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호
- 작성일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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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를 열며]
지난봄, 담양의 한 도서관에서 시민분들과 함께 한 달 동안 김혜순 시인의 『공중의 복화술』을 읽었습니다. 참석자분들의 열의와 시에 대한 사랑 무엇보다 김혜순의 시 세계에 대해 나눈 대화와 감응의 순간이 지금까지 제 마음 한편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당시 함께 읽었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복화술을 메타포로 하는 중요한 세계시의 한 사례로 선보인 시입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원전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전해질지 모르겠습니다.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복화술
시아위 (번역: 윤재민)
방을 잘못 찾아온 나는
자신의 결혼식을 놓쳐버렸다.
벽에 있는 유일한 틈새 사이로, 내가 보는데
모든 진행은 완벽하다. 그는 하얀 셔츠를 입고
그녀는 꽃을 움켜쥔, 의식,
맹세, 입맞춤
따위를 짊어질…… 운명, 나는 고통스레 복화술을 연마할 따름이다
(혀 그 한 마리의 수생수(水生獸)
그곳을 길들여라
조그마한 어항 안에서
꿈틀대는)
그 짐승이 말하길…… 예, 동의합니다.
腹語術
夏宇
我走錯房間
錯過了自己的婚禮。
再牆壁唯一的隙縫中,我看見
一切行進之完好。他穿白的外衣
她捧著花,儀式,
許諾,親吻
背著它. . 命運,我苦苦練就的腹語術
(舌頭那匹溫暖的水獸 馴養地
在小小的水族箱中 蠕動)
那獸說. . 是的,我願意。
대만 현대 시인 시아위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복화술」입니다. 알 수 없는 기이한 공간에 당도한 시적 화자가 자기 결혼식을 놓쳐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한한 일이죠. 결혼식은 순조로이 진행되고 시적 화자는 이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네요. 이상한 상황입니다. 나 아닌 누군가가 내 결혼식에 참여해 성혼의식에 참여합니다. 그러다 반전이 일어나죠. 갑자기 시적 화자가 ‘어렵사리 복화술을 연마한다’라고 되뇝니다. 복화술은 복식으로 발성하여 목소리의 출처(화자)를 은폐하는 기법이죠. 여기서 시적 긴장이 일어납니다. 결혼식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엄숙한 예식에 복화술이라니. ‘방을 잘못 찾아온 시적 화자’는 대체 어떤 생각으로 결혼식에 임하고 있는 걸까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위의 시적 화자처럼 ‘복화술’을 해야 할 상황에 놓입니다. 나의 진짜 감정과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상황에 적절한 말’을 내뱉곤 하죠. 그런 종류의 발언 역시 분명 나에게서 발로한 우리 각자의 ‘목소리’입니다. 하나 때때로 저는 그런 목소리가 도리어 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목소리일까요.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그것 역시 제게서 발로한 저 자신의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로부터 발로한 ‘목소리’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평생을 ‘고통스럽게 복화술 연마하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끝나지 않는 복화술 수련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네요. 자기 ‘목소리’에 대한 책임과 긴장 가운데, 우리는 간신히 한마디씩 내뱉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냅니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각자의 ‘목소리’를 기꺼이 감당하며, 때로 복화술을 감행하면서까지 더불어 이 시대를 살아갑니다. 복화술을 연마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 행운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ㅡ 윤재민 문학평론가 외 문장웹진 편집위원 일동

2026년 9월호 <나 같지 않은 나와의 조우> ⓒ 윤연우
9월호 표지 그림 작가의 말
“이따금 친구에게서 네가 전에 했던 말 “……”을 다시 돌려 들을 때가 있는데,
그 말이 너무 낯설고 내가 아닌 것 같아 부정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나는 오늘 나의 결혼식을 구경했다.
결혼식에서 “예, 동의합니다”라고 말했던 나는 누구일까.”
문장웹진 2026년 9월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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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교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로 3회 연재됩니다. 여자에게 말하게 하라 최선교 김혜순은 2002년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을 시작으로, 2017년 『여성, 시하다』를 거쳐 2019년 『여자짐승아시아하기』, 2026년 『공중의 복화술 : 문학은 어디서 시작할까?』에 이르기까지 여성과 여성시를 대상으로 한 시론을 세워왔다. 명백히 여성과 여성시를 위한 시론이다. 그녀는 여성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는 여성시에 대해서 말한다. 이 진술에 대해 해명하거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없다. 그녀의 시론은 기존의 ‘여성적 글쓰기’ 범주에 속하면서 ‘들림’이나 ‘바리데기’ 등의 동양 무속적 상상력을 통해 개성을 확보한다. 한국에는 ‘여류시’라는 말이 있(었)다. 김혜순은 생물학적 성차 개념에 기반을 둔 ‘여류시’라는 일종의 멸칭으로부터 ‘여성시’의 범주를 구분하려고 했다. 시론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님을, 공중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지만 어떤 순간에는 생생하게 발악하기도 하는 구성적 개념임을 설명하고자 했다. 김혜순의 시는 종종 난해하다거나 초현실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 본인은 그러한 평가가 ‘현실’이나 ‘환상’의 개념을 남성적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현실이 무엇이고, 환상이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나의 시를 초현실이라고 부르는가. 그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곧 여성이 현실이라면?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이 쓴 시, 여성시를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발성기관, 새로운 발성법에 대한 해독이 필요”1)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구체적인 시 형식을 향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2022년 11월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의 개정판을 펴내며 김혜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시는 여성의 형식을 발명한다. 면면히 내려오는 말하기 방법 말고 다른 말하기 방식 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가 여성주의적 발성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는 김혜순이 여성 시론을 적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말하기 방식을 통해 ‘여성시’의 범주를 설계하고자 함을 암시한다. 단지 생물학적 여성에 의한 시가 ‘여성시’가 아니다. 여성이 말하는 시가 바로 ‘여성시’인 것이다. 시 형식에 대한 김혜순의 관심은 1990년대 한국의 ‘여성문학’ 담론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로부터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 문학장에서 ‘여성문학’을 둘러싼 담론들은 그 당시의─대부분 남성이었던─비평가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일 경우에만 미학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김혜순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 시론을 만들
- 최선교
- 2026-09-01
분노의 하나비(花火) ─ 구소현론1) 하혁진 썩은 과일에 사랑을 담아 건네면 신선해진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나. 정말 그런가. ─ 「요술 궁전」 중에서 * 오랜만이다. 이런 소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 한동안 뜸했던 것은 사실이어서, 구소현의 소설을 읽는 내내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잔뜩 화가 난 소설이라니. 이렇게까지 눈치 안 보고 나쁜 소설이라니. 분노의 감정이 차갑게 벼려진 폭력적인 장면들이 설령 보기 좋은 (혹은 보고 싶은) 장면들이 아니더라도 어쩌겠는가. 뒤표지의 표현처럼 그 마음 역시 인간이 가진 ‘진짜’ 마음인 것을. 고백건대 분노가 가득한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것이 불순한 마음임을 알면서도 적지 않은 해방감을 느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우리 소설이 그 화를 지나치게 참고 있다고, 너무 오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튼 구소현의 소설에는 곪을 대로 곪은 마음의 종기를 터뜨리는 것 같은 장면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면. 은호는 피곤한 날에 꼭 꿈을 꿨다. 그녀는 꿈에서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죽였다. 평생 꾼 꿈 중에서 최고로 기분 좋은 꿈이었다. 흉기로 목과 가슴과 배를 수차례 찔렀다. 기어가는 도중에도 계속 뒤쫓아가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안면을 가혹할 정도로 가격했다. 눈알을 터뜨리고 광대뼈와 턱뼈를 으스러뜨렸다. 그 뒤 꿈에서 깨기 이전까지는 사람인지 연체동물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하게 시체를 훼손했다. 누군가 ‘꿈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묻는다면 은호는 어떠한 비난도 감수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324쪽)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곤란하다. 조시 코언은 “우리는 분노하면 종종 공격을 연상하며, 심지어 둘을 혼동하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며, “하지만 공격은 분노와 달리 행동의 범주에 속한다”2)라고 짚어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구소현의 인물들은 느끼고, 행한다. 인용한 장면에서 은호는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을 ‘극악무도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죽인다. 꿈이니까 괜찮다고? 그렇다면 소설은 현실인가 꿈인가. 은호가 말하는 ‘꿈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독자들은 꿈속에 있는가 현실 속에 있는가. 일단은 이렇게 대답해 두자. 끝없는 분노를 생산하고 심지어 부추기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출할 출구는 마땅치 않은 상황, 즉 “분노와 공격의 병목 현상”3)으로부터 이 소설들이 나왔다. 감정은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
- 하혁진
- 2026-09-01
사랑의 여백, 퀴어한 정동의 자리에서 ― 박상영 문학 읽기 황석현 회색빛 갯벌, 우연히 스며든 사랑 박상영의 소설 세계 「대도시의 사랑법」 도입부에는 연인 규호와 연애를 시작한 지 200일이 지난 시점에서 규호가 홀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영의 실수로 규호 홀로 떠나게 된 여행에서 고영은 공항철도 창밖을 바라보다, 감정의 리듬과 직면한다. “나 홀로 공항철도를 탔다. 창밖으로 회색빛 갯벌이 계속 이어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대도시의 사랑법」, 184-185면) 이 짧은 문장은 연인 규호와의 단절 이후의 감정을 '슬픔'이나 '외로움'으로 바로 치환하는 것이 아닌, 반복되는 비어 있음, 스스로를 검열하는 감정적 카메라, 종종 회색빛으로 필름이 씌워진 삶의 프레임으로 보여준다. 고영은 ‘갯벌’ 속에 발이 빠지듯 감정적 침몰을 겪으면서도 공허에 침전되지 않으며 곧이어 감정적 전환을 시도한다. 섹시한 팝가수 카일리 미그노 앨범과 립밤.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립밤을 찾는 행동은 감정을 파국으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한 자기 정동의 능동적 복구 행위이다. 촉촉한 립밤을 바르며 감정의 표면을 다듬는 조심스러운 생존술로 읽을 수 있다. 입술은 말을 시작하는 신체 기관인 동시에 키스·식사·호흡 등 생존과 욕망의 경계 지점이다. 이는 사랑이 머뭇거리는 자리에서 지금 여기 다시 관계의 준비를 하는 미세한 제스처이다. 이는 관계를 살아낸 몸이 감정을 지속하려는 퀴어한 생존술이자 정동적 자기 조율 방식이다. 연인 규호와의 감정적 관계는 기계적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모르게 끝나가 보이지만, 여전히 감정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은 도래하지 않을 듯도 보인다. 이 글은 그러한 지속 불가능한 단일한 감정의 리듬, 끊어졌으나 끝나지 않은 애착, 그리고 삶을 살아내기 위한 감정적 생존술을 퀴어 정동1)의 관점에서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가 보여주는 감정의 구조, 감각과 기억의 귀환, 기쁨의 부재가 어떻게 문학적 윤리로 전환되는지를 추적해본다. 로런 벌랜트는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에서, 우리가 삶을 지속하게 해주는 어떤 대상이나 관계가 오히려 그 삶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적 조건으로 변할 때의 정동 상태를 ‘잔인한 낙관’이라고 설명한다(윤조원·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24). 현대의 주체는 여전히 ‘좋은 삶(good life)’의 약속을 좇지만, 그 약속 자체가 자기착취적 생존을 강화하거나 정서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기도 한다. 박상영 소설 속 고영과 규호의 관계 역시 이러한 양가적 구조 안에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착을 통해 버티고 살아가지만, 그 관계는 사회적 제도와 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점차 유지되기 어려운 형태로 변하며, 그럼에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내부에 잔존한다. 바로
- 황석현
- 2026-09-01
[문학의 곁] 보이지 않는 마음에 물성을 입히는 일 ― 원고를 읽고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북디자이너(@yj.archive) 권예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파주로 향한다. 꼬박 40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은 유난히 나무가 빽빽하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파주출판도시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3평 남짓한 서재 책장 한편에는 유난히 가벼운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미국 페이퍼백이었는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눅눅하고 낯선 냄새가 났다. 그 옆으로는 규칙적으로 꽂힌 만화책들, 어린 손으로는 한 번에 들기도 버거운 역사책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종이 두께와 제본 방식의 차이라는 걸 몰랐다. 그저 어떤 책은 손에 착 감기고, 어떤 책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는 감각만 있었을 뿐이다. 중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친구와 경쟁적으로 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야기만큼이나 표지의 질감이나 판형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무지갯빛이 반사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까슬까슬 사포 같은 질감의 책도 있었다. 그렇게 직접 손끝으로 짚어보며, 책이라는 물성이 주는 낯설고 매력적인 감각을 좋아하는 취향이 생겨났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건, 내 안의 두 다른 감각이 우연히 겹친 순간부터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늘 디자인에 대한 깊은 갈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국어 시간과 미술 시간에만 눈을 반짝거리는 학생이었는데, 그 편식이 성인까지 쭉 이어질 줄이야.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마음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서울북인스티튜트(SBI)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내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매일 가슴이 뛰었다. 문학출판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막내 디자이너에서 팀장이 되기까지, 수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단편적인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막내 디자이너였던 내게 주어진 일은 멋진 프로젝트가 아닌 중쇄 진행과 광고 작업이었고, 자리에는 전원을 켜면 ‘윙-’ 하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형 맥이 놓여 있었다. 중쇄 작업을 하려면 어김없이 그 요란한 전원을 켜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괜히 동료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버튼을 누르곤 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집에서는 틈만 나면 단축키와 툴 사용법을 독학해야 했다.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시절 내 퇴근 후 일상은 낯선 용어와 디자인 프로그램 튜토리얼을 붙잡고 씨름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
- 권예진
- 2026-09-01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호주 도서관의 공간혁신과 문학 생태계를 살펴보다. - 시드니·멜버른 도서관 탐방기 - 김성하(인천광역시교육청중앙도서관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 담당자)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로 선정되어 7박 9일간의 호주 국외연수에 참여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번 연수는 오랜 시간 도서관을 일터이자 삶의 공간으로 삼아온 사서로서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도서관과 문학, 문학과 지역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 생생한 현장을 살펴보는 뜻깊은 여정이었다. 5월 19일 저녁, 인천공항을 출발해 10시간 넘는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 상공에서 마주한 붉은 여명은 긴 비행의 피로를 단숨에 잊게 만들었다. 도착해서 처음 만난 생명체는 현지에서 흔히 ‘쓰레기새'라 부르며 홀대한다는 호주흰따오기, ‘아이비스(Ibis)’였다. 노천카페 주변을 서성이며 사람들이 남긴 빵 조각을 가로채는 녀석들의 모습은 낮선 도시의 첫인상을 도리어 친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어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하버 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마주하니, 비로소 이번 연수가 실감났다. 1. 시드니(Sydney): 전통과 혁신이 어우러진 도서관 문화의 현장 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시드니 작가 축제(Sydney Writers' Festival)가 한창 열리던 5월 21일,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을 찾았다. 1826년에 설립되어 올해로 주 전체 도서관 서비스 개시 200주년을 맞이한 곳이다. 정문의 웅장한 사암 돌기둥이 인상적인 이곳은 1942년에 완공된 고풍스럽고 웅장한 구관 '미첼 빌딩'과 호주 이주 200주년을 기념해 1988년에 지어진 후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마친 '신관'이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한 도서를 열람하는 공간을 넘어 거대한 박물관이자 미술관의 역할의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웅장한 열람실은 벽면 전체를 채운 고서들과 클래식한 목재 책상, 아치형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지적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높은 곳의 책을 꺼낼 수 있도록 연결된 2층 구조의 난간과 계단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어린이도서관은 천장에 책들이 마치 새처럼 날아다니는 듯이 조형물이 매달려 있었고, 독창적인 도서 소개 사인물은 아이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의 자료는 관내열람만 가능하다. 법정 납본 제도에 따라 뉴사우스웨일즈 주에서 출판되는 모든 도서의 원본과 역사적 기록물을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 주립도서관의 핵심 임무이기 때문이다. 분실 위험이 있는 관외대출을 금하고 오직 관내 열람과 연구만을 허용하여 아카이브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었다. 도서관이 운영하는 '펠로우십 프로그램(Fellowship Program)'은 역사학자와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최소 1,000AUD에서 최대 120,000AUD에 이르는 파격적인 창작
- 2026-09-01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30년 만에 만난 호주 김중석(시옷책방 상주작가) “호주라니!” 상주작가 우수시설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기대했던 해외연수의 행선지가 호주라는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전 해에는 유럽으로 다녀왔다고 알고 있었던 터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호주라니. 하지만 연수를 하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 되돌아보는 지금까지도 호주가 너무 좋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여정에 많은 문화공간과 아름다운 자연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고 새로운 창작을 향한 에너지와 영감을 듬뿍 채운 시간이었다. 사실 호주는 30년 전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곳이었다. 그때는 결혼식을 마치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코스를 따라 몇 팀의 신혼부부들과 다녀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딘가에 내리고 밥을 먹고 멋있는 자연을 보며 감탄했지만, 자세한 것은 모두 다 머릿속에서 지워진 상태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기억에 선명한데 또 어디를 갔더라? 캥거루를 만나서 먹이를 주기는 했는데 이제는 어느 동물원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나의 호주는 아주 오래전 앨범을 뒤져야만 나오는 추억 속의 나라였다. 호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이미지는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코알라 그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멋진 공원들 그리고 원주민들의 미술이었다. 그때의 호주와 지금의 호주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기대감을 잔뜩 안고 출발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맑고 청명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제까지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씨였다는데 다행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 ‘날씨요정’이 있었는지 여정 내내 좋은 날씨 덕분에 즐거운 연수를 마칠 수 있었다. 공항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오니 그때의 호주가 조금씩 떠올랐다. 커다란 나무들, 온통 영어로 만들어진 간판들(아주 당연하지만) 익숙함이 밀려왔다. 며칠의 여정 동안 인상 깊었던 몇 개의 장면들을 기억해 본다. 1. 라이온 킹 뮤지컬 시드니에 도착한 첫날. 우리 일정에는 뮤지컬 ‘라이온 킹’이 관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창작자로서 부끄럽지만 뮤지컬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공짜 티켓이 생겨서 다녀온 게 전부였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미 영화로는 보았던 것이니 대충의 스토리는 이해가 되었다. (아! 영어의 벽. 이럴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해둘걸, 이라는 후회) 공연이 시작되기 전 놀라웠던 모습은 극장의 분위기였다. 판매원이 돌아다니며 맥주와 음료와 음식을 팔고 옆 사람과 떠들고 인사하며 사진을 찍고 객석에서 바로 보이는 무대 옆쪽 매점에서 음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공연 전의 풍경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본 것은 무대 미술과 의상이었다. 한정된 무대에서 공간을 변화무쌍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로 이루어졌을까? 무대의 일정 부분은 회전판을 사용하고 어떤 부분은
- 김중석
- 2026-09-01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기다리는 마음 김홍(중화문학도서관 상주작가) 내게 여행은 몇 권의 책으로 남는다. 이번 연수를 떠나는 길에도 트렁크 한켠에 책을 잔뜩 넣었다. 그중에 손이라도 한 번 닿게 되는 책이 몇 권이나 될는지 스스로도 궁금했다. 자기 전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줄여보려고 중고로 구입한 이북리더기에도 도서관 대출 범위가 허락되는 만큼의 책을 잔뜩 다운로드했다. 결론적으로 돌아보면 이번 연수에서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은 사람들로 남았고 나머지 시간은 꽤 많은 책을 읽었다. 정리해 보자면 애나 친의 을 주의 깊게 읽었고, 루리의 을 다 읽었다. 1권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의 책을 두 권 읽었다. 반 정도 남아 있던 을 완독하고 를 시작하고 끝냈다. 이 중 종이책은 이고 나머지는 전부 전자책이었다. 이 과정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낭비가 존재한다. 가방에 넣어 가져간 종이책 5권 중에 실제로 읽은 것은 한 권에 불과했기 때문에 4권의 책만큼의 무게가 바다를 건너는 동안 탄소 발자국은 간데없이 낭비된 셈이고, 가방을 밀고 다니면서 소모된 나의 열량에 관해서도 (적어도 책 4권의 무게만큼은) 최고의 효율을 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에게 더 많은 오차범위가 필요하고, 그걸 이해하고 용납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하고, 공공성이라는 것이 전부 그런 토대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번 연수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번 연수에서 말도 안 되게 새롭고 놀라운 것들을 잔뜩 보고 온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자주 한 생각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예술 지원 정책에 있어 많은 부분은 우리가 이미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한국문학번역원, 한국출판문화진흥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등의 여러 기관을 통해 이미 시행하고 있는 내용들이었고, 충분히 검토되고 있는 내용이었다. 정책의 중요한 부분인 예산 규모에 있어서도 대체로 우리나라 기관들이 확보한 단위가 적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호주의 경우 문학 분야를 독립시켜 Writing Australia라는 기구 아래 통합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우리처럼 예술 전 범위가 통합돼 있다는 것에 비교해서 일장일단이 있을 것 같았다. 도서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연수단이 방문한 주립도서관은 우리의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처럼 공공 납본을 받는 관내 열람 도서관이었고, 대출이 가능한 시립 도서관도 있었다. 장서량은 우리도 도서관마다 차이가 있는 만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조금 달랐던 부분은 주립도서관이 마치 공공 갤러리처럼 운영되는 것이었다. 다양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시민들 입장에서는 도서관에서 여러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점이 편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실정과는 맞지 않았다. 이미 우리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들은 책의 안과 밖에서 전천후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며 수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우리도 충분
- 김홍
- 2026-09-01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호주 책방에는 쉬라즈의 풍미와 앨리스의 꿈이 있다. 남규조(시옷책방지기) 감사하게도 시옷살롱책방이 2025년 문학상주작가 우수기관 서점 부문에 선정되었고, 포상으로 호주 연수를 가게 되었다. 아르코에서 두 명, 도서관·문학기관·서점 각 기관의 담당자와 작가님 두 명씩, 총 여덟 명이 함께했다. 시옷책방에서는 그림책 작가 김중석 선생님과 동행했다. 작가님 덕분에 이런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중석 작가님 그림책 제작 워크숍 결과 발표회 그림책 제작 워크숍 결과 발표회 이후 김중석 작가님의 프리페인팅 5월 19일 오후 인천공항을 출발해 다음 날 아침 시드니에 도착했다. 여행 내내 여러 곳을 다녔지만, 연수기는 각 작가님과 기관의 특성에 맞게 나누어 쓰기로 했다. 시옷책방은 ‘책방’을 중심으로 기록하기로 했다. 방문한 책방은 네 곳이다. 시드니 뉴타운의 Better Read Than Dead, 멜번의 Readings Kids, The Paperback Bookshop, 그리고 사사프라스 마을의 Through the Looking Glass. Better Read Than Dead — 시드니 뉴타운 뉴타운의 엔틱한 거리에 힙한 장소 Better Read Than Dead 책방. 서가와 매대는 분야별로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주요 도서는 포인트가 돋보이도록 진열되어 있었다. 동선도 잘 확보되어 있어 손님의 이동이 자연스럽고, 간섭이 적어 책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Better Read Than Dead 책방 앞에서 구입한 도서와 함께 서점 내부, 1층 서점 내부. 1층은 서가와 매대, 2층은 북토크와 전시 공간 서점 내부. 1층과 2층 사이 중층, 스킵플로어 구조, Cooking Zone 스킵플로어 공간을 활용해 1층과는 다른 섹션을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동선의 지루함을 줄이고, 분야별 집중도와 서가의 다양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었다. 조금 올라가면 북토크와 전시가 가능한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공간의 온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전통이 쌓인 책방의 외관을 일러스트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 이미지는 책갈피와 다양한 굿즈로 확장되어, 방문객들에게 만족도 높은 기념품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너른 자연과 독특한 생태가 공존하는 호주답게 동물·식물·생태 관련 큐레이션이 돋보였고, 이주민의 나라라는 특성과 맞물려 원주민 문화에 대한 내용도 곳곳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 세계 원주민을 다룬 《Origin》이라는 책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구입하게 되었다. 또 서가에서 영화 ‘미나리’를 발견했을 때는 반가움이 밀려왔다. 서점 내부, 2층 북토크 및 전시 공간 서점 외관을 모티브로 한 일러스트 작품 서가에서 발견한 ‘미나리’ 귀국 후 서점에 대해
- 2026-09-01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구루발루의 작가견문록 오시은(인천광역시교육청중앙도서관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 상주작가) 여행객들은 나를 까치라고 하더군. 이곳 사람들은 맥파이라고 하는데 말이야. 뭐라고 부르 건 내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 구루발루. 그게 내 이름이지. 가까운 친구들은 그냥 ‘발루’라고 불러. 나더러 “까치네.”라고 말하던 이들을 만난 곳은 포트 잭슨이었어. 언제나 여행자들이 넘쳐나는 항구 말이야. 파라마타강 하구 바닷가인데, 멋들어지게 생긴 공연장과 철재로 만들어진 아치교가 유명하잖아.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 솔직히 나도 그걸 보려고 갔던 거야.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을 만나러 갔구나 싶어. 아, 참고로 나는 운명 어쩌고 하는 걸 믿지 않아. 친구들이 점성술 하는 까마귀 집에 재미 삼아 몰려갈 때도 슬그머니 도망칠 정도니까. 그런 내가 그들을 운명이라고 여기게 된 건 좋아하는 게 같아서였어. 그들이 커피를 마시며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책과 작가들에 대해 말하더군. 실제로 그 중 몇은 작가라던데, 유독 눈길이 가는 이가 있더라고. 때때로 시선을 먼 곳에 두는 작가였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으려는 탐험가 같더란 말이야. 그때 감이 왔지. 그가 뭘 찾고 있는지 말이야. 이야기. 그것도 엄청나게 재미난 이야기. 나도 많이 해 본 일이라 금세 알 수 있었어. 그렇다고 나도 작가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야기를 사랑하는 건 작가 못지않다고 자부해. 쫄깃하고, 숨 막히고, 따뜻하고, 울컥하고, 기품 있는 언어로 가득한. 왜 있잖아, 시간을 잊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들. 참고로 내 둥지는 오래된 서점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에 있어. 이만하면 내가 책과 이야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겠지? 나는 먹는 거 다음으로 이야기를 좋아해. 재밌는 이야기 소리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그래서 그날 포트 잭슨에서 결심했지. 여행객들, 아니 이야기를 찾는 작가를 따라다니기로. 그의 눈동자가 빛나던 순간이 기억나는군. 작가들을 지원하는 곳의 책임자를 만났을 때였지. 작가에게 상금도 주고, 한 명의 시인을 뽑아 국립 시인상도 주고, 여행 기금도 주고, 문화유산에서 작업할 기회도 제공한다는 설명을 들을 땐 고개만 끄덕이더라고. 하지만 도서관에 책이 비치되면 작가에게 보상한다는 대목에서 눈동자가 커졌어. 출판사와 작가에게 반반씩 보상하다가, 삼 년 후부터는 작가에게만 보상하는데, 유명 작가에게 쏠리지 않게 상한제를 둔다고 했지. 그 모든 게 법에 따라 지켜진다는 말을 듣는 그의 눈에 부러움이 흘러넘치더군. 나한테는 전혀 새롭지 않은 얘기라 그런 반응이 신기했지. 인간의 시간으로 치면 삼십 년도 더 된 일이라 고전이나 마찬가지였거든. 그토록 당연한 걸 부러워하는 게 흥미롭더라고. 다음으로 간 곳은 오페라 하우스 옆에 있는 로열 보타닉 가든이었어. 마침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던 차라 반가웠지. 말이 가든이지 여긴 원시 식물원이라고 봐야
- 오시은
- 2026-09-01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우수시설 국외연수 후기 호주 시드니, 멜버른 국외연수 : 로열 보타닉 가든 탐방과 상주작가 레지던시를 중심으로 전수지(중화문학도서관 사서) 1. 들어가며 2026년 봄, 뜻밖의 소식이 들어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후원하는 「2025년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에 우리 중화문학도서관이 전국 우수시설 중 하나로 선정되어 호주 연수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2025년 1월에 갓 문을 연 우리 도서관이, 게다가 이제 사서로서 발을 막 뗀 내가 이런 자리를 얻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이번 연수를 통해 사서로서, 그리고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의 담당자로서 우리나라의 문학 지원 체계와 사업 운영 방식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호주의 선진 문학 생태계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호주의 랜드마크 오페라 하우스-vivid light 하버 브릿지 앞에서 5월 19일 저녁 인천공항을 출발해 시드니와 멜버른을 돌아보는 7박 9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시드니에서는 호주의 시그니처 ‘오페라 하우스’ 투어를 시작으로 타롱가 동물원의 기린이 우릴 반겨주었고, Writing Australia 방문, NSW 주립 도서관 탐방, 시드니 작가 축제(Sydney Writers’ Festival) 참관에 이르기까지 도시 전체가 문학과 이어져 있었다. 멜버른은 말 그대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의 명성에 걸맞은 곳이었다. 호지어 레인의 그래피티 골목, 예술가들의 수직 공동체 Nicholas Building, 빅토리아 주립도서관과 휠러 센터, 독립서점 Readings와 The Paperback Bookshop, 그리고 Maru의 캥거루 무리와 퍼핑빌리 증기기관차에 펭귄 퍼레이드까지—문학과 자연과 예술이 경계 없이 뒤섞인 도시였다.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부천이 2017년부터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였다는 점이다. 누군가 내게 직업을 물을 때, 과연 사서라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는가 내심 부끄러웠다. 한편, 호주 정부의 문학 지원 체계를 대표하는 Writing Australia의 책임자 Wenona Byrne 디렉터와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호주는 연간 800만 AUD 규모의 문학 전담 예산을 확보하는데, 한국의 문학분야 지원 규모가 호주보다 훨씬 더 크고, 호주는 한국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문학상주작가 지원사업 하나만 해도 연간 70~90개 시설, 수천만 원 규모의 국비가 전국 각지로 분산 투입되며 일자리 창출과 지역 문학 생태계 활성화를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 국가 단위 지원 시스템의 체계성과 지역 침투력 면에서는 우리나라가 꽤나 선진국이구나 싶어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2. 시드니 로열 보타닉 가든(Royal Botanic Garden) 가. 항구와 오페라 하우스를 품은 정원 우리 일행은 시드니 도심 한복판의 신호등과 차량 소음을 등지고
- 2026-09-01
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 임아라 그가 돌을 키우자고 했을 때 나는 딸기를 먹고 있었다. 케이크에 얹은 것치고 과즙이 실해서 턱이 저릿했다. 나는 테이블 매트에 포크를 내려놓고 오른뺨을 어루만졌다. 입안에 머금은 걸 삼켰는데도 신맛이 가시질 않았다. 어금니에 들붙은 씨가 거슬려서 자꾸 혀끝으로 더듬댔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돌을 키우자는 거지. 문득 씨가 아니라는 게 떠올랐다. 딸기의 겉에 박힌 점들 말이다. 그게 열매고, 그 속에 더 작은 씨가 있다는데, 그렇다고 그걸 달리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골라낸 씨를 검지에 뱉었다. 침과 뒤엉켜서인지 꽤 부푼 것 같았다. 자기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한테? 그래, 우리한테. 그의 윗입술에 묻은 생크림이 바르르했다. 나는 그것을 닦아 주려다가 관두고 나이프를 집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면 으레 주는 플라스틱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직원이 물었을 텐데. 그가 뭐라고 답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초는 없고, 나이프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손잡이에 달린 마개를 열었더니 성냥 두 개비가 쏟아졌다. 돌을 키우기도 해? 응, 돌도 키울 수 있대. 그는 컵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또 커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 컵은 가장자리가 겉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물이 넘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서랍에 들어박힌 처지길래 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발끈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다. 너무 말짱하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 이후 그의 커피는 그 컵에만 내줬다. 똑같은 컵이 있었는데 이미 버렸다는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왜 돌이야? 손이 가는 건 싫다며. 그렇다면 돌 만한 게 없지. 그가 살며시 컵을 기울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슬쩍슬쩍 드러나는 둥근 밑면을 바라보면서 유난히 까맣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에 닿을 때마다 닳았을 테니까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하얀 컵과 대비되어서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너머에 있는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흰자위를 바삐 오가는 걸 보아하니 뭔가 숨기고 있었다. 실은 주문했어. 나는 잼이 덕지덕지한 접시를 토닥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몫의 케이크는 모로 누운 채로 사이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겹겹인 시트에서 반쪽짜리 딸기들을 빼낸 흔적이었다. 언제부턴가 버터에서 여물의 향을 맡았다. 내가 투덜댔더니, 그는 여물의 근처라도 가본 적이 있느냐며 놀렸다. 그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는데, 어째서 끄덕였는지 의문이었다. 미리 이름을 지어 주자. 그가 반절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새 눅눅해진 받침대가 흔들려서 잠시 애를 먹었다. 나는 식탁에 흐트러진 빵 부스러기를 그러모으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검지에 뱉은 씨앗이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로 옮았을 텐데, 전연 기억나지 않았다. *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따끈한 물줄기를 쏘였더니 순식간에 케이크가 일그러졌다. 폭우를 맞은 모래성처럼 쉬이 뭉그러졌다. 자잘한 건더기는 배수구를 향해 미끄러지고,
- 임아라
- 2026-09-01
심심 임승훈 심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심심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심심해서 집안을 싹 바꿔봤어."라든지, "심심해서 머리핀을 또다시 찾아봤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심심함이란 일종의 수사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유는 있는데 말하기 귀찮거나,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고. 대체 그 심심함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그만한 에너지를 들여서 굳이 무언가를 저지르냔 말이다. 하지만 이 년 전 급작스럽게 아내인 진서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심심함에 시달렸다. 사실 위의 말들은 주로 진서가 한 거였다. 그녀는 '심심해서 뭐뭐 했어'란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나는 때로는 재치 있고 수사적인 그녀의 화법이 귀여웠고, 때로는 완곡적인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고, 때로는 자기 마음에 시달리다 지쳐버린 그녀가 답답해 종종 짜증이 났었다. 왜 그녀는 본심을 밝히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심심. 진서는 왜 심심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진서와 나의 기질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다. 뭐 대단한 농담도 아니다. 대화하다가 내가 무심코 '지금'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잽싸게 내 말을 자르고 '이 순간-'이라고 흥얼거리는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바로 오늘'이라고 대꾸해주곤 했다. 섹스할 때도 그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비장한 표정으로, "어디, 오늘 자네 실력 좀 확인해 보겠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진서 언니, 그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옷을 훌렁 벗었다. 그 무렵 우린 홍명희의 소설 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진서와 광명 본가에서 아버지가 내놓은 책 박스를 뒤적이게 되었다. 진서와 나는 그 속에서 을 꺼내 들고 "우리도 이거 보자, 보자."라며 집에 가져왔다. 그 소설에서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임꺽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꺽정이 언니, 이 우라질 놈의 목을 뎅강 자를깝쇼? 진서는 또한 예민하고 침울한 사람이기도 했다.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툭 내뱉고는(주로 꿈에서 내가 자기가 키우던 양을 잡아먹었느니, 섬세한 사람에겐 섬세한 날이 있다느니 했다), 긴 침묵에 빠지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스 부호처럼 짤막하고 건조한 말을 하긴 했으니 완벽한 침묵은 아니고, 침묵의 근사치에 이르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이틀 정도. 그러다가 그 침묵(의 근사치)에서 벗어나서 문득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였다. "심심해서 LA갈비를 만들어봤어."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내 사랑은 진서의 사랑과 조금 달랐던 걸까? 확실히 나의 사랑엔 고통이 없었다. 친구의 후배였던 진서를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까맣고 가느다랗고 풍성한 단발머리,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녀는 왠지 어떤 정물 같았다. 그런 그녀를 나는 힐끔힐끔 쳐다봤는데, 그때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후, 한 달 뒤에 우린 연애를 시작했고,
- 임승훈
- 2026-09-01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 이승은 수연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다른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었다. 월급이 높은 편도 아니었고 학원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지만, 수연은 아이들과 지내면서 학원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 손에 샤프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우개 똥을 굴리며 수학은 왜 배워야 하는 거예요? AI가 있잖아요. 이제 수학은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투덜거리다가도 방긋 웃으며 떡볶이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작은 규모의 학원은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한 편이라고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학원에서 일하는 삼 년 동안 수연은 무탈하게 지냈다. 월급이 밀리지도 않았고, 선생님들과 의견도 잘 맞았다. 크게 아프지도 않았고 사소한 말다툼을 빼고는 우재와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지냈다. 출근하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재미난 퀴즈를 생각했고 퇴근하면서는 그날 볼 OTT를 고르고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와 장 볼 것들을 체크했다. 수연은 아이들이 수포자가 되지 않도록 일차함수와 연립방정식을 쉽게 이해할 방법을 고민했다. 주말에는 가성비 좋은 맛집을 찾아두었다. 우재와 외식을 하고 집에서 OTT를 보는 것 말고 다른 걸 해 보고 싶기는 한데 뭘 해야 할지, 우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이었다.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지고 나서 이런 고민은 사라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리고 며칠 후에 천장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집주인이 옥상에 방수포를 깔아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정 불편하면 나가라고 한 이후로 수연은 하루 종일 집과 돈을 생각했다. 부동산 앱을 다섯 개 깔고 대출 조건을 알아보면서 진짜 고민이 시작되었다. 늘 아끼면서 지냈지만 모아 놓은 돈은 없었고 집값은 훌쩍 뛰어있었다. 대출 조건은 까다로웠고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매달 빠져나갈 이자를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이사를 해야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은 막막한 게 아니라 뻔했다. 수연이 갈 수 있는 집은 반지하 아니면 또 다른 재개발 지역이었다. 수연은 자신의 상황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하고 싶었다. 그래야 느닷없이 찾아온 이 난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빗물에 얼룩진 천장과 벽지를 보며 누워있던 어느 날 수연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삶을 그려보았다. 이 동네에 지낼만한 집이 없다면 살던 동네를 떠날 수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학원 일을 할 수도 있고 학원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 다양한 선택지가 펼쳐지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연은 오랜만에 설레었다. 하지만 우재의 생각은 달랐다. 네가? 아무 연고도 없는데 혼자서? 지방에서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우재의 말에 수연의 설레던 마음은 사라졌다. 우재야. 응? 그냥 잘될 거라고 말해주면 안 돼? 너 차도 없고 운전도 못
- 이승은
- 2026-09-01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진행 : 윤재민 평론가 패널 :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장웹진 9월호 비평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문장웹진 편집위원이자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그리고 오늘 패널로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전적으로 저의 사심 때문인데요. 그간 제가 글이나 활동하는 것들을 인상 깊게 보았고, 궁금했던 분들 모신 겁니다. 참석자 분들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언제 데뷔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부터 먼저 하실까요? 현재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조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성을 떼고서 필명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교 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안희연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원고에 넣을 약력을 요청받으면 이 정도로만 저를 소개하곤해서 어떤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진 안녕하세요. 저는 2025년에 김기태론으로 창비 신인 평론상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미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1년이 된 것 같고, 조금씩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생활인으로서 돈을 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윤재민 오늘 이렇게 모신 세 분. 연차가 현재 평론가가 3년, 그리고 최선교 평론가가 4년 차 정도 됐죠? 2022년도니까 4년. 그다음에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1년 되셨지요? 이미진 아마 발표 기준으로는 1년이 조금 안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이제 1주년 돼 가시는군요. 세 분들 모두 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시고 계시거나,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드는 분들과 대화 나눠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신인 비평가’로서 가지고 계시는 여러 가지 고민이나 문제나 목표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요.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각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지평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비평가로 데뷔하게 된 각자의 계기가 있을 텐데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최선교 평론가가 된 계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해 보자면 국문과 대학원 수업 과제로 처음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 평론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것에 심취하고 매료된 상태를 무척 즐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매료되었는지 꼭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 2026-09-01
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김효나 그는 얇은 회색 잠바를 입고 있었다. 아니다. 그의 시신은 얇은 회색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아니다. 그의 얼어붙은 육체는 얇은 회색 잠바 속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였다. 아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였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체크 남방, 한 번도 본 적 없는 추리닝이었다. 아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 남방, 추리닝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얇은 회색 잠바였다. 그의 얼어붙은 육체가 내동댕이쳐진 잠바, 남방, 추리닝 사이에서 내가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은 얇은 회색 잠바라고 썼지만 실은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은 그였다. 아니다. 실은 가장 아는, 가장 여러 번 본 적 있는 것은 그였다. 아니다. 실은 가장 아는, 가장 무수히 본 적 있는 그였지만 이런 모습의 그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알아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볼 수 없었다. 아니다.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가갈 수 없었다. 아니다. 다가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갑게 얼어붙은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시라고 말했다. 아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고 확인해 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확인해 주지 않으면 무연고자 처리가 될 거라고, 시신이 안치된 지 닷새가 지났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알았다는 식으로 입술을 웅얼거렸다. 아니다. 나는 다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전히 그에게서 멀리, 가능한 한 멀리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직원 역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즉,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옆걸음질 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뒷걸음질이나 옆걸음질 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시신 곁으로 바짝 다가가야 하는 것 같았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셔야 한다고 반복하여 말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아니다. 반만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반만 가까이 다가갔고, 반만 보았다. 아니다. 겨우 두 걸음 다가갔고,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하여 그를 보았다. 아니다. 초점을 흐리게 하여 본 것은 그의 얼굴이었고,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만 분명히 보았다. 아니다.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초점은 저절로 흐려졌다. 나는 내 눈이 자동 초점 기능을 가진 카메라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고장 난
- 김효나
- 2026-09-01
결혼 이자연 484초 그 사람이 왔다 4848초 눈이 멈추지 않았다 눈의 폭격으로 쓰러진 집 씩씩하게 뛰어다니는 귀신들 얼어 죽기 위해 눈밭을 계속해서 걷는 나 마당엔 여우 한 마리 피투성이 시체 옆에서 날 노려보았다 여우의 눈은 어찌나 투명한지 여우는 날 물어 죽일 생각이었다 헤매는 사람은 정말 맛있거든! 여우를 쓰다듬었다 여우를 안아주었다 빛은 왜 우리를 피하고 있나 빛은 왜 우리를 싫어하나 여우가 따뜻해서 나는 죽지 않았다 여우의 턱 밑으로 침이 떨어졌다 나는 좀 더 일찍 죽었어야 하는데 0초 여우가 죽었다 0초 48483123마리의 여우들이 날 발견했다 0초 세계는 빤하다 48483초 너무 덥다 484831초 그 사람이 돌아왔다 4848312초 그 사람이 돌아왔다 48483123초 그 사람이 돌아왔다
- 이자연
- 2026-09-01
너무 좋았던 그날 이자연 야심 차게 시작한 게임 프로젝트 그리고 첫 번째 시연은 최악 첫 번째 필드는 비 내리는 골목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모두에게 물었지만 플레이어 캐릭터는 곳곳을 움직이며 가만히 비를 맞을 뿐이다 흠뻑 젖었다 사무실은 대답이 없다 미소 짓는 팀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그 누구보다 멋지게 웃었다 누군데요? 비밀인데요 당신이 더 멋진 것 같은데요? 플레이어 캐릭터는 달렸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걸 부끄러워하고 힘들어하면서도 게임의 시작되면 길드원들은 늘 빈손으로 와서 같은 위로를 건네 게임이 종료되면 사람들이 가득해 숨이 막혀 우리는 다시 못 만날 테지만 무덤에서 심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어째서인지 KFC에서 뼈가 부러진 선수의 영상이 자꾸 떠올랐고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UFC인데 플레이어 캐릭터는 선수의 무릎뼈가 닭의 연골을 떠올리게 했다고 생각했다 어젠 이런 걸 주웠다 [한 유저의 메모] - 사실 알고 있어요 멋지게 웃은 그 사람이 누군지 (비 내리는 골목에서 랜덤으로 드랍됩니다) 두 번째 필드는 강의실이다 우리 같이 체술 배울래? 앞자리에 앉은 유저가 쪽지를 줬다 강의를 듣는데 메일이 왔다 세 번째 필드는 왜 당근밭인가요? 이해가 안 가는데 당신이 정신이 나갔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번째 필드 화장실에서 자꾸 울지 말라고 했을텐데 하지만 고개를 들면 천장이 없을 거야 넌 알지? 이 세계는 한계가 없어 내가 다섯 번째 필드에서 얘기한 건데
- 이자연
- 2026-09-01
우울한 빨강 이연숙 찔레 열매빛 앙고라 스웨터가 서랍 속에서 늙어간다. 저 스웨터는 내 나이 스무 살 때 엄마가 사준 옷. 싫다고 찡그리는 딸에게 억지로 사 안겨진 채로 구겨진 옷. 그때 나는 회색빛 스커트, 회색빛 스웨터, 안과 밖 모두 온통 잿빛 그림자뿐이어서 한 번도 저 옷을 입어보지 못했고. 더 더 나이가 들면 입어야지 하고 갖고 있던, 이제는 버리지도 못하는 우울한 빨강. 그날도 재와 밤으로만 가득한 거울 속 나를 보며, 너는 왜 그렇게 어두운 옷만 입냐며 엄마는 쓰게 웃으셨지. 빨강이나 화사한 핑크, 무지개 속 하나라도 골랐으면 엄마 얼굴에 어두운 구김이 덜 갔을까. 그림자의 시간이 끝나고 서랍을 여니 후회와 걱정을 욱여넣은 우울한 빨강, 서랍 속에서 숨소리 할딱이며 뒤척이는 우울한 빨강
- 이연숙
- 2026-09-01
오래된 집 이연숙 서까래는 알고 있었다, 김 노인의 흩어진 호흡을. 김 노인의 손은 안노인을 불러내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들은 이 집에 오래 살았고. 노인이 기억하기론 그랬다. 나쁘지 않은 생이었다. 우물의 물은 맑았고 오래 가물던 해에도 쉬이 바닥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을의 누군가는 죽었고 아이들은 자라 성큼성큼 다리를 건너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오래된 집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못할 일은 없었다. 자연의 순환. 나무의 잎사귀는 떨어지고 새 움은 여지없이 같은 자리에 돋아났다. 스스로 그러한 것들. 가득 채워진 집 뒤 물항아리처럼, 오래된 집도 사람들로 어수선하게 들고 났다. 김 노인이 떠나자 몇 해 지나지 않아 안노인도 그 길을 따라갔다. 아무도 그들이 간 곳을 묻지 않았다. 수년 동안 새들은 서까래 위에 앉아 그들의 행보를 궁금해했다. 새들은 서까래 한 귀퉁이에 알을 낳고 세대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자연스레 잊었다. 어느 날 한가한 구름이 집을 내려다보던 날, 한 부부가 찾아와 안마당 툇마루에 앉아 오래도록 숲을 보며 말없이 있을 때 집은 알았다. 저들이 곧 이곳에 둥지를 틀겠구나.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뒷산 지절대던 새들은 밤이 숲에서 내려오자 오래된 습관처럼 처마 밑을 파고들며 익숙한 흙집 냄새에 잠을 청했다. 그들은 모두 오래오래 살았다. 서까래가 모두의 아버지처럼 든든하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모두 자연사했다.
- 이연숙
- 2026-09-01
샅샅이 찾아볼게 이상영 겉으로든 안으로든 단단한 껍데기를 만드는 법을 모르겠어 귀담아 듣지 말고 따르지 말자 답장을 남겨줄래? 나는 이 여름이 가기 전에 다시 오게 될 것 같거든 열과 성의를 다해 머무르기 나는 오늘 이곳에서 폐부와 솔기로 가끔은 내 이름으로 가끔은 네 이름으로 가끔은 윤영의 이름으로 가끔은 이름의 이름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처음 중에 가장 어려웠던 거 말하기 하루에 거짓말은 몇 번 해 가방에 든 것 중 가장 보여주고 싶은 거 동시에 꺼내기 내버려둘래 내버려둘래 이거 다 외워야 이 건물을 나갈 수 있대 층이 바뀔 때마다 와락 튀어나오는 눈들이 있다 하나하나 모두 형광펜 같아 비닐 안에 들어있는 카스텔라 크게 웃을 때 광대뼈가 도드라지는 언니 소리 내지 않고 웃는 건 정말 기이해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저녁에는 은혜롭다 말해버리자 큰 소리로 인사하면 빨리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린 지름길이 도움이 됐니 여기까지 내려왔다면 너도 한번 해봐 도움닫기처럼 마지막 하나 남은 계단처럼 왜 이토록 숨죽이고 기도해야 할까 밤이 오게 해주세요 오늘도 같은 주문을 뱉어낸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오게 해주세요 우리들의 소리가 날카로워집니다 꿈의 정점에서 점프를 할 거예요 듣습니다 너의 원망을 나의 해결하지 못하는 희망들을 거품을 뿜어내요 내 입에서 실이 빚어진다면 그건 짙고 반짝이는 상상만 해도 설레어요 단단히 꼬여가고 쥐어요 오므려요 끝없이 서로 망을 봐주기로 해 훼손된 우리들은 이렇게나 길어지고 있어 몸이 먼저 기억할 거야 밤은 지나왔으니까 발바닥으로 눈 밑으로 새살이 팔꿈치를 덮고 속눈썹 새 이마 새 밤 새 영혼 새 로퍼 새 방화문 누군가 내 사과를 처음 받아준 날 누군가 새 친구가 되기로 약속한 날 조금 전에 할퀸 것도 잊어버린 것처럼 보지 않아 듣지 않는다 만지지 않는다 외우고 기억하고 소리낸다 멧돼지의 복부로 발톱의 자국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이건 다음 사람에게 전해질 두꺼운 족보 이렇게나 풍성한 저녁 지어낸 것이 없는 이야기 움직이지 않는 돌덩이를 밀어버린 사람이 있대 비법이 있었을까? 하지만 이건 꼭 입에서 입으로 전해줘 웃으면서 얘기하더라도 심각하게 얘기하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잿빛이다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최선의 속도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힘이다 계획을 세웠지 용기가 충만해 벌써 두 번 물어본다 나는 서두를 것 없다 입안에 침이 남아 있지 않은 기분으로 여길 봐 봐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구나 너는
- 이상영
- 2026-09-01
멀리 있는 물체가 작아지는 것 이상영 그때는 번거로운 줄 몰랐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철문을 닫아야 했지. 경희는 사남 삼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배가 유명한 고장에서 자란 경희는 도시에 나가 공부를 했고. 결혼 후 남편을 따라 해외에서 살았다. 서너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몇 번의 이사를 치렀다. 경희는 마지막 도시의 낮은 빌라를 가장 그리워했다. 도시의 전통 문양과 도안들을 모아둔 스크랩북을 꺼냈다. 작은 도형들이 모여 숲이 된다. 날개가 커다란 새가 구름을 쫓는다. 붉은 날개 아래로 푸른 물방울이 흩어진다. 이건 네 날개 이건 네 콩팥 피가 흐르고 있다 발밑의 마을을 조망한다. 시점이 바뀐다. 윗면. 아랫면. 내부. 기억나는 것들을 모두 적어 입체로 만든다. 빌라의 창문. 제설용 모래함. 이유가 있는 장소. 그 말을 빼면 나무 책상이 남는다. 거기에 앉아 투시도를 그린다. 먼저 오늘 후회되는 것들. 오늘 기억나는 것들. 오늘 뽑아낸 가시. 오늘 씻긴 발. 건물은 많이 낡지 않았다. 담쟁이가 타일 벽을 타고 올라간다. 여름꽃이 활짝 핀 날 완전히 막혔던 배수구. 어쩌면 내 기억이 아닐지도 몰라. 나도 누군가에게 들었고. 다른 누군가도 누군가에게 들은 초입이다. 부드러운 흙을 손으로 한 줌 들어내고. 씨앗 위로 다시 흙을 놓는다. 이제 물을 뿌린다. 새싹이 돋아난다. 팔과 팔이 닿고. 언제고 언덕은 무성해진다. 세 개의 메추리알 중에서 한 마리가 부화했다. 어울리는 계절에 태어났다. 메추리는 높이보다는 온도에 더 민감했다. 마당에서 땀을 닦는다. 나무를 내리친다. 힘이 아닌 다른 걸 사용한다. 이젤을 세우고 얇은 연필로 그린다. 무릎이 넘어진다. 마당은 이미 무성하다. 다친 발끝으로 중심을 잡는다. 매일 눈을 뜨면 적는 첫 문장. 나를 위한 작은 울타리와 나를 위한 작은 나사못. 방 안에 사람이 가득 찬다. 시점을 바뀌면 어느새 텅 빈 집이 남는다. 흰색 창틀이 투명한 유리를 감싸안는다. 먼 것부터 작아진다. 가족과 가족이 만들어내는 부피. 경희의 스크랩은 잘 넘겨지지 않는다. 언제고 이 그림을 완성할 것이다. 이어지는 손과 도망가는 사람이 여전히 더운 고장의 높은 나무 벤치에 올라 경희는 그 고장의 춤을 춘다. 느리고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이유 없이 웃었고 쉽게 알아차렸다. 알고 보면 같은 고향 사람이다. 알고 보면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사람이다. 능소화가 뒤덮은 지붕 아래로 팽팽한 파이프가 뻗어간다. 경희는 바퀴가 달린 보행기 손잡이를 쥔다. 이 길은 너무 많이 변했다.
- 이상영
- 2026-09-01
조금과 사리 박시현 접영을 할 때 나는 거의 새다. 나는 접영을 하면서 너에게 간 적이 있다. 접영과 내가 정확히 일치할 때 나는 거의 십자가에 매달린 자세다. 거의 구출할 수 없는 자세다. 접영을 할 때 나는 진심으로 막막해진다. 너도 알지, 십자가에서는 내려다볼 수 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이로움. 잠에서 깨면 발등부터 확인하는 우리 수영장이 불타고 있다. 잠수하는 사람과 잠수하지 않는 사람이 동시에 질식하는 동안 나는 화염을 가르며 접영을 구사한다. 오래전에는 이걸로 너에게 간 적도 있었는데. 왜 너는 자꾸 실재하는가… 그 생각을 하면서. 이제 나는 너의 접영이 기다려진다. 다른 누구의 접영도 아닌 너의 접영. 호각을 입에 문다. 너를 출발대에 세운다.
- 박시현
- 2026-09-01
참사랑건강원 박시현 이건 뱀이에요 길에서요 저 길에서 이것을 잡았어요 뱀은 길을 가려 했던 것이에요 옛날에는 뱀이 걸어 다녔다고 해요 완전히 사람처럼요 뱀은 옛날보다 더 오래된 동물이에요 뱀은 나쁜 동물이에요 성경에서요 재혁아 쏘리 우리가 아직 어렸을 때 너를 너무 놀려서 네게서 개소주 냄새가 난다고 해서 새치가 많고 뚱뚱하다고 해서 건강원은 네가 물려받았다며 축하해 정말로 축하한다 하지만 재혁아 사람이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 좀 받아줄 줄도 알아야지 최재혁 이 등신아 이건 길에서 주운 뱀이고요 이 뱀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뱀은 영혼도 길쭉해서 사람이 죽은 뒤에도 뱀은 살아 있을 것이에요 하지만요 뱀을 줍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요 이 길 위에서요 하지만요 뱀은 나를 휘감았던 것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휘감을 것이에요 형산강 둑에 재혁이가 서 있다 강바람을 맞고 서 있다 그래 재혁아 뱀을 몇 마리나 잡았니
- 박시현
- 2026-09-01
영원의 힘 김향지 배꼽 위에서 두 손으로 구를 만든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내가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계속 구를 만져본다 지구 같기도 하고 나주배 같기도 한 구를 매만진다 배꼽에서 무언가 멀리 퍼져 나간다 빛줄기 같기도 사라진 풍경 같기도 하다 환하고 아득한 광선이 어디까지 뻗어가는 것일까 임종을 기다리던 나비들이 날아와 날개를 접기 시작한다
- 김향지
- 2026-09-01
지구 최종 보고서 김향지 우리는 이분법을 경애했다 선 아니면 악이어야 하니까 낙관 아니면 비관으로 끈끈했다 장르처럼 우리는 뚜렷해지고 무게를 가졌다 아아, 영화적이군 파이프를 뿜으며 긴장을 가장 잘 표현한 씬을 찾는 편집실의 히치콕인 양 우리는 공존을 의아해했다 안 아니면 밖이어야 하니까 어둠 아니면 빛으로 유보했다 희미한 길을 행진하며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밤과 낮을 함께 품은 눈동자를 빛내며
- 김향지
- 2026-09-01
다대포 김참 옛날엔 30도면 땀이 줄줄 흘렀는데 이젠 30도면 땀도 안 난다. 오늘은 섭씨 38도. 무더운 날이다. 백사장엔 파라솔이 길게 펼쳐져 있다. 해변을 향해 파도는 밀려오고 모래밭에서 몽돌은 반짝인다. 다대포엔 몽돌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물속에서 돌 하나 꺼내 들고 손바닥에 올려본다. 돌은 짙은 색에서 밝은색으로 말라간다. 작은 물고기들이 파도를 타고 몰려다니다 튀어 오르는 한낮.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북쪽 해안 저 멀리 검은 원숭이 몇 마리와 얼룩말 한 마리 보인다. 단체로 피서라도 온 걸까? 아니면 내가 더위 먹고 헛걸 본 걸까?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얼룩말과 원숭이가 있는 북쪽 해변을 향해 걷는데 파고가 심상치 않다.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 파도에 쓸리는 돌처럼 닳아가며 조금씩 늙어가는 피서객들이 있는 해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하얀 물거품 만들어내며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는 뜨거운 여름 해변. 백사장에 길게 펼쳐진 파라솔 위로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 김참
- 2026-09-01
마술 김참 고깔모자 광대가 거리에 나타난다. 마술을 보여드릴게요. 당신이 원하는 걸 순식간에 가져오는 마술. 자, 원하는 걸 말해보세요. 빵모자 쓴 노인이 말한다. 나는 포도주가 필요해. 광대는 노인의 빵모자 속에서 포도주병을 꺼내 노인에게 건넨다. 노인이 깜짝 놀란다. 구경하던 소녀는 생각한다. 완전 사기네.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소녀는 말한다. 나는 노란 탁자 한 개와 보라색 찻잔 두 개 그리고 검은 초콜릿 한 상자가 필요해요. 광대는 고깔모자 속에서 노란 탁자와 보라색 찻잔 두 개, 초콜릿 한 상자를 꺼내 소녀에게 건넨다. 소녀는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소녀 뒤에 서 있던 거인은 말한다. 나는 약탕기가 필요해. 아주 커다란 약탕기 말이지. 광대는 모자 속에서 검은 약탕기를 꺼낸다. 아주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약탕기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광대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노인과 술병과 소녀와 탁자, 의자, 초콜릿 상자가 약탕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인도 비명을 지르며 커다란 약탕기 속으로 사라진다. 광대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검은 약탕기가 공중으로 둥둥 떠오른다. 광대는 약탕기를 타고 솜사탕 같은 흰 구름 떠다니는 언덕 너머로 날아간다.
- 김참
- 2026-09-01
이누이트의 산책 김태훈 차가운 손에서 땀이 흘러 내 심장은 불타는 얼음이야 이해는 인간의 몸으로 불가능한 걸까 뇌의 회로에서 전기가 번쩍이는데 어딘가 고장나고 있었고 무사한 날들이었지 빙하 뒤를 상상하기 전까지는 너머에 닿기를 꿈꾼 새의 날개는 펄럭일 수밖에 없다고 날개뼈를 으쓱거리며 먼 조상을 생각해 건넬 수 있는 언어가 없었을 때 그들에게도 오해가 있었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어 무릎을 눈밭에 푹푹 집어넣으며 멀리 가는 사람이 있었대 돌아오는 길은 생각하지 않고 내지르는 말처럼 걷는 거야 얼음만 가득한 풍경 속에서 무엇이든 부서지면 걸음을 멈추는 거지 마음이든 몸이든 둘 중 하나는 끝장을 보는 거래 끝장을 모르는 두루미 떼는 자꾸 유리 벽에 부딪혔다 거기까지를 두루미의 이해라고 부른다면 당신의 방향이 잘못된 것 나는 죽은 두루미들을 껴안으며 미래를 생각해 생각이 많이 쌓일수록 마찰이 생겨 몸이 타오른다 몸을 견딜 수 없을 때 비행을 거듭하고 유리를 깰 수 있을 것 같아 온몸을 내던지기도 하면서 너머는 가까워지고 마음은 단순하게 깎인다고 두루미 몸에 박힌 유리를 하나씩 뽑으면서 아픔을 가늠하는 동안 주변의 눈을 다 녹일 정도로 땀을 흘렸는데 나는 춥다, 춥다고 곁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뒤를 돌아보면 발자국이 없었어 똑같은 빙하가 전부 다르게 보이고 여기서부터는 또 다른 미래가 시작되겠구나 깨닫는 순간 다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고 산책과 방황을 구분할 수 없어서 두루미들의 날개를 편 채 눈에 파묻는다 얼마나 더 가야 너머에 도착할 수 있을까 몸이 말을 듣지 않지만 두루미를 이해하고 싶어 두루미에 박힌 유리까지도 온몸에 눈이 묻어 있다 눈 결정이 살을 파고드는데 아프지 않았다 두루미를 묻은 곳부터 미래가 시작되었다고 여기서부터 너머라면 나는 아직 부서지지 않아서 조금 더 걷기로 한다
- 김태훈
- 2026-09-01
겨울나기 김태훈 마당에서 대문까지 쌓인 눈을 치웠건만 바닥은 빙판입니다 오해가 폭설처럼 그치지 않아 맨손으로 눈을 치웠습니다 추운데 땀 흘리는 내가 이상했어요 눈에 손을 박으며 이 새하얀 것으로 무력해지는 마당에 나는 혼자 있습니다 눈더미는 건들수록 검게 물들고 조금씩 녹다가도 더 단단해질 작정이군요 내가 산산조각 깨질 운명입니까 질 수 없어 드러누웠습니다 팔을 휘저으며 여긴 내 마당이라고 하지만 눈을 대문 바깥으로 몰아내진 않습니다 나의 오해는 남의 몫이 아닙니다 치우다 보면 눈은 사람이 되었다가 담벼락이 되기도 하고 겨울이 있었다는 흔적이 되기도 해서 눈을 맞으며 눈이 그친 마당을 상상합니다 검게 멍이 든 사람의 뒤통수를 덜 녹아서 돌처럼 딱딱해진 마음을 계속 매만진 손은 붉습니다 찬 것만 쥐었는데 뜨겁고 따뜻하군요 방금 태어난 것처럼 기다리는 마음은 항상 새롭고 등줄기로 들어간 눈이 녹으면서 가진 온도를 전부 내어주듯 쌓인 눈에 얼굴을 박을래요 눈이 다 녹을 때까지 절대 마당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 김태훈
- 2026-09-01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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