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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 작성일 2019-04-01

기획의 말

2019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성진, 「검은색과 흰색」(《문장 웹진》 4월호)을 읽고

수퍼 수퍼 드라이

강호연

장류진,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문장웹진》, 3월호) 중 'DAY 1.'를 동기로 작업.
맥주 맛에 있어서 드라이(Dry)는 스위트(Sweet)의 반대 개념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생맥주가 단맛이 강하며 도수가 약한 반면, 드라이 맥주는 톡 쏘는 쓴맛이 강하며 알코올 농도가 높다 한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흑역사는 존재한다. 시간은 좋지 않은 기억마저 언젠가는 스위트하게 추억으로 미화시키고 말지만, 그 과정은 너무 드라이하다.

문장웹진 4월호 살펴보기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

[단편소설] 당신이 있던 풍경의 신과 잠들지 않는 거인 우다영 노란 나무 벽과 바닥을 가로지는 몇 줄기 빛. 나는 따뜻하고 밝은 곳에서 그늘로, 고요한 어둠 속에서 다시 빛이 있는 쪽으로 걷는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나의 행로에도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곧고 선명한 줄무늬가 뒤섞이거나 훼손되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면서. 부드러운 그물처럼 촘촘하게 몸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언제나 빛과 어둠이라는 놀라운 진실에 서서히 무감해지면서. 어쩌면 이것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이고, 나는 이 순간이 내가 살아갈 삶 전반을 의미하며 작동시키는 신의 중요한 계시가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나는 이제 그 장면이 다섯 살 내지 여섯 살의 기억이며 당시 부모님이 자주 방문하던 한 이층 가옥의 넓은 거실 풍경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 거실에서 여자들은 바닥에 나무 도마와 커다란 쟁반을 놓고 여러 사람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식사를 준비했다. 신문지에 싸인 파와 물기를 털어낸 통통한 양파에서 나던 향긋하고 매운 냄새. 수북이 쌓인 그것들을 도마 위에 올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다듬는 소리. 국에 넣을 고기를 썰면 분리되어 도마에 고이던 선홍색 피와 유선형 식칼의 물결무늬를 따라 묻어 나오던 크림색 지방.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엄마는 "위험해." 하고 주의를 주며 식재료로 쓰기 위해 얇게 썰어 둔 배나 조그맣게 뜯어낸 호박떡을 입에 넣어주었다. 여자들은 손에 칼을 쥔 채 웃었다. 그 집에 온 사람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갓 지은 음식을 나누어 먹은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집이 일종의 교당이며 거기서 지금으로서는 정체를 알 길이 없는 종교집회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 집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어른들이 향초와 휘장, 조각상, 장신구로 꾸며진 벽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드리던 모습이나, 자그마한 가죽 책을 손에 들고 읽으며 노래 부르던 모습을, 그 모든 과정에 경건한 태도로 임하던 부모님 곁에서 내가 칭얼거리며 다리에 몸을 기대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나는 늦은 밤 돌아온 아버지가 뜨거운 손을 내 이마에 짚고 중얼중얼 입말로 외던 간절한 기도나, 집에 든 강도에게 값나가는 물건들의 위치를 알려준 뒤 어린 나를 등 뒤에 숨기고 절박하게 반복하던 어머니의 작은 손짓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것이 사람들끼리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신앙의 형태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오랜 세월 동안 그 일에 별다른 신경을 기울인 적이 없으며 무의식의 발로일지라도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부모님과 나눈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한동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맥락으로 유추했을 때, 그 종교는 종교라기보다 신화에서 유래한 원시신앙에 가까웠다.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오랜 세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전파되며 추가되고 변형된 흔적들을 발견할

  • 2019-04-08
시집의 생각

시집의 생각 이성진 식물원에서 혼자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래된 출판 연도가 좋아 시집을 한 권 읽고 있었다 물론 주운 것이었다 낭비되는 금화와 사라진 영화들 쳐다보는 것과 고개를 돌려 보는 것 어둠 속에서 생각하는 개 이런 것들을 읽고 있다가 비슷한 사람이 지나갔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는 사람보다 더 아는 사람 같은 모르는 사람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일몰을 그린 그림 같았다 바라보는 시간은 끝을 몰랐고 나는 계속 보고 있었다 바라보는 시간은 끝이 났겠지만 나는 그 시간을 기억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끝이 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시집을 다시 버렸다 그림이 일몰이 되지는 않았다 우연히 나는 시집과 한번 조우한 적이 있다 시집은 나를 아는 척했지만 나는 팔짱을 끼고 가던 길을 갔다 시집은 어깨를 한번 쓱 올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던 길을 갔다 오래된 연도는 그대로였고 그때는 누구나 착한 사람들이었다고 시집이 말했다 차는 차갑게 식어버렸고 나는 식물원을 영원히 나가는 중이다

  • 이성진
  • 2019-04-01
검은색과 흰색

검은색과 흰색 이성진 원래 없는 색은 검은색인가 흰색인가 일단 보기로 한다 안경 너머 걸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 많다 사실 그건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건물로 눈을 돌린다 한 사람은 아프고 다른 한 사람은 침대를 서성이고 나머지는 웃음이다 가깝지 않게 옆에 있다 나는 한 사람일까 웃음일까 기억으로 간다 밤 고속도로 휴게소 떠도는 자동차의 마음과 대학 동기들 졸업 그리고 나만 읽었던 표정들 다시 들을 수 없는 눈빛들과 수많은 한 장면들 다시 움직이지 않을 복수명사들 우리는 뻔하게 살 거야 우리는 뻔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학과 답사 지역 노래방 앞에서 같이 난장을 까다 술이 된 그 선배가 개명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런 기억들이 밤을 밀어 올리기도 한다 밤은 얼마나 검은색인가 이렇게 많아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흰색은 텅 빈 걸까 검은색과 흰색은 왜 반대편에 있을까 그들은 원래부터 마주 보고 서 있었을까 사실 그런 것은 애초에 없거나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밤은 밤으로 있다 누구나 알고 있다 나머지도 어딘가 있을 것이다 나마저도 거기에 있을 것 같다 나는 없어지기도 한다 원래 없었다는 듯이 그때 나는 검은색일까 흰색일까 아무래도 좋다 없거나 아닐지도 모르니깐 오래된 카메라로 찍는다 오래된 얼굴을 갖고 싶어서 사실 얼굴은 이름처럼 아무것도 모른다 흰색 천을 뒤집어쓰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 나는 조금 뚫려 있는 것 같은데 뜨거워서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그건 흰색일까 검은색일까 아무래도 여기는 세계가 아니다 세계관들이다 침대가 되어야겠다

  • 이성진
  • 2019-04-01
실려 가는 개들

실려 가는 개들 김명기 해지는 초겨울 속으로 개들이 실려 간다 구멍 숭숭 뚫린 철창에 구겨진 체념 덩어리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오래전의 미래 한 번도 틀리는 법이 없는 운명이란 명확하고 지독하다 하지만 출처조차 알 수 없는 생이 이제 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뜨기 위해 있는지 감기 위해 있는지 모르는 눈처럼 어차피 출구조차 알 길 없는데 차라리 지나쳐 버린 과거라도 생각하렴 그곳에는 두고 온 한때라도 있으니 지상에 깃드는 날들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았으나 지난 한때에 마음을 모두 두고 와 그저 쓸쓸한 저녁 풍경이나 쫓아가는 몸은 참혹이란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뱉지도 못한다 어디 실려 가는 것이 개들뿐이겠나 실려 가고 끌려가는 것에겐 관용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걸 너무 오래 믿고 살았다 낡은 트럭의 속도만큼 숭고는 멀어지고 어느 몸뚱이에선가 창살 밖으로 튀어나온 때 묻은 털 깃이 한 올 한 올 떨리고 있다

  • 김명기
  • 2019-04-01
쉼보르스카는 모른다

쉼보르스카는 모른다 김명기 쉼보르스카를 읽는 밤. 절정이 지나도록 피지 않는 능소화와 때가 되기도 전에 피어버린 배롱나무 꽃을 생각한다. 끝과 시작 사이, 어긋난 꽃처럼 때를 찾아낸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태풍이 오고 비바람이 쳐도 방 안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나는 어떤 말에 따옴표를 쳐야 할지 모르겠다. 꽃이 피고 지는 이치를 모를 리 없지만 모른다. 두 번이 없으니 세 번과 네 번도 없겠지. 당신의 시는 너무 합당하고 인간적이라서 때로는 실망스럽다. 희망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 희망을 얘기하는 건 기만일 뿐. 저버린 희망들이 뜨거운 한낮을 피해 어깨 걸고 대오를 맞춰 걸어가는 것을 본 적 있는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기껏 뜨거운 한낮을 피하는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이제 따옴표를 쳐야겠지. '이치를 모를 리 없지만 모른다' 우린 아직 한 번도 오지 않은 절정과 때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저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 죽어갈 뿐이다. 그것조차 모를 리 없지만 모른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에서 차용.

  • 김명기
  • 2019-04-01
원인

[단편소설] 원인 민병훈 너는 옷을 태운다. 밤의 해변에서, 불에 그을린 종아리가 파도에 씻길 때까지, 뛰고, 바닷물을 마시고, 도망치듯,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수평선이 지퍼처럼 열리자, 지금이,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라고, 창문 하나 없는 호텔을 상상해 보라고, 소리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옥상에서 솟구친 미래가, 널 울게 만들 때, 너는 고동소리를 듣는다. 1999년 3월 24일. 풀이 무성한 운동장. 녹색 빗금 사이를 헤치는 연속적인 감각들. 너는 아득하게 흐려지는 정문 너머의 오르막길. 오르막길 끝의 하얀 집. 너는 동급생들보다 먼저 교실 창문을 열었고 칠판에 번진 흔적을 바라보며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너는 빗속을 거닐듯 얼마 남지 않은 기억 속에서 애가 타지만, 네게는 공포가 없고, 공포에게 네가 있으며, 오르막길 끝의 하얀 집. 하얀 집 너머 길 끊긴 산속. 너는 길을 잃고, 긴긴 밤과 새벽을 그곳에 앉아, 사람들이 찾는 줄도 모르고, 온갖 미신과 소문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절벽을 타고 다니는 파란 동물과, 키가 나무만큼 큰 양복쟁이에 대한 목격담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빈집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와, 둑방을 달리는 우비 입은 아이가 스치듯 떠오른다. 너는 눈을 감거나 떠도 같은 장면인 지속 속에서 너의 어떤 모습들을 떨어트린다. 너는 아침이 되자 제 발로 산에서 걸어 나온다. 안심과 탄식과 비명과 희망. 너는 예감에 질린 얼굴로 운동장에 쓰러진다. 너는 Avicii의 멜로디가 느슨하다는 이유로 그의 음악을 싫어했지만 사망 뉴스를 접한 날에는 마이애미가 그를 죽인 거라며 욕을 하고 말끝마다 턴테이블에 침을 뱉었다. 가드는 취한 너를 말릴까 하다가 열에 들뜬 스테이지가 새하얗게 너를 가리켜서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무전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같은 트랙만 틀 것 같았고 지시를 받은 바텐더가 술을 가져다주며 귓속말로 무슨 말을 했는데 너는 되묻는 대신 천장을 가리켰다. 문을 열고 나와, 파라솔 아래 모인 사람들에게, 턱이 뻐근하면 아지랑이는 집에 가서 보라고, 그건 엔진이라기보다 엉킨 베이스 소리에 가깝다고 말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쿵, 누가 떨어지지 않았어? 높은 곳은 안 된다니까, 쿵쿵, 튜브를 허리에 두르고 달려간 사람이 아까 걔야? 내가 오줌을 눴는데, 저기 봐, 내 입자들이 무서워진다, 박스를 뜯어 만든 타임테이블 안내판에는 누구의 이름도 적히지 않았다. 테라스 구석에서 칵테일을 팔던 너의 친구는 해머백을 열어 검은 액체를 꺼내는데 너는 모른 체하고, 부스에 두고 온 USB가 떠올랐지만 돌아가진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자 기둥에 기댄 정비공들이 형광봉 대신 스패너를 흔들고 있었다. 붉은 레이저에 비친 금속성이 벽에 무늬를 만들었고 프로젝터에 자신을 반사하던 누군가가 쫓겨나며 시티팝을 부탁했지만 틀어 주진 않았다. 저 새끼는 이제 막 무덤에서 나온 것 같네, 킥킥대는 바텐더들이 관능적으로 보였고, 병자처럼 느껴졌고, 테크노, 프랭키 너클스, 다시 테크노, 그런 구분의 박자가

  • 민병훈
  • 2019-04-01
등껍질 속 가족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소설]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등껍질 속 가족 잇몸(오태연)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게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너는 돌다리 밑에서 주워 온 거야.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지. 네가 강에서 떠다니는 걸 네 애비가 주워서 집 앞에 놓고 갔어. 그게 끝이야. 할머니가 술과 한 뭉텅이의 약을 왕창 먹고 식탁으로 올라가 손을 번쩍 들고는, 하나님 아버지! 하고 울부짖었다. 나는 엄마와 배를 잡고 웃었다. 킥킥, 움직이는, 움직이는 텔레비전이야. 엄마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속삭였다. 엄마의 입김이 귀에 닿자 알코올과 약방의 냄새가 났다. 괜히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귀를 벅벅 긁었다. 빨간색의 무언가가 손가락 끝에서 묻어나왔다. 립스틱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화장을 고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립스틱을 바르고 다녔다. 크레파스로 덕지덕지 뭉쳐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짓말같이 예뻤다. 할머니가 그 상태로 고꾸라져 아빠가 누워있던 이불위에 쓰러져 누웠다. 먼지가 푸석하고 일어났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지 한참이 지났다. 이상적인 나날이었다.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다. 어쩌면 눈치 챘겠지만 나는 네버랜드에 산다. 피터 팬에 나온 것과는 조금 다른 영원한 네버랜드. 우리 집에서 늙어가는 것은 거북이와 나밖에 없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멈춰 있다. 아니 할머니는 오히려 젊어지고 있었다. 육십 먹은 노인네가 목청 좋게 소리를 지르다 빠글빠글한 머리를 지닌 아줌마가 되고 촌스러운 옷을 입은 시골 아가씨가 되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소녀가, 해맑게 웃는 아기가 되었다. 네버랜드는 거대한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 있는 섬. 그 무엇도 불가능하지 않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우리 집 가훈이다. 가훈 바로 아래에 걸려있는 조잡한 대자보에는 네버랜드에 살기 위한 규칙이 나열되어 있다. 네버랜드에 살기 위한 규칙 첫 번째, 네버랜드는 물과 전기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 생필품을 구하러간다. 두 번째, 등껍질 아래에는 해적이 도사리고 있다. 네버랜드는 움직이는 거북 섬이므로 한번 떨어지면 절대 다시 올라올 수 없다. 세 번째, 항상 웃어야 한다. 그래야지 거북이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네 번째, 거북이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늙지 않는다. 규칙을 보면 어려운 것이라고는 딱히 없다. 이곳은 말 그대로 네버랜드. 웃음이 끊이질 않는 곳. 단지 매일같이 생필품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야한다는 점이 귀찮을 뿐이다. 규칙을 보니 문득 주름이 생각났다. 나는 땅에 떨어진 손거울을 들어 얼굴 앞에 가져가댔다. 내가 조각처럼 웃는 게 보였다. 손을 뻗어 실룩 올라간 광대 위 눈가를 매만졌다. 자글자글한 주름선이 몇 개나 되는지 세었다. 광대 아랫부분에서 미세한 경련이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웃으면 웃을수록 얼굴에 주름이 진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매일같이 거울로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이를 먹지 않아도 주름은 진다. 얼굴에 박힌 주름이 내

  • 2019-04-01
공동주택

공동주택 박은지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저 사람은 저 집 주인이 아니다 지금은 빈 가지만 무성하지만 7월이면 능소화 수십 송이가 피어나는 담벼락의 주인은 저 사람이 아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지나갈 때마다 낮은 소리로 컹컹 짖는 커다란 개의 주인은 저 사람이 아니다 길고양이들이 낮잠을 자거나 사람들의 발걸음을 피해 훌쩍 올라서는 커다란 고무대야의 주인은 저 사람이 아니다 불길한 그림자를 눈으로 쫓다가 창문을 닫았다 창문에 비친 얼굴이 말을 걸었다 너도 이 집 주인은 아니잖아 입을 다물고 등을 돌렸다 저 불길한 그림자가 주인이 아니기를 계절이 산산조각 날 때까지 빌었다 건물이 허물어졌다 다시 세워졌다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까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문 밖의 발걸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 박은지
  • 2019-04-01
의자들

의자들 박은지 선생님에겐 의자 세 개가 있다 나는 적당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거나 끝나지 않는 라디오를 들었다 그럴 때면 셀 수 없이 많은 미래가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들을 하나씩 펼쳐 보는 일은 즐거웠다 녹조가 흐르거나 파스스 흩어지거나 빛을 뿜거나 따뜻하게 녹아내리거나 살아 볼 만한 미래에겐 빈 의자를 내어주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멋진 의자가 갖고 싶었다 창밖을 내다보거나 더 많은 미래를 펼쳐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멋진 의자를 세 개나 들여놓기에는 어느 쪽이든 여유가 없었다 고민 끝에 낚시의자와 욕실 의자를 꺼내 놓았다 책상의자까지 의자 세 개가 완성되었다 높이가 맞지 않아 더 그럴듯해 보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혼자 있을 때도 의자를 비워 두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빈 의자에 나무며 바람이며 햇볕이며 여유가 없어도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초대해 보았다 방에선 나무가 곧잘 죽었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오래되었다 햇볕이 닿기엔 너무 작은 창문 그래도 나는 창을 열고 바람과 햇볕을 기다렸다 더 많은 미래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할 곳에서 다가온다 생각하면 마음이 부풀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밤이 깊어지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밤이 다 지나가도록 의자는 비어 있었다 아무도 몰래 선생님의 반질반질한 가죽의자에 앉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집으로 달렸다 창문을 닫고 벽에 기대 앉아 의자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 박은지
  • 2019-04-01
에덴으로 보내는 편지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수필]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 에덴으로 보내는 편지 김한세(김규리) 에덴으로, 딸에게 작년은 내가 처음으로 너를 자각했던 때란다. 지상에 떨어진 내가 낙원에 있을 너를 느낀다는 건 곧 내 존재가 그만큼 상처입고 불안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환경에 종속된 인간은 그를 둘러싼 세계가 위태로워지고 휘청거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 존재의 오롯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야. 용서를 하나 구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자각했던 그 순간에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 내가 두려웠던 탓이야. 그 어떤 생각도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고 심지어 일종의 박탈감마저 느끼는 상황에서 내가 이성을 잃고 존재를 난도질할까 두려웠단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네게 편지를 쓰고 있지. 조금 모순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시간이 일정 지난 오늘의 나는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어. 비수 같은 말을 품고 우리 모두를 훼손하는 일은 없을 거야. 또, 요새 하는 생각들을 종합해보니 네게 꼭 전해야할 것 같은 메시지가 있더구나. 주목적은 그거야. 그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나는 조금 독특한 버릇이 있어. 이걸 버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밀한 속내를 터놓고 깊이 대화해본 이가 없으니 일단은 버릇이라 칭할게. 내 버릇은 내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여긴 기억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거야. 일상생활을 하다가,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 나는 그것들을 소처럼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해. 그렇게 기억은 내 마음 속의 양분이 되지. 그것이 과연 성장을 위한 양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생각해. 생각은 주로 기억 당시의 내게 아쉬웠던 것, 내 부족했던 것을 초점 삼아 흘러가. 왜 나는 그때 아버지께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무력하게 눈물만 흘려야 했을까? 왜 나는 나를 몰아세우는 어른들의 앞에서 입을 제대로 열 수 없었을까? 생각의 흐름은 빠른 물살과도 같아서, 그렇게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여태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 초등학교 때 발표를 하지 않았다고 나를 윽박질렀던 선생님, 계산 과정에서 바보 같은 실수를 계속 한다고 내 손등을 회초리로 때리던 학원 선생님, 수학 시험에서 실수로 세 개를 틀렸다고 나를 연신 없는 사람 취급하던 엄마…. 물론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춥고 그늘진 건 아니야. 그렇게 평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그렇지만 칼날 같은 경험들을 떠올리기 시작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음, 생각의 연속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만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야. 나 스스로에 대해서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거든.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사고작용을 거치며 어른이 나를 꾸중하는 때 극단적인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나는 어른이 나를 훈계하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예리한 두

  • 김한세
  • 2019-04-01
궤도연습1

궤도연습1 강지이 온통 흰 벽뿐인 전시관에서 거대하고 느린 고래의 움직임을 플라스틱 화면으로 보았다 푸른 수면으로 나와 잠시 숨을 쉴 때 낮이든 밤이든 항상 몸엔 물이 있었기에 그의 표면은 빛이 났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래는 점점 더 깊고 까만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빛이 있어 푸른 곳으로 나오고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가끔 친구를 만나면 검푸른 중간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내 옆에 서서 함께 그것을 바라보던 연인들과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손을 붙잡은 이들이 전부 고래는 참, 아름답다고 말했고 나는 지하철에 앉아 아까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떻게 그곳의 벽은 그토록 새하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다 3호선이나 5호선으로 갈아타실 고객께서는 이번 역에서 내리시기 바랍니다, 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다

  • 강지이
  • 2019-04-01
VOID

VOID* 강지이 그 산책의 시작은 놀이터였다. 우리는 작고 푸른 오리 모양의 흔들의자에 몸을 넣은 채 아이의 그네를 밀며 노래를 불러 주는 여자가 노래를 끝마친 후 아이를 그네에서 내려 주고, 손을 잡고,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었고 너는 일어나서 곧바로 여자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네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잘 들리지 않아 어디 바람도 불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걸었고 첫 번째와 두 번째 골목 한낮인데도 가로등이 깜빡거리고 누군가가 버린 담배꽁초와 깡통들이 심각한 대화를 무기력하게 나누고 있었기에 우리는 땅바닥을 되도록 보지 않으려 노력했고 하늘을 보며 걸었다 구름과 바다란 단어를 수시로 헷갈리는 네가 커다란 바다가 하늘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말만 내뱉고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기엔 다들 너무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나는 좀 더 걸어도 괜찮으니 더 넓고 트인 곳으로 걸어 보자, 고 손을 잡고 골목에서 빠져나왔고 버드나무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잔풀만 발에 밟히는 곳 이곳에선 노래를 부를 수 있겠다, 생각하며 네가 노래를 부르자 버드나무가 그 노래에 맞춰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고 저 나무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을까 말도 걸지 않았는데 왜 혼자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걷다가 폐쇄된 박물관 아주 옛날에 죽은 왕들의 보물을 전시하던 곳은 문도 닫혀 있지 않았다 먼지 쌓인 전시관을 둘러보다 우리의 발소리는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생각하며 발밑을 내려다보니 전시물품을 감싸던 유리를 밟으며 걸어왔다는 것을 깨닫고 유리가 없는 트인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시 걷고 또 걷다 보니 커다란 기둥 옆엔 아무것도 두지 않은 넓고 트인 곳 바람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그들은 도착한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입을 다물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주었다 그래서 너는 노래를 부르고 나는 너의 짧은 머리 이제 여긴 바람도 불지 않는데 네 목덜미에 있는 잔털들이 조용하게 흔들리는 걸 보고 이것이 내가 너를 계속, * 2016-10-12~2017-03-17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와 2017-03-24~06-18 현대카드 스토리지 Numen/For Use 전시에서 영감을 얻음.

  • 강지이
  • 2019-04-01
축복

[단편소설] 축복 기준영 그녀가 아들 나이였을 때 일이다. 문고판 연애소설을 읽으며 사랑은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여자가 바다가 보이는 별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 남자는 밤낮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며 바싹 말라가는 것. 그가 아들 나이였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짐을 싸서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형은 아버지를, 누나는 어머니를 따라갔지만, 그는 할머니와 시골에 남았다. 그는 이별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떠나간 것과 남겨진 것 사이에서 많은 질문을 꺼내놓지 않는 것. 이제 그 날들로부터 걸어와 한 침대를 쓰는 그와 그녀는 여느 부부들처럼 서로에 대해서 어떤 부분은 너무 잘 알았고, 또 어떤 부분은 아예 몰랐다. 그들의 장단점을 조금씩 닮긴 했으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부모를 종종 놀라게 하는 외아들은 올해 열한 살이 됐다. 이름은 보경이었다. 부부는 친척들과 왕래가 그다지 없는 편이었다. 명절이나 생일에 대가족이 모여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하며 서로 덕담이라도 나누는 것이 바로 사는 일의 참된 면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런 견지에서는 자기들의 인생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고백할 사람들이었다. 그는 가족이 흩어진 즈음부터, 그녀는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으로 부모에게 큰 실망을 끼친 후로 점차 그렇게 되었다. 금요일 밤 아홉 시를 넘긴 시각, 부부는 이튿날부터 일요일까지 눈이 내리겠다는 예보를 들으며 거실에 앉아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내주 중으로 집안의 물건들을 대폭 정리해 공간 활용을 새로이 해볼 계획이었다. 새로 구입할 가전제품과 옷, 침구 세트, 처분해야 할 그릇과 화분, 기부할 만한 가구와 장난감 기타 등등. "자기 일요일에 코트 안에다 그거 입으면 좋겠어. 푸른 셔츠에 와인색 스웨터, 거기에다 회색 기모바지, 벨트는 새 걸로." 그녀가 말했다. "눈 오면 차는 두고 가야겠네. 보경이는 마음 안 변할라나?" 그가 중얼거리자 보경이 "아, 그럼요!" 하고 시원하게 대답을 하고 나서더니 제법 이런 카드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은택이네 삼촌은 무주에 살잖아요?" 그는 이 뜬금없는 질문에 뭔가가 걸려 있구나 싶으면서도 보경의 친구 은택이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녀석인지, 작은 키에 교정기를 낀 녀석인지 헷갈려서 아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서 눈을 끔벅였을 뿐 무슨 꿍꿍이냐고 얼른 묻지를 못했다. "삼촌이 스키장에서 일한대요. 기회가 좋잖아요. 나도 은택이 따라 거기 놀러가고 싶어요." "알았어. 나중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부부는 다시 리스트를 살피며 거기에 1, 2, 3 표시를 해서 우선적으로 처리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세부 구분해뒀다. 보경은 아버지의 동의를 얼른 끌어내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지난달에 사소한 거짓말을 들키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혼쭐이 났던 걸 떠올렸다. "거짓말 다신 하지 마. 너 거기 소질 없어. 표정에 다 써있다고." 보경은 엄마의 잔소리에 피곤해 했으면서도, 소질과 표정 운운한 그 지적은 너무 예리했다고, 여자들은 참 당해낼 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 2019-04-01
더 레드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소설]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대상-더 레드 윤별(윤예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체온 사이의 서사를 옮겨 적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풍경을 글로 묘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써넣은 낱말이 이 세상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그러면 어떤 세계에서든 언제나 가장 먼저 멸종할 단어는 빨강이다. * 피터, 하고 부르면 빨간 베레모를 쓰고 벤치에 앉은 203이 익숙하게 돌아본다. 그게 낯설어 나는 못내 아쉬운 투로 203을 발음했다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피터,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피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썼다. 귀 뒤로 쓸어내려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카락이 베레모 그림자 아래로 구불구불 흘렀다. "이제 좀 익숙해졌어?" "여전히 내가 왜 널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해 줄 생각은 없고?" 피터는 한 손을 바닥에 짚어 무게를 실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피터가 종종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지만 번호 대신 이름을 불러 달라는 건 지금까지의 숱한 요구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테였다. "농담으로라도 익숙해졌다고 해 봐. 그럼 알려줄게." 확신하는데, 214 네가 좋아할 만할 일이야. 피터는 그렇게 덧붙이며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이럴 때의 피터는 어렵다. 가늠하기도, 꺾기도. 이기지 못할 것을 예감한 나는 손을 뻗어 괜히 피터의 눈꼬리를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피터는 개의치도 않고 발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또 재촉한다. 알았어. 익숙해졌어. 이제 됐지?" 여전히 피터는 웃는 낯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터는 내 몸을 당겨 자기 몸에 바싹 붙였다. 몸이 피터 쪽으로 기울면서 새하얗고 빳빳한 교복 와이셔츠 칼라에 그늘이 졌다. 피터라는 이름보다는 훨씬 익숙했으나 여전히 몸에는 힘이 바싹 들어가는 게 척추부터 손가락 끝까지 느껴졌다. "책을 한 권 발견했어, 214." "그건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많잖아.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야, 들어봐. 우리가 읽었던 책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피터는 자신을 밀쳐내는 내 손목을 쥐고 눈을 반짝였다. 뭔데.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피터는 그제야 내 손목을 놓고 뒤집힌 치마 끝단을 다시 뒤집어 정리하며 길게도 뜸을 들였다. 피터는 늘 침묵이 죄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만은 예외인가 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잖아?" "응, 레포트 쓸 때 많이 읽었지." "세상에 배울 게 없는 책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어?" "그런 책이 있을 리 없는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네 직속선배 203이 집필부라며." 그러면 이제 직속선배 203도 직속선배 203이 아니라 직속선배 피터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비를 다 쏟아낸 구름처럼 둥실둥실 밀려나갔다. 그렇긴 한데. 피

  • 윤별
  • 2019-04-01
당신들의 광장

[문학리뷰(소설)] 당신들의 광장 - 황정은의 「파묘」를 읽고1) 박윤영 황정은의 「파묘」를 읽고, 나는 이순일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일흔둘인 이순일은 할아버지의 묘를 혼자 돌보다 결국 '파묘'를 선택했다.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는(183쪽) 남편의 무시와 "거기 뭐가 있"느냐는(177쪽) 자식들의 무관심에도 몇 십 년간 꿋꿋이 이어 온 일이었다. 북한어에서는 파묘를 '폐묘'라고 한다니, 자기 손으로 조부의 묘를 없앤 것이나 다름이 없다. 대를 이어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었기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올릴 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5년 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순일만큼의 용기도 내지 못했다. 쉰여섯이었던 아빠는 뇌출혈로 6시간 만에 급사했다. 우리 집엔 아들이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세 딸들만이 유일했다. 아빠가 생전에 매장을 부탁했었다는 말을 전하자 어른들은 난처한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에 담긴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묘한 웃음에 나는 내 의견을 관철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그때 나는 아마도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집안 어른들의 묘 사이에 앙상한 백일홍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평장을 한 아빠의 초라한 무덤이 있다. 성묘철만 되면 나는 그때의 나의 '용기 없음'을 자책하고는 한다. 1) 황정은, 「파묘」, 《창작과비평》 봄호, 창비, 2019. 이하 쪽수만 표기한다. (…) 그래도 누나, 너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지는 마.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192~193쪽) 장남 한만수는 엄마의 마지막 성묫길을 동행한 누나 한세진에게 "엄마가 하자는 대로"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충고한다.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하려는 그는 자신이 행할 수 없거나, 행하지 않은 일련의 일들을 '효'라는 유습(謬習)으로 치부함으로써 한세진의 행위에 담긴 의미를 폄훼하고, 잠시나마 느꼈을 정서적 부담감에서 손쉽게 벗어난다. 반면, 늙은 엄마의 "웃는 얼굴"에서 애써 의연해 보이려는 어떤 비장(悲壯)과 복잡한 심경을 감지한 한세진은 자신의 행위를 '효'라고 규정한 한만수의 발언에 거부감을 보인다. 떠난 이를 추모하고 그와의 추억을 간직하려는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가까운 이의 슬픔을 기꺼이 공유하려는 태도는 낡은 도덕이나 규범을 의미하는 '효'라는 기표 내에 국한될 수 없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이순일의 그런 마음은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에게조차 이해 받지 못한다. '엄마'(혹은 '아내')의 '조부'라서 늘 불필요한 행위로 간주되었던 이순일의 성묘는 결국 파묘로 끝을 맺었다. 아빠의 농담 같은 유언을 들어주고 싶었던 나의 마음 역시 내가 여자이기 때문

  • 박윤영
  • 2019-04-01
‘법의학(강대영 외)’ 239쪽 우측상단 사진 10-27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최우수상 수상작/시]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최우수상- '법의학(강대영 외)' 239쪽 우측상단 사진 10-27 곧(조유진) 준아, 내가 아는 세상의 다른 모든 준에게는 또다시 세상에 한 사람의 준이 사라졌다고차마 말해줄 수가 없어 오늘은 아아 그래 너의 부고는 아홉 사람을 거쳐 비로소 나에게로 전해졌구나 너에게 맞는 옷 또한 이 세상에는 부재하여 너는 존재하지 않는 몸을 공허로 감싼 채 매트리스 없는 침대 위에 뉘였다 그들의 카메라는 너의 부재를 촬영할 수 있었으나 이미 휘발하여 바람에 섞인 너의 언어는 차마 해독할 수 없었으므로 너의 육신은 기록되어지나 너의 정신은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젠가 머리가 반쯤 벗겨진 교수가 되어 연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말하겠지- 사진의 사체에서는 전형적인 지상시체 손괴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망과 동시에 부패는 시작됩니다 부패한 사체에 모여든 파리는 코건 입이건 귀건 축축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알을 낳습니다 구더기는 자라 파리가 되고 파리가 되어 알을 낳고 알은 다시 자라 구더기가 되고 다시 파리가 되어 알을 낳고 그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 구더기는 사체를 파먹어 이렇게 종내에는 뼈와 머리털을 빼곤 무엇도 남지 않습니다죽음이란 누구에게나, 그런 것입니다 준아, 내가 아는 세상의 다른 모든 준은 또다시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차마 너의 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어 오늘은 작가소개 / 조유진 뀨꺅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 2019-04-01
시간의 모양

[글틴스페셜-청소년을 위한 SF소설] 시간의 모양 배미주 럭키문방구 그 소년이 우리에게 온 덕분에, 리-다비트 구에 대한 우리 연구는 다시 희망을 보았다. 우리 셋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럭키문방구가 문을 닫은 걸 알았다. 럭키문방구는 우리 초등학생 때 만남의 장소였다. 밖에 오락기가 있어서 약속시간보다 좀 늦게 가도 마음이 편했다. 중학생이 된 뒤로는 만남의 장소가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야, 왜 문 닫았대?" 태영이가 아쉬워했다. '폐업정리' 종이가 색 바랜 채 붙어 있었다. 오늘 초여름치고 더워서 럭키문방구에서 파는 오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먹자고 오지 않았으면 문 닫은 것도 모를 뻔했다. "우리가 안 오니까 문 닫지." 건우가 말했다. 가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마음이 허전했다. 문방구 아주머니, 우리한테 잘해 주셨는데. "오늘은 뭐 하고 노냐?" 건우가 나른하게 말했다. "게임이나 하자. 너네 집 돼?" 태영이가 나를 보았다. "이준이네 집 안 되잖아. 누나 아파서." 건우가 태영이를 째렸다. 안 되는 줄 알면서 번번이 묻는 마음은 이해한다. 누나 아프기 전만 해도 우리 집은 최적의 아지트였으니까. 우리 셋은 내가 전학 온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친구다. 학원 안 다니는 아이들 예닐곱 중에 집 가까운 아이들 셋이 뭉친 거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학원에 다닐 필요는 없다는 엄마의 소신 때문에 학원 대신 스포츠센터에 가서 일주일에 세 번 수영을 배웠다. 솔직히 난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수영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힘든 게 싫다. 내 소원은 죽을 때까지 편히 살면서 크게 아프지 않고 수술도 받지 않는 것이다. 지지난해 여름에 건우가 찬 축구공에 맞아 손목뼈가 골절됐을 때 내 소원이 깨질 뻔했다. 다행히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골절된 뼈가 어긋나지 않아서 몇 달 동안 깁스하는 걸로 끝났다. 그때 사람 몸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걸 알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땐 늘 오늘은 뭐 하고 놀까가 대화 주제다. 초등학교 땐 집 근처 공원에서 농구하고 배드민턴도 치고 축구공도 차며 놀았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편의점에서 군것질하고 우리 집이나 태영이네 집에 가서 주로 게임을 했다. 건우네 집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셔서 거의 안 갔다. 태영이네 집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늦둥이 동생이 있어서 좀 성가셨다. 엄마, 아빠가 모두 일하시고 누나도 학원에 다녀서 텅 비는 우리 집이 놀기엔 최고였다. "공원이나 가자." 공원 쪽으로 슬슬 가는데 누가 불렀다. 돌아보니 문방구 아줌마였다. 못 본 지 일 년은 된 거 같은데 하나도 안 변하셨다. 단발머리도 기운 없는 표정도. "어, 안녕하세요!" "그래. 잘들 지냈니? 너희 셋 다 엄청 컸다. 이준, 누나는 좀 어떠니?" "그냥…… 잘 있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뒷머리를 긁었다. 누나 병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줌마, 가게 파신 거예요?" 건우가 물었다. 건우는 여기 토박이라 나름 동네 사정에 밝았다.

  • 배미주
  • 2019-04-01
어제는 태풍이 왔다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수장작/시]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어제는 태풍이 왔다 여전사 캣츠걸(남)(송호정) 뉴스는 호우주의보를 보도했다. 잠가 놓았던 난민들이 쏟아졌다. 철새처럼 무리지어 수근거렸다. 간밤에 301호가 무너져 내렸다고 302호와 303호는 속닥였다. 십자가 위에 걸린 비바람처럼 웅성거렸다 무너져 내린 길목을 걷느라 어른들은 아이가 되었다. 모두의 무릎이 축축했다.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만 보인다는 비벼락은 낯 익은 소문이었다. 다 헤진 야상을 걸치고. 사람들은 자주 주머니 속에서 뒤척거렸다. 가게들은 전부 닫혀 있거나 닫혀 버렸다 내일은 내일의 태풍이 올 것 아무데나 버려진 바람을 한 움큼 훔치고길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훌륭한 소란이었다 때때로 부슬비가 내리면 나란히 걷던 발자국들은 두려워한다. 갈라진 골목을 한 줄로 걷고 싶어 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입버릇이다. 비상식량처럼 부러진 손톱을 아껴 먹으며. 다만 여전히 비린내가 풍긴다고 말한다. 오늘의 날씨는 흐림이라는 전보다. 먹구름들의 뒤꿈치가 무너진 301호 예수상에 걸렸다 거꾸로 뒤집힌 교회엔 302호 303호 사람들의 입모양으로 만원이었다. 오늘은 전투적으로 계속된다. 뉴스는 영영永永, 호우주의보를 보도한다. 거리에 고여 가는 불행들에 대해 생각하며. 어제의 폭풍처럼 잠잠한 눈꺼풀을. 내린다 작가소개 / 송호정 2002년 여름, 월드컵보다 한 발 느린 속력으로 탄생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매일 1인1닭을 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 현재는 검정고시 준비 중. 《문장웹진 2019년 04월호》

  • 송희지
  • 2019-04-01
물구나무

물구나무 윤여진 다 쓴 연필처럼 얼굴의 겉면이 뭉툭해졌다면 거꾸로 서자 당신이 문을 열고 떠난 쪽으로 뾰족해지자 비로소 창백해지자 이젠 눈을 감으면 속눈썹에 달라붙는 빛을 머무르게 둘 줄 알아 몸 한가운데 꿈틀거리는 심지를 기억해 내기도 하지 곁을 셈해 보다 한 겹씩 깎아내다 보면 어느 날 당신은 내 앞에 서고 나는 당신임을 한번에 알아보지만 거꾸로 서면 화분은 모든 것을 뱉어내고 비는 하늘로 솟기 시작해 천천히 차오르는 시간이 목까지 잠겨 가도록 둘 수 있어 나는 당신에게 귓속말을 건네 이게 우리의 마지막일까? 대답 대신 당신은 얼굴을 지우고 미처 흔들지 못한 인사가 문 너머로 아득하게 몰려오는

  • 윤여진
  • 2019-04-01
봄의 연인과 방아쇠

봄의 연인과 방아쇠 윤여진 당신은 천천히 파묻던 고개를 든다 천진하게 입가에 매단 물방울, 어느 저녁 옮아온 빛깔을 떨어트리면 당신의 입 꼬리를 쓰다듬을 수 있다 당신은 입을 벌렸을 뿐인데 탕, 신호가 터지고 도는 피를 뒤집어쓴 채 뛰어나가는 것이 있다 수풀이 활짝 열리고 그것이 달아나는 동안 피어오른 연기는 가볍게 찢긴다 끼얹던 물소리가 범벅인 채로 방금 당신의 입 꼬리는 무엇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오른손은 수풀을 헤치고 왼손은 뒤로 감추는, 번갈아 먹는 다짐이란 몸 안의 커다란 풍선을 띄우는 것 그러다 팽팽해진 줄을 한순간 놓아버리는 것 그것은 가볍게 날아갔을 것이다 마구잡이로 무성해지는, 뒤늦은 마음 같은 것이 수풀 사이를 헤집으면 싸늘한 그것이 놓여 있다 주위로 무수한 날벌레가 한 방향으로 돌고 있는, 소멸하는 것에는 저토록 많은 벌레가 모여드는 걸까 잠시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오랫동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불길한 예감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힘껏 피고 스러지던 마음, 희미해지는 발을 담그며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꾸만 넘어지던 때가 있었다

  • 윤여진
  • 2019-04-01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 감상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감상&비평] 제14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우수상 -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 감상 물개맨 대개 영화를 비평할 때에는 영화에 반영된 현실의 무언가를 주목하기 마련이지만, 간혹 세상에 자신을 반영시키는 작품들이 분명 있다. 어느덧 시작한 지 40년이 넘은 스타워즈 시리즈는 영화가 현실의 문화를 지배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스타워즈 시리즈의 외전 격인 를 논하기에 앞서 '스카이워커 가문'에 얽힌 이 거대한 사가(saga)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미국의 신화이다. 스타워즈를 격상하기 위한 꾸밈말이 아니라, 별다른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미국인들에게 스타워즈 시리즈는 정말로 일종의 대체 신화로써 여겨진다. 실제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그리스 신화, 아서왕 전설 등 전 세계의 영웅 신화를 분석하였고 조지 루카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에 적용했다. 고전적인 선과 악의 대립을 다룬 스타워즈는 놀라울 만큼 단순한 플롯과 인물들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굉장히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이야기를 펼쳐낸다. 결국 이 작품은 수많은 신화의 원형적 본질, 인간의 무의식적 열망에 접근해 엄청난 흥행을 이끌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3대 SF 프랜차이즈로 불리는 , , 중에서도 스타워즈 시리즈는 독보적인 위치와 상징을 차지하고 있다. 우선 인물들이 그렇다. 능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수치화할 수 있는 최근의 '히어로'들과 다르게 스타워즈 영웅들의 능력은 매우 모호하게, 마치 '신'처럼 그려진다. 히어로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초능력이나 기술과 달리 스타워즈의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포스'는 정확한 위력과 발동 조건을 전혀 알 수 없는 매우 신비한, 신적인 힘이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대립하는 클래식 3부작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전형적인 오이디푸스형 인물이다. 눈여겨볼 만 한 점은 1~3편에서 아버지 아나킨의 이야기를, 4~6편에서 루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개봉 순서는 루크의 4~6편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 전복된 계보는 흔하디 흔한 '출생의 비밀' 서사에 서스펜스를 더하며, 상상도 못 했던 적의 정체를 알게 된 루크의 절망과 관객의 충격을 극대화하고, 작품 전체에 비장미를 감돌게 함으로써 매우 성공적으로 신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시공간적 배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짙은 영국적 색채를 숨기지 않으며 현실의 이슈들을 적절히 반영하는 , 23세기 미래 지구라는 공간을 빌려 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사회의 다양성과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과 다르게 는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듯한 신화적 배경을 택하고 있다. 첨단 우주선과 칼싸움이, 웅장한 군대와 이동수단으로써의 동물들이 혼재하는 세계관은 흔치 않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프닝 타이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래전 멀고 먼 은하계에서(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라는 두루뭉술한 말은 사실 스타워즈를 관통하는 정보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 불독
  • 2019-04-01
익명대담 5회 - 문단 권력에 대하여

[익명대담] 익명대담 5회- 문단 권력에 대하여 ㅇ 기획 : 《문장웹진》 청년 작가 간사(김남숙 소설가, 양안다 시인) 김남숙과 양안다는 혜화에서 만났다. 익명대담이 진행되면서 계절이 세 번이 바뀌었다. 변한 게 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고 그저 벌써 5회째 진행 중이다. 등단제도, 편집 시장, 평론가의 역할, 문단 권력까지. 예민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시작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익명임에도 많은 말들을 걷어냈다. 그들이 친절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는 지나치게 친절하고 누군가는 지나치게 불편하고 불친절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김남숙과 양안다는 지나친 친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김남숙과 양안다는 어쩌면 친절한 편에 있으니까. 이번 익명대담은 문단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멈춰 있는 듯하다. 이번 회 차는 대담을 나누기보다 산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익명 A가 본 '다수 A의 얼굴'에 대한 산문이다. 이번 익명대담에 용기 내어 참여해 주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다음 익명대담 6회도 문단 권력이 주제다. 6회 차는 여러 A들이 모여 'A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이 다수를 지칭하는 'A와 A의 얼굴'에 대해 좀 더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시인 A가 본 얼굴 등단제도는 사방에서 공격받는다. 나는 어찌 되었든 등단제도의 수혜자고, 만일 등단하지 않았다면 내 작품이 책으로 묶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등단이라니? 대체 얼마나 구시대적인 방식이냔 말이야! 나도 어느 자리에서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폐해를 나 역시 알고 있으니까 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자기 제자를 뽑고, 어느 창작교실에서 강의하는 시인이 거기 다니는 사람을 뽑는 걸 종종 봤으니까, 이게 문단이냐?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등단제도 대신 추천제가 존재하던 때로 돌아갈 순 없고. 그렇다면 예비 작가가 각 출판사에 자유롭게 시집 원고를 보내서 실력과 대중성을 평가받는 방식은 어떨까? 등단제도의 심사위원은 서로서로 해먹는 것 같아서 미덥지 못하니까 말이다. 출판사의 문학 팀 편집자라면 원고의 질과 대중성을 공정하게 판단하여 퍼블리싱을 결정하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수많은 시집 원고가 그들의 이메일함으로 들어오고, 지금도 그걸 꼼꼼하게 살펴볼 시간이 그들에겐 많지 않다. 게다가 편집자에게도 친분이란 게 있고, 때로는 그 편집자 자신이 시인이거나 평론가이기도 하고, 그래서 종종 그는 신춘문예나 문학잡지에서 등단자를 결정하는 심사위원이기도 한데? 나는 앞으로도 계속 시집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구두계약이긴 하지만 다음 시집을 낼 출판사도 정해졌고. 나는 내가 시를 못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 사

  • 2019-04-01
늦은 봄밤의 풍습

늦은 봄밤의 풍습 조성국 산벚꽃 핀 앞산이 소쩍새 울음으로 다가왔다 환하던 마음이 왠지 모를 눈물방울로 떼구르르 굴려 나올 듯이 눈두덩에 오래 머물렀다 앞산이 그 뒤의 큰 산에게 어둑어둑 저미어 안기듯 더 넓게 나누기 위해 중천으로 향해 가는 달빛을 오래오래 지켜보는 것도 내가 할일이어서 병처럼 도지는, 삼십 수년째 빛의 고을에 살며 몸에 밴 습관이기도 하여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지키는 일이어서 지키려고 애쓰는 일이어서, 하여 나는 월력을 보지 않아도 총과 밥과 피를 생각하는 때임을 알았다

  • 2019-04-01
수선화 피는 망월28-2번지

수선화 피는 망월28-2번지 조성국 1 늦눈 내린 북향에 한데 뭉쳐져 감싸듯이 희게 빛나서, 푸근한 무덤 앞 어매가 심었다는 수선화 촉에 금이 벌어졌다 벌어진 금으로 틈 생겨 땅거죽이 열렸다 좀 더 넓은 넓어서 좀 더 낳은 세상으로 가는 통로와 같이 어매의 수선화가 한껏 피었다 2 술 한 잔 치다가 막소주 한 모금에도 금세 붉어지는 얼굴이 문득 생각나 묏등에 쑤실쑤실 욱은 잡초 솎는데, 묘비명 읽던 딸애 눈동자 호동그레진다 매 맞고 불로 지져진 듯이 그을린 자국의 웃통을 드러낸 채 가까스로 왼눈동자 부릅뜬 너의 진상규명사진첩을 익히 보았던 터라 몹시 겁이 난 모양이다 얼마나 서운할까, 살아 있으면 저도 이만한 자식 두셋은 두었을 터인데 볕바른 무덤만 덩그마니 터를 잡았다 저도 늙는가, 무덤귀가 살짝 헐었다 3 나만 멀쩡해서 미안한, 살아남아서 더 아픈 한 시절 네가 살아남았다 한들 마음 편치 않긴 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몸 도사리듯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도 새맑게 웃는 버릇 여전하구나 앳된 흑백의 청춘과 붉은 산그늘 드리워진 영정 맡에 향 피우듯 담배 한가치 물려 놓고 예서 눈빛 치떠 뜨며 몇 발자국 떼면 확 붙었다 꺼져 가는 성냥개비의 뼈 그스름같이 고스란히 밴 비명소리, 그러나 증거 댈 수 없는 무등의 청옥동 4수원지 기슭을 후다닥, 쫓겨 뛰는 숨 가쁜 발자국 소리 여전히 들리듯 보이는데 보이듯 들리는데 어쩌자고 나는 너를 먼저 보내고 매번 바람의 조문만 받는 것이냐 너를 먼저 보낸 슬픔의, 분노의 무게는 자꾸만 자꾸만 아련해져 가벼워지는 것이냐 * 28-2는 고(故) 이철규 열사 묘지번호. 열사는 1989년 광주 조선대학교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공안합수부의 수배를 받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광주 북구 청옥동 무등산 제4수원지 기슭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 2019-04-01
책방곡곡 부산 영도 손목서가 1편 ㅡ 어른이 되어 어린이책을 읽다

[독자모임-책방곡곡] ※ 기획의 말 2019년 독자모임 코너 [책방곡곡]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의 독립서점들을 방문하고, 그 지역의 문인 및 독자의 목소리를 청취하고자 합니다. 각 지역의 문학 생태계와 특수한 현안들이 곳곳에 계시는 독자들에게 서로 공유되어, 사유와 비평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책방곡곡 부산 영도 손목서가 1편 ㅡ 어른이 되어 어린이책을 읽다 사회/정리 : 유진목참여 : 서은주, 최진경, 황선화 부산 영도 바닷가에 서점 '손목서가'를 연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열 평 남짓 작은 서점의 서가를 꾸리면서 잘 팔리는 책이라든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내가 서가에 꽂아 둔 책들이 잘 팔리는 책인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책인지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책들만으로도 작은 서점의 서가는 금세 가득 차버렸고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꼼꼼히 살펴 고르는 손님들 덕분에 서점 주인으로서의 즐거움과 보람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와중에 어린이책 서가를 꾸리면서 여러 달 막막함을 느꼈는데, 지금껏 읽어 본 적이 거의 없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내게는 어린이책을 선별할 수 있는 기준조차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린이책을 구비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일 텐데 나는 꼭 어린이책 서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서점에 자주 오시던 단골손님이 집에 가지고 있는 수백 권의 어린이책을 이동도서관처럼 가지고 나와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읽는 것이 꿈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신이 나서 손목서가 마당에서 하면 좋겠다고, 그리고 저도 아이들과 같이 읽어 보고 싶다고 대뜸 이야기했다. 하루는 어떤 손님이 서점에 없는 책을 주문하고 가면서 한 동네에 서점이 생긴 것도 좋은데 어린이책도 있어서 참 좋다고 하셨다. 나는 서점을 하는 동안에 어린이책을 많이 읽어 보고 싶어서 조금씩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뒤 그분이 주문한 책을 찾으러 와서는 어린이책 두 권을 선물로 주고 가셨다. 그저 서점에서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신기하기도 하고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날로부터 어린이책 서가를 볼 때마다 그분들 얼굴이 생각났다. 내가 왜 어린이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고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곧장 연락을 하지는 못하고 매번 망설이기만 하다가 만 한 좋은 기회가 없겠다 싶어 불쑥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는지 청했다. 집에 있는 어린이책을 더 많은 어린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최진경 씨. 서점에 책을 사러 와서는 어린이책을 선물하고 간 서은주 씨. 그리고 어린이책을 읽어 주는 모임에 가서 위로를 받고 돌아온 뒤로 어린이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황선화 씨. 그리고 어린 시절 읽지 못한 책을 지금이라도 실컷 읽어 보고 싶은 서점의 주인인 나. 이렇게 손목서가를 통해 서점 주인과 손님으로 만난 네 사람이 함께 읽고 싶은 어린이책을 한 권씩 추

  • 2019-04-01
매혹의 지도를 그리는 방법

[기획-다시 이 작가] 매혹의 지도를 그리는 방법 - 홍일표 시인 인터뷰 고봉준 내게 '홍일표'라는 기호는 두 개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단정하고 점잖은 태도가 그 하나이고, 최근 몇 년 동안 이전의 시세계와 단절하면서 밀고 나가는 새로운 시적 경향이 다른 하나이다. 앞의 것이 '사람'에 관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시'에 관한 것이다. 홍일표 시인은 『매혹의 지도』(2012) 이후 새로운 작시법을 선보이면서 전통적인 서정의 세계에서 이탈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평론가는 이 변화를 "그동안 그가 축적해 왔던 시학적 준거와 기율의 일대 전환을 예고하는 돌올한 실례"(유성호)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그의 시집들을 읽어 보면 일련의 실험적 경향이 분명한 목표 지점을 설정하고 나아가는 여정이라기보다는 그때그때마다 시가 위치하고 있는 토대를 허물어뜨림으로써 다른 세계를 개시하려는 부정의 몸짓처럼 느껴진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이러한 '부정'에 손을 내맡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여정을 일회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일관성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태도를 가리켜 '단정하고 점잖은 태도'라고 평가했지만, 실상 이 말 속에는 부정의 연속에 좌절하지 않는 내적인 단단함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홍일표의 두 권의 시집에 해설을 썼다. 2007년에 출간된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천년의 시작, 2007)과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문학동네, 2018)가 그것들이다. 첫 번째 해설은 시풍이 변하기 이전에 출간된 것이고, 두 번째 해설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시집이다. 생각해 보니 공교롭게도 시적 경향이 바뀌기 직전의 시집과 가장 최근에 출간된 시집의 해설자가 나인 셈이다. 사실 두 권의 시집이 보여주는 시세계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약간이나마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독자의, 또는 해설자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앞의 시집은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이라는 다소 이국적인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인간과 자연의 투명한 관계에 대한 욕망이나 실존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인간적 몸짓 등 서정의 전통적인 어법과 결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이고 익숙한 어법은 『매혹의 지도』(문예중앙, 2012) 이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시적 경향의 단절과 변화는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도대체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터뷰 대상을 결정하고 제일 먼저 묻고 싶은 질문도 이것이었다. * Q. 선생님의 약력을 살펴보니 1988년에 잡지로 등단한 후 1992년에 신춘문예로 다시 재등단을 하셨더군요. 왜 등단을 두 번씩이나 하셨는지, 등단 전후의 사정을 좀 들려주십시오./span> A. 1988년 《심상》 신인상,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어요. 등단한 지는 오래됐지만 동년배의 시인들에 비해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선배도, 동료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악전고투하며 버텨 왔지만 발표 지면이 많지 않았고, 그러다

  • 2019-04-01
콧수염, 없는 인간

[단편소설] 콧수염, 없는 인간 이상희 『내용 없는 인간』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엉뚱하게도 『콧수염』이 들어 있었다. 파리 행 비행기 안이었다. 두 책 모두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가 적힌 단순한 디자인이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가방에 책을 넣을 때 다시금 제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반사적으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이 부리부리한 남자였는데 고골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가 어느 틈엔가 『내용 없는 인간』을 가져가고 거스름돈처럼 『콧수염』을 넣어 둔 후에 『고골 단편집』 뒤에 얼굴을 숨기고 있을 리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멍청히 표지를 쳐다보다가 책을 펼쳤다. "콧수염을 잃어버리나요?"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말을 걸었다. "네?" "내껀 코를 잃어버렸거든요." 부리부리한 남자는 고골의 소설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코」를 읽은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고는 다시 『콧수염』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난데없이 독서토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인공은 아내를 웃기려고 콧수염을 밀었는데, 아내도 친구도 아무도 그가 애초에 콧수염을 기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십 년간 줄곧 콧수염을 길러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급기야······. "내가 보니까 소설에서는 죄다 뭘 그렇게 잃어버리더라고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나도 여권을 잃어버렸어요.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틀림없이 손에 쥐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대던 그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말을 하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고골에게 돌아갔다. 나는 그가 또다시 말을 걸어오기 전에 눈을 감았다. 내 의식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기울어 불명료해졌다. 그러는 사이에 비행기는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파리에 다다랐다. 덜커덩, 비행기 바퀴가 난폭하게 활주로에 부딪쳤다. 그때 머릿속 어딘가에 스파크가 일었고, 예지가 생각났고, 소스라치듯 눈이 번쩍 떠졌다. 입국장에 늘어선 사람들 틈에서 예지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예지의 인중에는 콧수염이 붙어 있었다. 채플린보다는 숱이 많고 아인슈타인보다는 숱이 적은 콧수염이 예지의 작은 코를 수북이 받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지를 흘낏거렸고 예지는 턱 밑에 걸려 있던 마스크를 올려 썼다. "위스키 괜찮아요?" 예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스크를 벗어 소파에 던지고 싱크대 위 선반을 뒤적이면서 물었다. 정오의 태양 볕이 거실로 느리게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태양 볕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좋다고 답했다. 예지는 "싸구려지만 먹을 만해요."라고 말하면서 위스키를 따랐고, "이상해요?"라고 묻고는 자기 콧수염을 가리켰다. 이상하다기보다는 낯설었다. 콧수염이 달린 여자를 본 적은

  • 2019-04-01
소원

소원 채길우 할머니가 등을 긁어 달라 하시면 윗옷을 들추고 등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낡고 해진 브래지어 호크를 푼다. 손톱을 세워서 위아래로 쓸어내릴 때 고속도로처럼 하얀 줄이 섰다가 진흙을 뒤집은 봄밭처럼 붉어진다. 할머니가 시원하다 살 것 같다 하시는 두껍게 눌린 진한 자국보다 먼 북쪽 그리고 동쪽에 있는 거기가 할머니 고향의 지도와 가깝다. 등에 맞댄 양손바닥만으로는 가릴 수 없어 문질러 지워도 보고 닦아도 보는 깊이 파인 살과 골의 건너편 미세한 봉분들이 돋아난 비좁은 자리마다 할머니 손은 이르지 않아서 내가 대신 매만지는 묽고 비린 땅을 위하여 마지막은 손톱을 거두고 피맺히지 않도록 지문으로만 닿아 보았다. 다시 브래지어 묶어 주고 옷을 내려 주자 가려움을 숨긴 너무 작은 뒷모습 나는 함부로 재단된 경계와 선 들에 뒤덮여 찢기고 바스러진 몸을 껴안으며 말한다. 할머니 오래오래 살아요 둘이 같이 손잡고 너머에 가야죠

  • 2019-04-01
‘시’라는 질문 혹은 대답

[문학리뷰(시)] '시'라는 질문 혹은 대답 이진경 시는 질문이다. 리쾨르가 지적한 바처럼 일상 언어의 사용법에서 벗어나 지시대상과 의미를 분리시키고 고유의 문법 속에서 다른 의미를 찾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의 특성은 읽는 이에게 아름답고 낯선 미적 경험을 선사하기도 하고 시 읽기를 정복하기 어려운 도전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한 시도 끝에 실패의 부스러기만 남아 있다 해도 좋다. 시는 심미적 차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므로 현실과 주체의 분리를 유도하는 측면이 있기에 '질문'만으로도 남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생존과 결부된 삶에 천착해 살아가는 '주체'에게 삶이 무엇인지를 묻고, 답해 주는 시-순간은 언제인가. 나의 시-순간은 대형서점에서 한 시인의 시집을 처음 보았을 때와 닮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제목에 이끌려 그 시집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목이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삶을 내 것으로 존치하려는 시도를 무화하는 그(들) 때문에 더 이상 아파하지도 외로워하지도, 울지도 말라고. 그건 단지 그(들)와 네가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시(인)의 말. 그것은 삶이라는 억압 체계를 자신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내내 아파야만 하는 내게 위안이 되어 줄 언어로 다가왔다. 그 시집을 통해 이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에 나는 지금도 시의 곁에서 여전히 삶을 갱신하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파서 신체를 당연시하지 않게 될 때 신체를 새롭게 경험하는 반갑지 않은 기회를 갖는 것"(테리 이글턴)이라면, 삶이라는 경계의 바깥으로 내몰린 순간 우연히 접하게 된 시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또 다른 기회일 것이다. 바로 여기서 시의 쓸모가 가시적 형태로 드러난다. 그곳은 언제나 위기와 동요의 한복판이다. 시의 언어가 반짝이며 떨어지기 때문이다. 떨어진 곳은 대개 아픔이 비롯된 곳이며, 그즈음 시는 우리에게 '대답'인 듯 안겨 온다. 너를 죽일 거라고 말하면 나를 끌어안았던 어깨와 좀 더 길어질 것만 같았던 팔 안쪽의 따뜻함이 내 눈을 덮고들리지 않았던 걸 들리게 만들어 개미 떼가 늘어납니다 굴속에서 사람들은 바쁘게 고개를 돌립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랜턴을 켭니다 주름이 많습니다 나는 주름이 많아요(그래요 나는 주먹을 쥐고 이를 꽉 깨물었습니다 긁으면 안 된다고누가 내 손을 가져갔습니다) 안전모를 썼다면 불빛에 속지 않았을 겁니다모기가 윙윙거립니다 중간까지밖에 안 왔는데 목을 축이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사슴 같아요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소리 없이 다가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나는 가끔 움직이지 않는데도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요 지저분하게 웅덩이에 빠지면 빠진 대로 물을 흘리면서 발자국을 남기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어디로든 가게 될 겁니다알고 있습니다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으면 안전모를 쓰게 될 겁니다아주 혼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은경, 「묶인 사람」전문 (릿터, 2018 12/2019 01, 15호) '

  • 이진경
  • 2019-04-01
승진

승진 채길우 야생 완두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길들여지면서 열매가 다 익은 후에도 자발적으로 깍지가 열려 씨앗을 퍼뜨리는 능력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었으므로 식용작물이 되었다. 꼬투리를 잡은 누군가의 손이 비틀린 멱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때까지 입 꽉 다물어 속을 비치지 않았기에 사랑받았고 함부로 옷이 벗겨져 다섯 알 중 네 개를 잃고도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다는 산술로 계약을 따냈다. 완두는 좀처럼 터지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는 초록의 순종으로서 같은 껍질 속 똑같이 생긴 얼굴로 가지런히 줄 서 기다리며 선별과 배제는 우연이거나 더 높은 곳의 뜻임을 순순하게 다짐하는 겸손한 위치에서조차 간택되기 위해 무거워진 목을 늘어뜨린 비산도 탈출도 하지 않는 어여쁜 두상들

  •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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