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호
- 작성일 2020-02-01
- 댓글수 0
기획의 말
2020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건비치
나미나
여러 해변을 앞에 두고 이곳의 역사에 대해 생각한 날이 오래다. <벽의 반대말>을 읽고 기댐에 대해 생각해 봤다. 기댈 곳을 찾는 것은 내 마음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나 작품 제목 : 침묵의 나선-건비치_장지에 분채_210x148cm_2018>
문장웹진 2월호 살펴보기
[단편소설] 기도 황시운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좁고 어두운 내 방에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면 오래 묵은 먼지가 햇살 속을 부유하며 반짝이기 시작한다. 빛 속에선 먼지마저도 제 존재를 발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한 번은 오지 않을까. 나에게도 딱 한 번은 오지 않을까. 아닌가.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나에게 그런 순간은 결코 오지 않으려나.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어찌 됐든 내 얼굴에도 빛이 드리워진다. 눈이 부신다. "사기? 사기라고? 거기 너만 못한 사람이 하나나 있는 줄 알아? 너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 천지야. 잘난 척 좀 그만 하고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좀 들어. 넌 어떻게 된 게 매사 뭘 해보기도 전에 초부터 치고 그러냐?" 김 여사가 몰아붙였다.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김 여사는 긴 한숨 끝에 다시 쏘아붙였다.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단 줄 아나……. 하여간에 속이 터져서 못살아, 내가." 한껏 독이 오른 김 여사를 더 자극할까 싶어 얼른 시선을 돌렸다. 누렇게 바랜 천장 벽지 속 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리며 이 집에 머무는 것과 기도원으로 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덜 위험할지 가늠해 봤다. 놈이 있는 한 집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김 여사가 말하는 기도원이란 곳은 어떨까. 암환자를 낫게 하고 하반신이 마비된 환자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이 일어난 곳이라고 했다. 물론, 김 여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날 리 만무할뿐더러, 그런 곳에서 뜯어먹을 것도 없는 나를 끌어들일 리가 없었다. 도대체 내게서 얻어낼 게 뭐라고 나를 받아 주겠나. 설마 김 여사가 그동안 애면글면 틀어쥐고 있던 돈을 내놓기라도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가진 거라곤 박우식 씨의 사망보험금뿐이었다. 놈조차 한 푼도 알겨내지 못한 돈을 김 여사가 그리 쉽게 내놓았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보내려는 김 여사도 보내지 않으려는 놈도, 나를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양쪽 다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드러난 위험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위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어찌 됐든 놈에게서 벗어나는 편이 나으려나. 아니면 이미 바닥까지 드러난 위험 속에 머무는 편이 나으려나. 아니, 어차피 내게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저울질을 왜 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널을 뛰었다. 이곳에서 벗어나 보려는 시도를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근처에 놓인 김 여사의 휴대전화를 간신히 끌어당겨 혓바닥으로 버튼을 눌러 신고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경찰이 찾아왔다. 비쩍 마른 중년 남자와 평범한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둘 중 나이 든 이가 문지방을 밟고 서서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러곤 턱을 치켜든 채 킁킁거리다가 한껏 인상을 쓰며 내게 물었다. "아가씨가 신고했어요?" 나는 그의 뒤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김 여사의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제발 절
- 황시운
- 2020-02-01
가상 물질 운전 전호석 나는 목이 말라 눈을 뜬다 차는 멈춰 있다 나는 운전하는 방법은 알고 있다 이 철제 몸뚱이가 무엇인가 언제 어디를 들어내 기름칠을 해야 할까 그저 악셀을 밟고 창문을 열어 손을 밖으로 빼 바람이나 맞을 줄 알았지…… 어쨌거나 조난이다 다른 차들은 지나다니지 않고 보험회사에 전화를 거는 일은 비참하다 일제히 켜지는 백색 가로등 리얼리티를 위해 재미가 없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틀린 사람이다 앞니가 하나 없는 데다가 운전 면허증도 없으며, 음주를 즐겨하고 요즘 시력이 몹시 나빠져 밤에는 불빛을 보는 일이 괴롭다 운전을 한다면 무언가를 쳐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당신이나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말린 버섯이기를 바란다 세상이 식초 냄새가 나는 내 발 같지 않기를 바란다 산성비를 아랑곳 않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알맞게 익어 간다 나는 없는 자동차의 실재하는 보닛을 연다 불 꺼진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와 엔진오일과 분골되어 엔진오일에 첨가된 황소의 넋을 기려야겠다 사고치지 말자 사고치기 싫다 집에 가서 부모님들 앉혀 놓고 괴로운 소리를 하고 잘못되었다는 소리나 듣고 나는 겁난다 30km/h 이상 빠르게 운전하기 싫다 그래 본 적도 없다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아예 없다 보험사 차량이 도착한다 점퍼케이블을 설치하고 나에게 당신의 죄는 운전만 할 줄 알면서 운전을 방만한 것이라 말한다 근데 왜 나는 전쟁을 무서워할까 버섯들이 어둠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나무 밑동에서, 특히 잘린 나무 밑동의 나이테에서 자라나고 있다 당신에게 운전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아니다 차 정비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전기를 견뎌낸다면 죽지 않는다면 삐거덕거리는 사람들을 실컷 마주치며 뒤로 뒤로 걸어가서 나는 정자와 난자가 된다 조금 더 뒤로 걸어가서 플라스틱과 나일론 한을 품은 공룡들이 현대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 전호석
- 2020-02-01
팔판동 전호석 편의점 앞 플라스틱 탁자에 둘러앉아 우리는 생일파티를 한다 촛불이 누웠다 일어서는 동안 개 짖는 소리 회오리가 낙엽을 그러모은다 유리문이 열린다 작은 종이 울리고 담배를 쥐고 걸어 나온 사람은 플라스틱 탁자의 얼룩을 잠시 바라본다 일행이 하나 둘 도착한다 나는 고깔모자의 부재를 생각하며 유치한 짓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낯선 일행에게 소곤거린다 촛농이 케이크를 덮어 간다 눈이 먼 일행이 플라스틱 칼을 들고 일어난다 그는 추위로 몸을 떨며 입을 작게 벌려 무엇인가 중얼거린다 재봉선이 터진 인형처럼 하얗고 하늘거리는 것이 흘러나온다 일행은 끊임없이 늘어난다 골목 너머로 빈 캔이 굴러간다 우리는 팔판동을 서서히 잠식해 간다 모두들 서로의 이름을 떠올리는데 아무도 취하지 않았고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철 대문 너머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동자 칼이 케이크를 파고든다 오늘은 여기 모인 누구의 생일도 아니다 벌려진 손 위로 머리가 새까맣게 탄 성냥이 떨어진다 * 팔판동에는 편의점이 없다
- 전호석
- 2020-02-01
안경을 쓰면 눈이 작아진대요 이병국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러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느냐고 대답했어요 얼버무린 건 아니에요 동네에선 흔한 일이죠 짧은 여행은 비행기는커녕 차도 타기 어려워요 아무려나 되는 대로 해요 얼굴을 씻는 것만큼 지치는 일도 없어요 마트에서 집어온 빼빼로가 몽땅 부러졌어요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안부는 알아보기 힘들어요 돌아올 때를 대비한 동선을 짜야 해요 내일이라도 당장 출근할 수 있다는데 마음이 좋지 않아요 불을 피운 흔적을 덮으며 처지를 생각해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주소를 잃었어요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있었나요 미처 빠져나오질 못했잖아요 스트리트 뷰로 내려다본 맵은 지도 한 장 들고 헤맸던 이야깃거리를 낚아채요 화면 속 멍울이 지평선을 밟고 대신 설명해 줘요 마땅히 그러해야 해요 캐리어를 끌며 놓치지 않을 거라죠 이건 비정상적인 행동이에요 은밀한 염탐을 포기해야 해요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처음 해본 일이라는 말 뒤에 숨지 말아요 쉼 없이 달려왔잖아요 우리가 그때 보았던 건 무엇이었나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데 우리는 오류에 머무르곤 해요 그러니 안경을 쓰지 않아도 평소와 다를 게 없다는 말을 들었죠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안경 너머를 볼 수가 없네요 그런데 우리 집은 해발 몇 미터인가요
- 이병국
- 2020-02-01
보행 신호 시 유턴 이병국 좁은 길 안쪽, 숨어 있던 걸음이 머뭇거리면 생선 굽는 냄새가 저녁놀처럼 퍼졌다 희미한 술렁거림이 낮게 가라앉고 먼 데서 바람은 투명했다 속수무책으로 나는, 길을 망설였다 골목을 메운 거짓이 한 무더기의 불빛을 비껴가고 흰 종이를 채우는 하루가 밀려나고 주린 말을 돌이켜 문장 속에 밀어 둔다 목차가 순서를 잃었다는 듯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처럼 깊게 새겨진 우연의 습관 계속된 기다림 곁으로 누군가 빈 걸음을 짓는다 비스듬히 흐른 것들을 피해 몸을 옮긴다 어떤 차이가 군중의 환호가 되는지 낮달의 밀도만큼 낯설게 다가오고 뒤늦은 서지(書誌)가 구겨지고 조각난 말들이 한숨에 부드럽게 박힌다 땅을 짚고 겨우 일어서도 나는, 갈피를 깁지 못한다 허공을 맴도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디뎌야 할 저만치의 고요 보행 신호가 떨어져도 길 복판에 선 허기가 지고 가쁜 책을 펼치듯 좌우로 갈라진 말이 느릿한 발치에 머뭇거린다 골목으로부터 비롯된 발자국처럼 나는, 얼룩으로 매어 있다
- 이병국
- 2020-02-01
[단편소설] 계시, 꽃 고진권 ○ 계시 사진 속 보디빌더는 안경을 썼고 맨바닥에 옆으로 누운 채 왼쪽 팔꿈치를 세워 벽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왼손에 책을 들고 멀리 저쪽에 시선을 두었다. 검은색 경기용 트렁크를 입은 몸에 청재킷만 걸친 채 앞을 풀어헤쳤다. 빨간색 벽돌로 된 바닥과 벽 앞에서, 보디빌더의 몸은 벽돌보다 짙은 갈색으로 빛났다. 이 모습을 본 요한은 그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았다. 90년대 초반, 요한은 중학생이었다. '왜 그 사진을 오려 두지 않았을까.' 몇 년이 흘러도 그 사진이 잊히지 않았다. 요한은 그 보디빌더를 생각하면서 몸만들기를 시작했다. 팔굽혀펴기를 했다. 하루에 50회에서 한 번에 50회로, 한 번에 50회에서 하루에 100회로, 하루에 100회에서 한 번에 100회로……. 팔굽혀펴기를 한 번에 100회 이상 할 수 있게 되자, 요한은 자극을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 손으로 점프해서 박수하며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가슴을 바닥에 대며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책상이나 의자 위에 발을 올려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물구나무서서 팔굽혀펴기를 했다. 방법의 변화에 따라 몸의 느낌이 달라졌고 발달하는 부위가 달라졌다. 재미가 붙었다. 스트레칭과 복근 운동을 했고 단거리 달리기를 했다. 요한은 어렸을 때부터 겁이 많았고 잘 울었고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길 잘했다. 친구가 많지 않았고 구기 종목을 못 했다. 소심하고 곱상한 모범생이 될 자질이 다분한 아이였지만, 요한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소심하고 곱상한 모범생은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이 지향하는 아름다움은 '소심함과 곱상함'보다는 '대범함과 강인함'에 가까웠다. '맨바닥에 누워서도 책을 손에 들 만큼 대범하고 온몸에 근육이 풍성할 만큼 강인하리라.'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요한은 몸만들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밤늦게 집에 와서 지친 몸으로도 그날 해야 할 운동량을 채웠다.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강도를 높였고 고통스러운 느낌을 참아내며 목표한 횟수에 도달했다. 요한이 이런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결국 요한의 '자기'였다.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운동의 강도를 높이는 '자기', 고통스러운 느낌을 참아내며 목표한 횟수에 도달하는 '자기'. 성실과 인내에 대한 보답으로서, 이보다 더한 것이 세상에 없었다. 성실과 인내를 통해 알게 된 '자기'만큼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깨끗한 교복을 반듯하게 입고 상의의 단추를 끝까지 채웠다. 교복 입는 게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요한이 웃었다. '너무 싫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자기가 웃겼기 때문이다. 나름 근육질이었지만, 요한은 대범하다고 하기엔 너무 섬세했고 강인하다고 하기엔 너무 예민했다. 그래도 거울 속에서 웃는 요한은 나름 너그러웠고 여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점점 '대범함과 강인함'에서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더 자유로운 것이 더 아름다웠다. '맨바닥에 누워서도 책을 손
- 고진권
- 2020-02-01
식물원 일지 김안 죽은 사람들이 자꾸만 내게 길을 묻습니다 나도 살아 있는 것은 처음인데 생활을 잃은 사람들이 자꾸만 내게 조언을 구합니다 내게 무슨 생활의 자취가 있다고, 나는 그저 말을 조작하는 사람일 뿐인데 나를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피해 죽은 척 목을 꺾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제각기 다른 구호들과 찬송들과 춤들로 가득한 채, 제각기의 정의와 선의와 애국으로 곪아 가는 마음의 열도 그 속에서 어제 만난 친구와 그와 싸운 친구와, 그들을 말리던 친구와 엎어지던 식탁 옆에서도 평화롭게 곯아떨어진 강아지 한 마리 돌아보니 모두 죽은 듯 누워 있습니다 다 아무 일이 아니었다는 듯이 대체 왜 사냐고 물었던 이들은 내겐 가족이었고 대부분의 가족들도 왜 사는지도 모른 채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그저 내 몫의 부끄러움만을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부끄러웠던 일은 말하지 못합니다 그토록 진부하고 수많았던 사랑처럼 사랑이란 헛된 믿음처럼 처음으로 죄를 저질렀던 순간도 그것이 죄라고 내게 말했던 사람도 우리는 마주 보면서 여전히 선한 척 웃고 있습니다, 난 법 없이 살 수 있어요, 라고 말해 봤자 쓰러진 식탁과 깨진 유리 조각들과, 시뻘겋게 물든 고깃덩이 그래 봤자, 나는 지나치게 정상적입니다 내가 쓰는 시는 그게 문제지요 술도 덜 깬 채 집으로 돌아와 죽은 듯 눕습니다 아침이 오고 살아 있는 듯 일어나 처음 보는 딸아이에게 이끌려 놀이터로 나갑니다 더러운 비둘기들이 걸어 다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딸아이가 먹다 남긴 과자 부스러기나 던져 주다 보니 희망은 납작해집니다 과자 부스러기로 모여든 개미나 밟아 죽이면서 늙다가 늙어 곪다가 눈을 뜨니 깊이 없는 이승입니다 내가 쓰는 건 백지 위에 술이 덜 깬 채 누워 있는 징그러운 표정입니다
- 김안
- 2020-02-01
드문 김안 마음으로, 마음의 최대치로 만든 방 안에서 밤새도록 아이가 놀고 있다 아이의 놀이는 언제 끝날까 이 징그럽고 끔찍한 방 안에서 너와 나는 무엇을 만들어낸 것인지 붐비고 들끓고 징그러울 만치 하얀 폭설을 뚫고 도착한 책 더미들 속에서 나는 입부터 망하기 시작하지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무렴요 건강하셔야죠 전 진정 아무 일 없습니다 아, 옆에 아이가 있어서요 밤마다 천장에는 자꾸 구멍이 뚫리고 물이 떨어진다 아이야, 이 방은 안전하단다 이 방에만 있으면 우리 집은 떠내려가지 않을 거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쓸데없이 하얀 벽을 타고 벼락같은 수직처럼 천장으로 뻗쳐 올라가는 검은 곰팡이 내 입에서 말이 떠나고 아이는 그 사이사이마다 무지개를 그린다 그리고 말한다 찍어 줘 요즘 들어 아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제가 만든 성이나 제가 그린 그림 들을 찍어 사진을 남겨 달라는 것 찍어 줘 찍어 남기는 것 남겨서 기억하는 것 지옥의 습관처럼 최대치로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쓰는 것 기억하여 바득바득 이를 갈며 후회하기 위해, 최대치로 기억을 끌어 모아 내가 받은 선의를 찾는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아직도 이 방 바깥에는 숨 쉴 공기가 남아 있다 파랗게 언 볼 위로 하얀 입김을 불어 본다 마음은 드물고 우리는 얼마나 더 오래, 함께, 가까스로, 미치지 않고서 흘러가야 할까.
- 김안
- 2020-02-01
[책방곡곡] 구리 갈매책방 북적북적(제2화) 인문학 독서모임, 두 번째 - 『산 자들』, 장강명, 민음사, 2019 진행 : 김채현참여 : 금정은, 김점열, 김명일, 권영도, 강산옥 인문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현실과 세상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또한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길로 인도하기도 하지요. 지치고 힘들 때, 위로와 용기가 필요할 때, 자아를 확장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을 때 인문학은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둘러보라고, 더불어 살아가기, 공생하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인문학을 통해 삶을 좀 더 깊이 있게 성찰하고 다듬어 나가는 힘이 길러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사회자 : 이번에 함께 읽게 된 『산 자들』이란 소설은 취업, 해고, 구조조정, 자영업, 재건축 등의 문제를 통해 이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함과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우리 역시 '산 자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이나 총평을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김점열 :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문장은 다소 건조하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현실을 기자답게 팩트를 살려 그려낸 것이 좋았어요. 권영도 : 제가 이 모임이 아닌 다른 독서모임에서 처음 시작을 이 작가님의 『한국이 싫어서』로 했어요. 이 책 역시 분열이라는 주제로 제게 와 닿았고. 한국의 현실을 잘 짚어낸 것 같아요. 김점열 : 아쉬운 점은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에요. 균형 감각이 갖춰줘 있긴 한데,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작가가 다소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사회자 :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까요? 장강명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보여지는데요.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독자들이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는 스타일이죠. 그리고 「현수동 빵집 삼국지」에서 함께 공생을 제안하는 부분이 대안이 되지 않을까요? 프랜차이즈 빵집 한편에서 또 다른 빵을 함께 구워내는 것이죠.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나요? 김명일 : 저도 이 작가의 책은 처음인데요. 르포 형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연작소설이다 보니 하나하나가 커다란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것 같고요.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읽다 보니 알게 되더라구요. 오랜만에 사실주의 작가를 만난 느낌이었고,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데에 이 소설의 의의가 있지 않나 싶어요. 김점열 : 제가 봤을 때는 이 책은 암묵적인 진보가 아닌가 싶어요. 김명일 : 저는 꼭 어느 한쪽으로 나누기보다는 굉장히 신선한 작가라고 봤어요. 강산옥 : 저는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대기발령이 실제로 있었다고 생각하니 참 안타깝고, 그런 상황을 겪는 동료를 보거나 직접 겪는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또 제가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 2020-02-01
동시대 문학 기혁 기습적으로 다가와 여행이라고 불렀다 목적지를 몰랐지만 몸속 어딘가 방향성이 생겼다 하루하루 기차를 타는 기분으로 떠나고 있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사랑이나 죽음 따위의 종착역도 없었다 지루한 덜컹거림 속에서 같은 창밖을 보고 같은 멀미를 하곤 했다 굳게 닫힌 집들과 무덤, 반쯤 헐린 자연이 반복되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두 덩이 화물로 앉아 있었다 표면에 붙은 라벨을 읽는 것으로도 대화는 충분했다 타인의 마음까지 마중갈 수 있다면 나의 몸은 목적지가 아니길 바랬다 잠든 당신을 기습적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 기혁
- 2020-02-01
대설주의보 ― 낭광증(狼狂症) 기혁 버려진 인형 위로 눈이 내린다 버려진 강아지가 인형을 따라 눈을 맞는다 행인이 우산을 씌워 주자 인형을 물고 와 뺨을 핥는다 밤사이 폭설이 내린다고 했다 버려진 것들이 자꾸만 사람을 닮아 간다 저 여린 것들도 에둘러 안부를 묻고서 사소한 종말 따위를 알리려 애쓴다 내가 늑대였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피로 물든 일상을 앞에 두고 자주 눈을 맞았다 뜯어진 감정의 곁에서 사람의 눈알을 뜨기도 했다 버려진다는 건 얼마나 투명하게 영혼을 바꾸는 일일까 예상을 함구하기로 한다 새벽녘 새로 만난 주인처럼 눈길을 걷는다 청소차가 종량제 봉투만을 싣고 떠났다
- 기혁
- 2020-02-01
[단편소설] 메켈 정비공의 부탁 나푸름 잠에서 깬 너는 순간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러다 곧 이곳이 시칠리아 섬 서쪽 해안에 있는 작은 호텔이라는 걸 깨닫지. 너는 눈을 감고 오늘의 일정을 되새겨. 오전에는 바닷가의 염전 지대를 따라 산책을 할 거야. 정오에는 마을 광장에 있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어제 읽다 만 소설을 마저 읽는 거지.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예약한 식당에서 정어리와 회향을 곁들인 파스타에 와인을 마시며 지역의 미식 전통을 즐길 거야. 밤에는 호텔로 돌아와 매춘부와 사랑을 나누는 거지. 너는 곧 상황을 납득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지.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수증기가 올라와. 의뢰인에게는 지나치게 더운물로 샤워를 하는 습관이 있거든. 물줄기에 닿은 살이 빨갛게 익어 가. 너는 무의식적으로 왼쪽 귀를 만지려 하지만, 이윽고 손이 가는 방향을 바꿔 비누를 집어 들지. 개미에 물린 것처럼 왼쪽 귀가 따끔거려. 너는 고통을 참으며 거품을 낸 비누로 온몸을 문질러 씻어. 너는 키튼 앤 마거릿 주식회사의 기버(giver)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 의뢰인들은 대체로 너의 기억에 높은 만족지수를 보였지. 작년에 가장 평가가 좋았던 프로젝트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던 한 달간의 기억이었어. 의뢰인은 B 의류 회사의 임원으로 출장을 제외하곤 혼자서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는 50대의 중년 남성이었지. 너는 작년 겨울 의뢰인을 대신하여 상업 등반대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올랐어. 그리고 아이스폴 지대를 통과하는 도중 갑작스러운 눈보라를 맞아 동료들과 함께 산에 고립됐지. 너는 그곳에서 운 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동상으로 괴사한 왼쪽 귀의 삼분의 일을 잘라내야 했어. 회사에서는 네가 겪은 재난에 애도를 표했어. 그리고 네가 겪은 지나친 고통의 시간은 그 귀퉁이가 조금씩 잘려 나간 채 의뢰인에게 이식됐지. 그 결과, 의뢰인은 기획했던 것보다 극적인 기억을 전달받았어. 바람이 왼쪽 귀를 스칠 때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귀 끝이 가려운 지경에 이르렀지. 의뢰인은 귀를 긁어도 없어지지 않는 그 가려움 때문에,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했어. 고통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인 기분이 든다고, 평생 잊지 못할 모험이 되었다고 했지. 너는 누비아 탑에서부터 해안가의 염전 지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해안 쪽으로 눈을 돌리면 둔덕처럼 쌓인 흰색의 소금 결정과 붉은 지붕의 풍차들이 보이지. 바람에 함유된 소금기가 네 몸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너는 멈춰 서서 소금 결정이 쌓인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봐. 이따금 코끝으로 스며드는 비린내로 인해 구역질이 난다는 것 이외에, 너는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않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감탄스럽지 않다기보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네가 하는 일에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야.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보는지니까.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는 것, 음식을 씹고 음미하는 것. 그렇게 감각을 통해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 그런 것들은 너
- 나푸름
- 2020-02-01
[문학더하기(+)] 우리 이웃의 문학 – 장류진, 이주란, 윤이형의 소설을 통해 본 한국 소설의 인간학 한영인 1. 내 '시민'인 이웃들? 이웃은 누구인가. 한때 한국 문학 비평 담론을 주도했던 '타자와 환대의 윤리'를 떠올리게 하는 이 물음은 사실 많은 종교들이 초창기부터 붙잡고 씨름하던 화두이기도 했다. 사랑의 종교로 일컬어지는 기독교에서 사랑의 소여 대상으로 다름 아닌 이웃을 지목한 것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衆生) 역시 희로애락에 긴박된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이웃을 가리킨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종교들이 지녔던 시대적 혁명성은 정복 전쟁 과정에서 경쟁과 제거의 대상이었던 이방인/타자를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주어 끌어안아 마땅한 '이웃'이라는 범주로 도약시킬 것을 요청한 데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도 쉽게 내뱉을 일이 아니다. 아니, 바로 그 점에서 이웃은 즉자적인 타인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웃은 차라리 지옥 속에 빠져 있는 타인을 '목숨을 건 도약' 끝에 끌어올려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세울 때 간신히 탄생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종교와 문학은 (그리고 이따금 철학은) 그 도약의 과정에 어떤 시적인 순간이 내재해 있음을 안다. 카렌 암스트롱이 야스퍼스의 말을 빌려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명명했던 고대 종교의 창세기에 나타났던 평등주의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지향은 전쟁과 폭력에 맞서 인류가 이루어낸 담대한 도약임에 틀림없지만1) 이내 실정성(Positivität)에 스스로를 구속하면서 해방의 잠재력을 잃고 차갑고 형식적인 교리로 물화되어 갔다.2) 알다시피 이후의 역사는 실정화 된 종교의 허위성과 형식성을 극복하고 본래의 가르침에 깃든 해방의 역량을 회복하려는 투쟁의 역사였다. 멀게는 루터로 상징되는 종교개혁의 족적이 뚜렷하고 비근하게는 1980년대 남한 민중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해방 신학의 꿈이 선연하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휩쓴 뒤에도 '이웃을 향한 열망'은 잔존했다. 그 잔존한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사르트르가 "본질상 영구 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라 칭했던 문학이었다.3) 이렇게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근거로 삼은 것 역시 사르트르의 저 문장이기 때문이다. 고진은 문학이 모든 굳어진 사회질서를 해체하는 부정성의 힘을 담지하며 그 부정성의 동력을 통해 영원한 혁명성을 담보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 뒤, 작금의 문학에는 부정성과 혁명성 대신 단지 오락성만 남게 되었기 때문에 근대문학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혐오가 점증해 가는 현실 속에서 타자의 이웃됨의 (불)가능성을 서사와 재현의 윤리를 경유해 치열하게 사유해 온 우리 문학을 부정성(혁명성)과 오락성이라는 부당 전제된 이분법 하에서 오락성의 손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정리해 내기란 고의적인 과소 진술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지금 한국 문학이 얼마나
- 한영인
- 2020-02-01
새 김명리 새벽에 잠들고 해 뜨기 무섭게 일어난다 해진 입술의 포말 모자란 잠의 덤불에서 백파의 바다가 넘실거릴 때도 있다 이 시각에 지리산 내원사 비로자나불이 보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겨울 마당에 내린 서리 밟고 고양이 향기 밥 주고 뒷숲 서성이다 쪽문 열고 들어서니 백동백처럼 생긴 가슴이 희고 통통한 새 한 마리 장항아리 위에 앉았다 그예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다
- 김명리
- 2020-02-01
불 꺼진 눈 김명리 마당 한 귀퉁이 얼어붙은 죽은 길고양이 한 마리를 묻어 주었을 뿐인데 온몸에 마른 잎사귀 돋아나고 있네 눈은 영혼이 들고 난 창구였는지 죽은 짐승은 눈부터 썩어 들어간다 한때 사랑의 욕망이 한때 살육의 욕망이 넘나들었을 눈 언제 폐쇄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 우체국 창구에서 돌연 건재약 냄새가 난다 내 고통 나의 괴로움에 그 누구도 손대지 말라는 듯 지금은 다만 불 꺼진 눈 두 눈이 움푹 팬 잿빛고양이가 은단풍나무 아래
- 김명리
- 2020-02-01
[기획특집 / 좌담] 본 좌담은 2019년 7월 중 페이스북을 통해 작가들에게 도움이 될 온라인 플랫폼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김서령 작가의 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등단제도, 출판과 결합된 문예지 시스템 등 기존 문학장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체제의 한계적 상황, 매체 환경의 변화에 따른 작가의 존재 양식 변화와 문학 생태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들의 등장 등 최근 한층 강화되고 있는 문학계 내의 흐름과 변화에 부응하여 해당 의견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지원부의 검토를 거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현장소통소위원회에 상정되어 주요 의제로 논의되었다. 이후 지금까지의 정부의 문학 지원 방식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과 함께, 작가는 물론 문학 생태계 내의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새로운 방식의 지원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해 현장소통소위원회 주관으로 마련된 이번 좌담은 모두 세 차례(11.18, 12.16, 12.27)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1.1, 1.8, 1.15, 모두 3회로 연이어 게재할 예정이다. 끝으로, 이번 좌담에 귀한 의견으로 참여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 논의가 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단계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 좌담 참여자 명단(회차별, 가나다순) · (1차 좌담) 김대현, 김서령, 오창은, 이민호, 이설야, 정훈교, 황규관 · (2차 좌담) 김지윤, 박서련, 박소란, 신지영, 유희경, 허 희 · (3차 좌담) 김미정, 김태형, 배명훈, 최진석, 최하연, 하명희 문학 공공 분야 창작 발표 및 유통 확대를 위한공유경제 플랫폼 제3차 좌담 플랫폼 기반 사업의 가능성과 올바른 방향설정을 위해·Ⅲ 사회 : 최진석(문학평론가) 좌담 : 김미정(문학평론가), 김태형(시인), 최하연(시인),배명훈(소설가), 하명희(소설가) 최진석 : 안녕하세요. 오늘 여기는 문학 공공 분야 창작 발표 및 유통 확대를 위한 '공유경제 플랫폼' 도입 관련 연속 좌담회의 세 번째 자리입니다. 이 좌담회는 한국 현대문학장에 새로운 변화를 담아내기 위한 플랫폼 구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으로, 여러분들이 겪은 다양한 경험과 제언을 함께 나누어 보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저는 평론글을 쓰는 최진석이고 오늘의 사회를 맡기로 했습니다만, 주로 여러분들의 말씀을 잘 듣고 갈무리하는 역할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우선 각자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미정 : 안녕하세요. 김미정입니다. 문학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책의 유통, 지식문화의 유통에 관심이 있습니다. 마침 개인적으로 어제 광주에 있는 지인이 하는 서점(책과 생활)에 행사차 다녀왔어요. 어떤 지역에서 작은 서점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 기분 좋게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는데요. 책이나 지식문화를 통해 서로 연결되기 원하는 많은 독자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 같아서 저도 많이 고무되었습니다.
- 2020-02-01
신수동 수화물 터미널 이용훈 그렇게 펄펄 끓고 있으면 어찌하랴 물어보면 왜 우스운 건지 우는 건지 우그러진 상자들 시큼한 냄새 숨이 멎는다 사내들 여전히 짐을 나른다 주임은 속도 모르고 느려 터져 속 터진다 고래고래 지른다 땀에 쩔어 윗도리 벗어재낀 장정들 입 모아 목 타들어간다 말해도 상자는 이리저리 옮겨지겠지 이국 청년들 안취엔, 안취엔 * 읊으면 그래, 그래 취하려면 멀었다 누워버리면 갈 곳도 없다 소매 접어 올리고 바짓단 추켜잡고 접고 무릎까지 접는다 형씨, 그거 알아? 테트리스, 뭐 하다 이곳까지 오셨어? 저거 봐라 무너지겠네, 형씨, 오락실도 안 가보셨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물어본들 아나 물 한 모금 마시고 오라 해라 넘어가겠다 머리 돌아간 선풍기 날개 달고 돌고 수레 끄는 사람들 돌아버리기 전에 먼지바람 일고 무너지고 그는 화물 꾸러미에 깔려 일어날 수 없다 화물차는 달리고 싣고 나른다 컨베이어 벨트는 쓰러진 그를 흘려보낸다 분류되면 옮겨지고 수레에 싣고 실리고 그를 짐짝 사이에 잠시 낑가 놓는다 벨트 가동되면 벨 소리 징하게 울린다 미친 듯이 밀려온다 달려들고 돌고 돌고 분류하고 분류되고 쌓여 있는 상자들 육면체 모서리 구겨지고 짜부라지고 주소지 불명이라 한켠으로 내동댕이쳤다 누락된 짐짝 돼서 서로 원수지지 말자 찌그러지지 않게 옮겨라 주임도 한 마디 던진다 그나저나 오늘 왔다는 사람은 어디 있는지 인사 신고는 왜 없는지 벌써부터 노랗다 안 봐도 보인다 이렇게 묻기라도 하면, 말 걸지 말고 가던 길 가소 어서 보내고 오소 쩍쩍 갈라진 갈색 소파 선수 대기실에 교대 시간 기다리는 수화물 노동자는< * 직업소개소에서 알려주는 말은 안전이다. 그들도 안취엔 하고 소리 낸다. 숙련공은 누가 쓰러질지 알고 있는 눈치지만 오늘은 쉬-쉬 한다. 멀리 이국에서 건너온 노동자가 화물차 안으로 이끌려간다.
- 이용훈
- 2020-02-01
살갗아래 이용훈 탕 그릇에 수저 휘저으면 식구라 불렀다 킁킁 냄새 맡고들 기어 나오는지 어제 왔다는 걔 손놀림이 빠르다는 걔 장반장 밑에서 일 시작하는 걔 홀연히 사라지는 걔 그저 걔 너를 걔라 불렀다 목청껏 울었고 미친 듯이 짖었다 종종 내 옆에 존재 했다 했지만 보고 있자니 멀어서 형태만 가늠해 본다 저게 사람 새끼인지 건설되는 꼴 콘크리트 들보에 황혼이 깃든다 온통 붉어서 너까지 타오른다 너가 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는 재수없다 침을 뱉는다 신발을 세워 흙 바닥을 툭툭 내리쳤다 패이는 구덩이가 달 표면을 닮아서 한참을 바라본다 슬슬 돌아가자 수신호를 받는다 받았지만 너를 부를 수는 없었다 너는 승합차를 쫓아온다 차량의 불빛은 한 치 앞 노란 줄 선 하나를 쫓는다 아스팔트 길 옆 마른 넝쿨이다 타르 냄새 진동한다 코끝이 아프다 새들은 침묵했다 풀숲 사이 두 개의 흰 점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따라왔을까? 차 안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숙소 주변을 가득 메운 소리가 사라졌다 그 밤에 사라졌을 거라 짐작한다 너는 몸을 뉘운다 성난 울음을 멈춘 지 오래돼서 숨쉬기조차 조심스럽다 아주 낮게 엎드렸다 진득한 어둠은 너의 허기를 조롱하듯 나뭇가지를 꺾는다 너는 이빨을 드러낼 거다 울음소리를 억누르고 싶지만 사람들은 너를 걔라 불렀다 승합차에 차곡차곡 오르는 사람들은 소리가 사라졌다, 듣지 못했다 한다 누군가는 창밖을 보고 있다 누군가는 하품을 한다 누군가는 시동을 걸고 누군가는 누군가는... 맞은편에 사내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 녀석들은 돌아올 거라 한다 너를 알고 있다 기척 없이 다가온 너에게 돌을 던졌다 꼬리를 흔들어도 돌을 던졌다 괴사한 가죽으로 파리가 날고 있다 매질을 했다 흐르는 침 좀 봐라 목을 매고 매질했다 벌거벗겨진 너는 그슬린 그 밤에 악다물고 너는
- 이용훈
- 2020-02-01
보트를 쓴 남자 고영민 2인용 보트를 머리에 쓰고 한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그의 얼굴은 보트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쓰고 온 보트를 벗어 물가에 내려놓고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사내였다 사내는 호수에 보트를 힘껏 밀어 넣더니, 그 위에 올라 천천히 노를 젓는다 쓰고 왔던 기다란 모자가 사내를 태운 채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 고영민
- 2020-02-01
기어가는 기분 고영민 뱀을 보았다 뱀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낮은 풀들 사이를 꼿꼿이 선 채 걸어가고 있었다 길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같은 보폭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끈이 풀린 것처럼 나는 갈림길에 서 있는다
- 고영민
- 2020-02-01
[문학더하기(+)]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이선우 1_ 두 개의 밤 "밤은 어두웠으며,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1) 바루지의 『십자가의 성 요한』에 나오는 구절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 문장을 빌려와 사랑의 문형(紋形, figure)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 나는 이 역설적인 사랑의 문형을 다시 문학의 표제로 삼아 보려 한다. 스무 살 무렵에는 예사로 넘겼던 이 문장을, 몇 년간 오래 들여다보았다. 처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밤이 밤을 밝힌다는 역설이었는데, 나중에는 '어둡다'와 '밝히다'를 연결하는 '그리하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둡다, '그리하여' 밝힌다. 여기에는 아무런 논리적 결함이 없다. '그리하여'는 두 문장을 인과관계로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문제는 앞뒤 문장 모두의 주어가 '밤'이라는 사실이다. 상반되는 서술어의 주어가 동일하다는 모순은 몇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첫 번째 의문은 이것이다. 어두운 것도 밤이고 그 어둠을 밝히는 것도 밤이라면 이 밤은 대체 무엇인가. 롤랑 바르트의 논지(argument)에 따르면, "밤(nuit)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둠의 은유(감정적인, 지적인, 실존적인)를 야기하는 온갖 상태로서, 그 속에서 그가 몸부림치거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2)이다. 여기서 핵심은 밤이 어둠의 은유라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인 어둠이라는 것이다. 몸부림치는 시공간이 밤이라면 그 마음을 진정시키는 곳 역시 밤이라는 역설. 바르트는 그것을 '암흑(tinieblas)'과 '어둠(oscuras)'으로, '십자가의 성 요한'3)은 '감각의 밤'과 '영의 밤'으로 구분한다. 전자가 '사물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혼란으로 눈이 먼' 상태라면, 후자는 소유하고 해석하려는 맹목의 눈을 가만히 감은 상태, 욕망에 사로잡혀 암흑 속으로 떨어지는 대신 사랑의 어두운 내부 안에 조용히 앉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이 "두 번째 밤이 첫 번째 밤을 감싸며, 어둠이 암흑을 비춘다."4) 그러나 누구에게나 '두 번째 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암흑 속에 갇혀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이들도 있다. 무엇이 이 둘의 차이를 낳는가. 어둠의 이중성에 대한 사유는, 단순히 모든 것은 양가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어둠조차 고정된 어떤 것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에게 밤의 다른 지평을 열어 보이는 것, 어둠에 거하되 어둠에 갇히지 않고 밤을 밝히는 밤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이 사유가 가 닿고자 하는 지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성 요한이 신앙을, 바르트가 사랑을 논하면서 어둠의 이중성에 대해 천착했다면 노자는 도(道)에 이르는 길을 논하면서 현(玄)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바르트는 글의 마지막에 "이 어둠을 어둡게 하는 것, 바로 거기에 모든 경이로움의 문이 있다"는 『도덕경』의 한 구절("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을 인용하는데,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으로 유명한 『도덕경』 1장5)의 결구가 바로 이 구절이다. '도라고
- 이선우
- 2020-02-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