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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 작성일 2020-03-01

기획의 말

2020년 커버스토리에서는 웹툰, 사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을 모시고, 《문장 웹진》 과월 호 수록작 중 1편을 선정해 시각화 해주시기를 요청 드렸습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기도」(황시운, 《문장 웹진》, 2월호)를 읽고

뜨거운 반복

나미나

가끔 이 현실이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디의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기도를 하곤 한다. 부디 이 상황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란다면 나 먼저 주변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문장웹진 3월호 살펴보기

이번 달 기획은 쉽니다.

이번 달 기획은 쉽니다.

  • 2020-03-01
뼈의 중량

[단편소설] 뼈의 중량 편혜영 초인종이 울리자 도진은 먹고 있던 스낵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볼륨을 줄였다. 불을 끄고 창마다 커튼을 치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했지만 사람 있는 기척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긴장해서인지 숨소리가 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고픈 동물의 울음 같았다. 조금 지나자 방문자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도진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애원이나 부탁이 아니었다. 요구나 경고에 가까웠다. 방문자는 집에 도진이 있는 걸 알았고 자신이 아는 걸 감추려는 마음이 없었다. 도진에게 겁을 주고 싶어 했다. 그들은 도진이 근무하는 은행으로 먼저 왔다. 기합을 주려는 체육 선생처럼 도진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섰다. 비속어를 섞거나 야, 하고 부르기도 했다. 도진에게 받아야 할 게 있고 도진 때문에 손해를 입은 듯 굴었다. 형에 관해 알아내는 과정에서 도진의 신상을 파악한 듯했다. 도진이 형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게 아니면 형이 잠적하기 전 도진에게 뭔가 넘겼으리라 확신했다. 도진은 어리둥절해하는 동료와 고객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들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도 수치스럽고 미안한 마음은 들었다. 고개를 숙이면 신발이 보였다. 도진의 입사를 기념해 몇 해 전 형이 사준 구두였다. 움직임과 운동성에 따라 가죽이 갈라진 신발을 보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사과를 받으려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도진의 마음이. 형이 언제나 잘못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을 다한 적도 있었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뜻대로 안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죄책감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사과로 충분할 리 없었다. 욕도 먹고 멱살도 잡혔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을 텐데, 시작이었다. 멱살을 잡힌 채 형의 행방을 추궁 당했다. 목이 졸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목이 메어 컥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멱살을 쥔 사람이 손의 힘을 조금 풀어 주었다. 숨이 막히고 얼굴이 달아오른 와중에도 마음이 놓였다. 도진에게 분노를 푸는 사람조차 도진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지점장이 나와 봤다.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지점장에게 몰려갔다. 얼마 전 부임한 지점장은 외국인이었다. 그는 방문자들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못 알아듣는 척했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캄 다운, 캄 다운 플리즈 하며 양손을 아래로 내저어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파에 마주 앉으면 아무리 씩씩대던 사람들도 화를 가라앉혔다. 지점장은 비치된 냉장고에서 캔에 든 혼합 과즙 음료를 꺼내 내밀었다. 방문자가 누구든 계절이 언제든 상관없이 지점장은 냉장 음료를 제공했다. 따뜻한 차는 마시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재빨리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식은 음료가 나았다. 지점장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다가 틈을 봐서 제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들은 통역해 주기를 기다리며 두리번거렸지만 그러는 사람은 없었다. 긴 얘기를 빠르게

  • 편혜영
  • 2020-03-01
지역 사회

지역 사회 원보람 애인이 말없이 떠나고 여자의 뱃속에는 이방인이 찾아왔다 여자는 외국어를 몰라서 밤새도록 울었다 아비 없이 배가 불러오면 총 한 자루를 쥐어 주는 마을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들이 바이오리듬에 따라 향기를 바꾸고 있다 골목 담장에는 낙서로 위장한 글씨들이 가득하다 불행이 타인에게 옮겨 가길 바라는 주술이다 장미의 감각으로, 가시를 세우는 쓸쓸한 감각으로, 화단의 식물들이 푸른 잎맥 속에 햇빛을 장전했다 마을에는 이상한 규칙이 있다 이곳에 사는 남자들은 매일 밤 러시안 룰렛을 해야 한다 개구멍으로 드나들던 사내들은 이름이 없어서 안전핀을 걸고 방아쇠를 당겼다 마을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공동의 표적을 정했다 여자는 어제 죽은 사람이자 오늘 처음 보는 사람, 마을의 역할은 새로운 이방인에게 총 한 자루를 쥐어 주는 일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두 사람이 마을을 떠났다

  • 원보람
  • 2020-03-01
초록 달을 만나러

[단편소설] 초록 달을 만나러 백승연 "다른 행성에 너랑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좀, 찝찝해." 혜지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다가 맥주잔을 들었다. 혜지의 말을 온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서의 나의 하루하루도 고되고 힘든데, 척박한 제2 지구에서 또 다른 나는 어떤 방식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의 복제인간이 제2 지구로 보내지는 걸 허락하면 학자금 대출을 모조리 갚을 수 있었으니까. "쓰리디 업종이겠지? 분명히?" 혜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25년 전 인류는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한 두 번째 행성을 발견했다. 새 행성의 이름을 붙이는 것에도 여러 국가의 신경전이 이어져서, 행성이 발견된 지 20여 년이 넘도록 '제2 지구'로만 부르고 있었다. 당연히 인간의 생활터전으로 삼기에는 아직까지 인프라가 마련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로봇과 몇몇 우주비행사를 보내 몇 가지 실험을 거쳤다가, 재작년에야 안전성을 검증받고 주민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 주민 중에는 나의 복제인간, 두 번째 '필'이 껴들어간 것이고. 필은 테라포밍 1기 주민이었다. 제2 지구를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하는 일을 했다. 제2 지구에서는 밤낮으로 인공 달이 떠 있었는데, 낮에는 불을 꺼두어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밤이 되면 표면이 은은한 초록빛으로 빛났다. 초록 달. 그것은 제2 지구의 상징이자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달이었다. "그치만 나도 초록 달은 한번 보고 싶다." "사진으로 보면 되잖아." "그게 같냐." 혜지가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밤하늘은 네온사인과 가로등, 자동차가 뿜는 불빛 때문인지 충분히 어두워지지도 못하고 불면증을 앓는 것 같았다. "필은 거기선 계속 시를 쓸까." 혜지가 밤하늘에 뜬 하얀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었다. 벨벳 쿠션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둥근 달.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이든 폭 감싸 안아 줄 것 같은 동그라미. 그 밑에서는 자동차가 내는 소음과 매연, 사람들이 함부로 떠드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지구답게 시끄러웠다. "안 쓰겠지. 내 몸만 복제해 가는 게 아니라, 2년 전 내 기억까지 모조리 복제해 가는 거니까. 제정신이면 눈 뜨자마자 정신 차리고 바로 다른 일이나 열심히 할걸?" 내 말이 끝나자 혜지가 둥근 눈을 살짝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혜지를 따라 웃다가 뒷맛이 쓴 맥주를 마셨다. 올해 초, 제2 지구로 간 복제인간 중 한국인은 100명이었다. 단 100명 안에 내가 들어간 것이었다. 그중 50명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인류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었다. 생물학자나 화학자, 천문학자 등등의 과학자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의학자, 심리학자가 있었다.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계공학자, 로봇 공학자도 있었다. 제2 지구 사람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줄 요리사나 체력을 관리해 줄 트레이너도 뒤를 따랐다. 그렇게 '쓸모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50명을 채우

  • 백승연
  • 2020-03-01
전생

전생 원보람 전생에 덩치가 크고 순한 개였던 사람이 내 눈가를 닦아 준다 목줄을 풀어 주었던 일이 현세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가 뜨거워진 내 얼굴을 더듬는 동안 나는 잠깐 전생으로 돌아간다 그 개를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모르는 개의 목줄을 풀어 준 이유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전생에 있었던 일 때문에 슬픔이 내 입을 자른다 슬픔이 조금씩 나를 먹을 때 우리는 초점 없는 눈을 마주친다 나는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그 사이 두 번의 겨울이 지나가고 계피의 효능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생강과 생각의 차이는 모르지만 그것이 슬픔이 나를 먹는 이유는 아니다 한밤중에 빗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면 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입이 없어서 말은 못 하고 슬픔이 나를 다 먹을 때까지

  • 원보람
  • 2020-03-01
불행 연습

불행 연습 조온윤 불시에 방문하면 곤란하다 문도 두드리지 않고 들어와 거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너를 발견할 때면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이건 또 내가 처음 보는 모습인데 알몸으로 비를 맞고 찾아올 줄이야 늙은 개마냥 카펫 위에 오줌을 지려 놓을 줄이야 도박에 영혼을 걸어 몽땅 잃어버리고 돌아올 줄은 차마 내가 연습하지 못했던 불행이구나 잠시 게을리했던 예습과 복습의 필요성을 느낀다 공책을 꺼내어 지금 알 수 없는 곳에서 트럭에 치여 날아가는 사람을 나라고 생각했다가 새라고 생각했다가 새를 닮은 너라고 착각했다가 길을 걷다 빗방울에 맞아 살해된 경우에 대해 쓴다 * 그게 나였다면 심호흡도 못 해보고 차가운 빗방울에 명치를 맞고 쓰러지는 너였다면 * 브레히트. 그게 네가 아니라면 좋겠어 잠들었니? 너무 지쳐버린 불행이구나 행운을 파산한 사람은 빗속에서도 익사할 수 있다는 걸 너는 알고 있니? 경우의 수를 헤아리지 않는 안온한 삶을 꿈꾼 적 있니? 더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거지? 응? 아무리 되물어도 어기는 일에 지쳐버린 너는 대답하지 않는다 수많은 문장으로 수많은 불행을 시뮬레이션해도 언제나 뜻밖인 사람 아주 멀리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가도 소낙비에 온몸을 얻어맞고 돌아와 어느새 내 무릎 위로 쓰러지는 이상하고 슬픈 사람 너는 내게 어떻게 작별을 고할 거니? 알 수 없는 너를 위해 나는 연습하고 또 연습할 것이다 너는 나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판돈으로 목숨을 걸었다가 도박판의 악당들에게 살해될까 너는 나와 술에 취해 손을 잡고 새벽의 거리를 뛰어다니다 몸뚱이가 하나뿐인 새가 될까 너는 나와 세상에 남은 마지막 짝수처럼 하루를 함께한 뒤 같은 꿈속으로 보조를 맞추며 걸어갈까 우리의 불행을 처음 발견할 사람이 곤란하지 않도록 우리를 불행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나는 매일 너를 연습하고 언제나 처음인 것 같은 너는

  • 2020-03-01
사랑의 기원

사랑의 기원 조온윤 우리가 한몸이었던 때를 기억해? 우리가 한몸이었던 때를 기억해 하나의 운명체로서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공평하게 동전 던지기로 정하면서 어디가 앞면이고 뒷면인지를 두고 다투곤 했지 이인삼각 달리길 하듯 뒤뚱대면서 비탈을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등가죽에 달라붙은 서로를 등지고 처음과 끝 일출과 일몰 동쪽 바다의 파도소리와 서쪽 하늘의 갈매기 떼 전혀 다른 풍경을 바라보던 우리는 이제 탁상에 마주 앉아 닮은 듯 닮지 않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네 팔과 다리를 공평하게 나눠 갖고서 눈코입을 나눠 갖고서 너는 아직도 궁금해? 나는 아직도 궁금해 그는 왜 우리 몸을 갈가리 찢지 않고 반쪽으로만 갈라놓았지? 한 사람의 발걸음 뒤로 따라오는 두 개의 발자국처럼 우리 마음은 처음부터 둘이었잖아 진정으로 우리가 약해지길 원했다면 반을 가르고 또 반을 갈랐어야 했잖아 혼자서 달리는 해변은 더 멀리까지 반짝이고 더 잘게 부서지지 아름답게 내가 노을을 향해 몸을 돌릴 때 등 뒤의 네가 그늘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지 이제 우린 물결이 갈라놓은 다른 세상의 언저리에서 타오르는 일몰의 순간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네 앞면 뒷면을 공평하게 나눠 갖고서 그림자를 나눠 갖고서 우리가 한몸이었던 때를 기억해 나는 내가 앞면이었다고 생각해 너는 네가 앞면이었다고 생각해? 뒷모습이 없었던 때를 기억해 사랑하기 위해 그가 높이 동전을 튕겼지

  • 2020-03-01
설령 오래 걸릴지라도 2월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달

설령 오래 걸릴지라도 2월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달 권현형 이제 그만 아프자고 내게 속삭여 주었더니 차츰 나아졌다 설령 오래 걸릴지라도 2월은 자신의 손을 잡아 주는 달 지금 당장, 그런 말보다 차츰 나아질 거라는 말에 위로를 받는 날들 그리하여 가장 두려운 타인 나를 겪고 이해하느라 여러 세기가 지나갔다 가능성, 욕망, 사랑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어느 날의 검은 기억 낡은 기억의 안쪽에 상처받은 아이가 살고 있다 누가 당신의 악마인가, 물었을 때 '나'라고 대답한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인터뷰를 아끼는 책 읽듯 읽었다 코카인도 마리화나도 아닌 자신과 싸우느라 생을 소진한 그녀의 자존심은 시적이기도 하고 산문적이기도 하다 길가에 고인 빗물이 맑기를 바라며 말하고 싶어 안달하지 않기로 한다 몇 시냐고 자꾸 물어보지 않기로 한다 심장 근처로 살랑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장미 화관을 쓰고 만찬을 하는 습관이 있던 옛 로마 사람처럼 차츰 장미를 좋아하는 습관이 생긴다 시와 산문 사이에서 돌은 앉아 있고 나는 춤을 춘다

  • 권현형
  • 2020-03-01
소문자 당신께

소문자 당신께 권현형 공기의 긴 한숨을 여명에 바친다 새벽의 소음은 이마로 스며든다 이동 중이라 끊긴 필름을 잇고 있다가 오늘은 깨끗하게 당신 목소리를 듣고 있다 빛 반 어둠 반 섞어 아스피린 아스파라거스, 아스피린 아스파라거스 그렇게 읊고 있는 새가 음악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움직이는 모자는 상념을 갖게 한다 머리에 쓸 것인가, 손에 들고 있을 것인가, 모자의 혁명적 감수성 덕분에 룩셈부르크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되어 본다 베를린에서는 베를린이 되어 본다 모자가 전 재산인 채 가방이 전 재산인 채 이제 창문을 반쯤 열어 놓을 때 얼굴의 반만 열어 두고 골목과 나무와 땅의 절기를 살펴야 할 때 기억나는 장소를 찾아, 당신을 찾아 빨간 우체통에 언어 대신 공기를 부친다 간절할 때 나는 텅 비어 있다 전무후무한 공명이 전달되길 바라면서 길이 명백한 지도와 행선지를 표시하는 꼬리표는 아예 영자사전처럼 씹어 삼켜버렸다 당신에게 가기 위해 길을 끊어버렸다

  • 권현형
  • 2020-03-01
다음 페이지도 파도라면

다음 페이지도 파도라면 이원 펼쳐 놓은 책은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았고 그 페이지를 읽어야 했지 책은 꽤나 두꺼웠거든 문제는 죽은 사람들이 그 페이지로 자꾸 들어가는 거야 펼쳐 놓은 페이지가 거기였으니 거기뿐이었으니 그거 알아? 죽은 사람은 무거워 하나 남은 표정을 못 놓치거든 점점 내가 무거워진 것은 그 페이지를 넘기려고 했기 때문이지 무거워서 들 수가 없고 거기는 와글와글 이어서 상가의 음식은 입뿐인 허기여서 상가의 근조는 여기로 몰려들었던 거야 사실 나는 몰라 죽은 사람을 들어 본 적이 없어 죽은 얼굴을 본 적은 있지 이 책이 얼마나 거대한 줄 알아? 놀랍게도 어마어마하게도 딱 책상만 해 지금까지의 시간을 다 쏟아 부어 한쪽으로 접으면 양쪽이 없어지고 표정은 봉인되고 책상은 심연의 책이 된다 다무는 입술과 벌리는 입술을 떼어 놓지 않으면 오른쪽 왼쪽 영영 잃어버린다고 약속하면 입들이 눈보라로 던져지면 다시 출렁일지도 다시 운동화를 신고 문 밖으로 나가게 될지도 그만! 그만! 그러면 나는 볼 곳이 없어져 나는 내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

  • 이원
  • 2020-03-01
밤이 올 무렵

밤이 올 무렵 이원 빛이 넘치게 스며드는 거다 빛이 넘치게 몰려오는 거다 빛에 숨 막히는 거다 빛에 타죽는 거다 이런 느낌으로 빛을 떠올리면 얘야 너는 아프구나 얘야 너는 병증이 있구나 얘야 빛은 그런 게 아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 나무들 바람이 넘치게 일렁이는 거다 바람이 넘치게 몰려오는 거다 바람에 숨 막히는 거다 뒤집히면 나뭇잎 한 장의 뒷면은 다른 색이다 어떻게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럴 수 있어? 빛을 떠올리면 바람을 떠올리면 얘야 너는 신경이 쇠약해졌구나 얘야 너는 숨을 세어야겠구나 얘야 너는 멀리 봐야겠구나 블라인드를 올려 줄 이는 누구? 석양들 넘치게 녹아내리는 거다 석양들 넘치게 끓이는 거다 석양들 가로를 잡고 숨넘어가는 거다 들어가면 물들이 있단다 숨차게 잠기는 거다 이 모든 것이 모여 밤이 된단다 그래서 밤 속에 들어가면 탈 것 같구나 그래서 밤의 물기둥 속으로 들어가면 늘 등줄기가 타오르는구나

  • 이원
  • 2020-03-01
식물도감

식물도감 안도현 * 둥굴레 겨드랑이에 둥굴레꽃 피었다 겨드랑이에 털 나면 너도 꽃이 된 줄 알아라 * 수크령 묶어 놓고 네 발목 걸리기를 기다린 적 있었지 나 열 몇 살 때 * 지리산 노고단 가서 물매화 보지 못했다면 하산하지 마시게 * 꽝꽝나무 그 작은 이파리마다 찰랑찰랑 자지러지는 붉은 달 뜬다 * 갯메꽃처럼 바닷가에 살자 바닷물에 발은 담그지 말고 바닷물이 모래알 만지는 소리나 들으며 살자 * 참새 떼가 찔레 덤불로 스며든다 * 2층 치과 창가에 능소화 입 냄새 * 후박나무 잎사귀 반짝거린다 곧 바다에 닿는다 * 까마중 익었다 여름방학 끝나 간다 * 참새 한 마리 발톱으로 흔들리는 강아지풀 줄기를 잡아 누르고 또 한 마리가 부리로 강아지풀 끝자락을 거머잡으니까 참새 떼가 우르르 날아왔다 강아지풀 씨앗들 부리나케 참새의 입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 바랭이풀은 몸에서 씨앗들 다 떼어낼 때까지 버텼다 서리 내리자 과감하게 무릎 꿇었다 * 먹쿠슬낭 열매 자랑자랑 * 나무의 정부에서는 금강소나무가 대통령이다

  • 안도현
  • 2020-03-01
호미

호미 안도현 호미 한 자루를 사면서 농업에 대한 지식을 장악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안쪽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 뻗지는 못하고 안쪽으로만 날을 세우고 서너 평을 나는 농사라고 하였는데 호미는 땅에 콕콕 점을 찍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불이 호미를 구부렸다는 걸 나는 당최 알지 못하였다 나는 호미 손잡이를 잡고 세상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너른 대지의 허벅지를 물어뜯거나 물길의 방향을 틀어 돌려세우는 일에 종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호미도 나도 가끔 외로웠다는 뜻도 된다 다만 한철 상추밭이 푸르렀다는 것, 부추꽃이 오종종하였다는 것은 오래 기억해 둘 일이다 호미는 불에 달구어질 때부터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렸을 것이다 날 끝으로 더 이상 뻗어 나가지 않으려고 간신히 참으면서 서리 내린 파밭에서 대파가 고개를 꺾는 입동 무렵 이 구부정한 도구로 못된 풀들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아이들을 키운 여자들이 있다 헛간 시렁에 얹힌 호미처럼 허리 구부리고 밥을 먹는

  • 안도현
  • 2020-03-01
라스 우바스(Las uvas)

라스 우바스(Las uvas)1) 정재율 빛이 오고 있었다. 이곳에는 포도밖에 없는데. 새로 산 은접시에서 빛이 났다. 포도 열두 알이 올려져 있다. 포도를 까주던 손이 있었다. 파랗게. 혹은 검게 물든 손끝을 바라보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 죄를 짓지 않아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우는 등이 있었다. 눈이 쏟아져 내렸다. 우는 모습을 지우듯. 포도를 받아먹던 어린 손들이 있었다. 자라서 등을 어루만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어린 날들이 있었다. 그땐 나의 영혼이 포도알처럼 보이기도 했었는데 발가벗겨진 기분은 이런 것일까? 기도하던 어린 영혼 또한 있었다. 어제와 오늘은 다르지 않지만 작년과 올해는 아침부터 달라서 기도가 더 오래되었다. 가지 말라고 말하면 남겨진 것들과 버려진 것들이 동시에 보였다. 예를 들면 포도 껍질 같은 것. 포도 위에 감겨진 흰 종이 같은 것. 오지 말라고 말하면 오는 것들이 있었다. 자정의 소리에 맞춰 빛이 오고 있었다. 이곳에는 포도를 까주던 손과 우는 사람이 없는데. 나는 열두 알의 포도를 씹고 또 씹고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씹은 다음 손끝을 바라보았다. 십자가의 불빛이 참 아름답다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1) 새해가 되면 포도 열두 알을 먹는 스페인의 풍습

  • 2020-03-01
투명한 집

투명한 집 정재율 얼음 속에는 단단한 벽이 있어 나는 그 너머로 집 한 채를 볼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고 싶다 자꾸 무너지는데도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아이처럼 인기척이 느껴지면 사라지는 벌레처럼 주머니엔 사탕 봉지가 가득하다 끝이 닳아버린 운동화와 홈이 맞지 않는 문턱들 그 아이의 사정은 모두가 알았다 커튼을 쳐도 들어오는 빛처럼 아이가 아픈 이유는 집에 큰 어른이 없기 때문이라고 얼음을 탈탈 털어먹으며 이야기하는 이웃들 아이는 나뭇잎을 주워 주머니 속에 구겨 넣는다 외투 밖으로 삐져나온 소매를 안으로 넣으면서 슬픔이 뭔지도 모르고 그새 자라 있다 창문이 깨지는 순간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과 비슷하고 아이가 바깥으로 밀려난다 영혼이 그곳에 있는데 귓속에서는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유리알 파편처럼 집이라는 건 다 부서지는데도 자꾸만 모으고 싶어진다

  • 2020-03-01
차곡차곡 차분차분

차곡차곡 차분차분 유병록 눈이 내린다 차갑고 포근하게 세상을 덮는다 누구든 용서할 수 있다면 아무도 죄를 묻지 않는다면 이런 밤이리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얼마쯤 용서받는 기분이 드니까 아무도 없는 눈밭에서 용서받지 못한 일을 늘어놓고 싶다 눈밭에 잘못을 차곡차곡 써둔다면 푸른 싹이 돋을 때쯤 죄책감도 다 녹아 사라질까 용서할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잘못은 무릎이라도 꿇고 뉘우쳐야겠지 그럼 좀 나아지겠지 지금껏 지고 다닌 죄를 내려놓고 조금 가뿐한 마음으로 걸어 다니고 싶다 눈 차분차분 내리는 날 그리하여 순백의 마음을 간직하는 날 어떤 죄도 용서받을 것만 같은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 유병록
  • 2020-03-01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유병록 참 애쓰는구나 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화관을 나와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에 간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칼국숫집이 그 집뿐이겠냐만 그 비빔칼국수와 황태칼국수를 먹지 못한다니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한 명은 사장님 같고 한 명은 직원 같기도 한 아주머니 두 분 도대체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슬픈 일이 있었는지 임대료가 턱없이 올랐는지 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다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하다 앞으로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다짐하다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칼국숫집이 없어지는 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우리 사랑은 왜 여기까지인지 집까지 걷기로 한다 칼국수의 맛을 기억하는 데 온 저녁을 할애하기로 한다

  • 유병록
  • 2020-03-01
고양이 눈

[단편소설] 고양이 눈 최정화 여기는 경성의 북쪽에 자리 잡은 구릉 지대로,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고양이 눈을 닮았다고 해서 묘안정이라고 불린다. 원래는 공동묘지였다고 하는데 안성에서 온 어떤 이가 묘지건 뭐건 상관할 바 없이 일단 몸 누일 곳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심정으로 움막을 지어 살았다. 오갈 데 없는 몇몇이 더 모여들어 그 옆에 따라 움막을 짓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묘지 전체가 하나의 촌을 이루게 되었다. 근처에 고양이들이 많아 번식기의 울음소리만이 귀에 거슬릴 뿐, 그것도 몇 번 듣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집이라고 하기에 영 무색하다. 문 대신 거적을 둘러 출입구를 만들고 한구석에 땔감, 또 한구석에는 물동이가 세간의 전부다. 그래도 부실하나마 내 집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주방도 화장실도 없지만 누울 곳이 있다는 게 어딘가. 작년까지만 해도 내게는 시장에 어엿한 가게 하나가 있었으니 오 년간 그 가게에서 두부를 팔아 움집이나마 장만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 이 움집도 넘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월삯을 지불하는 조선숙으로 가게 될 것이다. 구릉의 자락은 강가 모래밭이어서 모래 먼지가 많다. 바람이 꽤 강하게 불어오는데 건조한 공기라 얼굴이 트고 모래에 섞인 현실의 장면들은 늘 선명하지 못하고 부옇다. 눈꺼풀에 모래 알갱이가 끼어 들어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늘 꺼끌꺼끌하다. 그것도 처음에만 거슬렸을 뿐 곧 익숙해지고 말았다. 눈물이 흐르면서 모래 알갱이가 흘러내리면 눈꺼풀에서 뭔가 사라진 듯 시야가 맑아져 눈앞의 풍경이 제법 선명하게 보이면 그때야 흐릿하게 보였구나, 라고 알아챈다. 선명한 세상이 오히려 낯설기까지 하다. 그리고 다시 모래 알갱이가 들어와 흐릿한 세상이 원래 그런가 보다 살다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맑고 선명한 세상을 보곤 하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을 먹지 못하고 시장으로 나서는 길에 그림자군(群)을 만났다. 시장 입구에는 들어서지도 못하고 그들을 만났으니 서운한 일이다. 잽싸게 도망친다고 있는 힘껏 내달렸지만 요 며칠 먹은 게 없어서인지 다리가 땅을 박차질 못한다. 후들후들 종아리가 떨려 오고 몇 걸음 채 가지 못해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이 옷깃을 잡아채자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당겨진 옷에 목이 조여 왔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려 보았지만 발이 땅에 닿질 않았다.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 덩치들에게는 그 모습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인지 낄낄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둔중하고 무거운 몽둥이가 머리를 내리쳤다. 땅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무슨 깡으로 다시 나타난 거냐?" 그림자군이 던진 말들이 화살처럼 몸에 와 박힌다. 하지만 움찔할 기력도 없어서 그저 땅바닥에 몸을 맡기고 흙냄새만 맡을 뿐이었다.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는 말을 뭘로 들었냐?" 누군가 축 처진 몸뚱이를 질질 끌어 다시 잡아 올렸다. 낚싯대에 걸린 생선처럼 허공으로 번쩍 솟구쳐 오른다. 눈앞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흰 구름이 얇게 떠 있다. "맞고 싶어 몸이 아주 근지러운가 보니 어디 한번

  •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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