전에. 인사팀의 안내에 따라 변경된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가장 먼저 보인 건 누군가의 휑한 정수리였다. 포니테일로 묶인 머리카락이 그의 고갯짓에 따라 애처롭게 달랑거렸다. 보아하니 사내 네임드 여상길 씨였다. 이미 한
- 정미래
- 2026-07-01
Midnight Coffee Club 나일선 광학적 미디어의 역사는 사라짐의 역사이고 그것이 이제 내게도 사라질 자유를 주고 있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찾는 사람에겐 보여, 목소리, 믿고 있기 때문에 들려, 쓰는 일보다 더 하고 싶었던 건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일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써야 했고 자신이 만들어낸 목소리와 대화하는 것, 그런 걸 소설이라 불렀지.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현실과는 점점 멀어져 어느 순간 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 사람과 만날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건 그 갈망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너무 열심히 찾았기에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건지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함께 지내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다 말해야만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자신의 전부가 되어주길 바라거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것 같아. 그게 우리가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었으니까.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과 같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우리가 만나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라고 말하는 순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더 이상 살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 이제 네가 내 앞에 있었고 우린 함께 있으니까, 모두가 포기한 질문들 앞에서 목소리는 내게 말했지. 더는 아무것도 찾지 않아서 들려, 더는 믿지 않기에 보여, 모든 감정이 다 지나가고 난 자리에 언제나 내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잃어버릴수록 무언가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고, 어디서든 혼자일 수 있었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연결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아, 듣는 방법을 몰랐기에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내게 말해주었지. 오랫동안 서로를 생각한다는 건 연결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어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RB의 소설에서 이런 부분은 꼭 나를 위한 것 같다. 읽고 있으면 항상 그와 커피를 마시거나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꼭 RB가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라도. 그에겐 소설이 있었고 나에겐 무엇이 있나? 나중에 보니 노이도 나와 같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쯤 봤을 때 노이는 패밀리 레스토랑 윙키스에서 RB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나를, 극장에서 청소를 하는 나를, 주크박스를 차에 싣는 나를, 묘지 근처를 산책하는 나를, Noodle Express에서 팟타이를 포장하는 나를 봤다고 했다. 그중 어디까지가 나였을까, 나도 모르는 내가 노이의 기억 속에는 있었고 그런 게 좋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가 어쩌면 더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전에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 노이를 본 적이 있고 그때는 이름도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언젠가 노이와 대화를 하게 될 날이 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노이는 RB의 소설이 좋
- 나일선
- 2026-07-01
유품 한명원 집에 낡은 호미 하나가 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뿌리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시골 밭으로 향한다 마을 입구에 흰 수건이 나풀거리고 집들이 물방울무늬의 몸빼 바지처럼 보인다 겨우내 딱딱해진 땅을 톡톡 두드리면 쩍쩍 갈라졌다 솎아내고 씨를 뿌리다 잡초가 자라면 한 손에 잡초를 뿌리째 뽑아 어깨를 들썩이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꼬불꼬불한 이랑을 호미가 만지면 곡식은 잘 자랐다 곡식마다 습성이 달라 여름 내내 호미는 쉴 수가 없었다 잡초의 뿌리를 향한 집착은 손에 힘을 빼고 리듬을 타야 하기에 목소리가 쉴 때까지 노랫가락이 밭고랑에 머물렀다 호미 끝에서 계절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이제는 노을 속으로 사라진 호미 밭에는 키 큰 잡초만 무성하다 봄이 되면 나는 호미 닦는 버릇이 생겼다 내 머릿속 잡초를 뽑고 솎아내고 북 두드리며
- 한명원
- 2026-07-01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곽재식 인터넷에 누가 “자동차 엔진오일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엔진오일에 정말 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다고 해 보자. 이런 덧글을 달면서 기대하는 것은 엔진오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동차 수리 일을 하는 사람이나 엔진오일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담아 써 주는 대답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오래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들이 각자의 엔진오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엔진오일 우습게 보다가 저는 큰코다친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 비슷한 답을 기대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기대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공유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이라는 종족이 원시 시대 때부터 갖고 있던 아주 오래된 습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동안 이런 덧글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챗GPT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더군요.”라고 자기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본 내용을 복사해서 덧글로 붙여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덧글에 엔진오일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써 두어서 열심히 읽어 보았는데 다 읽어 갈 때쯤 보니까 맨 마지막에 “이상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본 결과입니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덧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거의 모든 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도대체 이런 덧글은 왜 달리는 걸까? 질문을 했던 나는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물어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덧글은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달린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 대규모 언어모델, 즉 LLM 방식으로 운영되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결과를 받아 본 뒤에 그 결과를 남들과 같이 공유해 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정에서 나온 동기는 조롱받을 이유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계각층에서 LLM 방식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다른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요즘 그렇게 유행이라고 하는 최신 첨단기술인 인공지능을 내가 이렇게나 잘 이용해서 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나는 요즘 뭐든 인공지능에게 물어봐. 너무 편하고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다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사회가 탄생할 거라는 이야기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매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는 거창한 환상마저 슬그머니 서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앞서갈 거라는 환상이다. 지금 치열한 경쟁
- 곽재식
- 2026-07-01
[문장웹진 다시 읽기]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2017년 8월호 수록) 김진선 어느 강의 시간,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면을 소개해 주셨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날 이후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에는 《문장웹진》이 빠지지 않고 있다. 햇수로 17년, 매달 1일이면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접했다. 나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보니 아닌 일이다. 맞다, 이것은 고해성사. 나의 죄를 고합니다. 나는 장르 편식이 있어서 시를 제외한 소설, 비평, 기획 등은 대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장웹진 다시 읽기’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다시 읽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마주한 글을 여러 번 살피고,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침내 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작은 2017년 8월호에 수록된 조연정의 이라는 비평이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한 비평만큼은 피하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죗값을 달게 받는 거 같다. 이 글은 윤이형 소설가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 고민하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 문학적 재현,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에서 《문장웹진》 2017년 4월호에 수록된 조강석의 에 의문을 표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먼저, 윤이형 소설가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밑줄은 인용자 강조)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은 왜일까. 이 질문들은 의무(‘써야만’), 제약(‘안 되는’), 판단(‘비판적인’), 자기인식(
- 김진선
- 2026-07-01
[레지던시 일기 – 협성마리나 G7] 바다는 당신의 우연 최영건 유리병 편지가 밀려오는 모래와 물, 소금과 손가락의 순간을, 당신은 떠올린 적 있으신지요? 사실 이 장면은 내게 퍽 익숙합니다. ‘동물의 숲’ 게임에 매일 찾아오는 순간이거든요. 게임 속에서 우리의 일과는 바다로부터 편지를 받는 것입니다. 열어보기 귀찮아 슬쩍 지나칠 만큼 꾸준히, 매일의 약속으로요. 부산에서 내게는 유리병은 없었지만 유리창은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그날의 윤슬로 바다가 일렁이던 창이요. 사실 이 말에는 약간의 거짓, 내가 알게 된 약간의 참이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윤슬은 매일 보이지 않아요. 저는 이걸 이번 레지던시 생활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물비늘’이라고도 불리는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해요. 그러나 어느 날은 바다에 반짝임이 없습니다. 어느 날은 흐려서 어두워진 바다, 묵직해진 바다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침마다 내가 본 것은 그날의 일렁임이지 그날의 반짝임은 아닙니다. 다만 얼어붙지 않은 바다에, 일렁임은 매일 있습니다. 그것만큼은 분명해요. 유리창으로 내가 본 것은 다만 매일이었습니다. 레지던시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약속을 지키듯 창밖을 보았어요. 그리고 매일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니지, 이것도 실은 약간 거짓입니다. 한 주에 하루이틀 정도는 안에만 머물렀어요. 소파에서 책을 읽다 보면 낮은 금세 저녁이 되었습니다. 부산역 근처엔 마침 배달비 무료 이벤트 중인 가게들도 꽤 있었어요. 어느 날엔 정말이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으며 책을 읽고, 그러다 씻고 잠을 잤습니다. 다만 그런 날에도 바다를 보았습니다. 내가 본 먼 곳의 다른 바다들과 이곳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월은 내게 지난해 머물렀던 군산의 작업실을 정리한 달이기도 했어요. 한 해를 다 살기는커녕 한 계절을 살기도 전인데, 한 해 계획이 다 세워져 버렸거든요. 계획이 나보다 먼저 한 해를 삽니다. 당신도 그렇겠지요. 계획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 우리이지만 우리가 아닌 사람, 우리보다 먼저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루에 두어 번 아침저녁으로 일기를 써요. 아침에 쓰는 일기는 계획표에 가깝습니다. 나보다 먼저 하루를 사는 그 사람의 어렴풋한 모습이 To-Do List로 쓰여 있습니다. 저녁에 그 사람은 다시 내가 되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여러 번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일기라는 글도 그래요. 당신은 일기를 쓰는 사람인가요? 4월이 되면서 한 해의 계획을 거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와 달리 작업실에서 지낼 시간이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고, 월세를 아끼려면 계약을 해지해야 했죠. 운 좋게도 생각보다 더 빠르게 계약을 이어 받아줄 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아주 조금 섭섭해질 만큼 빠르게요. 월세를 아낄 걸 생각하면 안도감이 들었지만요. 4월 레지던시 창으로 부산 바다를 내다보며 나는 아마도 내가 다시 보지 못할 군산
- 최영건
- 2026-07-01
굴러간다 한명원 어린 神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잠에서 깨어 자전거를 타고 젖은 음이 들리는 곳으로 달립니다 수많은 발자국 위를 바퀴는 굴러갑니다 골목도 굴러가고 지평선으로 달도 굴러갑니다 빈 벤치를 휘어서 돌자, 오르막이 보입니다 엉덩이를 들고 발에 더욱 힘을 주며 올라갑니다 마치 아르테미스 2호처럼 저 달의 궤도를 굴러가고 있는 적막을 어둠은 끌고 가겠죠 저수지 위, 안개가 밀려옵니다 물의 억양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감아가며 전진합니다 같은 자리를 몇 바퀴째 돌고 있으면 눈이 커지고 귀가 커집니다 발밑 노란 창포가 달을 삼켰다가 토해내는 소리가 들립니다 풀잎 위로 이슬이 떨어져 세상이 잠시 깨졌다가 다시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입니다 내리막길은 바퀴가 저절로 움직입니다 펄럭이는 옷자락보다 마음이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낯선 세계를 심벌즈 두드리듯 달리면 몸이 팽팽해집니다 바람이 옷을 헝클고 들어옵니다 고여 있던 녹슨 음이 방향을 찾아갑니다 길 잃은 어린 神은 어디쯤 있는 걸까요 구름 사이로 태양이 굴러갑니다 빛 위로 바퀴가 굴러갑니다
- 한명원
- 2026-07-01
[문학의 곁] 문학/텍스트가 등장하는 여섯 가지 기획 ― 웹진 《비유》 기획‧운영자가 소개하는, 문학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들(@webzineview) 이세옥 이 글은 일을 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여러 문을 여닫으며 장소들에 드나들고, 밥을 먹고 쓰레기를 버리며 사는 한 생활인의 삶에, 문학 텍스트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살펴본다.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길러진 환경과 현재의 활동을 단편적으로 기록해보는 글이기도 하다. 예술과 문학은 세계에서 가치 있는 위치를 점하면서도, 사실 시급한 이슈에 해당되지 않는 편이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처음 말을 꺼낼 때는 보통 압축적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썼다. 주민센터 한켠 작은 책장 어릴 때 살던 동네 주민센터에는 작은 책장이 두어 개가 있었다. 집에서 가깝고 생활 반경 내에서 손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에 있는 그야말로 ‘작은 도서관’이었다. 여러 종류의 책들이 어떤 일관된 취향을 파악하기 어렵게 꽂혀 있었는데, 그중 문학상 수상작들이 많았다. 토니 모리슨과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작들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종종 그 책장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돌이켜보면, 문학상이라는 제도가, 수상작이라는 선택이, 주민센터 한켠을 경유해서 청소년 시절 나의 독서목록을 구성했다. 이는 공공 인프라와 문학 제도가 연결되는 방식이다. 공공 도서관이 충분하지 않던 시기, 주민센터나 작은 도서관 같은 생활권 내 독서 공간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돌이켜보면, 문학 텍스트는 시장만이 아니라 행정과 복지 체계를 통해서도 유통되어 왔다. 읽기와 쓰기 훈련의 학교 학부 학업 과정 중에 내가 한 것은 텍스트를 읽는 훈련인 것 같다. 영문학과에서 시와 소설 그리고 희곡 등을 촘촘히 읽던 시기였다. 문장별, 단락별, 챕터별로 읽어가며 전체 작품을 조망하는 시점 이동을 학습했다. 가령 흔하지 않은 각종 식물명까지 찾아서 읽으며, 가까이서 텍스트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단어의 선택, 문장의 리듬과 속도, 단락의 호흡 같은 것들을 읽다가, 다시 텍스트의 맥락을 살펴보기도 했다.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언제 출판되었는지, 어떤 독자를 향하고 부르는지, 이 글은 어떤 제도를 기반으로 완성되었는지, 그리고 생략된 부분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난 특정 주제에 따른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그걸 바탕으로 창작하는 수업에도 참여했다. 그중 소설가 최윤 교수님의 성평등 글쓰기 워크숍 수업이 내게 오랜 기간 기준점이 되어주었다. 그 워크숍은 내가 창작 글쓰기를 자유롭게 전개해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공유할 수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기술적인 부분들을 연습하기보다는 내게 보이는 세상을 글로 쓰는 데 필요한 태도를 다질 수 있었다. 실제로는 자기 폭로에 가까운, 표현 자체에 치우친 짤막한 글들을 쓰고 공유했지만, 이 워크숍이 끝난 한참 뒤까지 내게 이 모임은 창작 자체가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과정이라는 것을 배운 경험으로 남
- 이세옥
- 2026-07-01
자괴감 한기옥 우리 동네 치과의사 P는 친절하지 않다 어디 불편하세요? 짧게 묻고 말하지 않는다 본 떠온 이가 맞지 않는다고 굼뜨다고 치위생사에게 수시로 눈 치켜뜰 때면 매몰찬데 환자가 넘친다 내가 이제껏 봤다고 말한 건 보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고 안다고 믿었던 건 가짜일까 모호하고 어려워 안개 들어찰 즈음이면 쥐어짜듯 아 아 아 아 아..... 한 마디 던지고 말문에 대못을 박는다 나는 이제껏 알던 말들을 지우고 오롯이 P의 한 음절에 기대어 낯선 꿈인 듯한 곳을 헤매다 나오게 되는데 그때마다 내가 천근만근 아파 여기 왔었던가요? P가 만져준 이는 달라 여기 온다는 그들처럼 개운함과 안도감과 충만함에 빠진다 나도 선물처럼 뭔가 주고 싶어서 시집을 만지작거리다가 아 아 아 아 아..... 누구든 읽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P의 한 음절 같은 시 들어있나? 그런 시 한 편 얻을 날 올까? 생각에 이르면 다 쳐내야 할 말 잔칫집 같아서 내려놓게 된다는 걸 그는 모를 거다
- 한기옥
- 2026-07-01
시를 모른다는 사람 한기옥 웃을 때 새의 눈이 되는 남자 이마 위에 가을 새 열 마리쯤 기르는 남자 새 모이 사러가면 문조 안부를 묻거나 새가 탈 없이 자라게 하는 비밀 꾹꾹 눌러 담으며 벙글거리는 남자 대낮부터 술 푸는 날 잦아 옆집 사람이 손님을 맞기도 하는데 기다리다 보면 막막한 새의 얼굴로 앵무새 앞에 가 중얼거리다 어린애가 되는 남자 마누라랑 아들하고 헤어진 지 오래야요 새 파는 일로 먹고 산 지는 50년 됐죠 풍물 장 그의 가게 들러 돌아오는 날이면 늙은 새 한 마리 내 방에 따라와 밤늦도록 어둠 밀어 올린다 시요? 난 잘 몰라요 내 몸에서 새를 빼 내버리면 무너질 거예요 새가 나가버린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는 온 방 안을 돌며 종을 치듯 새 이야길 들려주는데 나는 내가 시 쓰는 사람이 맞는지 시에 대해 뭘 알기나 했던 건지 끝없이 물어보면서 캄캄해지는 것이다
- 한기옥
- 2026-07-01
화물택배 옥빈 기계부품 주문이 제주도 거래처에서 전화기 벨소리를 탔다 부품을 신문지로 포장하여 폐상자에 넣고, 알사탕 서너 개 거래명세표와 함께 동봉해 보냈다 알사탕, 바다를 건너 달달한 마음 정박하리라 며칠 뒤 뜬금없이 귤 한 상자가 택배로 왔다 쇠밥 먹고 사는 세상 찬 바람 부는 날 많지만, 위로가 뭐 별건가 달달함에 새콤함을 보태 온 크고 작은 귤들이 도란도란 가슴을 적신다 전화기에 짠한 귤향기를 태웠다
- 옥빈
- 2026-07-01
고물 옥빈 사무실 뒤 지하주차장에 허리춤 높이로 백관을 사각으로 용접하여 분리수거대를 만들어 놓았다 비닐, 플라스틱, 캔 3종의 폐자재 이름을 인쇄하여 코팅해 타이밴드로 매달았다 옆 가게와 십 년이 넘도록 함께 사용하며 달그락거리고 있다 늘 허기를 채우는 분리수거함에 작은 손수레를 끌고 억새꽃 머리를 한 할머니가 다녀가기 시작했다 캔만 가져가는 손수레가 짊어진 하루는 이미 찌그러지고 구겨졌다 수분이 비워진 가벼운 몸, 깡통 소리 들썩거리며 적막으로 가고 있다 캔 구역의 비닐봉지는 사흘이 멀다고 비워졌다 나는 캔을 더 바짝 찌그러트렸다
- 옥빈
- 2026-07-01
하우스 오브 피스 안지은 우리가 나눈 대화 사이에 홀로 남은 나는 오래도록 배회합니다. 버리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를 보며 당신은 내게 말했죠. 구름이 부딪혀서 멍이 들면 먹구름이 된대요. 당신은 가죽을 뒤집어쓴 나무 같아요. 내가 보는 당신은 한 그루이지만, 가죽나무의 뿌리는 땅속에서 끝을 모르고 퍼져나가거든요. 옆으로, 옆으로. 버려진 땅에서 더 잘 자라는 나무. 나는 옆이 두려워요. 옆은 자꾸 나를 붙드니까 순환선만 타는 버릇. 손잡이를 잡지 않고 흔들리는 진동에 몸을 맡겨도, 무섭습니다. 순환하는 열차에도 종착지가 있다는 게. 나는 당겨야 열리는 문을 항상 밀어 보는 사람인데, 열차의 문은 언제나 미닫이. 영원히 한 방향으로 열리는 문. 영원 앞에 나는 자주 체해서, 당신의 문장을 조각냅니다. 조각난 문장을 계단처럼 밟으며 집으로 향해요. 평서형을 쓰지만 물음표가 가득하던 얼굴. 나는 그 표정을 잘 압니다. 나무는 바람이 불면 울거든요. 당신에게는 언제나 울 준비가 된 뿌리가 돋아나잖아요. 먹구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겨울이에요. 찬바람이 불어오면 눈빛으로 마음을 깎는 당신과, 먹구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여름이라고 생각하는 나. 나는 한여름에도 찬바람을 잘 느껴요. 고약한 계절. 뜨거운 혹한기는 믿음으로 견뎌낼 수 있습니다. 왜 제게 대답하지 않냐 물었죠. 신앙은 조용하지만, 영원하진 않아서 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넘어지지 않는 훈련. 쏟는 것은 쉬워도 주워 담는 것은 어려우니까. 내게 대화란 그런 거예요. 집에 가는 길은 길고, 길고, 길어지고, 그사이 무한히 증식하는 조각난 침묵. 집에 도착했음에도 나는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어요. 집에서도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라서, 내 방 창문에 비친 나와 눈싸움. 나를 붙드는 건 나. 환기가 필요합니다. 창문을 열면 쏟아지는 진눈깨비와 벽을 뚫고 번식하는 뿌리. 징그러운 평화.
- 안지은
- 2026-07-01
사랑에도 얼굴이 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안지은 노을 지는 강변을 걷는다 각자의 보폭으로 네가 한 발짝 걸을 때 나는 두 발짝 걸어야 해 함께 걷고 싶으니까 기꺼이 두 발짝 너와 나는 애인이지만 우리가 될 수 없고 평온한 너와 숨이 차오르는 나 벤치에 좀 앉을래? 앉는 것은 나 혼자 너는 내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본다 너와 눈을 맞추며 숨을 고르는데 샐쭉 웃는 너 왜 웃어? 너 따라 한 건데 널 바라볼 때의 내 표정을 나는 모르니까 네가 내 표정을 따라 해도 그것은 너의 것 강변에는 뛰는 사람들이 많고 내게 등을 돌려 어딘가를 응시하는 너 너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어 그게 바라보는 사람의 특권이니까 해가 질 때 가장 길어지는 그림자 너는 신발 끈을 묶다 나를 흘깃 보고선 안녕 짧은 인사 인사는 내게 그림자를 남기고 너는 안녕히 달린다 그림자를 뒤를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모르는 나의 표정은 너의 것 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걷는다 너는 내가 끝끝내 알지 못하는 나의 표정을 알고 있을까 달리는 사람은 너인데 여전히 숨이 가쁜 건 나 나에게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여서 두 눈을 감는다 맹신은 얼마나 허약한지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면 나는 감은 눈으로도 울 줄 아는 사람
- 안지은
- 2026-07-01
우아 신혜정 발음할 때 혀끝은 온순해진다 새 떼가 갈라놓은 하늘 그 공기의 밀도 사이 잠깐 하릴없어지는 허공의 시간 밤하늘 은하수가 갈라놓은 하늘 서두르지 않는 나무와 성급하지 않은 새와 조급함 없는 해 변함없는 별들의 운행 속 혀끝을 가만히 내려놓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이 말은 또 얼마나 우아한지
- 신혜정
- 2026-07-01
시간의 심연1) 신혜정 여기, 사방이 닫힌 세계 입이 무거운 것들이 있다 안으로 언어를 가두고 긴 침묵이 키워낸 것들 찢기고 패이고 갈라지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흔적 사이로 입을 퇴화시킨 것들 영원이라 불러도 좋을까 신들의 시간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 같은 우리는 모두 느슨히 엮였거나 엉킨 존재 멀리서도 보일 것이다 천천히 달리는 기차 안에서 같은 속도로 멀어지던 기억 자꾸만 따라붙던 단단하게 뭉쳐진 채 그리고 입을 열면 벽, 벽일 것이다 목구멍 가득 돌덩이가 박힐 것이다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뭉쳐 하나의 존재로, 결국 사라진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1) 18세기 말 존 플레이페어가 스코틀랜드 ‘식카 포인트’에서의 지질학적 발견 앞에서 남긴 말. 그 발견이 현대 지질학의 ‘Deep Time’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 신혜정
- 2026-07-01
제주도 이슬 마종기 얼마 전 한 열흘 제주도에 머물 때 눈을 반짝이며 노래하는 이슬들을 만났지. 몸통이 보통보다 작기는 했지만 누구를 기다리면서 안 기다리는 척하는 일찍 잠이 깬 그 눈들이 얼마나 반갑던지. 그 섬에는 내가 아는 친구가 많아서 그런가, 음악가도 있고 시인도 있고 죽은 화가도 있는데 이슬 때문에 깨끗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이슬 때문에 젖은 삶을 여미며 살고 있는 것인지 모두들 바람 속의 큰 바다처럼 살고 있었다. (중국의 삼오역기에는 1만 8천 년을 잠만 자다가 깨어난 반고의 눈물이 바로 이슬이라는데 자기 몸을 죽여 세상을 만들었다는 반고는 왜 세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울었을까.) (뉴질랜드에서는 생시에 눈치 보여 울지 못하던 아버지가 죽어서 자식 위해 밤새우는 눈물이 이슬이라는데. 그 이슬들 너무 많아 풀밭의 고사리가 모두 나무로 자라 숲이 되었다는데….) (그리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죽은 아들을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이 또 이슬. 이슬이 누군가의 눈물이라는 것은 전부터 알았지만 저 많은 제주도 이슬은 도대체 누구의 눈물이란 말인가.) 아침이 활짝 피어나기도 전에 도망가듯 말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슬이여, 이슬 앞에서 내 시는 할 말을 다 잊었지만 그건 원래 혼자서 떠돌던 내 피였고 꿈이었어. 힘들었던 일 어려웠던 시간 모두 지났다지만 그래도 눈물이 끝까지 나를 이끌어주기를. 더러워진 평생을 당신의 이슬이 늘 씻어주기를.
- 마종기
- 2026-07-01
간절한 안부 마종기 요즈음도 잘 지내지? 건강하게 나들이도 자주 하고? 오랜만에 보내는 안부 메일에 답장이 당장 오면 반갑지만 어떤 친구는 한동안 소식이 없어 이 친구 게을러졌나, 할 수 없이 다시 메일을 보낸다, 어째 말이 없냐? 잘 지내지? 소식 알려라. 그래도 한 열흘 또 소식이 없으면 그때는 별안간 상황이 달라진다. 다시 메일 보내기가 망설여진다. 외면하고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나이 탓이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자꾸 겁이 나려고 한다. 행여 많이 아픈 건 아닌지 힘든 사정이 생긴 건 아닌지 몇 자리 남지 않은 내 친구, 그래, 메일도 보낼 필요 없으니 그냥 탈 없이 잘만 살아다오. 연락을 못한다 해도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래, 그래도 좋으니까 그저, 제발.
- 마종기
- 2026-07-01
이세계(異世界) 김호애 우리 샴쌍둥이 하자 등을 맞댄 모양 말고 바라보고 안은 모양으로 해달라고 조르는 연인과 사랑이면 까짓것 무엇이든 되어줄 수 있지 이 세계 안에서 팔 아래 팔 배꼽 아래 배꼽 정강이 길이는 다르지만 왜인지 무릎이 맞닿는 느낌 빗장을 걸면 여기까지가 나의 땅 나의 몸 나의 손은 밥을 짓고 야채를 써는 너의 손 잘린 단면은 같은 색을 띤다 칼날에 비친 너와 나처럼 공유한 숟가락에 담긴 푹 익은 주말 네가 꼭꼭 씹어 삼키는 걸 바라보면 꿈틀 들썩이기 시작하는 건 내 소화기관이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건 이런 기분이로군 배 두드리고 있으면 빼꼼 고개 내민 네가 말하지 우리 이제 분리할까? 세계를 다 덮을 만큼 커다란 이불을 덮고 홀쭉한 낮잠을 잔다 자고 깨도 여전히 한낮 네 등에 새겨진 흉터는 접혔던 자국 같네 내 것과는 다른 모양을 구경하다가 갈라졌던 살갗이 아물기 전에 다른 방향으로 뒤엉킬 준비 2는 가장 작은 불가촉수* 만질 수 없는 숫자래 둘은 다시 하나로 그렇게 하나 하나 둘 쪼개졌던 두 낮의 끝 한밤이 올 때까지 *) Untouchable number. 수학자 에르되시 팔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 자연수의 진약수의 합으로 도달할 수 없는 수.
- 김호애
- 2026-07-01
귀신 부르기 김호애 오늘 밤에도 귀신을 불러야지 밤은 길고 달은 마침 가려졌고 혼자 잠들기는 싫으니까 계속해서 오싹 하고 싶으니까 오싹은 수축 오싹은 움츠러듦 오싹은 얄팍한 잠옷 오싹은 사각사각 오싹은 비밀 오싹은 아무도 모르게 종이도 아닌데 반으로 접히는 몸과 눈앞에서 활짝 벌어지는 열 개의 발가락 어제 만난 귀신이 알려준 대로 화분에서 아무 잎사귀 한 장 뜯어 쫙쫙 이파리 찢으면서 여기 여기 붙어라 너도 여기 붙어라 엄지 치켜들고 노래 부르면 마침내 바람이 불어온다 내 바람을 들어주려고 왔구나 이불을 들추었더니 곡선으로 휘어지는 바람결 풋내나는 빈 손 텅 빈 밤을 노크하는 단 하나의 손가락
- 김호애
- 2026-07-01
사라짐을 위한 유희 —황유원론1) 오경진 그는 불안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을 사랑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불안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밤의 해변에서 저기, 꿈(夢·몽)과 환상(幻·환)을 물거품(泡·포)과 그림자(影·영)로 새겨넣으려는 시인이 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떠밀리듯 들려온다. 잠깐 여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죽어도 된다 우린 그날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에 앉아 있다가 안전요원들의 눈을 피해 하나둘 밤바다로 뛰어들었지 … 잠들면 안 돼! 우린 여기서 밤새 놀다 가야 하니까 어차피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거다 그 역(逆)이 아니라 … 내가 더 이상 해변에서 잠들지 않으므로 간혹 해변이 내 곁으로 와 쓰러져 잠드는 밤이 있고 그런 밤이면 몰래 자리에서 일어나 어둔 밤의 해변을 홀로 거닐기도 했다 젖은 모래 위에 如, 夢, 幻, 泡, 影 손끝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며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다는 말 또 그림자 같다는 말을 문신처럼 새겨넣었다 우리 조금만 더 죽자 진짜 죽음이 있기 전에 하고 기도하던 밤이 있었다 「여몽환포영」 부분, 『초자연적 3D 프린팅』 “문신”(文身)처럼 새겨넣은 그것은 “어둔 밤의 해변”의 “젖은 모래 위” 하나의 형상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에는 지워지고 사라질 글쓰기. 꿈이 그렇듯, 허깨비가 그렇듯, 물거품이 그렇듯, 그림자가 그렇듯. 어른거리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으로 피어올랐다가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죽음을 삶에 좀 섞어보는” 것. 설령 그것이 진짜 문신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몸은 어차피 스러지는 것, 몰락하는 것, 죽는 것. “진짜 죽음”이 오면 그것 역시 꿈처럼 허깨비처럼 물거품처럼 잊힐 것이다. 그러면 시 쓰기는 다 무엇일까. 저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조차도 결국 망각의 무로 돌아갈 것인데, 그 게송으로 시를 지어봤자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은 “저승처럼 컴컴한” 해변을 거니는 것과 같고, 시 쓰기는 어차피 파도가 들이쳐 지워 없어질 모래 위에 “여몽환포영” 하고 한 자씩 새겨 넣어보는 일이다. 세계의 무상(無常) 속에 스러질 것,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사는 절대적인 무(無)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불안을 사랑하는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불안을 사랑한다. 불안의 포로인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시를 짓는다. 문학을 한다. “불안은 가능성에 앞선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2) 무(無)에서 시작되어 무(無)로 흩어
- 오경진
- 2026-07-01
불운에 대처하는 화자들 배민정 한때 유행했던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는 말은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발생한 ‘불운한 사건들’을 설명하는 가장 흔한 키워드였다. 마음에 드는 이성은 꼭 짝이 있고, 오랜만에 찾은 목욕탕은 정기 휴일이라는 식의 노랫말1)처럼 불운은 개인의 일상 속 ‘재수 없는 우연’에서부터, 갑작스레 발생하는 사회적 재난, 전염병, 범죄까지 아우른다. 이런 예기치 못한 불운을 맞닥뜨렸을 때, 개인이나 집단은 늘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왔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원인을 규정함으로써 고통을 위로받고, 같은 불행이 재발하지 않도록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는 이러한 사건들을 문제화하고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 특정 장치들을 동원한다. 가령 불운의 원인으로 초자연적 힘을 내세워 단숨에 공동체의 균열을 봉합하는 것이 ‘주술’이라면, ‘신정론(神正論)’은 사건의 원인을 사회 구조와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해 집단의 성찰과 개혁을 도모한다. 한편, ‘보험’은 사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피해 손익 측정과 보상 계약을 통해 신속한 사후 처리를 꾀한다.2) 이처럼 정치는 예상치 못한 불운을 관리 가능한 영역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다양한 통치 기술을 활용한다. 서로 다른 해법이 경합하는 정치의 장에서 시스템이 붕괴될지 모른다는 대중의 공포는 통제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또한 제도적 일상 안으로 안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인이 겪는 상실감과 두려움은 어떤 제도적 규범이나 보상금으로도 온전히 메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가 불운한 사건을 공적으로 의미화하여 체제의 정상화를 선언할 때, 문학은 그 수면 아래 방치된 개인의 실존적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정치의 공백과 마주한다. 이 공백 안에서, 크고 작은 불운에 빠진 시적 화자들은 그 불행을 계기 삼아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 구조를 감지하고, 새로운 주체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즉 화자들에게 있어 불운은 역설적으로 체제에 길들여진 존재들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주체화의 과정인 셈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불운의 대처법을 통해 제도화될 수 없는 고통이 시적 언어로 복원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 한 남자가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들어선다.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남자는 그동안 자신이 남들보다 적은 이발비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왜 자신만 만 원을 받느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숱이 없어서 금방 한다고.”(민구, 「거울 속의 신」,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아침달, 2021) 개인의 의지나 노력 바깥에서 마주하는 원치 않는 상황을 ‘불운’이라 한다면, 이 시의 화자는 불운한 사람이 맞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호감 가는 외모 조건 중에 적은 머
- 배민정
- 2026-07-01
이은지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6월부터 2026년 8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포이에시스, 오토포이에시스, 심포이에시스 (2) 이은지 1. 인간됨의 성찰에서 자동화된 소외로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인간됨을 기술 환경과의 연관 속에서 조정하며 견인해왔다. 타자기 이전에, 손글씨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도구이자 기술이었던 언어의 발생에서부터 그러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가 1772년 발표한 논문 는 당대 철학계의 주류 담론이었던 언어의 신적 기원론과 동물적 기원론을 모두 부정하며 신과도 동물과도 무관한 인간 고유의 성질로부터 언어가 유래했음을 증명한다.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유전적으로 고정된 본능을 발현하며 살아가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그러한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본능이 결핍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각인된 본능의 맹목적인 발현으로 벌집을 짓는 벌이나 거미줄을 치는 거미와 달리 인간은 “동물의 기술적인 능력에 뒤처져” 있기에 오히려 “자신을 비추어 볼 영역을 찾을 수 있고, 자신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된다.”1) 종의 본능에 따른 반응이 아닌, 각각의 고유한 개체가 세계에 대해 갖는 느낌을 표현하고 또 표상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언어를 탄생시킨다. 자기 외부의 대상을 식별하고, 사물과 사물을 구분 짓고, 이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여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자아의 경계를 확정하고 그러한 자아로 이루어진 타자와의 집단적, 사회적 교류를 형성하며 그로부터 습득한 것들을 세대를 이어 전수함으로써 인간은 더욱 인간이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하여 발현되는 이러한 인간됨의 사슬은 동물적 본능과 달리 고정되지 않는다. “구분을 많이 짓고 그것들을 서로 정돈할수록 그의 언어는 더 정돈”2)되며, “언어의 지속적인 형성” 속에서 “삶의 모든 상태는 성찰을 통해 발전적인 통일체가 된다.”3) 즉 인간에 의해 발명된 언어가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을 거듭 새롭게 발전시키며 인간의 일부이자 핵심적인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할수록 인간의 인간됨이 발전하는 한편, 언어 또한 고도화된다. “모든 기술은 생성에 관련”4)된다고 했을 때 이는 언제나 기술 자신에도 해당한다. 기술은 자신이 투여된 대상 혹은 영역에서의 생성과 더불어 기술 자신에서의 생성 또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무한히 순환하며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기술과 그 기술을 적용시키는 인간 사이에는 하나의 복잡한 피드백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의식은 변화된 기술을 요청하고, 변화된 기술은 그 의식을 변화시킨다.&r
- 이은지
- 2026-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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